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75)

“아씨, 우리가 어떻게 왔는지 왜 말씀 안 하셨어요? 노마님이 우리한테 돈 남겨 주신 거 없잖아요. 아씨께서 병을 치료할 줄 안다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 아니에요?”

“말해 봤자 안 믿을 거야.”

말해 봤자 안 믿을 거야. 주육낭은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반근을 내려다봤다. 눈앞에 여인 하나가 떠오르는 듯했다. 넋을 놓고 인형처럼 멍하니 앉아 있던 그날의 그 여인이 점차 또렷하게 보였다. 그 여인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일어섰다. 그 자신보다 더 큰 것 같았다. 말해 봤자 너희처럼 멍청한 인간들은 안 믿을 거야. 그녀는 조롱 섞인 웃음을 지으며 높은 곳에서 주육낭을 내려다봤다.

퍽 하는 소리가 났다. 주육낭이 휙 몸을 돌려 병풍을 향해 주먹을 내지른 것이었다. 서화가 그려진 6폭 병풍이 와르르 쓰러지자 밖에 있던 몸종들이 깜짝 놀라 들어왔다가 주육낭의 호통에 도로 나갔다.

“반근.”

진 공자는 멍하니 있는 몸종을 한숨을 쉬며 바라봤다.

“노야께 가서 진 상공한테 사실대로 말씀드려. 너희 아씨는 아직 강주에 있다고.”

반근은 네 하고 대답했다. 분노하는 주육낭을 보자니 두렵기도 하고 왠지 모르게 마음이 쓰리기도 했다. 반근은 고개를 숙인 채 총총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뭔가 잘못된 거 같은데.

“육낭, 이번엔 자네가 큰 잘못을 저질렀어.”

진 공자는 주육낭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잘못을 해?”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며 옷소매를 뿌리치고 자리에 앉았다.

“저 애가 나한테 말을 안 하는데 바보인지 아닌지 내가 어떻게 알아. 내가 무슨 신선도 아니고.”

주육낭을 보던 진 공자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내가 잘못 말했네. 자네는 잘못이 없고.”

진 공자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주육낭을 쳐다봤다.

“자네, 아주 큰 사고를 쳤어.”

마차는 곧장 현묘관 앞으로 가 멈춰 섰다. 마차를 몰던 노복과 시종이 마차에서 내리더니 한 사람은 마차에 타고 있던 노인을 부축하고 한 사람은 마차에서 커다란 대광주리를 꺼냈다.

“배고픈 병에 걸린 어르신이 또 오셨어요.”

문 앞에 있던 도동이 얼른 안으로 뛰어 들어가며 소리쳤다. 노인은 껄껄 웃고 수염을 쓰다듬으며 도관 안으로 들어왔다.

“우리 도관의 간식이요?”

영접하러 나왔던 손 관주는 영문을 모르겠는 눈치였다. 현묘관의 음식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유명해졌나?

사찰이나 도관에서 공양하는 음식은 본디 참배객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함이었지만 뜻하지 않게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워낙 유명하다 보니 돈을 내고도 밥 한 그릇 얻어먹기 힘들 정도였으며 아예 그 사찰의 대명사가 되기도 했다. 성 밖의 만녕사는 음식으로 이름을 날렸고 복주의 보타사는 간식으로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참배객이 끊이지 않는 유명 사찰이나 도관의 일이었고 작고 평범한 사찰이나 도관은 끼니 해결조차 힘든 상황이라 신도들에게 식사나 간식을 공양하는 일은 언감생심이었다.

“겸손하실 것 없소이다. 내 이번에는 거저 얻어먹자는 게 아니오. 자, 식재료는 내가 가져왔으니 수고스럽겠지만 조리만 좀 해 주시오. 이 늙은이의 배고픈 병을 치료해 주시면 고맙겠소이다.”

손 관주는 얼른 예를 표하며 사죄했다. 해황 등자라니, 먹어보기는커녕 이름조차 들어본 일이 없는데 대관절 어떻게 조리하라는 건지. 음식을 해서 신도들을 끌어들일 수 있다면야 기꺼이 그 고생을 마다하지 않겠지만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사부님, 전에 반근 언니가 만든 거예요.”

도동이 말했다. 경문을 읽던 여도사들도 밖으로 나왔다가 노인을 보고 기뻐하며 어찌 된 일인지 조잘조잘 떠들었다. 손 관주와 노인은 그제야 저간의 사정을 이해했다.

“은인이 여기 사셨구려.”

노인은 흠칫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도사님께서 말씀 좀 전해 주시오. 직접 만나 감사 인사를 하고 싶소이다.”

부엌에서 반죽을 하고 있던 반근은 얘기를 듣더니 의아해했다.

“어느 어르신이요?”

반근은 이해가 가지 않아 물었다.

“저한테 고맙단 인사를 한다고요?”

“그래요. 전에 그 어르신이 산에서 쓰러지셨을 때 사탕 귤을 주며 귀를 꼬집고 어쩌고 했던 거 기억 안 나요?”

여도사는 반근을 존경의 눈빛으로 보며 말했다. 진짜 착한 사람이네, 사람의 목숨을 구한 일마저 마음에 담아 두지 않다니. 몸종은 퍼뜩 깨달았다.

“아, 그분이요. 감사 인사를 받을 사람은 내가 아니에요.”

반근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아씨죠.”

그 바보? 멈칫했던 여도사는 진심으로 탄복했다. 정말 착한 몸종이네, 이토록 윗전을 잘 섬기다니.

“그리고 저번에 줬던 그 등자랑 게살인지 뭔지 그거도요. 어르신이 드시고는 엄청 좋아하셨어요.”

화제를 돌린 여도사가 기쁘게 말하며 대광주리를 앞으로 밀어주었다.

“이거 봐요. 반근 주라고 이것도 특별히 가져오셨어요. 저번에 먹은 음식에 대한 보답이래요.”

몸종은 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대광주리를 쳐다봤다. 그 안에는 둥그렇고 농익은 등자와 살이 통통하게 오른 게 몇 마리, 술 한 병이 들어 있었다.

“이게 목숨을 구해 준 일에 대한 보답은 아니에요. 그 어르신은 해황 등자를 반근이 만들었다는 걸 모르셨거든요. 이건 그냥 지난번 먹은 음식에 대한 보답이지, 지지난번에 목숨을 구해 준 일에 대한 보답은 아니에요.”

여도사가 얼른 설명했다. 지난번과 지지난번, 보답이면서 그 보답은 아니라니. 아리송한 말에 몸종은 웃음을 터뜨렸다.

“네, 알았어요.”

몸종은 대광주리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씨는 해황 등자가 먹고 싶다고 했지만 몸종이 산 아래로 내려가 구해 온 식재료가 별로라 입에 안 맞는다며 먹지 않았다. 그 후로 따로 언급이 없었기에 몸종도 잊고 지냈는데 때마침 이렇게 식재료가 굴러들어온 것이었다.

“잠깐만 기다려요.”

몸종이 말했다. 여도사는 대광주리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가는 몸종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는 눈길로 바라봤다. 산속의 날씨는 하루가 다르게 서늘해졌다. 전에 있던 대나무 문발을 치우고 한기를 막기 위해 종이로 된 문으로 바꿔 단 후였다. 여도사는 몸종이 문을 여는 동안 병풍 앞에 앉아 있는 여인을 얼핏 봤는데 책을 보고 있는 듯했다. 바보도 책을 읽나? 여도사는 좀 더 자세히 보려고 했지만 문이 닫히면서 시선을 가렸다.

“아씨, 이것 좀 보세요. 받을까요, 말까요?”

자초지종을 설명한 몸종이 공손히 물었다. 책을 내려놓은 정교랑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 대광주리를 쳐다봤다.

“어디 좀 보자, 물건이 어떤지.”

정교랑의 말에 몸종은 얼른 대광주리를 가까이 가져가 등자며 게, 술 등을 하나씩 꺼내 보였다. 정교랑이 하나씩 들고 살펴봤다.

“이게 괜찮구나. 이것도 괜찮고.”

마음에 드는 게와 등자를 한쪽 옆에 빼놓은 정교랑은 마지막으로 술을 집어 들어 냄새를 맡더니 얼른 한쪽 옆으로 치워 버렸다.

“술 때문에 사레 드셨어요?”

꿇어앉아 있던 몸종이 긴장한 채로 몸을 곧추세우며 물었다.

“아니, 냄새가 역해서. 이것도 술이라니.”

물그릇에 있던 물을 다 마신 노인은 작은 술 주전자를 들어 그릇에 조심스레 따른 다음 조금씩 천천히 마셨다.

“어르신.”

옆에 있던 도동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그 약이 잘 안 넘어가세요?”

노인은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약이라니?”

“그럼 어르신은 왜 그렇게 조심스레……·.”

도동의 말에 노인은 껄껄 웃었다.

“얘야, 맛이 끝내주는 술이라 아까워서 그런다.”

“노태야, 그런 술을 그리 많이 내주셨어요? 집에 있는 술을 다 털어 오셨잖아요.”

시종이 한쪽 옆에서 아까운 듯 불만을 토로했다.

“해황 등자를 만드는 데 술도 들어가요?”

“어리석은 것아, 당연히 술이 들어가지. 내가 먹어 봐서 알아.”

노인은 말을 이었다.

“아름다운 맛은 맛좋은 술과 어울려야 하는 법이다.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안 돼. 좋은 술만 있으면 아름답지 않거든.”

이쪽에서 그런 말을 나누고 있는 가운데 저쪽에서 여도사가 대광주리를 등에 지고 돌아왔다.

“또 없어요?”

“있어.”

도동이 얼른 묻자 여도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있다고? 근데 왜 안 보이지?

“반근 언니가 뭘 이런 걸 가져오셨냐며 해황 등자를 만들어 사례하겠대요. 조금만 기다리시면 직접 만들어서 갖고 오겠다네요.”

여도사의 말에 노인은 크게 기뻐하며 잘됐다고 손뼉까지 쳤다.

“그런데 말이죠.”

여도사가 대광주리를 건네며 말했다.

“술이 안 좋대요. 새 술을 가져와야 맛이 제대로 날 거래요.”

“술이 안 좋다고?”

노인은 멈칫했다.

“뭐야, 우리 집 최고의 술이라고요. 이게 안 좋으면 이 세상에 좋은 술 같은 건 없어요.”

시종이 발끈해서 따지자 여도사는 몸을 움츠리며 대답했다.

“나, 나도 그런 건 잘 몰라요. 반근이 말한 거예요. 이 술은 안 좋다고 새로 담근 술을 가져와야 맛이 날 거랬어요.”

요리를 할 때 쓰는 술은 새로 담근 술이 잘 어울렸다. 이 술이 안 좋다는 말이 아니라 이 음식에 쓰기엔 안 좋다는 뜻이었다. 퍼뜩 깨달은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로 조예가 깊다니 음식에 얼마나 정통한지 알겠군. 그러니 그렇게 훌륭한 맛을 내지.

“그랬군, 그랬어.”

노인은 얼른 시종을 재촉했다.

“냉큼 가서 새로 담근 술을 가져오너라.”

몸종은 방금 꺼내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해황 등자를 정교랑 앞에 조심스레 차려 놓았다.

“아씨, 이번엔 어떤지 드셔 보시겠어요?”

몸종은 기대에 찬 어조로 말했다. 정교랑이 젓가락을 들어 조금 짚더니 초간장에 찍은 다음 맛을 보았다.

“이 술도 새로운 맛이 조금 나는 정도네.”

정교랑은 고개를 가로젓더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번에도 아닌가? 몸종은 낙담했다.

“산골마을이라 술이 너무 형편없나 봐요. 제가 성에 나가서 좋은 거로 구해 올게요.”

몸종의 말에 정교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젓고는 손가락으로 밖을 가리켰다.

“내 입맛엔, 최고의 술도, 별다를 게 없구나.”

“그 어르신이요? 그냥 평범해 보였는데 최고의 술을 가져오셨단 말이에요?”

몸종은 이해할 수 없는 듯 물었다.

“근심 걱정이 없어야 음식을 따지는 법이야. 맛좋은 음식을 위해 공들여 고른 식재료를 들고 여기까지 직접 찾아온 걸 봐. 보통 사람이 그럴 수 있겠어?”

정교랑의 말에 몸종은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예전엔 부엌에서 밥 한 그릇만 얻어도 기뻐 어쩔 줄 몰랐으니 맛이 있고 없고를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아씨를 모시고 난 후에야 세상에 이렇게 다양한 음식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 말해 뭣하겠는가.

“그럼 아씨도 근심 걱정이 없는 분이겠네요.”

