소설리스트

11화 (11/75)

한가한 정월엔 시간이 빨리 흘렀다. 어느덧 정월 초이레가 다가왔고, 경성은 여전히 떠들썩했다. 친척들을 보내고 났으니 이제는 지인들과 왕래할 차례였다. 떠들썩한 집들에 비해 객잔에 기거하는 서생들은 쓸쓸한 면이 있었다.

“거리 구경 안 갈래?”

한 동료가 손을 책에서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는 추위를 쫓으려는 듯 손을 비비고 발을 굴렀다. 뒤에 있던 한원조와 다른 동료도 책을 내려놓았다.

“어제 구경했잖아. 돌아다녀 봤자 똑같을 텐데, 뭐 돌아다닐 게 있다고.”

한원조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꾸했다.

“그 미인이 또 찾아오길 기다리는 건 아니고?”

동료가 웃으며 놀리자 한원조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긴 하네. 그 미인은 이대로 자취를 감춘 건가?”

옆에 있던 동료가 말했다.

“허튼소리 마, 미인은 무슨 미인. 아마 어르신일 거야. 시녀는 강주 말씨를 썼는데 경성 생활에 익숙했어. 얘기를 들어보니 경성에 있을지 강주로 돌아갈지 아직 모른대. 아마 고향을 그리는 노인일 거야.”

이미 한원조에게 그날 있었던 대화를 자세히 들은 동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그 어르신한테 딸이나 손녀가 있을지 모르잖아.”

동료가 웃으며 말했다. 그 농담에 적막했던 방 안 분위기가 다소 누그러졌다.

“근데 진짜 이상하네. 왜 갑자기 안 오는 거지? 정말 그냥 그 부인을 도우려던 게 전부야?”

한 동료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뭐랬어. 나랑 비슷한 사람이라니까. 자네들이 괜히 일을 삼고 있는 거지.”

한원조가 웃으며 대꾸했다. 그때 문밖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어서 가세. 차정사로 글씨를 보러 가자고.”

같은 객잔에 묵던 다른 서생들이었다. 지루하게 공부에 몰두하고 있던 세 사람은 제안을 흔쾌히 수락하며 옷을 걸치고 나섰다.

“매화를 보며 시를 감상하는 거 아니었나? 갑자기 글씨라니?”

“소문 못 들었어? 지난 연말에 누가 차정사에 훌륭한 글씨를 남기고 갔대. 아주 독창적인 다섯 종의 서체를 남겼다더군. 장강주 선생까지 직접 보러 갈 정도라네.”

“그랬군. 글씨 보러 갔다가 운 좋으면 장강주 선생과 마주칠 수도 있겠는걸?”

서생들은 웃고 떠들며 문을 나섰다. 거리는 인파로 떠들썩했고 이따금 폭죽 소리가 들렸다. 두봉을 단단히 여미고 나서던 한원조가 동쪽 거리를 힐끔거렸다. 정말, 그뿐이었을까?

“원조 형.”

누군가가 소리쳐 부르는 소리에 한원조는 얼른 동료들과 함께 서쪽으로 걸어갔다.

같은 시각 정교랑은 진씨 저택의 문을 나서고 있었다.

“새해인데 식사라도 하고 가죠.”

직접 배웅을 나온 진 부인이 정교랑을 붙잡았다. 정교랑은 말없이 예를 표하는 것으로 완곡하게 거절했다. 주육낭이 마차를 몰고 오자 진씨 가문 자매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보며 수군거렸다. 진씨 가문 여인들은 마차가 골목을 벗어난 후에야 몸을 돌렸다.

“어머니, 정 언니가 입은 옷 말이에요. 어머니가 보내 주신 거죠?”

진단랑이 신이 나서 물었다. 정교랑이 진씨 저택 문 안으로 들어올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들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다. 보내 준 선물을 직접 입고 나타난 것은 최고의 답례였다. 진 부인의 얼굴에 웃음이 가려지지 않았다.

“그래. 정 낭자한테 잘 어울리는 것 같니?”

진단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 예뻐요. 정 언니는 뭘 입어도 예쁘잖아요.”

진단랑은 무언가 떠올랐는지 뒤에 있던 언니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십팔랑이 입은 건 정 언니 것만큼 안 예쁘지만.”

자매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십구랑, 다시 말해 봐. 새로 지은 옷, 너는 안 줄 줄 알아.”

진십팔랑이 짐짓 화난 척 소리쳤다. 진단랑은 언니가 무섭지 않은지 짓궂은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어머니의 손을 붙잡았다.

“어머니, 어머니가 만들어 주세요.”

자식들의 화기애애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진 부인은 미소를 지었다. 남편의 벼슬길도 순조롭고 시부의 병환도 완쾌된 후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맞이한 새해였다.


마차가 대문으로 들어서자 주육낭은 마차에서 훌쩍 뛰어내리면서 들고 있던 채찍을 휙 던지고 가 버렸다. 정교랑이 시녀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오늘 손님이 많이 오셨네요.”

저쪽에 세워져 있는 마차들을 보며 시녀가 말했다.

“매일 그래. 새해잖아.”

여종은 웃으며 은근히 뻐기듯 대꾸했다. 정교랑은 여종을 힐끔 본 후, 고개를 돌려 시녀를 쳐다봤다.

“돌아왔으니, 부인을 뵈어야겠다.”

시녀는 네 하고 대답한 후 여종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길을 안내해 줘요.”

부인을 뵙는다고? 밖에 나갔던 자식들이 집에 돌아오면 부인을 뵙고 문후부터 올리는 게 도리긴 했다. 하지만 정 낭자는 지금껏 그런 적이 한 번도 없는데, 갑자기 가겠다니. 여종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래도 어쨌거나 기쁜 일 아닌가. 여종은 반색을 했다. 이래서 식구는 식구라니까. 서먹할 게 뭐 있어. 처음엔 낯설어도 차차 익숙해지는 거지.

“아씨, 이쪽으로 가세요.”

여종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올해 주씨 가문은 예년보다 더욱 떠들썩했고, 찾아오는 이가 특히 많았다. 아랫것들이야 영문을 몰랐지만 주 노야 내외는 뻔히 알고 있었다.

“백모님, 집에 새로 온 동생이 있다던데 왜 안 보이죠?”

이런저런 얘기 끝에 젊은 여인 하나가 웃으며 말을 꺼냈다.

“맞아요. 새해인데 같이 얘기하면 좋잖아요.”

옆에 있던 부인도 거들고 나섰다. 요 며칠 주 부인은 똑같은 말을 하도 들어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다.

“집에 없어. 출타했거든.”

주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경성에 지인도 있어요?”

부인이 의심 어린 말투로 물었다.

“진씨 댁 있잖아.”

주 부인이 웃으며 대꾸했다. 웃는 얼굴이 다소 경직되어 있긴 했지만. 지난번엔 몸이 안 좋아서 잔다고 했고 이번엔 진씨 댁에 갔다고 했다지만, 다음엔? 차일피일 미루면서 이 부인들과 잘 지낼 수 있을까? 분명 눈치를 챌 텐데. 아니나 다를까 부인 하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부인도 참. 그 보물덩어리를 꼭꼭 숨긴 건 아니고요? 우린 진 상공 댁만 못하니, 그 보물을 볼 수 없단 거잖아요.”

“우린 진씨 가문만 못하니, 만나지도 못한단 거예요?”

다른 부인도 웃으며 거들었다.

이거 봐, 이거 봐. 괜히 욕먹을 줄 알았다니까. 주 부인의 웃는 얼굴이 더욱 경직됐다.

“그런 거 아니에요. 알다시피 진 노태야께서 이제 막 쾌차하셨잖아요. 마음이 안 놓이니 다른 데 신경 쓸 여력이 없죠.”

주 부인이 말했다.

“그럼 나중에 돌아오거든 꼭 우리 집에도 데려와야 해요.”

부인은 웃는 듯 아닌 듯한 얼굴로 끝까지 확답을 받아내려 했다.

“알았어요. 부인이 귀찮아하지 않는다면요.”

주 부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때 여종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왔다.

“부인, 사촌 아씨께서 돌아오셨어요.”

주 부인의 얼굴은 대번에 굳어졌지만 그 부인은 반색했다.

“어머나, 너무 잘됐다. 어서 모셔 와.”

그 부인의 말이었다.

아이고, 왜 하필 지금 돌아와. 왔으면 온 거지, 이 눈치 없는 건 왜 이리 달려와 고하고 난리야! 그 계집의 성격이 괴팍한 걸 모르는 것도 아니고. 오기 싫다고 하면 때려서 데려와야 하나? 괜히 망신살만 뻗치는 꼴이잖아!

주 부인은 마음이 급해졌다.

“사촌 아씨께서 부인께 문후 올리러 오신대요.”

부인의 표정을 못 본 여종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주 부인의 표정은 편해지기는커녕 더욱 하얗게 질렸다. 귀신에 씌었나, 대체 뭐 하자는 거지?

다른 여인들은 주 부인처럼 이런저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젊은 여인과 색시들은 바깥쪽을 두리번거렸고, 나이가 있는 부인들도 호기심에 자세를 고쳐 앉았다.

문밖에서 여인 하나가 천천히 걸어왔다. 밝고 아름다운 옷차림에 멋스러운 행동거지, 오목조목한 얼굴을 가진 여인이었다. 표정이 없고 두 눈에 생기가 없긴 했지만. 여인들은 서둘러 시선을 옮겼다. 찬란한 아름다움은 순식간에 잊히고 오싹함이 느껴지는 서늘한 두 눈만이 인상에 남았다.

전에 바보였다더니 아직 그게 남아 있네. 고운 얼굴이 아깝구먼.

“외숙모님.”

정교랑은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목소리도 이상하네. 자리에 있던 젊은 여인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안타까워했다. 반면 나이든 부인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여전히 놀란 주 부인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정 낭자, 듣자니 진 노태야를 고쳤다던데 정말 대단하네요.”

주 부인은 남몰래 이를 악물었다.

“교교, 힘들지? 우선 가서 쉬어. 넌 몸도 안 좋잖니.”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싸늘한 눈초리가 느껴졌다.

“에이, 이렇게 만났는데 웃어른이란 사람이 선물 하나도 안 주면 내가 뭐가 돼요.”

한 부인이 정교랑을 손짓해 부르며 손에 차고 있던 금팔찌를 풀었다. 정교랑이 미동도 하지 않아 그 부인의 행동만 머쓱해졌지만.

거봐, 얘는 최소한의 예의도 안 통한다니까. 주 부인은 속으로 외쳤다.

“정 낭자, 듣자니 병을 고칠 줄 안다면서요. 우리도 좀 부탁해도 될까요?”

다른 부인은 거두절미하고 본론을 꺼냈다. 주 부인은 숨이 턱 막혔다. 예의를 모르는 건 이 바보만이 아니었네.

“물론, 되죠.”

정교랑이 그 부인을 보며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 부인은 경악했다. 된다고? 전에는 안 된다고 했잖아? 주 부인이 바라고 또 바라던 말이었다. 그런데 하필 지금 여기서 듣게 되다니. 그것도 갖은 핑계를 대며 둘러댄 직후에.

문안 인사를 와야 할 땐 안 오고, 안 와도 될 땐 온다. 수락해야 할 땐 안 하고, 수락을 안 해도 될 땐 한다. 얘는 참, 어쩜 이렇게 말썽이야. 일부러 이러는 거지?

-좋다-

어둠이 내릴 무렵, 주 부인은 방으로 들어갔다. 주 노야가 술기운에 홍조를 띤 얼굴로 팔걸이 책상에 기대 잠들어 있었다. 다리와 등을 안마하던 시녀 둘이 얼른 예를 표했다. 주 부인의 뒤에 있던 여종이 손을 내젓자 시녀들이 물러갔다.

여종이 들고 있던 명첩들을 바닥에 내려놓자 그 소리에 주 노야가 눈을 떴다. 주 노야는 취기가 남아 있는 피로한 표정으로 자세를 바로 하여 앉았다. 그리고 여종이 건네는 뜨거운 물수건을 받아 얼굴을 닦았다.

“내일은 생당 집에서 초대했으니, 당신이 아이들 데리고 다녀오시구려.”

새해 같은 큰 명절에 지인과 상관, 동료 접대를 소홀히 할 수 없는 경성이었다. 누가 누굴 초대하고, 누구 집에 누가 왔다는 소식에 이목이 집중됐고, 이를 왕래의 근거로 삼았다.

“못 가요.”

주 부인의 말에 주 노야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것 좀 보세요.”

주 부인은 바닥에 둔 각양각색의 명첩을 손으로 가리켰다. 주 노야는 놀란 표정이었다.

“이게 다 뭐요? 아직 안 간 곳들이오?”

예년 이맘때라면 인사가 거의 마무리될 시기였다.

“당신의 그 잘난 외조카 덕분이죠.”

주 부인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주 노야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길로 쳐다봤다.

“이게 뭐 안 좋소?”

주씨 가문에서 그 여인들을 초대한 건 이와 같은 상황을 위함이었다. 친척 혈육임을 알리고, 진씨 가문이 은혜를 입었음을 알리고, 병을 고치는 신선의 비방을 얻었다는 구실로 더 많은 이와 인연을 맺기 위해서.

주 노야에게 부끄러운 기색은 찾을 수 없었다. 솔직히 그 여인 덕분인 건 맞으니까. 주 노야는 손을 뻗어 명첩들을 확인했다. 과연 전혀 왕래가 없던 사람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 그 아이가 병을 치료하러 가지 않겠다는 것도 이해는 되지. 어쨌거나 아직 혼례도 안 치른 규수잖소. 집안 형편이 가난한 것도 아니고. 당신도 남들 눈 걱정할 것 없소. 공평하게 아무도 안 보면, 누구 병은 고쳐 주고 누구 병은 안 고쳐 준다는 말도 안 나올 테고.”

“보겠대요.”

주 부인이 말했다.

“안 보겠다는데 어쩔 거야. 저쪽에서 부탁하는 처지……·, 뭐라고?”

주 노야는 하던 말을 멈추고 놀란 눈으로 주 부인을 쳐다봤다.

“오늘 사람들 앞에서 그랬어요. 자긴 병을 고칠 수 있다고요.”

주 부인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주 노야는 멈칫했다가 곧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럼 더 좋지.”

“좋긴 뭐가요.”

주 부인은 울적한 표정이었다.

“어찌나 시원스럽게 대답하던지 나만 죄인이 됐어요. 그 여인들이 내 뒷담화하는 거 못 봤죠? 치료해 주지 말라고 내가 막았던 것처럼 여기더라니까요.”

