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75)

날이 밝을 무렵, 진소는 벌써 궁문을 나와 황성 근처에 도착해 있었다. 조회가 끝나고 왁자지껄 떠들며 나오던 문무백관이 일사불란하게 길을 열었다. 두 달 가까이 휴가를 냈던 이부의 진 상공이 다시 입조한 첫날이었다. 앞뒤, 좌우에서 수많은 눈길이 진소에게 쏠렸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눈길도 있고 시기하는 눈길도 있었다.

방금 조회를 마친 후, 조회를 주재한 대황자가 친히 진소를 불러 폐하의 부름을 전했기 때문이었다. 황제가 진소를 얼마나 믿고 신뢰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진소가 부친상을 치르는 동안 그 자리를 대신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 기회가 사라지게 됐다.

태의도 속수무책이던 병을 고치다니. 진소는 운이 좋기도 하지. 진소는 그런 눈길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진소의 머릿속은 온통 방금 폐하를 알현한 생각뿐이었다. 황제는 대황자를 물린 후 진소와 단독으로 정사를 논하며 환담을 나누었다. 몸이 안 좋다던 황제는 정신이 맑아 보였고 황제가 진소를 얼마나 신임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어릴 때 이름을 날린 진소는 부침이 없이 성장했다. 진사 급제를 하자 황제는 진소를 발탁하여 경험을 쌓게 했다. 곧이어 중임을 맡길 생각이었지만 모친이 병사했다. 물론 기복출사(起復出仕: 관례를 깨고 상중에 벼슬함)를 명할 수도 있었으나, 황제는 진소의 명성을 지켜 주고자 그리하지 않았다. 진소가 마침내 삼년상을 마치고 돌아와 중임을 맡기려던 때에 그 부친이 또……·.

실로 천만다행이었다. 황제도 안도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농담을 건네지도 않을 터였다.

“경성의 참새는 씨가 마를 지경이라더군. 진씨 가문의 비법 덕에 말이야. 다음엔 짐도 진씨 가문의 참새 요리를 맛보게 해 주게.”

진소는 웃음을 터뜨렸다. 글재주로 일찌감치 조야에 명성을 날린 자신이지만, 요리로 경성 백성에게까지 이름이 날 줄은 몰랐다. 이러다가 백성들 사이에서 진참새라는 별호로 불리는 게 아닐까? 신동에서 참새라니, 그 격차가 커도 너무 컸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그 여인을 집으로 들인 후 부친의 병세가 좋아졌다. 가장 먼저 참새를 먹고 싶다고 한 것도 그 여인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찬모들도 그런 요리를 만들진 못했을 것이다. 상에 올리기조차 부끄러운 상스러운 음식에서 그리 훌륭한 맛이 날 줄이야. 지나치게 속된 것은 극도로 우아하다고 했던가. 생각할수록 기괴하고 재미있는 여인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진소는 평상복으로 갈아입자마자 부친의 거처로 갔다. 마당 문을 들어서자마자 활짝 열린 대청 문안에 앉아 있는 노인과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수척하긴 했지만 정정한 모습으로 의자에 기대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는 백발의 노인과 소매가 크고 수수한 옷을 입고 흑발을 내려뜨린 채 단정히 앉아 있는 소녀의 모습이었다. 둘은 바둑판을 두고 마주 앉아 있었고, 바둑판 옆에는 붉은 옷을 입고 손으로 머리를 괸 채 몸을 이리저리 흔드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진소는 대혁도(對奕圖: 대국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와 같은 정경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듯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낭자, 바둑을 둘 줄 아시오?”

진 노태야가 물었다. 정교랑은 벌써 한참 동안 바둑판을 쳐다보고 있었다.

“생각이 안 나요.”

생각이 안 난다? 할 줄 안 다는 거야, 모른다는 거야? 진 노태야는 순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전 쌍육을 놀 줄 알아요. 할아버지, 언니랑 같이 쌍육 놀아요.”

단랑이 두 사람의 말을 끊으며 끼어들었다. 노인은 검은 돌을 내려놓은 후 잠시 있다가 흰 돌을 내려놓았다. 알고 보니 노인 혼자 즐기는 중이었다.

“아버지.”

단랑이 문 앞에 선 부친을 단번에 알아보고 신이 나서 소리쳤다. 진소가 들어와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리며 부친에게 문후를 여쭌 후 정교랑에게 인사했다. 정교랑도 답례했다.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아직, 너무 많이 걷는 건 안 돼요.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죠. 지금 병이 재발하면, 돈을 아무리 많이 준대도, 저 역시 못 고쳐요.”

진 노태야는 껄껄 웃으며 손으로 다리를 툭툭 쳤다. 걷고 싶은 유혹은 실로 컸다.

“닷새만 더 침을 맞으면, 약만 드셔도, 회복될 거예요.”

정교랑의 말에 두 부자는 크게 기뻐했다. 이제는 그런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게 기뻤고, 완쾌할 날이 머지않았다는 사실이 기뻤다.

“정말 고맙습니다, 낭자.”

진소가 진지한 얼굴로 다시 한번 감사를 표했다. 정교랑은 두 부자가 이야기를 나누도록 먼저 일어났다. 단랑도 따라서 일어났다.

“단랑, 낭자를 귀찮게 하지 마라.”

진소의 당부에도 단랑은 신이 나서 정교랑의 옷소매를 붙잡고 걸어 나왔다.

어느덧 날씨가 많이 쌀쌀해졌다.

“며칠 후면 눈이 내리겠네.”

정교랑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정말요? 너무 잘됐다. 우리 산으로 눈 구경 가요.”

단랑은 신이 나서 말했다. 얼마 안 가 맞은편에서 여인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낭자 네다섯 명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정교랑과 진단랑을 본 여인들은 걸음을 멈추었다.

정교랑은 진씨 저택에 들어온 후 밥을 늘 혼자 먹었고, 진 노태야와 자신의 거처만 오고 갔다. 처음 왔을 때를 제외하고는 집안사람들도 얼굴조차 보지 못했기에 교류는 더더욱 없었다. 교류하는 이로 따지면 진 노태야와 진소 내외, 단랑이 전부였다.

정교랑을 보며 여인들은 알 수 없는 어색함을 느꼈다. 황족과 귀족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진씨 가문의 여인도 여염집과는 달랐다. 행동거지와 기품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은 태가 났다. 더구나 이제는 외부 연회에 참석할 나이가 된 터라 수줍어하는 일은 있어도 어색해하는 건 처음이었다.

“언니들, 어디 가려고?”

단랑이 먼저 달려와 물었다.

“차정사에 매화 보러 갈 거야.”

한 여인이 저도 모르게 정교랑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매화가 피었어?”

단랑이 놀라 물었다.

“응, 차정사의 겨울매화가 올해 일찍 피었대.”

단랑은 신이 나서 손뼉을 쳤다.

“나도 갈래, 나도.”

단랑은 무언가 떠올랐는지 정교랑 옆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정 언니, 언니도 같이 가요.”

진단랑의 초청에 진씨 가문 낭자들은 알 수 없는 긴장감을 느꼈다. 정교랑은 대답이 없었다.

“정 낭자, 별일 없으면 같이 가요.”

진씨 가문의 낭자 하나가 나서서 말했다. 꼬맹이의 초청에 응낙하긴 어려웠겠지. 정교랑이 낭자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단랑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같은 시간 강남 지역엔 겨울비가 내려 날씨가 더욱 쌀쌀했다. 정육랑이 쿵쾅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집사 부인과 웃으며 담소를 나누는 대부인의 모습이 보였다.

“어머니.”

아랫것 앞인지라 정육랑은 깍듯하게 예를 표했다. 요즘 들어 기분이 좋은 대부인은 딸을 불러 앉혔다.

“그자들이 소란을 떠는 바람에 활기를 잃지만 않았어도 점포 수익이 더 늘었을 거예요.”

집사 부인이 장부를 덮으며 말했다.

“장사도 모르면서 장사를 망칠 줄만 알지. 그래서 그자들은 떠났고?”

“손 놓고 관여하지 않고 있긴 한데 아직 떠나지는 않았어요.”

“내버려 둬라. 몇 사람 밥 더 먹인다고 신경 쓸 필요 없어.”

대부인은 미소를 지었다.

“어디 두고 보라지. 점포가 내 손에 있는 한 사업은 날로 번창할 거야. 따지고 보면 그 댁에서 해온 혼수를 불려 주는 셈이지. 우리 가문은 일부러 장사를 망치는 일 따위 안 해.”

“그런데 농장 쪽 장부는 이부인께서 보시겠대요.”

집사 부인이 나지막이 속삭이자 대부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내키지 않은 길이었지만 이노야는 결국 부임지로 떠났다. 이부인은 집과 가깝다는 핑계로 이번에는 자식들과 함께 따라가지 않고 집에 남았다. 말로는 노모를 봉양하고 자식을 양육하는 데 힘쓰기 위함이라고 했다.

4권에 계속

교랑의경 4권

차례

나들이

산사는 매화가 피기를 기다릴 뿐이네

이해

오해

의남매

아는 사람

마음

좋다

날조

풍문

쉬운

-나들이-

낯선 외지에 나와 있다 보니 업신여길까 봐 걱정된 건지, 정씨 집안에서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자 흥미가 떨어진 건지 주씨 집안에서 온 사람들은 혼수를 놓고 다투는 일을 그만뒀다. 그러면서도 경성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아씨의 혼수를 잘 간수하는지 직접 보기 위함이라고 했다. 정씨 가문으로서는 기쁠 따름이었다. 가뜩이나 이노야의 벼슬길에 먹구름이 드리웠는데, 조금이나마 근심이 걷혔기 때문이었다.

“그럼 이부인한테 맡겨라. 이제 곧 세밑이구나. 노부인께서 이노야의 방한복을 걱정하셨어. 장부 대조가 끝났으니 사람을 골라 노부인의 시중을 드는 매향과 함께 다녀오도록 해라.”

노부인의 시중을 드는 매향? 여종들은 눈을 마주치며 뭔지 알겠다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매향은 바느질 솜씨도 좋고 진중한 사람이니, 이노야 쪽에 가 있는 게 좋을 거야. 그래야 노부인께서도 마음이 놓이시겠지.”

집사 부인과 여종들은 한쪽 옆에서 따분해하며 앉아 있는 정육랑을 보고 서둘러 물건을 정리해 물러났다.

“어머니, 제가 말씀드린 현묘관 간식은 얻었어요?”

정육랑의 물음에 대부인은 그제야 생각난 듯 여종을 불러 물었다.

“그게, 섣달이라 달라는 사람이 많아서 벌써 한참 전부터 예약을 받았다네요. 그래서……·.”

여종은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우리 집 몫은 없다는 거야?”

정육랑은 몸을 곧추세우고 여종을 다그쳐 물으며 대부인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어머니, 보셨죠? 그 사람들 일부러 그러는 거예요. 우리가 아무리 일찍 말해도 우리한텐 안 준다고요!”

대부인도 놀란 눈치였다.

“정말 없다고?”

“네, 부인. 달라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요. 시장에서도 현묘관 간식은 한 상자에 은자 열 냥을 받아요.”

여종이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그렇게 비싸?”

대부인은 더욱 놀랐다. 현묘관이 언제 그렇게 바뀌었지? 그러고 보니 현묘관 관주를 본 게 아주 오래전 일처럼 느껴졌다. 얼굴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였으니.

“시줏돈을 받으러 오지도 않았고?”

집안에 왔을 때도 못 본 건가?

“주지도 마세요.”

정육랑이 눈썹을 치켜뜨고 소리쳤다.

“부인, 현묘관에서는 처음에 딱 한 번 돈을 받았고, 그 뒤로는 받으러 온 적 없어요.”

한 상자에 열 냥이나 하는 간식도 없어서 못 살 정도인데, 그깟 시줏돈을 누가 신경 쓰겠나. 대부인은 표정이 굳어졌고 정육랑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랬구나. 남의 밑에 있지 않은데, 누가 눈치를 보려 들겠는가.

“상관없다.”

대부인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가서 사 오너라. 돈을 더 쓰면 그만이지.”

정육랑이 털썩 주저앉았다.

“이미 늦었어요. 이제 못 산다고요! 매화 구경 가면서 간식도 못 들고 가면 비웃음을 당할 거예요! 간신히 그 바보를 내쫓아 놀림을 안 받게 됐는데, 또 집 밖으로 못 나가게 됐어요!”

“우리 딸.”

대부인은 마음이 아픈 듯 딸을 어루만지며 위로했다.

“그런 말 마라. 넌 재색을 겸비하기로 강주성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야. 다들 너랑 같이 놀고 싶어서 난리지 누가 널 무시해. 육랑, 남들이 비웃는 건 사람이지, 물건이 아니야. 네 바보 자매를 생각해 봐. 그 애가 다과회를 연다 한들 누가 신선이라고 떠받들겠어?”

정육랑은 풉 웃음을 터뜨렸지만 금세 다시 울상을 지었다.

“봐, 너도 알잖아. 남들이 부러워하는 건 너라는 사람이지, 어떤 물건이 아니야. 걱정 마라, 걱정 마.”

대부인이 웃으며 딸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우리 육랑이 최고야. 너 싫다는 사람 있으면, 너무 질투가 나서 그러는 게지.”

정육랑은 그제야 울적한 마음을 떨치고 웃음을 지었다.

“그럼, 어머니. 저 자마금(紫磨金: 자색을 띤 순수한 황금)으로 만든 영락(瓔珞: 구슬을 꿰어 만든 장신구) 할래요.”

정육랑은 애교를 부리며 대부인의 팔을 끌어안았다.

“그래.”

대부인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사랑스러운 딸의 어깨를 어루만져 주었다. 두 모녀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딸들이 정교랑과 함께 매화를 보러 간다는 말에 진소 부부는 긴장이 됐다. 딸아이를 처음 집 밖 나들이에 보내는 심정과 비슷했다. 뭘 입혀야 하나, 뭘 챙겨야 하나, 누굴 딸려 보내야 하나, 춥지는 않을까, 말실수라도 하면 어쩌나, 남한테 무시라도 받으면 어쩌나 등등 여러 가지 고민으로 마음이 불안했다. 결국 진 노태야께 물어보기로 했다.

“대체 무슨 생각일까요?”

진 부인의 물음에 진 노태야는 껄껄 웃었다.

“무슨 생각이냐고? 너희가 괜한 생각을 하는 게지. 10대 소녀가 아니냐. 노는 걸 좋아할 나이야.”

진소 부부는 깨달음을 얻은 듯 실소를 터뜨렸다. 그렇지, 잊고 있었네. 그 여인은 이제 열네다섯밖에 안 된 소녀지, 나이든 노파가 아니었다.

“사람들을 몇 명 딸려 보내겠습니다. 애들 형제들도 두엇 보내고요.”

진소가 말했다.

정교랑이 옷을 갈아입은 후 두봉을 걸치고 시녀와 함께 나와 보니 진씨 가문 낭자가 두 명 더 늘어나 있었다.

“이쪽은 십랑, 여긴 십이랑, 이쪽은 십팔랑이에요.”

단랑은 신이 나서 일일이 소개했다. 몇몇은 어색해했고 몇몇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여인들은 하나하나 정교랑에게 예를 표했다. 인사를 했으니 이야기를 나눌 차례였다.

“토시가 정말 예쁘네요, 낭자.”

연장자인 십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의상이나 장신구는 말문을 열기에 더없이 좋은 소재였다.

“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날씨가 별로 안 추우니 손난로보다 토시가 더 좋죠.”

다른 낭자도 거들었다. 낭자들의 담소와 함께 분위기가 한결 편안해졌다. 낭자들은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 나왔다. 중문 밖으로 나와 보니 마차 네 대 외에도 말에 탄 소년 예닐곱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웬 사람들이 이렇게 많지?”

진씨 가문 낭자들은 깜짝 놀랐다. 준수하고 늠름한 모습으로 두봉을 걸치고 말에 타 있던 소년들이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께서 데려다주라고 하셨어.”

집안 자매들이 나들이 갈 때 형제들이 데려다주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형제가 갈 필요는 없지 않을까?

준수한 소년들이 둘러싼 마차 네 대가 거리를 지나는 모습은 눈에 확 띄었다. 새해가 다가오면서 나들이를 나오는 이는 점점 늘어났고, 그중에서도 특히 부잣집 여인이 많았다. 사람이 많은 거리에서 진씨 가문의 행렬은 이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준수하고 생기 넘치는 소년들이 앞뒤로 호위하는 가운데, 바람결에 나부끼는 휘장 너머로 여인들의 화려한 장신구가 보이고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행인들이 길을 비켜섰다.

“아직 매화가 만개할 때도 아닌데, 진씨 가문이 갑자기 웬 나들이지?”

행인들은 의아한 눈치였다.

관리 가문 사람들이 출타할 땐 몰지각한 이들로 인한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고자 마차에 표식을 달았다. 일반 백성은 잘 모르지만, 부잣집이나 글공부를 한 서생, 부잣집에 아첨하는 자, 말썽을 일으키며 살아가는 시정잡배들은 표식을 머릿속 깊이 숙지하고 있었다. 진씨 가문의 행렬을 알아보는 사람은 금세 늘어났고 마차를 피해 가는 사람도 늘어났다.