몸종이 웃으며 말했다. 정교랑은 무표정한 얼굴로 팔걸이 책상에 기대 문밖을 바라보며 말없이 있었다. 예전엔 애지중지 자라 사치스럽게 살았던 사람이었나 보다. 그러니 이렇게 입맛이 까다롭겠지. 그렇다고 근심 걱정이 없는 사람인 건 아냐.

흐릿하고 아득한 기억 속에서 또렷하게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모습이 어지러이 겹쳐졌다. 가까이 다가가 확실하게 보려고 할 때면 두 눈이 따갑고 쓰렸다. 그녀는 자신이 정교랑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누구일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지? 정교랑은 눈을 감았다.

“가서 그 어르신을 만나. 품위가 있는 분이니 같이 맞춰 드려.”

몸종은 아씨의 메마른 목소리 속에서 뜻밖에도 쓸쓸함이 묻어나자 내심 놀랐지만, 더 이상 물을 수 없어 네 하고 대답한 후 물러났다.

-일이 커지다-

“반근.”

눈썹이 가늘고 얼굴이 긴 몸종 하나가 웃으며 다가와 길을 막아섰다. 반근은 쭈뼛거렸다.

“내가 할게.”

몸종은 뭐라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반근의 손에 든 다반(茶盤)을 받았다. 반근은 몸종이 주육낭의 방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멍하니 서서 바라봤다. 이제 공자님은 자신이 방 안으로 들어오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

“파격적으로 아껴 주시더니.”

“원래 공자님을 가까이에서 모실 수 있는 건 수풍 언니네 셋뿐이었잖아.”

“말 걸어 주는 사람도 없는데 시치미 떼는 것 좀 봐.”

회랑 아래에 선 몸종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귓가로 들려왔다. 반근은 바늘방석에 앉은 듯한 불편했다. 떠나자니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고 남자니 여기 남으면……·.

“내가 무슨 여인네도 아니고 차를 마시겠다고 했으면 차나 마시는 줄 알 것이지, 이 따위 주전부리를 왜 가져와! 갖다 버려라!”

방 안에서 주육낭의 호통에 이어 접시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반근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더는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 없어 뒤돌아 총총 가 버렸다. 갈까? 어디로 가지? 갈 수 있는 곳이 어딜까?

“자네는 자기 자신한테 화가 났어. 차라리 형님들을 찾아가 한바탕 겨루면 좀 나을 거야.”

진 공자는 팔걸이 책상에 기댄 채 고개를 숙이고 작은 책자를 넘겨 보며 말했다.

“내가 왜 자신한테 화가 나?”

주육낭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진 공자는 대꾸하지 않고 있다가 풉 웃음을 터뜨렸다.

“뭘 웃어!”

주육낭은 심기가 불편한 듯 두 눈을 치켜떴다. 진 공자는 주육낭의 분노를 못 본 척 넘기고 공책 위의 한 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오늘 문 앞에서 여인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장씨 댁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다툼이 있었다고 했다. 아씨께서 돌을 가져왔냐고 물으셨다.’”

진 공자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재미있네. ‘돈’을 뜻하는 글자를 쓸 줄 몰라 ‘돌’이라고 썼어.”

주육낭은 흥 콧방귀를 뀌고는 자리에 앉아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육낭.”

진 공자는 주육낭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이 책자를 일찍 봤다면 이런 소동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거야.”

그 얘기를 꺼내자 주육낭은 초조해졌다.

“내가 무슨 소동을 일으켜? 젊고 혈기 왕성한 나이니 예쁜 여인에게 마음이 혹하는 게 당연하지. 저 아이가 마음에 들어 데려온 게 무슨 잘못이라도 돼? 그 애의 것을 빼앗은 일에 대해선 나중에 사과하면 그만이야. 몸종 여러 명 더 붙여 주면 되지, 뭐.”

진 공자는 피식 웃었다. 당시 사건의 경위를 듣고 나서 직접 반근을 데리고 진소의 저택으로 가 보니 진소의 부친은 과연 정신이 들자 반근을 알아봤다. 반근의 말이 틀림없음을 알게 된 주육낭은 곧장 강주로 가 정교랑을 데려오려 했지만 진 공자가 말렸다.

“지금은 자네가 가면 안 돼. 이미 그 여인의 심기를 건드렸으니 가 봤자 벽에 부딪힐 거야. 지금 진소 상공 댁에선 그런 사정을 기다려 줄 여유가 없으니 그 댁 일부터 해결하는 게 우선이야. 어쨌거나 이건 자네 집안 내부의 일이니, 밖으로 전해지면 일이 커져.”

그 말에 주육낭 등은 코웃음을 쳤다.

“일이 커질 게 뭐 있나? 일개 몸종을 가지고 뭘 어쩌겠다고? 그래 봤자 한낱 몸종일 뿐인데 무슨 일이 커져?”

진 공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여인이 뭘 어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것만은 확실해. 자네 주씨 가문은 책자의 왼쪽 장에 올라갔을 거야.”

진 공자는 손을 뻗어 책자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오른쪽 책장에는 기억해야 할 은혜가, 왼쪽 책장에는 기억해야 할 원한이 쓰여 있었다.

“우리가 뭘 어쨌는데?”

주육낭은 실소를 터뜨렸다.

“그냥 몸종을 데려온 것뿐이잖아? 그게 무슨 대수라고 원한을 품고 복수를 해!”

진 공자가 주육낭을 쳐다봤다.

“하나하나 가르쳐 가며 갈고 닦아 키운 든든한 오른팔을 난데없이 누군가에게 빼앗겼어.”

진 공자는 눈앞에 있는 책자를 보며 말을 이었다.

“입장 바꿔 자네라면, 오른팔을 잃은 원한이 사무치지 않겠어?”

진 공자는 손을 뻗어 자신의 지팡이를 움켜쥐었다가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책자에는 병으로 걸음조차 걸을 수 없던 소녀가 천천히 몇 걸음씩 걷고, 의식을 자주 잃던 소녀가 차츰 의식을 회복하고, 말도 못하고 웃을 줄도 모르던 소녀가 한 글자씩 내뱉으며 문장을 이루는 말을 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먹어야 할 약, 벌어야 할 돈, 해야 할 말, 가야 할 길, 피해야 할 위험에 대해 정교하게 계획을 짜고 하나하나 가르쳐 세심하게 인도했다. 진 공자는 반근이 정씨 가문 사람들 앞에서 얼마나 당차고 야무지게 굴었는지 묘사하던 주육낭의 말을 떠올렸다. 이어서 말이 느리고 행동이 굼떠 바보로 여겨지는 여인이 보였다. 바보일까? 진 공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여인은 어떤 모습이었어?”

진 공자가 불쑥 물었다.

“내가 어떻게 알아. 나중에 직접 보면 알 거 아냐.”

주육낭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자네 말대로 진 상공 댁 사람이 그 애를 데리러 가는 편에 우리 집사 하나만 딸려 보냈어. 그러니 우리 주씨 집안의 체면을 깎겠다고 안 오는 일은 없겠지.”

눈앞에 그 여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전에 봤던 멍한 얼굴이 훅 스쳐 지나가고 이번엔 비웃음을 짓는 듯한 표정이 나타났다. 제 딴에는 잘났다고 그 몸종을 데려왔던 건데, 그 여인의 눈엔 얼마나 바보처럼 보였을까. 주육낭은 차를 들고 벌컥벌컥 마시며 분을 삭였다. 진 공자가 그 모습을 쳐다봤다.

“이 차가 맛없어서 못 먹겠다고 한 게 그 여인이었군.”

진 공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차를 마시던 주육낭은 사레가 들렸다. 이 차, 앞으로 다신 안 마셔!

노인은 시종이 올리는 차를 받아 단숨에 비웠다. 노복이 손수건을 건네자 노인은 이마를 가볍게 닦고 눈을 들어 눈앞의 도관을 바라봤다.

“그래, 들어가서 쉬었다 가자.”

노인은 시종이 또다시 차를 따르는 모습을 보고 급히 막았다.

“따르지 마라. 뒀다 간식이랑 먹어야지.”

마당 문으로 들어선 세 사람은 곧장 정전으로 향했다. 도교를 믿지 않음에도 노인은 시줏돈을 바쳤다. 도동은 신이 나서 노인 일행을 곁채로 안내하고 자리를 내줬다.

“오늘은 싱싱한 생선을 얻어서 반근 낭자 주려고 가져왔다.”

노인은 웃으며 시종에게 눈짓을 했다. 시종이 얼른 대광주리를 건넸다.

“쌀도 가져왔고.”

노인이 덧붙였다.

“시주님, 여기서 식사하시려고요?”

도동이 웃으며 묻자 노인도 웃으며 대답했다.

“이곳 현묘관이 참 좋구나. 아침 일찍 산에 올라가면 땀이 흠뻑 나는데, 그냥 돌아가자니 좀 아쉽거든. 등산하고 나서 이곳에 들러 좀 씻고 밥도 한 그릇 얻어먹으면 기분이 어찌나 상쾌한지 현묘할 정도라니까.”

“무량천존.”

한쪽 옆에서 걸어 나온 손 관주가 웃으며 예를 표하자 노인도 얼른 답례를 표했다.

“시주님의 말씀 덕분에 우리 현묘관이 더욱 영험해질 듯합니다.”

얼마 안 가 도동이 간식거리를 손에 들고 들어왔다.

“반근 언니가 생선을 찌고 있다고 차부터 드시래요.”

노인은 기다렸다는 듯 신이 나서 바로 시종에게 차를 따르라고 한 후 간식을 집어 들었다.

“오, 이번엔 복숭아로구나.”

노인은 웃으며 쟁반에 있는 간식을 가리켰다.

“산 아래의 복숭아는 맛이 없다고 아씨가 안 좋아하셔서 반근 언니가 설탕에 굴렸대요.”

도동이 말했다.

“마음을 쓰면 세상 만물이 다 아름답지.”

노인은 손에 든 복숭아를 보며 감탄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게 마음을 쓰는 일이란다.”

과일 절임 하나에 뭐 그리 심오한 말을?

“배고픈 병도 진짜 병이네요.”

도동이 사저의 어깨에 달라붙어 소곤거렸다. 그때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맛있는 냄새가 퍼졌다. 수수한 옷을 입은 평범한 외모의 몸종이 미소를 지으며 들어왔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몸종을 보더니 웃으며 진심으로 반갑게 맞이했다. 도동은 몸종의 손에 들고 있는 찬합을 낚아채듯 받았고, 손 관주는 몸을 틀어 길을 내주었다.

“어르신, 오래 기다리셨어요.”

몸종이 예를 표하며 말했다. 몸종을 보고 노인이 웃으며 일어났다.

“당치 않소이다. 내가 낭자에게 폐를 끼쳤지.”

한쪽 옆에 있던 시종은 코를 벌름거리며 자기 댁 노태야가 누군가에게 이토록 온화한 모습을 보인 게 언제였나 생각해 봤다. 명문 귀족에서부터 하급 관리에 이르기까지 적잖은 사람이 예를 표하고 공손하게 대했지만 언제나 본체만체하던 노인이었다. 그런데 볼품없는 일개 시녀를 자리에서 일어나 친히 맞이하다니, 식탐에 눈이 멀어 체면 따위는 내던진 듯했다.

“금가아(哥兒: 남자 이름 뒤에 붙여 친근하게 부르는 애칭), 또 어디 가는 거야.”

춘란이 소리쳤다. 잽싸게 빠져나가던 소년은 두 걸음도 채 못 가 멈춰 서더니 앞쪽 마당으로 급히 들어오는 소녀를 보며 물었다.

“누나, 어쩐 일로 왔어?”

“지난번에 사공자께 어렵사리 말씀을 올려 말을 먹이는 일을 맡겼더니 왜 안 갔어?”

“안 간다니까, 나 바빠.”

하나뿐인 동생이 이러니 춘란은 기가 막혔다. 전에는 돕고 싶어도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지만 이젠 사공자 앞에서 어느 정도 발언권을 얻게 되어 기회를 틈타 좋은 일자리를 마련해 준 터였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 알고 보니 동생은 아예 가지도 않았다지 뭔가.

“너도 이제 다 컸잖아, 왜 이렇게 밖으로만 돌아.”

춘란은 동생의 팔을 붙잡으며 혼을 냈다.

“이러면 아버지, 어머니가 마음이 놓이시겠어?”

“나 돈 벌고 있어.”

금가아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그런 가축들 시중드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네가 어디서 돈을 벌어? 또 누구한테 속는 거겠지.”

춘란은 믿지 않았다.

“청매 누나네 건물 수리하는 곳에서 보조로 일한다니까. 하루에 1문(文)이나 받아.”

금가아는 웃으며 우쭐한 듯 말했다. 청매? 누구지? 멈칫했던 춘란은 그제야 청매가 떠올랐다.