그것 때문이군. 하여간 여인들은 사소한 걸 따지고 든다니까. 주 노야는 껄껄 웃었다.

“괜찮소, 괜찮아. 마음대로 떠들라지. 나중엔 저들이 당신한테 부탁하러 올 거요.”

주 노야는 갑자기 힘이 불끈 솟는 듯 술을 더 가져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길 바라야죠. 이제 제발 문제 좀 안 일으켰으면 좋겠어요.”

주 부인은 탁자에 술을 차려 놓으며 말했다.

“우리 애들 키울 때도 무인 집안이라 애들이 짓궂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그렇게 골칫덩어리인 애는 없었어요. 그러니 정씨 가문에서도 그 앨 집안으로 안 들였겠죠.”

정씨 가문에서 그 애를 집안으로 안 들였다……·. 거기까지 말한 주 부인은 말을 멈췄다. 뭔가 중요한 정보란 생각이 들었다.

“노야, 혹시 정씨 가문에서도 그 애가 너무 성가셔서 집으로 안 들이고 도관으로 보낸 거 아닐까요?”

“정씨 가문?”

주 노야는 경멸하는 투로 말했다.

“그러니 아둔한 게지. 그자들이 뭘 알겠소? 저들이 내 누이를 죽음으로 몰았으니 저 바보, 아니, 저 아이 마음에 원한이 안 생겨? 그러니 그 집으로 안 간다고 버텼겠지. 아니면 경성으로 오는 이유를 굳이 숨길 필요가 없잖소. 진 상공 댁 초청으로 오는 걸 정씨 가문에서 알았으면 어쨌겠소? 아마 죽은 정 노태야까지도 무덤에서 기어 나와 따라붙었을걸?”

정씨 가문 얘기가 나오자 주 노야는 예의를 집어던졌다. 하긴 그렇지. 주 부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그 바보, 아니, 그 아이한테 잘 일깨워 주시오. 당초 제 어미가 얼마나 억울한 일을 겪었는지, 우리 집안은 또 얼마나 억울했는지. 특히 정씨 가문 때문에 화병에 걸리지만 않았어도 그 애 외조모님이 그리 일찍 돌아가시진 않았을 거라고.”

요점은 간단했다. 그 아이에게 누가 혈육이고 누가 원수인지 알려 주라는 것.

“정씨 가문으로는 절대 못 돌려보내. 경성에 있다가 좋은 집에 시집가서 잘 살아야지.”

주 노야가 말했다.

“시집을 갈 수 있을까요?”

주 부인이 놀라 물었다.

“왜 시집을 못 가? 앞을 못 보고 다리를 절어도 다들 잘만 시집가는데. 그리고 지금은 멀쩡하잖소.”

주 노야가 노려보며 대꾸했다. 여종이 술안주를 내오자 주 부인이 소매를 들어 술을 따라 주었다.

“시집을 안 가는 게 더 좋을 것 같기도 해요.”

주 부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시집을 안 가? 여인이 시집을 안 가면 어디에 써? 주씨 집안에 쓸모없는 사람은 필요 없어.

주노야가 노려보자 주 부인은 웃으며 술을 따라 주었다.

“저런 애가 좋은 집을 어디서 찾아요? 모친을 여의고 집안과는 상극인 데다 바보로 여러 해를 살았잖아요. 지금이야 어디서 신선의 비방을 얻었는지 병을 고칠 줄 안다지만 그래도 보통 사람과는 달라요. 좋은 집에서 저 아이가 눈에 차겠어요?”

주 부인이 ‘좋은 집’이라는 말에 힘을 주어 말하자 주 노야도 알아들었다. 좋은 집은 물론 주씨 가문에 도움이 되는 집이었다. 주 노야는 잠자코 술을 마셨다.

“그냥 집에 두는 게 나아요. 당신이랑 내가 잘 먹이고 보살펴 주면 되죠. 우리가 가고 나면 아이들이 고모를 봉양하고요. 남의 집에서 설움을 당하는 것보단 그게 낫지 않겠어요?”

주 노야는 퍼뜩 깨달은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그게 좋겠군. 역시 당신이 세심하구려. 역시 외숙모라 달라.”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하는 말이에요.”

주 부인이 웃으며 대꾸했다.

“자, 부인도 고생 많았잖소. 내가 한 잔 따라 주리다.”

주 노야가 술 주전자를 들어 주 부인에게 따라 주었다. 주 부인은 웃으며 술잔을 받았다. 주 노야 부부는 그렇게 화기애애한 겨울밤을 보냈다.

이튿날 해가 중천에 떴을 무렵, 주 부인은 벌써 옷을 갈아입고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어머니, 같은 마차 타기 싫어요. 쳐다보기만 해도 속이 안 좋다고요.”

“그럼 가지 말든가.”

여인이 불만을 토로하자 주 부인이 대꾸했다.

“안 돼요. 교(喬) 낭자의 다도 솜씨가 얼마나 훌륭한데요. 간신히 구경하게 됐는데 어떻게 안 가요.”

여인은 모친의 옷소매를 잡고 흔들었다.

“어머니, 마차 한 대 더 내주시면 되잖아요. 저 여자 혼자 타게 하면 더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그때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주 부인은 딸을 노려보며 똑바로 앉으라는 눈짓을 한 후, 자신도 얼른 자애롭고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온 건 여종이었다.

“부인, 정 아씨께서, 안 가신답니다.”

여종은 무릎을 꿇고 떨리는 목소리로 고했다. 주 부인의 얼굴에 있던 웃음기가 싹 걷혔다. 거봐, 거봐.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이럴 줄 알았다고!

주 부인은 함께 가자고 설득하기 위해 다시 외조카의 대청으로 왔다. 자리에 앉으려던 주 부인은 문득 설득이고 뭐고 그냥 가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명색이 외숙모인데 이렇게까지 해야 한다니. 아주 콧대가 하늘을 찌르네? 하지만 주 부인은 이를 악물며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왜 안 간다는 거야? 가기로 했잖니. 왜 말에 신용이 없어?”

주 부인이 앞에 앉은 여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앞에 앉은 여인은 천천히 밥을 먹고 있었다. 얘는 왜 이렇게 시간관념이 없어. 체통을 지켜야지!

“내가 언제, 간다고 했죠?”

정교랑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네 입으로 말했잖아. 병을 고쳐 주겠다며?”

주 부인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말했다. 웃는 얼굴이 다소 경직되어 있었다. 수십 년간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지내며 쌓아온 경험이 아니었다면 진작 폭발했을 것이다. 정교랑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는 고개를 숙인 채 식사를 이어 나갔다.

“부인, 저희 아씨 말씀은 병을 고칠 순 있지만 직접 가시진 않는단 뜻이에요.”

옆에 있던 시녀가 말했다.

“부인과 아씨께서 말씀하시는데, 네가 어느 안전이라고 끼어들어?”

주 부인 뒤에 있던 여종이 소리쳤다.

“어멈, 부인, 진정하세요. 소인이 법도를 몰라 그런 게 아니에요. 저희 아씨께선 눌변이라 말씀을 많이 안 하세요. 그래서 소인이 아씨 대신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래? 정교랑의 말수가 적긴 했다. 그랬구나, 말을 못하는 거였어. 하긴, 바보였던 애가 하루아침에 정상인이 될 순 없겠지. 귀신이 아니고서야. 여종은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했고, 주 부인은 한숨을 토했다.

“안 가면 병을 어떻게 고치게?”

주 부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잘 모르시겠지만 저희 아씨께서 병을 치료하실 땐 두 가지 원칙이 있어요.”

시녀가 웃으며 말했다. 정교랑은 시종일관 고개를 숙인 채 밥을 먹었기에, 주 부인은 시녀에게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첫째, 직접 찾아가서 고치지는 않으세요. 찾아오길 기다리시죠.”

무슨 원칙이 이래!

“그럼 진 상공 댁은……·.”

주 부인이 중얼거리자 시녀는 싱긋 웃으며 말을 끊었다.

“물론 진 상공 댁 같은 경우는 별개로 논해야죠.”

진 상공 댁 같은? 주 부인은 말문이 막혔다. 이런 말을 나더러 전하라고? 뭐라고 해? 당신네는 진 상공 댁만큼 대단하지 않으니, 모셔 갈 자격이 없고 해? 제정신이 아니거나 경성을 뜰 생각이 아니고서야!

“교교, 억지 좀 부리지 마. 그 원칙이란 것도 어차피 네가 정한 거잖아.”

주 부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지만 정교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정한 거라, 고칠 수 없어요. 말에 신용이 있어야 하잖아요.”

주 부인은 또다시 숨이 턱 막혔다.

“그리고, 원칙을 깨면, 병 못 고쳐요.”

원칙을 어기면 병을 못 고친다? 이거 협박이야? 원칙대로 안 하면 병자를 보지도 않겠다고? 주 부인은 여전히 태연하게 앉아 밥을 먹고 있는 여인을 보고 이를 악물며 일어나 나갔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주씨 가문 자녀들이 부모님께 문후를 올리러 왔다. 주육낭은 조금 늦게 왔는데, 들어와 보니 누나 하나만 앉아 있었다. 방 안 분위기는 다소 침울했다.

“당신도 참, 안 간다고 하면 내버려 두시오. 원칙대로 하는 건데 화낼 게 뭐 있소?”

주 노야가 말했다. 주육낭은 주 부인의 눈가가 붉은 걸 그제야 발견했다.

“어머니, 무슨 일입니까?”

“아무 일 아니다.”

주 부인은 억지로 웃음을 짜내며 아들을 안심시켰다.

“무슨 일이겠어. 강주에서 온 그 바보 때문이지.”

옆에 있던 누나가 분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제 입으로 허풍은 다 떨어 놓고, 이제 와서 잡아떼니 어머니만 나쁜 사람이 되잖아. 오늘 밖에서 사람들이 어머니를 놓고 얼마나 이기죽거렸는지 몰라.”

“칠랑, 입 다물어. 그만 가서 쉬어라.”

주 부인이 말했다.

“두 분이 그 애를 너무 오냐오냐하셔서 그래요!”

일어나 나가던 주칠랑은 주육낭을 보더니 옷소매를 뿌리치며 소리쳤다.

“너도 마찬가지야!”

주칠랑이 나갔는데도 주육낭은 잠자코 앉아 있었다. 모친은 지친 기색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 애가……·.”

주육낭과 주노야가 동시에 입을 열었기에 주육낭이 말을 멈췄다.

“부러 억지를 부리는 것은 아닐 게요.”

주 노야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요 며칠 사람들을 만나며 얘길 들어보니, 그 애가 병을 고치는 건 신선에게 받은 비방 덕분이라더군.”

“아버지.”

주육낭이 못 참고 소리를 질렀다. 그런 황당한 말을 누가 믿는다고! 아무리 모친을 위로하기 위함이라지만 너무 터무니없었다.

“신선이 아니라면 여기저기 유랑하는 도사나 거사일 수도 있고.”

주 노야는 취기가 남아 있는 얼굴로 껄껄 웃었다. 아내가 만난 여인들이 냉소와 조롱을 보낸 데 비해, 주 노야가 만난 사내들은 시시콜콜 따지지 않고 장기적 안목으로 생각했다. 덕분에 주 노야는 요즘 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진 상공 같은 거물과 연이 닿게 됐고, 죽은 사람도 살리는 고인을 집에 두고 있으니.

“그 바보, 아니, 교랑이 나아진 건 고인 덕분이라더군. 안타깝게도 오랫동안 바보로 지낸 탓에, 여기가 여전히 안 좋아서 그렇지.”

주 노야는 손가락으로 머리를 가리키며 웃었다.

“그래서 기억이 안 난다고 하오. 본인도 잘 모른다고 했대.”

주 부인과 주육낭은 그 말에 멈칫했다.

“아니, 그런 말을 어디서 들었어요?”

주 부인이 물었다. 화제의 주인공이 본인들 집에 묵고 있는데, 본인들만 그 일을 몰랐다.

“어디겠소? 진 상공 댁이지.”

진소 부친의 병세가 좋아지면서 지위가 탄탄해진 덕에, 진씨 저택은 끊임없이 드나드는 손님들로 떠들썩한 새해를 맞이했다. 손님이 가득 찬 문간채는 술집이나 찻집처럼 시끌벅적했다. 진씨 가문 문간채의 차 맛이 떨어지고 진소 역시 이들을 접견하는 일이 없었지만, 발 디딜 틈 없이 찾아오는 방문객을 막을 수는 없었다.

사실 그들은 진소를 보기 위해 오는 게 아니었다. 그저 관료 사회의 관습이었다. 왔다 갔다는 것으로 성의를 표하기만 하면 되니까. 문간채의 관료들은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웃고 떠들며 인사하고 자리에 앉아 한담을 나눴다.

“정 낭자는 고인을 만난 거라더군. 듣자니 신의 편작이라는 말도 있고.”

“아니오. 정 낭자는 도관에 살았다니 거기서 이 진인(眞人: 도교에서 도를 깨쳐 깊은 진리를 깨달은 사람. 여기서는 노자를 가리킴)을 만났겠지.”

오가는 잡담 중에 이런 말들이 퍼지기도 했다. 언제, 누구 입에서 시작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진 노태야의 병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화제는 곧 병을 고쳤다는 강주 처자에게로 옮겨 갔다. 이야기가 나왔다 하면 논쟁이 끝나지 않아 문지기를 잡고 물어보는 이도 있었다.

“강주 처자가 어떤 선인을 만났다던가?”

차에 물을 따라 주던 문지기들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괜한 말씀 마세요. 그런 일 없습니다.”

문지기들은 그렇게 말했지만 새어 나가는 소문을 막을 순 없었다. 진 노태야의 거처에 있는 진소 역시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아버지, 그런 말들이 왜 나온 걸까요?”

진소의 말에 진 노태야는 손에 들고 있던 서책을 내려놓았다.

“네가 말한 거 아니었느냐?”

진 노태야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버지!”

진소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는 고인이라고 했지, 신선이란 말 같은 건 한 적 없습니다.”

“바보의 병을 고치고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의술을 가진 고인이면, 신선이나 마찬가지지.”

진 노태야가 웃었다. 진소는 어이가 없었지만, 부친의 농담을 알아들었다.

“아버지, 말이 새어 나가기라도 하면……·.”

“내가 소문낸 거 아니다.”

진 노태야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난 그저 노복들과 한담을 나눈 것뿐이야. 누가 소문냈는지 누가 알아? 아무튼 난 요양 중이니 내가 소문낸 건 아니다.”

