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75)

“뭐라고요?”

정교랑이 물었다. 저쪽에서 주육낭에게 현재의 대치 상황을 설명하던 관리가 이쪽을 쳐다봤다. 저 여인이 여긴 뭐 하러 왔지? 주육낭을 따라온 것 같은데, 무슨 사이야? 주육낭이 여인을 말리거나 꾸짖는 대신 고개를 돌리자 관리는 얼른 눈치를 챘다.

“일가족 네 명을 인질로 잡고 있어 강공을 펼치긴 힘듭니다.”

관리가 공손한 말투로 고했다.

“사람만 내놓으면 아무 죄도 추궁하지 않겠다고 해요. 돈도 줄 수 있고요.”

시녀가 말했다.

중요한 건 지금 같은 상황에서 안에 있는 사람이 그 말을 믿겠느냔 말이다. 여인들이 이런 일을 어찌 알겠나. 하지만 관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했다.

“처음에, 그자들을 알아본 사람이, 뭐라고 했죠? 내가, 그 사람을 만나 봐야겠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금전 골목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기에 곧 유곽 여주인이 불려 왔다.

“저희도 몰라요, 저희는 장사하는 처지니 사람 가리지 않고 손님이면 다 받죠. 유괴범인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유곽 여주인은 울고불고하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어떻게 생긴 사람들이죠?”

정교랑이 말을 끊으며 물었다.

“울지 말고 똑바로 말해요.”

시녀가 유곽 여주인을 다그치며 정교랑의 말을 받아 물었다. 앙칼지긴. 유곽 여주인이 입을 삐죽거렸다.

“별다른 건 없었고 외지 사람인데 험상궂게 생겼어요. 키가 크고 수염이 났더라고요. 애가 막 우니까 그 사람들이 협박했어요. 뭐라더라. 울지 말라면서, 울면 다신 너희 아씨를 못 볼 거라고……·.”

유곽 여주인은 과장을 섞어 말했다. 그놈들이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흉악했는지 말해야 협박을 당한 자신들이 면죄부를 받을 테니까.

“몇 사람이었죠?”

정교랑이 말을 끊으며 물었다.

“일곱 명쯤이었나……·.”

유곽 여주인이 기억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정교랑은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곽 여주인을 밀어제치고 곧장 골목 안쪽을 향해 걸어갔다. 시녀는 놀라면서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따라갔다. 주육낭이 정교랑의 팔을 확 붙잡았다.

“적당히 해.”

주육낭이 소리를 낮춰 말했다.

“아둔하네요.”

“그래, 너 잘났다!”

정교랑의 말에 주육낭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대꾸했다.

“그건 납치가 아니에요. 도움이죠.”

주육낭은 정교랑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마당 안에 있던 셋째가 갑자기 허벅지를 탁 내리치며 소리쳤다.

“이런! 오해였어!”

사내들이 고개를 돌렸다.

“오해라니?”

첫째가 물었다.

“문 열어요.”

셋째가 대답도 없이 대뜸 소리치자 다들 놀라 얼어붙었다.

“셋째 형님, 이대로 패배를 인정하잔 겁니까!”

사내들이 노려보며 소리쳤다. 셋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패배를 인정하자는 게 아니야. 이건 그냥 웃어넘길 오해라고!”

셋째가 다시 소리쳤다.

“문 열어!”

이번에는 셋째의 목소리가 아니라 밖에서 들리는 여인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집 안팎이 일순 조용해졌다.

“문 열어.”

대문 안팎에서 동시에 소리쳤다.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금가아가 벌떡 일어섰다.

“아씨!”

금가아가 소리치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셋째가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열자, 언제나처럼 두봉으로 몸을 감싼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이 서로를 쳐다봤다. 사내가 먼저 웃음을 터뜨리자 정교랑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고개를 까닥였다. 뒤따라왔던 주육낭은 그 광경에 표정이 굳어졌다.

정교랑은 문을 열고 모두에게 들어오라고 했다.

“우리 집이긴 한데, 실은 저도 처음 와 봐요.”

그러면서 손을 들어 금가아를 두어 번 때렸다.

“너 이 녀석, 왜 멋대로 돌아다녀! 깜짝 놀랐잖아!”

이제 마음을 놓게 된 금가아는 우는 대신 헤헤 웃었다. 정교랑이 한 번 더 들어오라고 권하자 사내들은 얼른 예를 표했다.

“저희가 어찌 감히요. 아씨, 들어가십시오. 들어가세요.”

정교랑이 이번에는 주육낭과 진 공자를 쳐다봤다.

“마음이 안 놓이면, 들어와서 기다려도 돼요.”

그 말에 사내들이 놀란 눈빛으로 주육낭과 진 공자를 바라봤다. 마음이 안 놓여? 남녀가 한 방에 있어서? 보아하니 두 소년은 준수하고 귀티가 흐르는 게 이 아씨와 비슷한 분 같네. 친척이거나 아니면……·. 사내들은 어쩐지 멋쩍은 마음이 들었다.

“아닙니다. 저희는, 저희는 안 들어가도 돼요.”

첫째가 말했다. 주육낭은 냉소를 던진 후 옷소매를 뿌리치며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들어가요.”

정교랑이 손짓을 하며 재차 권했다. 사내들은 영문을 모르겠는 눈빛으로 주육낭과 진 공자의 뒷모습을 본 후, 안으로 들어갔다. 정교랑과 사내들이 자리에 앉았다. 이곳에 익숙한 금가아가 시녀를 도와 모두에게 물을 올렸다.

“준비를 못 했네요. 차도 없어요.”

시녀가 웃으며 말하자 사내들은 얼른 답례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사내들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머물기 좋은 곳입니다, 좋은 곳이에요.”

한 사내가 칭찬했다.

“그러게요. 이제 좀 경성답네요. 어젯밤 그 유곽은……·.”

맞장구를 치던 사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사내가 등짝을 후려치면서 말이 끊겼다. 다른 사내들의 노기 어린 눈빛에 사내는 목을 움츠리고, 얼른 물을 마시며 입을 다물었다.

-의남매-

“아씨,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의 무지로 아씨께서 걱정하셨겠네요. 폐를 끼쳤습니다.”

셋째가 진지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예를 올리며 말했다. 정교랑은 자세를 바로 하고 의관을 정돈한 다음, 사내들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큰절을 올렸다. 사내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몸을 옆으로 틀거나 비켜섰다. 일부는 허둥지둥 답례를 올리기도 했다.

“아씨, 이러시니 저희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첫째가 소리쳤다. 시녀도 놀란 눈치였다. 언제나 차분하고 예의 바른 아씨였지만 누군가에게 이리 큰절을 올린 건 처음이었다. 따지고 보면 아씨야말로 이 사내들의 은인이 아닌가. 은인이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 예를 표하다니?

정교랑은 예를 마친 후에야 고개를 들었다.

“정교랑이, 오라버니들의 큰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막 예를 표하려던 셋째를 비롯하여 사내들이 멈칫했다. 뭐라고?

“말도 안 됩니다!”

안에서 터져 나온 소리가 마당까지 전해졌다. 겨울인데도 아직 얼지 않은 화단 물길에서 나는 물 흐르는 소리가 대나무와 돌 사이를 맴돌며 퍼졌다.

사내들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여인을 보며 상기된 얼굴로 소리쳤다.

“아씨는 제 목숨을 구한 은인이십니다. 이건 법도에 어긋납니다.”

“맞습니다. 저희가 어떤 놈들이고 아씨가 어떤 분인데요.”

다른 사내들도 맞장구를 쳤다. 단정히 앉은 정교랑은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사내들의 반대와 거절의 말을 가만히 들었다. 요점은 간단했다. 아씨는 자신들의 은인이고 자신들과 격이 다른 분이니, 감히 그럴 순 없다는 것.

가만히 있는 정교랑을 보며 시녀도 무언가를 눈치채고 더 이상 놀라지 않은 채 조용히 물을 더 따라 주었다. 밤새 술을 퍼마시다가 잠에서 깨자마자 도망치고 이리저리 숨었던 터라 사내들은 마침 갈증이 났다.

“아무튼 아씨, 다시는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씨는 관두고 아씨의 시중을 드는 이 누이만 해도 저희와 비교할 바가 안 됩니다.”

사내는 물잔을 들어 벌컥벌컥 마시고는 시녀에게 내밀었다.

“고맙소, 누이. 한 잔만 더 주시오.”

시녀는 웃으며 말없이 물을 따라 주었다. 셋째가 모두를 향해 손을 흔들며 입을 다물라는 신호를 보냈다. 실내가 조용해졌다.

“아씨, 사실 이 일은 저희가 아씨를 도운 게 아닙니다. 저희가 아니었다면 금가아는 진작 아씨를 찾았을 거예요.”

셋째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 일은 담아 두지 않으셔도 됩니다.”

역시 이 사내가 똑똑하네. 시녀가 고개를 들어 셋째를 쳐다봤다. 정교랑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후 고개를 들어 셋째를 봤다.

“그건, 괜한 생각이에요. 난 그저, 오라버니를 갖고 싶을 뿐인걸요.”

오라버니가, 갖고 싶을, 뿐이다……·. 사내들은 흠칫 놀랐다. 정교랑이 사내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은혜를 갚는다지 않았어요? 누이로 맞아 보살펴 주면서, 평생 은혜를 갚는 게, 더 성의 있지 않나요?”

그런가? 사내들이 서로를 쳐다봤다. 듣고 보니 그건 또 그렇네. 근데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단 말이지.

“그럼 큰형님이 결정하십시오.”

사내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큰형이라 불린 사내는 셋째와 시선을 주고받았다. 셋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아씨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받아들이겠습니다.”

첫째가 말했다. 정교랑이 사내들을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오라버니들.”

이제 막 발을 들인 집이었지만, 집 안엔 웬만한 물품이 다 갖춰져 있었다. 작은 서재에는 종이와 붓, 먹은 물론이고 향까지 있었다. 시녀가 물건들을 가져왔다.

“아씨, 직접 쓰시겠어요?”

시녀의 물음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오라버니들 쓰는 걸 도와.”

시녀는 네 하고 대답한 후, 종이와 붓을 사내들 앞으로 가져왔다.

“내가 하겠소.”

셋째가 손을 내밀었다. 시녀는 셋째가 글공부를 한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당연히 글도 쓸 줄 알겠거니 여기고, 그 말대로 낮은 탁자를 밀어준 후 본인은 먹을 갈았다. 셋째가 붓을 들어 의남매를 맺는 글을 썼다.

“오늘, 무원산 형제 범강림, 범석두, 서무수, 서사근, 서납월, 범삼축, 서봉추가 조상님 앞에 고합니다.”

“오늘 강주 정가(程家) 교랑이 친족 앞에 고합니다.”

안에 있는 향로에 향을 꽂은 후, 정교랑과 셋째가 그 앞에 나란히 서서 각자 손에 든 종이를 펼쳐 들고 읽었다. 정교랑이 이름을 하나하나 읽을 때마다 그 이름에 해당하는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자신임을 알렸다. 정교랑은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낭송을 마치고 머리를 조아린 후 종이를 향로에 넣고 태웠다.

“이제, 이 누이가, 오라버니들을 뵈옵니다.”

정교랑이 다시 한번 예를 표했다. 갑자기 누이가 생긴 사내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하며 예를 올렸다. 셋째 서무수가 손을 뻗어 양쪽을 붙잡아 주었다. 이쪽에서는 시녀가 금가아를 데려와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공자님들을 뵈옵니다.”

당황한 사내들이 펄쩍 뛰었다. 공자님이라는 호칭은 평생 처음 듣는 것이었다. 다만 서무수만은 단정히 앉아 절을 받았다.

“이 서무수는 부모님을 일찍 여의었는데, 24년을 살다 보니 누이가 생기는 날도 오네.”

서무수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요. 저도 18년을 살면서……·.”

서봉추도 얼른 따라 소개했다. 갑자기 금가아가 놀라는 소리를 내고는 서봉추를 쳐다보며 물었다.

“봉추 형님, 열여덟밖에 안 됐어요?”

우락부락하게 생긴 서봉추는 머리가 크고 어깨가 둥글었으며, 덥수룩한 수염은 머리카락처럼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서봉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열여덟이 뭐? 내가 이래봬도 사내대장부라고.”

금가아는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근데 우리 아버지보다도 나이 들어 보여요.”

“네 아버지는 나 같은 대장부가 아니겠지!”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딱딱하고 서먹하던 분위기를 녹였다. 조금씩 어색함을 내려놓는 사내들을 보며 정교랑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이제, 오라버니가 생겼다.

노둣돌(말에 오르내릴 때 편하도록 대문 앞에 놓는 큰 돌)에 기대 채찍을 이리저리 흔들던 주육낭은 길을 오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진 공자가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로 주육낭을 쿡 찔렀다.

“아, 왜? 자네는 왜 아직도 여기 있어? 어서 돌아가.”

주육낭이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진 공자가 웃으며 손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자네를 찾나 본데.”

골목으로 나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던 시녀는 이쪽에 있는 주육낭을 발견하고 웃으며 다가왔다. 주육낭은 몸을 곧추세우고 채찍을 휘휘 저으며 시녀를 쳐다봤다.

“급히 나오느라 돈을 안 가져왔네요. 공자님, 돈 좀 꿔 주실 수 있어요?”

시녀가 예를 표한 후 웃으며 말했다. 진 공자는 웃으며 고개를 돌렸고, 주육낭은 그 시녀의 웃음을 보며 냉소를 지었다.

“싫다고 하면 어쩔 건데?”

시녀는 초조해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상관없어요.”

시녀가 고개를 돌려 진 공자를 쳐다봤다.

“여기 공자님은 기개가 남다르시죠. 혹시 돈 좀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너희 아씨께서 날 그리 치켜세우는데, 당연히 빌려줘야지.”

진 공자는 하하 소리 내 웃었다.

“천금을 주고 사는 게 웃음이라지. 난 천금을 주고 칭찬을 샀으니 그 값으로 충분하구나.”

진 공자가 사환에게 돈을 가져오라는 눈짓을 했다. 하지만 이미 주육낭이 시녀에게 돈이 담긴 쌈지를 던져 준 후였다. 시녀가 손을 뻗어 쌈지를 받았다.

“고맙습니다, 공자님. 아씨께선 여기 공자님들과 식사를 마친 후에야 돌아가실 거예요. 공자님 먼저 가세요.”

말을 마친 시녀는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공자님들? 그 무뢰한들이 공자님이라고? 사실 진짜 무뢰한은 나라고 모욕하는 건가? 주육낭은 미간을 찌푸렸다.

“봐, 간단한 말로 사람을 모욕한다니까.”

하지만 진 공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말로 트집 잡을 사람은 아냐. 공자님이라고 불렀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진 공자는 저쪽에 있는 저택을 쳐다보며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아쉽네, 들어가 볼 인연이 없으니.”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었다.

“어이쿠, 미안해라. 나 때문에 미인과 가까워지지도 못 하고.”

진 공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지난번에 내가 좋은 곳을 알아냈어. 아주 신기한 음식을 먹는 곳이지. 우리 먹으러 가세. 자네 누이는 자네를 아끼지 않지만, 난 자네를 아끼잖아.”


오시(午時), 정교랑의 저택 안. 반쯤 열린 종이 문 사이로 실내의 맛있는 냄새가 퍼져 나왔다. 안에 있는 사내들은 그릇을 받쳐 들고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었다. 금가아가 고기 한 접시를 끌어안고 부엌에서 뛰어왔다.

“누이가 있으니 정말 좋네.”

서봉추가 음식을 입에 물고 솥에 있는 고기를 젓가락으로 건지며 말했다.

“진짜 맛있다.”

게걸스럽게 먹는 다른 사내들과 달리 큰형 범강림과 셋째 서무수는 점잖은 편이었다.

“누이, 이제 그만해. 이거로 충분하다니까.”

시녀와 함께 접시에 고기와 요리를 나눠 담던 정교랑은 그 말에 이쪽을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오라버니, 어려워 말아요. 충분하긴요.”

범강림과 서무수가 옆에서 게걸스럽게 먹는 형제들을 쳐다봤다. 접시며 그릇을 금세 싹싹 비울 것 같은 모습에 두 사내는 멋쩍게 웃었다.

“그리고, 나도 기쁜걸요.”

정교랑은 고개를 숙이고 채소들을 가지런히 잘라 준비했다.

“이렇게 떠들썩한 건, 오랜만이에요.”

사 온 채소와 고기를 바닥낸 후에야 점심 식사가 끝났다.

“좋은 술이 없어 아쉽네요.”

정교랑의 말에 범강림이 웃으며 옆에 있던 술 주전자를 탁 쳤다.

“이게 좋은 술이 아니면 뭐야. 누이가 계속 그리 말하면 우리가 불편해.”

정교랑은 웃으며 잠자코 있었다.

“기분 좋은 일이 있으면 물을 마셔도 취하는 법이지.”

서무수가 고개를 젖혀 가며 술잔을 깨끗이 비웠다. 정교랑이 일어섰다.

“그럼, 난 이만 가 볼게요.”

사내들은 어리둥절해하며 따라 일어섰다.

“그래, 그래, 이만 가 볼게. 누이한테 너무 오래 폐를 끼쳤네.”

“아니요, 오라버니들은 여기서 지내요. 난 외조모님 댁에서 지낼게요.”

사내들은 멈칫했다가 곧 손사래를 쳤다.

“어떻게 그래. 누이의 음식을 먹고 누이의 술을 마신 것도 모자라, 누이의 집에서 지내다니.”

사내들의 말에 정교랑이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누이라면서요. 가족이 됐는데, 서먹하게 굴 것 없잖아요?”

서무수가 사내들의 말을 제지하고 진지한 얼굴로 정교랑을 쳐다봤다.

“누이, 아까 금가아한테 얘기 들었어. 원래 여기서 지내려고 했다면서.”

수염이 덥수룩한 얼굴이었지만 눈빛은 반짝이고 있었다.

“우릴 오라비라 여긴다면 무슨 일이든 편히 말해. 오라비들 걱정시키지 마시고.”

금가아를 ‘구출’하는 과정에서 이쪽저쪽의 사람들이 섞여 난장판이 되자 진씨 가문 사람들은 금가아에게 푸념을 늘어놓았다.