“그 바보의 시중을 드는 애?”

소현묘관을 수리하는 일은 춘란도 알고 있었다.

“그건 대현묘관 관주가 맡아서 하는 일 아니었어? 청매가 거기에 말을 넣을 수 있나?”

“그건 나도 모르겠고 아무튼 청매 누나가 나보고 가서 하랬어. 그 일꾼들도 내가 구해 준 거야. 지난번 수리할 때도 내가 구해 준 건데 이번에 또 사람을 찾는다니까 십장이 고맙다며 따로 사례금도 줬어.”

금가아가 방 쪽으로 턱짓을 하며 말했다.

“못 믿겠으면 어머니한테 가서 물어봐.”

방에서 나오던 춘란의 모친은 그 말에 놀란 듯 물었다.

“뭐라고? 네가 사공자한테 말씀을 올려 금가아를 보낸 게 아니었어?”

“난 그 계집한테 돈이나 몇 푼 주라고 말씀드린 게 다예요. 그 바보를 살뜰히 보살펴 주면 반근한테 은혜를 갚을 수 있으니까요.”

춘란은 뭔가 이해가 안 가는 눈치였다.

“그런데 어쩌다가 금가아가?”

“그 손 관주라는 사람이 사공자의 체면을 봐서 손을 썼나?”

춘란 모친의 추측은 그랬다. 대현묘관 관주가 자발적으로 바보 낭자를 맡겠다고 나섰고, 그게 노야와 부인의 마음과 딱 맞아떨어졌다는 건 집안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러니 좋은 일을 따냈겠지. 듣기론 노야가 그 관주에게 한꺼번에 80냥이나 내주었다고 했다.

집수리에 돈이 들어 봤자 얼마나 들겠는가. 엄청난 콩고물이 떨어질 게 뻔했다. 수많은 사람이 한밑천 잡겠지만 손 관주를 잘 아는 이는 많지 않았다. 이쪽에서 뭐라 암시를 주기도 전에 손 관주는 벌써 사람을 구해 일을 시작했다. 꽤 알려진 인물들조차 미처 나서기 전이었으니 춘란 가족은 언감생심이었는데, 생각지도 않은 횡재가 그들 앞으로 굴러들어온 것이었다. 춘란의 모친은 지금껏 사공자의 시중을 드는 춘란의 체면을 봐서 일을 준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딸은 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니에요, 사공자께선 글공부에 열중하시느라 이런 속된 일엔 관여 안 하세요. 그리고 부인께서 아직 저한테 화도 안 풀리셨잖아요. 사공자께서 그런 말씀을 올리러 가셨다간 그 일을 못 받는 건 둘째 치고 저까지 야단을 맞을걸요.”

춘란은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다.

“청매 누나가 나한테 시킨 거라니까, 왜 안 믿냐고.”

금가아는 짜증이 나는 투로 말했다.

“아무튼 나 간다, 나 바빠. 곧 공사 끝나.”

금가아가 뛰어나갔지만 춘란은 붙잡지 못했다.

“청매?”

춘란은 실소를 터뜨렸다.

“걔가 뭐라고. 바보의 시중을 들면서 뭔 유세를 그렇게 떨어?”

3권에 계속

교랑의경 3권

차례

정교

중추절

복을 나눠 주다

무례

진료

거짓이 아닌

솔직

-정교-

현묘산으로 온 금가아의 눈에 소현묘관 앞에 서 있는 손 관주의 모습이 들어왔다. 손 관주 외에도 노인과 노복이 있었다. 그들은 인부 둘이 문 위에 있는 글자 두 개를 탁본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 자리에는 청매 누나도 있었는데 손 관주가 청매 누나를 보며 공손하고 상냥하게 웃고 있었다. 보라고, 청매 누나의 체면을 봐준 거라니까. 왜 사람 말을 안 믿어.

금가아는 옆쪽 문으로 들어갔다.

“반근 낭자, 사나흘 후면 수리가 얼추 끝날 거야. 아씨랑 같이 옮겨와도 돼. 가구랑 장식품도 다 도착했어. 더 필요한 게 있나 들어가 봐.”

몸종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봤어요, 관주님께서 잘 준비해 주셨어요.”

손 관주가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 아이가 좋다고 한 건 곧 그 아씨께서 좋다고 했단 뜻이니, 아씨께서 좋다고 했으면 좋은 것이다. 옆에 있던 노인이 의아해했다.

“내가 좀 들어가 봐도 되겠소?”

노인의 물음에 시종과 노복은 뜻밖이라는 표정이었다. 여인이 거주하는 도관에 뭐 볼 게 있다고. 더구나 이 도관으로 말할 것 같으면 평판이 형편없던 곳 아닌가. 노태야도 참. 손 관주가 얼른 몸종을 쳐다보자 몸종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세요.”

손 관주가 그제야 들어가라는 손짓을 하며 안내했다. 노인이 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갔다. 앞쪽엔 정전 하나뿐이라 별다를 게 없자 곧 뒤쪽 후원으로 갔다. 후원 마당에는 아직도 인부들이 남아 분주한 모습이었고 바닥에는 잡동사니가 어지러이 쌓여 있었다. 그런데도 노인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감탄했다.

소현묘관에 이토록 정교한 아름다움이 있었다니. 작긴 해도 운치가 있는 구도였다. 방 하나에 양쪽으로 곁방이 있고 마당에 작은 정자까지 갖춘 데다 푸르른 대나무와 돌길도 있었다. 딱히 별다른 장식물이 없는데도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석가산을 지나가자 본채가 보이고, 반쯤 열려 있는 종이문 사이로 바닥과 창문, 문 등을 걸레질하는 두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6폭짜리 미인 병풍과 긴 팔걸이 책상, 새하얀 깔개, 발이 긴 화로 등이 한눈에 들어왔다. 저게 이 몸종의 지휘 아래 꾸민 방이라고? 그러니 저 관주가 아까 그리 물어봤을 텐데.

어쨌거나 규방 여인의 거처인데 오래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라 노인은 한번 쓱 둘러보고는 밖으로 나와 고개를 돌려 산문을 바라봤다. ‘현묘관’이라고 쓰여 있던 글자는 지워지고 새로 탁본할 두 글자는 아직 색을 칠하기 전이었다.

“태평.”

노인은 소리 내 읽어 보았다. 좋은 이름이고 글씨도 잘 썼지만 노인의 마음은 왠지 모르게 태평하지 않았다. 아름답고 정교하다기보다는 처음 글을 배우는 어린아이가 쓴 글씨 같았지만 필획 하나하나는 더없이 현묘해 보였다. 노인이 아는 그 어떤 필체와도 다른 모습이었다.

“태평. 도사님께서 이름을 아주 잘 지으셨구려.”

노인은 웃으며 손 관주를 바라봤다. 멈칫했던 손 관주는 곧 노인이 ‘태평경(太平經: 도교 경전 중 하나)’을 떠올렸음을 눈치채고 얼른 웃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제가 지은 이름이 아닙니다. 제가 태평경을 자주 읽는 건 사실이지만 이름에 쓸 생각은 미처 못 했어요.”

손 관주가 몸종을 보며 말하자 노인은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 이해했다. 아까 본 그 마당을 이 몸종이 설계한 듯 보였으니 이름도 직접 지었겠지. 몸종이 웃으며 말했다.

“태평이란 이름의 경서도 있었군요. 그럼 태평이 그 경서에서 온 말이에요?”

태평이라는 말의 의미를 취했을 뿐 다른 뜻은 없었나 보군. 노인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의 도는 공평무사하여 선함을 칭찬하니 이는 곧 태평이라.’ 경서는 인간의 도리에서 왔으니 경서에서 그렇다고 하면 그렇겠지.”

몸종은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우리 아씨께서 좋아하시는 만두가 태평 만두거든요. 신기하네요.”

몸종이 웃으며 말하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몸종을 쳐다봤다. 무슨 뜻이지? 저 태평이란 이름이 그냥 태평이라는 만두를 좋아해서 붙인 거란 말이야? 그건 좀, 너무 속된 것 같은데.


중추절이 가까워지자 정씨 가문도 명절 준비로 바빠졌다. 하지만 이방의 분위기는 몹시 가라앉아 있었다. 밖에서 저녁 식사를 들여왔지만 마주 앉은 이노야 내외는 밥생각이 들지 않았다.

병주 자사에서 물러나 돌아온 이노야는 순리대로라면 벌써 진급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부에서는 도통 소식이 없었다. 아는 이에게 부탁해 몇 번이나 물어봤지만 이번엔 틀림없이 진급할 테니 걱정 말라는 소식만 돌아올 뿐이었고 사실상 직첩을 받기 전까진 모를 일이었다. 그러던 중 얼마 전에 드디어 확실한 소식이 왔는데 다름 아닌 내양(箂陽) 자사였다.

같은 자사라고 해도 병주는 인구 2만 호 미만의 하주(下州)였고 내양은 인구가 2만 5천 호 되는 중주(中州)였으니 정사품하에서 정사품으로 진급한 것이었다. 더구나 내양은 물자가 풍족하고 평화로운 땅이었다. 하지만 안 좋은 소식도 동시에 들려왔다. 이 자리를 탐내는 사람이 또 있다는 소식이었다.

“조정에 우리 편을 들어줄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에요. 은사인 장순 스승님이 태학에 계시다고 했잖아요. 그분이 나서서 천거하게 해 보세요.”

이부인이 말했다. 관직에 있진 않았지만 장순은 이름난 대유학자였다. 학당을 운영하며 길러낸 제자만 3천 명으로 명성이 자자한 분이었다.

“그렇소. 내 생각도 같소. 스승님께 서찰을 보냈으니 곧 소식이 오겠지.”

이노야가 말했다.

“스승님의 부친이 여기 계시잖아요. 마침 명절이 돌아오니 인사라도 가 보세요.”

이부인의 말에 이노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다만 노태야께서 손님을 안 받으시니, 원.”

이노야가 미간을 찌푸렸다.

“걱정이군.”

“그럼 여러 번 찾아가 봐요. 계속 안 만나 주진 않으시겠죠.”

“그래요, 밥부터 먹읍시다.”

이노야가 젓가락을 들며 말했지만 이부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왜 안 먹고?”

이노야의 물음에 이부인은 식탁 위의 음식을 보며 냉소를 지었다.

“내가 먹는 걸 고까워하는 사람이 있는데 뭐 하러 먹어요.”

또 무슨 일이지? 이노야는 영문을 모르는 눈치였다. 번번이 사달을 일으키던 그 바보도 내쫓았는데 왜 아직도 집안이 평안하지 않은 거야?


현묘관 안.

몸종은 세탁한 옷을 개키고 있었다.

“아씨, 그 어르신이 식재료를 안 가져오셨던데 뭘 드시고 싶으세요? 제가 이따 성에 다녀오려고요. 그 어르신이 태평 만두를 드시고 싶다고 하셔서 갖다 드리는 길에 채소랑 고기를 좀 사 올까 해요.”

몸종의 물음에 정교랑이 고개를 들었다.

“며칠째 안 왔다고? 아쉽네, 그분이 고른 과일이며 채소, 고기가 썩 괜찮았는데.”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다른 사람을 보내지도 않았어?”

정교랑이 물었다. 생각하고 말하는 게 느리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잠시 정교랑을 기다리던 몸종은 뜻밖에도 그런 말이 나오자 저도 모르게 풉 웃음을 터뜨렸다. 정교랑 본인은 웃는 일이 거의 없지만 이따금 남을 웃기곤 했다. 무엇보다도 자신은 웃지 않으면서 진지하게 말하는 게 핵심이었다.

“진지하게 말하는 건데.”

정교랑의 말에 몸종은 입을 가리고 웃었다.

“네, 네, 소인 안 웃을게요.”

그러면서도 몸종은 웃느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정교랑은 뭐가 그리 웃긴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소인은 아둔해서 채소며 고기를 잘 못 골라요.”

한바탕 웃고 난 몸종이 자책하듯 말했다.

“아둔한 건 아냐. 마음이 없을 뿐이지.”

“아씨, 소인은 꾀부린 적 없어요.”

몸종이 깜짝 놀라 얼른 해명했다.

“전부 정성 들여 고른 거예요.”

“그런 게 아니라.”

거기까지 말한 정교랑은 한숨을 쉬었다. 몸종은 무슨 말인지 몰라 근심 어린 표정으로 정교랑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방 안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손발은 그런대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됐지만 말하는 건 별로 나아지지 않았고 혀는 여전히 굳어 있었다. 서두르지 말자, 서두를 것 없어. 말은 많이 안 해도 돼, 할 수 있는 거로 충분해.