진소는 실소를 터뜨렸다. 부친이 넌지시 시킨 게 아니라면 누가 감히 그런 말을 입 밖에 냈겠는가.

“공자께서 괴력난신(怪力亂神: 귀신에 관한 일, 이성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불가사의한 존재나 현상)에 대해서는 입에 담지 말라 하셨다. 나는 모르는 일이고, 물은 적도 말한 적도 없어.”

진 노태야는 손을 내저으며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아는 건 정 낭자가 내 생명의 은인이라는 것뿐이다.”

유학을 공부하는 제자들이야 괴력난신을 입에 담지 않는다지만, 이 세상에 유학자가 그리 많다던가. 더구나 이런 신기하고 불가사의한 일을 두고. 모르긴 몰라도 올 새해 명절을 계기로 정 낭자의 명성은 온 경성에 널리 퍼질 것이다.

“아버지, 이게 정 낭자한테 좋을까요?”

진소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정 낭자가 신선을 만난 게 다른 사람이 신선을 만난 것보단 낫지.”

진 노태야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투로 웃었다.

“이 세상에 행운을 줍고 싶어 하는 사람은 널리고 널렸다. 하지만 그 행운이라는 게 어디 그리 쉽게 주울 수 있는 것이라더냐.”

주 노야의 말이 맞았다. 부인들의 말투에 날이 서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씨 가문을 찾아오지 않는 건 아니었다. 주씨 가문을 찾아오는 마차는 전보다 더 많아졌다. 본디 넓었던 대문 앞이 좁게 느껴질 정도로 어수선해졌지만 좁다고 불평하는 이는 없었다.

문지기들은 기쁜 얼굴로 어깨에 힘이 주며 마차 세울 곳을 찾아 이리저리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이웃들이 구경하러 오면 땀을 닦는 시늉을 하며 명절 쇠는 게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다고 불평하며 은근히 뻐기기도 했다.

주 부인의 객청은 여전히 사람들로 가득했고, 웃고 떠드는 소리로 문이 울릴 지경이었다. 화제는 대부분 정교랑이었다.

“어렸을 땐 바보였다면서요?”

“맞아요. 예전에 내가 과랑(戈娘)과 친했잖아요. 혼례를 올린 후에도 몇 년간은 경성에 올 때마다 날 찾아와 만나곤 했어요.”

부인 하나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주씨 가문의 자녀들은 무기의 글자를 따 이름을 지었는데, 딸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교랑 모친의 이름은 과(戈: 창을 의미)였다. 집안 서열로는 다섯째인지라 ‘오랑’이나 ‘과랑’으로 불렸다.

“그러더니 그 아이를 낳은 후부턴 안 보러 왔어요. 서신 왕래도 끊겼고요.”

그 부인은 낙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다들 자식이 있는 처지인지라 그런 얘기가 나오자 하나같이 마음 아파했다. 부인들은 함께 탄식했지만 젊은 여인들은 별다른 감흥이 없는지 계속해서 나지막이 소곤거렸다.

“세상에, 정말 부처님이 도우셨네요.”

“부처님이 아니라 진인이라니까요.”

“대체 진인이에요? 부처님이에요?”

“이따 올 거잖아요. 물어보면 알겠죠.”

거기까지 말한 여인들은 밖을 쳐다봤다.

“주 부인이 간 게 언젠데, 왜 아직도 안 오죠?”

여인들은 미간을 찌푸렸다.

“또 무슨 허세를 부리려고 이러는지 모르겠네요. 주 부인이 점점 우리와 거리를 두는 것 같아요.”

입을 삐죽거리며 불평을 털어놓는 이도 있었다.

“이제 진 상공 댁 부인과 왕래하는 사이가 됐잖아요. 우리 같은……·.”

이와 같은 불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주 부인은 자리에 있지 않았지만 그런 얘기가 나오리라 짐작했다. 어디 그뿐인가. 요즘은 걸핏하면 주 부인이 화제에 올랐다.

“네가 말한 원칙대로 했다. 네가 안 찾아가도 되고 사람들이 찾아왔어. 이제 어쩔 거야?”

주 부인은 노기를 숨기지 못한 채 물었다.

“교교, 너 이 외숙모를 일부러 괴롭히는 거지?”

휘장 뒤 침상에 누운 여인은 말이 없었다. 윗전 앞에 공손히 앉아 미소를 머금고 있던 시녀는 그 말에 표정이 굳어졌다.

“부인, 저희 아씨는 누굴 괴롭힐 만큼 기력이 넘치지 않으세요. 아씨는 원칙대로 하는 분이에요. 터무니없거나 쓸데없는 말씀은 안 하시죠.”

시녀는 불안해하기는커녕 도리어 기분 나빠했다.

“저희 아씨는 매일 꼭 낮잠을 주무세요. 아시잖아요.”

알다마다, 이 집에 들어오던 첫날부터 그놈의 낮잠 때문에 날 눈밭에 세워 뒀잖아.

“그 낮잠은 어쩜 이렇게 시간이 우연히 맞아떨어지는지.”

주 부인은 냉소를 지었다.

“세상사는 본디 우연으로 이루어지잖아요. 우연이 아니었다면, 저희 아씨께서 오늘 부인 앞에 계시지도 않았을걸요.”

시녀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열 받은 주 부인은 옷소매를 뿌리치며 가 버렸다.

“부인, 기다리는 부인들께 뭐라고 하죠?”

얼른 뒤따라가던 여종이 나지막이 물었다.

“뭐라고 하긴, 잔다고 해야지.”

주 부인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여종이 종종걸음으로 뒤따라갔다.

“그런데, 그래도 될까요? 부인께서 일부러 뻐기신다고 여길 텐데요.”

그래, 어쨌든 우리 집 애잖아. 손님이 오셨는데 안주인이란 사람이 아이를 부르기는커녕 잔다고 하다니. 진짜 잔다고 쳐도 깨우면 그만 아닌가. 웃어른이란 사람이 이럴 수가 있나, 괜히 허세 부리는 게 아니고서야. 주 부인은 손을 쥐며 이를 갈았다.

“어쩌다 저런 화근덩어리가 집안에 들어와서!”

주 부인은 대청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지만 달리 도리가 없었다. 문이 열리면서 주 부인의 뒤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부인들의 안색이 묘하게 변했다.

“거봐, 내가 뭐랬어.”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불평이 터져 나왔다. 주 부인은 못 들은 척 자리에 앉았다.

“사실 그 애 몸이 아직 안 좋아요. 방금 약을 먹고 잠들었다네요. 다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주 부인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주 부인을 바라보는 표정들에 묘한 구석이 있었다.

“진 노태야의 병을 치료할 때도 몸이 그렇게 안 좋았대요?”

젊은 부인 하나가 웃으며 물었다. 주 부인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땐 진씨 가문에서 머물렀으니 나야 모르죠. 그건 진 부인께 여쭤봐요.”

주 부인은 이번에도 웃으며 대꾸했다. 이 젊은 부인의 남편은 주 노야보다 품계가 높았지만, 높아도 진 부인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정도로 높진 않았다. 그럼 나한테도 그런 말을 해선 안 되지!

주 부인이 그런 수모를 당할 이유는 없었다. 언제나 호탕하고 사소한 것에 구애받지 않으며 온화하다는 인상은 이미 잃은 후였지만. 이게 다 그 천것 때문이야. 왜 하필 나한테 이런 일이!

두 부인 사이에서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말이 오가면서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집에 애들이 아직 어려서 먼저 일어날게요.”

그 젊은 부인이 지체 없이 일어나자 두세 명이 따라 일어섰다. 나머지 부인들은 주 부인을 쳐다봤다. 기분 나쁜 표정이 역력했다. 주 부인은 단정히 앉아 있었지만 역시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이대로 가 버리면 원수가 될 텐데. 좋은 인연을 맺으려던 게 이런 꼴이 될지 누가 알았겠나.

그때 문밖에서 여종의 소리가 들렸다.

“부인, 반근 낭자 말이 아씨께서 일어나셨답니다.”

일어나 갈 준비를 하던 여인들은 멈칫했고 주 부인은 이를 악물었다. 우연도 참. 그 젊은 부인은 주 부인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문 쪽으로 걸어갔다. 여종들이 얼른 문을 열었다.

“우리 애도 깼을 것 같네요. 정 낭자는 다음에 뵈러 오죠.”

젊은 부인은 관심 없다는 듯 냉담하게 말했다. 그때 문 앞에 있던 시녀가 고개를 들더니 입을 열었다.

“부인, 저희 아씨를 뵈러 오셨어요?”

낭랑한 목소리에 용모도 예쁘장한 게 대갓집 시녀로 더없이 제격인 모습이었다.

“너희 아씨를 보는 게 쉽지 않구나.”

일개 시녀에게 깍듯할 필요는 없는지라 젊은 부인은 직설적으로 툭 내뱉고 문을 나섰다.

“부인, 그럼 직접 가시면 되잖아요.”

시녀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주 부인은 큰일 났다고 중얼거리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반근, 무례하구나! 아랫사람이 웃어른을 만나러 와야지, 어디 부인들더러 오라 가라야?”

주 부인이 무거운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시녀는 웃으며 예를 올렸다.

“사실 부인들께서 저희 아씨를 보시려는 건 진료를 위해서잖아요.”

시녀는 회랑 아래에 서서 자리를 뜨려는 젊은 부인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서 안에 남아 이야기를 듣고 있는 부인들을 쳐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희 아씨께서 말씀하시기를 병자의 일은 사적인 것이라 남들 앞에서 논하기 어렵다 하셨어요. 문을 닫고 따로 앉아 자세히 얘기해야지, 드러내놓고 자랑할 일이 아니라고요.”

하긴,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선 말도 많이 나오기 마련인데 남들 앞에서 태연하게 진료를 받을 이가 어디 있겠는가. 곧장 낭자를 찾아가 남들 안 보는 곳에서 얘기하는 게 낫지.

젊은 부인은 웃으며 두봉을 걸치고 걸음을 옮겼다.

“그럼, 네 아씨께 안내해라.”

시녀는 웃으며 네 하고 대답하고는 안에 있는 주 부인을 향해 공손히 예를 올린 후에야 뒤돌아 길을 안내했다. 실내 분위기는 대번에 밝아졌다.

“우리도 가 봐요.”

부인들이 일어나며 말했다.

“서두를 것 없어요. 한 명씩 가야죠.”

나서서 순서를 정하는 이도 있었다. 여인들은 누가 먼저 가고 그다음에 누가 가자며 웃고 떠들었다. 안주인인 주 부인은 한쪽에 내버려 둔 채로.

저희 아씨께서 말씀하시기를 병자의 일은 사적인 것이라 남들 앞에서 논하기 어렵다 하셨어요.

주 부인의 귓가에 그 시녀의 말이 울려 퍼졌다. 주 부인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너희 아씨가 말하긴! 너희 아씨가 언제 그런 말을 해! 세상에, 저렇게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거짓말을 하는 천것이 있다니! 그리 대범하게 망발을 지껄이다니!

“주 부인, 다음부턴 이런 말 일찍 좀 전해 주세요. 괜히 오해하지 않게.”

누군가가 고개를 돌려 주 부인을 보며 알 듯 말 듯한 미소로 말했다. 주 부인은 목이 따끔거리는지 연신 기침을 해댔다.

-날조-

주씨 가문 대문 앞에는 여전히 마차가 끊이지 않았지만 주 부인의 객청은 텅 비어 있었다. 처음엔 그래도 안주인인 주 부인에게 인사하러 오는 이가 있었으나 시간이 흐르자 곧장 정교랑에게로 가는 사람이 점점 많아졌다. 게다가 정교랑은 과연 몸이 안 좋은 듯했다. 기껏해야 하루에 몇 명 보는 게 전부였다.

“몸이 안 좋아서 집중할 수가 없네요. 제대로 진료하지 못할 바에야 진료를 안 하는 게 낫죠.”

깍듯하면서도 이치에 합당한 말이었다.

“하긴, 경성의 태의들도 진료를 늘 보는 건 아니잖아.”

“맞아. 성 서쪽에 있는 그 여도사는 질문도 오전에만 받는대.”

“아휴, 정 아씨는 여도사가 아니잖아.”

“여도사나 마찬가지지. 침도 안 놓고 그저 듣기만 하잖아. 그냥 듣기만 하고 무슨 병인지 알다니 여도사나 박수무당과 비슷하지 않아?”

“맞아. 정 아씨는 이 진인 밑에서 수학한 제자란 말도 있잖아.”

뒤에서 두 여종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앞서가던 부인이 걸음을 멈췄다.

“부인, 주 부인부터 만나러 가시겠어요?”

여종이 물었다.

“방금 보니까 마차가 벌써 마차가 여러 대 왔더구나. 더 지체할 순 없지.”

잠시 머뭇거리던 부인이 말했다.

“우린 정 낭자를 보러 온 거잖아. 어차피 주 부인이 진료할 것도 아닌데.”

거길 만나러 가서 뭐해, 시간만 지체되지. 따지고 보면 주 부인 때문에 지체된 시간이 얼마야? 다들 내심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여종들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은 지체하지 않고 곧장 정교랑의 처소로 향했다.

이제 주씨 저택에서 가장 떠들썩한 곳은 정교랑의 처소가 됐다. 정교랑의 마당엔 여종이 여럿 서 있었고 회랑 아래와 대청 안에도 사람이 있었다. 차를 올리고 물을 따라 주는 몸종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거처가 너무 좁네.”

부인 하나가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삐죽거렸다.

“돈도 많은 노섬 주씨 가문이 이러면 안 되지.”

그 말은 곧 주 부인의 귀로 들어갔고, 주 부인은 울화가 치밀었다. 주 노야가 싱글벙글 웃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주 부인이 팔걸이 책상에 기대 두 몸종의 시중을 받으며 무언가를 먹는 모습이 보였다. 방 안에 약 냄새가 가득했다.

“정초부터 뭘 먹는 게요?”

주 노야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약 먹어요.”

주 부인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갑자기 무슨 약을 먹는단 거요? 손님도 많이 오는데 여기 들어앉아 약을 먹고 있다니.”

“그 손님들은 내가 신경 쓸 필요 없거든요.”

주 부인은 이를 갈며 약을 들이켰다. 입맛이 썼다.

“안주인이란 사람이 손님이 오는 걸 신경 안 쓴다고?”

“나보다 더 안주인 노릇을 잘하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뭐 하러 나서요!”

주 부인은 열이 받는지 점점 언성을 높이며 약그릇을 쾅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몸종은 놀라 덜덜 떨며 엎드려 고개를 숙이고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다.

