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75)

하루를 달려 또다시 밤이 깊었다. 산속으로 난 작은 길은 말 두 필이 간신히 지나갈 너비라 높이 든 횃불이 길게 꼬리를 물었다.

“조 대인, 안 되겠습니다. 쉬었다 가죠. 너무 어두워서 걸음이 점점 느려집니다.”

앞쪽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조 집사가 즉시 사람을 시켜 정교랑의 의사를 묻게 했다.

“진 사노야께 묻지 않으시고요?”

시종이 물었다.

“우리 아씨는 그분이야. 사노야는 진료를 청하는 분이고.”

조 집사가 말을 이었다.

“누구한테 물어야겠나?”

시종이 입을 삐죽거렸다. 우리 아씨 좋아하네. 가까이 다가가 얼굴도 못 내미는 주제에. 정교랑이 곧 휴식에 동의했다. 군인 출신인 주씨 가문 시종들에게 야외 숙영은 더없이 간단한 일이었다. 잽싸게 천막을 치고 나무를 쌓아 모닥불을 피웠다.

밤바람이 차긴 했으나 정교랑은 모닥불 옆에 앉아 잠시나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모닥불 근처에는 정교랑과 시녀 둘뿐이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자연스레 자리를 피했다. 진 사노야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낭자, 술을 좀 드시겠습니까?”

진 사노야가 웃으며 물었다.

“고맙습니다.”

정교랑이 말을 이었다.

“안 마셔요.”

예상했던 일이다. 여인 중 술을 잘 마시는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진 사노야는 웃으며 술을 거뒀다.

“내 부친의 병에 대해선 얼마나 확신을 가지고 계십니까?”

진 사노야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물었다.

“운이 좋네요. 보름 전이었다면 못 구했을 거예요.”

정교랑은 막대기를 들고 불을 쑤시며 말했다.

그 말인즉 지금은 구할 수 있단 뜻이로군. 진 사노야는 정교랑의 말에 몹시 기뻐했다. 어쨌거나 남녀가 유별한지라 진 사노야는 인사치레로 몇 마디를 건넨 후 자리를 비켰다.

“아씨, 방금 그 말씀이 좀 이상해요. 이번엔 소인도 모르겠어요.”

시녀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말했다.

정교랑은 언제나 말을 간단하게 했고, 그나마도 많이 하지 않았다. 다행히 이 시녀는 그 짧은 말 속에 담긴 의미를 잘 알아들었기에 더 묻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엔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다.

“보름만 지체했어도 못 구했을 거라고 해야 맞지 않나요?”

시녀가 한쪽 옆에 꿇어앉아 정교랑을 보며 물었다. 정교랑이 손에 든 부지깽이로 꽃을 그리자 불꽃이 일었다.

“보름 전엔, 몇 걸음만 걸어도 지쳤어. 마차를 타고 먼 길을 왔다간, 경성에 도착하기도 전에, 내가 먼저, 죽었을 거야. 그런데 무슨 사람을 구해.”

의미를 깨달은 시녀가 풉 웃음을 터뜨렸다.

“아씨, 아씨의 생각은 참 기이해요.”

시녀는 생각할수록 웃기는지 아예 깔깔대며 웃었다. 언제나 질문에 엉뚱한 대답을 하는 듯한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일리가 있는 말이니 기이하면서도 흥미로울 수밖에.

시녀는 짚방석 위에 앉아 불빛에 비친 아씨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커다란 두모가 얼굴을 가리고 있어 턱만 살짝 보였다. 정교랑과 시녀가 이쪽에 조용히 앉아 있는 사이, 저쪽에서 빙 둘러앉아 술을 마시던 시종들이 벌떡 일어섰다.

“누가 온다.”

이 오밤중에 길을 가는 자가 있다니? 산적이나 토비 아닐까? 분위기가 순식간에 긴장에 휩싸이면서 시종들은 창과 활을 들고 공격 태세를 취했다.

산길을 돌아 먼저 도착한 건 말 두 필이었다. 저쪽 역시 갑자기 나타난 숙영지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거기 누구시오?”

주씨 가문과 진씨 가문 사람들이 입을 모아 소리쳤다.

“지나가는 길이오.”

말에 탄 두 사람 역시 횃불 불빛에 기대 두 손을 위로 높이 들어 위협이 될 만한 무기를 소지하고 있지 않음을 알렸다. 산적이나 토비로 몰려 다짜고짜 쏜 화살에 맞아 죽으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하지만 허리춤에 있는 칼과 화살도 횃불에 또렷이 보였다. 평범한 행인은 아닌 듯싶었다.

곧이어 뒤에서 말과 마차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앞쪽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걸음을 멈췄다. 쌍방이 대치하는 가운데 밤바람이 불어 횃불이 화르르 타오르자 긴장감이 한층 고조됐다. 쌍방은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듯 경계했다.

“아씨, 먼저 마차에 오르십시오.”

조 집사가 사람을 시켜 정교랑을 불렀다. 시녀도 살짝 창백해진 얼굴로 정교랑을 부축해 걸음을 옮기려 했다. 난데없이 아우웅 하는 소리가 들렸다. 산골짜기에서 바람이 휘몰아치는 소리인 듯싶었다. 양쪽은 팽팽하게 대치하느라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마차에 오르려던 정교랑은 돌연 걸음을 멈췄다.

“늑대야!”

정교랑이 말했다. 시녀는 멈칫하여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뭐라고요?”

시녀가 물었다.

“늑대가 온다!”

정교랑은 사람들이 있는 저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시녀는 비명을 내질렀다. 그 비명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더욱 오싹하게 들렸다.

“늑대가 와요!”

시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비명을 지르며 소리쳤다. 늑대? 쌍방은 멈칫했다.

“저 여자가 또 무슨……·.”

이쪽에 있는 조 집사가 투덜거렸다. 아직 입동 전이라 산에는 먹이를 구하기 쉬웠다. 들짐승들도 한창 살이 올랐을 때라 늑대가 먹을 건 차고 넘칠 텐데, 뭣 하러 사람을 공격한단 말인가. 하지만 조 집사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맞은편에 있던 사람들이 소란을 피웠다.

“늑대다!”

“늑대 떼야!”

저쪽에 있던 사람들이 이쪽으로 달려왔다. 정말 늑대가 있다고? 공격 개시를 위해 핑계 대는 거 아냐? 조 집사 쪽 사람들은 공격에 맞설 태세를 취하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아우웅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더니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틈을 파고들었다. 사람들 역시 새파랗게 빛나는 눈 수십 개를 확인했다. 정말 늑대야! 그것도 늑대 떼!

사람들이 그 사실을 눈치챘을 무렵 늑대 떼는 이미 공격을 시작하고 있었다. 쉭쉭 하는 화살 소리가 들리더니 맨 앞에 있던 늑대 몇 마리가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하지만 나머지 늑대의 공격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공격은 오히려 늑대 떼의 분노를 자극한 꼴이 됐고, 늑대들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세상 어느 산적이 늑대 떼 공격이라는 고육계로 사람을 유인한단 말인가. 이건 진짜 늑대 떼의 공격이었다.

“어서 막아라!”

조 집사와 진 사노야는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횃불과 화살이 늑대 떼를 향해 쉭쉭 날아갔다.

정교랑과 시녀는 모닥불 옆에 포위되어 있었다. 금가아는 어느 시종에게서 받은 건지 칼을 움켜쥐고 덜덜 떨면서도 제법 그럴듯하게 둘을 지켰다. 시녀는 정교랑에게 바짝 기대며 몸을 떨었다.

“아씨, 겁, 겁내지 마세요.”

시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정교랑이 시녀를 힐끔 쳐다봤다.

“겁 안 나.”

저쪽에 있던 사람들도 가운데 있는 마차의 말 머리를 돌려 시종들을 방패 삼아 이쪽으로 다가왔다. 마차가 모닥불이 있는 쪽으로 길을 잡은 것이다.

“거기 서요. 사람만 오든가, 아니면 오지 마요.”

정교랑이 말했다.

정교랑의 가냘픈 목소리는 혼잡한 소리 속에 묻혔다. 시녀가 정교랑의 말을 듣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따라 소리쳤다. 바짝 긴장하며 수비하던 시종들은 그제야 시녀의 말을 알아듣고 얼른 마차를 향해 칼과 활을 겨누었다. 저쪽 마차 주변에 있던 시종들도 지지 않고 곧바로 무기를 들어 이쪽을 조준했다.

“소리 질러.”

정교랑이 다시 말했다. 시녀는 뭐라 묻지도 않고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입을 열어 소리쳤다.

“거기 서요. 사람만 오든가, 아니면 오지 마요.”

그 뜻이었어? 양쪽의 대치 분위기가 살짝 누그러졌다. 여전히 경계 중이었지만.

“마차에서 내려요. 늑대 떼 때문에 말이 놀랐어요. 위험해요.”

시녀는 즉시 떨리는 목소리로 정교랑의 말을 따라 소리쳤다. 그래? 타오른 횃불 속에 저쪽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망설였다. 별안간 마차의 휘장이 들리더니 한 사람이 폴짝 소리가 나도록 뛰어내렸다.

“공자님.”

시종들이 긴장하여 불렀다. 시녀가 공자를 쳐다봤다. 자신의 아씨처럼 커다란 피풍의로 몸을 싸매고 두모로 얼굴을 가린 사람이 불빛 아래로 어렴풋이 보였다. 미처 모닥불을 피우지 못해 저쪽 사람들은 횃불을 높이 든 채 그 사람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늑대 떼와 대치하는 저쪽 사람들에게 쏠렸다.

횃불과 화살이 있다고는 하나 늑대 떼의 수가 워낙 많았고 필사적으로 덤벼드는 터라 화살은 소용없었다. 다들 칼과 횃불을 휘두르다가 달려드는 늑대와 함께 죽어갔다. 사람들도 눈이 시뻘게졌고 이미 누가 누군지 구분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쌍방을 합쳐 서른 명쯤 되는 사람들이 40~50마리가 넘는 늑대 떼와 뒤엉켜 싸우면서 팽팽하게 맞섰다. 말들은 히잉 울음소리를 내며 늑대의 공격에 쓰러져 갔고 늑대에게 물린 사람들도 처참한 비명을 내질렀다.

시녀는 점점 더 심하게 몸을 떨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터져 나오는 울음을 삼켰다. 죽음이 이리도 가깝다니.

“가서 도와라.”

저쪽에 있던 사람이 말했다. 시종들은 주저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공자님, 저희가 가면 공자님이 너무 위험합니다.”

“저 사람들이 못 버티면 내가 더 위험해져.”

말을 마친 공자는 이쪽을 쳐다봤다.

“난 저쪽에 가 있겠다. 저쪽엔 불도 있고 사람도 있잖아.”

공자가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자 시종들이 얼른 막아섰다.

“공자님, 저 사람들은 아직 누군지도……·.”

“짐승 손에 죽는 것보단 사람 손에 죽는 게 낫지.”

공자는 웃음까지 내보이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어서 가라.”

시종들은 하는 수 없이 두 명만 공자를 지키게 남겨 두고 나머지는 늑대를 죽이러 달려갔다. 공자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이자 정교랑 주변의 시종들은 긴장했다.

“겁낼 것 없어.”

시녀가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 소리쳤다.

“물러서요. 길을 가던 중 함께 위기에 처했잖아요.”

시종들은 하는 수 없이 비켜섰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와 모닥불 옆에 섰다. 불빛에 비친 턱은 굵었으며 피부는 뽀얗고 깨끗했다.

“고맙소, 낭자.”

그는 시녀를 향해 공수하며 인사했다. 목소리가 청량한 걸 보니 어린 소년인 듯싶었다. 시녀는 여전히 덜덜 떨면서 공자를 힐끔 쳐다보기만 하고 대꾸하지 않았다.

공자가 이쪽에 서자 곧 포효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검은 그림자가 훅 덮쳐 왔다. 시녀가 비명을 내질렀다. 바깥쪽에 서 있던 시종들이 잽싸게 방향을 바꾸어 칼을 내지르자 늑대가 비명을 내지르며 땅을 굴렀다. 하지만 곧이어 또 한 마리가 다가왔다. 이 늑대들이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시종들이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쳐다봤다. 뒤쪽으로 난 길에서 늑대 네다섯 마리가 달려들었다. 피비린내를 맡은 늑대들은 더욱 미쳐 날뛰며 하얀 이를 드러내고 군침을 흘렸다. 늑대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바짝 다가왔다. 이래서 늑대 한 마리를 만나는 건 겁나지 않으나 늑대 떼를 만나는 건 무서운 일이라고 하는구나.

저쪽에 세워져 있던 마차에 있던 말 역시 놀라 히이잉 울음소리를 내며 마차를 끌고 마구 달아났다. 하지만 시종들은 그런 걸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고, 금가아마저도 기합을 지르며 닥치는 대로 늑대를 베고 있었다. 시녀는 비명을 내지르며 정교랑을 끌어안았지만 정교랑이 잡히지 않았다.

정교랑은 몸을 굽혀 모닥불 속에서 불타는 장작 하나를 꺼내 늑대를 향해 겨누고 있었다. 시녀도 얼른 따라 하려고 했다. 혼자만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옆에 있던 사내도 몸이 근질근질한 듯 장작 두 개를 꺼내 늑대를 겨눴다.

“저놈들의, 코를, 태워.”

정교랑이 말했다. 정교랑의 목소리는 소란에 섞여 들리지 않았다.

“저놈들의 코를 태워요!”

시녀가 소리를 질렀다. 사내는 시녀의 고함과 동시에 횃불을 들고 달려나가 이를 드러내고 덤비는 늑대를 향해 내질렀다. 늑대가 불을 겁내며 뒤로 물러서자, 그는 다른 손에 든 횃불로 잽싸게 늑대의 머리를 내려쳤다. 늑대는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옆쪽에 있던 시종이 달려들어 칼로 찔렀다.

공자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움직임 때문에 두모가 벗겨지면서 앳된 얼굴이 드러났다. 번쩍이는 불빛과 처참한 비명, 진동하는 피비린내 속에서 공자가 고개를 돌려 시녀를 향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재미있군.”

공자가 말했다. 재미있다고? 이게 재미있어? 저자도 바보인가? 멈칫한 시녀는 몸을 돌리는 공자의 뒤로 매섭게 달려드는 늑대를 보면서 순간 비명을 지르는 것조차 잊었다.

화살 몇 발이 쉭쉭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갈랐다. 그중 한 화살이 도약하던 늑대를 명중하자 늑대는 달려들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모닥불 옆 시녀의 발치로 떨어졌다. 시녀는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정교랑을 와락 끌어안았다. 이제는 제법 민첩해진 정교랑이 재빨리 손에 들고 있던 횃불을 던져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시녀는 늑대에게 물리는 대신 화상을 입을 뻔했다.

시녀가 고개를 들어 쳐다보자 쉭쉭 화살 소리가 잇달아 들리며 화살이 늑대에 명중했다. 한 화살로 늑대 두 마리를 맞히는 경우도 있었다. 이쪽의 위협은 곧 잠잠해졌다. 곧이어 어둠을 뚫고 가까운 거리에 말 몇 마리가 나타났다. 말에 탄 사람들이 왁자지껄 소란스레 떠들었다.

“이렇게 늑대를 쏘며 논 건 오랜만이군!”

“큰형님, 서북에서 늑대를 잡던 때 같습니다!”

“물러서, 이 몸 걸 남겨 두라고. 이 몸이 시원하게 죽일 거니까!”

그 소리와 함께 또 한 마리의 늑대가 허리에 화살을 관통당했다. 몇 마리 안 남은 늑대 떼는 포효하며 뿔뿔이 달아났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환호하며 위기를 넘긴 일을 자축했다.

다시 세 군데에 모닥불을 피웠다. 아찔했던 전투를 겪은 후라 서먹했던 감정은 말끔히 걷힌 후였고 오히려 친밀감까지 들었다.

시종들은 달아났던 말들을 함께 붙잡아 오고 서로의 상처를 싸매 주며 치열했던 전투에 대해 웃고 떠들었다. 이쪽에서는 진 사노야와 조 집사가 그 젊은이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서로의 내력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그저 감사 인사만 표했을 뿐이었다.

“밤길을 재촉하는 건 위험하오.”

진 사노야가 여전히 겁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엔 몰랐는데 이제 알겠습니다. 아주 재밌네요.”

소년이 대답했다. 이게, 아주 재미있다고? 진 사노야와 조 집사는 멈칫했다. 열대여섯의 나이로 보이는 소년은 수수한 옷차림이었으나 가려지지 않는 귀티가 흘렀다. 밤바람이 두려운지 두모까지 쓰고 있어 불빛 아래에서도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소년은 모닥불 근처에 앉아 손에 든 나뭇가지로 불을 이리저리 쑤시고 있었다. 치기 어린 소년이 위험을 어찌 알리오. 진 사노야는 고개를 가로젓고 조 집사를 쳐다보며 말했다.

“저 사내들이 달려오지 않았다면, 아주 위험할 뻔했네.”

늑대에게 팔을 물린 조 집사는 상처를 천으로 싸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얘기가 나오자 모두가 다른 쪽 모닥불을 쳐다봤다. 거기에는 가뭄의 단비처럼 어둠을 뚫고 느닷없이 나타난 사내들이 앉아 있었다.

“저 사람들은 뭐 하러 온 거죠?”

소년 역시 그쪽을 쳐다보며 물었다.

“듣자니 병을 치료하러 왔다던데.”

진 사노야가 대답했다.

“병을 치료해요?”

소년은 놀란 목소리로 물으며 진 사노야를 힐끔 보고 저쪽 사람을 봤다. 그 시선은 커다란 피풍의로 몸을 감싼 채 두모를 쓰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는 여인에게서 마지막으로 멈췄다.

정교랑은 시녀가 금가아의 상처를 싸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금가아는 늑대에게 다리를 물렸다. 아직 어린 나이인지라 얼굴에 눈물과 콧물이 범벅되어 있었다. 시녀는 상처를 싸매 주며 금가아를 칭찬했다. 옆에 있던 두 사내도 금가아의 어깨를 두드리며 소년 영웅이니 장차 큰일을 하겠느니 하며 치켜세웠다.

금가아가 지금껏 살면서 겪은 가장 위험한 일은 좁은 골목에서 사나운 개 몇 마리를 만났던 게 전부였다. 그런데 이젠 야밤에 늑대 떼와 혈전을 치르지 않았는가. 위험이 사라지자 짜릿한 기분이 들었고 칭찬까지 받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이제 돌아가면 훌륭한 사내대장부가 될 것 같았다.

“상처가 많이 나았네요.”

고개를 돌린 정교랑은 마차에서 나무틀에 실려 내려진 사내를 보며 말했다. 며칠 사이에 사경을 헤매던 병자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여느 사내들과 마찬가지로 신체 건장해 보였다. 부상을 입기 전에는 꽤 튼튼한 사내였을 것이다.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랐고 얼굴에도 살짝 누런빛이 돌았지만 두 눈만큼은 형형하게 빛났다.

“아씨께선 참으로 명의십니다.”

사내가 쉰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아직 기력이 달리는 목소리였다.

“아씨, 저희 셋째 아우에게 무슨 약을 더 먹여야 할까요?”

옆에 있던 사내가 얼른 물었다.

“필요 없어요.”

정교랑은 그 말을 끝으로 사내들에게서 눈길을 거두고 모닥불을 쳐다봤다.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며 몸보신하면 충분해요.”

사내는 웃음을 터뜨렸다.

“네, 네. 그런 치료라면 저도 좋죠.”

웃으며 말하던 사내는 아쉽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며칠째 술과 고기 구경을 못 했더니 아주 힘들어 죽겠네요. 술이든 고기든 통쾌하게 먹었으면 좋겠습니다.”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사내를 힐끔 쳐다봤다.

“여기 술은, 물보다 조금 진한 정도지, 별거 아니에요. 그럼 통쾌하게 마셔요.”

정교랑이 손에 든 부지깽이로 한쪽을 가리켰다.

“저기 고기 있잖아요.”