“넌 먹고 싶은 마음이 없고, 어떻게 먹어야 할지도 모르잖아. 그러니 어떤 게 좋을지, 어떤 맛을 내야 할지 안 떠오르지. 음식에 마음이 없단 거야. 네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정교랑은 고개를 들고 몸종을 보며 말했다. 몸종은 무슨 뜻인지 퍼뜩 깨닫고 눈시울을 붉혔다.

“아씨, 소인은 우둔해요. 아씨께서 설명해 주셔야 해요.”

몸종이 허리를 구부리고 절을 올리며 말했다.

“그것도, 네가 기꺼이 들을 건지에 달렸어.”

정교랑이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번엔, 마음을 써. 사람이 마음을 쓰지 않으면, 자기가 듣고 싶은 거만 듣거든. 한쪽 말만 듣는 거지.”

몸종은 정교랑을 보며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르침에 감사드려요, 아씨. 어떤 게 마음을 쓰는 건지 잘 알겠어요.”

몸종은 다시 한번 예를 표하고 일어나 똑바로 꿇어앉았다.

“그럼 마음을 쏟아 정성 들여 식재료를 고를 분이 없으니, 아씨께서 뭘 드시고 싶은지 마음을 쏟아 생각해 보세요. 소인이 마음을 쏟아 만들게요.”

정교랑이 몸종을 보며 다시 한번 입을 삐죽였다. 이번에는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웃는 티가 났다.

“마음을 쓰면, 다 맛있어.”

정교랑의 말에 몸종이 웃으며 일어났다.

“아씨, 기다리고 계세요.”

몸종이 웃으며 나갔다.

손 관주는 벌써 한나절을 방 안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식사를 가져온 제자들은 문밖에서 서로 눈치를 살폈다.

“사부님이 왜 저러시지? 산에서 내려오신 후로 계속 한숨만 푹푹 내쉬시네. 무슨 근심이라도 있는 것처럼.”

제자들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수리에 들어간 비용 때문인가?”

다른 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방을 꾸미는 데만 해도 건물을 수리하는 돈보다 훨씬 많은 돈이 들어갔잖아.”

제자가 소리를 낮춰 말했다.

“바보 주제에 뭘 그리 좋은 물건을 써?”

의아해하던 제자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무래도 이번에 도복을 못 바꿀 것 같아!”

제자가 불만스레 말했다. 어쩐지 사부님이 의복에 관해 일언반구 없으시더라. 그때 방문이 열렸다. 밖으로 나오던 관주는 곧 걸음을 멈추고 도로 들어갔다.

“사부님, 대체 무슨 일이에요?”

두 제자는 아예 따라 들어가서 물었다.

“우리 도관과 관련된 중대한 결정을 내리려고 하는데 그래도 될지 모르겠다.”

손 관주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무슨 일인데요? 말씀을 해 보세요. 같이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 봐요.”

제자들은 밥상을 차리는 일을 제쳐 두고 손 관주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잠시 뜸을 들이던 손 관주가 입을 열었다.

“우리 도관이 이름을 날릴 기회가 있거든.”

도관이 이름을 날리는 건 물론 좋은 일이었다. 두 제자가 얼른 물었다.

“사부님, 어떤 기회인데요?”

손 관주는 주저하다가 대답했다.

“식사 공양.”

두 제자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식사 공양으로 이름을 날리는 게 드문 일은 아니었다. 강주성만 해도 좋은 예가 있었으니 바로 성 서쪽에 있는 만녕사였다. 속세의 덧없음을 깨달은 유명한 숙수가 불문으로 귀의한 후 수행에 정진했는데, 부처님의 도움 덕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숙수의 음식 솜씨는 그 절에서 일취월장했다. 사찰 내의 승려들에게 칭찬을 받던 게 어느덧 사찰을 찾는 참배객의 입으로 번지더니 날로 명성을 얻어 지금은 식사 공양을 위해 사찰을 찾는 참배객들이 줄을 설 지경이 됐다.

식사를 공양하고 돈을 받는 건 아니었으나 공짜로 밥을 먹는 이는 거의 없다 보니 공덕함을 몇 개 더 놓아둘 정도였다. 이름을 날리자 사람들이 찾아오고, 사람들이 찾아오자 더욱 이름을 날리는 일이 반복되면서 지금의 만녕사는 참배객이 끊이지 않는 유명한 사찰이 됐다. 하지만 속세에 달관한 이름난 숙수는 쉽게 찾을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 만녕사가 잡은 기회는 얻고 싶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우리가 식사 공양을요?”

두 제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사부님, 이제야 간신히 기름기 들어간 음식을 먹게 된 마당에 누가 우리 음식을 먹고 싶어 하겠어요.”

“우리 솜씨로는 당연히 안 되지.”

손 관주가 문밖을 보며 말했다.

“그러니 배워야 해.”

배운다고?

“누구한테 배워요?”

제자가 물었다.

“반근 낭자 말이야.”

“반근 낭자가 한 음식이 정말 그리 맛있어요?”

제자들의 물음에 손 관주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너희는 그 어르신이 정말 등산하다가 힘들어서 쉬러 들어오는 줄 알았어? 반근 낭자가 가져오는 과일이랑 음식을 먹기 위해서야.”

제자들이 퍼뜩 깨달았다.

“하지만 반근은 곧 산 위로 옮겨 가잖아. 왔다 갔다 하며 음식을 가져오긴 힘들 거야.”

손 관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뭘 그런 일로 근심을 하세요. 반근 언니한테 가르쳐 줄 수 있냐고 물어보면 되죠.”

한 제자가 말했다.

“그래도, 될까?”

손 관주는 주저했다. 한나절 동안 고민하던 게 바로 이 문제였다.

“안 될 게 뭐 있어요. 반근 언니는 마음이 착하니까 분명 동의할 거예요.”

제자가 말했다. 반근이 착한 건 알지. 하지만 결정을 내리는 건 반근이 아니야. 손 관주는 잠자코 침묵을 지켰다.

“난 못 하겠어.”

손 관주가 중얼거림에 제자들은 이해가 가지 않는 듯했다.

“사부님, 뭘 어려워하세요? 반근 언니는 말이 잘 통하잖아요. 되든 안 되든 한번 물어보는 건데 뭐 어때요.”

“그러다가 언짢아할까 봐. 그럼 대현묘관도 이름을 바꿔야 할지 몰라.”

손 관주가 중얼거렸다.

8월 14일, 손 관주는 제자들을 이끌며 법회를 열었고, 정교랑과 몸종은 새로운 거처로 옮겨 왔다. 손 관주가 도동을 시켜 후원으로 가는 길을 지키게 했다.

“넌 얌전히 이곳을 지키고 부르지 않는 한 뒤쪽으론 절대 가지 마라. 단, 후원 청소엔 정성을 다해야 해.”

손 관주는 당부의 당부를 거듭했다. 대현묘관을 비워도 됐다면 아마 관주 자신이 태평궁으로 들어와 살았을 것이다. 그렇다. 이곳은 이제 소현묘관이 아니라 태평궁이라 불렸다. 하나의 산에는 하나의 도관만 있는 법, 이제 태평궁은 현묘관의 소속이었다.

손 관주는 산 아래를 쳐다보며 상쾌한 듯 숨을 토했다. 평생 이루지 못할 꿈인 줄 알았던 게 이제는 현실이 됐다. 지금은 정씨 가문 여식의 것이지만 어쨌거나 수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여인이니 머지않아 이곳을 떠날 것이다.

문밖에서 서성이는 손 관주의 모습이 회랑 아래를 청소하러 나왔던 몸종의 눈에 들어왔다. 손 관주가 들어올까 말까 망설이는 듯 보여 몸종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아씨는 일어나셨고?”

손 관주가 물었다.

“일어나셨어요.”

몸종이 웃으며 대답했다. 손 관주는 무언가를 말하려다 말을 삼켰다.

“지낼 만은 해? 더 필요한 거 있으면 내가 구해다 줄게.”

“좋아요, 아주 좋아요.”

손 관주의 말에 몸종이 대답했다.

“드시라 해라.”

문 뒤쪽에서 정교랑의 목소리가 들리자 몸종이 얼른 일어나 문을 열었다. 손 관주 역시 크게 심호흡을 한 후 네 하는 대답과 함께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 돈이 많이 들었죠?”

정교랑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 손 관주가 받아온 돈 중 도관 수리에 들어간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정교랑의 거처를 장식하는 일에 들어간 돈이 대부분이었다. 바닥에 깐 깔개며 침상, 창문의 휘장 등이 전부 새것으로 바뀌었다.

“당치 않습니다. 본디 낭자께서 얻으신 돈인걸요.”

손 관주가 얼른 대답했다.

“난, 사리에 밝은 사람이 좋아요.”

정교랑이 말을 이었다.

“잘했어요.”

칭찬인가? 손 관주는 은근히 뿌듯했다. 나이로 따질 것 같으면 자신이 이 소년보다 곱절은 많건만, 지금 이 순간 자신은 세상 물정에 어두운 소녀고 앞에 있는 이 소녀는 노회한 할멈 같았다. 손 관주는 실소가 나왔다.

“내가 뭐 도울 일이 있으면, 얼마든 말해요.”

정교랑의 말에 옆에 있던 몸종은 흠칫 놀랐다. 아씨 쪽에서 먼저 이렇게 말하는 건 처음이었다. 놀라기는 손 관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보다는 기쁨이 더 컸다.

“저는, 그러니까, 반근이 제 제자들에게 요리를 가르치게 하면 어떨까요?”

손 관주 역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몸종은 멈칫했다.

“요리를 배운다고요? 뭐 하시게요?”

몸종이 호기심을 못 참고 물었다.

“그 어르신께서 반근 낭자의 음식 솜씨를 좋아하시는데, 이제 낭자는 이쪽으로 거처를 옮기게 됐잖아. 계속 성가시게 할 순 없으니, 아무래도……·.”

손 관주가 쑥스러워하며 둘러댔다. 원하는 게 뭔지 직설적으로 말하기는 뭣하지 않은가.

“이름을 크게 알리고 싶어요? 조금 알리고 싶어요?”

정교랑이 손 관주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크게? 조금? 내가 여기 온 목적을 짐작하고 있는 건가? 손 관주는 더욱 불안해졌다.

“이름을 조금 알리고 싶은 거면, 도와줄 수 있어요. 조림, 볶음, 튀김 등의 조리법과 채소, 생선, 고기, 과일, 차, 술 등을 고르는 비법을 알려 주죠.”

정교랑의 말에 손 관주는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니까 그 음식들이 실은 반근의 솜씨가 아니었단 말인가?

“저 애 솜씨는 맞아요. 난 그저, 조언을 살짝 했을 뿐이죠.”

정교랑이 말했다. 살짝 조언한 정도인데, 그 노인이 삼시 세끼를 여기서 못 먹어서 안달이야? 손 관주는 흥분이 됐다. 말을 제대로 꺼냈구나!

이름을 조금 알리는데도 저리 많은 걸 알려 준다니,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릴 수 있겠네. 그럼 이름을 크게 알리려면……·.

“이름을 크게 알리고 싶으면, 아까 말한 것 중에 딱 하나만 골라요.”

정교랑의 말에 손 관주와 몸종은 또다시 어리둥절해졌다. 하나? 한 종류? 그런데도 이름을 크게 알릴 수 있다고?

“도사님.”

정교랑이 손 관주를 쳐다보며 말했다.

“무엇을 위해 수행하죠?”

무슨 말인지 퍼뜩 깨달은 손 관주는 순간 머릿속이 맑아지는 듯했다.

“도사님의 수행은, 큰 도와 작은 도를 위해서겠죠. 하지만 작은 도는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것일 뿐 주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경중을 구분하지 않고, 대소를 구분할 줄 모르면, 도는 멀어지는 법이지요.”

정교랑이 말했다. 그렇지. 여긴 도관이지 주점이 아니었다. 그녀는 수행을 원하는 것이지 명성을 원하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도사지 숙수가 아니었다. 명성에 눈이 멀어 정도를 잊다니. 식사 공양으로 엄청난 명성을 얻은들 현묘관은 무엇이 되겠는가. 명성만 얻었을 뿐 몸에 걸친 도복은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는가. 그리 웃음거리가 되면 명성이 얼마나 가겠는가. 이것저것 배워 이름을 조금 알리는 정도가 옳았다.

“감사합니다, 아씨.”

손 관주는 진심으로 머리 숙여 예를 올렸다. 정교랑은 손 관주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내게 고마워할 것 없어요. 고마워하려면 본인에게 해야죠. 내게 1척(尺)의 존경을 보내면, 나는 1장(丈: 1장은 10척과 같음)으로 갚는 게 도(道)입니다.”