“어쨌거나 우리 주씨 가문 여식 아니오. 왜 애한테 신경질이야?”

주 노야는 미간을 찌푸리며 아내를 쳐다봤다. 하여간 여인들은 식견이 짧다니까. 그저 시시콜콜 따지려고 들지.

“저 좋은 일 하면서 왜 날 나쁜 사람으로 만드냐고요.”

주 부인은 생각할수록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화를 참을 수 없었다. 그 여인이 이 집에 들어온 후부터 자신은 점점 궁지로 몰렸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그 애가 뭘 했기에?”

주 노야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주 부인은 그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그래, 뭘 했지? 아무것도 안 한 것 같은데……·. 하지만 사사건건 훼방을 놓지 않았는가. 어디가 잘못됐는지도 모르니 속수무책일 수밖에. 정상인과는 완전히 다른 여인이었다. 얼핏 보기엔 어리숙하고 멍청해 보이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간다. 잡히지도 않고 종잡을 수도 없이.

생각할수록 가슴이 답답했다. 주 부인은 가슴을 움켜쥐며 격렬한 기침을 해댔다. 몸종이 얼른 다가가 등을 두드리고 가슴을 쓸어 주었다.

“대체 무슨 일이오? 교교가 집에 있으니, 무슨 병인지 그 애한테 봐 달라고 하면 되잖소.”

차라리 말을 말지. 그 말을 들은 주 부인은 더욱 울화가 치밀어 숨도 못 쉴 듯 기침이 나왔다. 주 부인은 옷깃을 움켜쥐며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그 애가, 그 애가 집에 있어서……·.”

화병에 걸린 거라고요! 물론 그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내진 못했다. 황당한 말이기도 했거니와 주씨 가문 안주인이란 사람이 외조카한테 무시를 받아 이 꼴이 됐다고 하면 웃음거리만 될 뿐이었다.

“성급히 굴지 마시구려. 교랑이 병을 잘 고치면 차차 명성이 높아질 거요. 그런 애가 우리 집에 있으면 결국 당신 체면도 올라가고, 우리 주씨 가문의 체면도 올라가지 않겠소.”

가슴을 두드리는 주 부인의 안색은 몹시 안 좋았다.

“그러길 바라야죠.”

그 여인이 이 집 문턱을 넘어선 그날부터 주 부인은 계속 불안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건들이 종국에는 거대한 풍랑을 일으켜 주씨 가문을 덮칠 것 같았다.

“여봐라. 강주로 사람을 보내라.”

주 부인이 갑자기 소리쳤다. 여종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강주로 사람을요?”

“정씨 가문에 가서 알아봐.”

“뭘 알아보는데요?”

여종들은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주 부인은 손수건을 꽉 쥐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 바보에 관한 모든 일을 알아봐라. 알아야겠다, 그 애가 정씨 가문에서도 이렇게 말썽을 부렸는지.”


정교랑이 문진(問診)을 시작한 지 사흘이 흘렀다. 정교랑의 거처는 여전히 사람들로 붐볐다. 부인 하나가 휘장을 들고 나오자 대청에 있던 사람들이 일어섰다.

“뭐래요? 정 낭자가 약 지어 줬어요?”

사람들의 물음에 부인은 이해가 안 가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람들은 의혹의 눈길로 서로를 쳐다봤다.

“또 약을 안 지어 줬어요? 뭐라는데요?”

그 부인은 이번에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에도 똑같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뜻이지?”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지난 며칠간 사람들은 바람대로 정 낭자를 만나 어딜 치료하고 싶은지 소상히 얘기했다. 정 낭자는 아들 얘기든 딸 얘기든, 남편 얘기든 다른 친척 얘기든 사람들이 얘기하도록 조용히 들어 주었다. 하지만 진지하게 경청하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았다.

약을 지어 주지도 않고 무슨 병인지 알려 주지도 않는데 이게 무슨 진료야? 그냥 수다를 들어주는 거잖아? 사람들은 초조해졌다.

“다음은 어느 분 들어가시겠어요?”

시녀가 휘장을 들어 올리고 나와 물었다. 부인 하나가 시녀를 보고 일어섰다.

“내가 들어갈게.”

부인은 사람들에게 진정하라는 손짓을 했다.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게요. 뭐라고 하나 봅시다.”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며칠간은 다들 귀부인인지라 예법을 중시하기도 했고, 정 낭자의 진료에 나름의 원칙이 있다고 여겨 좀 이상해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런데 상황을 보니 물어보지 않고는 안 될 것 같았다.

부인이 측방으로 들어가자 팔걸이 책상에 앉아 책을 보는 듯한 여인이, 정확히 말하자면 소녀가 보였다. 자리에 앉은 부인은 정교랑과 인사를 나눴다.

“무슨 병인지, 환자의 나이는 몇인지, 소상히 얘기해 봐요.”

정교랑이 말했다. 부인도 법도를 아는지라 일단은 차분히 얘기했다. 얘기를 마친 부인의 눈에 여전히 책을 보고 있는 정교랑의 모습이 들어왔다. 얘기를 제대로 듣긴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방 안에 침묵이 흘렀다.

“부인, 얘기 다 하셨어요?”

시녀가 물었다. 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정교랑을 쳐다봤다. 정교랑은 살짝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부인, 가세요.”

시녀가 일어나 길을 안내했다. 이번 부인은 순순히 따라 나가지 않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정 낭자, 우리 남편한테 무슨 약을 써야 할까요?”

정교랑이 고개를 들어 부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난, 몰라요.”

부인은 하도 어이가 없어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낭자? 방금 뭐라고 했어요?”

“부군의 병은, 내가 못 고쳐요. 그러니, 어떤 약을 써야 할지 모르죠.”

정교랑이 말했다. 이게 무슨 뜻이지? 부인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바깥에 있던 사람들이 소식을 듣고 우르르 들어와 정교랑을 둘러싸고 질문을 해댔다. 정교랑은 시종일관 고칠 수 없다는 말로 응수했다.

“낭자, 그럼 며칠간 우릴 갖고 논 거예요?”

“그러게요. 신의라고 하지 않았어요?”

“왜 못 고친다는 거예요? 딱히 희귀한 병도 아니잖아요.”

방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정교랑은 단정히 앉은 채 조용히 책만 봤다.

“이게 원칙이라고요.”

시녀가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원칙? 그래, 직접 찾아가지 않는 게 원칙이라고 해서 우리가 왔잖아. 근데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차라리 말을 말 것이지. 며칠 동안 허둥지둥 달려와 기다렸던 걸 생각하니 열이 오른 부인이 소리쳤다.

“네, 저희 아씨의 치료엔 원칙이 있다고요. 다들 아시는 거 아니에요?”

시녀 역시 놀라며 반문했다.

“방금 말씀하신 건 첫 번째 원칙이고요.”

첫 번째? 그럼 두 번째도 있어? 사람들이 놀라 서로 눈치를 살폈다.

“두 번째는 뭐요?”

누군가가 물었다. 시녀는 잠자코 있고 정교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교랑은 긴 머리 사이로 보이는 커다란 두 눈동자로 사람들을 훑었다.

“죽을 사람이 아니면, 안 고쳐요.”

정교랑이 입을 열었다. 사람들은 놀랐다가 곧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죽을 사람이 아니면 안 고친다? 장난해? 제정신인가?

마당에 있던 귀부인들은 주 부인의 거처로 우르르 몰려갔다. 처음엔 궁금해서 보러 왔더니 안 만나 줘서 실망하게 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진료를 받는다면서 상냥하게 굴기에 다들 좋아하며 달려왔다. 하루에 대여섯 사람만 받는다기에 흥분된 마음으로 초조하게 기다렸는데, 이제 와서 한다는 말이 죽을 사람이 아니면 안 고친다니!

이 여러 사람이 며칠 동안 실없이 놀아난 꼴이잖아! 실망이 놀람과 기쁨, 흥분과 초조로 이어졌다가 다시 실망으로 돌아왔다. 사람을 갖고 놀아?

대청이 발칵 뒤집어졌다. 언제나 온화하고 단정한 태도를 유지하던 귀부인들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제대로 폭발해 버렸다.

“이게 대체 무슨 뜻이에요?”

“그동안 언니로 대우했는데, 동생을 이렇게 대하는 언니가 어디 있어요?”

“강구랑, 우린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랐잖아. 이제 진 상공 댁과 연줄이 닿게 됐다고,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거야?”

“사람을 이렇게 무시해요?”

약을 먹고 막 잠들었던 주 부인은 갑자기 여러 사람이 몰려와 고성을 질러대자 머리까지 어질어질했다. 무슨 일이지? 대체 무슨 일이야? 머리도 아픈데 여인들이 뭐라고 따지는 건지 알 길이 없으니 주 부인은 말문이 막혔다.

“왜들 이러는 건지……·.”

주 부인이 일어나며 말했다.

“그러게요. 주 부인이야말로 우리한테 어떻게 이래요. 정초부터 이러면 재미있어요?”

부인 하나가 씩씩거리며 따졌다.

“그 일이 나와 무슨 상관인데요?”

주 부인이 가슴을 치며 물었다.

“이 댁 딸인데 주 부인과 상관이 없으면, 우리랑 상관있단 거예요?”

다른 부인이 따졌다. 이거 봐, 이거 봐. 그 계집 앞에선 웃는 얼굴만 보이면서, 문제가 생기니까 나한테 와서 따지네. 주 부인은 가슴을 쥐고 기침을 했다.

“그 애가 안 고친다고 하면 그 애한테 따져야지, 왜 나한테 이래요?”

주 부인은 열불이 났다.

“그런 원칙이 있으면 진작 말했어야죠. 일부러 우리 골탕 먹인 거잖아요!”

부인들도 열을 냈다. 원칙이라니? 들을수록 알 수 없는 얘기에 주 부인은 머리가 웅웅 울렸다. 죽을 사람이 아니면, 안 고친다고?

“그건 나도 몰랐어요.”

주 부인이 말했다. 하지만 이미 분노를 주체할 수 없게 된 부인들의 귀에 그런 말은 들리지 않았다.

“아무튼 정말 잘났네요. 아주 제멋대로야. 우리가 자진해서 놀아나 줬으니, 누굴 탓해.”

격분한 부인들은 주 부인의 해명을 듣지도 않은 채 옷소매를 뿌리치며 가 버렸다. 주 부인은 손을 뻗어 붙잡으려 했지만 누굴 붙잡아야 할지도 알 수 없고, 계속 기침이 나오는 통에 그저 가슴을 움켜쥘 수밖에 없었다.

“어서 노야께 집으로 오시라 해라. 큰일이 났어!”

주 부인이 비틀비틀 자리에 앉으며 외쳤다.

주씨 저택 대문 앞에 있던 마차들이 속속 빠져나가면서, 그 대담하고 오만방자하며 바보 같은 말도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한가한 정월은 사람들 사이의 왕래가 빈번한 때였다. 각 집의 안채와 사랑채에서 퍼지는 각종 유언비어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고 넓게 퍼졌다.

진 상공의 부친을 고쳤다거나 신선을 만났다는 소문이 먼저 퍼지긴 했지만, 그 황당한 말을 이기진 못했다. 더구나 이젠 정교랑을 직접 본 사람도 많아진 터였다. 아직 나이 어린 소녀였고, 바보로 보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영리해 보이지도 않았다. 의술을 배운 적 없으니 감히 그런 말을 내뱉겠지.

신선의 비술 같은 건 백성과 부녀자, 아이들이나 듣고 화제에 올릴 뿐, 고관대작이나 대갓집에서는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라(敬鬼神而遠之)’는 공자의 말씀을 따랐다.

“노섬 주씨 가문이 명성을 얻으려고 아주 발광을 하는군!”

“사람 하나 고쳤다고 주씨 가문이 그리 날뛰다니.”

“노섬 주씨란 이름을 너무 오래 쓴 것 같군. 여러 해가 되도록 발전이 없으니. 이참에 이름을 바꾸는 게 낫겠어. 이를테면……·.”

“이를테면 아둔 주씨?”

“하하하……·.”

주 노야는 앞에 있던 탁자를 확 밀쳐 버렸다. 대청 안팎에 있던 여종들과 몸종들은 목을 잔뜩 움츠렸다. 방 안에서 들리는 주 부인의 기침 소리가 점점 격렬해졌다.

“내가 뭐랬어요, 내가. 그래도 기어이 믿더니……·.”

주 부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 주씨 가문을 망치려고 아주 작심한 애라니까요! 우린 이제 경성에서 못 살아요!”

주 부인이 여종을 재촉했다.

“어서 짐을 챙겨라. 짐을 챙겨. 당장 떠나자. 섬주로 돌아가야겠어.”

주 부인이 이런다고 당장 짐을 챙기러 갈 수도 없는 여종들은 바닥에 꿇어앉은 채로 주 부인을 위로하고 달랬다.

“저것이 여길 집으로 여기긴 하는 건지!”

주 노야가 발길질로 화분대를 엎어 버리며 소리쳤다.

“쟤가 여길 집으로 여기는 거 같아요?”

주 부인이 안에서 소리쳤다. 이어 격렬한 기침 소리가 들렸다.

“저 앤 우릴 원수로 여기고 있어요!”

“천것 같으니라고, 당장 불러와라!”

주 노야가 호통을 쳤다.

“냉큼 불러와.”

여종 하나가 허둥지둥 뛰어나갔다가 얼마 안 되어 돌아왔다.

“저, 그게, 안 오겠답니다.”

여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천것이! 주 노야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대청을 빙 돌더니 벽에 걸려 있던 보검을 집어 들었다.

“저런 화근덩어리를 남겨 봤자 어디에 쓰겠느냐!”

주 노야가 밖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놀란 여종들과 몸종들이 무릎을 꿇고 팔다리를 붙잡고 매달리며 말렸다.

주육낭이 발로 문을 뻥 차며 들어오자 안에 있던 시녀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공자님.”

시녀는 얼른 웃는 얼굴로 일어섰다.

“마침 말씀드리러 가려던 참이었어요. 저희 아씨께서 나가신다니 마차를 준비해 주세요.”

굳은 얼굴로 따지러 왔던 주육낭은 그 말에 말문이 막혔다.

“정교랑, 당장 나와!”

주육낭이 휘장 뒤를 쳐다보며 소리쳤다. 웃고 있던 시녀는 주육낭의 표정을 보고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다른 몸종들처럼 불안해하거나 겁을 먹진 않았다. 그저 뒤로 몇 걸음 물러나 휘장 옆에 섰다.