“혹시 참새 때문인가?”

누군가가 자못 심각한 말투로 툭 내뱉자 주변 사람들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진씨 가문의 참새 요리는 이미 경성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참새 같은 야생 동물은 시골의 무지렁이가 고기 맛을 보고 싶을 때나 먹는 음식이지 대갓집 식탁엔 오를 일이 없었다. 진씨 가문의 참새 요리가 훌륭하다는 소문이 퍼진 후 이를 모방한 요리를 내놓는 경성의 술집이 늘었지만 딱히 별다를 게 없는 맛이었다.

진씨 가문의 참새 요리를 먹어 본 사람들은 진씨 가문의 요리엔 비방이 따로 있다고 했다. 더욱 호기심이 생기는 말이었다. 진 상공의 명성도 덩달아 높아져 갔다. 천금을 내놓으며 진씨 가문의 비방을 사겠다는 술집까지 나왔다고 했다.

그 흥미로운 광경에 진 공자는 인파 속에서 웃으며 주육낭을 쳐다봤다.

“자네의 사촌 누이는 참으로 재미있는 사람이야.”

웃고 있던 주육낭의 얼굴이 돌연 굳어졌다.

“자네도 참. 오로지 그 애 생각뿐이군. 내가 들었으니 망정이지, 다른 사람이 들었으면 어쩌려고 이래?”

진 공자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좋을 대로 생각하라지. 그런데 생각할수록 아쉽네. 자네 노섬 주씨 가문이 참새 요리로 이름을 날릴 기회를 진씨 가문에 빼앗겼으니 말이야.”

주육낭이 인상을 썼다.

“무슨 소리야?”

주육낭이 말을 달려 앞으로 가자 진 공자도 따라갔다.

“진씨 가문의 참새 요리가 정말 진씨 것인 줄 아나?”

진 공자는 고삐를 잡아당기며 말을 이었다.

“전도 아니고 후도 아니고 딱 자네 누이가 오자마자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어. 자네가 빼앗아 온 몸종의 튀김 솜씨를 잊지 마.”

또 그 여인인가! 생각이 난 주육낭은 굳어진 얼굴로 말고삐를 당겼다.

“먹는 것밖에 모르는군!”

“더없이 일품이었지.”

진 공자가 말을 덧붙였다.

“어디에 있든 기쁘고 흡족할 거야. 훌륭한 솜씨를 가졌으니.”

주육낭이 고개를 돌려 진 공자를 쳐다봤다. 진 공자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여인은 훌륭한 사람이야. 그런 누이가 있는 걸 영광으로 여겨.”

주육낭이 말 머리를 돌렸다.

“매화 구경은 안 가겠네. 고목에 뭐 볼 게 있나? 여인들이나 좋아하지. 난 사냥하러 갈래.”

주육낭이 말을 재촉해 떠났다.


경성 교외 팔리진은 차정사가 있는 곳이었다. 이맘때면 유람객의 발길로 소란스러웠다.

“……·그 선인은 복숭아씨를 떨어뜨리고는 홀연히 떠나갔지. 그제야 깨달은 사람들이 소리쳐 부른 거야. ‘잠시만요, 멈추십시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어.”

한 소년 공자가 웃으며 말했다.

“그리하여 이곳에는 ‘잠시 차(且)’에 ‘멈출 정(停)’을 쓰는 ‘차정사’만이 남게 됐지.”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소녀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넷째 형님, 그 얘긴 재미없어요. 이 차정사는 본디 비석이 세워졌다가 후에 절이 세워졌는데, 그 비석에 내력이 있습니다. 그 비석으로 말할 것 같으면……·. 으응?”

말을 이어가던 소년이 주변에 있는 형제자매들을 둘러보다가 불현듯 말을 멈췄다.

“정 낭자는?”

모두들 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과연 푸른 두봉을 걸친 여인이 보이지 않았다.

“단랑이랑 불상을 보러 저쪽으로 갔어요.”

한 소녀의 말에 소년들은 소녀가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리도 가 보자, 우리도.”

소년들이 입을 모아 말하자 소녀들이 손을 뻗어 붙잡으며 말렸다.

“열두째 오라버니, 하던 얘기 아직 안 끝났잖아요.”

“더 얘기하고 말 것도 없어. 경성 사람들은 다 아는 얘기야.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다 알걸.”

소년의 말에 소녀들은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소년들과 소녀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에 주변의 이목이 집중됐다.

한편 같은 시각 서쪽 편전은 떠들썩한 정원과는 사뭇 단절된 분위기였다.

“언니, 이리 와 봐요. 여기 불상이 엄청 무섭게 생겼어요.”

단랑은 신이 나서 소리치며 앞으로 뛰어갔다. 정교랑은 느릿느릿 그 뒤를 따랐고, 시녀도 옆에서 수행했다.

편전에 있던 네다섯 사람은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가 모두 여인인 걸 보고는 예의 있게 시선을 거뒀다. 경성은 개화한 곳이었고 곧 새해인지라 나들이를 나온 여인이 많았다. 여름에는 너울로, 겨울에는 두모로 얼굴을 가리곤 했다.

단랑은 불상에 정신이 팔려 있었지만 정교랑의 시선은 서쪽 벽을 향했다. 금강역사와 금강신 등이 지키는 다른 벽과 달리 이쪽 벽은 텅 비어 새하얗기만 했고 구석에는 필묵까지 놓여 있었다.

“문인 나그네가 시를 쓰도록 한 거네요.”

시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때 저쪽에 있던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경림 형의 시가 아주 훌륭합니다.”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함께 한 사내가 붓을 내려놓고, 벽에 쓴 시를 다시 한번 조용히 쳐다봤다.

-산사는 매화가 피기를 기다릴 뿐이네-

“부끄럽소이다.”

사내는 공손하고 겸손하여 더욱 돋보였다. 왁자지껄한 소리에 고개를 돌리던 단랑은 정교랑과 시녀가 저쪽 벽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얼른 뒤따라갔다. 가까이 가 보니 벽 여기저기에 시가 몇 수 쓰여 있었다.

“언니, 언니도 시를 지을 줄 알아요?”

단랑이 정교랑의 옷소매를 잡아끌며 물었다. 웃고 떠들던 사람들이 또다시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범상치 않은 기품이 느껴지는 걸 보면 부잣집 여인임이 틀림없었다. 부잣집의 교양 있는 여인들은 공부도 하고 글도 익혔으니 시에 정통한 이도 드물지 않았다. 안주 이씨 가문의 이랑도 글재주로 이름을 떨치지 않았던가. 시를 아는 여인을 보자 사내들은 흥미로운 눈치였다.

“몰라. 읽어 봐.”

정교랑이 옆에 있는 시녀를 보며 말했다.

시녀가 벽에 있는 시들을 왼쪽에서 오른쪽 순으로 나지막이 읊기 시작했다. 글도 안 읽혔나 보군, 안타깝네. 사내들은 시선을 거두고 관심을 돌렸다.

정교랑은 조용히 듣기만 했다.

“아씨, 어떠세요?”

시녀가 물었다.

“난 시를 쓸 줄 몰라서, 모르겠어.”

“난 할 줄 알아요. 할아버지한테 배웠어요.”

단랑이 두 손으로 얼굴을 받치고는 새하얀 공간이 많이 남은 벽을 보며 헤헤 웃었다.

지난해 차정사는 매화가 만개했을 무렵이 가장 떠들썩했다. 문인들이 가장 많이 다녀간 때기도 했다. 새롭게 칠한 이 벽은 그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새해가 지나고 와 보면 이 벽은 시로 빼곡할 것이다.

“잘됐네. 난 글씨를 쓸 줄 아니까 넌 시를 지어. 난 글씨를 쓸게, 어때?”

정교랑은 새하얀 벽을 보자 마음이 울렁거렸다. 손은 벌써 움직이고 있었다. 나뭇가지로 글씨 연습을 한 지는 꽤 됐는데, 붓으로 써도 가능할지 모르겠네?

“좋아요, 좋아.”

단랑은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은 참 꾸밈이 없다니까. 뭐든 일단 내뱉고 말지, 겸손하거나 뺄 줄 몰라. 개구쟁이 꼬마가 재잘대는 모습을 본 사내들은 서로 눈길을 주고받으며 웃었다.

“그럼 우린 잠시 매화나 보러 가세나.”

시를 이야기하며 웃고 떠들던 사내들이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천천히 먹을 갈고 난 시녀는 미간을 찌푸리고 진지하게 생각에 빠져 있는 단랑을 쳐다봤다.

진씨 가문은 시와 예에 밝은 가문이었기에 어린아이에게도 일찍부터 글을 가르쳤다. 그래도 단랑 같은 여자아이는 어쨌거나 남자아이보다는 요구가 덜한 편이었다. 이제 막 삼경(三經)을 익히기 시작했을 어린아이에게 시문을 짓는 일은 마음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라버니와 스승, 부친과 조부가 시를 논하는 걸 보고 들은 적은 있겠지.

정교랑은 담담한 표정으로 벽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우린 매화를 감상하러 왔어요. 거기서부터 시작하면 될 거예요.”

시녀가 단랑을 보며 나지막이 일깨워 주자 단랑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래, 그래. 생각났어.”

단랑은 목청을 가다듬었다.

“매화 감상, 산사. 산사에 매화를 보러 왔네.”

시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바로 그거예요. 그다음은요?”

“매화, 매화라……·.”

단랑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빠졌다.

“매화를 굳이 또 쓸 필요는 없어요.”

시녀의 말에 단랑은 입을 삐죽거렸다.

“못하겠어.”

정교랑이 고개를 숙이고 단랑을 쳐다봤다.

“괜찮아. 한 구절만 해도 돼.”

정교랑이 손을 내밀자 시녀가 얼른 붓을 건넸다.

“방금 말한 그 구절을 쓰겠다고요?”

단랑이 눈을 깜빡거리며 물었다.

“내가 말한 것도 시로 쓸 수 있어요?”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고 붓을 쥐었다. 처음에는 조금 떨렸다. 분명 힘이 들어갔는데 왜 떨리는 거야, 왜. 코가 시큰거렸다. 글씨를 쓰자, 글씨를 쓰는 것뿐이잖아. 정교랑은 고개를 들고 새하얀 벽을 바라봤다.

“단랑, 네가 쓴 시를, 내가 몇 글자, 바꿔도 될까?”

정교랑의 물음에 단랑은 헤헤 웃으며 대답했다.

“좋아요, 좋아.”

시녀는 문득 떨리는 마음으로 벽 앞에 붓을 들고 선 정교랑을 쳐다봤다. 왜 그렇게 떨리는 건지 시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정교랑이 손을 들어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엔 손이 떨려 먹물이 조금 흘러내렸다. 시녀는 속으로 아, 하는 탄식을 내뱉었다. 벽에 글씨를 쓰는 건 본디 종이에 글씨를 쓰는 것보다 힘든 일이었다. 더구나 아씨는 붓으로 글씨를 써 본 일이 없지 않은가.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여전히. 뭘 이렇게까지 하실까, 안 쓰면 그만이지. 손발을 움직일 수 있고 병을 치료하여 몸이 나았으면 됐지, 글씨 같은 건 쓸 줄 알든 말든 뭐가 중요하냔 말이다.

“아둔하긴, 글씨 하나를 제대로 못 쓰다니. 내 딸이라고 하지도 마라!”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말에 가슴이 쿵 내려앉은 정교랑은 눈물이 차올랐다. 누구지, 누굴까. 정교랑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손목을 꺾었다. 막힘없이 자연스러운 손놀림이었다.

옆에 있던 시녀는 숨이 멎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의 글씨를 보며 이런 감정을 느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질식할 것 같은 순간, 그 여인의 손이 또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녀는 숨을 내쉬고 손을 가슴께에 가져다 댔다. 평생처럼 길게 느껴진 시간이었건만 실은 눈 깜짝할 순간이었다.

“산사는……·.”

시녀는 천천히 따라 읽었다.

“매화가……·.”

단랑도 읽었다.

“피기를……·.”

시를 읽던 시녀는 순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녀가 미처 뭐라 말하기도 전에 단랑이 이어 읽었다.

“기다릴……·.”

단랑이 고개를 쳐들고 읽었다.

“뿐이네.”

마지막 어절을 읽은 정교랑은 붓을 거둔 후 뒤로 몇 걸음 물러나 섰다. 새하얀 벽에 쓰인 커다란 글자가 눈에 확 띄었다. 정교랑도 보고, 시녀도 보고, 단랑도 봤다. 한 사람은 속이 탁 트였고, 한 사람은 놀랐고, 한 사람은 그저 조용했다.

아버지.

당신이 누군지 내가 누군지는 아직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살아 있는 한 난 기다릴 수 있어요. 기다려요. 내가 모든 걸 기억해 낼 때까지. 그때까진 나도 즐겁게 살 거예요.

“가자, 매화 보러 가야지.”

정교랑은 옷소매를 흔들며 뒤도 안 돌아보고 뒷문으로 나갔다. 이미 시에 흥미를 잃은 단랑은 정교랑의 말에 신이 나서 따라갔다. 멍하니 있다가 곧 정신을 차린 시녀도 편전에 자신만 덩그러니 남은 사실을 깨닫고는 얼른 뒤따라갔다. 정교랑의 일행이 뒷문으로 나가는 동안 우르르 들어오는 무리도 있었다. 이들은 여러 지방의 말씨로 웃고 떠들었다.

“장강주 선생께서 우리 같은 응시생을 위해 새해에 학당을 열고 경문을 가르치실 거라더군.”

“수학하려는 이가 워낙 많아서 청강할 기회가 있으려나 모르겠소.”

“지금은 아직 일러요. 정월에 와야 매화가 만개하지. 이 벽도 아직 흰 부분이 많이 남아 있잖소.”

“문명 형, 그럼 어서 한 수 지어 주십시오. 이어서 내가 한 수 지을 터이니. 천고에 남을 작품을 남겨 보십시다.”

왁자지껄 웃고 떠들며 흰 벽 앞으로 몰려들던 사람들은 순간 멈칫했다.

“누구지? 이럴 수가!”

시라기보다는 문구에 가까웠다. 딱 한 구절만 써 놓다니, 이게 뭐지?

“산사는 매화가 피기를 기다릴 뿐이네(山寺待梅開).”

누군가가 큰 소리로 읽었다.

“첫 구절이라고 볼 순 없고, 좋게 봐야 마지막 구절인데. 이 구절만 덩그러니 써 놓다니, 이게 대체 뭐야!”

문밖에서 또 누군가가 들어왔다. 소란을 듣고 다가와 보더니 따라서 발을 굴렀다.

“누가 이런 장난을. 멀쩡한 벽을 망쳐 놓다니.”

“지키는 승려가 없으니 아무나 들어와 낙서하지.”

고개를 내젓고 탄식하는가 하면 쯧쯧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그 속에서 누군가가 놀라는 소리를 내며 벽에 쓰인 글씨를 꼼꼼히 들여다봤다.

“이 서체는, 대체 뭐지? 처음 보는 서체인데?”

사내는 중얼거리며 저도 모르게 손바닥에 글씨를 따라 써 보았다. 그러자 다른 이들도 하나둘 글씨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벽에 큼지막하게 쓰인 글자라 아무래도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것 좀 보시오. 글자 하나하나가 다 달라!”

“오묘하군, 오묘해. 과연 거침이 없고 붓놀림이 자유자재로군.”

“안타깝네. 첫 글자의 첫 획에 망설임이 있어서 글자 전체에 힘이 빠졌어.”

“네 살 때부터 여러 서첩을 두루 익혔건만, 이 다섯 종의 서체는 처음 보는구려.”

자그마한 편전에 점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시끄러운 소란은 더 많은 사람을 불러들이는 법이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까지 서로 물어보기에 바빴다.

“누가 묘한 시를 썼다고?”

“아직 매화가 절정에 이르진 않았으니, 훌륭하긴 해도 잠시일 뿐이지. 얼마 안 가 더 좋은 게 나올 거요.”

누군가는 놀라며 감탄했고, 누군가는 태연했고, 누군가는 하찮게 여겼다. 멀리서 매화를 보러 온 사람들도 이곳의 소란을 들었다.

“경림 형, 우리가 방금 들어갔을 때 시는 딱 네 수뿐이었습니다. 다들 입이 마르게 칭찬하던데, 혹시 경림 형의 시가 아닐지요?”

경림이라 불린 중년의 사내는 흥분을 감추기 힘든 표정이었지만 애써 침착을 유지했다.

“부끄러운 재주라오.”

“어쩐지 경림 형의 시는 다르더라니까요.”

다른 이들도 거들며 치켜세웠다. 시 한 수로 이름을 날린 이는 적지 않았고, 거물로 인정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경사가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다니 호흡이 가빠질 수밖에. 곁에 있는 동료들은 질투가 나기도 했지만 덩달아 흥분되기도 했다. 일거에 명성을 얻지 못한 게 아쉽기는 하나, 그런 유명 인사의 벗이 되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어서 가서 물어봅시다, 어서요.”

사내들이 서둘러 도착했을 무렵, 편전은 이미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였다.