한편 이노야는 장순의 고택에 벌써 세 번째 찾아온 참이었다. 지난번과는 달리 이번엔 다른 사내가 동행했다. 서른 남짓한 나이의 그 사내는 키가 크고 신체가 건장했는데, 서생 같은 옷차림에서 문관의 기운이 느껴졌다.

“노태야께선 집을 자주 비우시나 보네요.”

사내가 섬서와 감숙 지역의 말투가 묻어나는 말로 입을 열었다.

“옥곤 아우, 하필 때를 잘못 맞춰 왔군.”

이노야는 이곳 토박이 행세를 하며 거침없이 말했다.

“노태야는 늘 은둔을 좋아하시지. 스승님의 제자가 워낙 많다 보니 찾아오는 이도 적지 않거든. 그래서 일부러 피하시는 걸세.”

옥곤이라 불린 사내는 부러움의 눈빛을 담아 이노야를 쳐다봤다.

“대인은 이곳에 사시니 자주 뵐 수 있겠네요. 전 스승님께 3년을 수학하고 곧장 서북 지역으로 가는 바람에 스승님께서 상경하신 후론 벌써 몇 년째 통 뵐 일이 없었습니다. 이번에도 죄인을 호송하며 지나는 길에 잠깐 들른 거고요. 스승님의 고택을 본 것으로 충분합니다. 노태야를 귀찮게 해 드릴 순 없으니 이만 가죠.”

이노야는 다급하게 사내를 붙잡았다.

“옥곤, 서두르지 말게. 모처럼 왔는데 그래도 얼굴은 뵙고 가야지.”

이노야는 다소 절박한 투로 말했다. 이 유옥곤, 즉 유박이라는 자는 동주 유씨 가문의 사람으로 일찍부터 이름을 날렸다. 지금은 한직에 있다지만 그 숙부가 보통 사람이 아니었으니, 우녕(佑寧) 3년에 장원급제를 하여 지금은 한림원 대학사로 있는 유평이었다.

이노야는 유박이 장순 문하의 제자임을 일찍부터 알았다. 다만 워낙 멀리 떨어져 있고 같은 시기에 수학한 제자가 아니다 보니 통 마주칠 일이 없었는데 뜻밖에도 이렇게 만난 것이다. 그러니 교분을 맺을 이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있겠는가. 이노야는 스승의 부친을 뵙고 싶었지만, 선물만 두 번 들여보냈을 뿐 본인은 문턱조차 넘지 못했다. 그런데도 이노야는 유박을 꼭 데리고 들어가겠다며 큰소리를 쳤다.

“노태야를 방해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어르신께서 보고 싶지 않으시다니 그만하시죠.”

유박이 말했지만 이노야는 손을 풀지 않으면서 문지기에게 물어보라며 시종을 채근했다. 시종은 내키지 않아 발을 질질 끌면서 노야가 웬 허풍을 저리 떠는지 이해할 수 없어 속으로 투덜거렸다. 자주 뵈러 오기는, 이번 달에만 세 번째 오는 건데도 문간조차 못 넘고 있으면서.

그 문지기는 상대조차 안 해 주는 자가 아닌가. 반기지 않을 게 뻔한데 또 가서 물어보라니, 괜히 본전도 못 찾을걸. 시종은 입을 삐죽거리며 걸어갔다. 문 앞에 채 도착하기도 전에 문이 열리자 시종은 얼른 걸음을 멈추었다. 안에서 바구니를 든 여자애 하나가 나왔다.

“낭자, 조심히 가. 내가 얼른 마차 불러 줄게.”

나이가 들어 눈도 침침하고 귀도 잘 안 들리는 문지기가 다 빠진 이까지 드러내고 환히 웃으며 친절하게 말했다.

“아니에요, 아저씨. 별로 멀지도 않고 동쪽 시장에 들렀다 가야 해요. 그냥 걸어가면 돼요.”

볼품없어 보이는 어린 시녀 하나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쓰나! 노태야 드리려고 특별히 먹을 것까지 싸 왔는데 걸어가게 두면 손님에 대한 예가 아니지!”

그 말을 들은 시종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먹을 것 하나에 이런 시녀가 손님 대접을 받는다고? 대체 어느 댁 시녀인지, 대단하네.


장씨 고택의 문이 열리자 이노야는 몹시 기뻐하며 얼른 유박을 이끌고 다가갔다.

“노태야께선 댁에 안 계십니다.”

이노야를 본 문지기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정색을 하며 말했다.

거짓말! 문밖에 선 세 사람이 동시에 외쳤다. 물론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하고 속으로.

“노인장, 보다시피 몇 번이나 왔는데……·.”

이노야는 비위를 맞추며 공손하게 말했다. 그런데 이노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어린 시녀가 엇, 하는 소리를 내며 총총 다가와 예를 표했다.

“노야, 노야도 오셨네요?”

노야? 이노야는 멈칫해서 눈앞에 있는 시녀를 바라봤다. 날 부른 건가? 이노야가 미처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유박이 몹시 반가워하며 경탄의 눈빛으로 이노야를 바라봤다.

“대인, 이제 보니 댁에 있는 시녀까지도 노태야 댁을 드나들고 있었군요. 대단하십니다.”

유박이 한층 짙어진 섬서와 감숙 말씨로 말했다. 그 말이 이노야의 귓가에 웅웅 울렸다. 우리 집 시녀가 스승님의 고택을 드나들다니! 우리 집 시녀가!

-중추절-

노태야가 찻잔을 들자 유박과 이노야는 눈치 있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두 사람이 공손히 말하자 노태야는 그러라고 했다.

이노야와 유박이 장씨 고택에서 나왔다.

“형님, 이번엔 정말 큰 신세를 졌습니다.”

유박이 흥분된 표정으로 말했다.

“옥곤 아우, 당치 않은 말씀일세.”

이노야는 다소 굳은 표정이었지만 억지로 웃어 보였다.

“길을 서둘러야 해서 회포를 풀긴 어렵겠군요. 언제 기회가 되면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셔 봅시다.”

유박은 손을 뻗어 이노야의 어깨를 탁탁 쳤다. 유박은 어릴 때부터 무예를 익혔다. 도중에 장순의 문하로 들어가긴 했지만 글공부를 하면서도 무예를 놓지 않았다. 이노야는 유박의 손힘에 아파 이를 악물면서도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이번 일로 이제 동주 유씨 일족과 연줄이 생기게 됐군. 특히 유박은 떠나기 전 이노야가 어디로 부임하는지 꼬치꼬치 캐물었고 대답을 들으며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딱히 별다른 말은 없었지만 헤어질 때도 웃는 낯이었다.

“된 거예요?”

이부인은 남편이 벗은 웃옷을 받으며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유옥곤 그자가 거칠기는 해도 세심한 면이 있으니 필시 숙부님께 서찰을 쓸 거요. 스승님의 천거에 유 학사의 조력까지 더해졌는데도 일이 성사되지 않으면 벼슬 관두고 농사나 지어야지.”

이노야가 웃으며 말하자 이부인은 기뻐했다. 성사됐으면 됐다. 장차 남편 덕에 고명 부인(誥命夫人)이 될 꿈을 꾸는 이부인이었다.

“그렇다면 정말 잘됐네요. 장 노태야께 감사드려야겠어요.”

이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그 얘기가 나오자 이노야의 표정이 굳어졌다. 장 노태야께서 체면을 보아 안으로 들어가게 해 줬으니 고마운 일인가? 하지만……·.

“노태야께선 내 체면을 봐주신 게 아니오.”

이노야가 자리에 앉으며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는 듯 말했다.

“우리 집의 시녀 덕이지.”

당시 문지기는 그 시녀가 ‘노야’라고 부르는 걸 보고 표정이 급변했다. 그러더니 이노야가 인사드리러 왔다고 하자 전처럼 한마디 툭 내던지고 문을 닫는 게 아니라 들어가 여쭙겠다고 했고,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이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이노야는 알고 있었다. 그 시녀에게 은혜를 입었다는 걸.

“시녀요?”

이부인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노야가 사건의 경위를 들려주자 이부인은 좋아 어쩔 줄 모르겠는 표정을 지었다.

“그땐 나도 누구냐고 물어볼 수가 없었소. 이름이 뭔지도 모르고.”

이노야가 말을 이었다.

“집에 있는 아랫것들을 모조리 불러 보시오. 대체 누군지 알아내야지.”

“우리집 시녀가 어떻게 함부로 바깥을 나다니겠어요. 게다가 남의 집까지 드나들다니요.”

이부인이 말했다.

“노야, 잘못 들은 거 아니에요?”

하긴 그렇지.

“그럼 집 안에 있는 시녀가 아닌가?”

이노야가 말했다. 집 안이 아니면 어디지? 이노야 부부는 얼떨떨했다.

“아씨, 아씨 말씀이 맞았어요. 그 어르신은 보통 분이 아니더라고요.”

몸종은 바구니를 내려놓으며 서둘러 이야기했다.

“오늘 거기서 노야를 만났지 뭐예요.”

몸종은 찬바람이 들어오는 걸 감지하고 얼른 가서 문부터 닫았다. 정교랑은 책을 내려놓고 몸종을 보며 대꾸했다.

“그래?”

“노야께서 그 어르신 댁 문 앞에서 아주 공손하시더라고요.”

몸종은 흥분을 감출 수 없는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그 어르신이 노야한테 말해서 우릴 도로 데려가라고 하면 노야도 틀림없이 따르실 거예요.”

“도로 데려가?”

정교랑이 몸종을 보며 말했다.

“간신히 빠져나와 이런 자유를 얻었는데, 거기 돌아가서 뭐 해.”

“아씨.”

몸종은 긴장하며 무릎걸음으로 바짝 다가가 정교랑의 무릎을 주물렀다.

“우리가 지금은 여기 산다지만, 아씨는 도교에 귀의하고 싶은 마음이 없으시잖아요.”

정교랑의 입가에 웃음이 드러났다.

“인생살이 자체가 전부 수행이야. 어딘가에 구속되지 않을 거야.”

정교랑이 몸종의 손을 톡톡 두드려 주었다.

“넌 마음 편히 먹고, 그런 일 생각하지 마. 우선 그 여도사들한테 가서 네가 과일 말리는 법을 가르쳐 줘. 내일 중추절 달맞이 때 쓸 수 있게.”

몸종은 네 하고 대답했다.

“아씨, 뭐 드시고 싶으세요? 말씀하시면 제가 만들게요. 우리 먹으면서 달맞이해요.”

몸종이 신이 나서 말하자 정교랑도 고개를 끄덕이며 좋다고 했다.

“여긴 산이 높고 공기가 맑아서, 달맞이하기 좋겠구나. 아마도 집은, 그리 즐겁지 않겠지만.”

정교랑이 문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빽빽한 대나무 숲에서 나는 소리가 더없이 고풍적이었다.

중추절 당일,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정씨 저택 역시 초롱을 달고 오색천으로 집안 곳곳을 장식하며 떠들썩한 분위기로 명절을 맞이했다. 거리에서 등불놀이 구경을 마치고 돌아온 아이들은 정씨 가문 노부인과 함께 달맞이를 했다.

달맞이를 마치고 나서는 온 식구가 둘러앉아 밥을 먹으며 달구경을 했다. 정육랑은 꽃꽂이를 선보였고, 정오랑과 정육랑은 함께 만든 꽃신을 노부인께 올리기도 했다. 정칠랑은 달맞이 그림을 그려 보여 주는 등 일가는 화기애애한 모습이었다.

노부인이 노복들에게 나지막이 이야기하던 그때, 여인들이 앉아 있던 탁자에서 쨍그랑 소리가 났다. 나이가 든 여종 하나가 접시를 깬 것이었다. 보통 이런 일은 대부인까지 나설 필요 없이 집사 부인이 처리하면 됐다. 집사 부인이 가서 목소리를 낮춰 꾸짖자 여종은 얼른 무릎을 꿇고 깨진 조각을 줍기 시작했다. 그런데 무릎을 꿇는 찰나, 품속에서 둥글둥글한 과일 몇 개가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세상에, 이 망할 것이 도둑질까지 했네.”

가까이 서 있던 여종이 놀라 소리치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인지 잘 알 수는 없었지만 다들 도둑질이라는 단어는 똑똑히 들었다. 노부인이 굳어진 얼굴로 대부인을 힐끔 봤다.

“물건을 훔친 게 아니에요.”

다른 한쪽에 있던 정칠랑이 소리쳤다.

“이 사람은 내 시중을 드는 어멈이에요.”

다들 멈칫하는 사이, 노부인은 더욱 일그러진 얼굴로 대부인을 쳐다봤다.

“이젠 저런 자까지 가까이서 시중을 드는 거냐?”