휘장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자 시녀가 휘장을 들었다. 늘 입던 수수한 옷으로 도로 갈아입고 머리를 길게 내려뜨린 정교랑이 주육낭을 쳐다봤다.

“너 미쳤어?”

주육낭이 소리쳤다.

“아니요.”

정교랑이 대답하며 걸어 나왔다.

“안 미쳤으면서 왜 그런 미친 소릴 해?”

주육낭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죽을 사람이 아니면 안 고친다니, 무슨 원칙이 그래! 괜히 일 만들려는 거면 좀 그럴듯하게 지어내!”

정교랑은 주육낭을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나한테 그런 원칙이 있는 거, 몰랐어요?”

“내가 어떻게 알아? 난 바보가 아니잖아!”

정교랑이 냉소 짓는 주육낭을 쳐다봤다.

“그쪽한테, 반근이 있지 않나요?”

정교랑이 천천히 말했다. 갑자기 튀어나온 반근이라는 이름에 옆에 있던 시녀는 하마터면 반사적으로 네 하고 대답할 뻔했다.

“가서, 물어봐요. 이 정교랑이, 멋대로 말을 지어내고, 날조하는 사람인지.”

정교랑은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뭐라 묻기도 전에 천천히 말을 이으며 느릿느릿 다가가 주육낭을 쳐다봤다.

“가서, 물어봐요. 이 정교랑이, 원칙을 지키는 사람인지 아닌지. 나 정교랑은, 바르고 올곧은 사람이에요. 찾아가서 치료하는 일이 없고, 죽을 사람이 아니면 안 고쳐요. 내 말에 한 치라도 거짓이 있다면……·.”

정교랑은 어느덧 주육낭 앞에 서 있었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소년이 이제 막 피어나는 소녀 앞에 서 있었지만, 시선에서 결코 우위를 점할 수 없었다.

“난 벼락을 맞아 죽을 거예요!”

정교랑이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그 말을 듣던 주육낭은 귀에 벼락이라도 맞은 듯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굳은 얼굴에 무안과 분노가 스쳤다. 정교랑은 벌써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정교랑, 일이 커질까 겁나지도 않아?”

주육낭이 소리를 지르자 정교랑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주육낭을 바라봤다. 정교랑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이 여인의 얼굴이 드러내는 유일한 표정이었다. 주육낭은 그 표정에서 기쁨이나 희열을 조금도 느낄 수 없었지만 말이다. 무뚝뚝한 얼굴에 웃음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두 눈은 보는 이를 오싹하게 했다.

“난, 일이 커지지 않을까, 겁날 뿐이에요.”

정교랑이 말했다.


마차가 주씨 저택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이번 마부는 주육낭이 아니었다.

“길 알아요?”

시녀가 휘장을 걷고 물었다. 마부는 쭈뼛쭈뼛 고개를 끄덕였다.

“대통(大桶) 거리로 가면 더 가까워요.”

시녀는 길을 제대로 알긴 하냐는 눈빛으로 마부를 쏘아보며 말했다.

“그 댁 육공자는 매번 멀리 돌아갔거든요.”

말을 마친 시녀는 휘장을 내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마부는 입을 삐죽거렸다.

옥대교까지 가려면 대통 거리를 통하는 게 가깝긴 했다. 거기서 보초(寶鈔) 골목을 가로질러 가는 게 가장 가깝고 마차와 사람도 드물었다. 강주에서 온 촌뜨기가 그런 것도 알아? 상경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경성 토박이보다 더 잘 아네. 과랑 아씨의 여식이 신선을 만났다더니, 곁에 두는 몸종도 보통내기가 아니군. 마부는 채찍을 휘둘러 말을 재촉해 떠났다.

마차 안의 시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정교랑을 쳐다봤다.

“아씨, 주씨 가문으로 다시 돌아오실 거예요?”

“당연하지. 우리 아직 안 쫓겨났잖아.”

시녀는 풉, 웃음을 터뜨렸다가 얼른 표정을 수습했다.

“아씨, 장 노태야께서 돌아오셨나 가 볼까요?”

무언가 떠오른 듯 시녀가 물었다. 정교랑이 시녀를 힐끔 쳐다봤다.

“필요 없어. 아직은 내가, 막다른 골목에 몰리지 않았잖아.”

시녀가 헤헤 웃었다.

“아씨를 얕보려는 뜻은 없었어요. 아씨는 정말 대단하세요.”

“알아. 난 희망을, 남에게 거는 게, 내키지 않아. 그뿐이야.”

거기까지 말한 정교랑이 시녀를 쳐다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더구나, 지금은 모든 게, 내 뜻대로 되고 있고.”

시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네 하고 대답했다.

정교랑의 방문으로 옥대교 저택이 분주해졌다.

“누이, 이게 대체 며칠만이야.”

서봉추가 소리쳤다. 정교랑은 마중 나온 사내들에게 예를 표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직접 말을 끌고 가던 서봉추는 어안이 벙벙한 마부의 표정을 보고 소리를 빽 질렀다.

“뭘 봐!”

서봉추가 눈을 부라리며 채찍을 빼앗고는 말을 몰아 안으로 들어갔다. 정신을 차린 마부가 얼른 따라 들어가려고 했다.

“어이, 뭐 하는 거야?”

고개를 돌린 서봉추가 눈을 부라리며 소리를 질렀다. 마부가 놀라 걸음을 멈췄다.

“아니, 저, 저는……·.”

마부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했다.

“저리 가, 저리. 법도를 모르네.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서봉추는 턱을 쳐들고 마부를 훑어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예전 그 마부에 비하면 어림없네. 예전 그 마부는 법도를 잘 알아 문턱 한 번 넘는 일이 없었어. 귀퉁이에서 대기하고 있었지. 잘 좀 본받아.”

서봉추가 말을 끌고 안으로 들어가자 문밖에 남겨진 마부는 어리둥절했다. 예전 그 마부? 정 아씨가 출타할 땐 늘 육공자가 직접 데려다주셨는데. 육공자를 마부로 여기는 거야? 문턱도 안 넘으셨다고? 그리고 저 사내들은 뭐야? 여기서 주인 행세를 하고 있네.

다른 사람들은 누이에게 줄 식사를 준비하러 나가고, 안에는 범강림과 서무수, 서봉추만이 남았다. 정교랑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가격을 8천 관(貫)까지 깎았다고요?”

정교랑의 물음에 서무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고집 있는 녀석이 아니야. 그것도 며칠을 실랑이한 끝에 간신히 깎은 거야.”

범강림이 혀를 내둘렀다.

“8천 관이라니. 내 평생 그리 큰돈은 구경도 못 해 봤는데.”

“맞아. 그 자식이 아주 우리 덕에 한몫 챙기려는 거야. 그 식당에서 대박이 났다나. 목이 좋아서 돈을 엄청 벌었대.”

서봉추도 혀를 내둘렀다.

“일 년이면 투자금 회수할 거라는데, 그 정도면 재상 대인보다 돈을 많이 버는 거잖아.”

서봉추가 서무수를 쳐다봤다.

“셋째 형님, 재상 대인의 수입이 술집만도 못해요?”

서무수는 잠자코 있는데 정교랑 뒤에 꿇어앉아 있던 시녀가 입을 삐죽거리며 웃었다.

“평(平) 상공의 녹봉이 한 달에 3백 관쯤 되니까, 2년은 꼬박 모아야 술집을 살 정도겠네요.”

다들 깜짝 놀랐다.

“재상을 해도 그것밖에 못 벌어? 딱해라.”

서봉추는 놀란 눈치였다. 그저 녹봉이나 받자고 재상을 하는 건 아니잖아요! 시녀는 빙긋 웃으며 잠자코 있었다. 범강림과 서무수도 서봉추를 내버려 두고 정교랑을 쳐다봤다.

“확실히 저렴한 가격은 아니야. 급한 게 아니면 우리가 천천히 협상해 볼게.”

서무수의 말에 정교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됐어요. 그깟 돈이, 무슨 대수라고요.”

8천 관인데? 그깟? 대수가 아니야? 안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정교랑을 쳐다봤다. 시녀마저도 조금은 놀란 눈치였다.

“누이, 재상 대인보다도 돈이 많네.”

서봉추가 웃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가장 값나가는 게 목숨이잖아요.”

정교랑이 일어나며 말했다.

목숨? 세 사람은 정교랑을 쳐다봤지만 시녀는 퍼뜩 깨달았다.

“아, 아씨, 뭔지 알겠어요.”

시녀는 예의도 잊고 소리쳤다. 아씨께서 하신 모든 일이, 이제 보니 이걸 위해서였구나!


주육낭은 술을 아예 동이 째 들고 입에 들이부었다. 진 공자가 지팡이로 주육낭을 후려치는 바람에 주육낭의 옷으로 술이 쏟아졌다.

“뭐야? 또 같이 퍼마시려고?”

주육낭이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진 공자는 그 말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게 왜 내 말을 안 들어? 기어이 쫓아가서 시비를 걸다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때릴 수도 없고 욕할 수도 없으면서. 치욕을 자초한 셈이잖아.”

“그 애가 우리한테 시비를 건 거지! 무슨 원한이 그리 대단하다고 끝도 없이 이래?”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뭘 그리 성을 내?”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며 냉소를 지었다.

“죽을 사람이 아니면 안 고친다니. 진씨 가문에서 좀 치켜세워 주니까 제가 정말 신선이라도 된 줄 아나? 욱해서 삐딱하게 나가나 본데, 이래서 저한테 좋을 게 뭐야? 여인네가 돼서 그리 경망스러워서야 어떻게 살려고?”

진 공자는 찻잔을 들며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오라비인 자네가 지켜 주면 되지.”

“진십삼낭!”

주육낭은 분을 못 이기고 소리를 질렀다.

“농담 안 할게, 농담 안 해.”

진 공자는 곧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사실 내가 보기엔 별일도 아니야. 진짜 욱해서 오기를 부리는 건지, 정말 자신이 있는 건지 물어보면 되잖아?”

주육낭은 굳은 얼굴로 잠자코 있었다.

“내가 누굴 말하는지 알잖아. 내 앞에서 모르는 척하지 마.”

진 공자가 차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여봐라.”

주육낭이 소리쳤다. 문밖에 있던 몸종이 얼른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반근을 불러오너라.”

주육낭의 말에 몸종은 멈칫했다.

“공자님, 어느, 반근이요?”

몸종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주육낭은 술잔을 꽉 쥐어 으스러뜨리며 이를 갈았다.

“그 애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작심하고 움직였어!”

언제 어디서나 남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일깨워 주려는 것 같았다.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존재감을.

주육낭이 탁자로 시선을 옮겼다. 맞은편의 진 공자는 차를 우리고 있었다. 주육낭의 시선을 의식한 진 공자가 웃음을 지었다.

“이 차는 맛이 없어. 나도 술을 마셔야겠네.”

진 공자가 눈썹을 꿈틀이며 말했다. 주육낭이 굳은 얼굴로 진 공자를 노려봤다.

“너희 육공자의 반근을 불러오너라.”

진 공자가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돌려 문가에 있는 몸종에게 명했다. 몸종이 네 하고 대답한 후 뒤돌아 나갔다.

-풍문-

정월의 거리는 인파로 북적였다. 가난하든 부자든, 좋은 옷을 입었든 그렇지 않든 다들 깔끔한 행색이었다. 얼어 죽지 않기 위해서기도 했지만 새해의 길운을 위해서기도 했다. 관부에서 담벼락이나 다리 어귀, 다리 밑에 살던 거지들을 쫓아낸 터라 거리도 모처럼 깨끗했다.

“경성이 크긴 크네요. 북적북적해요.”

몸종은 놀란 표정으로 감탄했다. 오늘은 날씨가 맑았다. 두꺼운 두봉으로 몸을 감싸고 두모까지 쓴 데다 두 손에 손난로까지 쥐고 마차에 앉아 있으니 더없이 따스했다. 기분이 좋아서인지 몸이 따뜻해서인지 그 소박하고 눈에 띄지 않는 외모에서도 생기가 느껴졌다.

몸종은 행인들을 쳐다봤고, 행인들도 몸종의 일행을 쳐다봤다. 검은 당나귀가 끄는 마차였다. 옆에는 노복이 마차를 몰며 걸어가고 있었는데 나이는 많아도 정정해 보였다. 볼품없는 행색이었지만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기백이 느껴졌다.

“반근, 경성엔 아직 들어가지도 않았어.”

노복이 고개를 돌리고 웃으며 말했다.

몸종은 아, 하는 소리를 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아직 경성에 들어가지도 않았다고요? 그럼 여기는……·.”

“여긴 경성 밖이야. 저 앞을 봐라.”

노복이 채찍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저기가 성벽이야, 경성 성벽. 저 성벽을 지나야 경성에 들어가는 거지.”

몸종이 몸을 곧추세우고 쳐다봤다. 눈앞에도 집들이 늘어서 있었지만, 더 멀리 내다보니 과연 반짝이는 성이 있었다. 웃으며 앞쪽을 가리키던 노복이 문득 멈칫하더니 채찍을 들고 있던 손을 내렸다.

“도련님, 오셨습니까?”

노복이 반가운 얼굴로 소리쳤다. 도련님? 몸종은 얼른 고개를 돌렸지만 눈에 들어온 건 모르는 사람이었다. 누군가가 마차 옆으로 와서 섰다.

마흔다섯쯤 되어 보이는, 마른 체격의 중년 사내였다. 평범한 차림의 푸른색 옷이라 눈에 띄는 행색은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올곧고 박학다식해 보이는 기질이 있었다. 글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에게선 느껴지지 않는 분위기였다.

“아버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중년 사내가 단정히 예를 올렸다. 세간에서 장강주 선생으로 불리고, 삼천 제자를 거느린 장순, 장자연이었다. 서생들은 장순의 얼굴 한 번 뵙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고 대화라도 나눌라치면 감격해 어쩔 줄 몰랐지만, 노복과 몸종은 차분한 표정이었다.

“노태야, 노야께서 마중 나오셨어요.”

몸종이 얼른 고개를 돌려 휘장을 걷었다. 마차 안에 있던 노인이 쳐다보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근이 노야를 뵈옵니다.”

몸종은 그제야 예를 올렸다. 장순은 몸종을 힐끔 보더니 놀란 눈빛을 드러냈다.

“소심은 노태야께서 다른 이에게 주셨어요. 이 애는 그분께서 노태야께 주셨고요.”