“아씨도 빼앗겼는데 너까지 잃어버리면, 우리 진씨 가문은 경성에서 얼굴을 못 들 거야.”

“이게 다 주가 놈 때문이다. 그놈이 아수라장을 만드는 바람에 금가아 널 까맣게 잊었어.”

“너희 아씨는 협박에 못 이겨 그리로 가신 거야.”

사내가 뜻밖에도 하급 사환들이 금가아를 붙잡고 한 말을 귀담아들은 터였다. 나머지 사내들도 정신을 차리고 서무수와 정교랑을 차례로 바라봤다.

“무슨 일이야? 누가 누이를 괴롭히기라도 한 거야?”

다들 얼굴이 시뻘게져 묻자 정교랑이 웃음을 지었다.

“오라버니들, 괜한 걱정이에요.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요. 남들이 내가 괴롭힘을 당한다고 여길 뿐이죠.”

정교랑은 서무수를 보며 다시 생긋 웃었다.

“말했잖아요. 난 그저, 오라버니가, 갖고 싶을 뿐이라고.”

서무수 등은 정교랑이 시녀와 함께 마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며 배웅했다. 이 저택에 남은 금가아는 안팎을 정리하느라 분주했다.

“셋째야, 누이의 일을 함부로 추측하는 건 안 좋아.”

범강림이 불쑥 입을 열자 서무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난 그저, 이 일이 좀 불가사의해서 그랬어요.”

확실히 불가사의한 일이긴 했다. 서북에서 도망쳐 나온 후 셋째는 병으로 사경을 헤매게 됐다. 그러다가 길에서 우연히 만난 아씨 덕에 목숨을 건졌고, 그 아씨는 돈을 받기는커녕 돈을 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생명의 은인과 결의를 맺고 의남매가 되었다.


아씨는 외모가 출중했다. 말한 적은 없지만 가세도 대단할 것이고,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의술까지 지녔다. 자신들 같은 천것에게는 하늘처럼 높은 분이니, 교류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누이가 됐다? 말한들 믿을 사람이 있을까? 본인들도 믿어지지 않는데.

“무수, 말했잖아. 오라버니가 갖고 싶을 뿐이라고. 괜한 추측 마. 누이가 우리에게 원하는 게 있다면……·.”

거기까지 말한 범강림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우리가 뭘 해 줄 수 있겠나.”

범강림이 거친 두 손을 벌리며 말을 이었다.

“이 목숨? 어차피 누이가 구해 준 거니까, 줘도 그만이야.”

범강림이 서무수를 쳐다보며 덧붙였다.

“자네 목숨은 우리 게 아니라고.”

서무수도 웃음을 터뜨렸다.

“네, 내가 괜한 생각을 했나 보오. 책 몇 권 읽었다는 자부심으로 이치에 안 맞는 일을 보면 괜히 넘겨짚으려 들어 긁어 부스럼일 때가 많습니다. 내가 향칠을 의심하지만 않았어도 그런 오해는 안 했을 거 아닙니까.”

서무수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뒤에서 형제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와, 방이 엄청 많네. 한 사람당 하나씩 써도 되겠어요.”

“잘됐다, 이젠 넷째가 코 고는 소리 안 들어도 되잖아.”

“거 무슨 소리요, 코 골아서 잠 못 자게 하는 게 누군데!”

“난 이 방 쓸게요.”

“여긴 내가 쓸 거야. 넌 다른 방 찾아봐.”

범강림과 서무수는 서로를 쳐다보며 웃었다. 이제, 누이가 생기고 집도 생겼다.

저녁해가 서산으로 넘어갔을 무렵, 주육낭과 진 공자는 그릇과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옆을 보니 접시가 여러 개 쌓여 있고 노구솥 안에는 탕이 끓고 있었다.

“재미있긴 하네.”

주육낭의 말에 진 공자가 웃었다.

“풍치 있으면서 소탈하기도 하고.”

“근데 이름을 잘못 지었어. ‘과로신선(過路神仙: 길 가는 신선)’이라고? 무슨 이름이 이래, 우습잖아.”

옆에서 시중을 들던 사환이 웃었다.

“공자님, 이게 길 가던 신선이 주고 간 비방으로 만든 음식이라서 그래요. 관리인 어르신이 미처 음식 이름을 못 물어서 이런 이름을 붙였죠.”

주육낭이 웃음을 터뜨렸다.

“사기꾼들이 허풍은.”

주육낭이 몸을 일으키자 진 공자도 사환의 부축을 받아 일어섰다. 바깥쪽 대청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화로 주변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둘러앉아 있었고, 실내는 음식 냄새와 노구솥에서 나는 수증기로 자욱했다. 문밖에서는 마차가 끊임없이 들어왔다.

“자리가 없어요, 자리가 없다고요.”

입구에 있던 점원은 밀려드는 사람을 막으며 계속 소리쳤다.

“내일 일찍 오세요, 내일요.”

문 앞에 걸린 깃발은 새것으로 바뀌었고, ‘신선거(神仙居)’라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먹는 방법이 좀 신선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름까지 바꾸다니. 아버지 대에서 물려준 이름까지 버리면서.”

주육낭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채찍을 받은 후 몸을 훌쩍 날려 말에 올랐다.

“사람 욕심이란 게 원래 끝이 없잖나.”

진 공자는 깃발을 올려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몰며 앞서가는 주육낭을 향해 소리쳤다.

“육낭, 이리 맛있는 음식이면 자네 누이도 좋아할 거야. 내가 여기서 자네 누이한테 식사 대접을 하면 틀림없이 좋아하겠지?”

주육낭이 고개를 돌려 진 공자를 유심히 쳐다보며 물었다.

“정말 그 애를 좋아하게 된 건 아니지?”

등을 내걸 시간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온 주육낭은 곧장 정교랑의 거처로 향했다.

“공자님.”

문밖에 선 여종이 불안해하며 예를 올렸다. 정 아씨가 들어온 후, 집안 식구들은 한시도 마음 편할 때가 없었다. 들어오던 첫날부터 추운 겨울날 부인을 반나절이나 밖에 세워 두더니, 육공자가 형장을 지고 죄를 묻는 소동을 벌이게 했다. 간신히 날이 저물자 이번에는 사환이 없어졌다며 자그마치 사흘이나 법석을 떨었으니……·.

아이고, 언제나 집안이 좀 잠잠해질지. 육공자가 오다니 이번엔 또 무슨 소동이 벌어질지 모르겠네.

다행히 주육낭은 문 안으로 발을 들이는 대신 마당 문 앞에 서서 안을 쳐다보기만 했다. 방 안에는 등불이 따스하게 켜져 있었고, 마주 앉은 두 사람의 모습이 비쳤다. 바둑을 두며 담소를 나누는 듯했다.

“거기 갈 필요 없어. 자네 누이는 자네 집으로 돌아갔을 거야.”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난 알고 싶거든. 그래서 아는 거야. 자네는 알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 모르는 거고. 자네가 생각을 못 하는 게 아니라.”

“육낭, 자네 누이를 멀리하면 더 소원해지기만 해. 소통할 생각을 해야 자네를 쳐다보고 자네의 말을 들으려 하겠지. 안 그럼 답이 없어. 다시는 횡포 부리지 마.”

진 공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주육낭은 주먹을 꽉 쥐고는 뒤돌아 성큼성큼 걸어갔다. 여종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당직 교대를 하고, 나머지 사람들도 흩어졌다.

얼마 안 가 또 다른 형체가 마당 문 앞에 나타났다. 그런데 이번에 나타난 형체는 누구에게 들킬세라 이리저리 몸을 숨겼다.

아씨, 이거 드시겠어요? 맛이 없으세요? 아씨, 이렇게 쓰는 거 맞아요?

반근은 문에 비친 두 사람의 모습을 쳐다봤다. 어디선가 본 광경이고 언젠가 들어 본 대화 같았다. 다시 아씨를 보게 됐다. 이제 아씨 곁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었지만. 반근은 손수건을 꽉 쥐며 터져 나오는 울음을 삼켰다. 시야가 흐릿해진 반근은 차가운 벽을 손으로 짚으며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거 누구요?”

문 안에 있던 여종이 눈치를 채고 소리를 빽 질렀다. 반근은 황급히 뒤돌아 후다닥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여종이 등을 들고 나와 문밖을 살폈지만 겨울바람 소리만 쉭쉭 들릴 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말썽을 일으키는 사람이 온 것도 모자라, 이젠 부정한 것들까지 달려드는 건가? 여종은 오싹함에 몸서리를 치며 생각을 떨치려는 듯 퉤퉤 침을 뱉고 문단속을 했다.

날이 환히 밝았다. 주 부인이 대청에 앉아 한참을 기다린 끝에야 정교랑이 방에서 나왔다.

“교교, 조봉대부(朝奉大夫) 댁의 부인께서 친히 찾아오셨더구나. 어서 가서 그 댁 어린 낭자가 무슨 병인지 좀 봐.”

주 부인의 말에 정교랑은 주 부인을 힐끔 쳐다보고는 자리에 앉았다.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예도 올리지 않고 문후도 여쭙지 않는군. 관두자, 그런 법도를 알기나 하는지 모르지. 주 부인은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러니 널 모셔 가려는 게지.”

주 부인이 상냥한 말투로 말했다.

“안 가요.”

정교랑은 시녀가 건네는 물을 받으며 대꾸했다.

“왜 안 간다는 건데?”

주 부인은 초조했다.

“내가, 왜 가야 하는데요?”

정교랑이 물었다.

“넌 병을 치료할 줄 알잖아. 너는 신의고.”

“난, 신의가 아니에요. 어떤 병은, 고칠 줄 알지만, 어떤 병은, 못 고쳐요.”

정교랑은 고개를 가로젓고는 천천히 물을 마셨다.

이게 무슨 말이야!

“교교.”

주 부인은 바짝 다가앉으며 손을 뻗어 정교랑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뒤끝 있게 굴지 말고.”

정교랑은 물잔을 내려놓고 주 부인을 보며 말했다.

“틀렸어요. 뒤끝이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당신들이죠.”

주 부인이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정교랑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부인, 저희 아씨는 오늘 진 노태야 댁에 약을 지으러 가셔야 해요. 번거로우시겠지만 마차 좀 준비해 주세요.”

시녀가 정교랑의 손을 부축하며 말했다.

나더러 마차를 준비하라고? 주 부인은 기가 막혀 시녀를 쳐다봤다. 내가 누군데! 너희는 누구고!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마차를 준비하지 않으면? 진 노태야 댁에 왕진을 가지 말란 소린데? 내가 진 노태야 댁에 왕진 가는 걸 막는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어찌 됐소?”

답답한 마음에 실내를 이리저리 서성이던 주 노야는 주 부인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얼른 다가서며 물었다.

“오씨 댁 부인이 아직 기다리고 있소. 서둘러 짐을 챙겨 따라가라 하시오.”

주 부인은 안색이 어두웠다.

“서두르긴요, 가서 빌기라도 하란 말이에요?”

“무슨 말이오?”

주 노야가 멈칫하며 인상을 썼다.

“안 가겠대요.”

주 부인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안 가?”

주 노야는 잘못 들었나 하고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왜 안 가겠단 거요?”

“안 가겠다는데 그걸 내가 어찌 알아요.”

주 부인이 억울하단 표정으로 덧붙였다.

“묶어서 강제로 데려가기라도 하게요?”

감옥에 처넣는 것도 아니고 병을 치료하는 일이니 강제로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망할 계집.”

사태 파악을 한 주 노야는 분노로 이를 갈았다.

“방금 오 부인한테는 진 노태야 댁에 왕진 갔다고 말씀드렸어요. 오늘은 돌려보냈다 치고, 내일은 어쩌죠? 오 부인은 돌려보냈지만 다른 부인들이 또 찾아오면요?”

주 부인이 자리에 앉았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그래, 다른 일도 아니고 병을 고치는 일이다. 욕하고 윽박지르고 협박해서 데려간다 한들, 고칠 수 있는 병이어도 고칠 줄 모른다고 잡아떼면 도리가 없지 않은가.

“그 애를 이 집에 데려온 게 엄청난 경사인 줄 알았는데, 이게 뭐예요? 우린 이제 완전히 진씨 가문 눈 밖에 났어요. 진 노태야의 병이 호전되면서 그 애 명성이 더 높아졌으니 찾아오는 사람은 점점 많아지겠죠. 우릴 찾아오는 것이니 우리 주씨 가문의 일인데, 그 망할 계집이 번번이 안 간다고 해 봐요. 다들 우리한테 분풀이할 거라고요!”

주 부인이 머리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그럼 어쩌겠소. 내쫓기라도 해?”

주 노야가 언짢은 말투로 대꾸했다.

“내쫓으면 우리 주씨 가문이 뭐가 돼요?”

뭐가 되냐고? 여기저기서 욕을 먹겠지!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거지? 주 노야의 표정이 굳어졌다.

“지금으로선 그 계집을 때릴 수도 혼낼 수도 없소. 어르고 달래서 비위를 맞춰야 그나마 쓸모 있게 굴겠지.”

“그 바보가 아주 상전이 됐네요.”

주 부인이 팔걸이 책상에 기대앉아 한숨을 토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주 노야 내외의 당초 예상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대체 어디서 잘못된 거야?


중문 밖으로 나온 시녀는 준비된 마차를 보고 쿡 웃음을 터뜨렸다.

“공자님, 또 우리 아씨의 마부가 되어 주시려고요?”

주육낭은 고개를 돌려 시녀를 힐끔 보고는 옆에 있는 정교랑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곧이어 고개를 돌린 주육낭은 손에 든 채찍을 흔들며 잠자코 있었다. 정교랑 역시 별다른 말 없이 시녀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 올랐다.

정교랑이 왔다는 소식에 진씨 가문 사람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소식을 듣고 문밖으로 마중을 나오던 진씨 가문 공자들은 마차에 앉은 주육낭을 보며 냉소했다.

“주 공자, 들어가서 차라도 한잔하겠나?”

“됐어, 여기 주 공자는 마차를 지켜야지. 한눈팔다 사람 잃어버리면 어떡해.”

주육낭은 조소와 비아냥거림을 가볍게 무시하고 마차를 몰아 자리를 떴다. 정교랑은 문 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신경 쓰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진씨 가문 여인들이 나와 반갑게 맞이했다. 특히 가장 먼저 뛰어나온 건 단랑이었다.

“언니.”

쪼르르 달려온 단랑이 정교랑의 팔을 잡아 흔들었다.

“할아버지랑 나랑 언니 보고 싶어 했어요.”

“날 안 보는 게 제일 좋아.”

정교랑이 말했다. 이때 여종들에게 둘러싸여 나온 진 부인이 정교랑에게 예를 표했다.

“마침 모시러 가려던 참이었어요.”

진 부인은 정교랑과 나란히 걷고, 나머지 낭자들은 몇 걸음 뒤에서 걸었다. 낭자들은 정교랑의 옷이며 머리 양식을 꼼꼼히 뜯어보며 속삭였다.

“왜 안 보는 게 좋다는 거야? 돈 벌면 좋잖아?”

옆에 있던 낭자가 눈을 흘겼다.

“정 낭자는 의원이잖아. 의원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누구겠어?”

낭자들은 그 의미를 퍼뜩 깨닫고 입을 가리며 웃었다.

“정 낭자도 참, 몇 마디 더 해 주면 어디가 덧나나.”

“우리가 말이 너무 많았던 거지. 열 마디를 떠들어도 진짜 핵심은 한 마디 정도잖아.”

먼저 말했던 낭자가 대꾸했다.

“그야 상대가 못 알아들을까 봐 그렇지. 그럼 오해를 사잖아.”

누군가가 반박하고 나섰다.

“오해하면 뭐?”

먼저 말했던 낭자가 쏘아붙이자 상대는 말문이 막혔다. 하긴, 오해하면 어쩔 텐가. 병이 중한데 치료할 생각이면 와서 빌지 않고 배겨?

“정 낭자를 이해하려는 사람은 그 말도 이해하겠지. 정 낭자를 이해 못 하는 사람은 정 낭자가 신경 쓸 바 아니고.”

진씨 가문의 낭자는 진 부인과 함께 진 노태야의 거처로 간 여인을 보며 감탄 어린 말을 내뱉었다.

“저리 자유롭게 살다니, 무슨 바람이 더 있을까.”

-아는 사람-

정교랑이 손을 거두자 진소 부부는 긴장한 눈빛으로 정교랑을 쳐다봤다. 진 노태야는 편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이 약을, 닷새 더 드세요.”

정교랑은 그렇게 말하며 시녀를 쳐다봤다. 시녀는 진작 지필묵을 준비해 놓고 정교랑을 보며 붓을 들었다.

“닷새 후에는 이 처방으로 바꾸시고요.”

시녀가 처방을 적어 진소에게 건네자 진소가 받으며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낭자, 뭐 먹고 싶어요? 부엌에 준비하라고 할게요.”

진 부인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고맙습니다. 일이 있어서요.”

정교랑이 작별을 고했다. 진소 부부는 아쉬운 마음에 붙잡으려 했지만 진 노태야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낭자, 바쁜 일 없을 때 자주 놀러 오시오. 어려워할 것 없소.”

정교랑이 진 노태야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교랑은 예를 표한 후 물러났다. 진 부인이 직접 배웅하러 나갔다.

진맥을 위해 자리를 비켰던 단랑이 다시 돌아왔을 무렵, 방 안에는 진 노태야와 진소, 진 사노야 형제만 남아 있었다.

“언니가 벌써 갔다고요?”

단랑은 못내 아쉬워하며 진 노태야의 팔을 잡아 흔들었다.

“할아버지, 언니한테 다시 여기 와서 살라고 하면 안 돼요?”

“단랑, 버릇없이 굴지 마라.”

진소가 고개를 내저으며 나무라자 진 노태야는 웃으며 손녀를 달랬다.

“그 낭자는 남의 집에 드나드는 걸 안 좋아한단다. 이다음에 할아비 몸이 나으면 널 낭자한테 데려가 주마.”

단랑이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요즘에 이 작품이 요즘 아주 유명합니다.”

진 사노야가 종이 한 장을 조심스레 펼치자 진소도 관심을 보였다.

“이게 요즘 떠들썩한 차정사의 그 글씨냐?”