노부인이 물었다. 가까이서 시중을 드는 사람은 그래도 근본이 있는 자들인데, 이런 일을 저지른 걸 보면 집안 꼴이 엉망이라는 뜻이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대부인이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아니에요, 조모님.”

정칠랑이 일어나며 소리쳤다.

“물건을 훔친 게 아니에요. 이따 가져가서 먹게 제가 챙기라고 했어요.”

“아닙니다, 아니에요. 소인의 손버릇이 문제예요. 식탐이 있어 과일을 훔쳤어요. 일곱째 아씨와는 무관한 일입니다.”

당황한 여종은 얼른 무릎을 꿇고 쾅쾅 소리가 나도록 머리를 찧으며 잘못을 빌었다. 너무 급히 죄를 시인하는 게 도리어 이상할 정도였다. 노부인은 무거운 얼굴로 대부인을 보며 손에 든 찻잔을 탁자 위로 꽝 내려놓았다. 정적을 뚫고 귀가 찢어질 정도로 무거운 소리가 났다.

달구경은 일찌감치 끝났고 아이들 역시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지만, 노부인의 마당에는 등이 환히 밝혀져 있었다. 여종들과 몸종들은 공손히 서 있었고 사방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다른 사람 일이면 그냥 넘어가겠지만 아랫것의 일이다. 좋아하는 과일을 평소에 충분히 먹질 못해 칠랑이 떼를 쓰고 귀찮게 하니까, 그 아랫것이 이참에 챙겨 두려고 한 거야. 누가 그러라고 시킨 일이 아니란 말이다.”

“맞아요, 조모님. 황 어멈이 저한테 이걸 챙겨도 되겠느냐고 물어서 그러라고 했어요. 황 어멈이 훔치려던 게 아니에요. 제가 알아요.”

“다 제가 자식을 잘못 가르친 탓입니다. 어머님, 형님을 나무라지 마세요. 전부 제 잘못이에요.”

노부인의 방으로 사람들이 드나드는가 싶더니 급기야 대부인이 소리 죽여 울기까지 했다.

“누가 고의로 네게 망신을 준 것이란 말이냐? 고의면 뭐? 네가 먼저 아둔한 짓을 했으니 망신을 줄 기회가 생긴 거야. 따지고 보면 너 스스로 망신을 준 셈인데, 누굴 원망하느냐?”

노부인의 호통이 방 안에서 흘러나왔다. 밖에 있는 여종과 몸종들은 더욱 고개를 숙였다.

“사람이 점점 퇴보하기도 한다더니, 네가 그 꼴이구나. 화를 풀 데가 없어서 먹는 음식을 제한해? 생각하는 꼴 하고는. 팔자 좋게 산 지 너무 오래됐나 보구나.”

“창피한 줄을 알아야지. 집안 애들이 음식을 훔치게 해?”

“돌아가서 제대로 반성해라!”

대부인은 방에서 얼굴을 가리고 울며 나왔다. 몸종과 여종들은 고개를 땅속으로 파묻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밝은 달이 휘영청 떴건만 정씨 가문의 마당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좋은 중추절에 이게 웬 난리인지.”

연못 근처에 두 소년이 마주 앉았다. 각자의 옆에 있는 몸종이 술을 따라 주었다.

“한 식구래도 어쩔 수 없지. 윗니, 아랫니도 안 맞을 때가 있는걸.”

정삼낭이 정사낭과 술잔을 부딪치며 말했다. 두 사람은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둘째 숙부님이 곧 부임하시면 숙모님도 따라가시겠죠. 눈앞에 있을 땐 불평하고 원망해도, 따로 떨어져 있으면 각별해지는 법 아닙니까.”

정사낭이 웃으며 말하자 정삼낭도 고개를 끄덕였다.

“듣자니 숙부님이 이번엔 내양 자사로 가신다지? 정사품하에서 정사품으로 영전하셨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삼낭은 정사낭을 바라보다가, 정사낭이 자신의 말을 안 듣고 한 곳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걸 눈치챘다. 정사낭의 시선을 따라가 보자 연못 맞은편의 석가산이 보였다.

“또 그 미인 생각이 나?”

정삼낭이 웃으며 물었다. 정사낭이 연못에서 미인을 만났다가 정신이 나갔던 일은 집안에서 공공연한 웃음거리가 됐다. 성격 좋은 정사낭은 얼굴을 붉히지 않고 웃음으로 넘길 뿐이었다.

“미인 얘기를 하니 생각나는 일이 있네요.”

정사낭은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춘란을 쳐다봤다.

“도관에 있는 그 아이가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구나. 내일 먹을 걸 챙겨서 갖다 줘라. 그래도 명절인데.”

춘란이 네 하고 대답했다.

“일개 바보가 뭘 어떻게 지내. 계절 지나가는 것도 모를 텐데.”

정삼낭이 웃으며 말했다.

“그 애가 알든 말든 상관없습니다. 어쨌든 우린 알잖아요.”

정사낭이 웃으며 대꾸했다. 정삼낭도 무의식적으로 그 석가산을 힐끔 쳐다봤다.

“돌아가신 숙모님께서 전에 내게 참 잘해 주셨어. 늘 웃는 낯으로 엿을 챙겨 주곤 하셨지. 그 동생이 태어난 후론 다신 그 웃음을 볼 수 없었지만 말이야. 듣자니 돌아가실 때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안 감길 정도였대.”

정삼낭이 말했다. 그 아이가 마음이 걸리셨겠지. 부모의 마음이란. 순간 두 사람은 씁쓸한 마음이 들어 잠시 침묵을 지켰다.

“춘란, 내 몫도 네가 함께 챙겨다 줘라.”

정삼낭의 말에 춘란은 얼른 네 하고 대답했다.

“그 숙모님이 정말 좋은 분이긴 했죠. 그분이 살아 계셨다면, 오늘 같은……·.”

정사낭은 적절치 않은 말임을 깨닫고 얼른 말을 삼켰다.

“쇄은을 넉넉히 가져다줘라. 날이 추워지니 채워 넣을 것도 많을 거야.”

헛기침을 하고 난 정사낭이 춘란을 보며 화제를 돌렸다. 춘란은 또다시 네 하고 대답했다.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그 바보의 귀환은 집안 식구들의 마음속에 자국을 남겼다.

한편 같은 시각 현묘관에서는 달구경이 한창이었다. 손 관주가 직접 와서 초청하자 정교랑도 흔쾌히 동의하고 몸종의 부축을 받으며 밖으로 나와 달맞이 법회에 참석했다. 탁자 위에는 공물이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가득 차려져 있었고, 손 관주와 제자들도 새 도복으로 갈아입어 몹시 흥이 난 상태였다. 물론 최고의 날이라고 할 순 없었다. 더 좋은 날은 이제부터니까.

그 생각을 하니 손 관주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 뒤로 단정히 앉은 정교랑은 멍한 무표정 상태였지만 눈에선 웃음기를 읽을 수 있었다. 밝은 달 아래 현묘관 안에는 7명뿐이었지만 오붓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아씨, 술 드실 수 있으세요?”

손 관주가 조심스레 물었다.

“먹죠.”

정교랑의 대답에 손 관주는 기뻐하며 얼른 술을 따랐다.

“그런데, 여기 술은, 안 먹어요.”

이어진 정교랑의 말에 술잔을 든 손 관주의 손만 머쓱해졌다. 이곳의 박주를 정씨 가문의 명주와 비교할 순 없겠지. 언짢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 말은 사실이었으니까. 사람이 주제 파악을 잘하면 기분 나쁠 일도 없는 법이다. 대신 손 관주는 과일과 쌀떡을 정성스레 올렸다.

다른 쪽에 앉아 있는 여도사들은 그 광경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우선은 관주가 그토록 정성을 다하며 조심하는 게 놀라웠고, 말로만 듣던 저 바보의 행동거지도 놀라웠다. 정씨 가문 바보 낭자를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본 건 처음었는데, 좀 뻣뻣하고 표정이 부자연스러운 것 외에는 보통 사람과 전혀 다를 게 없었다.

“아씨가 말도 알아들어요?”

궁금증을 못 참은 도동이 몸종에게 물었다. 몸종은 실소를 터뜨리며 대답했다.

“우리 아씨의 병은 벌써 나았어.”

바보로 태어난 사람의 병이 낫기도 하나? 그게 가능해? 다들 의아해하며 진지한 눈길로 그 조용한 여인을 쳐다봤다. 바보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정상인과는 좀 달라 보였다. 이를테면 말을 아주 적게 하고 목소리가 메마르고 딱딱했으며 자리에 앉은 후 오랫동안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몸종이 정교랑을 부축해 일어서자 손 관주도 얼른 따라 일어섰고, 관주가 일어서자 나머지도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이것들을.”

정교랑이 앞에 놓인 간식과 말린 과일을 보며 말을 이었다.

“도관 앞에서 행인들에게 나눠 줘요.”

이렇게 많이? 현묘관은 끼니도 제대로 챙기기 힘든 도관이었다. 신도가 많아 법회 한 번 열면 재물을 두둑이 챙기는 커다란 사찰이나 도관과는 달랐다. 이 정도 양이면 현묘관에서 한 달은 족히 먹을 텐데, 이걸 그냥 나눠 주라고? 그건 너무 낭비잖아.

“네.”

하지만 손 관주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공손하게 대답하고는 직접 길을 안내해 정교랑을 배웅했다.

이튿날 아침, 보부상 오씨는 아침밥도 거르고 일찌감치 성으로 향했다. 그러던 중 현묘산을 지나는 길에 여도사 몇 명이 현묘관 밖으로 나와 서 있는 게 보였다.

소현묘관이 문란한 행실로 명성을 날린지라 대현묘관 여도사들은 거의 바깥출입을 안 했었다. 오늘은 웬일로 저렇게 많이 나와 있지? 게다가 새 도복까지 차려입고. 소현묘관이 벼락에 맞은 일은 풍문으로 알고 있는데, 소현묘관이 없어졌으니 이제 대현묘관이 그 전통을 잇겠다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던 보부상 오씨는 저도 모르게 흐흐 웃었다. 저속한 생각에 어느덧 배고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라버니, 이거 같이 드세요.”

저쪽에서 도동이 상냥하게 인사하며 기름종이에 싼 물건을 들고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뜻이지? 길을 가던 다른 행인들도 인사를 받았지만 왠지 다들 꺼리는 눈치였다.

“우리 현묘관 중추절 법회 공물입니다. 보시하는 거예요.”

손 관주가 예를 표하며 말하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보고만 있을 뿐 섣불리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보부상 오씨는 탁자 위에 놓인 말린 과일과 간식들을 보자 또다시 배가 고파졌다. 맛은 없겠지만, 먹는다고 죽진 않겠지.

“고맙소, 고맙소이다.”

보부상 오씨가 큰 소리로 인사하며 가장 먼저 손을 뻗었다.

여도사들의 물건을 받으러 가는 사람이 나오자 주변에서 소란이 일었다.

“오씨, 그러다 사족을 못 쓰게 되면 어쩌려고.”

인파 속에서 누군가가 의미심장한 뜻을 담아 소리치자 사람들은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여도사들은 민망하고 곤혹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손 관주만은 태연한 표정이었다. 악인이 사라지고 없으니 악명이 오래 갈 리 없지.

“겁 안 납니다.”

보부상 오씨가 웃으며 앞으로 다가갔다. 이미 걸음을 내디뎠는데 물러날 순 없지. 패배를 인정하는 꼴이잖아.

“가져가세요.”

손 관주는 변함없는 표정으로 웃음을 머금고 간식 몇 개를 직접 건넸다. 작고 둥그렇게 구운 과자 위에 꽃무늬까지 새겨져 있었다. 두껍고 실한 게 처음 보는 과자였다. 보부상 오씨는 저도 모르게 궁금증이 일어 물었다.

“도사님, 이게 뭡니까?”

“월병이에요.”

손 관주가 웃으며 대답했다.

“8월 15일이 중추절이잖아요. 달처럼 둥근 이 월병엔 상서로움이 깃들어 있죠.”

한 사람이 받기 시작하자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모여들어 받아 갔다. 시종을 데리고 걸어오던 춘란은 현묘관 앞이 사람들로 붐비는 모습을 보고, 호기심에 물건을 받아 손에 든 기름종이 포장을 살펴봤다.

“이거 과일 절임이니?”

“네, 낭자. 우리 현묘관에서 공양하는 과일 절임이에요. 중추절이라 복을 나눠 주는 거예요.”

춘란의 물음에 도동이 제법 깍듯하게 예를 갖춰 대답했다. 이 작은 도관에 좋은 물건이 있겠어, 그냥 복이나 바라는 거겠지. 춘란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기름종이로 싼 물건을 시종이 들고 있는 대광주리에 던져 넣었다.