“말씀 좀 물읍시다. 여기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누군가가 심호흡을 하고는 시치미를 떼며 궁금한 듯 물었다.

“누가 훌륭한 시를 썼어요.”

앞쪽에서 흥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역시나. 사내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고, 경림이라는 자는 얼굴까지 살짝 붉어진 채 내려뜨린 손을 꽉 쥐었다.

“무슨 시입니까? 누가 지었죠?”

사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앞에 선 사람이 고개를 돌리고 눈을 흘겼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들어갈 수가 없어요. 나도 못 봤단 말이오.”

보지도 못했으면서 덩달아 흥분할 건 뭐람. 사내들은 속으로 깔보며 투덜거렸다. 앞뒤로 몇 번 질문이 오간 후 마침내 답을 얻었다.

“이름을 안 남겼어요.”

이름을 안 남겼다고? 시를 지어 놓고 이름을 안 남기다니. 장님 보라고 추파를 던지는 꼴이 아닌가. 사내들은 멈칫하여 경림을 쳐다봤다.

“난, 난 이름을 남긴 것으로 기억하는데.”

경림은 얼굴이 붉어진 채 말했다.

“너무 작아서 못 봤을 수도 있지.”

누군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추측을 내놓았다. 묻고 또 물어도 앞쪽에선 이렇다 할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초조해진 사내들은 눈을 흘겨 가며 가까스로 문 앞까지 왔지만 더는 들어갈 수 없었다.

“그건 우리 학형이 쓴 시라고요!”

누군가가 소리쳤다. 앞에서 길을 막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감격과 존경의 눈빛이 아니라 냉대의 눈길이었다.

“허튼수작 작작 부려요.”

사람들이 일제히 말했다.

“우리도 아직 못 봤단 말입니다. 못 비켜요.”

“정말 우리 학형이 쓴 시라고요!”

사내들은 격분하여 다시 소리쳤다.

“뭐라는 거야. 여기서 보는 건 시가 아니라 글씨란 말이오.”

앞에 있던 사람이 비웃었다.

“당신네들이 쓴 시는 저분의 글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뭐야? 시가 아니야? 글씨라고? 사내들은 까치발을 들며 앞에 있는 사람들의 어깨너머로 벽을 쳐다봤다.

  • 산사는 매화가 피기를 기다릴 뿐이네(山寺待梅開)

짧디짧은 구절이건만 호방한 기개와 처연한 분위기와 형언할 수 없는 오묘함이 깃든 글씨가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았다. 입말로 간단히 쓰인 말인데도 필치에 거침이 없었다. 용이 꿈틀대는 듯 생기가 넘치고 웅장한 소리가 울려 퍼지는 듯했다.

산사는 매화가 피기를 기다릴 뿐이라네. 매화가, 피기를 기다리네!

이쪽의 편전은 떠들썩한데, 저쪽의 정교랑과 단랑은 벌써 진씨 가문 낭자들과 함께 산문을 나서고 있었다.

시라고 할 수 없는 시를 남긴 후, 시를 지은 진단랑은 이미 뒤로 빠져 있었고 글씨를 쓴 정교랑은 기분이 탁 트여 어느덧 근심이 사라져 있었다. 저쪽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본인인 두 사람은 그 내막을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같은 시각 진 공자도 주육낭과 함께 갔던 사냥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진씨 저택은 경성의 정중앙 지대에 있었다. 조모인 방녕공주는 세상을 뜬 후였지만 진씨 가문은 여전히 황실에서 하사한 공주부(公主府)를 소유하고 있었다. 정자와 누대, 누각이며 화원과 작은 길에 이르기까지, 그 구조가 정교하고 아름다워 경성에서도 손꼽히는 저택이었다.

하지만 공주부에 거하는 이는 진 공자의 일가뿐이었다. 진씨 가문의 조상은 본디 천주(川州)에 살았다. 진 공자의 부친이 경성에서 임직하지 않았다면 진 공자의 일가도 이곳으로 옮겨오진 않았을 터였다.

돌아온 진 공자는 여느 때처럼 부모님부터 찾아뵙고 문후를 올리고자 했지만 부모님이 계시지 않았다.

“세밑이라 바쁘세요. 열셋째 공자님, 진지는 드셨는지요?”

여종의 물음에 진 공자는 손으로 자신의 뒤를 가리키고는 웃으며 말했다. 사환 하나가 꿩 두 마리를 들고 있었다.

“내가 잡은 거야. 이따 삶아 먹으려고.”

십삼공자는 불구의 몸이었지만 유순한 성격이었다.

“조심하세요, 손 다치지 마시고요.”

진 공자는 웃으며 가마 의자에 탔다. 사환들이 가마 의자를 들어 진 공자의 마당으로 옮겨 갔다.

마당에 있던 여종과 몸종은 이미 전갈을 듣고 칼이며 화로, 솥 등을 준비해 놓은 상태였다. 진 공자는 간단하게 몸을 씻은 후 마당으로 나와 직접 꿩을 잡고 손질했다. 입구에 있던 여종이 진 공자의 마당으로 들어서던 두 여인을 막으며 나지막이 고했다.

“여섯째 아씨, 일곱째 아씨. 열셋째 공자님께서는 꿩을 잡아 음식을 준비하고 계세요.”

두 여인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십삼낭은 대체 왜 저러는 거야. 뭐든 자기가 직접 해 먹으려 들다니, 불결하게.”

“그러게 말이야.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쓰는 것도 모두 제 손으로 하겠다지 뭐야. 집에 시중들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두 여인은 안을 들여다보며 피비린내라도 나는 듯 코를 틀어막았다.

“그럼 됐어, 다음에 다시 오자.”

두 여인은 몸종들에게 둘러싸여 자리를 떴다. 여종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려 마당을 힐끔 쳐다봤다.

“물부터 끓여야지. 뜨거워야 털이 잘 빠져.”

사내의 낭랑한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그러게. 하필 저런 기괴한 습성을 가지셨담.”

여종이 나지막이 한탄했다.

“하긴.”

다른 여종이 맞장구를 치며 눈썹을 꿈틀하고는 손으로 다리를 탁탁 쳤다.

“이런 사람들은, 다 조금씩 기괴한 면이 있어.”

먼저 말했던 여종이 기겁하며 손을 찰싹 때리고는 눈을 치켜떴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부인의 귀에 들어갔다간 경을 쳐.”

여종은 쉿 하는 동작을 하며 목까지 수그렸지만, 얼굴엔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마당 안은 등불이 환히 밝혀져 있었다. 진 공자가 버섯을 가져와 질솥 안에 넣었다.

“다 됐다. 반 시진 후에 꺼내 와라.”

진 공자가 걷어 올렸던 소매를 내렸다. 몸종은 네 하고 대답한 후, 지팡이를 잡으려 손을 뻗는 진 공자를 쳐다봤다. 일할 때 걸리적거려 한쪽으로 치워 뒀던 터라 손이 닿지 않았다. 몸종이 얼른 지팡이를 가져와 건넸다.

미소를 짓고 있던 진 공자의 얼굴이 잠시 굳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진 공자는 손을 뻗어 지팡이를 받은 후 몸종의 부축을 받아 일어서서 절뚝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갈아입을 깨끗한 옷을 든 몸종 네 명과 진 공자의 옷을 벗겨 주는 몸종 세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옷을 벗은 진 공자는 맨 마지막 한 겹만 남겨 놓고는 부축을 받으며 씻으러 들어갔다.

몸을 씻고 나자 진 공자가 팔걸이 책상에 기대앉아 눈을 감고 있는 동안 몸종 두 명이 뒤쪽에 꿇어앉아 머리의 물기를 닦아 주었다.

“공자님, 탕을 다 끓였습니다.”

문밖에서 여종의 목소리가 들리자 진 공자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 바람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몸종들이 진 공자의 긴 머리를 잡아당기고는 놀라 머리를 조아렸다.

“괜찮다. 물러가라.”

진 공자는 웃으며 손을 내젓고는 자세를 바로 하여 앉았다.

“어서 가져오너라, 어서.”

뜨거운 버섯 꿩탕이 놓이자 맛있는 냄새가 확 퍼졌다.

“맛있구나, 맛있어.”

진 공자는 웃으며 입맛을 다시고는 수저를 들고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뒤에 있는 두 몸종이 눈길을 주고받았다. 이게 맛있다고? 고기 구경 못 하는 사람들이야 맛있게 먹겠지만 명색이 진씨 가문에서 이깟 꿩탕이 무슨 대수겠는가.

몸종들은 흰옷을 입은 소년 공자가 바닥까지 길게 드리운 장발을 내려뜨리고 소매를 걷으며 탕을 먹는 모습을 쳐다봤다. 모락모락 나는 김에 백옥 같은 피부가 가려져 희미하게 보였다.

“내가 만든 거다. 내가 만들었어, 내가. 내가 직접, 만들었지.”

진 공자는 고개를 숙이고는 고기를 맛있게 뜯어 먹었다.

멀리 나가 즐기고 왔으니 오늘 밤은 단잠을 자겠지.

돌아온 정교랑은 언제나처럼 진 노태야에게 침을 놓으러 왔다. 나들이는 어땠냐는 질문이 빠질 순 없었다.

“괜찮았어요.”

정교랑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차정사는 과연 영험한 곳인가 보오.”

진 노태야가 정교랑을 쳐다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낭자가 표정이 한결 좋아졌으니 말이오.”

시녀가 정교랑을 눈여겨 쳐다봤지만 멍한 표정은 여전했다. 보통 사람의 눈엔 딱히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 얼굴이었다.

“전에는 근심이 있는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나아졌구려.”

근심? 시녀는 저도 모르게 정교랑을 다시 쳐다봤다. 저 표정에서 근심을 읽어낸다? 정교랑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기만 할 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금침을 집어 들었다.

안으로 들어온 주 부인은 피곤한 기색으로 자리에 앉았다.

“어머니, 또 핑계를 대고 안 만나 줍니까?”

따라 들어온 주육낭이 물었다. 주 부인은 여종이 건넨 차를 받으며 대답했다.

“보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라지. 어쨌든 난 할 만큼 했다. 나머진 그 애 일이야.”

주육낭이 미간을 찌푸리고는 허리를 굽히며 예를 표했다.

“소자 때문에 고생하셨습니다.”

주 부인이 얼른 붙잡으며 만류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무슨 상관이라고. 일개 계집이 아니냐. 그 계집이 뻔뻔하게 나오며 모르는 척해 놓고, 우리 잘못으로 떠넘기는 게 더 경우 없는 일이지.”

주 부인은 코웃음을 쳤다.

부모님의 거처에서 나와 연무장에서 무예 수련을 하고, 흠뻑 젖은 모습으로 돌아와 보니 어느덧 점심 먹을 시간이 됐다. 막 밥그릇을 드는데 진 공자가 사환의 부축을 받으며 급히 들어왔다. 다리가 불편하다 보니 언제나 느릿느릿 걷는 진 공자였기에 이리 허둥대는 모습을 보이는 일은 드물었다. 주육낭이 몸을 곧추세워 앉았다.

“육낭, 자네가 좋은 구경을 망쳤어.”

진 공자가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이야?”

주육낭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어제 차정사에서 좋은 시가 나왔다네.”

진 공자의 말에 주육낭은 입을 삐죽였다. 하여간 이렇게 한가한 이들이나 하루 종일 시 타령이지.

“무슨 좋은 시를?”

주육낭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산사는 매화가 피기를 기다릴 뿐이네.”

진 공자가 시를 읊었다. 주육낭은 탕을 들고 진 공자가 이어 읊기를 잠시 기다렸다.

“그다음은?”

주육낭이 탕을 마시며 물었다.

“없어.”

진 공자의 말에 주육낭은 마시던 탕을 풉 하며 내뿜었고, 맞은편에 앉아 있던 진 공자는 그 바람에 옷이 다 젖게 됐다. 그런데도 진 공자는 개의치 않으며 미소까지 머금은 채 시 구절을 다시 음미했다.

“이게 좋은 시라고?”

눈을 치켜뜬 주육낭은 닦아 주려는 몸종을 뿌리치고 손수건을 받아 수염을 직접 닦았다.

“날 놀리려고 이러나? 내가 무인이긴 하지만, 우리 주씨 가문도 엄연히 글 선생을 두고 있는 집안이라고! 그런 시는 나도 짓겠네, 어디 한번 들어봐.”

주육낭은 손수건을 내던진 후 시를 읊었다.

“뜨거운 차는 마시기를 기다릴 뿐이네.”

주육낭이 잠시 후 덧붙였다.

“산사는 매화가 피기를 기다릴 뿐이네. 뜨거운 차는 마시기를 기다릴 뿐이네. 어때? 잘 맞잖아.”

진 공자는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아둔하긴.”

진 공자는 손을 뻗어 옆에 있던 사환이 조심스레 내미는 종이를 받아 펼쳤다.

“산사는 매화가 피기를 기다릴 뿐이네. 좋은 시군.”

주육낭은 종이에 쓰인 시를 읊으며 붓을 들고는 자기가 지은 구절을 덧붙이고자 했다. 금상첨화가 아닌가. 진 공자가 코웃음을 치며 탁자를 밀었다.

“글씨를 보라고.”

글씨가 거기서 거기지, 뭐 볼 게 있다고.

“내가 방금 모사해 온 거야. 형태는 비슷해도 거기서 직접 보는 오묘한 맛은 없어.”

진 공자도 글씨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보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아예 자리를 펴고 앉아 멍하니 모사만 하는 이도 있다니까. 차정사에선 행여 글씨를 망칠까 봐 푸른 천까지 걸쳐 놨지. 괜히 망신당할까 봐 이젠 벽에 시를 남기려는 자도 없고.”

거기까지 말한 진 공자는 웃으며 감탄했다.

“올해 시회(詩會)는 시작도 안 했는데, 이 글씨가 나오면서 이미 끝나 버렸어.”

그렇게 좋은가? 주육낭이 탁자에 놓인 글씨를 쳐다봤다.

산사는 매화가 피기를 기다릴 뿐이네. 산사는 매화가 피기를 기다릴 뿐이네. 한 글자 한 글자 꼼꼼히 뜯어보니 나머지 글자는 평범한데 첫 글자만큼은 마음을 들끓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주육낭의 시선이 첫 글자에 멈췄다. 용맹하게 돌진하는 군대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했다.

주육낭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부친의 세대는 말을 타고 전장에 나간 일이 있었다. 하지만 주육낭은 아직 나이가 어리고 태평성대인지라 용맹무쌍한 군대에 관해선 어르신들의 묘사나 연무장에서 간접적으로 경험할 뿐, 실제 느낌이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꿈에도 나올 정도로 애타게 바라는 일이어서, 꿈에서 깨면 못내 아쉽기만 했다.

그런 감정을, 글씨에서 느끼다니. 주육낭은 손을 뻗어 글씨를 가볍게 쓰다듬어 보았다. 산사는 매화가 피기를, 기다릴 뿐이네! 주육낭의 동작을 보며 진 공자는 웃음을 지었다.

“난 이 기다린다는 글자가 더 좋아.”

진 공자도 손을 뻗어 가볍게 어루만지고는 감개무량한 듯 말했다.

“이 글씨는 보는 사람마다 느끼는 게 달라. 평범한 이 구절을 이토록 오묘한 맛이 나도록 쓰다니, 대체 누구의 재주인지.”

“누가 썼는지 모른다고? 문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게 이름 남기는 거 아니었나?”

주육낭은 놀란 눈치였다. 진 공자가 하하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름도 없고 누가 썼는지 본 사람도 없어. 벼슬에서 물러난 노옹이라는 말도 있고, 큰 뜻을 품은 서생이라는 말도 있지. 공을 세울 때만을 기다리는 무장이란 말도 있고.”

진 공자가 웃으며 종이 위의 글씨를 다시 한번 쳐다봤다.

“내 눈에 필력은 좀 부족해 보여. 힘이 모자란다고 해야 할까. 여인의 기운이 느껴져.”

주육낭이 다시 쳐다봤다.

“추측할 필요 없어. 이런 글은 이름을 얻기 위해 쓰는 거잖나. 이미 우쭐해 있을 테니 자진해서 모습을 드러내겠지.”

진 공자도 고개를 끄덕이며 글씨를 쳐다봤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참, 그러고 보니 어느덧 열흘이 다 되어 가는데, 자네 사촌 누이는 돌아온다고 하던가?”

진 공자가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돌아오든 말든 알 게 뭐야, 괜히 기분만 잡치게!”

주육낭이 급격히 정색하며 언짢아하자 진 공자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해-

새벽빛이 들어오며 방 안이 밝아지자 단랑은 침상에서 내려왔다. 죽은 듯 잠들어 있는 유모를 보며 멈칫했던 단랑은 버선만 신은 채로 걸어와 창을 힘껏 밀어 열었다. 찬바람과 함께 눈송이가 날려 들어왔다.

“와, 정말 눈이 오네! 언니 말이 맞았어!”

그 소리에 잠들어 있던 유모가 깼다.

“아이고, 아씨. 이러다 풍한 드세요.”

유모는 호들갑을 떨며 단랑을 들어 창가에서 떨어뜨려 놓았다.