부친과 숙부가 시와 글을 논하기 시작하자 흥미를 잃고 놀러 나가려던 단랑은 ‘차정사’라는 말에 걸음을 멈추고 쪼르르 달려왔다. 탁자 위에는 종이가 펼쳐져 있었다.

“이거 내가 지은 시예요!”

방 안의 적막을 깨고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먼저 울려 퍼졌다. 멈칫하던 진소 형제와 진 노태야는 곧 웃음을 터뜨렸다.

“단랑이 쓴 거라고? 훌륭하구나.”

진 사노야가 웃으며 말했다.

“네, 제가 썼어요. 정 언니가 수정해 줬고요.”

진단랑이 우쭐해하며 말하자 진소는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 그래. 단랑이 많이 늘었구나.”

“네, 정 언니도 잘했다고 했어요. 제가 지은 시를 직접 벽에 써 주기도 했어요.”

진단랑은 신이 나서 조잘댔다. 그때 손님을 배웅하고 돌아온 진 부인이 손짓을 하며 진단랑을 불러냈다.

“곧 새해니까 새 옷 지어야지. 치수 재러 가자.”

어린아이에게 새해와 새 옷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진단랑은 기뻐하며 밖으로 나갔다.

“어머니, 저도 정 언니 같은 옷 지을래요.”

아이의 목소리가 문밖으로 멀어지자, 방 안의 세 부자는 다시 글씨를 들여다봤다.

“시문에 어린애 말투가 남아 있긴 하네요.”

진소는 수염을 만지며 말하면서도 딸의 말이 진짜라고 여기진 않았다. 차정사에서 이 시를 봤을지도 모를 일이지. 어린애는 자기가 한 일과 본 일을 제대로 구분 못 할 때도 많으니까.

“하지만 이 글씨엔 어린애 느낌이 전혀 없어요.”

진 사노야가 말했다. 글씨를 한참 들여다본 진 노태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쉬었다.

“다섯 종 모두 처음 보는 서체구나. 하나로 합치면 오묘하고, 한 어절 한 어절에 오욕칠정이 살아 있어. 세상사를 다 겪은 노인인 듯하다가 호방한 기개를 뽐내는 소년 같기도 해. 다만 팔 힘이 좀 부족해 경지에 도달하진 않은 듯싶구나.”

거기까지 말한 진 노태야는 고개를 내저으며 감탄했다.

“이건 모사를 한 글씨라 흉내만 냈을 뿐 그 오묘함을 다 담진 못했죠.”

“그런데 누가 쓴 건지 모른다고?”

한참을 들여다보던 진 노태야의 물음에 진 사노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쉬워했다.

“자기라고 나서는 사람이 없습니다. 정말 아쉬운 일이죠.”

“과거 준비에 몰두할 생각인가 보지. 내년 3월이면 알게 될 거야.”

진소가 대꾸했다. 이리 훌륭한 서체를 가진 이라면 과거 시험에서 그 실력이 만천하에 드러날 것이다. 진 노태야와 진 사노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정말 정 낭자가 쓴 건 아닐까?”

진 노태야가 불쑥 묻자 진소와 진 사노야는 실소를 터뜨렸다.

“아버지, 그 정 낭자는 글도 쓸 줄 모릅니다.”

매번 약 처방을 쓸 때면 시녀를 시켜 쓰지 않았던가. 시중을 들었던 여종 말로는 평상시에도 시녀가 책을 읽어 주면 아씨는 가만히 들었다고 했다. 글도 모르는 것 같은데 글씨를 쓸 리가.

진 노태야도 껄껄 웃었다. 이 서체며 글씨에서 느껴지는 기품은 십수 년 갈고 닦았다고 해서 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정 낭자는 이제 겨우 열네다섯 살인데, 날 때부터 글씨 연습을 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나중에 몸이 낫거든 같이 가 보자.”

진 노태야가 탁자 위의 글씨를 보며 말했다.

정교랑이 문밖으로 나오자 멀지 않은 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주육낭이 마차를 몰아 다가왔다. 미인을 배웅하러 나왔던 진씨 가문 소년들은 주육낭의 등장에 부아가 치밀었다.

“누가 훔쳐 가기라도 하나, 사람을 모욕해도 분수가 있지. 노섬 주씨 가문은 역시 근본이 없다니까.”

소년들은 미인이 마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보며 분통을 터뜨렸다.

“딱해라, 가엾기도 하지.”

시녀는 가여워할 게 뭐 있나 생각하면서 휘장을 들어 주육낭에게 말했다.

“공자님, 죄송하지만 옥대교 집으로 데려다주세요.”

주육낭은 대꾸하지 않고 채찍을 휘둘러 출발했다. 잠시 앉아 있던 시녀는 휘장을 들어 밖을 쳐다보다가 깜짝 놀라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공자님,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창밖으로는 성문 밖의 널찍한 대로가 펼쳐져 있었다. 겨울인지라 들판은 황량했다. 모처럼 날씨가 따뜻한 날이기도 했고 일이 적은 겨울철이다 보니 성문을 드나드는 사람이 많았다. 놀랐던 시녀는 주육낭이 대꾸하지 않자 콧방귀를 뀌었다.

“여인이라 힘이 없다고 우리 아씨를 무시하네. 잘나셨어.”

시녀는 휘장을 휙 내리고 도로 앉았다. 마차 안은 고요했다. 주육낭이 손에 힘을 주어 채찍을 매섭게 내리치자 마차가 시끌벅적한 대로를 빠르게 내달렸다.

마차는 그렇게 반나절을 질주하고 나서야 멈춰 섰다.

“도착했다, 내려.”

주육낭의 말소리가 밖에서 들렸다. 시녀가 휘장을 들자 사람들로 떠들썩한 곳이 눈앞에 보였다.

“공자님, 예약은 하셨습니까?”

점원 둘이 뛰어나왔다. 하나는 예약 여부를 묻고, 하나는 말을 끌고 갈 준비를 했다. 주육낭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름을 댔다.

“신선거?”

시녀가 깃발을 읽고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씨, 왠지 눈에 익은 곳이에요.”

정교랑도 마차에서 내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공자님, 아씨, 안으로 드십시오.”

점원이 친절하게 소리쳤다. 주육낭이 막 안으로 발을 들이는데, 앞에서 나온 사람이 웬 아낙을 홱 밀쳤다.

“비렁뱅이 같으니라고, 죽고 싶어 환장했어? 여기가 어디라고 와서 행패야.”

점원들이 욕을 해댔다. 아낙은 갓난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다. 점원들이 밀치는 바람에 아낙의 머리는 산발이 되고 품에 안은 아이는 자지러지게 울었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행여 불똥이 튈세라 잽싸게 비켜섰다.

“애 아버지가 평생 여기서 일한 걸 생각해서라도 품삯을 쳐 주세요. 사람이 죽어 가요.”

바닥에 나동그라진 아낙이 울며 애원했다.

“이씨댁, 말을 그렇게 하면 안 되지. 그 집 양반이 벌써 석 달째 일을 안 나왔는데 무슨 품삯을 달랩니까? 여긴 밥집이지 자선사업 하는 곳이 아니라고.”

점원이 소리쳤다.

아낙은 아이를 끌어안고 흐느끼며 머리를 조아렸다.

“제발, 부탁드려요. 그럼 돈이라도 꿔 주세요.”

워낙 소란스러운 통에 자연스레 이목이 집중되면서 수군대는 사람이 많아졌다. 안에서 기생오라비처럼 단장한 사내와 하인 둘이 나왔다.

“웬 소란이냐.”

사내가 분노 어린 눈빛으로 호통을 쳤다.

“대인, 이대작의 처가 또 왔습니다.”

점원이 나동그라져 울고 있는 아낙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낙은 사내를 보더니 얼른 기어와 무릎을 꿇고 사내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애원했다.

“두(竇) 도련님, 도련님. 제발 부탁드려요. 우리 애 아버지가 중병에 걸렸어요. 의원을 부르도록 품삯을 계산해 주세요. 열댓 살 때부터 노태야를 모신 일을 생각해서라도 부디 살려 주세요.”

못마땅한 얼굴로 아낙의 하소연을 듣던 사내는 아낙이 붙잡고 있는 옷자락을 홱 잡아챘다. 사내는 불쾌하고 부아가 치미는 듯 아낙을 발로 걷어찼다.

“내쫓아라! 심보가 고약하구나. 뉘 집 장사를 망치려 들어!”

아낙이 발길질에 나동그라지면서 품에 안고 있던 갓난아이를 놓쳤다. 아이는 더욱 자지러지게 울어댔는데 그 울음소리가 유달리 처연하게 들렸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곁눈질을 했고, 안에 있던 사람들도 무슨 일인지 구경하려고 고개를 내밀었다.

“우리 가게가 네 서방의 공으로 잘된 것처럼 말하는구나. 일도 안 하면서 무슨 품삯을 달래? 어디서 행패를 부려!”

두칠은 옷자락을 털며 호통을 쳤다.

“어찌 여인과 어린아이를 괴롭히시오?”

한 사내가 소리쳤다. 주육낭과 정교랑은 그 소란 속에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고 안으로 들어간 후였다. 세상엔 어쩔 수 없는 일도 많은 법, 매사가 뜻대로 이루어질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안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곧 젊은 공자 하나가 일어섰다. 옆에 있던 공자들은 사내를 말리려는 듯싶었다.

“원조, 괜한 일 만들지 마.”

공자는 자신을 붙잡는 손길을 뿌리치고 성큼성큼 걸어 나와 정교랑을 스치고 지나갔다. 정교랑이 걸음을 멈췄다.

정교랑이 걸음을 멈추자 주육낭도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아씨?”

시녀가 나지막이 불렀다. 무슨 일이지?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문밖을 바라봤다.

“여인과 어린아이를 괴롭히다니요? 그럼 여인과 어린아이라고 해서 무조건 웃는 낯으로 상대하고 달라는 대로 돈을 주란 말씀입니까?”

“맞습니다, 공자님. 사정도 모르면서 말씀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

“이 여인이 행패 부린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이제 여기서 일도 안 하는데 무슨 품삯을 달란 겁니까!”

두칠과 점원들이 젊은 공자에게 따졌다.

“연유가 어찌 되었든 간에 여인과 어린아이에게 손을 대서야 쓰나.”

공자는 짐짓 예를 표하는 척하며 말을 이었다.

“‘신선거’라는 이름을 내걸고 이런 횡포를 부리면 신선이 어찌 거하시겠소?”

하여간 서생들은 융통성이 없다니까! 두칠은 미간을 찌푸렸다. 과거 시험이 다가오면서 경성으로 향하는 서생이 늘어나던 때였다.

“신선이 거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오. 공자가 상관할 바도 아니잖습니까.”

두칠은 냉소하며 손을 휘휘 저었다.

“냉큼 내쫓아. 또 소란을 피우면 공갈죄로 관아에 발고해라. 여긴 음식 파는 곳이지 자선 단체가 아니야!”

젊은 공자는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이따위로 구는 곳의 음식이 맛있을 리가 있나!”

두칠이 고개를 돌려 공자를 쳐다보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괜히 입 더럽히실 거 없어요. 고결하신 분이니 여긴 눈에 안 차시겠죠. 여기 공석이 났는데 누가 들어가시겠습니까?”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기하던 사람들이 와글와글 소리를 질렀다.

“나요.”

“여기요.”

젊은 공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두칠은 하하 웃음을 터뜨리며 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

“들어가시지요!”

일이 이렇게 되자 젊은 공자와 함께 왔던 두 사내도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문 앞에 한바탕 소란이 일더니 세 사람이 안으로 들어갔다.

“원조, 참 성격하고는……·.”

사내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원조가 두 사람을 향해 예를 표했다.

“나 때문에 흥을 깼군.”

아이를 안고 있던 아낙도 일어나 눈물을 훔치며 한원조를 향해 연신 고개를 숙였다.

“소인이 공자님의 흥을 깼네요. 소인 탓이에요.”

한원조와 사내들은 얼른 아낙에게 일어나라고 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한원조가 물었다.

“우리 남편은 어릴 때부터 여기서 숙수로 있었어요. 그러다 노태야께서 돌아가시고 지금의 대인께서 가업을 물려받으면서 이름을 바꾸고 새롭게 꾸미게 됐죠. 남편은 하필 그때 풍한에 걸려 며칠 쉬게 되었는데, 대인께서 바로 잘라 버렸고요. 울화가 치미는 바람에 병이 심해져 지금은 아예 자리보전을 하고 누웠어요.”

아낙은 아이를 어르며 목멘 목소리로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그럼 품삯을 떼어먹은 건 아니지 않소?”

한 사내의 물음에 아낙은 잠시 주저했다.

“떼어먹은 건 아니에요.”

세 사람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공연히 억지를 부린 거다? 하지만 억지를 부릴 작정이었다면 이리 순순히 시인할 리도 없는데.

“당초 노태야께선 수익의 3할을 우리 남편 몫으로 주기로 하셨어요. 그런데 노태야의 병이 중해지면서 문서로 남기기도 전에 그만……·.”

상황을 파악한 세 사람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글공부하는 서생이라고는 하나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린애는 아니었다. 사람이 떠나면 인정도 사라지는 법, 왕조가 바뀌면 신하도 바뀌는 게 세상 이치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한원조가 허리춤에서 전대를 풀더니 돈을 털어 아낙에게 주었다.

“가진 돈이 얼마 없군요. 한동안 경성에서 지낼 돈도 필요하고요. 약소하지만 이것밖에 안 되겠습니다.”

아낙은 손사래를 쳤다.

“공자님의 돈을 어찌 받겠습니까, 그럴 순 없어요. 이미 폐를 끼친걸요.”

한원조는 돈을 주려 했지만 아낙은 한사코 받지 않더니 아이를 안고 비틀비틀 걸어 자리를 떴다. 세 사람은 탄식했다.

“오늘 과로신선 맛은 못 보겠군.”

“내가 흥을 깬 탓일세.”

한원조가 미안해했다.

“자네도 참, 자네 성격을 무슨 수로 고치겠나. 원조, 글공부를 할 게 아니라 협객이 되는 건 어떤가?”

한 사내가 웃으며 한원조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아닐세. 협객은 몇 사람의 근심을 해결할 뿐이야. 부친께서 말씀하셨네. 천하 만백성의 근심을 해결하고자 한다면 글공부를 하여 벼슬길에 나가거나 학당을 열어 성현의 말씀을 전하라고.”

한원조는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넒은 경성 땅에 밥 먹을 곳 하나 없겠나. 다시 찾아보세.”

세 사람이 막 자리를 뜨려는데 누군가가 공자를 불러 세웠다. 세 사람이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리자 안에서 나온 시녀의 모습이 보였다.

“공자님.”

시녀는 웃으며 예를 표했다. 세 사람은 영문도 모르는 채로 가벼운 답례를 했다.

“실례지만 존함이 어떻게 되세요?”

시녀가 웃으며 묻자 한원조는 동료들과 시선을 주고받았다.

“소생 숙주(肅州)의 한균(韓均)이오.”

“그럼 ‘원조’는 공자님의 자(字)고요?”

시녀의 물음에 한원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동료들이 부르는 소리를 들었을 수도 있으니 이상할 건 없었다.

“좋은 자네요.”

시녀가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경성 어디에 묵으세요?”

“규원거(葵園居)라오.”

무심결에 대답하던 한원조는 깜짝 놀랐다. 말을 유도하는 솜씨가 제법이네!

“무슨 일이오?”

한원조가 의아해하며 묻자 시녀는 가만히 예를 표했다.

“공자님의 의협심에 탄복했습니다.”

시녀는 그 말만을 남긴 채 뒤돌아 자리를 떴다. 남은 세 사람은 어리둥절한 눈길로 서로를 쳐다봤다.

“원조, 세상인심이 야박하다고 누가 그러던가. 자네 행동에 감동한 사람이 많은 모양일세.”

동료가 웃으며 말했다.

“아리따운 규수가 틀림없어.”

다른 동료도 웃으며 한원조의 어깨를 툭툭 쳤다.

“과거에 급제하여 방이 붙기도 전에 사위 삼자고 달려들지도 모르겠군. 자네 조심해야겠어.”

급제자를 알리는 방이 붙을 때면 경성의 부호와 권세 있는 집안에서는 능력이 출중한 급제자를 사위로 들이곤 했다. 한원조는 웃음을 터뜨렸다. 묵는 곳을 알려준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감탄과 탄복은 바라는 바가 아니었고, 자신에게 따지고 훈계하러 오는 자가 있대도 두려울 건 없었다.

“허튼소리 말고 속히 가세, 가자고.”

시녀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안에는 정교랑이 홀로 앉아 있었다.

“아씨, 그 공자님은 숙주의 한균이라는 분이래요. 자는 원조고요.”

시녀가 자리에 앉으며 나지막이 고하자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보니, 그 사람이었구나.”

“아씨, 아는 분이세요?”

시녀가 호기심을 못 참고 물었다. 이름은 알지만 잘 아는 사이로 보이진 않았다. 정교랑은 잠자코 있다가 다시 물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뭐라고 하던?”

“이대작이라는 사람은 본디 이곳 신선거에서 일했는데……·. 아, 원래는 이곳 이름이 신선거가 아니라 취봉루(醉鳳樓)였다네요. 아무튼 이대작은 음식 솜씨가 좋아 취봉루 주인의 총애를 받았는데, 그 주인이 죽고 가업을 물려받은 두칠 대인은 이대작을 아니꼬워했대요. 그러다가 마침 훌륭한 요리법을 손에 넣어 그 기회에 잘라 버렸고요.”

시녀가 방금 대청에서 들은 얘기들을 정리해 고하자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문이 열리더니 점원 둘이 쟁반을 받쳐 들고 들어왔다. 전부 고기와 채소였다.

“아씨께 밥을 사 주려고 했나 봐요.”

시녀는 쿡 실소를 터뜨리며 밖을 쳐다봤다. 주육낭은 두 사람과 함께 들어오지 않고 옆쪽 별실로 간 터였다.

“아씨, 우리 집 과로신선이 얼마나 맛있는지 모릅니다. 일단 드셔 보시면 제대로 왔다 싶으실 거예요.”

점원은 우쭐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점원이 차려놓는 채소들을 보며 시녀는 엇, 하는 소리를 냈다.

“아니, 이게 뭐지?”

시녀가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이게 바로 과로신선이란 요리예요. 우리 신선거가 신선의 가르침을 받아 독창적으로 만들어 낸 맛이죠.”