“소현묘관은 저쪽으로 가는 거니?”

춘란이 물었다.

“낭자, 소현묘관은 이제 소현묘관이라고 안 불러요. 태평궁이라고 부르죠.”

도동이 정정해 주며 춘란을 살폈다. 참배하러 온 사람 같지는 않은데……·.

“태평궁?”

춘란은 의아한 눈치였다.

“이름을 이상하게도 지었네.”

“안 이상해요, 태평하란 뜻을 담은 거예요.”

도동이 얼른 대답했다. 춘란은 입을 삐죽이고는 더 이상 상대하지 않고 산으로 길을 재촉했다.

“누굴 찾아오셨는데요? 반근 언니는 외출했어요.”

도동의 말에 춘란은 걸음을 멈추고 도동을 쳐다봤다.

“이렇게 일찍? 그, 아씨는 안 돌봐도 돼?”

춘란이 놀라서 묻자 도동은 직접 앞장서서 걸어가 산문을 열어 주었다. 이쪽에서 문을 지키고 있던 여도사 역시 문이 열리며 낯선 사람이 보이자 깜짝 놀란 모습이었다.

“반근 언니를 찾아왔대요.”

길을 안내하던 도동이 얼른 말했다.

“반근 언니는 아침 일찍 성에 나갔는데요.”

여도사가 말했다.

“그럼 어쩔 수 없죠. 난 정씨 댁 사람인데 먹을 거랑 돈을 가져왔어요. 그럼 일단 둘이 받아 둬요.”

춘란의 말에 여도사와 도동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사부님이 아씨를 방해하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나이가 더 많은 여도사가 뒤쪽의 마당 문을 조심스레 보며 말했다. 마당 안은 고요했다.

“이건 방해가 아니에요. 아씨 댁에서 온 사람이잖아요. 일단 말은 전해야죠.”

도동이 말하면서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문안에서 여인의 딱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동은 신이 나서 안으로 들어갔다. 반쯤 열린 방문 사이로 병풍 앞에 단정히 앉아 있는 여인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여인이 고개를 들어 이쪽을 쳐다봤다. 안으로 들어가던 도동은 그 눈길에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아씨, 댁에서, 사람이 왔어요. 물건을 가져왔대요.”

도동은 일부러 속도를 늦춰 천천히 말했다. 이 정도면 바보라도 알아들었겠지?

같은 시각, 강주성으로 나온 몸종은 노태야의 댁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몸종이 이름을 대자 문지기는 반갑게 문을 열어 주었다.

“이걸 월병이라고 한다고?”

노태야가 몸종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네, 어르신. 드셔 보세요. 어제 만든 거예요. 관주님이 법회도 여셨어요.”

몸종도 웃으며 대답했다.

“많이 드셔야 해요. 그래야 만수무강하고 모든 일이 뜻대로 이뤄지시죠.”

노태야가 껄껄 웃자 옆에 있던 노복도 따라서 웃었다.

“어서요, 노야. 어서 드셔 보세요.”

노복이 재촉하자 노태야는 웃으며 월병을 작은 크기로 잘라 입에 넣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을 했다.

“그 마음이 고맙군. 나한테까지 특별히 챙겨다 주고.”

“어제 중추절에 공양할 음식을 많이 만들었어요. 관주님께서 시주님들한테 전부 나눠 주라고 하셨어요.”

몸종은 웃으며 바구니 안에서 기름종이에 싼 각종 간식도 꺼내 놓았다.

“전부 산에 나는 야생과일로 만든 과일 절임이로군.”

노태야는 고개를 끄덕이고 웃으며 고마움을 표했다.

“그럼 이만 가 볼게요.”

몸종은 오래 있지 않고 물건을 내려놓은 다음 웃으며 인사했다. 노복은 몸종이 마당 문을 나가는 걸 확인한 후에야 돌아왔다. 방에 있던 노태야는 벌써 월병 하나를 다 먹은 참이었다.

“훌륭하군, 훌륭해.”

노태야는 연신 감탄을 하더니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쉽구나, 아쉬워.”

노복은 뭐가 아쉽다는 건지 묻지 않고 잠자코 침묵을 지켰다. 노태야는 탁자 위에 쌓인 간식들을 보더니 엇, 하며 뭔가를 발견한 듯 손을 뻗어 하나를 집어들었다.

“현묘관.”

노인이 손에 든 종이 포장지를 보며 말했다. 노복도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 포장지에는 ‘현묘관’이라는 세 글자가 쓰여 있었다. 노태야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만평, 내 명첩을 들고 가서 이 과일 절임을 성 안의 지인들에게 나눠 줘라. 현묘관에서 중추절을 맞아 재를 올렸기에 그 복을 나눠 가지는 의미라고 전하고.”

노복은 놀란 표정이었다 이 과일 절임은 별게 아닐지 몰라도 노태야의 명첩과 함께 보낸다면 그건 보통 의미가 아니었다. 현묘관이 이제 이름을 날리겠군. 노태야가 그 시녀의 체면을 봐서 현묘관을 띄워 주시려나 보네.

“네.”

노복은 허리를 굽히며 대답한 후 얼른 과일 절임을 챙겼다.

몸종은 노태야의 결정을 까맣게 모르는 채로 어느덧 친해진 문지기와 인사를 나눈 후 장씨 고택의 문을 나섰다. 골목으로 막 꺾어질 무렵 옆쪽에서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누나.”

소리치는 소리에 몸종은 깜짝 놀랐다. 낯이 익은 얼굴이긴 한데, 어디서 봤는지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누나, 난 정씨 댁 사람인데 누나는?”

시종이 물었다. 이노야는 이부인의 의견을 따라 집안 아랫것을 모조리 불러 장씨 고택에서 손님 대우를 받는 시녀를 찾아내는 대신 시종을 장씨 고댁 근처에 대기시키는 길을 택했고, 마침내 몸종과 마주치게 됐다.

“난 교랑 아씨를 모시는 반근이야.”

몸종은 그 시종이 누군지 그제야 알아보며 대답했다. 그날 이노야를 따라 노태야를 찾아왔던 아이였다. 시종은 이제 떠올랐다는 듯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방에서 시종의 말을 듣던 이노야와 이부인도 퍼뜩 깨달은 눈치였다. 그 아이였구나. 역시 집 안이 아니라 밖에 있었어.

“장 노태야는 어찌 안다더냐?”

이노야가 물었다.

“현묘산에서 우연히 만났다고 했어요. 그 어르신이 밥을 별로 안 좋아하시는데, 마침 그 아이가 만든 간식들이 그분 입맛에 딱 맞아서 알게 됐대요.”

시종이 대답했다. 간식? 이부인은 멈칫했다. 언젠가 비슷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이런 우연이 있나, 왜 그 바보 옆에 있는 애들은 전부 음식 솜씨가 좋지?

“그 계집의 말이 참인 것 같아요? 거짓인 것 같아요?”

이부인의 물음에 이노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노태야는 쉽게 속아넘길 수 있는 분이 아니오. 아마 거짓은 아닐 거요.”

“그 아이의 솜씨가 노태야의 입맛과 맞아떨어진다면, 그 아이를 노태야께 드리죠.”

이부인이 말했다. 좋은 생각인데. 이노야가 눈빛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명을 내렸다.

“여봐라, 현묘관에 가서 그 계집을 데려오너라.”


현묘관 안.

춘란은 성가신 듯 손을 내저었다.

“나한테 뭘 묻겠단 거야? 물건 가져다줬잖아. 넌 청매한테 춘란이 왔다 갔다고 전하기만 하면 돼.”

도동은 쭈뼛거렸다.

“아씨께서, 물, 물으시겠대요. 이름이 뭔지, 누가 가져다주라고 한 건지요. 왜 보낸 건지도요.”

도동이 우물쭈물하며 방금 들은 말을 전했다. 바보가 쓸데없이 말은 또 많네. 춘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걸 물어서 뭐 하려고?”

그걸 누가 알겠어요. 도동은 어리벙벙한 모습으로 말했다.

“언니, 그냥 들어가서 말씀을 올리세요.”

“나 바빠.”

춘란이 더는 못 견디겠다는 투였다.

“나 간다.”

대답도 제대로 안 하고선, 아씨한테 뭐라고 대답하라고? 도동은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가 아예 길을 막아섰다.

“아무튼, 대답 똑바로 하고 가요.”

춘란은 눈앞에 선 이 대담한 꼬맹이를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야, 너 정말……·.”

춘란은 말문이 막혔다.

“아씨께서 물으시잖아요. 확실하게 대답 안 하면 나만 사부님한테 혼난다고요.”

도동은 겁을 먹은 듯하면서도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바보를 모시는 게 확실히 쉬운 일은 아니야. 춘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하는 수 없이 도동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반쯤 열린 방문 사이로 안에 앉아 있는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손에는 책을 한 권 들고 있었다. 책? 춘란이 멈칫하는 사이, 그 여인이 고개를 들어 이쪽을 쳐다봤다. 그 가리개 아래로 이토록 눈부신 미모가 있었구나. 춘란은 저도 모르게 넋을 잃었다.

“누가 네게 이 물건을 전하라고 했지?”

여인의 뻣뻣한 목소리에 춘란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반사적으로 예를 표했다. 집안의 다른 아씨를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댁의 사공자십니다. 그리고 삼공자도요.”

춘란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공손함이 담긴 말투로 대답했다.

“이유는?”

정교랑이 물었다.

“다른 건 아니고 중추절이라 아씨 생각이 났다고 하셨습니다.”

춘란은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먹을 것과 말린 과일이에요. 쇄은도 좀 가져왔고요. 공자님께서 날이 추워지니 아씨께서 더 사야 할 게 있을 거라고 하셨어요.”

말을 마쳤는데도 눈앞의 여인은 조용히 있었다. 춘란은 그제야 조금씩 정신이 들었다. 이 아씨가 실은 바보가 아니었나? 바보의 기운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고개를 든 춘란은 정교랑과 눈이 마주쳤다. 문안은 밝았지만 문밖은 어두웠다. 검은 눈동자보다 흰자위가 훨씬 큰 눈은 더없이 밝게 빛났다.

“그렇다면, 고맙구나. 내 기억해 두지.”

정교랑이 천천히 말하며 시선을 책 위로 돌렸다. 뭘 기억해? 기억하면 어쩔 건데? 멈칫했던 춘란은 우스운 마음이 들었다. 기억했다가 은혜를 갚기라도 하려고?

춘란은 현묘산에서 얼굴도 못 본 그 몸종을 정씨 저택의 문 앞에서 마주쳤다. 평소에 이런 하급 몸종들과 왕래할 일이 없다 보니 춘란은 처음에 이 몸종을 알아보지 못했다. 반근 낭자라고 부르는 시종의 말을 듣고서야 고개를 돌렸다.

“너 집에 와 있었구나.”

춘란이 몸종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럴 줄 알았음 괜히 거기까지 갔다 왔네.”

몸종은 자초지종을 들은 다음에야 무슨 일인지 이해하고 감격한 표정으로 감사를 표했다.

“원래 집에 올 생각은 없었는데 길 가다가 불려온 거야. 이노야께서 날 찾으신대.”

몸종의 말에 춘란은 아, 하고 대꾸했다. 두 사람은 함께 안쪽 마당으로 향했다.

“전에 금가아를 통해 돈을 보내 준 건 고마웠어. 살펴 줘서 정말 고마워, 언니.”

몸종이 말했다. 원래 잘 아는 사이도 아닌지라 춘란은 딱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그저 응 하고 짧게 대답했다.

“금가아도 네가 챙겨 줘서 고맙다고 그러더라.”

춘란이 말했다.

“금가아가 일을 잘하잖아. 그 애한테 맡기면 나도 안심이 돼.”

몸종의 대답에 춘란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몸종을 쳐다봤다. 그냥 인사치레로 한 말인데, 이 아인 정말 자기가 챙겨 주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네? 그런 말을 나누는 사이 어느덧 갈림길에 다다랐다. 몸종은 작별의 예를 표했고, 춘란은 그 몸종이 다른 쪽으로 가는 모습을 쳐다봤다.

“정말 저 애의 체면을 봐준 건가?”

춘란은 혼잣말을 했다. 일개 바보의 시중을 드는 몸종인데? 춘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체면을 봐준 거라면 아마도 정씨 가문의 체면이겠지.

“언니, 왔구나. 공자님께서 그 대부 먹을 준비하라셨어.”

마당으로 들어서자마자 어린 몸종이 신이 나서 말했다. 사공자는 먹을 좋아했는데, 그 보물들의 관리는 전부 춘란 소관이었다. 춘란은 그 말에 웃으며 먹을 챙겨 서재로 들어갔다.