같은 시각 정교랑의 처소에서도 시녀가 휘장을 들며 창문을 열고 있었다. 한기 섞인 바람에 손이 아플 정도였다.

“엇? 눈이 오네.”

시녀가 밖을 보며 신이 나서 외쳤다. 병풍 뒤에서 나온 정교랑은 문가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밖에는 쌀 알갱이 같은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아씨, 바람이 차요.”

시녀가 얼른 다가와 두봉을 걸쳐 주었다.

눈이 온다. 정교랑은 밖을 보며 처음으로 가슴이 뛰는 걸 느꼈다. 눈이 오던 날에 잊지 못할 일이 있었나? 눈을 보면 떠오르는 게 있을까? 절에서 붓을 들자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부친의 기억처럼,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잡힐 듯 말 듯한 뭔가가 있긴 했다.

정교랑은 손을 뻗고 잠시 가만히 있었다. 순간 가슴이 떨렸다. 손바닥으로 떨어지자마자 녹는 눈송이처럼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진소가 진 노태야의 방으로 들어왔다. 정교랑이 앉아 처방을 읊어 주자 시녀가 붓을 들어 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할아버지, 정말이에요. 눈이 내려요.”

진단랑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언니가 며칠 후에 눈이 올 거라더니 정말 눈이 내려요!”

진소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단랑은 신이 나서 아버지를 불렀다. 그러더니 곧 정교랑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눈이 오는 것도, 하늘이 언니한테 말해 준 거예요?”

이게 무슨 말이야, 밑도 끝도 없이. 진소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이 여인이 며칠 내로 눈이 온다고 했다고? 이미 단정적으로 말했다? 하늘을 보고? 부친이 길에서 이 낭자를 만났다며 한 얘기를 떠올려 보았다.

그때도 비가 올 것이라고 하니 비가 오고 비가 그칠 것이라고 하니 비가 그쳤다고 했다. 오로지 부친의 병세에만 정신이 쏠려 있던 터라 담아 두지 않았는데, 이 여인이 정말 하늘을 보고 날씨를 읽는 비술이라도 가졌나? 태사국 사람들처럼?

하지만 태사국 사람들도 열 번에 한두 번 맞힐까 말까였다. 하늘을 보고 날씨를 예측하려면 천문과 지리에 두루 능통해야 하고, 책도 수없이 많이 읽어야 했다. 그렇다 해도 노력은 삼 할뿐이요, 천부적인 재능이 칠 할을 차지했다. 개국 당시의 원 태사 상공처럼 말이다. 그리 대단한 사람은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인데.

부친께 문안을 올리고자 딸을 내보낸 후 정교랑과 인사를 나누던 진소가 못 참고 입을 열었다.

“낭자, 스승이 어느 분이십니까?”

정교랑은 잠시 침묵했다. 스승은 있겠지. 의술도 알고 하늘도 볼 줄 아는데, 그런 게 날 때부터 지니는 기술은 아니지 않은가. 바보를 가르쳐 키워 내다니, 대체 어떤 성인이기에? 바보였던 정교랑의 병도 혹시 그 고인(高人)이 고쳐 주신 건가?

정교랑의 침묵에 진소의 마음은 용솟음쳤다. 그래, 틀림없어. 분명 그럴 거야! 아무렴, 고인이지! 고인이고말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던 의문이 단번에 풀리는 듯했다.

“내가 만약, 기억이 안 난다고 하면, 대인께서는 믿으시겠습니까?”

정교랑이 고개를 들고 진소를 보며 말했다. 진소의 표정엔 이미 확신이 담겨 있었다. 자신의 생각에 추호의 의심도 없는 듯했다. 고개를 끄덕이던 진소에게 또다시 의문이 들었다.

“어떻게, 기억이 안 나죠?”

“도관이 벼락을 맞은 일이 있어요. 나도 벼락에 맞았는데, 요행히, 목숨을 건졌죠. 깨어나 보니, 지난 일이 기억나지 않았고요. 기억나는 것도 있고, 잊은 것도 있죠.”

진소는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랬군요, 이해했습니다.”

진소의 목소리엔 이미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래도 너무 염려 마십시오. 언젠간 나아질 겁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나아지겠죠.”

정교랑과 시녀는 진소에게 작별을 고한 후 처소로 돌아왔다. 우산을 받쳐 든 시녀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아씨, 저 대인이 뭘 이해했다는 거죠?”

정교랑은 내리는 눈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건, 나도 몰라. 이해했으면 됐지.”

시녀는 어리둥절한 채 실소를 터뜨렸다.

“그러니까, 사실 말 같은 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야.”

정교랑은 손을 뻗어 흩날리는 눈송이를 받았다.

나들이를 다녀온 후 진씨 가문 낭자들이 또 나들이를 가자고 청해 왔으나 정교랑은 전부 거절했다. 정교랑을 찾아와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용기가 있는 낭자는 없었다. 정 낭자는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날 나들이에선 딱 세 마디 한 게 전부야. 아니지, 세 단어라고 해야 하나. 단랑, 이쪽이야, 좋아.”

한 낭자가 손가락을 꼽아 가며 말했다. 방 안에 앉은 자매들은 훗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어때서?”

한 낭자가 다른 자매들을 비웃으며 입을 열었다.

“다들 말만 많지, 무슨 쓸모가 있어? 조부님의 병을 고칠 수가 있나, 멀리 천 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모시러 오는 사람이 있길 하나?”

자매들은 순식간에 표정이 굳었다.

“십팔랑, 우린 비웃자는 뜻 없었어.”

먼저 말했던 낭자가 무안해하며 변명했다.

“없으면 됐어. 누가 누구를 비웃을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야.”

“그래, 그래. 오늘 오후에 같이 조부님 병문안 가자.”

한 낭자가 웃으며 이야기를 원만하게 매듭짓자 다른 낭자들도 좋다고 했다. 막 일어나 마당 문 앞으로 왔을 때쯤 정교랑이 시녀와 함께 문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여인들은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오전에 진료를 마치지 않았나?”

여인들은 계속 머뭇거리기만 할 뿐 마당 안으로 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진 노태야의 거처에는 진소 부부와 단랑이 있었다. 이들 역시 정교랑이 이런 시간대에 찾아오자 놀란 눈치였다.

“혹시 부친의 병세가……·.”

진소가 저도 모르게 긴장하여 물었다.

“아무 일 없어요. 내일부터는 침을 안 맞으셔도 돼요.”

정교랑의 말에 진소 부부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치료비를 정산해 주세요. 이만 떠날까 합니다.”

정교랑의 말이었다.

떠나겠다고?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또다시 깜짝 놀랐고, 진 노태야마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언니, 떠나려고요?”

“당연히 떠나야지.”

단랑의 물음에 정교랑이 대답했다. 정교랑은 지금껏 조용히 지냈다. 매일 침을 놓고 약을 지으러 올 때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시간을 쭉 자기 거처에서 보냈다. 진 노태야의 병세가 하루하루 좋아지는 게 눈에 보이지 않았다면, 진씨 가문 사람들은 정교랑의 존재조차 잊을 뻔했다.

“아씨, 좀 더 머무시지요.”

진소의 말에 진 노태야가 나섰다.

“삼낭, 그건 안 될 말이다. 낭자가 여기 머문 지도 벌써 보름이 넘었어. 낭자가 가겠다고 하는 걸 보니, 낭자가 떠나도 될 만큼 내 병세가 좋아진 게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자 진소도 더는 강하게 붙잡지 못했다.

“그럼 강주로 돌아갈 건지, 아니면……·.”

진소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한동안, 경성에 있다가, 돌아갈까 해요.”

정교랑의 대답에 진소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경성에 있기만 하면 됐다. 어쨌든 부친의 병세는 이제 막 호전된 참이었다. 정교랑은 마음을 놓으라고 했지만, 그게 어디 그리 말처럼 쉽겠는가.

그날 저녁, 진 부인이 치료비를 보내 왔다. 하지만 정교랑은 봉투를 들고 직접 찾아왔다. 정교랑이 얼마를 달라고 밝히지 않았고 진 부인 역시 얼마를 주겠다고 밝히지 않았지만, 봉투에 든 돈이 적지 않았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진 부인은 불안했다. 적다는 뜻인가?

“부인, 도움을 청하고자 합니다. 난 경성을 잘 모르니, 세 들어 살 만한 집을 알아봐 주셨으면 해요.”

진 부인은 놀란 표정이었고, 밖에 꿇어앉아 있던 주씨 가문 여종과 몸종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를 쳐다봤다. 세상에! 진 부인은 한참 만에 정신을 차렸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바로 떠오르지 않네요. 그럼 일단 여기서 지내시다가 좋은 집을 찾으면 그때 옮겨 가세요. 그래야 더 정성을 들여 고를 수도 있고요.”

정교랑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부인께 부탁을 드리는 건, 이 일이 급하기 때문이에요.”

진 부인은 난처한 표정이었다. 이 낭자는 고상하고 우아해 보이는 데다 말수도 적지만, 입을 열 때면 늘 날카로운 말을 내뱉었다.

진소 부부의 말을 들은 진 노태야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그 말대로 해 주어라.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이지. 찾으려 들면 아무리 급해도 찾을 수야 있으니까.”

말을 마친 진 노태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더 물어볼 것 없이 옥대교 근처에 있는 우리 저택을 그 낭자에게 팔아라. 가구 같은 게 전부 갖춰져 있으니 바로 들어가 살 수 있지 않느냐.”

진소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아버지, 낭자에게 팔라고 하셨습니까?”

그냥 주는 게 아니라?

“팔아라.”

진 노태야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반복하자 진소는 알았다고 했다.

소식은 금세 주씨 가문으로 전해졌다. 진씨 가문의 첫 반응과 마찬가지로 주씨 가문 역시 소란스러워졌다.

“정말 그리 말했단 말이냐?”

주 노야가 호통치자 앞에 있던 여종들은 덜덜 떨었다.

“네, 네, 노야. 진 부인께서 진 노야와 상의하여 정 아씨의 집을 사 주셨대요.”

주 노야는 노발대발했다.

“이런 몹쓸 것! 집안 어른은 안중에도 없구나!”

“노야, 이 일을 어쩌면 좋죠? 소문이라도 나면 남들이 우릴 어떻게 보겠어요.”

주 부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전에는 치료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몰라 진씨 가문과 주씨 가문 모두 의원을 불러온 일을 함구했다. 하지만 진 노태야의 병세가 하루가 다르게 회복되면서 주씨 가문은 자신들이 진 노태야의 완쾌와 관계됐다는 사실을 은밀히 퍼뜨리던 차였다.

주 부인은 사흘에 한 번씩 진씨 저택을 찾았다. 이따금 정교랑을 보기도 했지만 못 보더라도 소문을 퍼뜨리는 데 문제될 건 없었다. 하급 무관이 상공 댁의 문턱을 무시로 넘나든다는 게 무슨 뜻이겠는가.

아랫것들을 매정하게 내치면서까지 진씨 가문의 의심을 피한 터였다. 그 일은 그렇게 넘어간 줄 알았건만, 갑자기 이런 식으로 나오다니!

“배은망덕한 것 같으니라고. 외조카는 먹기만 하고 줄행랑을 놓는 개와 다름없다더니, 그 말이 맞구나. 애초에 누구 덕에 지금껏 편히 산 건지 관심도 없어. 이런 근본 없는 계집을 봤나!”

격노한 주 노야는 당장이라도 진씨 저택을 찾아가 못된 조카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다고 했지만, 주 부인이 막았다.

“노야, 그 애는 바보인데 무슨 말인들 못 하겠어요. 진씨 가문 사람들 앞에서 안면 몰수하고 소란을 피울 순 없잖아요.”

“먼저 안면 몰수한 게 누군데?”

주 노야가 씩씩거렸다.

“아직은 돌이킬 여지가 있어요. 어쨌든 진씨 가문에서도 그 애가 우리와 가깝지 않다는 걸 알잖아요. 경성에 와서 진 노태야의 병을 고쳤으니, 집을 주어 곁에 두게 한다고 해도 말이 안 될 건 없어요.”

주 노야는 이를 악물었다.

“그다음은? 거기 들어가서 사는 걸 보고만 있으라고?”

“거기 들어가 살면, 그때 불러오면 되죠.”

주 부인의 말에 주 노야는 냉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그 계집이 대놓고 망신을 줘도 참고 또 참다가, 웃는 낯으로 알랑거려 데려오라고? 그까짓 게 뭔데! 그 계집이 뭐라고! 제 몸엔 주씨 가문의 피도 흐른다는 걸 몰라?”

문밖에 있던 주육낭은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확 풀어 버리고는 뒤돌아 가 버렸다.


한밤중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새벽녘이 되자 제법 많이 쌓였다.

“경성은 겨울이 되면 눈이 엄청 내려요.”

시녀가 챙겨놓은 짐을 보며 말했다. 짐이라고 해 봐야 보따리 한 개가 전부였다. 정교랑이 직접 지은 옷 몇 벌과 빗 등이 들어 있었다. 주 부인이 보낸 옷은 이미 시녀가 진씨 가문 몸종들에게 나눠 준 후였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짐은 단출했다.

경성은 땅값이 비쌌다. 진씨 가문에서 받은 치료비는 딱 저택 하나와 맞바꿀 정도였다. 말은 그렇게 해도 진씨 가문에서 반은 팔고 반은 거저 줬다는 것쯤은 누구나 알았다. 정교랑은 얼핏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듯 보였다.

“마차가 준비됐나 보고 올게요.”

시녀의 말에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고, 눈이 내리는 창밖을 쳐다봤다. 우산을 들고 나가던 시녀의 눈에 이쪽으로 뛰어오던 금가아가 보였다.

“금가아, 저쪽 새집에 가서 정리 좀 해.”

금가아의 다리 상처는 어느덧 많이 나은 상태였다. 금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 타고 가려던 참이야.”

금가아가 작은 나귀 마차를 가리켰다.

“가서 불 좀 때 놓고 있어.”

시녀가 당부했다.

“물도 끓이고. 눈은 나중에 쓸어도 되니까.”

“누나, 걱정 마요. 우리도 같이 가서 청소해 주고 올게요.”

마차를 몰던 두 사환이 말했다. 시녀는 웃으며 고맙다고 하고는 정교랑을 위해 준비한 마차를 보러 갔다. 준비된 마차는 평소 진 부인이 쓰던 마차였는데, 아랫것들에게 명하여 새롭게 꾸며 놓은 터였다. 시녀는 다시 한번 확인을 마친 후에야 안심하고 정교랑을 부르러 갔다.

“아씨, 가시죠.”

문밖에 있던 여종이 우산을 들고 공손하게 말했다. 정교랑이 손을 들어 두모를 썼다. 진소 내외와 집안 식구들이 전부 나와 배웅했다. 진 노태야는 병환으로 추운 날씨에 나오기 힘든 터라 어제 미리 작별을 고한 터였다.

“계속 경성에 있을 거라고 하니, 나중에 내가 다 낫거든 보러 오시구려. 오늘이 꼭 마지막일 필요는 없잖소.”

진 노태야가 호쾌하게 말했다.

여인의 모습은 모두가 예상한 대로였다. 검은 두봉을 걸치고 푸른 우산으로 진눈깨비를 막고 있었다. 걸음을 걸을 때 보이는 진한 색상의 옷자락이 주변의 다른 색을 덮어 버렸다.

“나도 저런 옷 한 벌 지을래.”

진씨 가문 여인은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정교랑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듯이. 다들 넋이 나간 채로 걸음을 옮겼다.

“언니.”

진단랑이 사람들을 헤치고 달려와 정교랑을 잡고 간절한 눈으로 올려다보며 물었다.

“언니한테 놀러 가도 돼요”

“응.”

정교랑이 진씨 저택에서 지내는 동안 두 사람은 얘기가 잘 통했다. 전에 만난 인연이 있으니 그렇겠지. 옆에 있던 어린 낭자들은 부러움이 담긴 눈길로 시선을 교환했다. 분명 또래인데 왜 저 여인 앞이면 겁을 먹게 되는 걸까. 같이 나들이도 한 번 다녀왔지만, 뭐라고 말을 붙여야 할지 알 수 없어 교류는 많지 않았다.

마차는 중문 밖에 세워져 있었다. 진 부인은 정교랑이 마차에 오르도록 직접 살펴 주었다.

“그쪽은 다 정리해 놨어요. 가서 부족한 게 있으면 나한테 연통해요.”

진 부인의 말에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표하고는 별다른 말 없이 마차에 올랐다. 마차의 휘장이 내려지면서 시선을 가리게 되자, 아쉬운 듯 탄식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마차는 느릿느릿 앞으로 나아갔다. 진 대인 등 사내들은 따라 걸으며 배웅했고, 나머지는 전부 그 자리에 서서 눈으로 전송했다.

“정 낭자는 나이가 어떻게 되지? 혼처는 있나?”

진 사노야의 부인이 문득 중얼거렸다.

“아직 어리긴 한데, 그래도 혼담이 오갈 나이가 되긴 했지.”

진소의 부인이 대답했다. 다른 사람들보단 그나마 정교랑을 가장 잘 알았기에 일부러 입을 연 것이었다.