“과로신선?”

시녀가 놀라 되물었다.

딱 보니까 바깥 구경도 제대로 못 해 본 규방 여인이군. 이리 맛있는 걸 먹어 봤을 리가 없지. 점원은 입을 삐죽거렸다.

“저 공자님이 세심하시네요.”

점원은 은근히 저쪽을 띄우고 이쪽을 무시하며 손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자리를 진작 예약하셨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내일까지 기다려도 못 드셨을 거예요. 저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보시라니까요.”

어느덧 식탁에 음식이 다 놓였다. 점원은 시녀의 놀란 눈빛을 보며 더욱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먹는 건지 먹는 방법을 알려 드릴게요. 이 고기는 날것으로 먹으라는 게 아니에요. 이 그릇도 물 따라 마시라고 드린 게 아니라 양념장을 만들라고 드린 건데……·.”

점원은 신이 나서 목소리를 높여 가며 말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시녀의 놀란 표정이 차츰 우쭐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이건……·.”

시녀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일부러 목청을 높여 입을 열려던 때였다. 정교랑이 손을 들어 제지하는 바람에 시녀는 도로 앉았다.

“왜 그러세요?”

점원이 영문을 몰라 하며 두 사람을 쳐다봤다. 정교랑은 자신의 앞에 놓인 채소며 고기, 노구솥 등을 가만히 쳐다봤다.

“토끼고기 덩어리와 칼, 갖은양념을 가져오너라. 그리고, 너희 숙수도 불러와.”

정교랑의 말에 점원은 멈칫했다.

“무슨 분부라도 있으세요?”

“이게 분부잖아요.”

시녀가 미간을 찌푸리고 점원을 보며 손가락으로 밖을 가리켰다. 시녀가 앙칼지기도 하네. 점원이 문을 닫고 나가자 사람들이 쳐다봤다.

“저 낭자가 뭘 하려고 저러지?”

“예사롭지 않아 보여. 뭘 할 건지 구경이나 하자.”

“말이 되냐. 이건 우리 신선거만의 비법이라고.”

“그래도 부잣집 낭자 같았어. 괜히 심기 건드리지 마.”

“부잣집 겁낼 거 뭐 있어? 우리 어르신은 중서문하성 비각 유 교리를 양할아버지로 모시는 분인데.”

점원들이 회랑에서 수군거리는데 저쪽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어디서 세 치 혀를 함부로 놀리느냐!”

주육낭의 호통에 점원들은 기겁을 하며 얼른 사죄했다.

“공자님.”

이 공자가 방금 그 낭자의 일행이라는 사실을 알아본 점원 하나가 말을 건넸다.

“저 아씨께서 숙수를 불러오라고 명하셨는데, 무슨 일로 심기가 불편하신지 모르겠습니다. 보시다시피 손님이 많아 숙수가 잠시도 자리를 비울 수 없어요.”

주육낭이 미간을 찌푸리며 맞은편 문을 쳐다봤다.

“시키는 대로 할 것이지, 웬 말이 그리 많아!”

주육낭이 언성을 높였다. 쳇, 이 공자한테 물어보는 게 아니었는데. 아리따운 여인을 데려와 점수를 따려 했을 테니, 뭐든 여인의 뜻대로 해 주고 싶겠지. 점원은 하는 수 없이 예를 표하고 관리인에게 사정을 알리러 갔다.

관리인은 공손하게 서서 두칠의 말을 듣는 중이었다.

“경성 쪽 주점에 얼추 준비가 됐으니 연말이 지나면 영업을 시작해야지.”

두칠은 웃으며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귀밑머리 근처에 새로 꽂은 죽도화(竹桃花)가 웃음과 함께 미세하게 떨렸다.

“그래도 이곳은 노태야께서 명당자리라며 물려주신 곳인데, 남겨 두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관리인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명당자리는 무슨, 그 명당에서 10년을 장사한 것보다 과로신선을 팔며 며칠 만에 얻은 명성이 더 큰데. 여길 남겨 두면 사람들이 이사 간 곳으로 오겠나?”

두칠은 못마땅한지 들고 있던 술 주전자를 탁자에 쾅 내려놓았다.


대대로 내려오는 점포 이름까지 내팽개칠 정도인데, 자리를 옮겨가는 게 무슨 대수라고. 관리인은 얼른 알았다고 대답했다.

“양조부께서도 말씀하셨다. 때가 되면 양조부도 오셔서 기세를 북돋워 주시겠다고. 이제 우리 두씨 집안은 경성에서도 이름을 날릴 거다.”

두칠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문밖에서 들린 점원의 목소리가 두칠의 흥을 깼다.

“무슨 일이냐?”

두칠이 언짢은 투로 묻자 점원은 겁먹은 채로 들어와서 상황을 고했다.

“고기가 신선하지 않아서 그러나.”

관리인이 중얼거리는 말에 두칠은 눈을 부릅떴다.

“신선하지 않은 고기를 쓴다고?”

“워낙 손님이 많아 물량이 달려서요. 가끔 씁니다.”

관리인이 우물쭈물 대답했다.

“그래도 탕에 익히면 모를 텐데요.”

두칠이 눈을 부라렸다.

“조심하게, 일 망치지 말고.”

관리인은 얼른 알았다고 했다.

“그럼 숙수를 들여보낼까요?”

점원이 물었다.

“들여보내라. 겁낼 게 뭐 있어. 트집을 잡거든 우리가 나서면 될 일 아니냐.”

두칠은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점원이 얼른 대답했다.

“네, 영명하십니다.”

일개 점원에게 받는 칭찬에 어깨가 으쓱해질 필요는 없었다.

“썩 물러가라, 아둔한 것.”

두칠이 점원을 내쫓았다. 쫓겨난 점원은 곧 숙수를 불러왔고 고기와 칼도 정교랑 앞으로 대령했다. 숙수는 못마땅한 듯 건성으로 예를 표했다.

“아씨, 이거 신선한 토끼고기입니다. 제가 바로 잡아서 썬 거예요.”

숙수는 불퉁한 표정으로 고깃덩어리를 내밀었다.

“보십시오, 신선하잖습니까.”

저것 때문이군. 하여간 입맛이 까다롭다니까. 줄곧 문가에 서 있던 주육낭은 시선을 거두며 돌아섰다. 하지만 놀라는 점원의 소리에 곧 다시 고개를 돌려야 했다. 주육낭도 어리둥절한 눈빛이었다. 이 여인이, 대체 뭘 하려고?

“아씨, 장난치지 마십시오.”

숙수가 칼과 토끼고기를 든 낭자를 보며 놀라 소리쳤다. 정교랑은 숙수를 힐끔 쳐다봤다.

“잘 봐요. 딱, 한 번만 할 테니까.”

보라고? 뭘 보란 거지? 시녀를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은 영문을 몰랐다. 정교랑의 현란한 칼질 실력에 점원과 숙수는 아, 하는 탄성을 내뱉었다.

“아씨.”

점원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말리려 했지만, 숙수가 얼른 막았다. 주육낭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미묘한 표정 변화를 보이며 저도 모르게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정교랑의 동작에 따라 접시 위로 토끼고기가 착착 쌓였다. 다양한 형태며 모양이 옆에 있는 접시에 무질서하게 썰어 놓은 토끼고기와 확연한 대비를 이뤘다.

“훌륭한, 칼질이네요.”

숙수가 중얼거렸다. 무언가 생각이 난 것 같다가도 이해가 안 가는 눈치였다. 고개를 들어 정교랑을 쳐다보던 숙수의 비대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설마……·.

“뭐라고?”

술 주전자를 들고 있던 두칠이 놀라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네, 그렇다니까요. 그 낭자가 다짜고짜 칼과 토끼고기를 가져오라고 했어요.”

점원이 말했다.

“무슨 뜻이지?”

영문을 모르는 눈치던 두칠이 곧 웃음을 터뜨렸다.

“직접 해 먹는 걸 좋아하는 자인가 보군. 그럼 집에서 먹지 뭘 나와서 난리야.”

옆에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관리인이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 낭자더냐?”

점원은 관리인이 내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고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시녀도 데려왔고요. 동행한……·.”

점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관리인이 손을 탁 치며 말을 끊었다.

“아이고, 그 낭자께서 오셨나 보네!”

관리인은 그 말만 남기고는 서둘러 뛰어나갔다. 두칠에게 잠시 실례하겠다는 말조차 안 하고 나간 터라 점원과 두칠은 흠칫 놀랐다. 어느 낭자가 왔기에?

관리인이 왔을 무렵 정교랑은 이미 양념장을 만들고 있었다. 여전히 입을 여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노구솥에서 탕 끓는 소리만 보글보글 날 뿐이었다. 정교랑은 기름과 소금, 간장, 식초 등을 분량에 맞춰 조금씩 넣어 섞고는 손을 멈추고 앞을 쓱 훑었다.

“참깨가, 빠졌네요.”

행여 놓치기라도 할세라 정교랑의 일거수일투족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숙수는 그 말에 벼락이라도 맞은 듯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참깨요, 참깨!”

숙수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어서 참깨를 가져오너라.”

그제야 점원이 안에 없는 걸 눈치챈 숙수가 멈칫하는 사이, 문가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냉큼 가져오너라!”

관리인이 옆에 있던 점원을 발로 차며 명하자 점원은 허둥지둥 참깨를 가지러 갔다. 안으로 들어온 관리인은 옷을 털고 꿇어앉아 머리를 조아렸다.

“아씨를 뵈옵니다.”

관리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따라온 두칠은 그 광경에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아는 사이였나?

“대인, 이분이 바로 그 신선이십니다.”

관리인이 뒤를 돌아보며 소개했다. ‘과로신선’이라는 이름은 두칠이 지은 것이었다. 관리인 말로는 지나던 행인이 들렀다 가며 남긴 맛이라고 했는데, 행인이라는 이름을 붙이자니 어쩐지 초라하게 들렸다. 그러다 번뜩 생각난 것이 이 속되면서도 호기로운 이름이었다.

그 행인이 여인이라는 건 두칠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모습을 드러낼 줄은 예상치 못했다. 무슨 연유로 온 거지? 돈을 달라는 건가? 두칠은 순간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가 재빨리 표정을 숨기고는 함께 꿇어앉아 예를 올렸다.

“신선 낭자셨군요.”

두칠은 웃음과 함께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수소문해도 찾을 수 없었는데, 이렇게 다시 왕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교랑은 두 사람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했다. 그때 참깨를 가지러 갔던 점원이 돌아오자 시녀가 손을 뻗어 받았다. 정교랑이 손으로 참깨를 집어 그릇에 넣었다. 숙수는 이미 넋이 나간 상태로 점점 심하게 몸을 떨었고 눈빛마저 흔들렸다.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모습이었다.

“잘 봐요.”

정교랑의 단호한 말에 숙수는 정신을 집중했다.

“딱 한 번만, 할 거예요.”

정교랑이 다시 강조했다. 숙수는 그제야 무슨 뜻인지 알아듣고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감사합니다, 아씨.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아씨.”

어리둥절한 모습이던 관리인도 곧 크게 기뻐했다. 두칠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놀란 눈빛이 스치는가 싶더니 몸을 돌려 옆에 있던 시종의 귀에 무어라 귓속말을 하자, 시종이 밖으로 나갔다.

저들이야 그러건 말건 정교랑은 양념장을 내려놓고 젓가락을 들었다. 시녀는 벌써 노구솥 안에 채소를 넣고 있었다. 시녀는 채소가 탕 속에서 이리저리 구르길 기다렸다가 토끼고기를 집어 노구솥 안에 넣었고, 정교랑도 똑같이 행동했다. 정교랑과 시녀는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가운데 주변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천천히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정교랑은 식성이 까다로웠지만, 일단 먹기 시작하면 남기는 일이 없었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갔을 무렵 마지막 고기 한 접시까지 야무지게 비운 정교랑과 시녀는 그릇과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눈도 깜빡이지 않으며 자신들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세 사람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아, 그 말을 깜빡했네요.”

정교랑이 무언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먹는 건, 안 봐도 되는데.”

뭔 소리야, 일찍도 말하네. 관리인은 한숨을 내쉬었고 두칠도 가슴을 쓸어내렸다. 두 사람은 시큰시큰한 눈을 비볐다. 숙수는 감격스러워 또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를 표했다.

그날은 솥 바닥에 남은 음식만 본 터라 어떻게 만드는지 직접 보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 실제로 보니 자신이 짐작한 방법과는 크게 달랐고, 훨씬 정교한 요리였다. 이젠 고기를 어떻게 써는지, 채소는 언제 넣는지 배웠을뿐더러 양념장에 참깨를 추가하는 것만으로도 요리의 맛이 확연히 달라진다는 걸 알게 됐다.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아씨.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제 알겠습니다. 이제 알겠어요.”

숙수는 계속 같은 말을 반복했다.

“알았으면 냉큼 나가서 해 봐라. 아씨의 호의를 저버리지 말고.”

두칠이 소리치자 숙수는 당황하여 고개를 조아리고는 물러났다. 관리인은 점원들을 데려와 식기를 정리하고 차를 직접 올렸다. 사람들을 물린 후 문을 닫으려는데도 주육낭은 여전히 문가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점원이 머뭇거리자 주육낭은 안으로 들어왔다. 주육낭은 상석에 앉지 않고 정교랑 옆에 앉았다. 관리인과 암암리에 눈을 마주친 두칠이 손을 내젓자 문이 닫혔다.

“아씨, 이분이 저희 주인어른이십니다.”

관리인이 소개하자 두칠이 예를 표했다.

“소생 두칠이 아씨를 뵈옵니다.”

정교랑은 두칠을 보며 간단하게 답례한 후 잠자코 있었다.

“지혜로운 아씨께서 이런 요리법을 알려 주시다니, 저희가 전생에 복을 쌓았나 봅니다.”

두칠은 웃으며 손을 뻗어 방금 시종이 들고 온 작은 함을 앞으로 내밀었다.

“작은 성의입니다. 부끄럽지만 받아주십시오.”

정교랑은 힐끔 쳐다본 후 손에 든 찻잔을 시녀에게 건넸다. 시녀는 찻잔을 받은 다음 물을 올렸다. 한마디 말도 없이 그런 동작이 착착 오갔다.

“그리고 저희 신선거에는 어제든 편히 찾아주십시오. 내 집이다, 여기시고요. 어려워하실 것 없습니다.”

두칠은 웃으며 관리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명심하게. 점원들한테도 눈 똑바로 뜨고 잘 보라고 전하고. 새로 여는 곳도 마찬가지일세.”

정교랑이 고개를 들어 두칠을 쳐다보며 물었다.

“새로 여는 곳이요?”

두칠이 눈빛을 빛냈다.

“네, 비각 유 교리께서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저희 가게가 성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한번 먹으러 오려 해도 여간 불편한 게 아니라고요. 마침 괜찮은 술집에 자리가 났기에 양도를 받았습니다. 저희 신선거는 이제 경성으로 옮겨갈 겁니다. 아씨도 경성에 계시니 찾아오기 편하실 거예요.”

두칠은 옆에 있는 주육낭을 무심결에 흘끗 보며 은근히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방금 시종이 은밀히 고한 바에 따르면 이 공자와 여인이 타고 온 마차는 귀덕낭장 주씨 가문의 것이었다. 경성에서 일개 하급 무관 따위가 대수던가. 더구나 비각 교리 대인 앞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지.

“아니에요. 이 맛의 즐거움은 직접 해 먹는 데 있거든요.”

정교랑이 허리를 곧추세웠다. 이대로 일어나려고? 아직 본론도 안 꺼냈으면서? 두칠과 관리인은 멈칫했다. 예상대로 정교랑은 시녀의 부축을 받아 일어섰다.

“아씨.”

두칠이 얼른 따라 일어서며 바닥에 있는 함을 가리켰다.

“너무 적어서 그러십니까?”

두칠이 웃으며 손짓을 했다.

“여봐라, 가서 더……·.”

“필요 없어요.”

정교랑이 말을 끊었다.

“이건 내가 만든 요리가 아니에요. 나도 배운 건데, 어떻게 돈을 받겠어요.”

두칠이 멈칫했다.

“이건 돈 문제가 아닙니다. 성의예요, 성의. 성의라 생각하고 받아주십시오.”

두칠은 웃음을 지으며 진심 어린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방금 직접 가르쳐 주셨잖습니까.”

“방금 전 일은, 더더욱 돈 때문이 아니에요.”

두칠과 관리인은 멈칫했다.

“그럼 왜 그러셨는데요?”

관리인이 물었다. 이미 그릇을 싹 치운 탁자를 바라보며 정교랑이 고개를 내저었다.

“여기서 만드는 건, 눈 뜨고 못 볼 정도로, 형편없거든요.”

눈 뜨고 못 볼 지경이라 숙수에게 만드는 법을 가르쳐 줬다? 두칠은 다시 한번 경악했다. 들어온 후부터 지금까지 벌어진 모든 일이 자신의 예상을 빗나갔다. 이 아씨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들어온 자신을 말도 몇 마디 안 하면서 속수무책으로 만들고 있지 않은가.

이게 정말, 그저 좋기만 한 일일까? 길 가던 신선을 만났다? 두칠이 27년을 살면서 돈을 보고도 눈이 확 뜨이지 않는 선인을 본 건 처음이었다. 두칠은 눈을 가늘게 떴다. 선인? 이 세상에 선인과 악인 따위는 없다. 아둔한 사람과 영리한 사람만이 있을 뿐!

시종들이 호위하는 마차와 함께 소년이 말을 타고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두칠의 얼굴에 있던 미소가 싹 걷혔다. 석양빛이 두칠의 얼굴을 비췄다. 귀밑머리에 꽂은 죽도화는 어느덧 시들어 있었다. 두칠은 꽃을 뽑아 바닥으로 내던졌다.

“대인, 저 두 사람이 정말 이대로 가는 걸까요? 돈도 안 가져갔잖습니까.”

“안 가면 어쩔 건데?”

두칠이 냉소를 지었다.

“내가 내 양조부까지 들먹인 마당에 감히 돈을 가져가? 돈을 가져갔다가 무슨 꼴을 보려고? 저 애송이들뿐 아니라 저들 뒤에 있는 주 노야가 오더라도 경솔하게 굴진 못할 게야.”