노복이 웃으며 설명했다. 몸종이 장순에게 다시 한번 예를 표했다. 장순은 고개를 끄덕인 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장순은 마디뼈가 툭 튀어나온 커다란 손으로 말고삐를 잡아 부친의 마차를 직접 몰았다. 몸종과 노복은 마차를 따라 옆에서 걸으며 경성으로 향했다.

장씨 저택은 시끄러운 번화가의 골목 안에 있었다. 피로가 싹 가신 모습의 장 노태야가 자리에 앉아 차를 마셨다. 옆에는 아들과 손자들이 있었다.

“할아버지, 또 어디로 놀러 다녀오셨어요? 어떻게 새해에도 안 돌아오세요.”

맏손자는 부친을 쏙 빼닮은 얼굴이었다. 아직 이십 대 초반이었지만 또래보다 조금 더 나이가 있어 보였다.

“산수를 즐기며 자유롭게 돌아다녔지. 망신살 뻗치는 일도 있었고.”

장 노태야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돈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산양현에 발이 묶여 있었다.”

장순 부자가 깜짝 놀랐다.

“할아버지.”

손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했다.

“그래도 재미있었어.”

장 노태야가 아들과 손자를 바라보며 웃었다.

“내가 자리를 오래 비운 동안 경성에 재미있는 일은 없었고?”

“폐하의 건강이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이황자께서도 공부를 시작하셨고요.”

장순이 말했다.

“이황자께선 올해 여섯 살이니 공부를 하실 때가 됐지.”

장 노태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신선하다고 할 일도 아니었지만 묻는 사람이나 대답하는 사람이나 진지했다.

황제에겐 황자가 둘뿐이었는데 대황자는 귀비 소생이고, 이황자는 품계가 낮은 비빈 소생이었다. 새해가 되면서 하나는 열한 살, 하나는 여섯 살이 됐다. 아직 어린 나이라고는 하나 조당에서는 벌써 국본을 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황제는 병약했다.

“폐하께서 아버지의 진급을 준비하셨어요.”

손자가 말을 보탰다. 장 노태야가 그러냐는 눈빛으로 장순을 쳐다봤다.

“너더러 이황자를 가르치게 하시려고?”

장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사양했습니다. 과거에 응시할 서생들에게 경문을 가르치기로 했는데, 말에 신용이 없어서야 쓰겠습니까.”

장 노태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참, 할아버지, 재미있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손자가 무언가 떠올랐는지 소리쳤다.

“여봐라, 내 서재에 가서 차정사 작품을 가져오너라.”

차정사 작품? 장 노태야는 영문을 몰라 했다.

“할아버지, 얼마 전에 누가 차정사에 글씨를 남겼습니다. 한번 보세요. 분명 걸작이라고 하실 겁니다.”

손자는 신이 나서 말했지만 장순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장순은 바른 서체를 중시하고 육예(六藝)를 고루 아낄 뿐 어느 하나에 푹 빠지는 성격이 아니었다. 잠시 후 사환이 잘 표구한 족자를 가져오자 손자가 받아 조심스레 펼쳤다.

“이게 그 무명씨가 쓴 글자라고?”

일어나 족자를 받아 들고 보던 장 노태야는 흠칫 놀란 표정이었다. 손자가 웃으며 설명했다.

“어떠세요? 할아버지, 훌륭하죠? 새로운 서체가 다섯 종인데, 고상하면서도 힘이 있고, 아름다우면서도 소탈하며 대범하니 저마다 독특한 멋이 있습니다.”

문이 열리고 몸종이 쟁반을 받쳐 들고 들어왔다. 동시에 은은한 향이 퍼졌다.

“노태야, 간식 드세요.”

몸종이 말했다.

“반근, 이리 오너라.”

장 노태야가 손짓했다. 반근은 쟁반을 내려놓고 장 노태야 뒤로 갔다.

“이 글씨를 봐라.”

장 노태야가 말했다. 옆에 있던 장순 부자는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장 노태야가 몸종을 교환한 사실은 모두가 알았다. 일개 몸종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소심은 장 노태야를 오래 모신 아이였다. 착하고 영리하여 무척 아끼는 아이였는데 갑자기 바꿔 버렸다고 해서 뜻밖이라 여기던 차였다. 이 아이에게 글씨를 보라고 하시다니, 시, 서, 화에 능한 아이인가?

“노태야, 뭐라고 쓰여 있는 거예요?”

몸종이 물었다. 장순은 다행히 침착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아직 수양이 부족한 손자는 실소를 터뜨렸다. 손자는 고개를 살짝 숙이다가 앞에 놓인 쟁반에 시선이 꽂혔다. 청자로 된 네모난 접시 위에는 참깨를 묻힌 황금빛 공 모양 간식이 놓여 있었다. 저게 무슨 간식이지?

“‘산사는 매화가 피기를 기다릴 뿐이네’라고 쓰여 있구나.”

장 노태야는 그중 한 부분을 손으로 가리켰다.

“반근, 이 ‘기다린다’는 부분 글씨를 봐라. 눈에 익지 않느냐?”

몸종은 다시 한번 골똘히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태야, 전 먹을 거라면 같은 음식에서도 다른 점을 찾아낼 수 있지만, 글씨는 도저히……·.”

몸종이 웃었다. 내가 잘못 봤나? 장 노태야는 다시 글씨를 쳐다봤다. 강주 현묘관에서 본 ‘태평’이라는 글자와 비슷해 보이는 건 왜일까? 고개를 숙여 다시 쳐다봤다. 비슷하긴 했지만 이 글씨가 더 잘 쓴 글씨인 건 분명했다. 더구나 그 낭자는 아직 강주에 있을 테니, 차정사 벽에 글씨를 남겼을 린 없지 않은가. 장 노태야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훌륭한 글씨구나, 훌륭한 글씨야. 아직 여린 면이 있지만 결코 천박하지 않아. 무엇보다도 새롭고 신선하구나.”

장 노태야는 감탄하며 쟁반으로 손을 뻗었다.

“자, 간식 맛 좀 봐라. 반근이 아주 맛있는 간식을 만들었어.”

장순은 하나를 집어 맛만 봤지만, 손자는 어려워하지 않고 두 개를 집어 먹었다.

“네, 맛있네요. 진짜 새로운 맛이에요.”

손자가 칭찬하며 몸종을 보고 물었다.

“이건 이름이 뭐냐?”

“그냥 기름과자예요.”

몸종이 웃으며 대답했다.

“산양현에서 반근이 간식을 만들어 판 덕에 간신히 살았다.”

장 노태야는 웃으며 자신도 하나 집어 먹었다. 이제 보니 찬모였구나. 손자는 퍼뜩 깨달았다.

“아버지, 어지럼증은 좀 괜찮으십니까?”

장순이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많이 좋아졌어. 이젠 거의 도지는 일이 없구나. 다 반근 덕분이지.”

장 노태야가 웃으며 말했다. 장순 부자가 몸종을 쳐다봤다.

“많이 드시면 병이 도지는 일이 없으시거든요.”

몸종이 웃으며 말했다. 먹는 것으로 병을 고친다? 말을 야무지게 하네. 장순 부자는 웃어넘겼다.

같은 시각 진씨 저택의 진 노태야도 간식을 먹고 있었다. 점점 숙련된 솜씨로 튀겨내는 참새 요리는 먹음직스럽고 맛도 좋았다. 진 노태야가 다시 젓가락을 가져다 대는데, 누군가가 접시를 휙 가져갔다.

“할아버지, 정 언니가 튀긴 거 많이 드시면 안 된댔어요.”

진단랑이었다.

“하나만 더 먹자, 하나만.”

진 노태야가 웃으며 말했다. 진단랑은 상의의 여지가 조금도 없다는 듯 고개를 홱 돌리며 접시를 꽉 붙잡고 내주지 않았다. 그때 진소가 들어오자 진 노태야는 웃으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아버지.”

단랑이 소리쳐 부르며 일어나더니 손을 벌리고 한 바퀴 빙 돌았다.

“보세요. 어머니가 지어 주신 새 옷이에요.”

진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드러냈다. 엄한 아버지가 보일 수 있는 최대의 감정 표현이었다.

“정 언니의 옷을 따라 만들었어요.”

진단랑은 우쭐한 투로 말했다.

“십팔랑도 한 벌 있고 저도 한 벌 있어요. 이거 입고 나가면 다들 우릴 에워싸고 물어보는데 아무한테도 안 알려 주기로 십팔랑이랑 약조했어요.”

옆에 있던 여종은 진단랑의 얘기가 끝나길 기다렸다가, 진소 부자가 대화를 나누도록 진단랑을 데리고 나갔다.

“아버지, 정 낭자가 했다는 말을 들으셨습니까?”

진소가 물었다.

“죽을 사람이 아니면 안 고친다?”

진 노태야가 대꾸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하죠? 아직 어려서 그런지.”

진소는 근심스러운 말투였지만 진 노태야는 껄껄 웃었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

진 노태야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도 곧 죽을 사람이었잖느냐.”

진소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그런 원칙이 어디 있답니까. 어떻게 그런 말을 해요. 일단 고치기라도 하고 말하든가.”

진 노태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아니야. 내가 보기엔 아주 훌륭하구나. 생각해 봐. 죽어가던 날 고쳐서 이름이 조금 났고, 내가 신선 얘기를 퍼뜨리면서 이름이 멀리 퍼졌다. 주씨 저택에서는 찾아가서 고치지 않는단 말로 이름을 더 널리 알렸지. 그러더니 죽을 사람이 아니면 안 고친단 말로 소란을 일으켰어. 이제 모든 게 준비됐으니, 동풍만 불면 된다.”

진소가 멈칫했다. 그럼 이 모든 게 그 어린 낭자의 계획대로 착착 진행된 것이다? 나이 어린 처자의 경솔한 허언이 아니라? 정말 그럴까? 아니면 그냥 우연?

진소는 침묵을 지켰다.

“모친을 여의고 부친에게 버림을 받은 데다 바보로 알려진 외로운 여인이다. 의지할 곳이 없으니 친족을 떠나 살아갈 수도 없어.”

진 노태야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진소도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본 바에 따르면 확실히 기구하고 가엾은 낭자였다. 진 노태야가 갑자기 씩 웃었다.

“명성이 있다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명성이요?”

진소는 부친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를테면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의술을 가졌다는 명성 말이다. 이제 분위기는 한껏 띄워졌으니 곧 죽을 사람만 찾아오면 되겠구나. 동풍이 부는 순간, 그 여인은 경성에서 만만치 않은 인물이 될 거야.”

거기까지 말한 진 노태야는 또 씩 웃었다.

“상경한 지 불과 달포 만에 이만한 일을 해내다니, 이것만 봐도 인물이지.”

“그런데 그런 사람이 나올까요? 그리고 만에 하나 못 고치면요?”

진소가 물었다. 늘 안정을 추구하는 진소였다. 매사에 주도면밀했고 조금이라도 소홀한 부분이 있으면 절대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진 노태야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니 그 어린 낭자가 인물이라는 거다. 재주와 지략을 갖춘 데다 필사적이기까지 하니, 실로 보기 드문 인재야.”

똑똑한 사람은 누구보다 목숨을 소중히 여겼기에 위험을 무릅쓰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낭자는 달랐다.

고치지 못할 경우 명성이 사라지는 것은 물론이요, 지금보다도 못한 상황이 된다. 그런 일을 벌이지 않고 얌전히 있으면 진 노태야를 고친 일만으로도 평생 안온하게 살 수 있지 않겠는가. 최소한 혼사에서 적잖은 도움이 될 터였다. 여인이 좋은 집으로 시집가면 평생 근심의 반은 사라진다고 했다.

하지만 그 여인은 거기서 그칠 수 없는 듯했다. 희망을 남에게 거느니 자기 자신을 믿으려는 것 같았다. 그런 사람들은 남을 믿지 않고, 모든 걸 자신의 손아귀에 장악하려 하는 법.

어렸을 때부터 몸이 불편하고 버림까지 받았으니 그럴 수밖에. 그런 생각을 하던 진 노태야는 아쉽다는 투로 말했다.

“정말 궁금하구나. 그 낭자는 대체 어떤 고인을 만났던 걸까?”

진 노태야가 진소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병주로 사람을 보내 알아보는 게 어떻겠느냐?”

“그 도사들은 전부 뿔뿔이 흩어져서 지금 찾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곤 그 낭자와 접촉이 별로 없었던 이들뿐입니다. 물어봐도 똑같은 말만 하고요. 나머지 사람들은 아직 찾는 중이라 어떤 분을 만난 건지 현재로선 알 길이 없습니다.”

진소의 말에 진 노태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천천히 알아보도록 하자.”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반근은 두려움에 떨며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자네는 저 애를 어찌 세탁방으로 보낸 거야?”

진 공자는 앞에 있는 몸종을 보며 미간을 찌푸리고 주육낭에게 물었다. 반근은 동상으로 부르튼 손을 얼른 소매 속으로 넣었다.

“공자님과 무관한 일이에요. 소인이 자원해서 갔어요.”

반근이 말했다. 주육낭은 신경 쓰지 않았다.

“물어볼 거면 빨리 물어봐.”

싫은 기색을 감추지 않은 목소리였다. 반근은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반근, 그게 말이다.”

진 공자는 주육낭을 노려본 후 몸종을 보며 친근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람들이 너희 아씨의 말을 못 믿어서 문제가 생겼어. 이래서는 안 될 것 같아 너에게 물어보려고 불렀다. 오해인지 아닌지……·.”

“오해예요, 분명 오해일 거예요. 저희 아씨는 절대 남을 안 속이세요.”

진 공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반근이 말했다. 절대 남을 안 속인다라. 옆에 있던 주육낭은 냉소를 지었다. 너무 잘 속이는 거겠지.

“너희 아씨가 의술을 펼칠 때 무슨 원칙이 있느냐? 이를테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반근이 말을 이어받았다.

“네, 있어요. 저희 아씨께선 절대 진료하러 찾아가는 일이 없으시고, 죽을 사람이 아니면 안 고치세요.”

반근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역시, 그랬군. 진 공자는 놀란 눈치였다. 그 여인은 매사 제멋대로 같지만, 어느 것 하나 흐트러짐이 없구나. 일거수일투족 하나하나가 황당해 보여도 그 어떤 허점을 찾을 수 없어.

“이루의 밝은 눈과 공수자의 뛰어난 기술이 있어도, 원을 그리는 기구와 자를 쓰지 않으면 네모와 원을 그리지 못한다(離婁之明 公輸子之巧 不以規矩 不能成方圓. 맹자) 하였지.”

진 공자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랬던 게로군.”

진 공자가 반근을 쳐다보며 불쑥 말했다.