“전에는 아팠다 치고 이젠 다 나았지만, 아직 혼처는 없는 것 같던데.”

혼처가 없다는 말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가슴이 뜨거워졌다. 어린 낭자들은 못 들은 척 자리를 피했고, 소년들은 짐짓 외면하면서도 귀를 쫑긋 세우고 주의 깊게 들었다.

“형님, 그럼……·.”

진 사노야의 부인이 눈을 반짝이며 다가왔다. 하지만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여종과 사환이 달려왔다.

“큰일 났습니다. 누가 정 아씨의 마차를 막고 있어요.”

뭐라고? 모두들 멈칫했다. 누가 막는단 거지? 감히 진씨 저택 앞에서 마차를 막는다?

“황당하군. 대체 누구냐?”

진소가 얼른 나가며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길에는 고개를 쳐든 소년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허리춤에는 칼까지 찬 상태였다.

“주씨 가문의 육낭입니다.”

소년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씨 가문? 진소는 이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을 혼내려고 달려들던 가노들을 향해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래?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진소가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대인, 누이를 데려가고자 왔습니다.”

주육낭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휙 몸을 날려 마부를 밀어내고 마차에 앉더니, 차고 있던 칼로 말의 엉덩이를 육중하게 내리쳤다. 놀란 말이 히이잉 소리를 내며 질주했다.

진 공자는 말을 듣고 붓을 멈췄다.

“뭐라고? 육낭이 사람을 낚아채?”

사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했다.

“거리가 난장판이 됐겠군.”

진 공자는 기괴한 표정을 짓더니 웃으려다가 꾹 참았다.

“녀석, 난 또 무슨 방법을 생각해 냈나 했더니 그거였군.”

고개를 가로젓던 진 공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안 되는데, 불난 데 기름을 끼얹는 형국인걸.”

진 공자가 사환을 보며 물었다.

“그래서 주씨 가문으로 돌아갔다더냐?”

“아직이요, 길가에 있어요.”

사환은 결국 풉 웃음을 터뜨렸다.

“진씨 가문 사람들이 나와 쫓아가면서 난장판이 되는 바람에 오성병마사 위병들이 나와 막았거든요.”

거리에는 사람들이 점점 불어나 물 샐 틈 없을 정도가 됐다. 나중에 도착한 사람들은 앞이 보이지 않아 다급하게 상황을 물었고, 웃고 떠드는 소리와 욕하는 소리가 뒤섞인 거리는 한층 시끄러워졌다.

위병이 땀을 닦으며 앞에 있는 사람과 마차를 쳐다봤다.

“저자가 댁의 마차를 훔쳤다고 했소?”

위병은 질문을 던지며 손가락으로 주육낭을 가리켰다. 진씨 가문 집사와 가노들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은 다음,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제일 간단하고, 말이 되지. 저자가 자기 사촌 누이를 훔쳤다고 하면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 괜한 억측을 낳을 뿐이다.

“주 공자가 그 댁 마차를 훔쳤다?”

위병은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한번 확인했다. 주육낭은 줄곧 마차에 앉아 있었다. 앞이 막히긴 했지만 내릴 뜻은 없다는 투였다. 마차 안은 시종일관 조용했다. 아무도 타지 않은 것처럼.

“어찌 된 일인지는 그만 물어보십시오. 이건 우리 집 마차란 말입니다.”

진씨 집안 집사가 마차에 달린 표식을 가리키며 말했다.

“보십시오, 우리 집 거잖습니까. 우리 집이요.”

사환들이 주육낭을 가리키며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저 사람은 우리 집 사람이 아니에요.”

위병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쓴웃음을 지었다. 경성에서 일하기 힘든 게 이런 경우 때문이라니까. 무슨 일이든 난다 긴다 하는 인물들이 엮여 있으니 원. 귀덕낭장 댁 사람이 이부상서 댁 마차를 훔치다니, 이게 대체 뭔 일이야!

“마차를 훔친 거야, 사람을 훔친 거야?”

“마차에 사람이 있나?”

거리에 있던 건달들이 떠들며 비웃었다.

하긴, 마차를 뭐 하러 훔치겠나. 위병들의 시선이 슬쩍 마차를 훑었다. 역시나, 괜한 억측을 낳게 생겼군. 걱정하던 일이 닥쳐오자 진씨 가문 사람들은 초조해졌다. 그때 안에서 불쑥 나온 손 하나가 마차의 휘장을 들어 올려 사람들을 기함하게 했다. 과연 섬섬옥수였다.

“죄송해요. 진 대인께 감사드립니다. 마차는 꼭 돌려드릴게요.”

진씨 가문 사람들은 그 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실 쫓아오면서도 이 일을 어찌해야 하나 걱정이 많았는데, 괜히 쫓아온 건 아닌 듯했다. 최소한 정 낭자가 대인의 마음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진씨 가문 사람들은 정교랑이 주씨 가문으로 가기 원치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주씨 가문 공자가 마차를 빼앗으며 난동을 부리자 체면을 불구하고 달려들 작정이었다. 남의 일에 함부로 간섭하지 말라고 따지기라도 해야지. 하지만 이들이 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어쨌거나 핏줄은 중한 법이고, 이들은 어디까지나 남이니까.

“누이를 집으로 데려가는 길에 그 댁 마차를 좀 썼기로서니 이렇게 쩨쩨하게 굴 일입니까.”

줄곧 잠자코 있던 주육낭도 입을 열었다. 뭔가 내막이 있는 게 분명해 보였지만 이제는 이 연극을 끝내야 할 때였다. 구경하던 사람들도 입을 다물고 쉬쉬하며 흩어졌다. 먼발치에 있던 사환 두 명이 흩어지는 인파를 보며 신이 나 고개를 돌렸다.

“공자님, 공자님, 이제 가셔도 돼요.”

말에 타 있던 젊은 공자도 시선을 거두었다.

“역시 경성이구나.”

경성의 화려한 모습을 처음 접한 놀라움이 서린 얼굴이었다.

“이 넓은 거리가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붐비다니.”

눈발은 점점 굵어졌다. 바람이 불자 눈 안개가 날렸다. 젊은 공자는 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호호 입김을 불며 손을 녹였다.

“원조!”

어디선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젊은 공자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근처에 있던 점포에서 젊은이 두 명이 뛰어나와 신이 나서 손을 흔들었다.

“하, 자네들도 왔군.”

한원조가 웃으며 훌쩍 몸을 날려 말에서 내리고는 그들을 향해 달려갔다.

“자네가 늦은 거지. 유곽에서 사랑을 속삭이느라 오기 싫었던 건 아니고?”

두 사람은 한원조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우리가 객잔 잡으면서 자네가 묵을 방도 함께 빌렸으니 망정이지, 걱정이 늘 뻔했네.”

한원조는 고맙다고 하며 두 사람의 손을 잡았다.

“이렇게 경성에서 동문끼리 모이게 됐으니, 술이나 실컷 마셔 보자고.”

“좋지. 경성엔 유명한 술집이 많으니 골라 보자.”

“아까는 무슨 소란이 있었던 거야?”

“모르겠어. 아무튼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잖아.”

세 사람은 웃으며 앞으로 걸어가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주육낭은 중문 앞에서 말을 세웠다. 문안은 벌써 시끌벅적했다.

“육낭, 네가 누이를 데려왔다고?”

“교교, 우리 아가, 돌아왔구나.”

주씨 부부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뛰어나오더니 마차를 보며 반색을 했다.

“누이가 고단할 겁니다. 아버지, 어머니, 우선 쉬게 해 주세요. 하실 말씀이 있으면 나중에 하시고요.”

주육낭은 굳은 얼굴로 말한 후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마차 안은 시종일관 조용했다. 주씨 부부가 시선을 주고받은 후, 주 노야가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손짓을 했다. 구경하러 나왔던 자식들과 시종들이 잽싸게 흩어졌다. 바보가 떼를 쓰기 시작하면 큰일이 아닌가.

“교교.”

주 부인이 다가가 휘장을 들어 올렸다.

“무슨 일인지 우선 내려서 얘기하자. 응?”

마차 안으로는 단정히 앉아 있는 시녀가 먼저 보였고, 그 뒤로 옆으로 누워 있는 형체가 보였다. 주 부인은 놀라 헙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교랑!”

주 부인은 엉겁결에 비명을 내질렀다.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지?

“쉿.”

시녀가 불쾌한 듯 입을 열었다.

“우리 아씨 주무시니까 시끄럽게 하지 마세요.”

잔다고? 마차에서 잠을 잔다니? 연기하는 거겠지.

“마차 안에서 어떻게 자. 들어가서 자게 해.”

“괜찮아요. 아씨께선 몸이 안 좋으셔서 매일 낮잠을 주무세요. 어디서든 주무실 수 있어요. 길게 주무시지도 않고요. 자는 걸 깨우면 몸이 불편하세요.”

시녀가 나지막이 말하며 밖으로 눈을 돌렸다.

“부인, 아씨께서 깨어나시면 그때 말씀하세요. 오래 안 걸려요.”

그래? 저 말이 진짜일까? 돌아온 여종과 몸종 말로는 매일 낮잠을 자는 건 사실이라고 했다. 굳어진 분위기 속에서, 마차와 땅 위로 눈이 사락사락 내렸다. 잠깐 서 있었는데도 주 부인은 발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여긴 너무 춥잖아. 아무래도 들어가서 자는 게 낫지.”

주 부인이 또다시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제가 다 대비해 놨거든요.”

시녀가 마차 안에 있는 난로와 정교랑이 덮고 있는 커다란 두봉을 가리키며 말했다. 시녀의 발도 두봉 속에 있었다. 주 부인이 계속해서 말을 이으려 하자 시녀가 또다시 쉿 하는 동작을 했다.

“바람이 차요. 우선 휘장을 내릴게요.”

시녀가 휘장을 내렸다. 주 부인은 말문이 막혀 밖에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부인?”

우산을 들고 있던 여종이 나지막이 불렀다. 들어갈까요? 아니면 여기서 함께 있을까요? 여종이 눈빛으로 묻자 주 부인이 눈을 부라렸다. 눈치도 없는 아둔한 것. 외숙모 노릇을 이따위로 한다고 손가락질을 받을 텐데! 하지만 기다리자니……·. 주 부인은 발을 동동 굴렀다.

“가서 손난로와 발 쬐는 화로를 가져오너라.”

주 부인이 나지막이 명했다.

다행히 시녀의 말은 사실이어서, 여종이 손난로와 화로를 가져오기도 전에 정교랑은 잠에서 깼다. 시녀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주 부인이 얼른 휘장을 들어 올렸다.

“교교.”

주 부인은 눈물까지 흘렸다.

“여기가, 어디죠?”

정교랑이 시녀가 건네는 뜨거운 물을 받으며 물었다.

“집에 왔어. 착하지, 마차는 추우니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

“마차는, 안 추워요.”

정교랑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난 춥다고. 주 부인은 발을 굴렀다. 얘는 정말 바보야, 뭐야. 말을 알아듣고 의사를 전달하는 게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단 말이지. 지금 추운지 안 추운지 따지잔 말이 아니잖아.

“그래, 교교. 이제 집에 도착했으니 안으로 들어가자. 눈이 많이 내리잖니.”

주 부인은 어서 가마를 가져오라며 여종들을 재촉했다. 손난로와 화로를 가지러 갔던 여종이 돌아오고 가마도 대령했다. 주 부인이 애걸복걸한 끝에 정교랑이 마침내 마차에서 내렸다.

울거나 떼를 쓰지 않았을 뿐더러 두모 속 표정은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처음부터 이곳으로 오려고 했다는 듯이, 중간에 억지로 끌려온 게 아니라는 듯이. 이런저런 말을 한가득 준비했던 주 부인은 도리어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는 눈치였다.

“교교, 우선 안으로 들어가자. 들어가서 얘기해.”

주 부인은 자신의 추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난로며 화로를 전부 가마에 실은 후, 여종들에게 둘러싸여 안으로 들어갔다.

“교교, 진씨 저택의 거처와 똑같이 꾸몄으니 낯설지 않을 거야. 마음에 드니?”

주 부인이 정교랑의 손을 잡고 층계를 오르며 물었다.

“여긴 내 거처에서 제일 가까운 곳이야. 무슨 일이든 편히 말해.”

막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여종 둘이 왔다.

“부인, 노야께서 오시래요.”

주 부인은 웃으며 정교랑의 손을 톡톡 두드려 주었다.

“집에선 마음 편히 가져. 어려워하지 말고. 난 네 외숙한테 가 봐야겠다. 이따 같이 보러 올게.”

말을 마친 주 부인이 여종들과 함께 자리를 떴다. 정교랑과 시녀는 처음부터 줄곧 말이 없었다. 회랑 아래에 꿇어앉아 있던 여종 둘이 얼른 문을 열었다. 실내의 따뜻한 온기는 회랑에서도 느껴졌다.

“아씨, 들어가세요.”

여종들이 공손히 말했다. 정교랑이 막 걸음을 옮기려는데, 뒤에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여섯째 공자님, 이게 무슨 일이세요?”

정교랑과 시녀가 몸을 돌렸다. 시녀가 먼저 헙 하는 소리를 내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주육낭이 마당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주육낭은 웃통을 벗은 채 싸리나무를 등에 지고 눈 속에 섰다. 주육낭이 몸을 돌리고 서자 탄탄한 등과 싸리나무가 정교랑의 눈에 들어왔다.

“육낭이 세 가지 죄를 지었기에 사죄하러 왔습니다.”

육낭은 포권의 예를 취한 후, 한쪽 무릎을 꿇고 바닥에 앉았다.

“낭자의 병세를 살피지 않고 시녀를 빼앗은 죄가 하나요, 낭자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억지로 붙잡아 둔 죄가 둘이요, 낭자가 강제로 이 사죄를 듣게 하는 죄가 셋입니다.”

눈밭에 선 소년의 헐벗은 상반신 위로 어느덧 눈송이가 쌓이고 있었다. 몸 위로 내린 눈이 녹는 속도는 점점 더뎌졌다. 주변에 있던 여종들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덜덜 떨면서 감히 말리지도 못했다.

정교랑은 부끄러운 눈빛이나 피하려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은 채로 소년의 벌거벗은 등을 훑었다.

“나한테 이걸 보여 주려고, 어머니가, 자리를 피하도록 했군요.”

정교랑이 천천히 말하자 주육낭이 몸을 돌아섰다. 역시 바보는 아니었군. 일부러 모친이 자리를 비우게 한 걸 알아채다니.

“난……·.”

주육낭은 이를 악물고 돌아서더니 싸리나무 채 하나를 뽑아 몸을 힘껏 후려치며 회랑 아래에 선 여인을 쳐다봤다. 사실 정교랑을 본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이미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뜻밖에도 자주 봤던 얼굴처럼 낯이 익었다.

회랑 아래에 두봉을 걸치고 선 여인은 어느덧 두모를 벗은 후였다. 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 주육낭을 빤히 쳐다봤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주육낭의 벗은 가슴을 쳐다봤다.

추워서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주육낭의 가슴 근육은 붉게 달아올랐다. 여인이 저런 눈빛으로 사내를 훑어보는 건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주육낭이었다. 보통은 옆에 있는 시녀처럼 손으로 눈을 가리지 않던가. 정교랑은 주육낭의 얼굴로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아무래도……·.”

정교랑은 두봉 속에서 손을 내밀어 손가락으로 주육낭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벗으니까, 못생겼어요.”

주육낭은 자신이 이런 짓을 벌였을 때 처할 상황에 대해 갖가지로 추측했었다. 그 추측 속에서 여인은 울거나 화를 내거나 냉소를 짓거나 비웃는 말을 내뱉었다. 아니면 진 공자처럼 음흉한 마음을 숨기고 웃으면서 겉으로는 화해하는 척, 자책의 말을 늘어놓을 수도 있고. 상대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난 꿈쩍도 안 하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은 터였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이 여인은 울거나 떼를 쓰거나 부끄러워하거나 초조해하거나 화를 내는 대신 그 섬섬옥수로 자신을 가리켰다. 넌, 못생겼어! 못생겼다고!

어디가 못생겼다는 거야! 네 눈이 이상한 거지! 아니지, 아니지. 멋있는지 보여 주려던 게 아니잖아!

여인이 계속해서 뚫어져라 쳐다보자, 부끄러운 듯 옆에서 눈을 가리고 있던 시녀도 손을 벌려 손가락 틈으로 훔쳐봤다. 순간 굳은 결심이 와르르 무너진 주육낭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정교랑의 거처가 시끄러워졌다.

“이게 무슨 짓이니, 육낭. 이 추운 날씨에.”

주 부인은 눈물을 보이며 여종들에게 얼른 옷을 입히라고 명했다.

“어머니, 상관 마세요.”

주육낭은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이를 악물더니 싸리나무 채를 뽑아 또다시 몸을 후려쳤다. 주 부인과 아랫것들은 놀라 비명을 내질렀다.

“우리 아들.”

주 부인이 달려가 주육낭을 끌어안고 빨갛게 부어오른 매 자국을 보며 통곡했다.

“아이고, 우리 아들.”

주육낭은 늠름한 소년의 몸이었지만 여인 몇 명이 달려들어 실랑이를 벌이는 바람에 결국 싸리나무를 내려놓고 두봉을 걸치게 됐다.