저기? 사내들이 고개를 돌리자 늑대에게 물려 죽은 말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쪽에서 왁자지껄 떠들며 우르르 달려드는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거 뭐 하려고 그러시오?”

“고기 먹습니다, 고기요.”

사내들은 이쪽에서 소리쳐 대답하며 얼른 칼을 꺼내 죽은 말의 고기를 잘라냈다. 아쉽게도 죽은 말은 많지 않았다. 그나마 다른 사람들은 먹으려 들지 않는다는 게 불행 중 다행.

“말고기도 먹나?”

“맛없을 거 같은데?”

“부유하게 사시는 분들이 신선한 말고기 맛을 어찌 아시겠소. 서북 지역이었으면 우리 차지까지 돌아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말고기를 굽기 시작한 사내들이 껄껄 웃으며 대꾸했다.

진 사노야는 고개를 내저으며 시선을 거뒀다.

“아무래도 서북의 탈영병인 듯싶습니다.”

조 집사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탈영병이라. 진 사노야는 더욱 하찮게 여기는 눈치였다.

“왕보당 수하에 저런 겁쟁이들밖에 없으니, 싸움에서 패하는 게 이상할 일도 아니지.”

옆에 있던 소년은 진 사노야를 힐끔 쳐다보더니 말없이 저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말고기를 먹는다고?”

소년은 호기심이 이는 듯했다.

“맛있나?”

“맛없어요, 공자님.”

옆에 있던 시종이 대답했다.

“냄새가 고약하죠.”

소년은 아, 하고 대꾸한 다음 더 묻지 않고 계속해서 이쪽을 쳐다봤다.

“그런데 저기서 먹다니. 낭자의 체통은 어찌하라고.”

진 사노야가 말했다. 조 집사는 못 들은 듯 시선을 내리깔고 좌선에 전념했다. 저 사람들을 내쫓을 작정이라면 자신들이 나설 필요도 없다. 저 여인은 입에 못 담을 말이 없고, 별 해괴한 일도 못 할 게 없잖아. 관여하지 말고, 뭐든 그 여인 뜻대로 하게 두게. 조 집사는 이미 진 공자의 말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었다. 조 집사가 미처 다가가기도 전에 저쪽에서 누군가가 달려왔다.

“저기, 대인. 아씨께서 여기 술이 있을 거라고 하시던데, 좀 빌릴 수 있겠습니까?”

두 사내가 입을 벌리고 웃으며 물었다. 아씨의 말이라는데 무슨 말을 더하리오.

“빌리다니, 당치 않네. 당연히 내줘야지. 큰 도움을 입었는데 빌린다니 당치도 않아.”

진 사노야는 웃으며 시종을 향해 손짓하여 밤에 한기를 쫓을 용도로 마차에 실어 놓은 술 단지 몇 개를 가져오게 했다.

“이 대협들에게 술을 내주거라. 다들 충분히 마시도록 줘.”

숙영지의 분위기가 한껏 달아오르자 말고기를 나눠 먹으러 오는 이도 있었는데, 그중에는 그 소년도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한입 베어 먹고 땅에 뱉어 버렸지만 말이다.

“진짜 맛없네.”

그러더니 소년은 무언가 흥미로운 일이 떠올랐는지 몸까지 떨며 옆에 있는 조 집사와 진 사노야를 쳐다봤다.

“아, 저기요. 한 말씀만 여쭙죠. 고기를 먹으면 재미가 오르나 보죠?”

뭔 개소리야. 이자가 제정신인가? 진 사노야와 조 집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저 웃고 떠드는 소리가 안 들려요?”

소년은 불만이라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진 사노야와 조 집사는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난 말이 몇 마리나 죽었나 봐야겠군.”

자리에서 일어난 진 사노야가 가 버렸다. 조 집사 역시 혼자 남기 싫어 핑계를 대고 자리를 피했다. 모닥불 옆에는 소년과 시종만이 남았다. 타오르는 불빛 아래, 위로 올라갔던 소년의 입꼬리가 차츰 아래로 내려왔다. 하나도 재미가 없단 말이지. 어둠을 뚫고 반짝거리는 불빛 아래 소년의 옆모습은 왁자지껄한 주변과 단절된 듯 쓸쓸해 보였다. 그때 왁자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히 해요, 조용히. 우리 셋째 아우가 노래를 부른다고!”

노래? 웃고 떠들며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돌렸다. 나무틀에 기대앉아 있던 사내가 입을 벌려 웃자 구레나룻이 더욱 무질서해 보였다.

“오늘 아주 통쾌합니다! 통쾌해요!”

사내는 손에 술 단지를 껴안고 말했다. 누렇게 떴던 얼굴은 취기가 돌며 상기되었고 두 눈도 게슴츠레해졌다.

“우린 무식쟁이라 말을 못합니다. 말을 못해요. 우린, 노래로 하죠!”

다들 떠들썩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말은 못하는데 노래는 잘한다는 사내는 처음이었다.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랐다.

“우리 셋째 형님은 글공부도 했다고요!”

사내 몇 명이 우쭐해하며 소리쳤다.

“시도 읊을 줄 알아요!”

글공부를 해? 시를 읊어? 사람들은 더욱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글공부를 한 자 중에 이런 이는 정말 드문데. 사내는 아랑곳하지 않고 껄껄 웃었다.

“형제의 정이여.”

사내가 갑자기 노래를 시작했다. 노래라기보다는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아직 병약한 상태였기에 쉰 목소리가 나왔는데 그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정말 부르는 거야? 사람들이 점점 조용해졌다.

“생사의 기로에서도.”

곡조를 이루지 못해 울부짖는 소리가 나왔지만 밤의 기운이 더해지면서 흥취가 전해졌다.

“호방한 기개와 정의를 잃지 않으리.”

이쪽에 있던 소년이 고개를 돌렸다.

“정말 글공부를 했나 보네.”

소년이 말했다. 시종도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사내는 가사가 기억나지 않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더니 문득 모닥불 근처에 앉은 아름다운 여인을 쳐다봤다.

“아름다운 여인이여, 날 위해 웃어 주오.”

시녀는 눈을 부릅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소년은 웃음을 터뜨렸다.

“글공부도 하고 풍류도 아는 자군. 저 낭자를 울리려 들다니, 재미있네. 재미있어.”

다른 때였다면 어린 낭자를 놀리는 노래에 사내들이 웃고 떠들며 놀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입을 벌리고 소리 내 웃을 준비를 하고 있던 사내들마저 입만 벌리고 있을 뿐 소리를 내진 않았다.

진 사노야와 조 집사가 분명히 말하진 않았지만 이 아씨를 모시러 천 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온 걸 보면 얼마나 중요한 분인지 알고도 남았다. 윗전들도 공손히 대하는 아씨인데 시종들 따위가 웃고 떠드는 건 말이 안 됐다.

“은인께 불경하구나.”

사내 중 큰형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 아씨는 딱 봐도 부귀와 권세를 갖춘 집안의 규수였다. 말로 희롱하는 건 관두고 눈길만 줘도 매질을 당할 터였다. 도발할 의도가 없었다고는 하나 말하는 사람은 별 뜻이 없어도 듣는 사람에겐 거슬릴 수 있었다. 사내는 가사가 기억이 안 나서인지 불안해진 것인지 그 구절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술 단지 좀 줘 봐.”

정교랑이 말했다. 워낙 정적 속에 있었던지라 모두가 그 말을 똑똑히 들었다.

“술 단지로 저놈의 대가리를 내리치려나 보네.”

조 집사는 뒤에 선 시종을 보며 고소하다는 듯 말했다.

“저 아씨라면 그러고도 남지.”

시녀가 네 하고 대답한 후 술 단지를 건네자 정교랑이 받았다.

“이 녀석은……·.”

큰형이 일어나 사죄하려고 입을 여는데 정교랑이 말을 끊었다.

“칼 좀 줘요.”

마침 일어섰던 큰형은 그 말에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자신의 칼을 건넸다.

“아씨, 제 아우는……·.”

큰형은 다시 한번 목소리를 낮춰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정교랑이 칼을 들더니 손을 뒤집어 칼등으로 술 단지를 치기 시작했다. 큰형이 하던 말을 멈췄다.

정교랑이 칼등으로 술 단지의 이곳저곳을 치자 텅 빈 술 단지에서 높고 낮은 소리와 맑고 둔탁한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캄캄한 밤이라 소리는 더욱 기이하게 들렸다. 소년은 엇, 하는 소리를 내며 두모를 조금 벗고 이쪽을 쳐다봤다.

“격부(擊缶: 물장구. 물이 든 동이를 두드려 소리를 내는 일)?”

“천, 고, 의, 풍, 류, 를, 즐, 기, 리.”

정교랑이 천천히 노래를 시작했다. 노래라기보다는 말에 가까웠다. 목소리가 딱딱하고 평온하다 보니 소리에 길고 짧음만 있을 뿐 다른 기복은 없었다. 주변이 워낙 조용하다 보니 목소리가 작은 정교랑의 노랫소리가 퍼져나갔다.

“지기를, 위, 해, 모든, 걸, 내던지고.”

칼등으로 술 단지를 치자 정교랑의 목소리처럼 느린 장단이 흘러나왔다. 자신의 목소리를 따라 정교랑의 마음에도 파란이 일었다. 지기, 그녀에게도 지기가 있었던 것 같았다. 지기를 위해 모든 걸 내던진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잊었다. 웃게 하고 울게 하던 그 모든 일을 잊었다.

“목, 숨, 까, 지, 바, 치, 리, 라.”

정교랑은 고개를 숙인 채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두모로 얼굴을 가리고 느릿느릿 노래를 불렀다. 기억이 있고 경험이 있으니 기쁨과 분노가 있는 게 당연했다. 이토록 분노가 치미는 건 어째서일까?

끓어오른 파란이 세차게 가슴을 쳤지만 얼굴엔 표정 변화가 없고 목소리 역시 무미건조했다. 그녀는 우리에 갇힌 야수와 같았다. 아니, 야수만도 못했다. 포효하고 싶어도 할 수 없으니까.

낮고 무거운 술 단지 소리와 한 자씩 읊는 가사가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특히 ‘목숨까지 바치리라’는 구절을 쉰 목소리로 나지막이 읊조리니 더욱 감동이 끓어올랐다. 주먹을 꽉 쥐는 사람도 있었다.

“생사의 기로에서도 호방한 기개와 정의를 잃지 않으리. 아름다운 여인이여, 날 위해 웃어 주오.”

사내는 갑자기 기억이 떠오른 듯 노래를 따라 부르며 방금 불렀던 구절을 반복했다.

“천고의 풍류를 즐기리. 지기를 위해 모든 걸 내던지고 목숨까지 바치리라.”

사내가 정교랑의 노래를 받아 불렀다. 사내의 목소리는 노래를 부르자 더욱 거칠어졌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내심 놀라며 가락을 따라 불렀다. 저 사내가 아무렇게나 부르는 노래를 이 아씨가 맞춰 부르다니! 정교랑은 계속해서 손으로 술 단지를 두드리며 사내와 곡조를 맞췄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이 아씨가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함께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큰 소리로 호응하며 잘한다고 소리치는 이는 없었다. 아씨의 노랫소리를 조금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고운 얼굴, 백발이, 되어도, 사랑하는 이 마음은, 늙지 않네.”

정교랑이 느릿느릿 노래를 불렀다. 여전히 딱딱하고 기복이 없는 목소리였지만 술 단지를 두드리는 소리가 어우러져 남다른 정취를 자아냈다. 여인의 목소리와 단조로운 술 단지 가락일 뿐인데 천고의 세월을 관통하는 듯 곡절이 느껴졌다. 목소리 때문일까? 술 단지 가락 때문일까? 아니면 가사 때문에?

“영웅에게, 묻노니, 무엇이, 어려우랴.”

영웅에게 묻노니 무엇이 어려우랴? 무엇이 어려우랴! 무엇이!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귓가로 들어온 그 가사에 쓸쓸한 마음을 느꼈다. 무엇이 어려우랴? 무엇이?

집에는 내 입신양명을 기다리는 노모가 계시고, 옆집에는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벗이 있다. 동쪽 거리의 술 시장도 아직 못 가 봤고, 아직 공을 세우지도 못했다. 부모의 은혜와 사모하는 연인, 충효와 인의……·. 느릿느릿 이어지는 가락 소리에 가장 먼저 나섰던 셋째마저 멍하니 넋이 나갔다.

“인생은 연기처럼 부질없으니 스쳐 지나 없어지는구나!”

사내는 돌연 목청을 높였다.

“번잡한 속세는 한순간이니 그대는 걱정 말라.”

정교랑이 노래를 이었다.

“천금이 다 흩어져도, 꿈은 끝이 없도다.”

번잡한 속세는 한순간이니 그대는 걱정 말라. 천금이 다 흩어져도 꿈은 끝이 없도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또다시 멍하니 넋을 놓았다.

상관없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를지라도, 아무것도 붙잡지 못할지라도, 아무것도 할 수 없을지라도.

상관없다. 그래도 여기까지 오지 않았는가. 비틀비틀 힘겹게 왔을지라도.

상관없다. 근심과 걱정은 필요 없다. 이제는 걸을 수 있고, 움직일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다.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든, 무엇이 다가오고 또 떠나가든. 번잡한 속세는 한순간일 뿐이나 그녀가 있는 한 끝없이 이어지리라.

정교랑이 칼을 든 손을 높이 쳐들었다가 팍 소리를 내며 술 단지를 쳐 엎어 버렸다. 술 단지에 있던 술이 이리저리 튀면서 불꽃이 일었다. 곡이 마무리되면서 노래도 끝났다.

“통쾌하네.”

정교랑이 딱딱한 목소리로 내뱉으며 손에 들고 있던 칼을 아래로 향하게 꺾어 건넸다.

“통쾌하네!”

정신을 차린 셋째 역시 웃음을 터뜨리며 옆에 놓아둔 술 단지를 들어 고개를 쳐들고 벌컥벌컥 마셨다.

통쾌하네! 진 사노야 역시 흥분을 감출 수 없는 얼굴로 술 주전자를 들어 고개를 젖혀 가며 마셨다.

통쾌하네! 술을 마시지 않고 있던 조 집사도 흥분을 억누를 수 없는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차를 빼내 술을 대신해 병째 마셨다.

통쾌하네! 다른 사람들도 속으로 소리치며 각자 술잔을 들어 단숨에 비우고 탁탁 소리가 나도록 바닥을 향해 내던졌다.

술 단지 두드리는 소리와 남녀가 쉰 목소리로 부른 노랫가락, 모닥불에서 나는 타닥타닥 소리가 함께 어우러지면서 생사를 넘나드는 혈투를 치른 비장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깟 늑대 몇 마리 죽여 놓고선 ‘풍소소 역수한(風蕭蕭 易水寒: 바람은 쓸쓸하고 역수는 차다. 장부가 큰 뜻을 품고 먼 길을 떠남을 뜻하는 말로 형가가 진시황을 암살하러 가기 전에 읊은 시)’을 찾네.”

소년은 모닥불 근처에 앉아 천천히 말했다. 모두를 가리키는 말 같기도 하고 그 자신에게 하는 말 같기도 했다.

술이 바닥나고 고기도 다 먹었다. 모닥불은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고 모든 게 변함없었다. 하지만 저 모닥불 옆에 석상처럼 앉아 있는 여인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저마다 달랐다. 우아하고 고상하면서도 거친 사내들과 어울려 술 단지 장단에 노래를 부르는 여인이라니. 거칠고 투박하지만 동작 하나하나에 대범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뭐 볼 게 있다고 그러십니까?”

사내 몇 명이 맞은편 모닥불 근처에서 이쪽을 두리번거리며 걸어오는 소년을 노려보며 말했다. 소년은 정교랑처럼 커다란 피풍의를 두르고 두모를 푹 눌러 쓰고 있어 밤바람에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소년이 다가오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경계 태세를 취하고 물었다.

“아씨인가, 아니면 마님이신가?”

소년이 궁금한 듯 물었다.

“보아하니 아씨인가 본데, 왜, 노부인 같지?”

어디가 노부인 같단 거야?

“이 자식이, 무슨 소릴 지껄이는 거야?”

사내들이 불쾌한 듯 말했다.

“아니라고?”

소년은 몇 걸음 더 다가오더니 걸음을 멈추고 말을 이었다.

“목소리가 왜 이렇게 듣기 싫지?”

너무 무례하네! 사내들이 우르르 일어서자 소년의 시종들도 저쪽에서 바로 경계 태세를 취했다.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였다.

“괜찮아요. 내가 병을 오래 앓아서 정상과 좀 달라요.”

정교랑이 입을 열었다.

“들었냐? 아씨께선 비정상이셔!”

한 사내가 걸걸한 목소리로 소리치자 소년은 풉 웃음을 터뜨렸다.

“아씨께서 비정상이라는데 웃긴 뭘 웃어!”

사내는 더욱 열이 받는지 두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며 소리쳤다. 옆에 있던 사내가 그 사내의 따귀를 후려치며 호통쳤다.

“봉추! 비정상은 너지! 어디서 아씨를 욕해!”

맞은 사내는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네? 내가 무슨 아씨를 욕해요.”

사내의 멍한 모습에 소년은 푸하하 웃음을 터뜨리고 가까이 다가와 한쪽 옆에 앉았다.

“아니, 이봐요. 어이, 거기. 여기 앉지 마요.”

사내가 한마디 덧붙였다.

“남, 남녀칠세부동석이라잖소. 내외하셔야지.”

소년은 더욱 흥미롭다는 듯 손으로 두모를 살짝 들어 사내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쪽은 남자가 아닌가 보네?”

사내가 순간 눈을 부릅떴다.

“얻다 대고……·.”

사내가 소년을 가리키며 욕을 하려고 했다.

“여섯째.”

나무틀에 기대 있던 사내가 제지했다.

“말을 삼가라. 소리 지르지 말고.”

사내들은 입을 다물고 이글거리는 눈으로 소년을 노려본 다음 정교랑 양옆으로 우르르 앉아 그 소년과 정교랑을 떨어뜨려 놓았다. 저쪽에 있던 진 사노야도 그 광경에 미간을 찌푸렸다.

“아씨한테 마차에서 쉬라고 하지 그러나?”

진 사노야가 조 집사를 보며 말했다. 조 집사는 한결같은 모습이었다.

“네, 그것도 좋죠.”

조 집사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걸음을 옮기지 않고 말할 테면 직접 가서 말하라는 표정을 지었다. 갈증 때문에 고생 한번 했다고 겁내는 꼴 하고는. 노섬 주씨 가문이 그래도 용맹무쌍한 줄 알았더니 별 볼 일 없군. 진 사노야는 속으로 타박하며 모닥불 옆에 앉았다. 이쪽 모닥불 근처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세상인심은 알 수 없고 야박한 법이죠. 오욕칠정을 다 겪은 병자에게 나이가 무슨 소용이겠어요.”

정교랑이 불쑥 입을 열었다. 두모 아래로 갸름한 턱이 보였다. 무슨 뜻이지? 사내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눈치를 살폈다. 소년은 고개를 숙이고 모닥불을 보고 있었는데 그 말을 듣고는 웃는 건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런가?

“아씨.”

옆에 있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아씨도 병을 앓고 계시면서 저희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어 주셨군요. 병을 치료하여 목숨을 구해 주셨으니 부처의 마음씨를 가지셨습니다. 훗날 필시 복을 받으실 겁니다.”

정교랑은 그러냐는 듯 고개를 살짝 돌려 사내를 쳐다봤다.

“글공부를 했나 보죠?”

정교랑이 물었다. 화제 전환이 너무 빠르잖아. 사내들은 어리둥절했다.

“글공부라고까지 할 순 없고 글자를 몇 자 익힌 게 전부입니다.”

사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왜 그만뒀는데요?”

정교랑이 물었다.

“가난해서요. 공부를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군에 들어가 급여라도 받아야 가족을 먹여 살리죠.”

사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정교랑은 음 하는 소리를 내더니 시선을 거두고 모닥불을 쳐다봤다.

“그럼 낭자는 왜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겁니까?”