“반근, 넌 여기서 자유롭지 않으니 나와 함께 가자.”

반근이 고개를 숙이고 예를 올렸다.

“감사합니다만, 소인은 가고 싶지 않아요.”

시녀의 거취는 시녀 뜻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진 공자가 물어서도 안 되는 말이었고, 시녀가 대답해서도 안 될 말이었다. 진 공자는 웃음을 지었고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었다.

“물러가거라.”

반근은 예를 표한 후 여전히 겁먹은 모습으로 물러났다.

밤의 어둠이 주씨 저택을 뒤덮었지만, 정월이라 여기저기에 등불이 켜져 있어 저택은 대낮처럼 밝았다. 반근은 여느 때처럼 정교랑의 마당 밖에 있는 커다란 나무 뒤에 서서 아직 문을 닫아걸지 않은 마당을 쳐다봤다. 반근은 나무껍질을 붙잡고 멍하니 마당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회랑 아래에서 여인 하나가 나왔다. 교차하는 명암 속에서 아리따운 형체가 드러났다. 저게 바로 그……· 반근이구나. 반근은 몸을 바짝 웅크리고, 문 너머에서 뭐라 말하는 시녀를 쳐다봤다. 두 여종은 공손한 기색을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한 후 서둘러 문밖으로 걸어 나왔다. 반근은 얼른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이 늦은 시간에 반근 낭자가 뭘 하려는 거지?”

“뭘 하든 우린 시키는 일이나 서둘러 하자.”

두 여종이 웃고 떠들며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가면서 마당 문을 닫은 탓에 반근의 시선이 가려졌다. 잠시 멍하니 있다가 뒤돌아 발걸음 내딛던 반근이 비틀거렸다. 추위 속에 서 있었던 탓에 발이 꽁꽁 언 것이다. 반근은 허리를 숙이고 한참을 주무르며 발을 녹인 후에야 어깨를 감싸 안고 자신의 거처로 뛰어갔다.

돌아가던 반근은 야간 순찰을 맡은 여종을 마주쳐 검문을 받기도 했다. 방으로 돌아와 보니 이미 문이 잠겨 있었다. 반근은 큰 소리를 내지 못하고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한참 만에 욕설과 함께 문이 열렸다. 이미 불이 꺼진 방을 걸어가다가 무언가에 부딪쳤다. 또다시 욕설이 들린 후에야 방 안이 고요해졌다.

날이 밝았다. 마차 한 대가 모퉁이를 돌아 멈춰 섰다.

“큰 도련님, 셋째 도련님.”

시녀가 휘장을 들며 소리치더니 마차에서 내려 예를 표했다. 범강림과 서무수가 나란히 다가왔다.

“누이가 온 거야?”

두 사내가 마차를 쳐다보며 물었다. 하지만 마차 안에서 여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요. 아씨께서 이 음식을 갖다 주라고 하셨어요.”

시녀가 웃으며 대답했다. 범강림과 서무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이한테 그 일은 얘기가 거의 다 됐다고 전해. 언제 계약을 쓰느냐만 남았어.”

서무수가 말했다. 다시 말해 돈은 언제 마련되냐는 뜻이었다. 시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예를 표한 후 돌아갔다.

사람과 마차가 스쳐 지나갔다. 거리를 걷던 한원조가 걸음을 멈췄다.

“원조, 무슨 일이야?”

동료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방금 그 몸종을 본 것 같아.”

한원조가 뒤쪽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마차는 벌써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 사라진 후였다.

“몸종이라니?”

동료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냐.”

한원조는 그저 웃고는 앞장서 걸어갔다. 동료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따라가려는데, 갑자기 거리가 소란스러워졌다.

“비켜라, 비켜.”

어느 댁 호위가 몽둥이를 높이 쳐들고 큰 소리로 호령하며 길을 열고 있었다. 거리의 행인들이 재빨리 비켜섰다. 맞아 봤자 재수 없는 건 자신이었다. 호위를 시켜 길을 열 정도면 보통 신분이 아닐 테니 억울해도 발고하긴 힘들었다.

“저게 누굽니까?”

한쪽 옆으로 비켜선 한원조와 동료가 물었다.

“외지 분이시오?”

옆에 있던 사람이 두 사람을 쓱 쳐다보며 물었다.

“과거 보러 온 수재구먼. 경성에 왔으면 대갓집 표식 정도는 외워 둬야지.”

한원조와 동료가 서로를 쳐다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어르신, 저게 어느 댁 표식인데 그러십니까?”

두 사람의 물음에 노인은 자신의 식견을 뽐내려는 듯 우쭐해 대답했다.

“잘 들으시오. 저건 동(童) 내한 댁 마차라오.”

노인은 무언가 떠오른 듯 쑥덕거리며 웃었다.

“동 내한이 또 종유(鐘乳: 춘약)를 하도 먹어서 제정신이 아닌가?”

내한(內翰)은 내제인 한림원의 학사로 황제를 지근거리에서 보필하며 조서의 초안을 쓰는 직책이었다. 한원조도 종유에 대해 알았다. 집안 웃어른 중에도 복용하는 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나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금석(金石) 단약은 부잣집에서나 먹을 수 있었다.

“종유는 삼천 냥이라지.”

노인은 고개를 내저으며 자리를 떴다. 경성에서는 딱히 드문 일도 아니었다. 한원조와 동료는 서로를 쳐다보며 웃고는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거리는 다시 원 상태로 돌아갔다.

내달리던 마차는 어느 저택 앞에 멈춰 섰다. 대문 앞으로 나와 초조한 기색으로 기다리고 있던 사내들은 마차가 멈춰 서자 우르르 달려갔다. 사내들이 소리쳤다.

“이 대인, 이 대인.”

마차의 휘장이 올려지고 아이가 먼저 내렸다. 이어 이 태의가 비틀비틀 마차에서 내렸다.

“어서요, 어서.”

마중 나온 사람이 재촉했다.

“서두르지 마십시오.”

사람이 늙으면 동작도 느려지는 법이다. 사람들은 들쳐 업고 달려가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지만, 노인은 태의국 한림의관(翰林醫官)이었다. 태후가 자색 예복까지 내린 의관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마당 안에는 곡소리가 요란했다.

“울긴 뭘 울어! 불길하게!”

대청에 있던 사내가 나와 소리치자 마당에 있던 여종들과 몸종들은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이 태의가 안으로 들어갔다. 경황이 없다 보니 대청에 있던 여인들도 자리를 피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이 대인, 우리 노야께서 왜 이러시는 거죠?”

동 내한의 부인이 눈물을 흘리며 이 태의를 안내했다. 이 태의가 방 안으로 들어가 보니 오십 대의 뚱뚱한 사내가 침상에 반듯이 누워 있었다. 사내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온몸을 떨며 쉰 목소리를 냈다.

이 태의는 가까이 다가가는 대신 곧장 주위부터 둘러봤다. 예상대로 옆에 있는 탁자에 비단 함이 올려져 있고, 그 안에는 도자기 병이 쓰러져 있었다.

“또 종유를 복용하셨습니까?”

“네, 남쪽에서 새로 가져온 거예요.”

동 부인이 눈물을 닦으며 대답했다.

“아주 좋은 거였는데, 드신 지 며칠도 안 돼서 갑자기 저리되셨어요.”

이 태의는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말했잖습니까. 그런 물건은 안 드시는 게 가장 좋다고요.”

“대인, 노야는 다리에 병이 있는데 그 약이 아주 잘 들었어요. 그걸 안 드시면 걸을 수가 없었다니까요.”

동 부인이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이 태의는 고개를 가로젓고, 여전히 침상에 누워 쉰 목소리로 괴상한 소리를 내는 동 내한을 쳐다봤다. 아이가 약상자를 열어 건넸다. 이 태의는 금침 하나를 꺼내더니 침상 앞에 꿇어앉아 한 손으로 동 내한의 머리를 붙잡고 한 손으로 침을 찔러 넣었다.

방 안에 소리가 뚝 멈췄다.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신의네요, 신의.”

밖에서 감탄 어린 말들이 쏟아졌다.

“신의는 무슨.”

이 태의는 그렇게 중얼거린 후 일어서서 침상에 누워 몸을 떨고 있는 동 내한을 바라봤다.

“겸손의 말씀이세요, 대인.”

동 부인이 얼른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옆에 있던 아들들도 예를 표하며 감사를 전했다.

“고마워할 것 없습니다. 후사를 준비하십시오.”

이 태의의 말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헉, 숨을 들이마셨다. 다들 놀란 표정이었다.

“대인!”

방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방법이 없어요. 체통을 지켜 떠나실 수 있도록 침을 놓았을 뿐입니다. 저리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다 죽는 건, 실로……·.”

이 태의는 고개를 내저었다. 생사의 갈림길을 여러 번 목격한 태의였기에 별다른 감흥이 느껴지진 않았다. 이 태의가 아이에게 손짓했다.

“아니면 다른 의원을 불러 보시든지요.”

태의국의 태의도 도리가 없다는데 어디서 의원을 불러온단 말인가. 동씨 가문 사람들의 얼굴은 사색이 됐다. 부친을 구할 도리가 없는 이상, 이제는 한 치의 소홀함도 없이 장례를 치르는 것이 중했다. 동씨 가문 아들들은 웃어른을 모셔 오고, 외지로 나간 형제들에게 서신을 보내느라 분주해졌다. 밖에 있던 여인들은 소식을 듣고 또다시 통곡하기 시작했다.

“세상에나. 언니들, 우린 이제 어쩌면 좋아요?”

고운 외모의 이십 대 첩실 몇 명이 부둥켜안고 와들와들 떨었다. 동 내한이 살아 있는 동안엔 아무 걱정 없이 살 수 있었지만, 동 내한이 죽고 나면 이제 집안에서 아무것도 아닌 처지가 될 터였다. 동 부인은 이들을 팔아 버리거나 남에게 선물로 줄 것이다. 남에게 가는 건 상관없지만 아이를 낳은 첩실들은 자식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

첩실들은 터져 나오는 울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노야께서 돌아가신다니, 고칠 수 없는 병이라니……·. 첩실 하나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다들 그 얘기 못 들었어?”

첩실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때가 어느 땐데 쓸데없는 소리를 해? 남 얘기 할 때가 아니잖아. 내 코가 석 자인데.”

“아니, 그게 아니라 죽을 사람이 아니면 안 고친단 사람 얘기 말이야! 그럼 노야는 돌아가실 분이니 고칠 수 있잖아.”

울고 있던 사람들이 뒤에서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뭐라고? 죽을 사람이 아니면 안 고친다니?”

첩실은 안쪽을 쳐다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부인, 부인.”

자리에서 일어난 첩실이 소리치며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노야께 그 사람을 불러 주세요.”

장례를 논하고 있던 이들은 깜짝 놀라 쳐다봤다가 첩실인 걸 확인하고 벌컥 성을 냈다.

“부인, 신선을 만났다는 정 낭자 말이에요.”

첩실은 쫓겨나기 전에 얼른 소리쳤다.

“진 상공 댁 노태야를 고친 정 낭자요. 강주에서 온 이 진인의 제자 말이에요. 그 사람은 고칠 수 있어요. 곧 죽을 사람만 고친다고 했대요!”

동씨 가문 사람들도 그런 풍문을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귀담아듣지는 않았다.

“웬 소란이야.”

침상 앞에 꿇어앉은 동 부인이 가쁜 숨을 몰아쉬는 남편을 끌어안고 통곡했다.

“부인, 정말이에요. 바깥에 소문이 파다해요. 부인, 일단 해 보세요.”

첩실은 바닥에 머리를 쾅쾅 찧고 울며 애원했다.

“부인, 노야의 치료를 맡겨 보세요. 부인도 노야께서 이렇게 돌아가시는 건 원치 않으시잖아요. 고칠 수 있다는데 일단 시도는 해 봐야죠!”

어차피 노야가 죽으면 끝날 운명인데, 이런 말로 부인의 심기를 건드린들 무엇이 대수겠는가. 반면 노야의 병이 낫는다면 부귀영화를 계속 누릴 수 있을뿐더러 자신은 큰 공을 세운 사람이 된다.

과연 동 부인은 그 말에 대노했고 아들들도 얼굴이 굳어졌다.

“천것 같으니라고. 여봐라, 끌어내라.”

아들들이 소리쳤다.

“부인, 신선을 만난 정 낭자가 있잖아요. 다른 사람은 못 고쳐요. 그 낭자는 죽을 사람만 고친다고 했어요. 제발 부탁드려요. 일단 노야의 진료를 맡겨 보세요.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야죠.”

첩실은 동 부인에게 달려들어 다리를 붙잡고 늘어지며 애원했다.

“노야께서 돌아가시면 우리도 좋은 날 끝이에요. 셋째와 넷째 아드님도 음보(蔭補: 조상의 덕으로 벼슬을 얻음)로 벼슬에 나가야죠.”

그 말에 대청에 있던 사내들의 안색이 굳어졌다. 동 내한의 신분이면 자손들에게 음보 혜택을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장자까지만 가능했고, 나머지 아들은 글공부를 하여 과거를 보거나 부친이 더 공로를 세울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과거를 위한 글공부는 힘들었다. 동 내한이 천자를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하라고는 하나 공을 세우는 게 어디 마음처럼 쉬운가. 이력이 쌓일 때까지 기다리는 방법이 유일했다. 그럼 자식들이 과거에 급제하지 못해도 음보로 관직에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죽는다면, 자손들의 앞날은 부친이 살아 있을 때보다 못할 게 뻔했다.

“정 낭자가 정말 고칠 수 있을까?”

아들 하나가 물었다. 첩실은 기뻐하며 머리를 쾅쾅 찧었다.

“한번 해 보세요.”

첩실의 애원에 그 아들이 다른 사람들을 쳐다봤다.

“그럼 불러 보자.”

나이가 많은 이가 결정을 내렸다.

“잠깐.”

동 부인이 소리치는 소리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첩실은 다시 울음을 터뜨렸고 아들들도 머뭇거리며 모친을 설득하려고 했다.

“그 낭자는 병자를 볼 때 원칙이 있단다. 찾아가서 치료하는 건 절대 안 해.”

동 부인은 울며 침상을 가리켰다.

“어서 너희 아버지를 모셔 가라!”

대청의 문이 벌컥 열렸다. 주 노야와 주 부인은 웃어른으로서 이토록 제멋대로인 정교랑을 더 이상 가만둘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터였다.