관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그때 그 신선이 주씨 가문 사람이라니 뜻밖이네요. 어쨌거나 예전의 우리가 아니라 다행입니다. 경성의 그 욕심 많은 관리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돈 정도가 아니라 이 식당을 통째로 빼앗으려 들걸요.”

“그러니 할아버지처럼 고리타분하게 굴어선 안 돼. 권세가처럼 욕심 많고 몰인정한 사람이 또 없어. 건드렸다간 경을 치지. 하지만 이 세상일이라는 게 가만히 있는다고 시비 거는 사람이 없는 건 아냐. 걱정만 많아서 이것저것 다 따지면 평생 가난하게 사는 거야. 그럼 무슨 발전이 있어? 지금 우릴 봐. 신선에 이어 유 교리의 뒷배까지 있으니 우리 두씨 가문이 천하에 이름날 일만 남았잖나.”

거기까지 말한 두칠은 어두워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유 교리도 속이 너무 시꺼메서……·.”

두칠은 고개를 돌렸다. 어느덧 화려한 등불이 내걸렸고, 신선거는 낮보다 더욱 분주해졌다. 밝은 등불과 왁자지껄 떠드는 사람들 소리,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점원들. 등불은 저 멀리까지 이어졌다. 이제 막 도착하는 손님들과 못내 아쉬워하며 걸음을 옮기는 손님들의 모습이었다. 별처럼 모여드는 수많은 사람이 두씨 가문의 곳간을 밝게 비춰줄 것이다.

“이건 신선이 주신 기회야, 절대 놓치면 안 돼!”

두칠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돌려 더욱 차가워진 표정으로 관리인을 바라봤다.

“어서 지분 배당 문서를 양조부께 전해라. 이번엔 주씨 가문이지만 경성에 들어가면 또 얼마나 많은 놈이 호시탐탐 노릴지 몰라. 주씨 가문에서 또 다른 꿍꿍이를 품었다간 아주 본때를 보여 줘야지.”


주육낭의 마차가 대문으로 들어섰다. 초조하게 이들을 찾던 집안사람들은 돌아온 주육낭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너도 참, 누이를 데리고 어딜 갔던 게야?”

주 부인이 나무랐다. 입으로는 나무라면서도 표정엔 아들을 아끼는 마음이 가득했다. 마차에서 내리는 정교랑을 바라보는 눈길엔 원망이 감춰지지 않았다. 저 계집이 강요한 거겠지.

“밥 먹으러 갔었어요.”

주육낭이 말했다.

“세상에, 여섯째 오라버니는 사촌 누이한테 정말 잘하네요. 나 데리고 밥 먹으러 간 적은 한 번도 없으면서.”

주 부인 뒤에 서 있던 고운 낭자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주육낭의 얼굴이 굳어지는데, 저쪽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뭘 그렇게 빈정대세요. 그럼 아씨도 그리 좋은 대우를 받으시든가요.”

시녀가 말했다. 갑자기 쏘아붙이는 말에 말문이 막힌 낭자는 한낱 시녀가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벌컥 성을 냈다.

“네가 감히……·.”

낭자는 인상을 쓰며 언성을 높이려 했지만 주 부인이 노려봤다.

“입 다물어. 어디라고 네가 끼어들어!”

그 말에 어린 낭자는 더욱 말문이 막혔다.

“어머니, 여긴 우리 집이에요. 제가 말 한마디 할 자격도 없어요? 그리고 제가 뭐 틀린 말 했어요?”

정교랑과 시녀는 그런 말이 귀에 들리지 않는 듯 벌써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주육낭도 따라갔다. 눈 깜짝할 새에 중문 앞에는 주씨 가문의 두 모녀와 여종만이 남았다.

“어머니!”

낭자가 발을 굴렀다. 저만 망신을 당한 것 같아 더욱 분한 마음에 손을 뿌리치며 홱 가 버렸다. 열이 받기는 주 부인도 마찬가지였지만 도리가 없었다.

“여봐라. 영리한 계집을 몇 골라 정 낭자한테 보내 줘라. 매일 저 선머슴 같은 계집 하나만 시중을 드니 저게 무슨 꼴이야!”

주육낭이 정교랑을 따라잡았다.

“그자가 협박한다고 겁을 먹은 게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정교랑은 그 말에 정신을 차렸지만, 곧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가요?”

정교랑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 과로신선은 본디 네 것인데 두씨한테 빼앗겼잖아. 그래도 괜찮냐고.”

정교랑이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내 것도 아닌데 안 괜찮을 게 뭐 있죠?”

정교랑의 반문에 주육낭은 말문이 막혔다.

“바보 시늉은!”

주육낭이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정말 그놈들이 하는 게 형편없어서 특별히 가르쳐 준 거냐고!”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니까요. 그 사람들이 만든 건, 정말 형편없었어요. 음식이 아까워서, 가르쳐 준 거예요. 사람들과 함께 즐겨야, 진짜 맛있잖아요.”

주육낭은 정교랑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또 시치미 떼며 바보 시늉이군!”

주육낭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정교랑, 나랑 제대로 대화 좀 하면 안 돼?”

정교랑은 주육낭을 힐끔 본 후 별다른 말 없이 뒤돌아 걸음을 옮겼다. 말은 없었지만 그 눈빛은 흡사 따귀를 때리는 것 같았다. 주육낭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저 바보가!

걸음을 옮기던 정교랑이 갑자기 멈춰 섰다.

“잠깐만요. 방금 그 사람이, 나를, 협박했다고 했어요?”

정교랑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지만, 주육낭은 정교랑을 쳐다보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아씨, 그자가 말한 유 교리가 교리 대인 유장(劉璋)이에요. 중서문하성 비각 전사(銓事)시죠.”

시녀가 나지막이 고했다. 주육낭은 내심 놀라며 처음으로 그 시녀를 제대로 쳐다봤다. 이 시녀가 중서문하성 비각 전사를 알아? 유장도 알고?

솔직히 말해서 번잡한 벼슬 명칭은 주육낭 자신도 잘 모를 때가 많았다. 그런데 일개 시녀가 신분과 지위, 내력, 명칭을 줄줄 읊다니. 정씨 가문에 이런 계집이 있었나? 아니면 그래서 특별히 이 바보한테 준 건가?

“어차피 상관없어.”

정교랑은 이해가 안 가는 듯했지만 더 캐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딱딱한 표정으로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나 싶더니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랬구나, 역시.”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였고, 주육낭은 한쪽 옆에서 이를 갈았다. 바보로 살았던 적이 있어서 그런지 바보 시늉을 하면 정말 감쪽같단 말이지! 자신은 두칠의 말을 전혀 못 들었다는 듯이,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제야 알겠다는 듯이!

그래, 바보 시늉을 할 테면 해라. 당사자가 괜찮다는데 주씨 가문이 나서서 네 분풀이를 해 줄 필요는 없잖아. 주육낭은 옷소매를 뿌리치며 돌아서는데, 뒤에서 정교랑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잘됐네.”

잘됐다고? 주육낭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자가 먼저 날 협박했구나. 왠지 꺼림칙했는데, 이제, 마음이 놓여.”

정교랑이 시녀를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저 바보! 주육낭은 뒤돌아 성큼성큼 걸어갔다.


또 한 번 큰 눈이 내리면서 세밑이 대엿새 앞으로 다가왔다. 시녀가 손을 비비며 들어가자 실내에는 따뜻한 공기가 가득했다. 정교랑은 창가에 앉아 밖을 보고 있었다.

“아씨, 춥지 않으세요?”

시녀는 몇 걸음 다가가 화로 근처에 손발을 갖다 대며 꿇어앉았다.

“노태야를 따라 남쪽에서 막 올라와 처음 겨울을 날 땐 어찌나 추운지 매일 울었어요.”

“병주도, 추워.”

정교랑의 말에 시녀는 헤헤 웃었다.

“아씨, 오늘은 집에 계시겠어요? 아니면 공자님들 쪽으로 가시겠어요?”

“오라버니들한테 가야지.”

시녀는 네 하고 대답한 후 일어나 문을 열고, 여종을 불러 마차를 준비시키게 했다. 집안 여식이 외출할 땐 안주인께 고하는 게 도리였다. 더구나 정교랑은 친척 여식이 아니었던가. 소식은 금세 주 부인에게로 전해졌다.

“또 외출한다고?”

주 부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눈이 내리는 밖을 바라봤다.

“그리고 돈도 좀 달래요.”

여종이 고개를 숙이며 고했다. 주 부인은 고개를 돌려 안에 있는 주 노야를 쳐다봤다.

“그런 말이 나온대?”

주 부인은 놀란 표정이었다. 자기 집이라 해도 저리 자유롭진 않을 텐데? 세상 어느 정상적인 여인이 저런단 말인가.

“여인네가 돼서 매일 밖으로 나돌다니, 체통을 지켜야지!”

주 노야가 침통한 표정으로 호통을 쳤다.

“어미 없이 자랐고 십수 년을 바보로 산 애잖소. 당신이 가서 잘 타이르시오.”

“내가요? 내가 나서는 게 도리에 맞을까요?”

주 부인은 고개를 내저었다.

“당신은 외숙모가 아니오. 외숙모도 어미인데 안 될 게 뭐 있소?”

주 노야는 불쾌한 듯 대꾸했다.

주 노야 부부가 이쪽에서 근심하고 있을 때, 저쪽의 주육낭은 벌써 두봉을 걸치며 문을 나서고 있었다. 때마침 들어오던 진 공자와 마주쳤다.

“또 나가려고?”

진 공자가 놀라 물었다.

“누이가 생기더니 친구는 아예 잊었군.”

주육낭은 진 공자를 노려보고 손을 내저으며 나가려 했다.

“이보게, 육낭. 이래도 소용없어. 자네가 뭘 하든 자네 누이 눈에 안 보여.”

진 공자는 손을 뻗어 주육낭을 붙잡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말대로 해. 신경 쓰지 말고 뭐든 맘대로 하게 내버려 두는 게 나아.”

“그 애가 어찌 생각할지 걱정돼서 이러는 거 아냐.”

주육낭은 고개를 쳐들며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이러는 게 그 여인 심기를 건드리는 일이라고. 좋아, 그럼 나도 같이 가.”

진 공자가 주육낭을 보며 말했다.

“자네랑 상관없는 일이야.”

주육낭이 성큼성큼 걸어 나가자 진 공자가 따라갔다.

“마침 눈도 오고 하니 화로 앞에 앉아 뜨끈한 탕에 고기 데쳐 먹으면 딱이겠군. 내가 자네들 오누이한테 쏠 테니 신선거에 가지 않겠나?”

진 공자는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 얘기가 또 나오자 주육낭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필요 없어.”

“어째서?”

진 공자가 멈칫하며 물었다.

“갔었어.”

진 공자는 그 말에 주육낭을 쳐다보며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녀석, 자네는 정말이지……·.”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진 공자가 잽싸게 물었다.

“좋아하던가?”

주육낭이 심호흡을 크게 하고 고개를 돌려 진 공자를 쳐다봤다.

“맞혀 봐.”

진 공자는 깜짝 놀랐다. 지금껏 진 공자와 알고 지내면서 저런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봤기에, 주육낭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래서 그 여인이 바보 시늉을 좋아하는구나. 말문을 막히게 하는 게 재밌긴 재밌네.

그런 생각이 스치는 찰나, 주육낭 얼굴에 있던 웃음기가 순식간에 확 걷혔다. 주육낭이 두봉을 홱 휘두르자 가죽 장화 옆에서 눈송이가 어지러이 휘날렸다. 주육낭이 마당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육공자께서 또 정 낭자의 마부를 해 주시네.”

“육공자는 정 낭자한테 정말 다정하셔.”

하지만 아랫것들의 잡담은 거기에서 그쳤고, ‘오누이의 정’을 넘어서는 말 따위는 나오지 않았다. 정 낭자에겐 바보였던 과거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나, 과거지사는 지울 수 없는 것. 지금 보면 그다지 좋아진 것 같지도 않고, 어딘지 모르게 이상한 게 딱 봐도 평범한 여인들과는 달랐다. 아무리 적장자가 아니더라도 주육낭이 그런 여인을 아내로 맞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세밑이 다가오면서 하늘과 조상께 제를 올릴 준비에 여념이 없다 보니 거리를 오가는 사람은 전보다 줄었다. 특히 주점이나 객잔은 더욱 그랬다.

커다란 두봉을 걸친 여인이 길가에 서서 무언가를 찾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새 등롱을 걸기 위해 길가에 나와 있던 가게 점원은 길을 묻는 질문에 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인은 잠시 서 있다가 방향을 잡고 곧장 걸어갔다.

“말 시장 거리로 가면서 대장간 골목으로 가로질러 가는 길을 알다니, 외지 사람이 아니네. 경성을 잘 아는 사람이야.”

점원은 사다리 위에서 고개를 내저으며 감탄했다.

골목을 지나자 떠들썩한 장터가 나왔다. 평범해 보이는 객잔에 걸린 깃발이 여인의 눈에 들어왔다. 깃발에는 ‘규원거’라는 세 글자가 쓰여 있었다.

“여기였구나.”

여인은 혼잣말을 하며 안으로 들어가 두모를 벗었다. 연말이 다가오면서 집으로 돌아갈 사람은 다 돌아간지라 객잔은 유독 적막했다. 계산대 뒤에 둔 화로 옆에서 불을 쬐던 두 점원은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가 아리따운 여인이 보이자 웃으며 맞이했다.

“숙주 한 공자를 찾아왔어요. 오라버니들, 날도 추운데 따끈한 약주로 몸 녹여요.”

시녀가 돈을 건네자 두 점원은 싱글벙글했다. 어린 낭자의 씀씀이가 제법이네. 객잔에 묵는 사람 중에는 이름을 남기는 이도 있고 남기지 않는 이도 있었다. 사람을 찾는다고 해서 금방 찾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두 점원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한 방향을 가리켰다.

“한 공자는 지(地) 3동, 동편 곁채에 계세요. 내가 데려다줄게요.”

시녀는 웃으며 고맙다고 하고, 그 점원을 따라갔다. 문을 두드리자 나온 사람은 한원조가 아니었다. 시녀를 본 상대는 영문을 모르겠는 눈치였다.

“유 수재(秀才: 과거 응시자), 여기 누이가 한 수재를 찾아왔답니다.”

점원의 소개에 시녀는 예를 표했다.

“어제 한 번 뵀는데 소인을 기억하실지 모르겠네요.”

퍼뜩 깨달은 유 수재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런데 원조를 찾아왔다고?”

“네, 저희 윗전께서 모셔 오라고 하셔서요.”

시녀의 말에 유 수재의 표정이 더욱 이상해졌다. 난처한 듯 무언가를 말하려다 말을 삼켰다.

“날 찾는다고?”

뒤에서 말소리가 들려 쳐다보니 위층으로 올라가려던 두 사람이 보였다. 한원조는 마침 두봉을 벗는 중이었다.

한쪽 옆에 다소곳이 꿇어앉은 시녀는 두 사내가 한원조를 옆으로 끌고 가 무어라 중얼거리는 모습을 쳐다봤다. 시녀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시선을 돌렸다. 저쪽의 사내는 시녀가 시선을 돌리는 모습을 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저리 가정교육을 잘 받은 걸 보면 범상치 않은 집안이야.”

사내는 한원조의 팔을 붙잡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덕주 안씨 가문과 비교하면 어때?”

“그래, 그래. 혼인은 평생이 걸린 대사야. 잘 생각해서 결정하라고.”

옆에 있던 사내도 흥분한 표정으로 한원조의 어깨를 툭툭 쳤다. 한원조는 실소를 터뜨렸다.

“생각할 게 뭐 있어.”

한원조는 두 사람을 밀어내고 시녀 앞으로 걸어왔다. 시녀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한원조가 먼저 앉기를 기다린 후에야 다시 앉았다.

“공자님, 저희 윗전께서……·.”

시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원조가 손을 들어 말을 끊었다.

“생각할 것도 없소. 어여삐 봐 주신 건 감사하지만 소생은 이미 혼처가 있으니 부디 헤아려 주셨으면 하오.”

한원조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시녀는 깜짝 놀랐다가 곧 실소를 터뜨렸다. 생각할수록 웃겨서 손을 들어 입을 가렸지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안에 있던 세 사람은 아리따운 시녀의 웃음에 영문을 몰랐다.

“공자님, 그런 거 아니에요. 저희는 사위를 들이려던 게 아니라고요.”

시녀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그 말에 한원조는 안도하면서도 멋쩍은 기분이 들어 고개를 돌려 두 사내를 노려봤다. 두 사내 역시 머쓱해서 서로 쳐다본 후 따라 웃었다.

“거 아쉽네. 난 또 도의의 결단을 내릴 기회가 온 줄 알았잖아. 아프지만 어쩔 수 없는 고뇌의 선택 말일세.”

“그러게. 난 원조가 옛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에게 가면 절교할 마음까지 먹었는데. 뒤도 안 돌아보고 무 자르듯 자르려고 했다고.”

간신히 웃음을 참고 있던 시녀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맑은 웃음소리가 퍼져나가면서 연말이라 한산하던 객잔에 생기가 돌았다.

“저 수재들에게 무슨 좋은 일이 생긴 건지 모르겠네.”

객잔 점원들이 궁금해했다. 곧 웃음소리가 그치고, 안에 있던 사람들은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러니까 낭자의 윗전이 내게 도움을 청할 게 있다고?”

한원조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시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네, 하고 대답한 후 전대를 내밀었다.

“어제 그 여인과 아이의 사정이 딱해서 약소하나마 도움을 주고 싶어요. 그런데 저희 윗전께서 부득이한 사정이 있어 출타하기 어려우시거든요. 공자님은 그 여인에게 은혜를 베푸셨으니, 공자님께서 대신 가시면 그 부인이 더 신뢰할 수 있기도 하고요.”

한원조는 놀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의협심이 뛰어난 분이군. 다만……·.”

“공자님의 공부를 방해하게 된 건 정말 죄송해요.”

시녀가 말을 이어받아 송구한 뜻을 전하며 예를 올렸다. 한원조가 얼른 가볍게 답례했다.

“아니다. 글공부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한원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내일 함께 가지.”

“내일 이곳으로 공자님을 찾아올게요. 그 부인한테 다녀와서 저희 윗전께 전하면 마음을 놓으실 거예요.”