그 소년이 불쑥 끼어들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미간을 찌푸렸다. 또 화제가 바뀐 거야? 아니지. 이 소년이 멋대로 끼어든 거잖아? 한 사내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못 견디겠는지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글공부를 했다던 사내가 그나마 조금 빨리 반응하며 미간을 찌푸리고 소년을 쳐다봤다.

“난 그때 병세가 심해 치료하지 않으면 죽을 지경이었고 옆에는 여기 형제들밖에 없었어요. 역참에서도 쫓겨난 마당이라 갈 곳도 없는 데다 수중에 돈 한 푼 없었죠. 따르는 이들도 없었고요. 공자, 이 아씨께서 도움의 손길을 왜 뻗으셨겠습니까?”

사내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구레나룻까지 세우며 노기를 드러냈다.

“대형의 미모가 마음에 들었는지도.”

소년이 입꼬리를 위로 올리며 말했다.

“이봐요!”

나머지 사내들도 분통을 터뜨렸고, 개중에는 벌떡 일어서는 자도 있었다. 이 건달 같은 놈이 입을 함부로 놀리네. 은인을 불경하게 묘사하는 것도 모자라 이젠 은인의 은혜를 비웃기까지 하다니. 하여간 부잣집에서 고생 모르고 자란 이들은 가증스럽다니까!

“이보시오, 공자. 공자는 인정 많고 정의로운 이를 못 봤는지 모르겠지만, 세상에 그런 사람이 없는 건 아니오.”

병을 앓았다던 사내가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 작가의 말. 정교랑이 부르는 노래 가사는 1994년에 방영한 타이완 드라마 <칠협오의> 주제곡에서 가져왔습니다. 장융샹이 작사한 곡입니다. 우연히 들었는데 절로 가슴이 벅차올라 이 장면에 가사를 쓰기로 했습니다. 여러분도 검색해서 들어보세요. 저도 모르게 손으로 탁자를 치며 박자를 맞추게 되더군요. 느낌이 있는 곡입니다.

-무례-

“그런 일을 농담거리로 삼지 마십시오.”

소년은 적의를 잔뜩 품은 사내들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손을 내저었다.

“내가 말한 게 아니오. 저 여인이 말한 거지.”

사내들은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아씨, 저희 형제 일곱은 모두 동향입니다. 무원산에서 왔죠. 저희의 천한 이름은 기억하실 것 없으니 은인인 아씨의 존함을 알려 주십시오. 은혜를 깊이 새기겠습니다.”

병을 앓은 사내는 그 소년을 상대하지 않고 정교랑을 쳐다보며 간곡하게 말했다.

“그래요, 그래요. 아씨께선 제 형제를 구하고 은자까지 주셨잖아요.”

“생명의 은인이 따로 없죠.”

“아씨께 장생위패(長生位牌: 은인의 복과 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만드는 위패)라도 세워 드려야 하는데.”

사내들은 왁자지껄 감사를 표했다. 정교랑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면서도 끝까지 이름을 밝히지 않고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쉬러 갔다. 정교랑이 길을 재촉하느라 고생하는 걸 알기에 무원산 형제들도 더 방해할 수 없어 쫓아가 묻진 않았다.

“아씨께선 과연 자비로운 분이야. 은혜를 베풀고도 의연히 기억할 필요 없다 하시네.”

병을 앓은 사내가 감탄하며 말했다.

“하여간 글공부한 사람들은 말투에서 먹물 냄새가 난다니까.”

한동안 잠자코 있던 소년이 옆에서 또 입을 열었다.

“진부하기만 하고 별것도 없으면서.”

사내들이 분노로 노려봤지만 소년은 태연하게 가 버렸다.

“저 자식, 귀한 집 자제처럼 생겼으면서 하는 짓은 꼭 무뢰한 같네.”

한 사내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병을 앓은 사내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 세상 부자 중에 무뢰한이 아닌 자도 있나?”

반문 같기도 하고 혼잣말 같기도 한 말이었다. 떠들썩했던 숙영지가 조용해졌다. 먼 길을 쉬지 않고 달려온 데다 늑대와 혈투를 벌이기도 했고 술까지 마셔 피로가 몰려왔다. 당직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피풍의로 몸을 싸매고 머리를 잔뜩 수그려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동녘이 밝아올 무렵, 숙영지는 또다시 떠들썩해졌다. 세 무리 모두 출발할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마차 소리와 욕설을 퍼붓는 소리, 말하는 소리가 짙은 새벽 안개와 함께 뒤엉켜 있었다.

“이제 날 따라올 필요 없어요.”

정교랑이 무원산 7형제를 보며 말했다.

“저 사람 상처는 이미 고비를 넘겼어요. 며칠 마음 편히 요양하면 되지만, 이렇게 먼 길을 가는 건 안 좋아요. 말했다시피, 병은 고칠 수 있어도, 목숨은 어쩔 수 없어요. 스스로 목숨을 버리려 들면, 내가 옆에 있다 해도, 구할 수 없다고요.”

무원산 7형제는 송구하기도 하고 감격스럽기도 한 표정으로 연신 감사 인사를 했다.

“그런데 댁들이 안 와서, 내가 목숨을 잃었다면, 그쪽도 아마 목숨을 잃었겠죠.”

정교랑이 말했다. 한기가 도는 새벽이라 두봉으로 몸 전체를 싸매고 있어 입과 턱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이게, 하늘이 공평하단 걸까요?”

말을 마친 정교랑은 별다른 말 없이 손짓하여 조 집사를 불렀다. 조 집사도 이번엔 훨씬 기민해진 터라 손을 모으고 공손히 명을 기다릴 뿐 괜한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저 사람들에게 돈을 내주게.”

정교랑이 말했다. 조 집사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전대를 꺼내 사내들에게 건넸다. 무원산 형제들은 조 집사가 건네는 전대를 보고 손사래를 치며 뒤로 물러섰다.

“어찌 아씨의 돈을 받겠습니까. 송구해서 못 받습니다.”

사내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돈은, 쓰기 위한 거잖아요. 사내대장부라면, 이럴 거 없어요.”

병을 앓은 사내는 엄숙한 표정으로 예를 표했다.

“큰 은혜에는 인사를 하지 않는 법이죠.”

사내가 손을 뻗어 전대를 받았다. 정교랑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시녀와 함께 마차 쪽으로 걸어갔다. 사내들은 전대를 들고 정교랑을 눈으로 배웅했다. 못내 아쉬운 눈치였다.

“아씨께선 참으로 좋은 분이야.”

수많은 말 중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번잡한 속세는 한순간이요, 천금은 다 써 버려도 다시 돌아오는 법. 쇠를 두들기려면 자신이 더욱 단단해져야 하지. 우리 형제들이 은혜를 갚으려면 하루빨리 자립해야 하네.”

병을 앓은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은인께서 경성으로 가신다니 나중에 우리가 가서 찾으면 되지. 방금 은밀히 얘기를 들어 보니 한쪽은 진씨 가문이고 한쪽은 주씨 가문이라 하더군. 아씨께선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은인은 충분히 찾을 거야.”

사내들은 좋은 생각이라며 환호하고는 나무틀을 들어 사내를 마차에 태웠다. 사내들은 어젯밤처럼 떠들며 서둘러 출발했다. 산골짜기는 금세 조용해졌다.

시녀는 시선을 거두고 정교랑을 부축해 마차에 올랐다.

“목숨을 구한 은혜면 이름은 몰라도 상관없지만 그래도 용모는 알아 둬야지. 안 그럼 배은망덕하지 않나?”

소년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모두가 고개를 돌리자 소년이 성큼성큼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움직임에 따라 두모를 눌러쓴 얼굴이 보였다 가려졌다 하는데, 새벽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저 무뢰한이! 여인의 외모를 보겠다고 저리 거침없이 굴다니! 주변에 있던 시종들이 분노로 노려봤다.

“은혜를 베푼 적 없는데, 뭐가 배은망덕하단 거죠?”

정교랑이 시녀의 부축을 받아 몸을 돌리며 물었다.

“은혜가 없다니요? 그럼 저들을 왜 치료해 줬습니까?”

소년은 가까이 걸어오며 낭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교랑이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때, 저 사람은 병이 깊어 치료하지 않으면 죽을 지경이었어요. 곁에는 형제들뿐이고, 역참에서도 받아 주지 않아 쫓겨났죠. 그 어디에도 갈 곳이 없었어요. 7척 장신의 사내가 천명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처지였는데, 내가, 그때, 왜 도와줬을 것 같아요?”

정교랑이 물었다.

“왜죠?”

소년이 정교랑을 보며 반문했다.

“그러면, 상쾌하지 않나요?”

정교랑이 천천히 말했다. 상쾌하다. 속이 시원하고 개운하다.

소년이 수없이 듣고 쓰고 말해 본 말이었다. 그런데 그 명료한 단어를 이런 식으로 말하니, 왠지 뭐랄까……·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소년만은 그 뜻을 알아들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 사내들처럼 막막했을 터였다.

사람이 너무 똑똑한 것도 안 좋아. 고개를 든 소년은 머리를 살짝 돌리고 받침에 올라 마차에 타려는 여인을 쳐다봤다. 두모가 살짝 벗겨져 소년의 얼굴이 조금 드러났다. 두 눈은 맑고 코는 오뚝했으며 눈썹은 길었다. 웃음기 없는 얼굴에서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차가움이 느껴졌다.

저 어린 공자가 꽤 준수하게 생겼군.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속으로 감탄했다. 정신을 차린 소년 공자는 남에게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듯 얼른 두모를 똑바로 썼다. 정교랑은 고개를 돌리고 치마를 들며 마차에 올랐다.

“낭자, 잠시만요.”

소년이 소리쳐 불렀다.

“낭자께선 나도 구해 주셨잖습니까.”

정교랑이 걸음을 멈추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소년은 정교랑이 자신을 쳐다보자 손으로 뒤쪽을 가리켰다.

“내 마차 말입니다.”

소년이 말했다. 마차가 뭐? 사람들이 손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소년의 시종들이 마차 한 대를 해체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젯밤 늑대 떼의 습격에 놀란 말이 마차를 달고 마구 내달린 일이 있었다. 어제는 밤이라 자세히 살피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마차 바퀴가 반쯤 망가져 있었다.

“낭자가 말해 주지 않았다면 나도 늑대 떼에 물렸을 겁니다.”

소년이 말했다. 정교랑 주변의 시종들이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저도 모르게 정교랑과 시녀를 차례로 쳐다봤다. 마차에서 내리라고 소리친 일은 시종들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녀가 소리치지 않았나? 정교랑이 소년을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건, 또 그렇네요.”

정교랑이 말했다. 그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소년이 앞으로 한 발짝 성큼 다가가 정교랑의 두모를 벗겼다. 여인의 용모가 소년의 앞에 나타났다. 소년은 눈앞에 있는 얼굴을 응시했다.

이 소녀라고 딱히 별건 없는데. 보통 사람보다 피부색이 좀 더 하얗고, 얼굴이 좀 더 예쁘긴 하지만. 다만 두 눈이 얼굴에 비해 유달리 튀어 보였고 딱딱한 표정까지 더해져 조금 기이하게 보였다. 살아 있는 사람 같지 않아. 소년은 멍하니 있었다. 정말, 병자인가?

워낙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고 소년의 동작이 빨랐기에 사람들은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이 소년이 이토록 경망스럽게 굴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탓도 있었다. 멈칫했던 시간이 지나가고, 시녀가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이어서 시종들도 재빨리 움직이며 소리쳤다.

“이런 호색한이 있나, 무례하다!”

소년 옆에 있던 시종들도 이미 소년을 보호하고 나선 후였다.

“내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은인의 얼굴은 기억해야 하거든.”

소년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서고 웃으며 말했다. 놀라고 분노하는 주변 사람들과 달리 정교랑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시녀는 열이 받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듯 떨리는 손길로 정교랑에게 다시 두모를 씌워 주었다. 이쪽에 있던 진 사노야가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진 사노야는 굳은 표정으로 소년에게 어서 출발하라는 뜻을 표했다.

“낭자, 나도 낭자가 구한 건데 그 일은 상쾌하지 않았습니까?”

소년은 웃으며 물러서는 한편 손을 살짝 흔들었다. 정교랑이 또다시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잠깐만요.”

“공자, 걸음을 멈추세요.”

시녀는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하는 수 없이 큰 소리로 외쳤다. 소년이 걸음을 멈추고 쳐다봤다. 정교랑이 손짓을 하여 소년을 불렀다. 그리 무례한 일을 당하고도 놀라거나 화내지 않고 가까이 오라고 부르다니? 하기야 늑대 떼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인데 저만한 일에 겁을 먹을 리가.

소년은 웃으며 성큼성큼 걸어와서는, 노려보는 주변의 눈길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정교랑 앞에 가서 섰다. 소년의 키는 여인보다 살짝 컸으나 여인이 나무 받침 위에 올라선 탓에 여인이 살짝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모양새가 됐다.

“공자를 구한 건, 별로 상쾌하지 않았어요.”

정교랑은 소년을 보며 손으로 천천히 두모를 벗겨 얼굴을 드러냈다.

“두 번은 구해야, 통쾌하다고 할 수 있죠.”

소년은 무슨 말이냐는 눈길로 눈앞의 여인을 바라봤다. 어제는 거리를 두고 있었고 오늘 처음 본 데다 말 몇 마디 나눈 게 전부인데,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소년 역시 손으로 천천히 두모를 벗으며 물었다. 입꼬리에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정교랑이 몸을 살짝 굽혔다.

“어젯밤, 늑대 떼는, 누군가가, 유인한 거예요.”

정교랑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소년은 순간 오싹한 표정을 지었다.

“이러면, 어떨 것, 같아요?”

정교랑이 몸을 곧추세우고 소년을 보며 물었다.

또 한 무리가 시끌벅적하게 출발하고 소년의 행렬만 남아 산골짜기는 더욱 조용해졌다.

“군왕(郡王), 이만 출발하시죠.”

옆에 있던 시종이 아직도 넋이 나간 듯한 소년에게 물었다. 소년은 응, 하고 대꾸하고는 두모를 들어 올리며 오던 방향을 쳐다봤다. 산골짜기에는 말발굽 소리가 은은하게 메아리치다가 이내 조용해졌다.

“군왕, 저 낭자가 무슨 말을 한 겁니까? 이토록 넋을 놓고 계시다니요?”

집사로 보이는 사내가 다가와 웃으며 물었다. 다른 이들의 공손한 태도와는 달리 사뭇 편한 사이로 보였다. 소년과 정교랑은 가까이 서서 속삭였기에 그들의 마지막 대화는 둘 외에 아무도 못 들은 터였다. 소녀는 몸을 돌려 사내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군왕은 황궁에서 근심 걱정 없이 자라서인지 잘 웃고 성격도 좋았다.

“나보고 어느 댁 공자냐면서 혼처가 있느냐고 묻더군.”

소년이 웃으며 대답하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군왕께선 용모가 수려하시니 반하지 않을 낭자가 있겠습니까.”

집사는 더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안타깝게도 부왕께선 내 혼례를 못 보고 가셨네.”

소년이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순간 웃음소리가 그치고 모두가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

“군왕,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집사가 눈물을 두어 방울 짜내며 말했다.

“군왕의 효심은 하늘에 계신 왕야께서도 아실 겁니다. 서둘러 길을 재촉하시죠.”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슬픈 표정으로 시종이 끌고 온 말을 건네 받았다.

“마차가 고장 나서 가는 길이 불편하실 듯한데, 수로로 바꿔서 가면 어떨지요?”

집사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수로로 가면 빙 돌아가야 합니다.”

누군가가 말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지 않았나. 군왕의 건강이 우선이지. 이리 먼 길을 다닌 일이 없고 놀라기까지 하셨어. 폐하와 태후마마께서 걱정하실 게다.”

집사는 불안하고 걱정된다는 투였다.

“그럼 료 집사 말대로 하자.”

소년이 편히 대꾸했다.

“평안히 가는 게 중요하지.”

집사는 기뻐하며 앞으로 가서 명을 전달했다. 걸어가는 집사의 뒷모습을 보며 소년은 냉소를 지었다. 어디 봐야겠네, 누가 내 목숨을 노리는지. 고기였던 자가 어느덧 고기를 잡는 자가 됐건만, 그 고기를 잡으려던 자는 아직 그 사실을 모르니 상쾌한 기분이 드는 일이었다.

소년은 웃음을 거두고 자신이 왔던 방향을 다시 한번 쳐다봤다. 한 집안은 진씨고 한 집안은 주씨라는데, 그 여인은 주씨일까, 진씨일까? 소년은 손을 뻗어 두모를 쓰고는 말의 옆구리를 걷어차며 힘차게 달려나갔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큰길과 작은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리니 경성은 하루가 다르게 가까워졌다.

“조 대인, 물건을 사 왔습니다.”

시종들이 크고 작은 꾸러미를 들고 객잔의 문안으로 들어왔다. 조 집사 등은 정청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가져가라, 가져가. 빨리 먹어야 길을 서두르지.”

조 집사의 말에 시종들은 네 하고 대답했다.

“아씨께선 뭘 드시죠?”

식탁 위에 즐비하게 차려진 산해진미를 보며 누군가가 궁금한 듯 물었다.

“이런 게 입에 안 맞으신다고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고생하며 여기까지 오는 동안 먹고 마시는 일은 그럭저럭 때우는 경우가 많았다. 경성까지는 이제 며칠 정도의 여정밖에 남지 않은 터라 다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상태였다. 단숨에 경성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진 사노야는 인내심을 발휘하며 이곳에서 잠시 묵어가겠다는 결정을 내리고 성대한 식사까지 대접했다.

모두에게 익숙한 구역으로 들어온 터라 평판이 좋은 객잔을 골라 간판 요리들을 주문했건만, 그 아씨는 한입 먹어 보고는 맛이 없다고 했다.

“별로야.”

그러더니 정교랑은 기괴한 목록을 줄줄이 읊어 주며 재료를 사 오라고 한 후 직접 음식을 만들었다. 무슨 말이야? 이 맛있는 음식을 두고……·. 저 아씨는 참 까탈스럽기도 하지. 진 사노야는 길을 서둘러야 하니 아쉬운 대로 참아 달라고 완곡하게 의사를 전달했다.

“쉬겠다고 한 건 댁들이에요.”

정교랑이 진 사노야를 보며 말했다. 정교랑의 짧은 말에 시녀가 설명을 덧붙였다.

“아씨께선 오는 내내 참고 견디셨어요.”

시녀는 언짢은 듯 말을 이었다.

“다들 고되게 길을 서두를 때도 아씨께선 불평 한마디 안 하셨다고요.”

그건 그랬다. 정교랑은 확실히 오는 내내 조용히 있었다. 어찌나 조용한지 진 사노야 등은 정교랑이 여인이라는 사실을 잊을 정도였다. 늑대 떼를 만났던 그날 밤만 하더라도 다른 여인 같았으면 놀라 울고불고했을 텐데, 이 여인은 조용하고 침착하게 행동했다.

앉아야 할 땐 앉고 노래를 불러야 할 땐 부르면서. 고생은 잘 참고 견디면서도 때로는 응석받이처럼 까탈을 부리니 그야말로 모순이었다. 물건을 가져다주고 돌아온 시종이 조 집사에게 정산한 내용을 보고했다.

“돈을 참 빨리도 쓰시네.”

조 집사가 말했다.

“두 여인이 먹으면 얼마나 먹기에?”

진 사노야는 웃으며 자신의 시종을 손짓해 불렀다.

“내가 내겠네, 내가.”

그럴 수야 있나. 조 집사가 얼른 막으며 웃었다.

“별로 안 들었습니다. 별로 안 들었어요.”

“아씨께서 쓰신 건 많지 않아요. 그 무원산 형제들에게 준 돈이 많죠.”

시종들도 해명하듯 거들었다.

“괜찮습니다. 아씨께서 마음이 착하셔서 그렇죠.”