“육낭, 저 애는 네 누이동생이야. 형제자매 간에 말로 못 풀 일이 어디 있어.”

“네가 이런 짓을 벌이면 네 누이만 난처해져.”

“너 때문에 네 누이가 놀랐겠다.”

아들을 끌어안고 눈물을 보이던 주 부인은 정교랑이 시종일관 조용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다른 여인이었다면 놀라서 눈물을 보이거나 불안에 떨었을 텐데. 주 부인은 고개를 들고 교교를 부르며 회랑 아래로 눈길을 돌렸다.

회랑 아래엔 이미 아무도 없었다. 어디 갔지? 주 부인이 멈칫하자 여종 하나가 손으로 안쪽을 가리켰다. 열린 문 사이로 그 안에 앉은 정교랑이 보였다. 정교랑은 시녀의 말을 들으며 실내를 둘러보고 있었는데, 몹시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교교.”

주 부인이 주육낭을 끌고 안으로 들어오더니, 주육낭을 꿇어앉혔다. 상의를 입지 않은 터라 꿇어앉으면서 두봉이 벗겨져 벌거벗은 상반신이 그대로 드러났다. 병풍에서 시선을 거둔 정교랑이 다시 손을 뻗어 주육낭을 가리켰다.

“벗고 있네요.”

정교랑은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손가락질을 했다. 얘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주 부인마저 민망해하며 서둘러 아들을 가려 주느라 말이 꼬이고 말았다.

“너도 참, 이게 무슨 짓이냐. 형장을 짊어지고 사죄하러 오다니. 네 누이가 이런 걸 알기나 하겠어?”

주 부인이 목소리를 깔고 나무라자 주육낭의 얼굴이 붉어졌다.

“진지하게 사과하러 온 거니까, 바보 시늉하지 마!”

주육낭이 몸을 곧추세우며 소리쳤다.

“옷 벗는 게, 사과예요?”

정교랑은 멍한 표정으로 더없이 진지하게 물었다.

“시치미 떼지 말라고!”

주육낭이 벌게진 얼굴로 벌떡 일어서자 주 부인이 얼른 잡아 앉혔다.

“육낭,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얘가 이런 걸 알겠니. 사내 녀석이 이 꼴을 해서 여인의 처소로 달려오니 얼마나 놀랐겠어? 얘가 너 같은 사내인 줄 알아?”

주육낭은 굳은 얼굴로 고집을 부리며 말없이 정교랑을 쳐다봤다. 얘가 너 같은 사내인 줄 알아? 정교랑 역시 주육낭을 쳐다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진 공자가 허벅지를 내리치며 박장대소하는 바람에 탁자에 있던 술잔이 흔들렸다. 방 안에 있는 주육낭은 여전히 상반신을 탈의한 상태였다. 몸종 하나가 등에 난 매 자국에 연고를 발라 주었다.

“뜻밖이네. 형장을 짊어지고 가 사죄하는 방법을 생각해 내다니.”

진 공자가 웃었다. 꿇어앉은 주육낭은 연고 때문에 화끈거려서인지 얼굴과 몸에 잔뜩 힘을 주고 긴장한 채였다.

“이 눈보라 속에서 호기롭게 죄를 청하러 갔는데, 어린 낭자한테 희롱당하는 소년 공자가 됐다는 건 더더욱 뜻밖이고.”

진 공자는 잔을 들어 술을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어린 낭자 때문에 소년 공자가 창피를 당해 돌아오다니.”

주육낭 옆에 있던 몸종은 저도 모르게 풉 웃음을 터뜨렸다가 얼른 엎드려 잘못을 빌었다. 주육낭은 신경 쓰지 않고 손을 내저으며 나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바보 시늉을 하더라고.”

주육낭이 냉소를 지었다.

“그게 뭐 어때서? 자네가 무모하게 막무가내인 시늉을 하니까 저쪽도 바보 시늉을 하는 수밖에.”

“바보 시늉을 하든 말든, 어쨌거나 우리 집으로 발을 들였어.”

진 공자는 주육낭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옆에 놓아두었던 지팡이를 들어 주육낭을 힘껏 내리쳤다. 힘을 주어 때리긴 했지만 주육낭을 다치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화들짝 놀란 주육낭이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상자, 자네 미쳤나! 날 왜 때려!”

“야만스러워서 때린다. 사람을 업신여겨도 분수가 있지!”

진 공자 역시 눈을 부라리며 소리치고는 술잔을 들어 한입에 털어 넣고 지팡이를 다시 움켜쥐었다. 탄탄한 근육을 가진 주육낭이었지만 이유도 없이 맞는 건 물론 원치 않았다.

“왔으면 술이나 마실 것이지, 왜 술주정을 하고 난리야!”

주육낭이 일어서며 몸을 피했다. 그런데도 진 공자는 지팡이를 내려놓지 않고 쫓아가 패려고 들었다.

“이 야만스러운 자 같으니라고, 사람을 업신여겨도 분수가 있지. 내가 괴로워서 그런다! 줘 패지 않고는 분이 안 풀릴 거 같아서!”

소리치던 진 공자는 사환을 부르더니 주육낭을 쫓아가 패도록 자신을 부축하라고 고집을 부렸다. 몸종과 사환은 이 소동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눈치였다. 언제나 우아하고 고상한 태도로 말소리조차 크게 내는 법이 없던 진 공자인데, 갑자기 술주정을 하며 주육낭을 때리니 말이다.

“내가 누굴 업신여겨!”

주육낭 역시 영문을 몰라 소리쳤다. 정말 술이 과해서 이러나? 아니면 집에서 열 받는 일이라도 있었나? 딴 사람 때문에 화가 난 건가?

“자네 말이야, 자네가 날 업신여겼다고.”

진 공자가 소리쳤다. 진 공자는 술기운이 올라와서인지 붉어진 두 눈으로 지팡이를 내던졌다. 물론 주육낭이 지팡이에 맞은 건 아니었다. 주육낭은 한 발 옆으로 비켜서며 미간을 찌푸렸다.

“자네는, 정 낭자를 업신여겼어. 그건 날 업신여긴 것이기도 하지.”

진 공자가 비틀거리며 소리쳤다. 뭐라고? 주육낭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니, 그 애가 자네랑 무슨 상관인데!”

주육낭이 투덜거렸다. 혹시 저번에 농담으로 한 말에 정말 마음이 동했나? 진 공자가 고개를 들어 주육낭을 쳐다보며 비웃었다.

“그 여인? 그 여인이 곧 나고 내가 곧 그 여인이야. 동병상련의 처지지.”

진 공자가 몸을 일으켜 세우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그 여인을 보러 가야겠어.”

몸종과 사환은 깜짝 놀랐다. 그건 좀 아닌데.


“부인, 부인. 진 공자께서 술에 취해 육공자와 싸우시고는 정 낭자 거처로 가셨어요.”

여종이 급히 달려와 보고했다. 놀란 가슴이 채 진정되지 않은 채로 앉아 있던 주 부인이 또다시 벌떡 일어섰다. 간신히 주육낭을 돌려보내고 정교랑을 어르고 달래 돌아간다는 말이 안 나오도록 했더니, 이젠 또 그 녀석이 난리네. 집안 형제자매도 아니고 진 공자는 외간 사내잖아!

주 부인은 속이 뒤집어졌다. 집으로 데려오면 뭐 하나, 한시도 마음 편할 때가 없는걸. 도리어 속만 끓이지.

“어서 가라, 어서 가서 막아.”

주 부인은 서둘러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시각 진 공자와 주육낭은 벌써 정교랑의 거처 앞에 와 있었다. 회랑 아래에 서 있던 시녀가 두 사내를 보고 얼른 뒤돌아 고했다.

“아씨, 벌거벗고 있던 사람이 또 왔어요.”

시녀는 소리치며 손을 들었다. 바로 눈을 가리겠다는 듯이. 시녀가 외치는 소리에 주육낭은 다리를 비틀거렸다. 부끄러운 줄 모르는 계집 같으니라고!

주육낭은 분해 씩씩거리며 돌아가려고 했지만 진 공자가 어깨를 붙잡았다.

“이번엔, 심지어, 두 명이네.”

시녀의 목소리에 이어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육낭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그 딱딱한 목소리가 어쩐 일인지 주육낭의 귀에는 조소로 들렸다. 그 윗전에 그 아랫것이네. 그 계집의 목소리겠지. 역시 귀에 거슬려. 목소리가 시녀만도 못하잖아.

진 공자가 고개를 들자 문 안에 선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어느덧 제법 굵어진 눈송이가 흩날렸다. 새하얀 눈보라 속에서 품이 큰 옷을 입은 채 긴 머리를 늘어뜨린 여인의 모습은 더없이 눈부셨다.

이 사람이 바로 도관에 10년 가까이 버려져 있다가, 홀로 천 리 길을 돌아온 정 낭자로구나. 이 사람이 바로 날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뚝딱하면 새로운 사람을 만들어 내는 정 낭자로구나. 이 사람이 바로 차와 음식에 까다롭고 언제나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이는 정 낭자로구나.

말씀은 익히 들었습니다. 진 공자가 손을 내밀었다. 멀리서 보니 절을 하는 듯 보였다. 중심을 놓친 진 공자는 기우뚱하며 앞으로 넘어질 뻔했지만, 다행히 사환과 주육낭이 얼른 붙잡았다. 이들은 비틀거리며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낭자, 같이 한잔하러 왔습니다.”

진 공자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 듯 따로 인사를 하거나 예를 표하지 않고, 지팡이에 의지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 시녀는 놀란 표정이었다. 정교랑도 진 공자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표정엔 변함이 없었다.

“절름발이가 옷을 벗으면, 멋있나요?”

정교랑의 물음에 회랑 아래에 있던 사환은 어찌나 놀랐는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이렇게 호방한 낭자라니! 주육낭이 눈을 치켜뜨며 소리쳤다.

“계속 바보 시늉을 하려나 본데, 내가 진짜 확 다 벗어 버리면 어쩌려고?”

시녀는 손으로 눈을 가렸다.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라 하였나니. 정교랑은 주육낭에게로 눈길을 돌려 천천히 훑어보며 말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죠?”

주육낭은 숨이 턱 막혀 얼굴이 붉어지고 목에 핏대가 섰다.

“낭자, 이 야만스러운 놈이 사람을 너무 업신여기네요. 내가 낭자와 함께 한잔해야겠습니다.”

정교랑이 진 공자를 쳐다봤다.

“함께요?”

진 공자는 주육낭의 방에서 가져온 술잔을 들며 말했다.

“함께 슬픔을 나누자고요.”

함께? 슬픔을 나눈다? 둘이 무슨 얘길 하는 거야?

“낭자는 손발이 있지만 이 야만스러운 놈한테 묶여 있으니, 나처럼 손발에 불구가 있는 사람과 다름없는 처지 아닙니까. 자유를 얻을 수 없으니 마음속에 분노가 쌓일 수밖에요. 달리 도리가 없지요!”

진 공자는 껄껄 웃으며 술을 비웠다.

“함께 슬픔을 나눕시다. 이 슬픔을 그 누가 알겠습니까.”

밝은 목소리로 말하며 웃는 진 공자를 보며 옆에 있던 시녀는 짠한 마음이 들었다.

달리 도리가 없었다. 누가 주씨 가문으로 오고 싶다고 했나. 이 야만스러운 자의 겁박 때문에 붙잡혀 왔거늘, 이젠 또 사과를 하겠다며 윽박을 지르니 말이다. 정작 뭘 잘못했는지, 아씨가 왜 슬퍼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아씨의 마음속엔 답답한 게 많을 터였다. 여인의 몸에 묶인 것도, 혈육이라는 자들의 속박도. 말할 수 없고 싸울 수 없고 벗어날 수 없으니 답답할 수밖에. 그래도 다행이네, 다행이야. 알아주는 사람이 있으니. 시녀가 손을 들어 눈을 가리자 눈물이 떨어졌다. 이 공자는 그래도 괜찮네.

주육낭이 진 공자를 힐끔 쳐다봤다.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눈빛이었지만 그래도 굳은 표정을 지었다.

문이 열려 있어 안에 있는 사람들도 흩날리는 눈송이를 내다볼 수 있었다.

“사람을 너무 업신여겼어, 너무.”

진 공자는 여전히 술잔을 쥔 채 웃으며 주육낭과 하늘을 번갈아 가리켰다.

“내가 하늘과는 못 싸우지만, 자네와도 못 싸울 줄 알아?”

진 공자는 또다시 지팡이를 들어 내리쳤다.

“진상자, 적당히 해.”

주육낭이 굳은 얼굴로 진 공자의 지팡이를 훅 빼앗았다.

“육낭, 아직도 뭘 틀렸는지 몰라? 자네는, 사람을 너무 업신여겼어.”

옆에 있던 시녀도 주육낭을 노려봤다. 맞아, 입으로는 잘못했다고 하면서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잖아! 사람을 업신여겨도 분수가 있지!

주육낭이 굳은 얼굴로 소리쳤다.

“내가 다짜고짜 네 시녀를 빼앗아 왔다. 내 잘못이야. 화가 나고 원망스럽거든 나한테 풀어. 조모님과 고모님을 생각해서라도 주씨 가문에 분풀이하진 말라고.”

“조모님과 고모님을 생각한다면서, 자네는 누이를 이렇게 대해?”

진 공자는 이미 비어 있는 술잔을 쥐며 말했다.

“술을 따라라, 술을. 낭자와 함께 슬픔을 달래야겠다.”

“그래, 우리가 사람을 업신여겼다.”

주육낭은 이를 악물고 정교랑을 쳐다봤다.

“어떻게 대해 줬으면 좋겠는지 말해 봐.”

“낭자가 자네를 용서하지 않고 어떻게 사죄하면 좋겠다고 말하지 않으니 낭자의 잘못이라는 거야? 자네는 억울하고?”

진 공자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주육낭을 쳐다봤다.

“좋은 말도 나쁜 말도 다 자네 차지로군. 육낭, 사람을 이렇게 업신여기나.”

시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이요, 내 말이. 아씨가 입을 다물고 있으니 눈앞에 있는 이 공자가 할 말을 대신 해주네. 아씨의 설움을 알아봐 주는 이가 있다니.

“난 그저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긴 한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뿐이야. 분풀이를 하고 싶으면 하고 싶은 대로 해.”

주육낭은 몸을 바로 앉으며 정교랑을 쳐다봤다. 맞은편의 정교랑은 말 한마디 없이 줄곧 조용히 앉아 있었다. 주육낭이 쳐다보자 침묵을 지키던 정교랑은 입을 가리며 하품을 했다.

“뭐야, 아직도 안 벗었네요?”

상념에 젖어 있던 시녀는 그 말에 실소가 터져 나와 얼른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정교랑, 아직도 안 끝났냐고!”

주육낭이 한쪽 무릎만 꿇은 채 일어나며 소리쳤다. 진 공자도 따라 웃었다.

“안 끝났지.”

진 공자가 주육낭을 향해 술잔을 내던졌다.

“냉큼 꺼져. 여기서 짜증 나게 하지 말고.”

“진상자, 자네까지 왜 이래!”

주육낭이 씩씩거리며 술잔을 휙 낚아챘다.

“꺼지라고! 자네가 이런 작자였다니, 내가 눈이 삐었지. 냉큼 안 나가면 다시는 아는 척 안 해.”

진 공자가 문밖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주육낭은 이를 악물고 노려보다가 옷소매를 뿌리치며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마당의 문밖에는 어느새 여러 사람이 서 있었다. 우산도 안 들고 선 탓에 거의 눈사람이 되어 있을 정도였다.

“육낭, 진 공자 혼자 안에 있는 거야? 아니, 이 일을 어쩌면 좋아.”

주 부인이 다급하게 아들을 붙잡았다.

“안 될 게 뭐 있어요? 이참에 저 바보가 달라붙었으면 좋겠네!”

주육낭은 심드렁하게 대꾸하고는 옷소매를 뿌리치며 가 버렸다. 주 부인은 소리쳐 부르고 싶었지만 큰 소리를 낼 순 없었다.

“쟤도 참,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달라붙긴. 진씨 가문이 그리 만만한가?”

달라붙을 수만 있다면, 우리 집안 딸들도 진작 수를 썼겠지. 그런데 진 공자가 뭐 하는 거지? 정말 취했나?

방 안에 남은 진 공자는 자리를 박차고 나간 주육낭을 보며 기쁜 기색이었다.

“저런 자는 따끔하게 혼내 줘야 합니다. 사람을 너무 업신여겨요.”

진 공자가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쳐다봤다.

“낭자, 마음 풀어요. 화를 내야 할 사람은 낭자가 아니라 저자입니다.”

정교랑은 그러냐는 눈빛으로 진 공자를 쳐다봤다.

“그야 그렇죠.”

정교랑이 진 공자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저 사람은 갔는데, 그쪽은 아직도 옷을 안 벗고 있네요?”

무서워라. 진 공자의 사환은 머리를 목 속으로 집어넣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정말 바보잖아! 저게 대체 무슨 말이야! 진 공자는 정교랑을 쳐다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낭자가 보고 싶다면 벗어도 상관없습니다.”