시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작별을 고했다. 배웅을 나온 한원조는 두봉을 걸치고 두모까지 쓴 시녀가 눈보라 속으로 멀어져 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원조, 사기꾼은 아닐까?”

동료가 어딘지 의심스럽다는 말투로 물었다.

“사기꾼? 뭐 때문에 날 속여?”

한원조가 웃었다. 동료는 일부러 진지한 표정으로 한원조를 꼼꼼히 뜯어보며 말했다.

“욕정.”

한원조는 푸하하 웃음을 터뜨리며 가볍게 주먹을 날렸다.

“절교하기 전에 서둘러 마차나 한 대 빌려 봐. 내일 자네들의 시종들 데려가서 그 일부터 처리해야겠어.”

마차도 빌리고 시종 예닐곱 명까지 수행하면 경성의 좀도둑쯤은 충분히 상대할 것이다. 하지만 대도라면……·.

“우리 한씨가 숙주에서는 명문이지만 경성에서는 누가 신경 쓸 지위가 아니야. 작심하고 날 상대하려 드는 거라면, 내가 대응한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섣불리 움직이느니 일단 지켜보는 게 나아.”

“의협심이 넘치는 자는 아둔하다던데, 누가 한 말인지 그 주둥이 다물어야겠네.”

동료들은 고개를 내저으며 감탄했다.


시녀가 대문으로 들어서자 뒤에서 각자 보따리를 안은 사환 둘이 따라왔다. 안으로 두어 걸음쯤 들어가자, 옆쪽에서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금가아, 장난치지 말랬지!”

시녀는 얼른 귀를 틀어막으며 소리쳤다. 문을 열고 뛰어나오던 금가아는 히히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대나무를 내던졌다.

시녀가 문을 열자 따뜻하고 향기로운 냄새가 퍼져 나오면서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안에서 들리던 말소리가 멈췄다.

“반근이 왔구나.”

서무수가 웃으며 말했다.

“셋째 도련님을 뵈옵니다.”

시녀는 예를 올린 후, 안에 앉은 다른 사내들에게도 차례로 예를 표했다. 예를 마친 시녀는 사환에게서 보따리를 건네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사환이 물러가자 시녀가 문을 닫아 바깥의 한기를 막았다.

“반근 낭자, 너무 예의를 차리는 거 아니오? 우리가 어딜 봐서 도련님 소릴 들을 사람이냐고. 셋째 형님 말로는 예를 받는 게 낭자를 존중하는 일이라던데, 이 봉추는 그런 거 못 알아듣겠소이다.”

맨 끝에 앉은 사내가 말했다.

“못 알아듣겠으면 잠자코 있어. 말 삼가고.”

한 사내가 목소리를 낮춰 호통을 쳤다. 다 합쳐도 몇 번 안 본 사이였기에 시녀는 한참 생각한 끝에야 그 사내가 맏형 범강림이라는 걸 기억해냈다.

“새해가 코앞이라 옷을 지을 시간이 없다며 아씨께서 이미 만들어 놓은 옷을 사 오라고 하셨어요.”

시녀가 보따리를 내밀며 말했다. 사내들은 또다시 시끄러워졌다.

“누이한테 새 옷까지 지어 달라고 할 순 없지.”

서무수가 말했다. 조용히 앉아 듣기만 하던 정교랑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집에 있는 여인들이 하는 게, 이런 일이잖아요. 내가 직접 지은 건 아니지만요. 요령 좀 피운 셈 치죠.”

범강림이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몸에 맞을지 모르겠네요. 어서 가서 입어 보세요. 안 맞으면 옷집 가서 수선하게요.”

시녀가 웃으며 말했다.

“세상에, 새해라고 새 옷 입어 보는 게 얼마만이야.”

서봉추는 입을 못 다물고 싱글벙글 웃으며 보따리를 안고 가장 먼저 밖으로 나갔다. 앞장서는 사람이 생기자 다른 사내들도 어려운 마음을 내려놓은 듯했다.

“이참에 목욕 좀 해야겠네. 새 옷에 냄새 배면 안 되잖아.”

“냄새나는 건 넷째 너지. 난 어제 씻었다고.”

“셋째 형님, 그 수염도 좀 정리하시오.”

“오라버니들 나가 봐요. 다들 정리 마치면 같이 밥 먹어요.”

“그럼 부탁 좀 할게, 누이.”

정교랑의 말에 서무수가 대답했다. 서무수에 이어 다른 형제들도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정교랑이 간단히 답례하자 다들 웃으며 일어나 나갔다.

방 안에는 시끌벅적했던 여운과 함께 사내들 특유의 냄새만이 남았다. 시녀는 우선 정교랑에게 물을 올리고, 정교랑이 조용히 글씨 연습을 하도록 책을 한동안 읽어 준 후에야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씨, 한 공자가 수락했어요. 내일 저랑 같이 가겠대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씨, 왜 저한테 의원을 데려가라고 하세요? 그냥 아씨께서……·.”

시녀가 망설이며 물었다. 아씨도 병을 볼 줄 아는데, 같이 안 가고 굳이 다른 의원을 데려가라니? 정교랑은 팔걸이 책상에 기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사람은, 내가 치료할 정도 아니야.”

신분이 천하여 자격이 안 된단 뜻인가? 추측해 보던 시녀는 얼른 생각을 털어 버렸다. 시녀는 윗전의 생각을 넘겨짚는 일이 없었다. 방금 질문을 던진 것도 이미 주제넘은 일이었다. 다른 생각을 하려던 시녀가 돌연 입을 가리고 쿡 웃음을 터뜨렸다.

“아씨, 아까 한 공자가 정말 웃겼어요.”

정교랑이 고개를 들어 시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왜?”

아씨는 남의 일에 대해 먼저 묻는 일이 드문데, 역시 한 공자는 아씨와 아는 사이인가 보구나. 시녀는 그런 생각을 하며 얼른 자세를 고쳐 앉았다.

“글쎄, 우리가 혼담을 넣으러 간 줄 알더라고요. 아주 점잖고 간곡한 말로 거절했어요.”

정교랑의 입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갔다.

“왜 그런 생각을?”

“그리 생각할 만도 하죠. 경성에 그런 풍속이 있거든요. 과거 시험이 있는 해면 권세가와 부잣집에서 과거 급제자 중에서 사윗감을 고르곤 해요. 지금 비각 교리로 있는 왕위정 대인을 놓고 두 권세가 사이에 싸움이 붙어 소송이 어전까지 올라간 일도 있어요.”

“경성 풍속이, 재미있네.”

정교랑은 다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음을 드러냈다.

“다른 곳은 경성처럼 경쟁이 치열하진 않아요. 그래도 훌륭한 사내라면 어디서든 혼사를 맺으려는 사람이 많기 마련이죠.”

시녀가 웃으며 말하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한 공자께서 그런 생각을 하시다니.”

시녀는 못 참고 또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웃고 있는데 밖에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사내가 가볍게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이.”

밖에서 서무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녀가 얼른 웃으며 일어나 문을 열었다.

“셋째 도련님, 벌써……·.”

고개를 들던 시녀는 갑자기 멍해져서 말을 잇지 못했다. 정교랑도 소리를 듣고 쳐다보다가 움직이며 연습하던 손가락을 멈췄다.

밖에 선 사내는 청색의 새 솜옷을 입고 서 있었다. 키는 훤칠하고 신체 건장하여 깔끔한 행색이었다. 방금 씻은 얼굴은 촉촉했고 진한 눈썹에 눈은 부리부리했으며 이마는 넓었다. 피부색이 좀 거칠긴 했으나 준수한 외모를 가릴 정도는 아니었다.

“딱 맞네요. 안 고쳐도 되겠어요.”

사내가 고개를 숙여 자신의 옷을 쳐다보며 말했다.

사내는 어색한지 짧은 수염만 남은 턱을 쓰다듬었다. 말을 잃은 채로 빤히 쳐다보는 두 여인의 눈빛에 사내는 더욱 어색해했다.

“셋째 도련님?”

정신을 차린 시녀가 놀라 소리쳤다. 서무수는 고개를 들어 시녀를 쳐다보고 다시 고개를 숙여 옷을 쳐다봤다.

“안 맞는 것 같아? 내가 보기엔 괜찮은데.”

“셋째 도련님!”

이번에는 시녀가 웃으며 말을 끊었다.

“수염 깎으니까 못 알아보겠어요!”

서무수도 수염을 깎은 게 어색하긴 마찬가지였다. 자리에 앉아서도 마음이 안 놓이는지 이따금 옷깃을 털었다. 시녀는 쿡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새 옷은 새해 첫날 입어야겠어. 괜히 주름지겠다.”

시녀가 얼른 일어나 문을 열어 줬다.

“셋째 도련님, 옷이 정말 몸에 딱 맞춘 것 같아요.”

“네가 잘 골라서 그렇지.”

서무수가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아씨, 새 옷으로 갈아입으면 도련님들 전부 딴사람이 되겠는데요?”

시녀는 웃으며 장난기 어린 눈길로 문밖을 쳐다봤다. 아쉽게도 새 옷을 입고 누이를 보러 온 다른 사내들에겐 딱히 달라진 모습이 없었다. 더 우스꽝스럽게 바뀐 이는 있었지만.

“좀 작네.”

“재 봤는데 이게 제일 큰 거였어.”

“여섯째 도련님, 소인이 기억했다가 바꿔 드릴게요.”

“내가 같이 가는 게 좋겠어. 괜히 잘못 고치면 옷만 못쓰게 되잖아.”

이쪽에서 웃고 떠드는 사이, 벌써 전에 입던 옷으로 갈아입은 서무수는 한결 자연스러워진 모습으로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보며 말했다.

“새해맞이라니, 이런 데 마음 안 써도 돼.”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금가아가 뛰어 들어왔다.

“아씨, 진 상공 댁에서 새해 선물을 보내 왔어요.”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 소리에 깜짝 놀라 얼른 일어섰다.

“진 상공? 진 상공이 누구지?”

다른 사내들은 몰랐지만 서무수는 알았다. 상공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이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누이, 자리를 비켜 줄게.”

서무수의 말에 정교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되죠. 내 오라버니라면서, 이 누이더러 손님을 맞으란 거예요?”

안에 있던 사내들은 그 말에 더욱 당황했다. 서무수는 정교랑을 보며 심호흡을 하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형님.”

서무수가 범강림을 쳐다봤다.

“우리가 손님을 맞이합시다.”

범강림은 고개를 끄덕인 후 의복을 정돈하고 앞장서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저기, 나, 새 옷으로 도로 갈아입을까?”

뒤에 있던 사내가 중얼거렸다.

마당에서는 진씨 가문 집사가 사환들을 시켜 마차의 짐을 내리고 있었다. 발걸음 소리를 들은 집사는 얼른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후 예를 올렸다. 하지만 고개를 들자 낯선 사내들만 보일 뿐이었다.

“범강림이 누이를 대신해 감사드리오.”

범강림이 맏형으로서 공수의 예를 표하며 먼저 나섰다. 진씨 가문 집사는 기민하게 반응하며 얼른 예를 올렸다. 금가아의 납치에 관한 오해는 암암리에 소문이 퍼진 상태였는데, 이제 보니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이 사내들은 정 아씨와 그저 아는 정도가 아니라 오누이로 칭하는 사이였구나.

-마음-

진씨 가문 집사는 진지하게 예를 표한 후 정 아씨에 대해 묻는 대신 범강림 등을 깍듯이 대하며 명첩을 건넸다. 그러고는 한 치의 소홀함도 없이 단자와 선물을 일일이 대조했다. 범강림은 선물 받는 일을, 서무수는 말을 책임졌다. 다소 서툴긴 했지만 당황스러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이들은 잠시 후 문밖으로 나가 진씨 가문 집사를 배웅했다.

“아이고, 어머니.”

서봉추가 땀을 닦는 시늉을 하며 소리쳤다.

“이 봉추가 이 나이 먹도록 새해 선물은 처음 받아 보오.”

일부는 선물이 뭔지 보러 갔고, 일부는 명첩을 확인해 보라며 서무수를 재촉했다.

“누군데요, 누구.”

서무수가 명첩을 펼쳤다.

‘취주 진박.’

모르는 이름이었다. 서무수가 안을 다시 살펴보니 봉투가 두 개 더 들어 있었다. 작은 봉투에는 축의금과 함께 이름이 남겨져 있었다.

‘진소.’

서무수가 손에 들고 있던 단자를 떨어뜨리자 범강림이 잽싸게 손을 뻗어 단자를 받았다.

“셋째야? 누군데 그래?”

“이부시랑 진 상공이요.”

서무수가 중얼거렸다. 조정의 대소 신료에 대해 무지한 이들이었지만, 그래도 누구나 아는 고관대작은 있기 마련이었다. 더구나 이부시랑은 관료의 승진 관련 업무를 관장하는 분이 아니던가.

“그럼 폐하와도 연이 닿는 분이잖아.”

놀란 범강림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안쪽을 쳐다봤다. 안에 있는 시녀는 붓을 들어 무언가를 적고 있었고, 옆에 있는 정교랑은 이따금 무어라 중얼거렸다. 여느 집 여인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서무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명첩을 잘 챙겨 넣으며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누이, 우린 무슨 답례를 보내는 게 좋을까? 경성은 처음이라 이곳 풍속을 잘 모르겠네. 누이가 좀 알려 줘.”

서무수가 다른 건 묻지 않으며 명첩을 건넸다. 정교랑이 서무수를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오라버니, 나도 경성은 처음이에요.”

그러더니 시녀를 쳐다봤다.

“반근은 경성이 익숙하지만요.”

서무수는 저도 모르게 시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 시녀가 경성을 잘 안다고? 정교랑은 경성 사람이 아니고? 뭐지?

“그렇군요.”

서무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범강림을 부르며 말했다.

“지난번에 누이가 남겨 준 돈이 아직 많이 남았으니, 반근에게 맡겨 사도록 하죠.”

“내가 돈을 갖고 있어. 같이 사러 가자.”

범강림이 몸을 일으키자 서봉추도 따라나섰다.

“나도 같이 갑시다. 나간 김에 점포에 들러 옷도 좀 수선하게요.”

“겸사겸사 새해에 쓸 물건들도 사야겠어요.”

시녀가 말했다.

“그래, 도부(桃符: 새해 아침에 마귀를 쫓기 위해 문짝에 붙이는 작은 나뭇조각)랑 폭죽도 사고.”

“술도요, 술도.”

“조상님께 제사 지낼 때 쓸 향촉도요.”

“다 같이 갑시다. 아직 경성 구경도 못 했잖아요.”

형제들이 웃으며 일어섰다. 목소리를 낮추려 애쓰지 않았다면 천장이 들썩였을 정도로 시끄러웠다. 서무수가 정교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정교랑은 조용히 앉아 입꼬리만 올리고 있었다. 처음 안 후로 지금까지 이 여인은 표정 변화가 거의 없었다. 이 정도로 기분을 드러낸 건 드문 일이었다.

“시끄럽지? 다들 거친 사내들이라 법도 같은 걸 몰라.”

정교랑이 서무수를 쳐다봤다.

“가족끼리, 법도 따질 필요 없어요. 떠들썩해야 경사죠. 고마워요, 오라버니들. 어려워하지 않고, 서먹하게 대하지 않아서요.”

서무수는 수염을 만지려고 손을 갖다 대다가 수염을 깎았음을 뒤늦게 깨닫고 어색하게 턱만 두어 번 쓰다듬고는 웃음을 지었다.

“매번 이러면 어려워할 수밖에 없어.”

“오라버니 말이 맞아요.”

정교랑이 똑바로 앉으며 말했다.


거리는 폭죽 터지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새해가 다가오자 아이들은 웃고 떠들며 거리를 뛰어다녔다. 시녀는 토끼 모양 등을 들고 장난치는 아이를 피해 규원거로 들어갔다. 점원은 시녀를 보더니 반갑게 맞이했다.

“왔군요. 한 공자께서 누이가 오면 부르라고 하셨어요.”

시녀는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얼마 안 가 커다란 두봉을 걸친 한원조가 나왔다. 문밖에 있던 점원이 얼른 마차를 대령했다. 시녀는 마차에 올랐고 한원조는 말에 올랐다. 이들은 의원 한 사람과 함께 성 밖으로 향했다.

“낭자, 말씨를 들으니 강남 출신 같군.”

한원조가 말을 걸었다. 날씨가 화창하여 시녀는 휘장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커다란 두봉으로 꼭꼭 싸매고 있는 탓에 추위가 느껴지지 않아 한원조와 이야기를 나누기엔 딱 좋았다.

“네, 강주 사람이에요.”

시녀는 숨기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경성엔 오래 있으려고?”

한원조가 또 물었다.

“그건……·.”

시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모르겠어요. 윗전 뜻을 따라야죠.”

한원조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요.”

시녀가 말을 이었다.

“아시나 모르겠네요. 신선거는 중서문하성 비각 전사 유 교리와 왕래가 있어요.”

한원조는 멈칫하며 고개를 돌려 시녀를 쳐다봤다.

시녀는 한원조를 보며 살짝 미소지었다.

“그렇군.”

한원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알았다.”

한원조는 말을 세우거나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계속해서 경성 풍속을 물었다. 시녀 역시 별다른 내색 없이 웃고 떠들 뿐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 술집이 보이자 한원조가 말의 고삐를 조이며 손짓하여 하인을 불렀다.

“어찌 물어야 하는지 알지?”

한원조가 물었다. 쭉 같은 길을 걸어온지라 하인도 시녀와 한원조의 대화를 들은 터였다. 하인은 질문의 의도를 대번에 알아듣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 좀 물읍시다. 여기 취봉루란 곳이 있소?”

하인은 고개를 들어 밖에 있는 편액을 바라보면서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드러냈다. 다른 지방의 말씨였다. 아직 밥때가 아닌지라 사람은 많지 않았다. 계산대 근처에 서 있던 점원들은 그 말에 웃음을 지었다.

“외지 분인가 본데 취봉루를 아세요?”

“알다마다요. 3년 전에 우리 공자님께서 지나가던 길에 이곳에서 밥을 한 끼 드셨는데, 그 맛을 못 잊으신답니다. 그래서 오늘 특별히 찾아왔지요.”