조 집사가 말을 덧붙였다. 조 집사는 아씨가 돈을 쓰지 않을까 봐 걱정이었는데 뜻밖에도 통 크게 쓰고 있었다. 돈을 쓰게 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사람으로 여긴단 뜻이니 그거면 됐다. 떠날 때 노야와 공자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원하는 건 뭐든 다 주라고. 그까짓 돈이 대수인가. 사람이 중하지, 돈이 별거라고.

시녀는 잘게 다진 재료를 건넨 후 정교랑이 솥에 넣는 걸 지켜봤다. 작은 솥에서 재료들이 와그르르 구르며 뒤섞였다.

“아씨, 아씨는 정말 착하세요. 그 무원산 사람들에게 돈을 많이 주셨잖아요.”

시녀가 말했다. 정교랑은 옆으로 가서 숟가락으로 참기름과 간장 등 양념을 배합한 다음 다진 실파를 솔솔 뿌려 시녀에게 건넸다. 시녀는 받으면서도 어떻게 먹어야 할지 모르는 눈치였다.

“이따 솥을 열고 토끼고기를 살짝 데친 다음 찍어 먹어.”

시녀는 정교랑의 말뜻을 대번에 알아들었다. 앞에 놓인 작은 화로에 올려 둔 노구솥과 아주 얇게 썰어 담아 둔 고기, 푸릇푸릇한 채소를 쳐다보고 솥에서 나는 고추 냄새를 맡으니 식욕이 확 돌았다.

“내 돈도 아닌데, 좋은 일에 쓴다고 해서, 아쉬울 거 없잖아.”

정교랑은 자신의 양념장도 한 그릇 더 만든 후 자리에 앉았다. 시녀가 히히 웃으며 정교랑을 따라 토끼고기를 집어 솥에 넣었다. 솥에서 나온 증기와 함께 맛있는 냄새가 별실에 확 퍼졌다. 시녀가 후루룩 소리를 내며 맛있게 먹는 소리와 정교랑의 말소리가 이따금 들렸다.

“뜨거워. 양념장 찍어서 식혀 먹어.”

“네, 진짜 맛있어요.”

“맛있다고 볼 순 없지. 좋은 술도 없고.”

“아씨, 이렇게 먹는 건 뭐라고 해요?”

정교랑은 잠시 침묵하다가 솥 안에서 이리저리 뒹구는 채소와 고기를 보며 천천히 세 글자를 내뱉었다.

“발하공(拨霞供. 하남 지역의 전통 음식. 토끼고기 샤브샤브와 유사함).”


술 한 잔을 천천히 마시고 난 진 사노야는 더 즐기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길을 서둘러야 했다. 부친이 완쾌하셔야 형제들이 마음 놓고 술을 마실 수 있을 것이다. 시종들은 이미 마차와 말을 돌보며 채비를 시작했다.

“채소며 고기, 술을 많이 샀는데 언제 다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시종이 진 사노야에게 나지막이 고했다. 솥에 한꺼번에 넣고 끓이지 않는 이상 따로 볶기만 해도 시간이 꽤 들 터였다. 진 사노야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무언가 말하려는데 저쪽에서 문소리가 나더니 정교랑과 시녀가 걸어 나왔다.

“낭자, 잘 드셨습니까?”

진 사노야는 내심 놀라며 물었다.

“내가 잘 먹었으면 좋겠어요, 못 먹었으면 좋겠어요?”

정교랑은 한 손으로 두모를 쓰고 진 사노야를 보며 무뚝뚝하게 물었다. 이게 뭔 소리야! 이 여인은 참 말문이 막히게 하는 재주가 있단 말이지. 진 사노야가 무안해하는 사이 옆에 있던 조 집사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풉 웃었다.

남이야 잘 먹었든 못 먹었든 관심도 없잖아. 오로지 길을 서두르는 일에만 관심을 쏟으면서 괜한 걸 물었으니 자업자득이지. 진 공자의 말씀이 맞았네. 이 여인한텐 긴말하지 말고 뭐든 뜻대로 하게 둬야 해. 여인과 시녀가 마차에 오르는 모습을 보며 진 사노야는 고개를 가로젓고 자조적으로 웃었다.

“잘 못 먹었으니 성질을 부리는 거겠지.”

진 사노야는 별실의 문을 열어 봤다.

“남은 음식이 얼마나 되나 보자. 싸가서 가는 길에 먹어도 되고.”

진 사노야의 목소리는 문을 연 후 곧 멈췄다. 별실에 있는 낮고 화려한 탁자에는 중앙에 구리 솥이 놓여 있고 옆으로 접시만 네다섯 개 놓여 있을 뿐이었다. 옆쪽 바닥에는 잡다한 용기들이 놓여 있었다. 아직 불이 꺼지지 않아 솥에서는 모락모락 김이 났지만 접시는 모두 텅 비어 있었다.

실내에 남아 있는 냄새가 훅 끼쳐왔다. 진 사노야는 저도 모르게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냄새가 좋네, 맛있는 냄새야. 이 많은 걸 다 먹었단 말이야? 진 사노야는 놀란 표정이었다. 어떻게 다 먹었지? 고기와 채소를 많이 사 왔다고 했는데, 만들면서 먹은 건가? 자신들과 똑같은 속도로?

“무엇을 만들어 줬느냐?”

진 사노야는 그릇을 정리하러 들어온 점원에게 물었다.

“저희는 안 만들었습니다. 아씨께선 토끼고기를 씻어 잘게 저미고 간장이나 식초 같은 양념을 달라고 하셨어요. 칼과 솥, 접시를 준비해 달라고 하셨고요.”

점원은 공손하게 대답하며 역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안을 살폈다. 이 여인이 설마 생식을 하나?

진 사노야가 더 캐물으려는데 밖에서 시종이 공손히 들어와 채비를 마치고 출발만 기다리는 중이라는 뜻을 전했다. 아씨를 기다리자고 해 놓고선 모두가 자신을 기다리게 한 꼴이 됐다. 진 사노야는 고개를 내저으며 더 묻지 않고 두봉을 받아 걸치고는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행렬이 앞을 향해 나아갔다.

얼마 안 가 별실에서 들린 고함 소리에 밖에서 그릇을 정리하던 점원들이 화들짝 놀랐다.

“너무 맛있어요! 진짜 신기하게 먹는 방법이에요!”

손님이 남긴 음식을 훔쳐 먹은 것도 모자라 저렇게 방정을 떨다니. 잘리고 싶어 환장했네. 점원들은 계산대에 있던 관리인이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이 녀석이 무슨……·. 응? 그러니까 전부 솥에 넣고 끓였다고? 그럼 맛이 뒤섞일 텐데 맛있을 수가 있나?”

“일단 드셔 보시라니까요.”

“너무 맛있네. 훌륭하구나, 훌륭해. 부엌에서 일하는 사람을 불러와라. 대체 어떻게 만들고 어떻게 먹는 건지 와서 보라고 해.”

경성 성문이 보였을 때는 이미 저녁 무렵이었다. 거리에는 여전히 인파가 많았다.

“도착했군. 드디어 도착했어.”

전갈을 받고 일찌감치 성문에 나와 기다리던 진씨 가문 사람들이 이들을 영접했다.

“넷째 아우!”

“형님, 형님도 나오셨습니까.”

진 사노야는 얼른 말에서 내려 마중 나온 사촌 형을 쳐다봤다. 사환을 먼저 보내 부친의 병세를 알아보지 않았더라면 떨리는 마음에 사촌 형을 똑바로 보지도 못했을 터였다.

“아버지께서는……·.”

그래도 진 사노야는 형의 손을 붙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속히 가게, 어서.”

진 이노야 역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담이나 나눌 때가 아니야.”

진 사노야가 흥분을 억누르고 말에 오르자, 시종들이 큰 소리로 외치며 길을 열었다.

같은 시각, 거리에는 또 다른 일행이 나와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소년은 팔짱을 낀 채 늠름하게 서 있었고 푸른 옷을 입은 소년은 걸상에 앉아 있었는데, 시끄러운 인파 속에서 유독 이목을 끌었다.

“공자님!”

조 집사는 고삐를 당겨 말을 세운 후 말에서 뛰어내리려 했다. 주육낭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손을 내젓자 조 집사는 바로 알아듣고 말 위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속히 가게. 부모님께서도 진가 저택에 계시네.”

주육낭의 말에 조 집사는 네 하고 대답했다. 진씨 가문 사람들은 벌써 저만치 간지라 조 집사는 지체하지 않고 정교랑의 마차를 호송해 바짝 따라갔다. 그 마차는 조금의 틈도 허용하지 않았고 휘장 안을 들여다보려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거들먹거리기는.”

주육낭이 콧방귀를 뀌었다.

“냉철한 거겠지.”

진 공자가 씩 웃으며 대꾸했다.

“오히려 내가 떨리는군.”

진 공자의 눈길이 마차를 쫓았다. 표정은 여느 때처럼 담담했지만 눈 속에는 생기가 더해져 있었다. 그래, 대체 어떤 여인이지? 빠르게 성문으로 들어간 마차는 인파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마차는 진씨 저택의 중문으로 곧장 들어갔다. 여종들은 받침대를 놓아 주었고 주위 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마차를 쳐다봤다.

“교교.”

시녀가 휘장을 젖히자 머리에 비취 장식을 가득 단 부인이 눈물을 글썽이며 다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 아씨의 이름이 교랑이니 교교처럼 친근하고 느끼한 이름은 가족이나 부르는 거겠지. 경성의 가족이라면 주씨 가문밖에 없는데, 그럼 주씨 가문 부인인가? 시녀는 부인을 훑어본 다음 몸을 돌려 뒤쪽을 향해 말했다.

“아씨, 천천히 내리세요.”

얘가 아니었구나. 부인은 눈물을 닦는 척 얼른 손을 거두고 다시 마차 안을 쳐다봤다. 먼저 내린 시녀가 손을 뻗자 커다란 두봉으로 몸을 싸맨 사람이 나오더니, 시녀의 부축을 받아 내렸다. 두모로 얼굴을 가린 데다 석양이 진 무렵이라 어두워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우리 교교.”

부인은 울며 시녀를 밀어내고 가까이 다가서며 정교랑을 확 끌어안았다.

“부인, 지금은 우실 때가 아니에요.”

시녀가 말했다.

“진 노태야부터 뵙는 게 중요하오. 얘기는 나중에 집에 가서 합시다.”

옆에 있던 중년 남자가 말했다. 부인은 그제야 눈물을 닦고 정교랑을 보며 손을 잡아끌었다.

“착하지, 어서 가자.”

부인은 정교랑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채에서는 진소와 백부, 숙부 집안 형제들이 모두 기다리고 있었고, 방문 앞에 있던 여인들도 이쪽을 쳐다봤다. 다들 복잡한 표정이었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부친께서 정신이 온전치 못해 말을 과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전에는 병세가 약해 치료가 가능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태의조차 손 쓸 도리가 없는 상황인데 저 여인이 과연 치료할 수 있을까? 추측과 의심과 기대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지만 이미 달리 방법이 없었다.

“오셨군요.”

여종 몇 명이 먼저 나서서 말을 걸었다. 진소는 불현듯 발이 무거워져 걸음을 내디디지 못했다. 감히 내디딜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염없이 기다릴 때는 그나마 희망이 있었다. 이제 확실하게 결론이 날 텐데, 만에 하나……·.

주 부인이 정교랑의 손을 잡고 마당 안으로 들어왔다.

-진료-

“정 낭자.”

진소는 다소 느릿느릿 앞으로 나가 예를 표했다.

“내 부친께서……·.”

정교랑이 진소의 말을 잘랐다.

“먼 길을 오느라 힘들었어요. 우선 좀 쉬어야겠네요.”

사람들이 모두 멈칫했다.

“교랑.”

주 노야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우리 아씨께서 기력이 없으면 어떻게 병을 보시겠어요? 노야, 이미 오래 기다리셨잖아요. 조금 더 기다려도 상관없지 않나요?”

시녀가 말을 끊더니 진소를 보며 말했다.

방문이 닫히자 주씨 부부가 뒤돌아 진씨 가문 사람들을 쳐다봤다.

“아니, 쟤가 참……·.”

주 부인은 몹시 송구한 모습이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하긴 먼 길을 왔잖아요. 우리였어도 못 견뎠을 거예요. 바깥채에서 잠시 쉬면서 기다리죠.”

진소의 부인이 얼른 주씨 부부를 안내하며 말했다. 진 상공 댁의 객청이라니, 예전 같았으면 발을 들일 꿈도 못 꿀 곳이었다. 주씨 내외는 물론 흔쾌히 동의했다.

시중을 들 여종과 몸종들만 남고 나머지는 자리를 떴다. 무작정 기다리자니 초조해진 이들은 진 사노야와 조 집사에게 오는 길에 있었던 얘기를 들으며 여인에 대해 알아보고자 했다.

초겨울이라 날이 일찍 저물었다. 진씨 가문의 대청은 불이 환히 밝혀져 있었고 숯불도 대령한 후였다. 실내는 따뜻했다. 십여 명이 모여 앉아 숨을 죽이고 진 사노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가까이 가 보니 저 낭자가 칼로 살을 도려내는데……·.”

거기까지 들은 여인은 화들짝 놀라며 얼른 두 손으로 옆에 있던 아이의 귀를 막았다.

“단랑, 듣지 마라. 밤에 잠 못 자.”

여인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괜찮아요, 안 무섭다고요.”

단랑은 쪼르르 빠져나와 아예 앞으로 가서 앉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숙부를 쳐다봤다. 그렇게 하면 당시의 광경이 보이기라도 한다는 듯이.

“그러더니 누더기 조각과 썩은 풀로 환자를 싸매고……·.”

“그리 중상을 입은 사람을 칼로 도려내 피를 보면 단독(丹毒: 다친 피부로 세균이 들어가 붓기나 통증을 일으키는 병)의 위험이 커지지 않습니까?”

주 노야가 끼어들었다. 주 노야는 군인 출신이라 칼이나 창에 다친 상처에 대해 잘 알았다.

“아닙니다.”

진 사노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숙부님, 빨리 말씀해 주세요. 그래서 병이 나았어요?”

단랑이 재촉하자 진소가 나서서 훈계했다.

“단랑, 무례하게 굴지 마라. 네 숙부는 먼 길을 와서 고단해.”

단랑은 어려서 몰랐지만, 어른들은 진 사노야의 표정에서 병이 나았다는 사실을 이미 읽어낸 터였다.

“숙부님, 고생 많으셨어요.”

단랑이 제법 그럴듯하게 예를 표했다. 진 사노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구나, 단랑.”

진 사노야가 말을 이었다.

“그러더니 더 기괴한 약을 처방해 달이게 했는데, 이튿날 아침이 되니 사람이 깨어났습니다.”

“대단하네요.”

단랑이 신이 나서 말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병자가 열흘 후엔 우릴 쫓아오기까지 했더군요. 고기도 먹고 술도 마시는 데다 부축을 받으면 걷기도 하고 기댈 곳이 있으면 앉기도 했어요. 말도 하고 노래도 했죠. 벌써 완쾌하여 우릴 도와 늑대 떼를 물리치기도 했습니다.”

다 죽어가던 사람이 완쾌되기까지, 도움을 청하던 사람이 도움을 베풀기까지, 불과 열흘밖에 안 걸렸다니. 참으로 신묘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웃음을 지었고 나이 어린 낭자들은 서로 손을 붙잡으며 기쁨을 나누기도 했다.

“과연 신의로군, 신의야.”

진소는 연신 칭찬을 해대며 주씨 내외를 향해 예를 표했다. 주씨 부부는 서로를 쳐다봤다.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도 물론 놀랐지만, 얘기를 소상히 듣고 보니 의혹이 풀리기는커녕 더 이해가 안 갔다. 그 바보가, 어떻게 신의가 된 거지? 세상에 이런 기이한 일이 있나?

“전에 도사님이 우리 교랑에게 장차 큰 길운이 있을 거라고 했어요. 집안에선 그 말을 믿는 사람이 없었죠. 그래서 도관에 보내는 것도 내키지 않았고요.”

이해가 안 가는 일이긴 했지만 주 부인은 옛일을 거론하며 눈물을 닦는 시늉을 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정말 맞았네요. 우리 시누이만 가엾게 됐죠. 살아 있었으면 얼마나 좋아했을지.”

처음엔 정 낭자의 일에 대해 잘 몰랐지만, 지금은 진씨 가문 사람들도 알아볼 만큼 알아본 때라 내막을 잘 알았다. 일부러 병주까지 사람을 보냈을 정도였다. 하지만 딱히 특별한 얘기는 못 들었다. 바보의 병이 나았다는 것만으로도 놀랄 일인데 병까지 치료하게 되다니.

“신선의 비방을 얻었나 보군.”

사촌 형 하나가 옆에 있는 진소에게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진소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말이 되긴 하지. 부디 그 비방으로 부친의 목숨을 구할 수 있기만을 바랄 뿐, 여인의 병이 어떻게 나았는지 알 게 뭔가.

“우리 집 얘기는 그만하시오. 진 노태야의 병부터 구하는 게 우선이지.”

주 노야가 말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밖에서 여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노야, 정 낭자께서 오셨습니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몸을 곧추세웠다. 곧 문이 열리고 한 여인이 들어오더니, 두봉과 두모를 벗은 아름다운 얼굴이 눈앞에 나타났다.

허리로 길게 드리운 흑발에 검은 비단으로 지은 덧옷, 어두운색 비단 치마까지, 수수하면서도 더없이 단정하고 깔끔했다. 하지만 안팎으로 불을 환히 밝혀 둔 터라 그 아름다움을 똑바로 직시할 수 없었다.

훌륭한 외모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가장 처음 든 생각이었다. 아주 어리군. 진씨 가문 노야들에게 든 두 번째 생각이었다. 의원은 경험으로 말하는 법인데 이리 어린 낭자에게 무슨 경험이 있나? 막다른 길에 몰린 게 아니었다면, 방금 신통한 치료법에 대한 얘기를 듣지 않았다면, 보자마자 희망을 접었을 터였다.

“병자는, 어디 있죠?”

정교랑이 입구에 서서 물었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제야 정신이 든 듯 얼른 일어났다.

“낭자, 나를 따라오십시오.”

단랑이 자신을 잡고 있던 여인의 손에서 벗어나 따라왔다.

“언니.”

단랑이 부친의 곁에서 걷고 있는 정교랑을 보며 소리쳤다. 진소의 부인이 얼른 붙잡아 세웠다.

“단랑, 어서 들어가.”

진소의 부인이 조용히 말했다.

“언니, 나 알아보겠어요?”

“모르겠어.”

단랑의 물음에 정교랑이 단랑을 힐끔 쳐다보고 대답했다.

모른다고? 하긴, 길에서 우연히 한 번 마주친 인연이 전부고 어린애인데 기억이 날 리가. 진소가 얼른 부인에게 단랑을 데려가라고 눈짓했다.

진 노태야의 방 쪽으로 오자 여종들이 얼른 문을 열었다. 진 노태야는 벌써 두 달째 병석에 누워 있었다. 자식들이 정성을 다하고 몸종들이 세심히 보살폈다고는 하지만 방 안에서 풍기는 냄새는 어쩔 수 없었다.

“낭자가 말한 병세가 맞습니다.”

진소는 나막신을 벗고 정교랑을 침상 쪽으로 안내했다.

“그런데 부친께선 두 달 전에 발병하신 게 아니라 한 달 반 전에 넘어지면서 병이 드셨어요.”

“아니에요.”

정교랑이 딱 잘라 말했다.

“두 달 전, 밤에 코피를 쏟았어요.”

밤에 코피를 쏟아? 진소 부부가 어리둥절하여 서로를 쳐다보는데 옆에 있던 여종이 아, 소리를 냈다.

“네, 맞아요.”

여종은 놀라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쳤다.

“두 달 전쯤 며칠 동안 노태야께서 밤마다 코피를 쏟으셨어요.”

“왜 말하지 않았느냐?”

진소가 급히 물었다.

“노태야께서 별일 아니라고 하셨고 정말 별일이 아니기도 했거든요. 물로 씻고 나면 금세 멎었고, 사흘 정도 그러신 게 전부였어요.”