진 공자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몸이 온전치 않아 볼품없지만요.”


밤의 어둠이 내릴 무렵, 눈이 그쳤다. 걸어 놓은 홍등이 비추는 마당은 반짝반짝 더없이 아름다웠다. 여종들이 서둘러 문을 열자 실내의 따뜻한 공기가 훅 끼쳐 왔다. 주 부인이 지친 기색으로 들어오며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됐소? 아직도 난동을 부리는 거요?”

주 노야가 서둘러 물었다. 여종은 주 부인의 두봉을 벗겨 준 후, 얼른 자리에서 물러나 문을 닫고 나갔다.

“아니요.”

주 부인은 자리에 앉으며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손으로 이마를 꾹꾹 눌렀다. 정교랑과 시녀는 이 집에 발을 들인 후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주 부인은 그 어느 때보다 심한 피로를 느꼈다.

“작은 부엌을 마련해 줬더니 둘이서 밥을 해 먹고는 자러 갔어요.”

주 노야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후에는 진씨 가문에서 사람을 보내 진 노태야의 진맥을 위해 내일 정교랑을 데려가겠다고 했다. 그 집에서 나온 게 오늘이거늘 뭐하러 내일 또 데려가겠다는 건지.

떠날 건지 남을 건지 정교랑의 의사를 물으러 온 게 분명했다. 정교랑이 진 노태야의 진료를 핑계로 떠나겠다고 하면, 주씨 가문에서도 막을 도리가 없으니 말이다.

주 노야는 울화가 치밀었다. 아들이 괜한 소동을 벌여 정교랑과 진씨 가문의 심기까지 건드리게 되지 않았는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던 와중에, 뜻밖에도 정교랑이 진씨 가문 사람에게 왕진은 안 가도 된다고 했다. 가야 할 때가 되면 자신이 직접 가 보겠다면서.

간신히 체면은 지키게 됐군. 주 노야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게 다 육낭 덕이에요.”

주 부인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제 몸을 어찌나 세게 후려치는지 못 보셨죠? 세상에, 이 엄동설한에. 그깟 몸종이 무슨 대수라고 그 계집이 이렇게 성질을 부리는지 모르겠어요. 혹여 육낭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가만 안 둘 거예요.”

“잘못될 게 뭐 있소, 그깟 상처 가지고.”

주 노야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마음이 한결 편해진 얼굴로 차를 마셨다.

“집안만 평온하면 됐소, 그거면 돼.”

집안의 평온이라. 주 부인은 불과 하루 만에 정신없이 벌어진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어쨌든 이미 지나간 일이잖아. 앞으론 집안이 평온하겠지? 그런데 이 알 수 없는 불안은 뭘까?

같은 시각, 침상에 누워 있던 정교랑과 시녀는 거의 동시에 일어나 앉았다.

“아씨, 금가아를 깜빡했어요!”

시녀가 소리쳤다. 이어 방 안과 온 마당에 불이 환하게 켜지더니 곧 주씨 저택 전체가 소란스러워졌다.

“뭘 하려고?”

막 잠자리에 들었던 주 노야 내외는 서둘러 옷을 챙겨 입었다.

“이 밤중에 어딜 나간단 거야?”

“사환 하나를 잃어버렸다면서 그 시녀가 찾으러 가겠대요.”

여종이 말했다.

“무슨 사환을 말이냐. 사환을 잃어버리다니?”

주 부인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떠나려는 핑계일 테지. 어디서 농간을 부려! 내 어쩐지 쉬이 넘어간다 했네. 아주 사람을 들들 볶는군. 절대 내보내지 마라!”

주 노야의 호통에 여종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는데 주육낭이 두봉을 걸치고 성큼성큼 걸어왔다.

“아버지, 어머니, 염려 마십시오. 어딜 가든 제가 같이 따라가면 그만입니다.”

“육낭, 몸도 성치 않은데 이 겨울밤에 어딜 간다는 게야.”

주 부인이 걱정했지만 주육낭은 손을 내저은 후 서둘러 나갔다.

회랑 아래에 그 여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옷을 단정히 차려입은 시녀만 서 있을 뿐이었다.

“공자님께 폐를 끼치다니요. 마차만 준비해 주시면, 제가 진씨 가문에 가서 알아볼게요.”

시녀만 간다? 그 여인은 안 가고? 주육낭은 인상을 쓰며 안쪽을 쳐다봤지만, 불 꺼진 방은 어두웠다.

“아씨는 주무세요.”

시녀가 말했다. 정말 사환을 찾으려던 건가? 바보 시늉에 도가 튼 여인인데, 그 말을 어찌 믿어!

“서둘러 사람을 찾는다지 않았느냐? 속히 가자.”

주육낭은 앞장서서 밖으로 나가며 소리쳤다.

낮에 눈이 내렸는데도 겨울밤의 경성은 여느 때처럼 활기찼고 거리는 인파로 가득했다. 주육낭은 마차를 직접 몰며 진씨 저택으로 내달렸다. 당초 금가아는 옮겨 가려던 저택으로 먼저 가 있었다. 그런데 정교랑과 시녀가 갑작스럽게 주씨 저택으로 끌려가면서 진씨 가문과 주씨 가문 모두 경황이 없어 금가아를 까맣게 잊고 말았다.

진씨 저택에서 그 아이를 도로 데려왔을 수도 있고,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아이에게 연통을 해 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진씨 가문 사람들은 한밤중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나왔다.

“주씨 가문에서 데려간 줄 알았죠. 저희도 안 가 봤습니다.”

여러 사람에게 물어본 끝에 집사가 허벅지를 탁 치며 이제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니, 사람을 보낸 것도 댁들이고 그 집을 빌려준 것도 댁들인데, 우리가 무슨 수로 데리러 가?”

부아가 치민 주육낭이 집사에게 소리를 질렀다.

“주육낭, 네가 파렴치한 짓을 안 벌였다면 이런 일이 생겼겠냐!”

진씨 가문의 소년 하나가 못마땅한 얼굴로 삿대질을 하며 욕을 해댔다.

“세밑이라 경성에 유괴범도 많은데, 그 사환은 이제 겨우 열두 살이고 경성은 처음이야. 길도 모르고 아는 사람도 없는데,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정 낭자한테 뭐라 할지 어디 두고 봐야겠다!”

옆에 있던 소년들도 거들고 나섰다. 정 낭자는 원치 않게 주씨 가문으로 끌려갔지만, 어쨌거나 혈육인지라 달리 하소연할 길이 없을 것이다. 그 딱한 사정에 모두 울분을 느끼던 차였다. 주육낭은 거리낄 게 없다는 듯 차갑게 웃으며, 한바탕 싸움이라도 벌이겠다는 눈빛으로 마당을 훑었다.

“우선 사람부터 찾아요. 못 찾으면 그때 따지고요!”

시녀가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

마차가 눈길을 내달렸다. 어슴푸레 새벽빛이 밝아올 무렵, 시끄러운 발소리가 고요한 주씨 저택의 아침을 깨웠다. 시녀는 새빨갛게 언 얼굴에 붉어진 눈으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정교랑은 의복을 단정히 갖춰 입고 앉아 책을 손에 쥐고 있었지만, 평상시처럼 책을 읽거나 글씨를 쓰진 않았다.

“아씨.”

시녀가 울먹였다.

“말부터 하고 울어.”

정교랑의 말에 시녀는 애써 눈물을 삼켰다.

“여러 사람한테 물어봤는데, 금가아가 문 앞에 서 있다가 골목으로 갔대요. 그 길을 따라가며 수소문했더니 코를 훌쩍이며 진씨 저택이 어디냐고 묻는 걸 본 사람이 있더라고요. 그런데 어느 진씨를 말하는지 모르니 못 찾았겠죠.”

시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거기까지 말한 후 말을 멈췄다.

“그러니까 진씨 저택도 못 찾고, 주씨 저택도 어딘지 모르고, 원래 있던 집도 잃어버려서, 어디로 갔는지 모른단 거네.”

정교랑의 말에 시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씨, 너무 염려 마세요. 관아에 고해서 찾고 있어요. 성문도 단단히 지키고 있으니 성을 나가진 못했을 거예요.”

정교랑은 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아씨, 아씨도 나가시려고요?”

시녀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그래, 내가 찾으러 가야겠다. 내가 잃어버렸으니, 내가 되찾아와야지.”

정교랑이 출타한다는 말에 주 노야 내외는 또 초조해졌다.

“역시 도망치려던 핑계였군. 그깟 사환 하나 잃어버린 게 별거냐. 찾으면 찾는 거고 못 찾으면 그만이지, 그게 무슨 대수라고!”

마당 문으로 온 정교랑은 길을 막아선 집사를 쳐다보며 물었다.

“자네들이, 날 막는 건가?”

집사는 아씨의 무뚝뚝한 표정에 모골이 송연할 지경이었다.

“아니다, 아니야.”

주 부인과 주 노야가 달려왔다. 주 부인이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정교랑의 손을 붙잡았다.

“교교, 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게 아니야. 날이 춥잖니. 저들이 찾게 두고 넌 그냥 집에 있어.”

“안 돼요.”

정교랑이 말했다. 얘는 말하는 게 어쩜 이렇게 단호하지?

“이게 웬 소란이냐. 가서 사환 몇 놈을 사다 주어라.”

주 노야가 웃어른의 위엄을 갖추며 집사에게 명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주 노야를 쳐다봤다. 상경한 이후 외숙을 이렇게 똑바로 직시하는 건 처음이었다. 주 노야 역시 조카의 눈빛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 두 눈은 어릴 때랑 똑같군. 소름 끼칠 정도로 추해. 특히 저 흰자위를 주체하지 못하고 번득일 땐.

“날, 못 가게 막는 건가요?”

정교랑이 주 노야를 보며 묻자 주 노야는 멈칫했다. 등에 알 수 없는 서늘함이 느껴졌다.

정말 정이 안 가는 아이야. 주 노야가 그런 생각을 하며 막 입을 열려는데, 밖에서 주육낭이 들어왔다.

“못 가게 하는 사람 없다.”

주육낭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밤을 새운 피로가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마차에 올라라. 내가 데려다주겠다.”

“육낭!”

주 노야와 주 부인이 동시에 소리쳤다. 하나는 부아가 치미는 목소리였고, 하나는 걱정이 되는 목소리였다.

“일개 사환 때문에 이게 무슨 짓이니. 관아에 고해 온 성에서 찾고 있으니 그거면 됐지, 왜 너희까지 직접 가겠다는 게야?”

주 부인은 아들을 잡아끌고 정교랑 앞으로 와서는 손을 뻗어 정교랑을 붙잡았다.

“교교, 넌 몸도 안 좋잖아. 육낭, 밤새 돌아다녔으면서 어딜 또 나가겠다는 거야.”

주육낭이 정교랑을 쳐다보자 정교랑도 주육낭을 쳐다봤다. 둘 다 같은 색 두봉 차림에 털이 달린 두모를 쓰고 있어 잘 어울리는 한 쌍처럼 보였다.

“괜찮습니다.”

주육낭은 주 부인에게서 손을 빼내고 먼저 밖으로 나갔다. 멈칫했던 주 부인이 소리쳐 부르는 사이, 정교랑도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손을 뺀 다음 따라 나갔다.

“가게 두시오.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둬.”

주 노야가 심드렁하게 손을 내저었다. 육낭이 감시하고 있으니 도망은 못 치겠지.

옥대교 근처에서 여러 해를 산 유사(劉四)였지만, 이곳이 이렇게 시끄러운 건 처음이었다.

“대체 몇 번이나 묻는 겁니까. 그 애는 동쪽으로 갔다니까요. 처음 보는 얼굴이라 눈여겨봤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기억도 못 했어요.”

유사는 똑같은 말을 또 반복했다.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똑같은 질문만 벌써 네 번째였다. 그 애가 대체 누구기에? 뉘 집에서 잃어버린 공자님이신가? 관아도 모자라 병마사까지 나서서 사람을 찾다니? 그래 보이진 않던데. 겁먹은 얼굴에 처음 상경한 듯 촌티가 좔좔 흐르는 행색이었어. 기껏해야 말이나 먹이는 사환으로 보였는데 말이지.

“이쪽 길을 따라갔어요? 아니면 저쪽?”

정교랑이 물었다. 유사는 아씨의 얼굴을 다시 쳐다봤다. 두모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살짝 보이는 피부는 백옥처럼 희고 고왔다. 목소리는 좀 귀에 거슬리는데, 얼굴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겠네.

“묻지 않느냐, 어서 대답해라.”

주육낭이 인상을 쓰며 호통을 쳤다. 겁먹은 유사가 늠름한 소년을 쳐다봤다. 이 소년은 누군지 알겠다. 어젯밤에 왔었으니까.

“이쪽이요. 아니, 저쪽이었나……·.”

유사는 머리를 부여잡고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다.

“이쪽 같습니다.”

유사가 한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또 아닌 것 같다.

“저쪽이요, 저쪽입니다. 저쪽 길을 따라갔어요.”

정교랑이 먼저 걸음을 옮기자 주육낭이 따라갔다.

“마차에 올라라.”

정교랑이 들은 체도 하지 않자 주육낭이 정교랑의 팔을 홱 잡아챘다.

“마차를 타라고.”

주육낭이 답답한 듯 소리치자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주육낭을 쳐다봤다. 주육낭은 말없이 쳐다보면서도 손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대치하는 사이, 마차 한 대가 달려왔다. 마차의 휘장이 들어 올려지고, 숙취에 시달리는 얼굴의 진 공자가 몸을 내밀었다.

“내 탓입니다, 내 탓이에요.”

진 공자는 인사도 없이 대뜸 공수의 예를 표하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젯밤에 술타령을 하는 바람에 이 꼴이 됐군요.”

“이게 자네랑 무슨 상관이라고!”

주육낭이 손을 풀고 진 공자를 향해 눈을 부라리는 사이, 정교랑은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진 공자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커다란 두봉을 걸치고 새벽빛 속으로 걸어가는 작은 형체를 바라봤다.

“낭자, 뜻밖의 상황은 늘 벌어지기 마련입니다.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진 공자는 다시 한번 예를 표한 후, 고개를 들어 걱정되는 눈길로 정교랑을 쳐다봤다. 자책이라는 말에 정교랑이 순간 걸음을 멈췄다. 뒤따르던 시녀는 다시 한번 코끝이 찡해졌다.

금가아를 잃어버렸다. 주육낭이 갑자기 마차를 납치하며 소동을 벌인 걸 감안하더라도, 두 사람 모두 금가아를 까맣게 잊고 있었으니 자책이 들 수밖에. 아씨의 자책은 더 클 것이다.

“아씨, 다 소인 때문이에요. 소인이 금가아를 깜빡했어요. 소인의 잘못이에요.”

시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하며 정교랑의 소매를 붙잡았다. 정교랑이 고개를 들어 진 공자를 쳐다봤다.

“이 세상에, 뜻밖 같은 건 없어요. 잘못한 건, 잘못한 거죠.”

앞으로 걸어가는 정교랑과 시녀를 보며 주육낭이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진 공자가 주육낭을 쳐다보자, 주육낭도 진 공자를 쳐다봤다.

“저 애가 그리 무서워? 이렇게 굽신거리긴.”

진 공자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슬픔을 함께 나누는 거야. 육낭, 자네는, 몰라.”

-오해-

거리에는 더 많은 사람이 흩어져 잃어버린 사환을 찾아다녔다.

시끄러운 인파 사이를 헤매는 동안 눈 깜짝할 사이에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렸다. 불빛으로 반짝이는 거리는 천상의 낙원 같았지만, 금가아에겐 그 경치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울고 싶은 마음으로 그저 걷고 또 걸을 뿐이었다.

그 집에서 이제나저제나 기다렸지만 아씨는 오지 않았고, 진씨 가문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어 진씨 저택이 어딘지 찾아 나섰다가 그만 길을 잃었다. 길 가던 사람에게 물어봐도, 그 진씨 가문이 어느 진씨인지 알 길이 없었다.

“진씨 가문? 경성에 진씨 성을 가진 사람이 어디 한둘이어야지.”

행인은 웃으며 그리 말했다. 금가아는 소매로 코를 닦았다. 눈 내린 겨울밤이라 그런지 다리가 쑤셔 왔다. 오는 길에 늑대에게 물린 상처로 인한 통증이었다. 진씨 저택에서는 아씨가 극진한 대우를 받은 덕에 금가아 같은 아랫것도 좋은 대우를 받았다. 특별히 방을 마련해 주고 삼시 세끼를 대령했음은 물론이고 옷을 빨아 주는 사람도 따로 있을 정도여서 주인 나리가 된 기분까지 들었다. 그 결과, 금가아는 경성에 온 지 20일이 다 되도록 집 밖으로 나가 본 일이 없었다. 그 댁 주인이 진씨 성을 가졌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몰랐다.

“똑바로 보고 다녀!”

술주정뱅이가 소리를 꽥 지르자 놀란 금가아는 허둥지둥 비켜섰다. 그러다가 실수로 옆에 있던 나무에 부딪히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그 속엔 여인의 간드러진 웃음도 섞여 있었다. 머리를 문지르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금가아는 자신이 알 수 없는 곳으로 왔다는 걸 깨달았다.