하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3년 전이면 과거가 있던 해였다. 올해 다시 응시하려는 서생도 많으니 이상할 게 없었다.

“외지 분이 기억력도 참 좋으십니다. 여기가 바로 취봉루예요.”

“지금은 신선거로 이름이 바뀌었지만요.”

“신선도 잊기 힘든 맛이죠.”

점원들은 별다른 의심 없이 웃고 떠들며 하인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하인은 잡담을 나누는 척하며 잊지 않고 물어야 할 말을 물었다. 이어 식당에 손님들이 오기 시작하자 그 틈에 몰래 빠져나왔지만, 주의를 기울이는 이는 없었다. 하인은 재빨리 한원조와 시녀 쪽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안 멉니다. 저쪽 송가촌(宋家村)이래요.”

하인이 한쪽을 가리키며 나지막이 고했다.

“마을 어귀에서 동쪽으로 가다 보면 문 앞에 커다란 홰나무가 있는 집이 있답니다.”

한원조와 시녀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멀지 않은 곳에 마을이 있었다. 겨울철이라 벌판이 휑하다 보니 눈에 확 띄었다.

이대작은 본명이 아니고 요리를 배우면서 불린 별칭이었다.

“우권을 보러 왔소?”

나무처럼 바싹 마른 노파가 흐린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땅을 보러 온 게 아니고?”

한원조가 무슨 말인지 영문을 몰라 하자 시녀가 웃으며 나섰다.

“저희는 땅 사러 온 사람 아니에요. 병이 났다기에 저희 공자님께서 도울 게 없나 하고 오신 거예요.”

시녀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노파는 눈이 침침하고 귀가 잘 안 들리는 듯했다.

“그거 아주 좋은 땅이에요. 많이 쳐 주셔야 해.”

노파도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에 있던 아낙이 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왔다. 울고 있었는지 눈이 빨갰다.

“어머님, 누구 왔어요?”

아낙은 시녀를 보고 멈칫하더니, 한원조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공자님, 어쩐 일이세요?”

역시 한 공자와 함께 오니 일이 훨씬 수월하네. 시녀는 한원조를 힐끔 쳐다봤다. 역시 아씨는 주도면밀하셔. 그런데 아씨는 그냥 불쌍한 사람이라 도와주시는 건가? 그날 식당 앞에선 왜 안 나서시고?

시녀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한원조는 벌써 여인에게 예를 표하고 있었다. 한원조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사내의 힘없는 목소리가 안에서 들렸다.

“땅 팔지 마시오. 그건 당신이 혼수로 가져온 밭이잖소. 나 죽으면 개가해야지 혼자 어찌 살려고!”

참고 있던 눈물이 다시 주르륵 흘러내리자 아낙은 얼른 손으로 닦았다. 한원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십시오. 땅 사러 온 거 아닙니다.”

“뭐라고?”

문가에 서 있던 노파가 이번에는 제대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노파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며 물었다.

“땅 사러 온 게 아니오? 그럼 뭐 하러 왔는데?”

시녀는 노파를 쳐다보며 입을 삐죽거리고 큰 소리로 대꾸했다.

“우린, 도와주러 온 거라고요.”

한원조가 객잔으로 돌아왔을 무렵은 이미 오후였다. 좌불안석인 채로 기다리고 있던 두 동료는 돌아온 한원조를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자네가 정말 유괴라도 됐으면 우리가 자네 부모님을 어찌 봤겠나.”

동료들의 놀림에 한원조는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자리에 앉은 한원조는 따뜻한 차를 마시며 몸을 녹였다.

“유괴범도 아니고 협박도 안 했어.”

한원조가 웃으며 찻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그 부인과 사내를 보러 같이 갔었지. 그 시녀가 돈도 주고 의원을 불러 치료도 해 줬어. 그 사내의 병이 심각한 건 아니더라고. 마음이 울적해서 그렇지. 마음 풀도록 잘 달랬으니 큰일은 없을 거야.”

동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한원조가 화제를 돌리며 두 사람을 보고 씩 웃었다.

“신선거가 중서문하성 비각 전사 유장, 즉 유옥탁과 관계된 것 같아.”

두 동료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헙, 숨을 들이켰다. 다들 성인인지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았다.

“원조!”

동료들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심상치 않은 일이야.”

계속 찻잔을 빙빙 돌리던 한원조는 그래도 표정이 괜찮았다.

“원조, 대체 누가 자네를 공격 무기로 쓰려는 거지?”

“누구든 간에 이 일은 여기서 그만둬. 누가 와서 뭐라고 하든 말일세. 원조, 자네는 불의한 일을 보고 나서서 도와준 것뿐이야. 이제부턴 시험 준비에 열중해. 나머진 신경 쓰지 말고.”

“경성 조당의 일은 우리 같은 애송이가 알 수 있는 게 아냐. 흥미로운 연애담이 나오려나 했더니 이건……·. 눈 내리는 겨울밤의 애정사는 책 속에만 있는 것이로군.”

동료들이 걱정을 늘어놓았다. 거기까지 얘기했을 때 쾅 소리가 나며 창문이 열렸다. 두 사람은 기겁하여 쳐다봤지만, 바람의 소행이었다. 한원조는 도리어 웃음을 터뜨리며 무거운 분위기를 깨고 유쾌한 표정으로 일어나 창을 닫았다.

“너무 깊이 생각할 것 없어. 그냥 불의를 보고 도와준 단순한 일일 수도 있지. 안 그럼 신선거와 유 교리의 관계를 왜 귀띔했겠나?”

“세상에 그리 단순한 일이 어디 있나.”

동료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원조는 무거운 헛기침을 했다. 동료들이 쳐다보자 한원조가 손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난 그저 불의를 못 참고 그 부인을 도와준 거야. 그때 유 교리와의 관계를 알았어도 나섰을 걸세. 단순하잖아?”

한원조는 미소를 지었고 두 동료도 웃기 시작했다.

“원조, 자네 같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그 시녀의 윗전도 그런 사람 중 하나일지 모르지.”

한원조가 웃으며 말하자 두 동료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쨌거나 원조, 이 일은 여기까지로 해. 누가 또 찾아오면 어떻게든 피하라고.”

동료들이 진지한 얼굴로 타일렀지만 한원조는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을 보니 북풍이 불었다. 장난기 많은 두 점원이 눈밭으로 폭죽을 던져 눈보라를 만들고 있었다. 한원조는 그 모습에 웃으며 창문을 단단히 잠가 바깥에서 들리는 폭죽 소리를 차단했다.


수왕부는 장례를 마친 후였지만 상중인지라 붉은색의 화려한 장식은 생략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집에 비해 새해 분위기가 덜했다.

진안 군왕이 수왕비에게 예를 올렸다.

“폐하와 태후마마께서 돌아오라고 널 재촉하신다니 정말 잘됐구나. 새해가 되면 바로 돌아가거라.”

수왕비는 기쁜 표정이었지만 진안 군왕은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어머니, 부왕 곁을 더 지켜야 합니다. 최소 반년은 지나야……·.”

“너도 참, 무슨 소릴 하는 거냐.”

수왕비가 말을 끊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반년에 돌아가는 여정까지 생각해 보아라. 그럼 근 일 년이나 경성을 비우게 돼. 일 년이면 태후마마와 폐하도 너와 서먹해지실 거다.”

진안 군왕은 고개를 숙였다.

“너도 이제 다 컸는데 감정을 앞세워서야 쓰겠느냐. 군왕에 봉해졌다고는 하나 아직 봉지도 못 받았으니, 폐하의 마음을 잃어선 안 된다.”

수왕비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진안 군왕은 예를 올리며 알았다고 했다.

“대황자와 이황자는 아직 어리다. 그나마 넌 궁에서 황자 대우를 받으며 함께 먹고 자고 했으니 정이 남다르지. 그건 바란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아니야.”

수왕비가 말을 이었다. 진안 군왕은 엎드려 다시 한번 예를 올렸다.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어머니.”

진안 군왕이 고개를 들었다. 감격과 친근함이 담긴 표정이었다. 수왕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우의 국공 작위도 확실히 매듭지어야 하고.”

수왕비는 흐뭇하면서도 근심 어린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네 아우의 국공 지위는 네 군왕 지위에 못 미치잖니. 네 형제들이 왕부에 남아 있는 건 예법에 안 맞아.”

진안 군왕은 수왕비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네. 소자, 바로 상경길에 오르겠습니다.”


대문으로 들어온 시녀는 찬바람에 두봉을 바짝 여미며 걸어갔다. 마주치는 여종들이나 몸종들은 다들 깍듯하게 길을 비켜섰다.

“반근 낭자.”

웃으며 말을 건네는 이도 있었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몸종은 고개를 숙인 채 길을 비켜서려다가, ‘반근’이라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네 하고 대답하며 고개를 들었다. 아리따운 시녀가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몸종은 멍해졌다.

“반근 낭자, 어디 다녀오나 봐?”

여종 하나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시녀는 그렇다고 하며 웃음을 지었다.

“네. 날이 추워서 어멈도 바쁘죠?”

“아니야, 바쁘긴.”

여종은 웃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바쁘기야 하지, 곧 새해잖아.”

“고생이 많네요.”

시녀가 웃었다. 여종은 밝게 웃으며 시녀가 모퉁이를 돌아 걸어가는 모습을 쳐다봤다.

“세상에, 저 낭자는 어쩜 저렇게 붙임성이 좋을까. 곱기도 하지.”

그러더니 옆에 있는 이에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 여편네들 말로는 성격이 불같다던데 전혀 아니야.”

“그러게요.”

옆에 있던 몸종도 멀어져가는 시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동의했다.

“듣기론 부인과 일곱째 아씨한테도 말대답을 했대요. 그런데 직접 보니까 예절을 모르는 사람 같진 않아요.”

시녀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홱 돌렸다. 여종들과 몸종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시녀의 시선은 고개를 숙인 채 몸을 감싸고 걸어오던 몸종에게서 멈췄다. 몸종은 추운 듯 몸을 떨고 있었다.

“저기, 언니.”

시녀가 몸종을 보고 웃으며 말을 걸었다. 하지만 몸종은 못 들은 척 종종걸음으로 시녀를 지나쳐 가 버렸다. 시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웃으며 두봉을 바짝 여민 시녀는 마당 안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반근은 한참을 걷고 나서야 조심스레 고개를 돌렸다. 문 앞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전에는 밤에만 어쩌다 마주치곤 했는데, 저게 바로 아씨의 새 반근이구나. 훌륭하네. 얼굴도 곱고 말도 잘하고……·. 반근은 멍하니 한참을 보다가 손을 들어 눈물을 닦고는 고개를 숙인 채 몸을 감싸 안으며 천천히 걸어갔다.

회랑 아래에 서 있던 몸종들은 시녀가 보이자 예를 표했다. 주 부인이 새로 보낸 몸종들이었다. 웃어른이 내린 걸 거절할 수는 없는지라 정교랑은 전부 남겨 두기로 했다. 일을 시키고 말고는 별개의 일이었지만.

시녀가 웃으며 몸종들에게 인사했다. 두 몸종이 얼른 문을 열어 주었다. 시녀가 안으로 들어가자 이들은 또 말없이 문을 닫았다. 병풍 앞의 정교랑은 팔걸이 책상에 기대 책을 보고 있었다.

“아씨, 잘 처리했어요. 의원이 봤는데 목숨은 지장 없대요. 돈도 줬고요. 의원 말로는 마음의 병이래요. 한 공자가 위로의 말을 건넸더니 병세가 한결 좋아지더라고요.”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책을 내려놓았다.

“그 사람들이 널 기억하겠지?”

정교랑의 물음에 시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인이랑 한참을 얘기했으니 분명 기억할 거예요. 한 공자와 함께 가서 딱히 의심하지도 않고요. 절 믿는 눈치였어요.”

“그거면 충분해.”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씨, 이젠 뭘 할까요?”

시녀가 궁금한 듯 묻자 정교랑이 시녀를 힐끔 쳐다봤다.

“아무것도 안 해. 이미, 다 했잖아?”

시녀는 놀랐다가 곧 실소를 터뜨렸다.

“아씨, 이게 다예요?”

“이게 다야.”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물었다.

“안 그럼?”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렇지, 안 그럼 뭐? 시녀가 입을 삐죽거리며 웃었다.

“책 읽는 거 들을래.”

시녀는 정교랑의 말에 네 하고 대답한 후 책을 받았다.

“지난번에 어디까지 읽었더라……·.”

시녀가 책을 펼치며 혼잣말을 했다.

“한식을 전후하여 호수에는 화려하게 장식한 배가 많아졌다.”

정교랑의 말에 시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씨는 정말 기억력이 좋으세요.”

시녀가 웃으며 책을 펼치고 낭랑한 목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다리처럼 길게 이어졌다. 첫 번째 배, 두 번째 배, 세 번째 배, 네 번째 배, 다섯 번째 배……·.”

그믐 전날은 명절 맞이로 가장 바쁜 날이었다. 바깥양반들은 조상께 제를 올릴 준비에 여념이 없었고, 안주인들은 자식들의 옷을 챙기고 앞으로 며칠 동안 이어질 연회 준비로 바빴다. 아직 나이가 어린 이들은 한담을 나누며 들뜬 마음으로 새해를 기다렸다.

명절 분위기 속에서도 조용히 지내던 정교랑과 시녀가 문밖으로 나섰다.

“이런 때에 외출을 한다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주 부인이 물었다. 예전의 다정하고 온화한 표정은 이미 벗어던진 뒤였다.

“내일이면 그믐이잖아. 교교, 또 어딜 가겠단 거야?”

정교랑은 뒤돌아 주 부인을 쳐다보며 잠자코 있었다.

“부인, 내일이 그믐이라 저희 아씨께서 나가시겠단 거예요.”

시녀는 놀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부인, 잊으셨어요? 저희 아씨는 주씨도 아닌데, 외조모님 댁에서 그믐을 보내게 하시려고요?”

시집간 여식은 친정집에서 그믐을 보낼 수 없다는 법도가 있긴 했다. 그런데 외손녀도 안 되나? 주 부인은 말문이 막혔다.

“아무리 밖에 나와 있다지만 그래도 명절인데 저희 아씨께서도 조상님께 제는 올려야 하잖아요. 경성에 집이 있으니 그리로 가면 돼요. 그래야 두 집안 조상님들이 제삿밥 앞에서 당황하시는 일이 없죠.”

“아무리 그래도, 괜찮을까?”

주 부인은 결정을 못 내리겠는 눈치였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주육낭은 사환이 들고 있던 채찍부터 낚아챘다.

“어머니는 일 보십시오. 제가 데려다주겠습니다.”

갈 테면 가라. 집에 있어 봤자 말썽이나 피우지. 주 부인은 심드렁하게 손을 내저었다.

“그래, 조심히 다녀오고.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떠들썩하던 거리엔 인적이 드물어졌다. 새해 선물을 바리바리 싸 들고 바삐 걸음을 옮기는 행인만 이따금 보였다. 주육낭이 말고삐를 잡아당기자 소리를 들은 사환이 문을 열고 뛰어나왔다.

“아씨, 오셨어요?”

사환이 큰 소리로 외쳤다. 문이 열리면서 안에서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누이 왔구나.”

두 사내가 손을 비비며 따라 나왔다.

“돼지머리를 삶고 있었어.”

“넷째 도련님, 다섯째 도련님, 돼지머리도 삶을 줄 아세요?”

시녀는 놀란 목소리로 물으며 정교랑을 부축해 마차에서 내렸다.

“그럼, 그럼.”

두 사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이, 어서 들어가자. 날씨가 춥네.”

한쪽 옆에 주육낭이 서 있었지만 다들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영락없는 마부 취급이었다. 소리를 듣고 안에서 또 몇 명이 달려 나왔다. 누이를 부르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정겨운 목소리로 서로 누이와 오라버니를 불러댔다.

주육낭은 웃고 떠드는 남녀를 힐끔 보고 냉소를 짓더니, 들고 있던 채찍을 휙 내던졌다. 눈치 빠르고 몸이 날렵한 사내가 재빨리 손을 뻗어 받았다. 웃음소리가 뚝 그치고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주육낭은 길을 따라 성큼성큼 걸어 벌써 저만치 가 있었다. 정교랑은 못 본 척 시녀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사내들도 곧 정신을 차렸다.

“누이의 외가는 대체 어떤 댁이야. 마부도 저리 늠름하네.”

“그러게. 아까 휙 던질 때 보니까 팔심이 장난 아니야. 긴 창이었으면 아주 사람을 꿰뚫을 정도였어.”

사내들이 떠들어대며 마차를 몰아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 폭죽 터지는 소리가 났다.

“금가아! 장난치지 말랬지!”

여인의 고함 소리는 떠들썩하던 마당에 더욱 생기를 불어넣었다. 사내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문을 닫았다. 문에는 악귀를 쫓는 두 문신(門神)인 신다(神茶)와 울루(鬱壘)의 부적이 걸려 있었고, 바람을 따라 흔들리는 붉은 등롱은 명절 분위기를 더했다.

거친 사내들뿐이었지만 집 안팎은 깨끗하게 청소한 상태였다. 그러면서도 예법을 지키기 위해 정교랑의 방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반근이 고생이네.”

방을 정리하고 나오는 시녀를 보며 서무수가 말했다.

“아직 경성이 익숙하지 않아서 하녀를 함부로 들이기도 뭣하고.”

범강림도 거들었다.

“별로 안 힘들어요. 새 집이고 아씨께서 계속 지내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걸레질만 한 번씩 하면 되는데 고생은요. 고생은 도련님들이 하셨죠. 새해 준비를 잘 해놓으셨네요.”

“다들 외로운 처지라 뭐든 직접 하다 보니 이런 건 익숙해.”

시녀의 말에 범강림이 웃으며 대꾸했다.

안에 등불을 여섯 개나 켜 놓고 회랑 아래에도 등롱을 두 개나 건 덕에, 안팎은 대낮처럼 밝았다. 시녀는 금가아, 사내들과 함께 음식을 바삐 옮겨 담았다. 곧 음식을 들여갔다. 금가아도 문가에 작은 탁자를 놓은 후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하지만 시녀가 금가아에게 건넨 건 차였다.

“누나, 나도 술 마실래.”

“넌 밤에 문도 지켜야 하는데 무슨 술이야. 멀쩡한 정신으로도 길을 잃었으면서 술까지 마시면 어쩌려고.”