여종이 당황하며 말했다. 이 아씨의 말대로 그때 노태야께서 병이 나신 건가. 여종은 생각할수록 겁이 났다. 노태야의 병을 못 고쳐서 제때 아뢰지 않은 죄를 뒤집어쓰게 되면 끝장이다. 여종은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무릎을 꿇고 잘못을 시인했다.

“말했으면, 뭘 할 수 있었죠?”

정교랑의 물음에 진소가 난처해졌다. 하긴, 말한들 뭘 할 수 있었겠나. 날이 건조하여 코피가 났다고 여기고 말았겠지. 그게 병의 시작일 줄 누가 짐작이라도 했을까.

“일어나라.”

진소가 말했다.

“부친께서는 연로하시니 무슨 일이든 예사로 봐선 안 된다. 부친께서 자식들을 아끼는 마음에 내색하지 않으셔도 너희까지 숨기려 들진 마라.”

여종은 감격하여 알았다고 대답했다. 정교랑은 벌써 침상 옆으로 와 있었다. 양쪽에 켜진 궁등이 침상 위에서 의식 없이 누운 노인을 어슴푸레 비추고 있었다. 진소 부부가 따라와 긴장하며 정교랑을 쳐다봤다. 정교랑의 진지한 표정을 보며 행여 진료에 방해가 될까 봐 말 한마디 건넬 수 없었다. 방 안이 어찌나 조용한지 모두 숨이 막힐 정도였다.

“생각이 안 나요.”

정교랑이 불쑥 내뱉자 진소 부부는 멍해졌다.

“낭자, 무엇이 생각 안 난단 겁니까?”

진소가 긴장하며 물었다. 신선의 비방이 생각 안 난단 건가?

“이분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기억 안 난다고요.”

정교랑은 노인을 보고 고개를 돌려 여종의 손을 붙잡고 휘장 근처에 선 단랑을 쳐다봤다. 반근이 떠난 후 정교랑은 그동안 일어났던 일과 인명, 장소를 전부 기억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반근이 떠나기 전의 일은 종이에 기록된 일만 기억할 뿐이었다.

진소 부부는 어리둥절하여 서로를 쳐다봤다. 시간을 끌더니 아직 진료는 시작도 안 했군.

“낭자, 내 부친께선……·.”

진소는 말을 하다 말고 한숨을 쉬었다.

“최근 보름 동안 의식을 찾는 일이 거의 없으셨습니다. 매일 인삼탕에 의지해 겨우 연명하고 계시죠.”

정교랑이 손을 뻗자 진소가 얼른 이불 속에서 부친의 손을 빼내 주고, 맥을 짚는 모습을 지켜봤다. 방 안은 또다시 침묵에 잠겼다. 잠시 후 정교랑이 손을 떼자 진소 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곧이어 긴장한 눈으로 정교랑을 쳐다봤다. 어떠냐는 말조차 물을 수 없었다.

“금침을 하나 만들어 주세요. 일단 침을 놔서 깨어나게 할게요.”

정교랑이 말했다.

그때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몹시 다급한 듯 나막신조차 벗지 않고 다다다 달려 들어왔다.

“만들 필요 없습니다. 만들 필요 없어요. 여기 있습니다.”

한 노인이 휘청거리며 말했다. 뒤이어 아이 하나가 약상자를 끌어안고 달려 들어왔다.

“신의께선 어디 계십니까?”

노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진소 부부가 얼른 나서며 맞이했다.

“이 태의, 늦은 시각에 어찌 오셨습니까?”

“신의께서 오시면 몇 시가 됐든 날 부르라니까요. 이런 일을 놓치면 평생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이 태의가 계속해서 방 안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신의는요?”

저쪽에 있는 정교랑은 일어나기는커녕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진소가 이 태의를 안내했다. 단랑은 어느 틈에 침상 옆으로 와 꿇어앉아 있었다.

“언니, 할아버지를 치료할 수 있어요?”

단랑이 정교랑의 옷깃을 붙잡으며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할아버지께서 8월 15일에 같이 등불놀이 보러 가겠다고 하고선 안 가셨어요. 사촌 언니가 정월 대보름 때는 분명 같이 가실 수 있대요. 언니, 사람들 말로는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실 거래요. 그럼 정월 대보름 때 저랑 등불놀이 보러 갈 수 있어요?”

네다섯 살 꼬마는 아직 삶과 죽음을 몰랐다.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단랑을 보며 말했다.

“갈 수 있어.”

정교랑이 말을 이었다.

“며칠만 지나면 나으실 거야. 정월 대보름 땐 등불을 보러 가실 수 있지.”

단랑은 환히 웃으며 침상에 엎드려 할아버지의 팔을 잡아 흔들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언니가 곧 나으실 거래요. 우리 같이 등불놀이 보러 가요.”

단랑이 신이 나서 소리쳤다. 진소의 부인이 얼른 다가가 단랑을 붙잡았다.

“이분이 바로 정 낭자입니다.”

진소가 이 태의에게 먼저 소개한 후 정교랑을 보며 말했다.

“이분은 태의원의 이 태의십니다.”

정교랑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고 이 태의도 정교랑을 쳐다봤다.

“이분이? 대인들께서 모셔 온 그 정 낭자라고요?”

이 태의는 무심결에 놀라 소리쳤다.

문에 들어섰을 때부터 이 여인을 보긴 했다. 하지만 너무 어려 노태야의 손녀뻘 되는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진씨 가문에서 실낱같은 희망으로 모셔 온 낭자일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정교랑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금침이 있다고요? 빌려줘요.”

정교랑이 손을 뻗으며 말했다.

대청에 있는 주씨 부부는 좌불안석이었고, 함께 앉아 있는 다른 사람들 역시 자리가 편치 않았다. 다들 속으로는 진료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지만 재촉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 진 사노야의 여정에 관한 일만 듣고 있을 따름이었다. 듣는 사람도 마음이 딴 데 가 있고 말하는 사람도 마음이 딴 데 가 있으니, 내용이 엉망진창이라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모를 상황이었다.

“여러 사람이 늑대의 다리를 물었죠.”

젊은 여인 하나가 풉 웃음을 터뜨리자 다들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진 사노야 역시 정신이 딴 데 가 있었던 사실을 깨닫고 머쓱해했다.

“진맥은 어떻게 됐나 모르겠군.”

진 사노야가 화제를 돌렸다.

“아직 나이가 어려서 말입니다.”

주 노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고칠 수 있든 없든 일단은 겸손하고 볼 일이다. 문밖에서 여종 하나가 급히 들어왔다.

“침을 놨습니다. 정 낭자께서 늦어도 내일 아침이면 의식을 회복할 거라고 하셨어요.”

여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흥분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앞다투어 밖으로 나갔다. 진소 부부가 정교랑과 함께 오고 있었다.

“교교, 어떻게 됐어?”

주 부인이 다급히 다가서며 물었다.

“고칠 수 있니?”

“당연하죠.”

정교랑이 대답했다.

“침을 놨고 약도 처방했다. 이 태의가 지키고 있어.”

진소가 형제들에게 말했다.

“그럼 이제 뭘 하면 됩니까?”

진 사노야가 정교랑을 보며 물었다.

“기다려야죠.”

정교랑의 대꾸에 진 사노야는 코를 만지작거렸다. 이 여인은 참, 언제나 너무 직설적으로 말한단 말이지.

“그럼 시간이 늦었으니 일단 돌아가자. 고단하겠네.”

주 부인이 정교랑의 팔을 잡아끌며 말했다.

“난 더 기다려야 해요. 깨어나면 약도 살펴야 하고요.”

주 부인은 곤혹스러웠다.

“낭자는 여기서 묵어요. 거처도 다 정리해 놨어요.”

진 부인이 얼른 나서며 말했다. 붙잡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아도 차마 미안해서 말을 못 붙였는데, 여기 남아 약을 살피겠다니 더없이 좋은 일이었다.

“그래요, 여기서 지내십시오. 그래야 다들 마음이 놓이기도 하고요.”

진소도 거들며 주씨 부부를 향해 예를 표했다.

“그게 좋죠, 그게 좋겠습니다.”

주씨 부부도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늦었으니 그럼 어서 돌아가 쉬십시오.”

진소가 말했다. 이들까지 붙잡아 둘 순 없는 노릇이었다. 집안에 병자가 있어 다들 초조하고 어수선하니 말이다. 주 부부는 시중들 여종 넷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주씨 부부가 자리를 뜨자 정교랑은 곧장 쉬러 가겠다고 했다. 진소의 부인이 사람을 시켜 안내하게 했다.

“아, 참.”

정교랑은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한밤중에 깨어날 경우, 약만 드시게 하면 돼요. 날 깨울 필요 없어요.”

진씨 가문 사람들은 어리둥절하면서도 곧 뭔가를 눈치챈 듯했다.


주씨 저택에는 불이 환히 밝혀져 있었다. 마차가 들어오는 모습을 본 주육낭은 저도 모르게 앞으로 다가섰다. 마차의 휘장이 올려지고 여종이 주 부인을 부축해 내리더니 휘장이 내려지면서 더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주육낭은 답답한 듯 콧바람을 내뿜었다. 거처로 돌아오자 대청에서는 진 공자가 화로에 술을 데우고 있었다. 방 안에는 술 냄새가 가득했다.

“어때? 괜히 나가서 기다렸지?”

진 공자가 옷을 걷어 올리며 자리에 앉는 주육낭을 보며 말했다.

“부모님을 마중 나가는 건 응당 해야 하는 일이야.”

주육낭이 술잔을 들어 단숨에 비우며 말했다. 진 공자는 웃으며 한 잔을 더 따라 주었다.

“진 노태야께서 오늘 밤에 깨어나실 수도 있다며 거기 남겠다고 했대.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라고.”

“긴지 아닌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진 공자가 말을 이었다.

“그 여인은, 자네 집에 발을 안 들일 거야.”

주육낭이 비웃었다.

“들이거나 말거나.”

“백부님과 백모님께선 뭐라셔?”

진 공자가 물었다.

“별말씀 없으셨어, 그렇지 뭐. 고모님과 많이 닮았다고 하시더군.”

주육낭은 심드렁하게 말을 이었다.

“아, 자네 고모님은 미인이셨는데.”

진 공자가 웃었다. 주육낭은 술잔을 돌리며 멍하니 있었다. 부친은 당연히 별말씀 없으셨지만, 모친은 여느 여인들처럼 과장된 묘사를 늘어놓았다. 마차에 내릴 때부터 옷을 갈아입고 방으로 들어가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까지, 전 과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얘기했다. 어찌나 소상한지 그 여인이 눈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정씨 댁에서 한 번 봤을 때처럼, 밤마다 꿈속에 나타나는 그 모습처럼, 그 여인은 딱딱한 표정으로 주육낭을 쳐다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있었다. 그건 비웃음이었다. 주육낭은 술잔을 들어 한입에 털어 넣었다.

“조 집사를 불러서 오는 길에 있던 얘기를 들어보자고. 재미있을 거야.”

진 공자가 말했다. 옆에 꿇어앉아 있던 몸종이 얼른 대답하고 사람을 부르러 밖으로 나갔다.

“뭐 재미있는 게 있다고. 집에 안 가?”

주육낭은 진 공자를 보며 심드렁하게 물었다.

“오늘 밤엔 안 갈 거야.”

“그 애한테 뭐 재미있는 게 있다고 자네까지 우리 집에 눌어붙어? 그렇게 관심이 생기면 장가들어 데려가든가.”

그 말에 두 사람 모두 멈칫했다. 진 공자의 조모는 방녕공주였다. 이미 돌아가셨지만 혈통으로 따지면 지금의 황제와 가까운 사이였다. 부친 역시 풍류를 알고 글재주가 뛰어나기로 이름났으며 진씨 가문도 명문가였다.

진 공자가 불구라고는 하나 아무나 사돈을 맺을 상대는 아니었다. 주육낭의 말은 그 결함을 비웃는 꼴이 되고 말았다. 결함이 있는 바보나 짝으로 어울린단 뜻이 아닌가. 주육낭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나, 난 그런 뜻 아니었어.”

시무룩한 표정의 주육낭을 보며 진 공자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뜻 아닌 거 알아. 그만한 미인이면 인연이 없는 게 걱정이지.”

주육낭이 무언가를 더 말하려는데 몸종이 조 집사를 안내해 안으로 들어왔다.

“고생 많았네.”

주육낭은 조 집사에게 앉으라는 눈짓을 했다. 조 집사는 싱글벙글한 표정이었다.

“고생은 무슨요. 집으로 돌아와서 마음이 아주 편합니다. 피로가 씻은 듯 사라졌어요.”

조 집사가 꿇어앉으며 대답했다. 먼 길을 다녀왔으니 집 생각이 간절했겠지. 주육낭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진 공자는 피식 웃었다.

“왜? 정 낭자 때문에 꽤 애를 먹었단 말로 들리는군.”

진 공자의 물음에 주육낭은 미간을 찌푸렸다.

“괜한 생각 마. 무슨 일이든 그 애랑 엮으려 들다니, 걔가 무슨……·.”

주육낭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조 집사가 쓴웃음을 지었다.

“진 공자님의 말씀을 들었어야 했다고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릅니다.”

조 집사는 고개를 숙이고 예를 표하며 말했다. 주육낭의 목소리는 거기서 뚝 그쳤다. 답답하기도 하고 딱히 도리가 없다는 듯 술잔을 들며 입을 다물었다.

“내가 괜한 생각을 하는 게 아냐. 자네가 생각하기 싫은 거지.”

진 공자는 답답해하는 주육낭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세상일이라는 게 다 그래. 사람과 사람 사이에 차이 같은 건 없어. 차이가 있다면 생각을 하려 드느냐, 하고 싶지 않느냐 정도지.”

“그냥 묻고 싶은 거 물어. 괜한 사람 엮지 말고.”

주육낭이 노려보며 말했다. 시선은 조 집사에게로 옮겨 갔다. 몸종이 조 집사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사실 정씨 댁 아씨께서 괴상하시긴 한데……·.”

문을 닫아 초겨울의 한기를 막았다. 노야와 공자들의 방이 밝고 따스한 데 반해 아랫것들의 방은 어둡고 싸늘했다. 반근은 손을 비비며 등불 가까이 다가앉아 옷을 기웠다.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와 여종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 문이 열리더니 여종들이 초겨울의 한기를 몰고 들어왔다. 그 바람에 등불이 꺼지려 하자 반근이 얼른 손으로 가렸다.

“소월이 서둘러 가지만 않았어도 내가 이기는 건데.”

“이기긴. 소월은 경사를 앞두고 있어 재물운이 대단한걸.”

“소월은 참 운도 좋지. 부인께서 조 집사에게 주시다니. 조 집사가 얼마나 유능해. 나이는 좀 많아도 집안 안팎의 대소사를 다 관장하잖아.”

“이번에 돌아오면서 큰 공까지 세웠으니, 혼례를 올리고 나면 소월은 부인의 시중을 드는 집사 부인이 되겠네.”

몸종들은 거울 앞에 앉아 머리를 빗으며 조잘조잘 떠들었다. 방 안은 웃고 떠드는 소리로 가득했다.

“조 집사가 돌아왔어?”

반근이 놀라 벌떡 일어나면서 물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손에 든 바늘이 손가락을 찌르는 것조차 지각하지 못할 정도였다. 몸종들은 그제야 반근을 쳐다봤지만, 대부분은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힐끔 보고는 시선을 거두었다.

“그래.”

그중 하나가 머리끈을 입에 물고 대답했다.

“저녁 무렵에 성으로 돌아왔어. 방금 노야와 부인께서 함께 돌아오셨고.”

“그, 그럼 우리 집 아씨도 오셨겠네.”

반근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찌나 흥분했던지 눈물까지 왈칵 쏟아졌다. 이번에는 몇 사람이 웃었다.

“너희 집 아씨? 너희 집이 어딘데? 넌 누구 집 사람이고?”

그중 하나가 경멸한다는 투로 말했다.

“여긴 자기 집이 아닌가 보네? 우리 집에서 고생이 많네요, 낭자.”

방 안에서 깔깔거리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반근은 무안한 듯 고개를 숙였다.

“나, 난……·.”

반근은 한참 웅얼거렸지만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눈물만 뚝뚝 흘릴 뿐이었다.

“오밤중에 웬 눈물 바람이야?”

한 여종이 소리쳤다.

“그러게, 하루 종일 표정이 썩어 있어. 누구한테 돈이라도 떼먹혔나.”

또 하나가 소리쳤다. 방 안은 와글와글 소란스러워졌다. 주눅이 든 반근은 자신의 침상으로 돌아와 이불을 끌어당겨 눈물을 닦았다. 울지 않으려 했지만 그럴수록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됐어, 다음에 어멈한테 말해야겠다. 남의 집 언니한테 좋은 곳 찾아 주라고. 여기서 우리 같은 사람이랑 어울리게 하다니, 미안해서 안 되겠네.”

반근은 고개를 숙이고 바느질거리를 허둥지둥 챙기며 몸을 떨었다.

“야, 바느질할 거면 다른 데 가서 해. 우리 이제 잘 건데 불 켜 놓으면 어떻게 자란 거야. 우린 너처럼 할 일 없이 빈둥대는 사람이 아니야. 낮엔 일하느라 바빠.”

방문이 닫히고 등불의 불이 꺼지자 안팎이 칠흑처럼 어두워졌다. 반근은 눈물범벅인 얼굴로 옷을 끌어안고 두리번거리며 몸을 떨었다. 아씨, 아씨……·. 대체 어떻게 된 거죠?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진 노태야의 방은 네다섯 사람이 지키고 있었다. 팔걸이 책상에 기대 잠시 눈을 붙이는가 하면 팔짱을 낀 채 꼿꼿이 앉아 눈을 감고 있는 이도 있었는데, 이 태의만은 침상 근처에 앉아 수시로 손을 뻗어 맥을 짚어 보았다.

“침을 놓는 방법이 기이하던데, 그게 정말 효과가 있을까?”

이 태의가 중얼거렸다. 침상 위에 누운 진 노태야는 여느 때처럼 입을 벌리고 곤히 잠든 채로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이 태의는 창밖을 봤다. 동녘이 밝아오고 있었다.

“날이 밝아오는데, 늦어도 아침이면 깨어난다지 않았나? 왜 아직도 안 깨어나시지?”

이 태의는 잠시 중얼거리더니 발치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아이를 보고 발로 차 아이를 깨웠다.

“얘야, 일어나라.”

아이는 비몽사몽 간에 일어나 중심을 잡지 못하고 얼른 침상을 붙잡았다.

“사부님, 사부님.”

아이는 게슴츠레한 눈을 뜨고 웅얼거렸다.

“몇 시예요?”

“곧 묘시다.”

이 태의가 고개를 돌려 아이를 보며 대답했다. 소녀는 아, 하는 소리를 내며 소매로 입가를 닦은 후 바로 앉았다.

“묘시라니, 곧 날이 밝겠네.”

이 태의는 아이를 바라봤고, 아이도 이 태의를 바라봤다.

“넌 어떻게 입도 안 벌리고 말을 하느냐?”

이 태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사부님, 사부님이 말씀하신 거 아니에요?”

아이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삼낭, 삼낭?”

침상에서 들어 올려진 손 하나가 옆에 있던 아이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아이가 깜짝 놀라 비명을 내지르는 바람에 방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잠에서 깼다.

진 노태야 방의 소란은 금세 마당으로 전해졌다.

“깨어나셨대요!”

“정말 깨어나시다니!”

“세상에. 늦어도 아침엔 의식을 회복하실 거라더니, 정말 그 말대로 됐네요!”

진소는 흥분하여 어쩔 줄 몰라 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명했다.

“어서 가서 정 낭자를 모셔 오너라.”

여종들이 얼른 밖으로 뛰어나가는데 진소의 부인이 막았다.

“여보, 정 낭자가 깨어나시면 자신을 깨우지 말고 약을 드시게 하라고 했잖아요.”

진소가 발을 굴렀다.

“뻐기려고 한 그런 말을 어찌 곧이들으시오. 그만큼 자신 있다는 뜻을 보여 주려던 거요.”