다만 정교랑은 다른 정상적인 아이들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웃어른 앞에서도 공손함이 없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밝고 상냥하게 대하지도 않을뿐더러 불안한 표정도 찾을 수 없었다. 자리에 앉아 예를 표한 후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묻는 말에만 대답할 뿐 뭔가를 묻거나 먼저 말하는 일이 없었다.

그런 반응에 주 노야는 가슴속 가득한 울분을 표출하지 못한 채 그저 한숨을 토할 뿐이었다.

“교교, 네가 어릴 때 병을 앓자 네 부친과 조부는 널 못마땅하게 여겼다. 우리가 아니었다면 오늘의 네가 있었겠느냐? 이제 널 데려오기까지 했는데 왜 이렇게 말썽을 피워? 우린 그렇다 쳐도, 네 외조모가 너한테 잘해 준 건 다 잊은 거야?”

주 노야가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어찌 이리 소란을 피워!”

“소란 피운 적 없어요.”

정교랑은 책장을 한 장 넘기며 대꾸했다. 글자나 몇 자 아는지 모를 애가 책 보는 꼴 하고는. 주 노야는 언짢은 듯 콧방귀를 뀌었다.

“교교, 경성에 온 지도 꽤 됐는데 집 생각 안 나?”

주 부인이 화제를 돌리자 정교랑은 주 부인을 힐끔 쳐다봤다.

“안 나요.”

진짜 양심도 없네. 아예 주씨 가문에 들러붙으려는 거야. 주 노야와 주 부인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래, 경성은 대보름 행사가 아주 떠들썩하지. 대보름 구경하고 돌아가.”

주 부인이 웃음을 짜내며 말했다. 정교랑은 주 노야 내외를 힐끔 쳐다본 후 잠자코 있었다. 그때 문밖에 있던 여종이 다급히 들어왔다.

“노야, 부인, 큰일 났습니다. 누가 쳐들어왔어요.”

뭐라고? 주 노야와 주 부인이 기겁했다. 경성에서 남의 집에 멋대로 쳐들어가는 상황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그럴 리가! 주씨 가문은 죄를 지은 적 없다고!

“노야, 노야. 동 내한 댁에서……·.”

곧이어 달려 들어온 건 집사였다. 어찌나 허둥댔는지 모자까지 떨어뜨리며 달려왔다. 집사의 손에는 명첩이 들려 있었지만, 집사가 미처 고하기도 전에 네다섯 사람이 들것을 들고 들이닥쳤다.

“비켜요, 비켜.”

사람들이 소란을 피웠다. 동 내한이 누군지 주 노야가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이들은 벌써 대청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세상에, 죽은 사람을 이리로 데려오면 어떡해요!”

주 부인이 소리를 질렀다. 들것 위의 사내는 안색이 창백하고 두 귀가 뒤로 축 늘어져 있어 금방이라도 죽을 사람으로 보였다. 연륜이 있고 웃어른들의 임종을 여러 번 지킨 주 부인은 대번에 상태를 파악했다. 정초부터 사람이 죽는 것도 불길한데, 그것도 남의 집 사람이라니!

“아니, 이게 뭐 하는 짓이오?”

명첩을 들고 왔던 집사는 사람들 틈에 저만치 뒤로 밀린 후였다. 집사가 명첩을 들고 소리쳤다.

“노야, 동 내한께서 정 아씨께 치료를 받겠답니다!”

주씨 가문 사람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사내 몇 명이 읍을 했다.

“정 낭자, 저희 부친을 구해 주십시오.”

“이미 죽게 생긴 걸 구하긴 뭘 구해요? 어서 가서 칠성판(죽은 이를 안치하는 침상. 임종에 즈음하여 숨을 거두기 전에 병자를 이 침상으로 옮김)이랑 옷이나 준비해요! 밖에서 돌아가시게 할 순 없잖아요!”

주 부인이 소리쳤다.

“이 댁에선 죽을 사람만 치료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동씨 가문 자제들이 소리쳤다.

“우리가 한 말이 아니오.”

주 노야가 가장 먼저 나서며 옆을 가리켰다.

“저 어리고 무지한 아이가 농을 한 거지!”

소란스러운 실내에서 단 한 사람만은 시종일관 조용히 앉아 있었다. 고개를 든 정교랑이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으며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쳐다봤다.

“병자만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 나가요.”

“교교, 네가 미쳤구나! 이 사람은 금방 죽어! 이걸 네가 어떻게 고쳐!”

주 부인이 당황하여 소리쳤다. 주 노야도 따라 호통을 쳤다.

“소란 피우지 마라!”

동씨 가문 자제들은 자신들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여인의 모습에 의심이 들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었다. 일단 매달려 보는 수밖에. 이 여인이 못 고치더라도, 치료조차 안 받고 돌아가시게 하는 것보단 낫지 않은가. 나중에 소문이 나더라도 최소한 불효의 오명은 짊어지지 않을 것이다.

“부탁드립니다, 낭자.”

맏이로 보이는 자제가 예를 표하며 큰 소리로 말했다. 나머지 자제들도 감사를 표한 후 자리에서 물러났다. 대청에는 주 노야 내외만이 남았다.

“이 사람 죽는 거, 기다려요?”

정교랑이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난 사람이 있으면, 안 고쳐요. 죽어도, 나 원망 마요.”

죽으면 우리 탓이란 거야? 이게 무슨 논리야! 주 노야 내외는 기가 막혔다. 한편 밖으로 나간 동씨 가문 사람들은 초조해 죽으려 했다.

“노야, 부탁드립니다! 사람 좀 살려 주세요!”

동씨 가문 사람들이 소리쳤다. 분노를 숨길 수 없는 목소리였다. 여전히 대청에 서 있는 주 노야 내외를 원수 대하듯 보고 있었다. 주 노야 내외는 분통이 터졌지만 하는 수 없이 밖으로 나왔다. 시녀가 문을 닫았다.


  • 작가의 말: ‘종유는 삼천 냥’이라는 표현은 백거이의 시 중 ‘종유는 삼천 냥이요, 금비녀는 열두 개라(鐘乳三千兩 金釵十二行)’라는 구절에서 인용했습니다.

-쉬운-

“집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게 생겼네. 이 일을 어쩌면 좋아!”

주 부인은 초조해서 발을 굴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저 화근덩어리!”

주 노야 역시 부아가 치밀었다.

“누굴 욕하는 겁니까?”

동씨 가문 자제들이 주 노야를 에워싸며 소리치자 주 노야는 흠칫 놀랐다.

“이봐요, 주씨. 우리가 여기로 온 건 조상님들 덕인 줄이나 알아요!”

한 자제가 소리쳤다.

하긴 그랬다. 한림원의 학사이자 천자의 근신인 동 내한은 주 노야 같은 하급 무관으로서는 얼굴을 뵙기조차 힘든 상대였다. 집까지 왕림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다만 살아서 왔다면 영광이었겠지만, 죽어서 오는 건 재수 없기밖에 더할까. 저 화근덩어리는 절대 남겨 둘 수 없다! 절대!

“마차 준비해서 당장 데려가요, 당장. 무슨 일이 있으면, 정씨 가문을 찾아가고요!”

주 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쳤다.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우리 주씨 가문은 모르는 일이오. 당신들이 쳐들어온 거지.”

주 노야도 언짢은 기색으로 동씨 가문 사람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때 문이 열렸다. 마당에 있던 사람들은 다 함께 숨을 죽였다.

“병자의 가족분?”

시녀가 마당을 쳐다보며 물었다. 몇몇 자제들이 앞으로 나섰다.

“나다, 나.”

자제들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부친께서는……·.”

“저희 아씨는 치료비가 비싼데, 내실 수 있겠어요?”

시녀의 물음에 마당에 있던 사람들은 사레가 들릴 뻔했다. 치료비? 지금, 치료비라고 했나?

“낼게, 낼게.”

밖에서 부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얼마가 되든 낼게!”

동 부인이 첩실의 부축을 받으며 달려 들어와 눈물을 훔쳤다. 자제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어머니.”

자제들도 눈물을 흘렸다. 시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부인. 1만 관인데요. 오늘 갖다 주시면 내일 병자를 데려가실 수 있어요.”

시녀는 웃으며 살짝 예를 표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1만 관이라……·. 주 노야 내외는 입이 떡 벌어졌다. 너무 터무니없는 액수잖아. 병자는 내일 데려가라? 동씨 가문 사람들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죽은 사람을 데려가라는 거야, 산 사람을 데려가라는 거야?

“동 부인, 이런 장난에 놀아나시면 안 돼요.”

정신을 차린 주 부인이 다가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저 애는 어릴 때부터 좀 괴팍해서 우리도 도리가 없었어요. 괜한 말 귀담아듣지 마시고 어서 내한 대인을 모셔 가세요.”

“걱정 마요. 일이 생겨도 주 부인한테 죄를 묻진 않을 테니.”

동 부인 역시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맞아요. 우리 부인께선 노야를 위해 무슨 일이든 다 하실 거예요.”

첩실도 옆에서 눈물을 닦으며 거들었다. 그때 또다시 문이 열리더니 시녀가 걸어 나왔다.

“실례지만 금침 한 상자만 사다 주세요.”

시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생긋 웃으며 말했다. 마당에 있던 사람들은 거의 쓰러질 지경이었다. 병을 고치는 의원이 금침도 없어 사다 써야 한다니, 병사가 무기도 없이 전장에 나가 적을 맞이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황당한 일 아닌가! 주 노야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발을 구르고, 옷소매를 뿌리치며 가 버렸다.

주씨 저택의 마당은 등불로 대낮처럼 밝았고, 정교랑의 마당은 사람들로 더더욱 북적였다. 가족들이 치료를 지켜보는 걸 막은 데다 동 부인도 그만 쉬러 가라는 주 부인의 말을 듣지 않고 있는 터라 다들 여기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동씨 가문 자제부터 며느리, 하인들까지 전부 들락거리는 통에 얼핏 봐서는 이곳이 주씨 저택인지 동씨 저택인지 알 수 없는 지경이었다.

“확인해 보게.”

동 부인이 아들의 손에서 건네받은 어음을 시녀에게 건넸다.

“비전(飛錢: 중국 고대에 쓰인 환어음의 일종)이야. 1만 관에서 한 푼도 안 빠져.”

시녀가 받아 유심히 들여다보며 확인했다. 일개 시녀가 본다고 뭘 알겠어? 주위 사람들이 의혹의 눈초리로 쳐다봤다.

“맞네요. 복주 진주원(進奏院)의 비전이에요.”

시녀가 웃으며 문서를 받아 잘 챙겼다. 옆에 있던 주 부인은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빼앗고 싶은 표정이었다. 1만 관이라니!

“아니, 이걸 어떻게 받아.”

주 부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부인께서야 못 받으시죠. 부인이 치료하신 것도 아니잖아요.”

시녀가 웃으며 대꾸했다. 공개적으로 웃으며 칼을 꽂다니. 가뜩이나 열 받고 걱정되던 차에 주 부인은 더욱 가슴이 답답해졌다.

“약은 사 왔어요?”

시녀는 개의치 않고 밖을 보며 물었다. 동씨 가문 자제들이 입을 모아 재촉하자 곧 하인 하나가 약포를 들고 왔다.

“왔습니다, 왔어요.”

시녀는 약포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는 등불로 환히 밝혀져 있었다. 긴 그림자가 어른거리나 싶더니 곧 병풍 뒤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무슨 약을 사 오라고 한 거야?”

아들 하나가 나지막이 물었다. 하인은 영문을 모르겠는 표정이었다.

“보골지(補骨脂)와 두충(杜仲)입니다.”

동씨 가문 자제들이 한참을 기다렸지만 하인의 말은 거기서 끝이었다.

“또 다른 건?”

아들이 물었다.

“그리고 호두를 사 오랬는데……·.”

하인이 복잡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호두? 동씨 가문 자제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늘과 술도요.”

하인이 말을 이었다.

“고기는 사 오라고 안 하던?”

한 사내가 못 참고 말을 이어받았다. 동씨 가문 자제들이 눈을 부릅뜨며 노려보자 사내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관둡시다. 약을 사 오랬든 장을 봐 오랬든 알 게 뭡니까. 애초에 이 낭자를 보러 온 것 자체가 정상은 아니니 일단 기다려 보죠. 어차피 길게 기다릴 필요도 없잖습니까. 내일이면 알게 될 테니.”

두꺼운 두봉을 내오던 주씨 가문 여종들은 회랑 아래에 서 있는 주육낭을 발견했다.

“공자님, 그만 들어가 쉬세요.”

여종 하나가 커다란 두봉을 건네며 말했다.

“모친께서도 안 들어가셨잖느냐. 여긴 외간 사내들뿐이라 형수나 누이가 오기도 불편하고. 내가 있는 게 낫지.”

주육낭이 두봉을 받으며 말했다.

“만에 하나 일이 생겨도 지켜 드릴 수 있으니.”

“효심이 지극하세요.”

여종들은 예를 올린 후 여인들에게 옷을 가져다주러 갔다. 밤바람이 불었다. 사람들은 대낮처럼 환한 밤을 불안에 떨며 보냈다.

날이 밝을 무렵, 진소는 후원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진 노태야는 지팡이를 짚고 두 시녀와 함께 산책 중이었다.

“아버지, 아버지.”

진소가 부르는 소리에 진 노태야는 걸음을 멈췄다.

“동풍이 불었습니다.”

진소의 말에 진 노태야는 멈칫하다가 실소를 터뜨리더니 곧 웃음을 거뒀다.

“누구더냐? 정초부터 딱하기도 하지.”

진 노태야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동 내한입니다.”

진소가 나지막이 고했다.

“그럴 줄 알았다. 금석을 먹다니 죽을 짓을 사서 한 게야.”

진 노태야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명이 길구나. 정 낭자한테 달려갔으니.”

“금석을 먹다가 목숨을 잃은 이가 한둘이 아닌데, 살릴 수 있을까요?”

진소는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당연하지.”

진 노태야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하며 손을 뻗어 아들을 토닥였다.

“고인이 제자를 세상으로 내보냈을 땐, 명성을 망치라고 보낸 게 아니야.”

“고인 얘기가 나와서 말씀인데, 어제 새로운 소식이 왔습니다.”

“그래?”

진 노태야는 바로 관심을 보이며 옆에 있던 시녀에게 지팡이를 건넸다.

“가자, 들어가서 얘기해.”

불과 하룻밤이었지만 소식이 빠른 사람들은 벌써 다 알고 있었다. 주씨 저택 앞으로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측문이 열리면서 마차 한 대가 빠져나오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마차는 빠르게 빠져나갔다.

“곡소리 들렸소?”

“남자요? 여자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