시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금가아의 얼굴이 빨개지자 방 안에 웃음소리가 퍼졌다.

“금가아가 아직 경성을 잘 모르긴 하지만, 이제 길을 잃을 일은 없을 거야. 반근, 너무 놀리지 마.”

범강림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요. 큰 도련님 말씀이 맞아요.”

금가아가 신나서 말했다. 시녀는 웃으며 정교랑 뒤로 가서 앉았다. 서무수가 정교랑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진 상공 댁에 보낼 새해 선물은 내가 직접 갖다 줬는데, 진 상공은 댁에 안 계셨어. 진 부인이 직접 나와 맞이하면서 누이에게 줄 새 옷을 전해 줬지. 주는 거니까 받아야 할 것 같더라고. 그래서 내가 누이 대신 받아 놨어.”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 뜻대로 해요.”

“진 부인이 누이더러 명절 지나면 놀러 오래.”

서무수가 말했다. 진씨 저택에서 보고 겪은 일을 떠올리니 아직도 가슴이 쿵쾅거렸다. 진 상공 댁 문턱을 넘어 보다니. 막 경성에 도착했을 때 전에 알고 지내던 형제들을 찾아봤지만, 대부분 성을 지키는 하급 관리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문간방에서 푸대접만 당했을 뿐, 대청엔 들어가 보지도 못했다.

그러던 자신이 눈 깜짝할 새에 진소 상공 댁 대문을 넘었다. 게다가 진씨 가문 안주인, 다시 말해 고명 부인이 직접 나와 맞이하기까지. 서무수는 저도 모르게 정교랑을 쳐다봤다.

등불 아래에 있는 정교랑의 표정은 여느 때와 같았다. 처음 만난 때부터 지금까지 늘 변함이 없었다. 세상사는 전혀 모른다는 듯한 표정. 기쁠 일도, 슬플 일도, 노여워할 일도, 원망할 일도 없다는 듯이.

범강림이 나서서 건배를 제안하면서 떠들썩한 연회가 시작됐다. 정교랑이 자리하긴 했지만 사내들도 이젠 어느 정도 익숙해졌고 술 몇 잔을 걸친 터라 스스럼없이 웃고 떠드는 분위기가 됐다.

음식은 얼마 먹지도 못했으면서 술을 비우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결국 시녀는 술을 아예 단지째 들고 왔고, 술을 못 마시게 했던 금가아도 분위기에 섞여 몇 잔 들이켰다.

“세상에, 이렇게 성대하게 차려놓고 새해를 맞이할 날이 오다니.”

서봉추는 술잔을 들고 불콰해진 얼굴로 취한 눈을 게슴츠레 뜨며 말했다. 이어 고개를 젖혀 가며 술을 들이켰지만, 입으로 들어가는 술보다 몸에 흘린 술이 더 많았다.

“그러게, 몇 달 전만 해도 쫓기는 목숨이었잖아. 망할 관군들한테 붙잡혀 감방에서 죽을 줄 알았는데, 이런 날이 오다니. 경성에서 술을 다 퍼마시고.”

다른 형제도 서봉추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동조했다. 그 말에 서무수가 움찔하며 반사적으로 맞은편의 정교랑을 쳐다봤다. 정교랑은 아무 말도 못 들은 듯 무뚝뚝한 표정으로 문밖을 보고 있었다.

서무수가 그만하라고 소리치려던 걸 간신히 삼키는데, 쨍그랑하는 소리가 났다. 취한 서봉추가 곯아떨어지면서 술잔을 떨어뜨린 소리였다. 다른 형제들을 보니 대부분 만취해 있거나 누워 있었다. 탁자에 기댄 채 무어라 중얼거리기도 했다. 금가아마저 술에 취해 곯아떨어져 있었다.

“누이한테 웃음거리가 됐네.”

서무수가 웃으며 말하자 정교랑이 서무수를 쳐다봤다.

“기분 좋아요. 웃음거리 보여 줘서.”

멈칫하던 서무수가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서무수가 정교랑을 향해 술잔을 들었다. 정교랑은 앞에 있던 물잔을 들었고, 두 사람은 각자 잔을 비웠다.

시녀는 방 안에 있는 화로에 숯을 더 넣고 밖에 나가 아궁이를 살폈다. 방 안은 따뜻했다. 술에 취해 잠든 사내들은 한기를 느끼기는커녕 잠꼬대를 하며 옷을 풀어헤치기도 했다.

“늦었는데 누이도 이만 가서 쉬어.”

서무수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믐이니 밤을 새워야죠. 안 자요.”

“그럼 날이 추우니 누이도 술 한 잔 마시지.”

서무수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이 술은, 맛없어요.”

정교랑의 말에 서무수는 웃으며 혼자 마셨다.

“술이 맛없다는 거야? 아니면 이 술이 맛없다는 거야?”

서무수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이 술이요.”

정교랑이 서무수를 쳐다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맛없어요.”

서무수가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그렇지. 격부를 하며 노래까지 부르던 누이가 어찌 술을 못 마시나 했네.”

웃음소리와 함께 밖에서 이따금 들리던 폭죽 소리가 점점 커졌다. 사내들도 잠에서 깨 몽롱한 채로 밖을 쳐다봤다.

“새해다, 새해. 폭죽 터뜨리러 갑시다, 어서요.”

서봉추는 소리치며 비틀비틀 뛰어나갔고, 잠에서 깬 나머지 사내들도 웃으며 따라 나갔다.

마당에 피운 모닥불에 대나무를 하나씩 던지자 폭죽 소리를 내며 터졌다. 시녀는 귀를 틀어막고 웃으며 정교랑 옆에 바짝 붙어 있었다.

“반근, 누이한테 두봉 갖다 줘. 바람이 차네.”

서무수가 말했다. 시녀는 혀를 날름거리고는 얼른 안에 들어가 두봉을 가져다 정교랑에게 걸쳐 주었다.

“반근 누나, 누나도 하나 태우면서 복 받아.”

금가아가 대나무를 들고 소리쳤다. 시녀도 아직 어린 나이인지라 웃으며 치마를 들고 다가갔다. 회랑 아래엔 서무수와 정교랑만 남아 나란히 서 있었다.

“오라버니도 가서 놀아요.”

“난 글공부를 했잖아. 이런 거 안 해.”

서무수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자 정교랑은 또다시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아, 참.”

서무수가 무언가 떠오른 듯 소매에서 물건 하나를 꺼내 건넸다.

“새해잖아. 가진 것 중에 딱히 좋은 게 없네. 누이한테 주는 새해 선물이야. 약소하지만 받아 줘.”

나한테 주는, 새해 선물? 정교랑은 서무수의 손을 잠시 쳐다보다가 손을 뻗어 받았다. 모닥불과 등롱에 비춰 보니 은으로 만든 빗이었는데, 오래되고 소박한 양식이었다.

“어머니가 물려주신 건데, 난 갖고 있어도 쓸 데가 없네.”

서무수가 어색해하며 말하다가 웃음을 지었다.

“아니, 말을 잘못했어. 선물은 진심을 전하는 거라고 하지. 이건 내가 가진 물건 중에 가장 귀중한 거야. 누이가 받아 줬으면 해.”

정교랑은 빗을 들어 머리에 꽂더니 고개를 들어 서무수를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었다.

마당에서는 연신 폭죽 터지는 소리가 났고, 이웃집과 거리에서 나는 폭죽 소리도 함께 어우러졌다. 어느덧 동녘이 밝아오며 새해가 시작되고 있었다.

날이 밝을 무렵, 황궁에서 황제를 알현한 이들이 줄지어 나왔다. 예복을 갖춰 입은 이들은 조용히 침묵을 지키다가 궁문 밖 길가로 나온 후에야 긴 한숨을 토하며 떠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궁문 밖에서 소곤소곤 정담을 나누며 반갑게 웃고 떠들었다. 모처럼 찾아온 명절 휴가에 술 약속을 잡기도 했다.

진소의 부인도 인파에 섞여 있었다. 며느리를 대동하고 온 다른 집 부인들과 달리 어린 몸종 하나만 데려온 진 부인은 쓸쓸해 보였다.

“경사네요.”

고명 부인의 예복을 차려입은 동 부인이 진 부인의 손을 잡으며 속삭였다. 밝은 표정이었다. 점잖은 진 부인도 그 말에 기쁜 표정을 드러냈다. 진 부인의 맏며느리는 회임을 하여 함께 입궐하지 못한 터였다.

진소의 집안은 손이 귀했다. 진소의 형제는 본디 넷이었지만 첫째와 둘째가 연이어 세상을 뜨는 바람에 진소와 진 사노야만 남게 됐다. 진소는 혼례가 늦기도 했거니와 여기저기 부임지를 전전하느라 나이가 꽤 찬 후에야 아들을 보고 첩실을 셋 들여 간신히 삼남 사녀를 두었다. 그러던 것이 이번에 맏아들의 부인과 시첩이 동시에 회임하고 진 노태야의 중병도 완치됐으니 실로 집안의 경사였다.

하지만 경사는 어디까지나 집안 식구들끼리의 일이고, 남들이 알면 시기를 살 만한 일이 아니던가. 그래서 밖에는 소문내지 않고 가까운 이들에게만 알린 터였다.

“듣자니 이 태의가 그 댁 며느리를 살피고 있다면서요.”

동 부인이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 태의는 진안 군왕의 태의잖아요. 그분을 모셔 온 건 잘한 일이에요.”

동 부인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진안 군왕을 집으로 모셔 올 수 있으면, 아마 진 부인도……·.”

얼굴이 붉어진 진 부인은 동 부인을 살짝 밀어냈다.

“동 언니, 점점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네요.”

동 부인은 입을 가리고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마차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별안간 앞쪽이 조용해졌다. 진 부인과 동 부인도 이야기를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앞쪽에서 종종걸음으로 걸어오던 어린 낭자를 본 두 여인의 눈빛이 반짝였다.

엄숙하고 경건한 겨울 황궁이었건만 낭자의 예복은 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났다. 낭자는 짙은 청색의 두봉을 걸치고 커다란 두모를 쓴 모습이었는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두봉이 휘날리면서 안에 입은 암청색 옷자락이 드러났다. 금실로 수를 놓고 비단으로 허리를 동여맨 후 긴 옷소매를 앞으로 엇갈리게 두자 흡사 물 위로 떨어지는 먹물처럼 색이 번져 나가는 듯했다.

낭자가 걸어오자 다른 여인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저쪽의 사내들도 저도 모르게 힐끔거렸다. 뉘 집 낭자가 저리 단정하면서도 우아하고 선녀처럼 아름다울까.

“어머니.”

진 부인을 본 낭자는 소리쳐 부르며 걸음을 재촉했다. 낭자는 손을 뻗어 진 부인을 부축하고 살짝 고개를 들어 얼굴을 반쯤 드러냈다.

“십팔랑.”

그제야 자신의 딸을 알아본 진 부인이 깜짝 놀랐다.

“아니, 네가 어떻게 여길?”

“숙모님과 언니들이 마음이 안 놓인다며 저더러 마중을 나가래요.”

진십팔랑이 손난로를 건네주며 이미 식어 버린 진 부인의 손난로를 받았다. 밤새 잠도 못 자고 찬바람을 맞으며 한나절을 서 있었던 진 부인은 따뜻한 난로가 손에 들어오자 따스함과 안도를 느꼈다.

“그래.”

진 부인은 사랑이 지극한 눈길로 딸을 쳐다봤다.

“세상에, 십팔랑. 며칠 못 본 사이에 또 이렇게 컸구나.”

동 부인이 진 부인의 손을 놓고 진십팔랑의 손을 잡으며 위아래를 꼼꼼히 훑었다.

“장화를 신어서 그래요.”

진십팔랑이 웃으며 대답했다. 동 부인은 웃으며 진십팔랑을 처음 본 것처럼 몸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이리저리 살폈다.

“그래도 많이 컸지, 이제 열네 살인데.”

동 부인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래요, 어서 마차에 오르죠. 날도 추운데.”

진 부인은 동 부인이 그만 쳐다보도록 웃으며 말을 건넸다. 두 부인이 앞에서 걸어가고 진십팔랑은 몇 걸음 뒤에서 걸었다. 오가는 인파 속에서 마차에 도착할 때까지 수많은 시선이 진십팔랑에게 집중됐고, 소곤거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진씨 가문 여식이라고?”

“나이가 꽤 찼네.”


마차가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며느리와 여종들, 몸종들이 줄줄이 나왔다. 진 부인은 옷을 갈아입고 탕을 마시며 피로를 풀었다.

“십팔랑, 그 옷은 누가 지은 거야?”

식사를 하던 진 부인이 함께 모여 웃고 떠들던 딸들을 보며 물었다. 두봉을 벗고 겉옷만 입은 진십팔랑이 웃으며 일어났다.

“제가 이렇게 만들어 달라고 했어요. 어머니, 예뻐 보여요?”

꽃처럼 싱그러운 나이의 풋풋한 소녀가 점잖은 색의 옷을 입으니 그것대로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그런데 정초에 입기엔 좀 수수하구나.”

그러면서도 진 부인은 웃기만 할 뿐 나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십팔랑, 이거 정 언니 옷 따라 만든 거잖아!”

여종을 따라 들어오던 단랑이 옷을 보더니 대번에 외쳤다. 그 말에 다들 퍼뜩 깨달았다. 어쩐지 눈에 익다 싶었는데 의문이 풀린 것이다.

“십팔랑, 우리한테 말도 안 하고 혼자만 해 입었네.”

“빨리 말해. 한 벌만 지은 거야? 아니면 여러 벌?”

낭자들이 십팔랑을 에워싸고 조잘조잘 떠들면서 방 안은 더욱 시끄러워졌다. 진단랑도 그 사이에서 시끄럽게 목소리를 높였다.

시끄러운 진씨 저택과 달리 옥대교 근처 정교랑의 저택은 조용했다. 부모 형제가 없다 보니 세배를 하거나 고향을 찾아갈 필요도 없었다. 날이 밝을 무렵 제사를 지낸 후 정교랑과 서무수 등은 각자 쉬러 갔고, 잠에서 깼을 땐 이미 오후였다.

서무수 등은 몸을 씻고 면도를 한 다음 새 옷으로 갈아입고 대문을 열어 두었다. 몇몇은 마당에서 웃고 떠들고 몇몇은 대문 밖으로 나가 거리 풍경을 봤다.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 보니 정교랑과 시녀가 나오고 있었다. 둘 역시 새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마당에 있던 사내들은 순간 넋을 잃었다.

“누이, 새 옷 입으니까 못 알아보겠어!”

서봉추가 가장 먼저 소리쳤다. 그 말에 대문 밖에 나가 있던 사내들까지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 정교랑은 새하얀 비단 치마에 붉고 긴 저고리를 입었는데, 소맷부리와 치맛자락엔 커다란 금빛 자수가 있었다. 언제나 길게 내려뜨리고 있던 머리는 낮게 틀어 올리고, 붉은 비녀 대신 작은 은빗을 꽂았다. 은빗을 쳐다보던 서무수가 시선을 거뒀다.

“역시 나이가 어리니 이렇게 입는 게 더 예쁘네!”

서봉추도 옆에서 거들었다.

“이게 좋아, 이게. 매일 점잖은 거만 입으니까 차가워 보이잖아. 어쩔 땐 좀 무섭다니까.”

범강림이 눈을 부라렸다.

“말을 할 줄 모르면 입 다물고 있어. 누이는 어떻게 입든 다 예쁘니까.”

시녀는 빙그레 웃으며 정교랑의 옷을 쳐다봤다.

“진 부인이 보내 준 새 옷이에요.”

시녀가 서무수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가져오신 셋째 도련님께 감사드려요.”

서무수는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잠자코 웃기만 했다. 정교랑은 벌써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시녀가 식사를 가져왔다. 서무수는 잠시 머뭇거리며 회랑 아래에 서 있었다.

“셋째 오라버니.”

정교랑이 부르는 소리에 서무수가 얼른 돌아섰다.

“다들 식사는 했어요?”

“먹었어, 먹었어.”

정교랑의 물음에 서무수가 웃으며 대답했다.

“좋아요. 오라버니한테, 부탁할 일이 있어요.”

서무수가 눈빛을 반짝이며 안에 단정히 앉은 여인을 쳐다봤다. 여느 때와 다른 차림새지만 화려한 옷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여전히 그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어두운 옷을 입지 않아도 그 위엄엔 변함이 없었다.

마당에 있던 형제들은 전부 대문 밖으로 나갔다.

“새로 이사 왔어요?”

“네, 잘 부탁드립니다.”

“서북 말씨 같네?”

“귀도 참 밝으십니다.”

대문 앞에는 이웃 사람들도 나와 있었다. 잘 모르는 사이긴 했지만 새해 덕담을 나누며 자연스레 말을 걸었다.

서무수가 맞은편에 앉은 정교랑을 쳐다봤다.

“누이, 무슨 일인지 편히 말해.”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 며칠, 성 밖에 있는, 신선거라는 식당에 좀 다녀와요.”

서무수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서 아마 식당을 내놓을 거예요.”

정교랑의 말에 서무수가 멈칫했다.

“오라버니들이 사들여요.”

서무수가 놀란 눈으로 정교랑을 쳐다봤다. 무언가 숨은 정보를 읽으려 했지만 아쉽게도 여인은 언제나처럼 무뚝뚝한 표정이었다.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는 뜻을 전할 때를 제외하면, 늘 표정이 없었다.

“알겠어.”

서무수가 대답했다.

형제들은 정교랑의 마차가 길에서 사라져 보이지 않은 후에야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새해 첫날이 이렇게 지나간 것이다. 형제들이 왁자지껄 밥을 지으러 간 사이, 범강림과 서무수가 단정히 앉았다.

“우리더러 식당을 사라고?”

범강림 역시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서무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나서서 식당을 사래요.”

서무수가 말을 고쳐 주었다.

“그게, 무슨 뜻이지?”

범강림은 이해가 안 가는 듯 물었다.

“그냥 누이가 식당을 사려는 거 아닐까요?”

생각에 잠겼던 서무수가 불쑥 말을 내뱉고는 자기가 생각해도 웃긴지 웃어 버렸다. 범강림도 머리를 긁적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그렇게 간단한 일일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