진소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말을 그렇게 했다고 곧이곧대로 들으면 쓰나? 속히 가라, 속히.”

진료와 약 처방에 용이하도록 진교랑의 거처는 진 노태야와 가까운 곳으로 정했다. 저쪽에서는 날이 밝기도 전에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지만 이쪽은 여느 때처럼 조용했다. 마당에 있는 등도 다른 곳보다 적었고, 방 안은 더욱 캄캄했다. 안에 있는 사람은 여전히 자는 듯했다.

물론 여느 때처럼 조용한 건 정교랑과 시녀뿐이었고, 주씨 가문 여종 넷은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저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자 얼른 밖으로 나와 쳐다봤다. 진씨 가문 여종들이 다가오자 주씨 가문 여종들은 긴장하며 물었다.

“언니들, 어떻게 됐어요?”

“아씨께선 과연 신의세요, 신의.”

진씨 가문 여종들은 입을 모아 칭찬하며 사뭇 공손해진 태도로 주씨 가문 여종들을 대했다.

“노태야께서 의식을 회복하셨어요. 어서 아씨를 모셔 가야 해요.”

정말 신통하네! 주씨 가문 여종들은 크게 기뻐했다. 자신들을 극진한 예로 대하는 진씨 가문 여종들의 태도를 은근히 즐기기도 했다.

“언니들, 잠시만 기다리세요. 모셔 올게요.”

주씨 가문 여종들이 얼른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채 두 걸음도 걷기 전에 안에서 문이 열렸다. 역시 못 잤나 보네. 하긴 저쪽 동정이 걱정됐겠지. 괜히 태연한 척하기는. 주씨 가문 여종들이 그런 생각을 하며 앞으로 다가가 예를 표하려 할 때였다.

“대체 뭐 하는 사람들이죠?”

시녀의 불쾌한 듯한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아씨한테 어서 말씀 좀 전해요. 노태야께서 깨어나셨대요.”

여종들이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깨어나셨으면 깨어나신 거죠. 약 드시게 하라고 말했잖아요. 아씨 깨우지 말고요.”

시녀가 목소리를 깔며 호통을 쳤다. 자리에 있던 진씨 가문과 주씨 가문 여종들은 모두 멈칫했다.

“반근 낭자.”

주씨 가문의 여종 하나가 웃음기를 거두고 불쾌한 듯 경고했다.

“낭자는 이런 진료에 대해 잘 모르잖아. 속히 아씨께 말씀부터 올리고 허락받아.”

시녀는 콧방귀를 뀌며 밖으로 두 걸음 나왔다. 물론 소란스러운 소리가 안으로 들리지 않도록 문을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걸, 그쪽은 알아요?”

시녀가 소리를 낮춰 물었다. 이런 무례한 계집 같으니라고! 여종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주 부인을 가까이서 모시며 총애를 받는 여종들한테, 생질녀를 모시는 시녀 따위가 이토록 무례하게 굴다니!

“정씨 가문에서는 아랫것을 이따위로 가르치나?”

여종 하나가 굳은 얼굴로 따졌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시녀가 침을 탁 뱉고는 소리를 낮춰 말했다.

“여기서 정씨, 주씨 타령이 왜 나와요? 얼른 가요. 사람 말 못 알아들어요?”

어안이 벙벙해진 여종들은 곧 격분했다.

“이 천것이 왜 이렇게 무례해. 매맛을 봐야겠네.”

진씨 저택만 아니었다면 이토록 무례한 시녀는 진작 따귀를 얻어맞았을 터였다. 시녀는 회랑 아래에 서서 네 여종을 쳐다봤다. 아직 날이 밝기 전인 데다 등불은 점점 꺼지고 있어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뭐가 어째요? 때리겠다고요?”

시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무례하게 굴었으니 맞아야겠네.”

진씨 가문 여종들은 이미 멍해진 상태였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한편 방 안에서 서성이던 진소는 수시로 밖을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 아직인 게야, 어째서.”

진소가 중얼거렸다.

“왔습니다.”

문밖에서 여종이 소리쳤다. 다들 반색을 하며 맞이하러 나갔지만, 여종 둘만 급히 돌아왔을 뿐 뒤따르는 사람은 없었다. 진소 등은 놀란 눈치였다.

“그 시녀 말이 아씨께서 쉬시니 방해하면 안 된답니다. 깨어나셨으면 약을 드시게 하래요. 아씨께서 일어나면 오실 거라면서요.”

여종이 쭈뼛거리면 말했다. 진소의 부인은 저도 모르게 남편을 힐끔 쳐다봤다. 거보라고요, 말한 대로 해야 한다니까. 진소는 어리둥절했다. 이 낭자가 대체……·.

“그리고……·.”

여종이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도로 삼켰다.

“뭐냐?”

진소의 부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방금 아씨를 부르러 갔던 일로, 주씨 가문 사람들과 그 시녀 사이에 소동이 벌어졌어요.”

여종은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그 시녀는 네 사람더러 돌아가라고 했고요.”

돌아가라고 했다는 말은 정중한 표현이었고, 실은 냉큼 꺼지라고 했다. 뭐라고? 진소가 옷소매를 뿌리쳤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진소의 부인이 남편을 다독였다.

“내가 가 볼게요.”

진소의 부인은 여종의 안내를 받아 서둘러 자리를 떴다. 진소는 떨떠름한 기분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우선 약부터 드시게 하죠.”

이 태의는 정교랑의 구술에 따라 시녀가 받아 쓴 처방을 아이에게 건넸다. 아이는 약을 달이러 뛰어나갔다.

“삼낭, 삼낭. 그, 그 낭자가 왔느냐?”

진 노태야가 침상에서 떨리는 손을 뻗었다. 진소가 얼른 다가가 하도 수척하여 이미 사람의 몰골이 아닌 부친을 쳐다봤다. 사내는 쉽게 눈물을 흘려선 안 된다지만 그건 슬픈 일을 겪어보지 못해 하는 말이리라.

“네, 아버지.”

진소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무릎을 꿇고 부친의 손을 잡았다.

“제 불효 탓입니다. 이리저리 바삐 다니시느라 이렇게 되셨어요.”

“셋째 아우, 그런 말 말게.”

사촌 형 하나가 다가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 낭자가 말하지 않았나. 숙부님께선 오래전부터 지병이 있으셨다고. 자네를 따라오는 길에 정 낭자를 만나지 않았다면 더 속수무책이었을 거야.”

방 안에 있는 다른 형제들도 맞장구를 쳤다.

“지금은 그런 얘기를 나눌 때가 아닙니다. 이제 희망이 생겼잖아요. 그 낭자가 고칠 수 있다고 했으니 이제 됐습니다.”

“약은? 어서 약을 재촉해.”

정교랑이 쉬고 있는 방 밖에서는 여종 네 명이 난처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부인까지 오시게 소란을 피우다니……·.”

여종들이 고개를 숙였다. 진 부인은 이들을 훑어보기만 할 뿐 잠자코 있었다.

“노태야의 병이 중하죠. 잠이야 조금 더 자든 덜 자든 무슨 상관이겠어요.”

한 여종이 말했다.

“이 일은 저희 집안일입니다. 부인께 부끄럽네요.”

“저희 아씨께서 아직 어리시고 저 몸종도 어려서 그렇습니다. 어릴 때부터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해 뭘 모르죠. 부끄럽습니다.”

또 다른 여종도 말을 거들었다. 진 부인은 잠시 주저했다. 따지고 보면 이들의 집안일이긴 한데……·. 진 부인의 눈앞에 어젯밤 주씨 가문 사람들이 떠난 후 정 낭자가 보인 표정과 말이 떠올랐다.

주씨 가문 사람들 앞에서는 병자를 봐야 해서 갈 수 없다고 하더니, 그들이 떠나자마자 쉬러 가겠다고 했다. 이 낭자는 진씨 가문 사람들을 위해 예의상 남은 것 같지 않았다. 주씨 가문으로 가기 싫은 것이다. 진 부인은 소매 속에 있는 손을 꽉 쥐었다.

“이렇게 하지. 자네들 먼저 돌아가게. 우리는 낭자께 진료를 청해야 하는데 낭자의 심기가 불편하면 자네들은 식구니까 괜찮을지 몰라도 우린 상황이 난처해져. 내 입장을 헤아려 주는 셈 치고 자네들이 좀 섭섭하더라도 낭자 말대로 하게.”

여종들은 기가 막히겠는 표정이었다.

새벽빛이 차츰 실내로 들어와 안을 환히 비췄다. 정교랑이 몸을 뒤척이다가 비단 이불 속에서 팔을 뻗었다.

“아씨, 물 드시겠어요?”

시녀가 휘장 밖에서 물었다.

“응.”

정교랑이 대답했다. 시녀가 휘장을 걷고 들어와 꿇어앉더니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넸다. 정교랑이 일어나 앉아 물을 마셨다.

“왜, 잠을 못 잤어?”

정교랑이 물었다. 시녀는 잠을 제대로 못 잤는지 얼굴이 푸석해 보였다.

“전 아씨 같은 복이 없어서 잠자리가 바뀌면 한 이틀은 지나야 제대로 자요.”

시녀가 웃으며 대답했다. 정교랑이 물잔을 건넸다.

“복이라고 할 것도 없어.”

정교랑은 이불을 걷어치우고 일어서며 말을 이었다.

“어디에 있든, 나한텐, 다 똑같거든.”

전부 모르는 곳이고 낯선 곳이다. 시녀는 그 말을 어떻게 받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모르면 말하지 않는 게 상책이다. 시녀는 일어서는 정교랑을 부축했다. 정교랑이 노태야의 일에 대해 묻지 않았기에 시녀도 먼저 꺼내지 않았다. 밖에서 기다리는 여종과 몸종들만 애가 탈 뿐이었다.

“아직 안 일어나셨나?”

“저쪽에선 벌써 약을 드셨어. 노야께서 또 가 보라고 하셨는데.”

“괜히 재촉하지 마. 주씨 가문 사람들도 쫓겨난 거 봐. 괜히 심기를 건드렸다간 너도 쫓겨날 거야.”

밖에서 수군대는 사이에 문이 벌컥 열리자 여종들은 얼른 입을 다물고 몸을 곧추세웠다.

시녀가 문을 열자 문밖에 있던 여종과 몸종이 얼른 예를 표했다. 시녀도 답례했다.

“고생이 많네요.”

시녀는 미소를 머금고 사근사근한 말투로 말했다. 실로 교양 있고 사리에 밝은 모습이었다. 방금 전만 해도 손을 허리에 대고 침까지 뱉으며 연장자인 여종들을 쫓아내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저희 아씨께선 식사하셔야 해요.”

“네, 네, 준비해 놨어요.”

시녀의 말에 여종이 얼른 대답했다.

“너무 번거롭게 하실 필요는 없고요.”

시녀가 웃음을 머금고 말을 이었다.

“오미 고기죽, 산초 소금 순무채무침, 산초 소금 등자 참새볶음이면 돼요.”

여종들은 아연실색했다. 뭐라고? 무슨 죽? 산초 소금? 등자를 볶기도 하나? 이게 번거롭지 않다고? 고기죽에 오미는 또 뭐야? 참새라고? 거기에 산초 소금과 등자를 넣어 볶아? 뭐야, 대체 어떻게 먹겠다는 거야.

진 노태야의 방에 있던 진소 형제는 다시 침묵에 빠졌다. 진 노태야는 약을 먹은 후 또다시 의식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 태의가 곁을 지키며 맥이 전보다 훨씬 나아졌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진소 형제는 벌써 정 낭자를 불러오려 사람을 보냈을 것이다.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느릿느릿 일어난 것도 모자라 차려 놓은 밥은 안 먹고 새로 주문을 하다니, 정 낭자는 참 인내심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대인, 너무 노여워 마십시오.”

이 태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어제 낭자가 침을 놓는 걸 보니 힘을 많이 쏟는 듯했습니다. 침의 깊이에 추호의 실수도 없었던 덕에 노태야께서 단번에 깨어나셨겠죠. 치료에 더욱 전념해야 하니 오늘은 더 많은 힘이 들 테고요. 급병의 치료 효과는 더디 나타나는 법이니 서두르셔선 안 됩니다. 낭자가 저리 태연한 걸 보면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대인, 기뻐하시는 게 옳습니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낭자의 사정이 이해가 가기도 했다. 침 한 번 놓은 일로 오랫동안 의식이 없던 노태야를 깨울 정도였으니 오죽 힘을 쏟았을까.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자식으로서 부친의 병이 근심되어 그러지요.”

진소의 말에 이 태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죠. 그러실 만합니다.”

이 태의는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눈을 찡긋하고는 말했다.

“말하고 보니 저도 배가 좀 고프군요.”

하긴, 이 태의도 하룻밤을 꼬박 새웠다.

“어서 식사를 올려라.”

진소의 부인이 얼른 나섰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이 태의는 다급하게 소리치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그럼 정 낭자가 주문한 것으로 똑같이 먹겠습니다. 이름을 들으니 맛있을 것 같아서요.”

오미 고기죽과 산초 소금 순무채무침, 산초 소금 등자 참새볶음이라. 자리에 있던 사람들도 속으로 그 이름을 읊어 봤다. 알록달록 먹음직스럽고 아삭아삭한 요리가 눈앞에 차려진 기분이었다. 맛있게 생겼네.

“다들 밤 새느라 고생 많았는데 어젯밤에도 오늘 아침에도 아무렇게나 대충 때웠지. 부엌에 가서 그대로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라.”

진소가 말했다.

-거짓이 아닌-

아침 문안을 드리러 가던 주육낭은 부모님의 마당에서 여종 넷이 울며 쫓겨나는 모습을 목도했다.

“쓸모없는 것들.”

주 노야는 굳은 표정으로 씩씩거렸다.

“그 애는 대체 왜 그럴까요?”

주 부인 역시 미간을 찌푸리며 화를 냈다. 주육낭이 예를 표한 후 꿇어앉았다.

“무슨 일입니까?”

주육낭이 물었다. 속으론 이미 답을 알고 있었지만.

“그 바보가 진 부인을 시켜 여종들을 내쫓았다지 뭐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주 부인이 말했다.

이럴 수 없을 것도 없지. 이러는 게 처음도 아니고. 주 노야 내외는 조 집사가 정 낭자와 그 시녀에게 우롱당한 일에 대해 잘 몰랐지만, 주육낭과 진 공자는 조 집사에게 소상히 들어 알고 있었다. 속 좁은 여인 같으니라고! 주육낭은 무릎 위에 올려 둔 주먹을 꽉 쥐었다.

“당장 찾아가겠습니다. 화가 났으면 저한테 풀 일이지 왜 주씨 가문에 맞선답니까.”

주육낭이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주 노야가 눈썹을 치켜뜨며 앉으라고 호통쳤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진 노태야의 병세가 가장 중요해.”

주육낭이 굳은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그때 여종 둘과 몸종 둘, 총 네 사람이 들어와 꿇어앉았다.

“가서 아가씨를 잘 모시고, 공손하게 예를 지켜라. 뭐든 시키는 대로 하고, 명이 없으면 움직이지 마.”

주 부인의 말에 네 사람은 네 하고 대답했다. 조 집사가 이들을 데리고 나갔다.

옷을 한 바구니 들고 힘겹게 문을 나서던 반근은 맞은편에서 총총걸음으로 다가오던 몸종들과 부딪칠 뻔했다.

“뭐야, 똑바로 보고 다녀.”

몸종들은 기분이 나쁜 듯 소리쳤다. 반근은 얼른 옆으로 비켜서며 고개를 숙이고 사죄했다.

“그 정 아씨는 왜 이렇게 시중들기가 까다로운 거야.”

“송 어멈 같은 사람들은 지근거리에서 부인을 모셔 제법 위신이 있는데, 말 한마디로 내쫓다니.”

쿵 하는 소리가 났다. 화들짝 놀란 두 몸종은 고개를 돌려 옷 바구니를 바닥에 떨어뜨린 반근을 쳐다봤다.

“언니들, 저기 그 정 아씨란 분이……·.”

반근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두 몸종은 반근을 힐끔 쳐다봤다. 그중 하나가 반근을 알아보고 옆에 있던 몸종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때 공자님이 같이 가겠느냐고 물으니까 진짜 따라오겠다고 하더래. 자기는 본디 주씨 가문 사람이라고 했다나.”

“아, 걔구나. 노부인께서 애초에 자기를 왜 사셨는지도 모르네.”

“그 속은 자기만 알겠지.”

두 몸종은 반근이 들어도 상관없다는 듯 수군거렸다. 반근은 더욱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불안에 떨었다.

“얼른 가자. 송 어멈처럼 재수 없는 일 당하기 전에.”

“그래, 난 쫓겨나서 섬주로 돌아갈 맘 없어.”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총총 걸어갔다. 반근은 눈물이 그렁한 채 몇 걸음 따라가다가 결국 걸음을 멈추고 멀어져가는 두 몸종을 쳐다봤다.

“아씨는, 아씨는 모시기 까다로운 분이 아니야. 아씨는 다정한 분이셔. 그저, 그저 그분께 잘해 드리기만 하면, 그분도 너희한테 잘해 주실 거야.”

결국 주저앉은 반근은 무릎을 끌어안고 흐느껴 울었다. 좁은 골목길에서 반근의 몸은 더욱 작아졌다.

한 번도 만들어 보지 못한 새로운 것을 만드는 일로 진씨 저택의 부엌은 부산스러웠다. 초겨울이라 참새가 많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사환들을 시켜 참새를 한 포대 잡아다가 여러 번의 시도 끝에 간신히 상에 올렸다. 정교랑은 한입 먹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씨, 입맛에 안 맞으세요?”

시녀가 얼른 물었다.

“난 또, 경성의 대부호라기에, 부엌이 훌륭한 줄 알았네. 그냥 돈 좀 있는 집 정도지, 제대로 된 음식을 할 수준은 아니야.”

거기까지 말한 정교랑은 시녀를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네 집만도, 못하네.”

정교랑의 말에 시녀가 헤헤 웃었다.

“아씨, 제 집이 아씨 집 아닌가요?”

정교랑은 시녀가 말을 알아들었단 걸 눈치채고 다시 한번 입꼬리를 올리며 잠자코 있었다. 정교랑은 죽과 순무채를 느릿느릿 먹은 후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탁자에 있는 참새는 건드리지도 않았다.

“참새 몇 마리만 더 다오.”

이 태의가 빈 접시를 가리키며 말했다. 옆에 있는 아이는 참새 한 마리를 들고 맛있게 뜯어 먹고 있었다. 얼른 대답한 후 밖으로 나가던 여종이 도로 들어왔다.

“정 아씨께서 오셨어요.”

이 태의는 먹던 걸 내팽개치고 얼른 손을 쓱쓱 닦으며 일어섰다. 이 태의가 아이를 발로 툭 차자 아이는 못내 아쉬운 듯 손가락을 쪽쪽 빨며 따라왔다.

“아버지, 아버지.”

진소가 침상 옆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부친을 불렀다.

“정 낭자가 왔습니다.”

진 노태야가 희미한 의식 속에서 눈을 뜨고 흐리멍덩한 눈을 이쪽으로 돌려 어두운 옷을 입고 침상 옆에 꿇어앉은 여인을 쳐다봤다. 컴컴한 방 안에 어두운 옷을 입고 있는데도 여인은 유달리 눈에 띄었다. 여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단정히 꿇어앉아 있었다. 그날 마차의 휘장을 들어 올렸을 때 보였던 얼굴처럼.

“낭자, 내 병을 치료할 수 있겠소?”

진 노태야가 몸을 일으키려 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치료할 수 있어요. 다만……·.”

‘다만’이라는 말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이 낭자는 참 일도 느리고 말하는 것도 느리고, 답답해 죽겠어!

“그때보다, 값이 좀 비싸요.”

정교랑이 말했다.

창과 문이 활짝 열려 밝아진 진 노태야의 방에는 예전 같은 어둡고 음침한 분위기를 찾을 수 없었다. 정교랑이 함에서 금침을 꺼내자 옆에 있던 이 태의가 머뭇거렸다. 어제는 일이 급하여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쳐도, 오늘까지 옆에서 보는 건 도리가 아니지 않을까?