이곳은 전에 있던 저택보다 훨씬 떠들썩했다. 등불이 대낮처럼 환히 밝혀져 있었고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갔다. 와글와글 떠드는 소리와 노랫소리, 악기 소리가 들렸으며, 연지분 향기와 술 냄새, 음식 냄새가 차가운 겨울바람과 함께 맴돌았다.

금가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강주에서는 정월 대보름 명절 때도 이리 호화찬란하지 않았는데. 옆에 있던 여인이 간드러지게 웃었다. 방금 전 웃음소리를 냈던 그 여인이었다. 금가아가 어리둥절한 눈길로 고개를 돌리자, 화려하게 차려입은 여인 네다섯 명이 골목 앞에 서 있는 게 보였다. 겨울밤인데도 얇은 옷차림으로 새하얀 가슴을 드러낸 상태였다.

금가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놀라 얼른 손으로 가렸다. 그 어리바리한 모습에 여인들은 또다시 간드러지는 웃음을 터뜨렸고, 흐느적거리는 그 몸놀림에 가슴이 출렁거렸다. 옆에 있던 사내는 침까지 흘리며 그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봤다.

“봉추!”

옆에 있던 사내가 머리를 후려치는 바람에 사내는 정신을 차렸다.

“망측하게 무슨 짓이냐!”

봉추라 불린 사내는 머리를 긁적이며 침을 닦은 후, 어쩐지 민망해져 눈길을 거뒀다. 대신 봉추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상태로 나무 옆에 있는 금가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이도 어린 게, 어디 홍등가를 돌아다녀! 싹수가 노랗네!”

봉추는 눈을 부라리며 호통을 치다가 갑자기 놀란 듯 눈을 비볐다.

“이 녀석, 왜 이렇게 낯이 익지?”

봉추가 중얼거렸다.

“봉추, 괜한 말썽 피우지 말고 속히 가자. 묵을 곳부터 찾아야지.”

옆에 있던 사내의 재촉에 마지못해 걸음을 옮기던 그때,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아니, 금가아?”

내 이름을 부르다니! 아씨가 보낸 사람이겠지? 잽싸게 고개를 돌리는 금가아의 눈에 커다란 머리통이 쑥 들어왔다. 놀란 금가아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금가아라고?”

벌써 저만치 걸어가던 사내들도 말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가 금가아 못지않게 놀랐다.

“네가 어떻게 여기에? 너희 아씨는?”

그 사람들이었다. 금가아는 눈앞에 선 일곱 사내를 쳐다봤다. 딱 두 번 본 인연이 전부지만 늑대 떼에 맞서 혈전을 치른지라 대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한없이 막막하고 아득하던 순간에 아는 사람의 얼굴이 보이니 금가아는 순간 꾹꾹 눌러 왔던 설움과 두려움이 복받쳤다.

“아씨를 잃어버렸어요!”

금가아가 목놓아 울음을 터뜨렸다.

하늘이 밝아올 무렵, 좁은 방 안에서 팔걸이 책상에 기대앉아 있던 금가아는 하품을 했다. 옆에서는 코 고는 소리가 요란했다. 술 냄새와 발 냄새와 땀 냄새도 모자라 기름지고 달짝지근한 음식 냄새까지 섞인 방 안 공기에 구역질이 절로 나왔다. 금가아는 자신의 발 위에 턱 올려진 사내의 팔을 조심스레 들어 옮긴 다음 주변을 둘러봤다.

붉은 종이를 붙인 창살 사이로 들어온 빛에 방 안은 한층 따스해 보였다. 여기저기 널브러져 잠든 사내들의 모습은 더없이 괴이했지만.

금가아는 살금살금 문가로 걸어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작고 평범한 마당엔 아직 햇빛이 들지 않았고, 나무와 처마에 걸린 홍등은 여전히 붉게 빛나고 있었다. 여인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자 금가아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옆쪽 마당 문 앞에서 옷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남녀가 작별의 정을 나누고 있었다.

“대인, 내일 또 오셔야 해요. 대인이 안 계시면 밤에 잠을 못 이뤄요.”

“예쁜아, 내 그것이 그리워 그러지?”

장난 섞인 웃음과 쪽쪽 입을 맞추는 소리에 금가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여인의 벗은 몸이 또다시 눈에 들어오자 금가아는 화들짝 놀라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았다.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어찌 이런 해괴망측한 곳에……·.

쾅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깬 사내들은 습관처럼 허리춤을 더듬었다.

“금가아, 너였구나.”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사내가 문가에 놀란 모습으로 서 있는 금가아를 보고,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강림 형님, 우리 어서 아씨 찾으러 가요.”

둘의 말소리에 더 많은 사내들이 정신을 차렸다.

“날이 밝았네.”

잠에서 깬 사내들은 순간 자신이 어디 있는 건지 분간이 안 됐다. 옆에 있던 술 단지를 흔들어 보고 낙담해 내던지기도 했다.

“제길, 향칠 이 배은망덕한 놈. 힘들 땐 좋은 말로 알랑거려 놓고 이제 와선 은자 몇 푼 쥐여 주며 우릴 내쫓다니. 우리가 무슨 비렁뱅인 줄 알아?”

사내가 욕을 해댔다.

“이깟 푼돈으론 유곽에서 잠이나 자는 거지, 계집은 구경도 못 해. 어쨌든 우린 탈영병이고 죄를 지은 몸이니 군에 다시 들어갈 생각은 접어야지. 집에 가서 농사나 짓는 수밖에.”

다른 사내도 일어나 앉으며 굳은 얼굴로 말했다.

“우리가 향칠을 찾아온 이유가 뭐요? 사건을 재조사해 명예를 회복하려는 거잖소. 그놈은 우리가 도망치도록 내몰았소. 일부러 우릴 탈영병으로 만들어 누명을 씌운 거라고. 사건을 조사하기는커녕 우릴 내쫓아 버리다니.”

팔을 베개 삼아 누워 있던 사내가 웃음을 터뜨렸다.

“향칠도 나름대로 성의를 다한 거야.”

수염이 덥수룩하고 여전히 꾀죄죄한 모습이었지만 신중한 목소리엔 따뜻함이 묻어 있었다. 다른 사내들과는 확연히 다른 서생의 기품이 느껴졌다. 책을 몇 권 공부한 적 있다던 그 병자였다.

“셋째 형님, 그게 무슨 말씀이오? 애초에 우리가 아니었으면 향칠 그놈은 목숨도 부지하지 못했을 텐데, 경성 대부호의 데릴사위가 되어 관료 노릇을 할 수나 있었겠소?”

옆에 있던 사내가 지지 않고 눈을 부라렸다.

“하긴, 마씨 성을 가진 부자는 본디 셋째 형님을 마음에 들어 했는데, 향칠이 그 댁 마씨 처자에게 마음이 있는 걸 알고 셋째 형님이 핑계를 대 거절했으니.”

다른 사내도 동조했다. 셋째는 웃으며 손을 거두고 일어나 앉았다.

“우릴 관아에 발고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은혜는 갚은 거야. 자기 일도 아닌데 누가 나서려 들겠나? 세상인심이 그러니 따지고 들 것 없어.”

“나서서 돕는 사람이 없다고요?”

한 사내가 한쪽 옆에 멍하니 있는 금가아를 힐끔 쳐다봤다. 잠시 멈칫했던 사내는 상대가 누군지 그제야 떠오른 듯했다.

“목숨을 구해 준 그 아씨가 있잖습니까.”

아씨 얘기가 나오자 안에 있던 사내들이 일제히 금가아를 쳐다봤다.

“그래, 그렇지. 이렇게 쉽게 아씨를 찾다니.”

“이 녀석이 아씨를 잃어버렸다지 않았어?”

시끄럽게 떠드는 사내들을 제지하고, 셋째가 금가아 앞으로 가 앉았다.

“금가아, 네 아씨의 저택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 떠올려 봐라. 같이 가서 찾아보자.”

사내가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금가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막 입을 열려는데, 문가에 앉아 있던 사내가 돌연 쉿, 하는 소리를 냈다. 시끌벅적하던 방 안이 금세 조용해졌다.

“큰형님, 무슨 일입니까?”

누군가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문 앞에 앉아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던 사내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관군이 뭔가를 찾고 있다. 혹시 향칠 그놈이……·.”

안에 있던 사내들은 순간 굳은 표정으로 벌떡 일어섰다.

“키는 이만 하고 강주 말씨를 쓰는 녀석이다.”

마당 문 앞에 선 병졸이 손짓을 하면서 유곽 여주인에게 대충 그린 용모파기를 건넸다. 유곽 여주인이 얼른 받아 꼼꼼하게 들여다봤다.

“낯이 익긴 하네요.”

귀밑머리를 푼 채 옆에 서 있던 기녀가 바짝 다가섰다.

“아, 그 애네요. 어젯밤에 왔던 아이예요. 사내들 사이에서 울상을 짓고 있었어요.”

병졸들은 크게 기뻐했다. 밤새 찾아다녔는데, 드디어 실마리가 보이는구나.

“아주 험상궂게 생긴 사내들이었어요. 기녀를 끼고 놀고 싶었나 본데 돈이 없어서 술상만 내갔죠.”

상황을 떠올리던 기녀는 어젯밤에 손님을 못 받은 일이 떠올랐다. 사내들에게 공을 들였건만 헛수고한 꼴이 됐으니 병졸들에게 전하는 말에 과장이 섞일 수밖에 없었다.

“그 아이는 사내들 틈에 끼어 있다가 저기 담벼락에서 몸을 웅크리고 울더라고요. 납치한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험상궂은 사내, 울고 있는 아이, 유곽에 왔으면서도 여인을 들이지 않은 사실. 병졸들은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용모파기에선 별다른 특징이 보이지 않았지만, 어젯밤부터 지금껏 경성의 수많은 사람을 들볶은 아이였다. 하급 병졸인지라 구체적인 사정을 알 순 없었으나 듣기론 진 상공 댁도 관련됐다고 했다. 진씨 가문 공자들도 어젯밤에 이 아이를 찾아 거리를 휘젓고 다닌 터였다.

뉘 집에서 잃어버린 귀공자려나? 부잣집에서 곱게 자란 공자라면……·. 병졸들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은 후, 허리춤에 찬 칼을 꽉 쥐며 천천히 물러났다. 공을 세울 기회다!


“금전(金田) 골목?”

주육낭이 보고하러 온 하인에게 되물었다.

“네, 관아와 오성병마사 사람들이 전부 갔습니다.”

하인이 밝은 목소리로 말하자 시녀는 밝은 얼굴로 정교랑의 팔을 붙잡았다.

“아씨, 아씨, 이제 찾았어요.”

기뻐하던 시녀는 곧 놀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망할 녀석, 어쩌다 그런 곳엘 간 거야.”

정교랑이 시녀를 쳐다봤다.

“거긴 홍등가예요.”

시녀가 정교랑에게 바짝 다가서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아씨께 아뢰옵니다. 관아 사람들 말로는 금가아가 납치되어 끌려간 듯하다고 합니다.”

하인이 얼른 고했다.

“납치요?”

시녀가 놀라며 긴장했다.

“그럼, 가서 자세히 좀 알아봐요. 그 애 안 다치게.”

같은 시각, 금전 골목에 있는 유곽의 문 앞은 병졸들로 빽빽했다. 유곽 여주인이 떨리는 손으로 방향을 가리키자 병졸들은 발소리를 죽여 잠입했다. 문 앞에 선 병졸이 귀를 기울이자 안에서 코 고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듯했다.

기녀 말로는 어젯밤에 늦게까지 술 마시고 놀다가 새벽녘에야 잠들었으니 아직 자고 있을 거라고 했다. 병졸들은 똑바로 서서 시선을 주고받은 다음, 칼을 손에 들고 기합을 내지르며 일제히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공무 수행 중이다. 순순히 죄를 고하면 죽이진 않겠다.”

와글와글 시끄럽던 실내는 금세 조용해졌고, 병졸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뒤쪽 창문이 활짝 열려 있고 찢어진 기름종이만이 바람에 나부끼며 코를 고는 듯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도망쳤다!”

“역시 도적놈들이었어!”

“어서 쫓아라!”


골목 어귀에서 고개를 빼꼼 내민 사내가 등 뒤로 손을 흔들자, 사내 몇 명이 잽싸게 튀어나왔다.

“이 망할 경성은 웬 골목이 이리 많은지. 성문은 어느 쪽이오?”

“지금은 성문으로 못 나간다. 이미 병졸이 쫙 깔려 있을 거야.”

앞쪽에서 걷던 셋째가 대꾸했다.

“셋째 말이 맞다.”

뒤쪽에 걷던 첫째가 좌우를 살피며 말했다.

골목을 나가자 시끌벅적한 장터가 보였다. 새벽녘인데도 몹시 활기찬 모습이었다. 골목을 오가는 사람이 점점 많아졌다. 사람들은 일곱 사내와 아이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봤다. 사내들은 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거나 머리를 숙였다. 앞쪽에서 걸어가던 셋째가 돌연 걸음을 멈추는 바람에 사내들끼리 부딪치고 말았다.

“저기 있다!”

큰길가에서 뛰어오던 병졸 무리가 이쪽을 보며 소리쳤다.

“어서 가자”

셋째의 말에 사내들은 얼른 돌아섰다. 금가아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길을 잃었을 뿐인데 관부에 쫓기는 몸이 되다니.

“우리랑 같이 가면 금가아에게도 괜히 불똥이 튈 거다. 적당한 곳에서 떨구고 가자.”

첫째가 말했다.

“강림 형님.”

금가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

“널 잃어버렸어도 너희 아씨께선 반드시 널 찾아내실 것이다. 네가 경성에 있기만 하면 분명 찾아내실 거야. 우리랑 같이 움직이다 너까지 감방에 들어가면 다시는 아씨를 못 볼 수도 있어.”

셋째가 걸음을 재촉하며 타이르자 금가아도 더는 말을 덧붙이지 못하고 조용히 따라갔다.

“저기 장작더미가 있으니 넌 저기 숨어라.”

첫째가 옆에 있던 금가아를 떠밀며 말했다. 금가아가 허둥지둥 걸음을 옮기려는데, 저쪽에서도 병졸들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여기 있다, 찾았어!”

병졸들은 시끄럽게 소리치며 무기를 들고 달려들었다. 이제 더는 금가아와 선을 그을 수 없게 되자 셋째가 금가아를 홱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이 집 담 넘어.”

일곱 사내가 각자 담을 오르기 시작했다. 셋째가 금가아를 들어 올리자 먼저 담을 넘은 사내가 붙잡아 주었다. 양쪽에서 달려든 병졸들이 집 바깥을 겹겹으로 에워쌌다.

“거긴 왜 가냐고!”

주육낭이 정교랑의 손을 홱 낚아채고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주육낭을 힐끔 쳐다봤다.

“보려고요.”

“보긴 뭘 봐. 그냥 여기서 기다려, 소란 피우지 말고.”

주육낭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정교랑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주육낭을 빤히 쳐다봤다. 싸리나무를 지고 죄를 청하러 왔던 그 소년의 나체를 볼 때처럼. 주육낭은 갑자기 손이 화끈거려 손을 뿌리쳤다.

“언제나, 이렇게 아둔해요?”

정교랑이 물었다.

“아둔한 건 너지!”

주육낭이 어금니를 꽉 깨물고 노려보며 소리쳤다.

“그래요. 난 원래 바보죠.”

시선을 거둔 정교랑은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다만 난, 아둔하지 않아요.”

담벼락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는 금가아는 겁나고 막막한 표정이었다. 앞쪽에서는 사내들이 방어 태세를 취하고 있었고, 옆쪽에서는 이 집 식구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울고 있었다. 밖에서 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겁내지 마시오. 우리가 숨을 곳이 없어 부득이하게 댁들을 인질로 삼은 거요. 잠시 시간을 끌려는 것일 뿐 해칠 생각은 추호도 없소.”

셋째가 이 집 식구들을 보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그런 위로가 통할 리는 없었다.

“제발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식구들은 떨리는 목소리로 울며 애원했다.

“셋째야, 시답잖은 말 집어치워. 넌 금가아를 데리고 빠져나가라.”

첫째의 말에 셋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봉추한테 데려가라고 하십시오. 난 몸이 안 좋아 못 버텨요.”

“난 못 갑니다!”

한 사내가 바로 소리치며 단도를 움켜쥐었다. 바깥이 잠시 조용해지더니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안에 있는 놈들은 들어라. 사람을 내놓으면 죄를 추궁하지 않겠다.”

물론 그 말에 대꾸하는 사람은 없었다. 한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이상하네, 왜 자꾸 사람을 내놓으란 거야. 멍청한 놈들 같으니라고. 무슨 사람을 내놔? 우리가 우릴 내놓는 게 말이 돼?”

그 말에 셋째가 미간을 찌푸렸다.

대문 밖엔 이미 사람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물 샐 틈 없이 들어찬 사람들은 저마다 추측을 내놓았다.

“엄청난 대도(大盜)래요.”

“사람을 백 명도 넘게 죽인 산적이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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