“정 낭자, 내가 자리를 피해 줘야 하오?”

이 태의가 물었다. 진 노태야 같은 불치병엔 본인만이 아는 비기를 쓸 터인데 다른 의원 앞에서 함부로 보여 줄 순 없지 않은가. 어린 후배야 먼저 입을 열기 어렵다지만 선배로서 규율을 무시할 순 없었다.

“괜찮아요.”

정교랑의 말에 이 태의는 몹시 기뻤다.

“봐도, 배울 수 없거든요.”

정교랑이 말을 이었다. 거 말 좀 안 쉬고 단숨에 할 수 없나? 이 태의의 얼굴이 굳어졌다.

“낭자, 누구 문하에서 배웠소?”

이 태의가 또 물었다. 천하에 이름난 명의를 대부분 아는 이 태의였기에 누가 키운 제자인지 궁금해졌다. 정교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기억이 안 나요.”

기억이 안 난다고? 이게 무슨 말이야? 말하기 싫으면 말 것이지, 참. 이 태의는 옷소매를 떨치며 한쪽 옆에 앉았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오해를 사든 말든 정교랑은 개의치 않았다. 처음에는 온전하고 상세한 말을 할 수 없음에 초조해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습관이 됐다.

알아들을 마음이 있으면 알아들을 테고, 그게 아니라면 뭐라 말하든 못 알아들을 테니 내버려 두자. 정교랑이 손을 뻗자 시녀가 얼른 소매를 걷어 주었다. 진소 역시 침상에 있는 부친의 옷을 벗겨 주었다.

“어제는, 의식이 없어서, 통증을 못 느끼셨어요.”

장침 하나를 꺼낸 정교랑이 진 노태야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정신이 온전하니, 아프실 거예요.”

진 노태야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낭자,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못 느끼는 게, 가장 고통스럽다오.”

진 노태야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야, 생각일 뿐이죠. 진짜 고통이 느껴지면, 그렇지 않을걸요.”

말을 마친 정교랑이 침을 찔러 넣었다. 부친의 머리맡에 꿇어앉아 있던 진소는 부친이 내지르는 비명을 똑똑히 들었다. 고통을 못 이긴 얼굴은 금세 일그러졌고, 내려놓았던 두 손은 비단 이불을 꽉 움켜쥐었으며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너무 아프군. 진소는 저도 모르게 손을 꽉 쥐었다.

이 태의도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이 태의는 정교랑이 침을 놓는 방법을 보며 그 힘을 가늠했다. 봐도 배울 수 없다니. 흥, 이 세상에 못 배우는 일이 어디 있어? 하지만 아무리 봐도 도무지 가늠이 안 됐다. 가볍고 편하게 침을 놓는 듯 보이지만 어느덧 여인의 이마에도 땀이 맺혀 있었다.

진 노태야는 침 24개를 다 놓을 때까지 버티지 못하고 절반쯤 놨을 무렵 의식을 잃었다. 진 노태야가 의식을 되찾았을 무렵 정교랑은 침을 정리하며 긴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아무래도, 감각이 없는 게 낫죠?”

정교랑의 물음에 진 노태야는 쓴웃음을 지었다.

“살려고 애쓰긴 싫고 죽는 건 또 아쉬워 비통하다더니.”

정교랑은 진 노태야의 말에 입꼬리만 살짝 올릴 뿐 대꾸하지 않았다.

진 노태야가 가냘픈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낭자, 만약 그때 내가 치료를 부탁했으면 이렇게 해 줬을 거요?”

한쪽 옆에 있던 진소와 진 사노야 등은 정교랑을 향해 눈짓을 했다. 병자에겐 위로가 필요하다는 것쯤은 의원이라면 응당 알고 있으리라.

“그럴 리가요. 그때는 침을 놓을 필요도 없었어요. 황주 세 잔에 환약 하나면, 충분했죠.”

충분했다니. 진소 형제는 시선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아니구나.”

정교랑이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 입을 열자 진 노태야가 기대에 찬 눈길로 바라봤다.

“황주 두 잔이면 됐겠네요. 그땐, 이미 한 잔을 드린 후였잖아요.”

낭자, 참 친절도 하시구려. 진소와 진 사노야는 정교랑을 보며 무언가를 말하려다 삼켰다. 정교랑이 나가는 모습을 보며 진씨 부자는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고, 곧이어 약이 들어왔다. 진소 형제가 약시중을 들었다.

“저 낭자를 잘 대해 줘라. 한순간 실수로 뭘 놓칠지 아무도 몰라.”

진소 형제는 알았다고 했다. 무언가 떠올랐는지 진 사노야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건 주씨 가문이 더 절절히 느낄 겁니다.”

진 노태야는 깨어난 지 얼마 안 되었기에 이와 관련된 얘기를 듣지 못했다.

“저 낭자의 내력에 관해 소상히 말해 봐라.”

진 노태야가 말했다.

조 집사가 여종 둘, 몸종 둘을 데리고 진씨 저택의 문으로 들어서자, 맞은편에서 막대기와 그물을 든 사환들이 뛰어왔다.

“화신묘(火神廟: 불의 신을 모시는 사당)로 가자. 그쪽 뒤에 많아.”

“서쪽 시장에 빈집이 많잖아. 거기가 더 많을걸.”

사환들은 길도 제대로 안 보고 떠들어대다가 하마터면 조 집사와 부딪힐 뻔했다.

“너희 뭐 하는 거니?”

조 집사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참새 잡으러 가요.”

길을 안내하던 사환이 헤헤 웃으며 대답했다. 참새를 잡으러? 지금 이런 때에? 원, 짓궂기도. 진씨 가문은 아랫것을 단속하는 사람이 없나? 아무리 집안에 우환이 있어 다들 어수선하기로서니 너무 난장판이네.

정교랑의 거처로 온 조 집사는 또 제지당했다.

“아씨께선 주무시니까, 잠시 기다리세요.”

시녀의 말에 여종은 저도 모르게 하늘을 쳐다봤다. 아침도 아니고 저녁도 아니고, 오수에 들 시간도 아닌데 무슨 잠을 자? 사람을 치료하러 왔으면서 어떻게 집에서보다 더 편히 지내? 이래도 되는 거야?

여종들은 저도 모르게 조 집사를 쳐다봤다. 조 집사는 알았다고 공손히 대답하고는 초조한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으며 회랑 아래에 차분히 꿇어앉았다.

“누이도 고생이 많을 텐데 들어가서 쉬어.”

조 집사가 웃으며 말했다. 조 집사는 집안 부인들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여종들에게도 이토록 깍듯하게 대한 일이 없었다. 주씨 가문에서 온 여종들과 몸종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얼른 함께 꿇어앉았다. 다행히 이번에는 전처럼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됐다. 얼마 안 가 정교랑이 잠에서 깼기 때문이다.

“그자들이 뭘 몰라 아씨께 대들었기에 팔아 버렸습니다.”

조 집사가 회랑 아래에 꿇어앉아 말했다. 문이 열려 있기에 고개를 살짝 들자 그 안에 앉아 물을 마시는 정교랑이 보였다.

“새로 뽑은 자들을 데려왔습니다.”

조 집사가 말을 이었다. 여종들과 몸종들이 얼른 앞으로 몇 걸음 나와 정교랑에게 예를 표했다.

“알았네.”

정교랑의 말에 조 집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더 필요한 게 있으면 편히 말씀하십시오.”

그 말에 정교랑은 조 집사를 힐끔 쳐다봤다.

“사야 할 물건이 좀 있네. 내 시녀를 함께 데리고 가게.”

정교랑의 말에 조 집사는 기뻤다. 데려가라는 뜻은 곧 돈을 쓰라는 말이다. 조 집사는 돈 쓰는 게 겁나지 않았다. 도리어 정교랑이 자신들의 돈을 쓰지 않을까 봐 걱정이었다. 좋아, 좋아. 조 집사는 시녀를 데리고 진씨 저택의 문을 나섰다.

“옷을 지을 천을 사야 해요.”

시녀가 손에 든 목록을 보며 말했다. 정교랑은 침을 놓을 때마다 옷이 땀으로 푹 젖었다. 원체 옷을 간소하게 입기도 했거니와 경성으로 올 때 가져온 두세 벌이 전부라 갈아입을 옷이 턱없이 부족했다.

“내 불찰이구나, 내 불찰이야. 집에 침모가 있으니 데려다주마.”

조 집사가 말했다. 사내가 이런 일까지 살필 생각이 났을 리가. 여인들의 일은 여인이 나섰어야지.

셋째 아씨가 성 밖의 백림사에 갈 때가 떠올랐다. 부인은 새벽이슬이나 비에 옷이 젖을까 염려하여 몸종과 어멈에게 갈아입을 옷을 넉넉히 챙기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역시 가족이 최고라니까. 어미 없는 아이는 참 딱하기도 하지. 그런 생각이 들자 조 집사는 등에 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지금껏 당한 거로 부족한가? 쓸데없이 나서기는. 시녀가 입을 열었다.

“됐어요. 아씨의 옷은 간단하거든요. 직접 지으신대요.”

그 바보가 바느질도 해? 옷을 직접 만든다고? 조 집사는 떨떠름한 생각이 들었다.


진씨 저택의 오후는 더없이 평온해 보였다. 죽음의 기운이 무겁게 내려앉아 조용했던 예전과는 사뭇 다른 고요함이었다. 진 노태야가 의식을 회복하고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진씨 저택은 한가롭고 평안해졌다.

햇빛이 좋은 날, 정교랑은 회랑 아래에 앉아 있었다. 팔걸이 책상에 기대 한 손으로는 머리를 짚고 한 손으로는 손길 가는 대로 글자를 썼다. 여종과 몸종은 한쪽 옆에서 숨을 죽이고 앉아 있었다.

밖에서 마당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네다섯 살쯤 된 여자아이인데 겁을 먹은 듯 안을 힐끔 보고는 몸을 움츠렸다가 잠시 후 또다시 고개를 들이밀었다. 여종과 몸종은 뻔히 보면서도 못 본 척했다.

“단랑.”

정교랑이 불쑥 입을 열었다. 여자아이는 기뻐하며 바로 마당 문 뒤에서 걸어 나왔다.

“날 찾아오다니, 무슨 일 있니?”

정교랑이 물었다. 쪼르르 달려온 단랑은 나막신을 벗고 단정히 꿇어앉더니 정교랑을 보며 웃었다.

“아무 일 없어요.”

단랑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하여간 어린애들은 말을 가려서 할 줄 모른다니까. 여종과 몸종이 고개를 숙였다. 아무 일 없으면 뭐 하러 와. 아무렇게나 지어서 둘러대면 되지. 정교랑의 입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갔다.

“아무 일 없어야지.”

정교랑은 손을 바꿔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그 모습을 흥미롭게 쳐다보던 단랑이 물었다.

“언니, 뭐 하는 거예요?”

정말 어린애들은 거리낌이 없구나. 남이사 뭘 하든 뭔 상관이야. 괜히 바보를 비웃는다고 여기면 경을 칠 텐데.

“글씨 써.”

정교랑이 말했다. 책상 위에서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게 글씨를 쓰는 거라고? 그런 말은 어린애나 믿지. 한쪽 옆에 있던 여종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예상대로 아이는 그 말에 감탄했다.

“언니는 왼손으로도 글씨를 써요?”

단랑이 놀라 물었다.

“왼손이든 오른손이든, 다 손인데, 당연히 쓸 수 있지.”

정교랑의 말에 단랑은 깨달음을 얻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참, 맞네요. 그렇죠. 난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단랑이 말했다. 왜냐면 넌 그냥 아이니까, 바보가 아니라. 여종과 몸종은 머리를 더 깊숙이 수그려 넣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이 바보는 정말 병이 나은 거 맞아? 아직 아닌 건가? 왜 바보 같은 말만 늘어놓는 거야. 그 시녀는 왜 안 오는 건지. 몸종과 여종은 불안했다.

정교랑이 손님인 단랑과 환담을 나누고 있던 시각, 진소도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사내와 함께 진 노태야의 방에서 나온 진소는 객청으로 들어와 앉았다.

“정말 다행일세. 폐하께서 마음을 많이 쓰셨네.”

사내는 기쁜 얼굴이었다. 진소가 예를 표하며 목멘 목소리로 말했다.

“신하 된 자로서 폐하께 근심을 끼치는 죄를 지었군.”

“이게 어떻게 자네의 죄겠나.”

사내는 손을 뻗어 진소를 붙잡아 일으키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으셨으니 됐네, 나으셨으니 됐어.”

진소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어디서 모셔 온 의원인가.”

사내는 호기심이 생기는 듯 물었다.

“강주 사람인데 부친과 길에서 한 번 만난 인연이 있네. 그때 숨은 병이 있다고 짚어 줬다더군. 물론 부친께서는 몰랐지만.”

진소는 참으로 다행이라는 투로 말했다.

“아, 대단한 자일세. 잠깐 보고도 숨은 병을 알아내는 신의라니.”

사내가 놀라워했다.

신의라고? 신기하긴 한데 어딘지 모르게 기괴하단 말이지. 진소는 웃으며 잠자코 있었다. 뭐라 대꾸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편이 더 정확했다.

“한번 볼 수 있겠나?”

사내의 물음에 진소는 머뭇거렸다.

“날 보겠다고요?”

정교랑이 앞에 있는 진소를 보며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요?”

진소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자는 내 동료입니다. 교분이 두터운 사이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죠?”

정교랑이 진소의 말을 끊으며 묻자 진소는 말문이 막혔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닙니다.”

서둘러 해명하려는 진소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이 낭자는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는 장난꾸러기처럼 괴팍하단 말이지. 뭐든 자기 맘대로고 다른 건 전혀 고려하지 않아. 하지만 장난꾸러기가 맞는다 한들 별수 있나?

“낭자가 신묘한 의술을 가졌다는 소문을 들어 얼굴을 익히고 싶답니다.”

진소가 말했다.

“난 얼굴 익히고 싶지 않아요. 쉬어야겠어요.”

정교랑은 자리에서 일어섰고, 진소는 땀을 닦으며 돌아갔다.

“정 낭자가 침을 놓은 후 많이 고단했나 보군. 공교롭게도 자러 갔다지 뭔가.”

진소의 해명에 사내는 개의치 않고 허허 웃었다.

“노태야의 병이 중하지, 노태야의 병이 중해. 나중에 보세나.”

사내가 일어서며 작별을 고하는데, 진소가 사내를 붙잡았다.

“모처럼 얼굴을 보지 않았는가. 근심이 사라졌으니 우리도 한잔해야지.”

진소가 한숨을 쉬며 사내의 팔을 툭툭 쳤다.

“오랫동안 쌓인 근심을 털어놓고 싶기도 하고.”

집안일이며 정사며 온갖 근심 속에 하루하루를 고통스럽게 보내는 진소였다. 사내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술을 준비해라.”

진소의 명에 사환은 네 하고 대답했다.

“아, 술안주로 그 참새를 한 접시 가져오너라.”

사내는 진소의 명이 흥미로운 듯 물었다.

“참새라니? 술안주로 쓸 만큼 고기가 되나?”

“그 오묘한 맛은 고기에 있지 않아.”

진소는 웃으며 팔을 잡아끌었다.

“글쎄 먹어 보면 안다니까.”

시녀는 주인장이 건넨 천을 이리저리 만져 보며 물었다.

“이게 가장 좋은 무늬 비단이라고요?”

“네, 맞아요. 낭자, 이게 요즘 가장 유행하는 천마 문양 비단이에요.”

가장 값비싼 것이기도 했다.

“이거로 주세요.”

시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주인장은 기뻐하며 점원들에게 손짓했다.

“그리고……·. 위금(緯錦)이랑 서금궁릉(瑞錦宮綾) 있나요?”

시녀가 쪽지를 꺼내 내용을 보며 말했다.

뭐라고? 주인장은 멈칫했다.

“위금이요? 서금궁릉? 그런 건 처음 듣는데요.”

“촉금(蜀錦: 사천 지방의 비단)이래요.”

시녀가 또다시 쪽지를 보며 덧붙였다.

“촉금이 있긴 한데 전부 경금(經錦: 경중직 비단)이라서요.”

시녀는 쪽지를 쳐다봤다.

‘있으면 좋고 없으면 아무거나.’

“그럼 저거로 주세요.”

시녀가 몇 가지 꽃문양을 짚으며 말했다. 천을 고르고 나자 더 이상 관여할 일이 없어진 시녀는 밖으로 나와 기다리며 거리를 살폈다.

“경성은 참 떠들썩하지? 시간이 촉박하지만 않았어도 구경을 좀 시켜 줄 텐데.”

조 집사의 말에 시녀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됐어요. 경성은 익숙해요.”

조 집사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익숙하다니? 처음 온 거 아냐? 정씨 가문 시녀가 경성에도 와 봤나?

“조 집사?”

한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 집사가 쳐다보고는 놀라 뛰어갔다.

“여섯째 공자님.”

조 집사는 얼른 예를 표한 후 가마 의자에 탄 소년에게도 인사했다.

“진 공자님.”

두 사람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조 집사가 뒤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 아씨의 물건을 사러 나왔습니다.”

정 아씨? 점포를 쳐다보던 주육낭의 눈길이 입구의 마차 옆에 선 여인에게 머물렀다. 가마 의자에 있던 진 공자도 따라서 쳐다보다가 몸을 곧추세웠다. 그럼, 저 사람이?

“반근 낭자.”

조 집사가 얼른 이쪽을 보며 소리쳤다. 저게 바로 수없이 생성된다는 그 반근? 진 공자가 흥미로운 듯 쳐다봤다.

“우리 여섯째 공자님이셔.”

조 집사가 친절하게 소개했다. 시녀는 살짝 놀란 듯 주육낭을 쳐다봤고, 주육낭도 시녀를 쳐다봤다. 시녀는 눈썹만 살짝 움직였을 뿐 예를 표하지 않고 딱히 공손한 기색도 없이 옅은 미소만 보였다.

“집사님, 시간도 꽤 됐는데 일이 있으면 보러 가세요. 전 이만 갈게요.”

시녀는 고개를 살짝 까닥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곧장 뒤돌아 마차에 올랐다. 조 집사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주육낭 역시 얼굴이 어두워졌다. 웃음을 터뜨린 건 진 공자뿐이었다.

“조 집사, 내 당부를 또 깜빡했군.”

조 집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또 괜한 말을 했군요.”

“우선 저 애를 데려다주게.”

주육낭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조 집사는 알았다고 한 후 마차를 따라갔다. 마차는 거리에서 유유히 사라져갔고, 그 시녀는 시종일관 고개 한번 돌리지 않았다.

“저 몸종, 어떤 것 같아?”

진 공자가 웃으며 물었다.

반근, 반근. 그냥 사람일 뿐이고, 그냥 이름일 뿐이다.

“원수라도 본 얼굴이네. 우리 집 돈을 쓰고, 우리 집 사람을 부리면서 왜 저리 흡족해하지?”

주육낭이 냉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진 공자는 웃음을 터뜨렸다.

“육낭, 원수의 돈을 쓰고 원수의 사람을 부리면, 당연히 흡족하지 않겠나?”

집으로 돌아온 주육낭은 화를 꾹 누르고 조 집사를 시켜 거리에서 무엇을 샀는지 주 부인에게 소상히 보고하도록 했다. 주 노야는 그런 일 하나 꼼꼼히 챙기지 못했다며 주 부인을 나무랐고, 주 부인은 억울했지만 본인이 생각해도 할 말이 없긴 했다. 두 부부는 잠시 말다툼을 하고는 답답한 마음을 안고 각자 자러 갔다.

주 부인은 측근 여종과 밤새 논의한 끝에 좋은 방법을 생각해 냈다. 이튿날 주 부인은 아침 일찍 직접 고방으로 가 새해 명절에 딸들 주려고 준비한 새 옷을 챙겨 여종들과 몸종들을 대동하고 진씨 저택을 찾았다.

우선은 노태야의 안부부터 묻는 게 도리였다.

“많이 좋아지셔서 일어나 앉으실 수도 있어요.”

진 부인은 주 부인을 맞이하며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고쳤단 말이야? 주 부인은 몹시 기뻤다.

“하늘이 노태야를 도우셨네요.”

“그러잖아도 댁으로 사람을 보내 말씀드리려던 참이었어요. 낭자를 한동안 여기 더 있게 하고 싶어서요. 낭자가 여기 있어야 우리도 마음이 놓이잖아요. 진료하고 약을 짓기도 편하고요.”

“저도 그리 생각했어요. 그래서 갈아입을 옷을 좀 챙겨 왔죠.”

주 부인은 뒤에 있는 몸종과 여종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애가 병 때문에 어릴 때부터 좀 성격이 괴팍했어요. 사람들이랑 왕래하는 걸 꺼리죠.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희와도 좀 서먹해요. 뭐가 옳고 뭐가 그른지 저희가 말하고 타일러도 안 들어요. 어릴 때부터 병을 앓았고 모친을 일찍 여읜 데다 혼자 외롭게 큰 점을 생각해서 좀 언짢은 게 있더라도 너그러이 이해해 주세요.”

주 부인은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간절한 표정으로 눈물까지 보였다. 정교랑이 주씨 가문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건 진 부인도 알고 있었다. 남의 집안일이라 함부로 넘겨짚으려 하지 않았는데 주 부인이 먼저 얘기를 꺼내니 오히려 마음이 풀리면서 가깝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진 부인이 차를 권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당치도 않아요. 부인, 차 드세요.”

‘차 들어요’와 ‘차 드세요’는 비슷한 말 같아도 그 친밀함의 정도에 차이가 있었다. 주 부인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주 부인은 살짝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후, 흡족한 표정으로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런데 이걸 어쩌죠. 정 낭자가 노태야께 침을 놓으러 가서요. 좀 기다렸다가 보고 가세요.”

“그럼 그냥 갈게요. 딱히 용건이 있어서 온 건 아니니 물건 건네고 아랫것들에게 당부 몇 마디만 하고 가면 돼요.”

주 부인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노태야의 치료에 전념해야 하는데, 오히려 절 보면 마음이 분산될 것 같아서요. 부인께서 보살펴 주시니 안심이 되기도 하고요.”

진 부인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일인걸요. 염려 놓으세요.”

-솔직-

같은 시각 진 노태야의 거처는 창을 활짝 열어 놓은 상태였고, 나무창도 반쯤 열려 있었다. 문은 반쯤 닫혀 있었다. 두 몸종이 온실에서 새로 꺾은 꽃을 가져다가 대청에 장식해 두었다. 꽃향기를 머금은 방 안에는 숯불 냄새와 약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몸이 마비된 후로 침상에서 대소변을 받아내며 났던 악취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꽃을 놓아둔 몸종은 방 안에 있는 윗전을 방해할세라 발소리를 죽여 살금살금 물러났다.

정교랑이 마지막 금침 하나를 천천히 돌렸다. 진소 형제는 옆에서 각각 부친의 어깨와 팔을 잡고, 부친과 함께 몸을 떨었다.

“다 됐어요.”

정교랑이 금침을 함에 넣었다. 진 노태야는 진소의 부축을 받아 일어났다.

“시원하군, 시원해.”

진 노태야가 소매로 얼굴에 난 땀을 닦으며 말했다.

“오늘 약을 드시면, 오후에는, 침상에서 내려와서, 몇 걸음 걸으실 수 있어요.”

정교랑의 말에 진씨 부자 셋은 깜짝 놀라며 기뻐했다.

“침상에서 내려올 수 있다고요?”

진씨 부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저 목숨이나 부지하길 바랐을 뿐 다시 걸음을 걷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 더구나 마비된 게 벌써 한참 전 일인데, 이렇게 빨리 침상에서 내려올 수 있다니?

“아, 물론, 내려오기 싫으면, 그냥 누워 계셔도 되고요.”

정교랑이 말했다. 진씨 부자는 정교랑의 괴이한 말투에 이미 습관이 된 터였다.

“고맙소, 낭자.”

진 노태야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앉은 채로 예를 표했다. 흥분한 진소 형제 역시 얼른 따라서 예를 표했다. 정말 잘됐군, 참으로 신묘해!

안에 벌여 놓은 옷을 보며 정교랑은 잠자코 있었다. 시녀는 손짓하여 여종과 몸종을 물린 후 정교랑이 옷을 벗도록 도왔다. 안에 입은 흰옷은 벌써 흠뻑 젖어 있었다.

“아씨, 주씨 가문에서 보낸 옷들이에요. 받을까요, 말까요?”

“받아.”

시녀는 고개를 돌려 바닥을 힐끔 보며 네 하고 대답했다.

진 노태야의 병세가 호전되면서 진씨 가문을 찾는 이들은 점점 많아졌다. 병이 중할 땐 문병을 안 와도 되지만, 병세가 호전됐을 땐 필히 문병을 와야 하는 법이다. 찾아오는 사람과 맞이하는 사람 모두에게 기쁜 일이었다.

“부인, 동 대인 내외께서 노태야의 병문안을 오셨어요.”

여종이 급히 들어오며 말했다. 벌써 안에 들어와 있던 부인 네 명은 그 말에 웃음을 지었다.

“세상에나, 이런 우연이. 동 대인 내외도 오셨구나.”

진 부인이 손님을 맞이하러 나갔다. 사실 우연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어제도 온 사람이 많았으니까. 진 부인은 웃으며 동 부인을 맞이해 대청으로 안내했다. 집사 부인이 진 부인에게 잠깐 할 얘기가 있다는 눈치를 보였다.

“부인, 오늘도 식사를 대접할까요?”

집사 부인이 나지막이 묻자 진 부인은 어쩔 수 없다는 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당장 갈 마음은 없어 보이더구나.”

안으로 들어온 동 부인이 공손히 예를 표했다.

“방금 보니 노태야께서 정말 많이 좋아지셨더라고요. 축하드려요. 큰일을 겪었으니 복을 많이 받으실 거예요.”

“맞아요. 이제 마음 푹 놓고 새해를 맞이할 수 있겠네요.”

다른 이들도 거들었다.

“그래요, 이제 솔직히 얘기해 보죠. 노태야의 병문안 말고 다른 용건은 없어요?”

진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진 노태야의 병세가 호전되면서 부친상의 근심을 던 남편 덕에 진 부인은 기분이 몹시 좋았다.

“참새를 먹고 싶어요.”

부인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하자 진 부인은 실소를 터뜨렸다. 진소가 노태야의 병문안을 왔던 벗이자 동료와 술을 몇 잔 걸친 후로, 요즘 집안에선 산초 소금 등자 참새볶음을 즐겨 먹었고 자연스레 주안상에도 자주 올랐다. 벗들은 그 음식을 무척 좋아했으나 아픈 사람을 두고 음식을 칭찬하며 치켜세우진 못했다. 그 음식을 먹으러 오는 것처럼 보일까 염려해서였다.

집으로 돌아가 똑같이 참새 요리를 만들어 보려고 했지만, 어째서인지 진씨 저택에서 먹을 때만큼 맛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맛이 자꾸 떠올라 저도 모르게 말을 꺼내다 보니 소문이 금세 퍼졌다. 호기심이 많은 이들은 일부러 밥때를 맞춰 병문안을 왔고 원대로 음식을 먹은 후에는 과연 찬양을 아끼지 않았다.

진씨 저택에서 만든 참새 요리에 관한 소문은 그렇게 점점 널리 퍼져나갔다. 진 노태야의 병세가 점점 좋아진 후에는 다들 어려워하지 않고 병문안을 온 김에 함께 모여 음식을 먹었다.

“아, 참.”

부인 하나가 갑자기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이번에 모셔 온 신의를 소개해 주실 순 없어요?”

그렇지. 먹는 것보다 신의가 더 중요하지. 진씨 가문에서는 진 노태야의 병세에 관해 함구령을 내렸으나, 경성에서 숨길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길어야 두세 달 버틸 거라는 소문이 돌았는데, 뜻밖에도 어디선가 모셔 왔다던 신의가 사나흘 만에 병을 고쳤다. 그만한 신의니 다들 서로 안면을 트지 못해 안달이었다. 진 부인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그건 내가 결정할 수 없어요.”

“결정하라는 게 아니라 소개를 해 달라고요. 의원이면 진료를 해야 할 텐데 계속 얼굴을 안 보일 순 없잖아요?”

동 부인의 말에 진 부인은 더욱 난처한 기색이었다.

“그게, 그러니까, 의원 같지 않아요.”

의원이 아니라고? 그럼 뭔데? 부인들은 어리둥절했다. 진 부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도 뭐라 말하기 힘든 처지라고 했다.

“어쨌든 진료를 안 받아요. 물어보는 사람이 있어도 완곡하게 거절하더군요.”

완곡하게 거절했다는 표현은 예의상 한 말이고, 실은 딱 잘라 거절했다.

“지금은 노태야의 병에 전념해야 하니 노태야께서 완쾌하시면 그때 다시 얘기하죠.”

부인들도 웃으며 얘기를 마무리했다. 진 부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하긴, 병을 치료하면 여기저기서 치켜세우며 떠받들 텐데 이런 일을 거절할 사람은 없겠지. 식사를 마친 후 손님들을 기분 좋게 배웅하고 난 진 부인은 마음이 편해졌다.

“단랑은?”

“정 아씨 쪽에 계세요.”

진 부인의 물음에 여종이 대답했다. 사실 이상한 건 또 있었다. 정 낭자가 조용한 편이긴 하지만 사람들과 살갑게 지내는 성격은 아니었다. 집안사람들은 아무도 가까이 다가가질 못했는데, 단랑만큼은 매일 정교랑에게 놀러 갔다. 열댓 살 먹은 낭자와 네다섯 살짜리 꼬맹이가 어떻게 어울려 논다는 건지.

“정 낭자한테 성가시게 굴지 못하게 해.”

여종은 알았다고 대답했다.

“정 낭자는 뭘 하는데?”

진 부인이 또 묻자 여종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옷을 만들어요.”


“언니, 정말 대단해요.”

단랑은 존경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교랑은 비단을 바닥에 쫙 펼쳐 놓고 손에 든 가위로 거침없이 비단을 갈랐다. 시녀는 한쪽 옆에서 헝클어진 실을 풀었다.

“그래, 내가 좀 대단하지.”

정교랑이 말했다. 문밖에 있는 회랑 아래에 공손히 앉아 있던 여종과 몸종이 눈을 마주쳤다. 또 시작이네. 크고 작은 둘이서 아주 쿵짝이 딱딱 맞아.

“언니, 오늘 점심에도 참새를 볶았는데, 전 한꺼번에 다섯 개나 먹었어요.”

단랑이 작은 손을 쫙 펼쳤다. 정교랑이 단랑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맛없던데.”

“응? 엄청 맛있는데요.”

단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참새는 말이지. 그러니까 참새를……·.”

정교랑은 가위와 바느질거리를 든 손을 멈추지 않으며 말했다.

“참새를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단랑은 이해가 안 가는 듯 물었다.

“부엌에 가서 전해. 거리에 가서, 생선을, 어떻게 만드는지 보라고. 그럼 알 거야.”

단랑은 신기하다는 표정이었다.

“네, 기억해 둘게요.”

신이 난 단랑은 또다시 정교랑을 쳐다보며 감탄했다.

“언니, 진짜 대단해요.”

“그래.”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언니, 아버지와 숙부님이 그러는데 언니는 신의래요. 언니는 신의예요?”

단랑의 물음에 정교랑은 손을 멈추고 똑바로 앉았다.

“내가 보기엔, 그보단, 찬모에 가까운 것 같아.”

정교랑은 고개를 숙이고 어느덧 겉옷의 형태를 갖춘 천을 보며 말을 이었다.

“아니면, 침모일 수도 있고.”


구주(衢州), 수왕부.

수왕은 벌써 입관 후 땅에 묻혔지만, 수왕부의 장례는 아직 끝나기 전이었다. 밤이 되자 내걸린 흰 등롱이 커다란 수왕부를 대낮처럼 밝혔다. 수왕비가 있는 대청의 문밖에는 시종들이 늘어서 있었다.

“군왕.”

예를 갖추며 인사하는 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오자, 시립해 있던 시종들이 술렁였다. 흰 상복에 흰 띠를 묶은 소년이 성큼성큼 들어오자 옷깃이 바람에 날렸다. 소년은 듬직한 체구에 엄숙한 표정이었는데 눈 주위가 빨갛고 초췌한 기색이 역력했다.

회랑 앞에 꿇어앉아 있던 시녀 둘이 손을 뻗어 문을 열자 문 안에서 빛이 쏟아져 나왔다. 소년이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군왕.”

남녀가 양옆 두 줄로 꿇어앉아 있었다. 나이가 어린 사람도 있고 많은 사람도 있었지만 다들 상복을 입고 꿇어앉아 일제히 예를 표했다.

수왕은 친왕(親王)이었기에 그 자손에게는 국공(國公)의 지위만 세습됐다. 하지만 진안 군왕은 황제에게 특별히 책봉을 받은지라 같은 형제자매라 할지라도 엄연히 신분이 달랐다.

성큼성큼 걸어들어온 진안 군왕은 정중앙에 꿇어앉아 우선 수왕비에게 예를 올리고 형제들에게 예를 표했다.

“그래. 한 식구끼리 서먹하게 이러지 말자.”

수왕비의 말에 자녀들은 일어나 앉았다.

“종낭, 듣자니 어젯밤에 밤새 부왕의 위패를 지켰다며?”

수왕비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소년을 바라봤다.

“다시는 그러지 마라. 먼 길을 달려와서 사흘을 통곡했잖니. 그러다 몸이라도 상하면 폐하께 어찌 말씀 올리려고.”

“낳아 주시고 키워 주신 부모님의 은혜를 갚을 길이 없으니, 실로 괴로울 뿐입니다.”

진안 군왕은 목멘 목소리로 엎드려 말했다. 수왕비는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았다.

“어서 일어나거라. 그런 말은 됐어.”

저쪽에 있던 형제들이 자리를 내주자 진안 군왕은 예를 표한 후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실내는 다시 숙연해졌다.

“부왕께서 안 계신다고 해서 공부를 게을리해선 안 된다.”

수왕비의 말에 자녀들은 네 하고 대답했다. 수왕비가 무언가를 더 말하려고 했다. 이런저런 당부일 게 뻔했다. 수왕비가 막 입을 열려는데 밖에서 또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

그 소리와 함께 소년이 들어왔다. 상복 차림의 소년은 열셋쯤 된 나이에 진안 군왕과 생김이 비슷했다. 소년이 들어오자 자리에 있던 수왕비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소년은 예도 생략한 채 곧장 수왕비 앞으로 가 앉았다.

“황낭, 또 어디 갔었어? 이제야 돌아오다니?”

수왕비가 소년의 어깨를 주물러 주며 자애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어머니, 고방에 갔었어요. 부왕께서 제게 주신 그 서화를 찾으려고요. 전에 제가 꾀를 부리자 부왕께서 경고의 의미로 서화를 주셨는데 제가 일부러 숨겼거든요. 이제 부왕께서 안 계시니, 제가……·.”

거기까지 말한 소년은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목이 메는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수왕비는 이미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착하기도 하지. 부왕도 네 마음을 아실 거야. 슬퍼하지 마라.”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제야 안을 둘러보더니 진안 군왕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형님.”

소년이 일어나 예를 표하자 진안 군왕도 미소로 답례했다. 잠시 한담을 나눈 후 진안 군왕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 봐. 일찍 쉬어야지.”

수왕비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집에서 서먹하게 굴 것 없어.”

진안 군왕은 고개를 숙이고 감사를 표한 다음 형제자매들에게 작별을 고한 후 밖으로 나왔다. 문이 닫히면서 시선이 가려졌지만 안에서 들리는 웃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어머니, 어머니도 쉬셔야죠.”

“형님, 어젯밤에 누가 내 옥지팡이 가져가는 거 봤어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서먹한 분위기였던 형제자매들이 정답게 이야기를 나눴다. 진안 군왕은 대청을 등진 채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군왕?”

회랑 아래에 있던 여종이 나지막이 불렀다. 진안 군왕은 고개를 돌려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안쪽을 향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 뒤돌아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찌나 씩씩하게 걸어가는지 왕비 처소의 문밖에 있던 시종들은 뛰다시피 걸어야 간신히 걸음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는 듯 계속 앞을 향해 직진했지만, 두려움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발걸음이었다. 뒤따르던 시종은 진안 군왕이 먼저 걸음을 멈출 때까지 찍소리도 못하고 숨을 죽였다.

“참.”

진안 군왕이 사방을 둘러봤다.

“내 거처가 어디지?”

진안 군왕은 또다시 활짝 웃었다. 옆에 달아 놓은 흰 등롱이 진안 군왕의 하얀 이를 비췄다.

“내가 너무 어릴 때 떠났어. 집은 여전히 그대로인데 기억이 안 나네.”

시종은 웃으며 길을 안내했고, 다 함께 한 방향으로 걸어갔다.

밤이 깊어지자 수왕부는 더욱 고요해졌다. 밤하늘의 별빛과도 같은 흰 등롱에서 알 수 없는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수왕부 일각에서 기이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올빼미의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사람의 울음소리 같기도 했지만 소리가 차츰 줄어들어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시종이 발로 툭 치자 널브러져 있던 사람이 데굴데굴 굴렀다. 실내엔 불빛이 적어 형체가 희미하게 보였다.

“아주 질긴 놈입니다, 군왕. 아직도 실토를 안 하네요.”

진안 군왕이 어두운 벽에서 나와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흰 상복을 입은 채, 손에 든 흰 손수건으로 입가를 가리고 있었다.

“충직한 놈이구나.”

진안 군왕은 손수건을 내리더니 언제나처럼 밝은 미소를 지으며 초주검이 된 사내를 바라봤다. 시종이 발로 툭 치는데도 그 사람은 이리저리 구르기만 할 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진안 군왕은 바닥에 있는 사람을 쳐다봤다. 희미한 등불 아래 얼굴이 어렴풋이 보였다.

“사실 말하든 말하지 않든 상관없다. 누가 날 해치려 했는지는 알 필요 없거든. 누가 날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안 거로 충분해.”

진안 군왕은 손을 내저었다.

“더 물을 것 없다. 마음대로 갖고 놀아라. 그래도 충절은 지키게 해 줘야지.”

시종은 웃으며 알았다고 했다. 곧이어 시종 두세 명이 나오더니 초주검이 된 사내에게 발길질을 했다. 희미한 등불 아래로 사내의 두 다리가 드러났다. 하얀 뼈가 그대로 보이고 핏줄과 살덩이가 조금 남아 있었다. 산 채로 가죽을 벗긴 듯했다.

이번에는 사내가 발길질에 정신을 차렸는지 신음을 내뱉었다. 시종 하나가 멱살을 잡으며 섬뜩한 기운을 내뿜었다.

“료 나리, 염려 마십시오. 군왕께서 대답 안 하셔도 된답니다.”

사내는 무언가 눈치챈 듯 힘껏 발버둥을 치며 상복 입은 소년을 바라봤다. 그 눈에는 공포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한발 늦었다. 시종은 사내의 혀를 단칼에 잘라 버렸다. 피가 확 튀자 진안 군왕이 뒤로 한걸음 물러서며 손수건을 가볍게 내저었다. 피비린내를 쫓기라도 하듯이.

료 집사가 까무러쳤다. 진안 군왕은 료 집사를 힐끔 쳐다본 후 뒤돌아 나갔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회랑 아래에 걸린 등롱을 치며 소리를 냈다.

소년이 쳐다본 밤하늘엔 조각달이 걸려 있었다. 등불에 비친 옥 같은 얼굴에 웃음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잠시 하늘을 쳐다보던 소년은 회랑을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흰 등롱 아래 흰 상복을 입은 형체가 더없이 쓸쓸한 모습으로 긴 그림자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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