“공자님, 물건을 가져다줬어요.”

춘란이 말했다. 정사낭은 순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 그날 술을 마시며 한 말이라 까맣게 잊고 있다가 춘란의 설명을 들은 다음에야 기억을 떠올렸다.

“그래, 잘했다.”

정사낭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대꾸했다. 춘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아씨도 봤어요.”

그 아씨는 집안 아씨들처럼 서열이 정해져 있지 않고 이름도 모르는지라, 춘란은 순간 뭐라 호칭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정사낭은 응 하고 가볍게 대꾸한 후 앞에 놓인 서화에 집중했다.

“아씨께선 말을 하실 줄 알았어요. 그리고 얼굴도 엄청 예쁘셨고요.”

춘란이 이어 말했다.

“사정을 몰랐다면 정말 바보라고 생각 안 했을 거예요.”

정사낭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 애는 지능이 부족할 뿐이지, 외모가 부족한 건 아니다. 숙부님과 돌아가신 숙모님의 외모가 추하지 않은데 그 애가 못생겼을 리가.”

춘란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아까 보니 이노야께서 그 아씨의 몸종을 부르셨다던데, 무슨 일인지 아세요?”

“무슨 일이든 그쪽 일이겠지.”

정사낭은 붓을 놓고 몸을 일으켜 춘란을 쳐다봤다.

“먹을 갈아라.”

춘란은 얼른 네 하고 대답한 후 먹을 가는 일에 정신을 집중했다.

한편 이쪽 방 안에서는 이노야와 이부인 앞에 몸종이 무릎을 꿇고 있었고, 문밖의 회랑 아래에는 노복 부부가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꿇어앉아 있었다.

“절 보내신다고요?”

몸종은 놀라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노야, 부인, 소인이 잘못했습니다. 소인이 고칠 테니 제발 보내지 말아 주세요.”

몸종은 황급히 절을 올리며 눈물까지 쏟았다.

“어리석은 것아, 거기 가면 넌 이제 호강하는 거야.”

밖에 있던 늙은 여종이 보다 못해 거들었다.

“어서 노야와 부인께 감사 인사를 올려.”

몸종은 여전히 불안한 모습이었다.

“장 노태야께서도 알고 계신다. 널 그 집으로 보내는 것 말이다. 네 음식 솜씨가 그분 입맛에 맞는다니 그 집으로 가서 찬모로 지내라.”

이노야가 말했다.

“소인은, 소인은 그저 아씨를 모시고 싶을 뿐이에요.”

몸종이 절을 올리며 대답했다.

“이 어리석은 것아. 바보의 시중을 오래 들더니 너도 바보가 됐어?”

밖에 있던 늙은 여종이 못 참고 나서며 목소리를 낮춰 야단을 쳤다. 이노야가 무거운 헛기침을 하자 늙은 여종은 얼른 절을 올리며 몸을 움츠리고 더는 나서지 못했다.

“너 그 노태야께서 어떤 분인지 모르지?”

이부인이 눈앞에 있는 몸종을 보며 입을 열었다. 썩 특출난 외모도 아니고 어리바리한 걸 보니, 집안에서도 평생 허드렛일이나 하는 몸종일 처지였다. 나이가 차면 허드렛일을 하는 하급 여종으로 살겠지. 저 밖에서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앉아 있는 늙은 여종처럼 말이다. 그 자식들도 숙명을 피해 가진 못할 것이다.

“장 노태야는 대유학자 장순의 부친이시다. 너는 장순이 누군지 모를지 몰라도 밖에 나가 보면 이름 좀 있고 책깨나 읽었다는 벼슬아치 중에 그분을 모르는 사람은 없어. 그분의 문하에서 수학한 제자만 3천이다. 천자께서도 그분께 예를 표하고 가르침을 얻으셨어. 그 이름도 유명한 장강주 선생이셔. 우리 강주부에 사람이 많아도 그런 호칭을 얻은 이는 그분 한 분뿐이야.”

그 볼품없는 노인이 그리 대단한 분이셨다니! 거기까지 말한 이부인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청매, 그런 집에 가서 노태야의 예쁨을 받는 찬모가 되는 것이다. 가고 싶으냐, 가고 싶지 않느냐?”

아씨의 말씀을 듣고 신분이 범상치 않은 분일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이 정도로 범상치 않은 분일 줄은 몰랐다. 노인이 사는 집도 딱히 눈에 띄진 않았는데. 몸종은 얼떨떨한 표정이었고 밖에 있는 몸종의 부부는 아예 넋이 나가 있었다.

착하지, 우리 딸. 그런 댁으로 가면 하급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는 건 물론이요, 이 강주부에서 널 무시할 사람은 없을 거야. 정씨 가문과 장씨 가문은 격이 달랐고, 몸종과 찬모 역시 엄연히 달랐다. 몸종은 평생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찬모는 평생 할 수 있다. 부잣집에서 일하는 찬모는 집안에서도 지위가 높았고 때로는 남에게 빌려주기도 했다. 솜씨 좋은 찬모를 모셔다가 그럴듯한 연회상을 준비하는 건 체면을 세우기에 썩 좋은 일이었다. 두둑한 금일봉을 따로 챙겨 받는 건 물론이다.

밖에 앉아 있던 몸종의 부모는 엉덩이가 들썩들썩했다. 딸이 그런 집으로 가면, 자신들까지 따라가지는 못하더라도 앞으로 정씨 댁에서 복을 누리며 살 수 있지 않겠는가.

“당연히 가고 싶지요.”

늙은 여종이 절을 올리며 기쁘게 소리쳤다.

“노야와 부인께 감사드립니다. 어여삐 봐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늙은 여종은 아예 무릎걸음으로 걸어가서는 멍하니 있는 여종을 밀며 소리 낮춰 말했다.

“어서 노야와 부인께 감사 인사 올려. 거기 가면 잘해야 한다. 노야와 부인의 얼굴에 먹칠하면 안 돼. 네 성(姓)이 무엇인지도 잊지 말고.”

몸종은 여종에게 밀려 앞으로 넘어지다시피 하자 손으로 바닥을 짚고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노야, 부인, 소인은……·.”

“됐다, 그런 말은 안 해도 돼. 거기 가거든 본분을 잘 지켜라. 앞으로 넌 장씨 댁 사람이지만 우리 정씨 가문을 잊으면 안 된다.”

이노야가 말했다.

“그게 아니고요, 노야.”

몸종은 얼른 절을 올리며 말했다.

“소인은 갈 수 없습니다.”

방 안이 고요해졌다. 이노야와 이부인은 놀란 눈치였다. 뭐라고?

“이 망할 년,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어디서 가식을 떨어. 노야와 부인의 말씀이시다. 넌 무조건 따르기만 하면 돼.”

늙은 여종은 또다시 몸종을 앞으로 밀며 야단을 쳤다.

“어머니, 알지도 못하면서 괜한 소리 마세요.”

몸종은 얼른 고개를 돌리고 이노야 내외를 바라봤다.

“노야, 부인. 소인은 솜씨 같은 거 없어요. 소인이 만든 건 전부 아씨가 가르쳐 주셨어요. 하찮은 재주로 노태야께 갈 순 없습니다.”

또 이 말이로군. 이부인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건 제가 만든 게 아니에요. 저희 아씨께서 가르쳐 주신 거예요. 눈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몸종이 예전 그 몸종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똑같이 불안에 떨면서, 똑같이……·. 헛소리를 하고 있어.

“너도 주씨 성을 가진 줄 아느냐?”

이부인은 냉소를 지으며 물었다. 몸종은 영문을 몰라 고개를 들었다.

“내 너를 부른 것은 내일 장 노태야 댁으로 가라고 알려 주기 위해서다. 가고 싶은지 네 의사를 물으려고 부른 게 아니야.”

이부인은 위압적인 태도로 몸종을 쳐다봤다.


저녁 무렵, 손 관주는 도동을 데리고 급히 태평궁으로 향했다.

“뭐라고? 반근 낭자가 아직도 안 돌아와?”

손 관주의 물음에 문을 지키던 여도사는 긴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날이 어두워지는데, 왜 아직도 안 올까요?”

“성에 있는 그 노인 댁에 월병을 가져다드리러 간다지 않았어? 진작 올 때가 됐는데.”

손 관주는 초조해하며 손을 비볐다.

“네가 사저들과 함께 성으로 마중을 나가라.”

여도사는 네 하고 대답한 후 종종걸음으로 나갔다. 손 관주는 도동을 데리고 정교랑의 마당으로 들어갔다. 문 안으로 들어가자 회랑 아래에 선 정교랑의 모습이 보였다. 고개를 든 채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씨.”

손 관주가 얼른 예를 표했다.

“반근 낭자가 장을 보러 멀리 나갔나 봅니다. 아직도 안 돌아왔네요.”

정교랑은 시선을 거두고 손 관주를 바라봤다.

“아닙니다. 오늘 밤엔, 안 돌아올 거예요.”

멈칫했던 손 관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씨께선 어디 갔는지 알고 계셨군요. 괜히 놀랐네요.”

손 관주가 도동에게 사저들을 도로 불러오라고 명하며 말했다. 정교랑은 대꾸하지 않고 계속해서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봤다. 손 관주는 이곳에 올 때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정교랑의 모습을 보곤 했는데,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씨, 뭘 보세요?”

손 관주도 따라서 쳐다보며 물었다. 서쪽 하늘로 석양이 지면서 가을 노을이 짙게 물들어 있었다.

“하늘을 봅니다.”

정교랑이 말했다.

“하늘이 뭐 볼 게 있다고요?”

손 관주가 물었다.

“별거 없죠.”

정교랑이 시선을 거두며 대답했다.

“그런데 예전엔, 보는 걸 좋아했던 것 같아요.”

예전엔? 손 관주는 어리둥절하여 다시 정교랑을 쳐다봤지만 정교랑은 이미 안으로 들어간 후였다. 바보가 아닌 건 확실한데 어딘지 모르게 기이하단 말이야. 보통 사람과 달라. 손 관주는 얼른 따라 들어갔다.

“아씨, 반근 낭자가 없는데 뭘 드시겠어요? 제자들을 시켜 만들겠습니다.”

“그래요.”

정교랑은 팔걸이 책상을 짚고 방석 위로 앉으며 대답했다.

“연근 버섯 백합 고기찜, 칠보 야채죽, 마 호병을 먹어야겠어요.”

뭐, 뭐, 뭐? 손 관주는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먹는 건가? 아리송하게 들리는 이름들이 선계의 음악처럼 마음을 어지럽혔다. 세상에, 이 아씨는 평소에 뭘 먹고 사는 거야.

“아씨, 아씨.”

손 관주는 난처해하며 정교랑을 다급하게 부르고는 벌써 자리에 앉은 정교랑을 보며 말했다.

“저는, 할 줄 모르는데요.”

“모른다.”

정교랑이 고개를 들어 손 관주를 쳐다봤다.

“배우면 되죠. 먹고 입고 자는 것 중에 먹는 게 가장 앞에 오잖아요. 그만큼 가장 간단하고 쉬운 일이죠.”

먹고 입고 자는 것에 그런 의미가 있었나? 손 관주는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했다.

날이 밝을 무렵, 현묘관에서 여도사 둘이 급히 나왔다.

“내가 거기 남는다니까 사부님은 마음이 안 놓인다며 기어이 본인이 남으시겠대.”

“반근 낭자는 대체 어딜 간 거야. 말도 없이.”

“그러게 말이야. 반근 낭자야 가든 오든 우리가 상관할 바 아니지만 그 낭자는 바보잖아. 그렇게 내팽개치고 가 버리면 어떡해. 말도 한마디 안 하고.”

“어젯밤에 식사 준비하느라 아주 죽을 뻔했어. 고기랑 채소를 하도 다져서 아직도 팔이 쑤신다니까.”

“넌 다지기만 했지. 난 호병 만드느라 얼마나 진땀을 뺐다고.”

“근데 맛있긴 진짜 맛있더라. 역시 부잣집 사람은 먹을 줄 안다니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지.”

“얼른 가자. 아침엔 또 무슨 이상한 게 먹고 싶다고 할지 모르겠네.”

두 여도사가 대화를 나누며 산으로 올라가려는데 앞쪽에 사람들이 보였다.

“진짜 재수도 없지. 며칠이나 됐다고 또 사람을 바꿔?”

“에이, 이번엔 재수 없어서가 아니지. 청매는 대운이 트인 거야.”

“그래. 청매는 재수가 좋지, 재수 없는 건 우리고. 바보의 시중을 들러 오게 됐으니.”

“에이, 따지고 보면 그 청매가 이 바보 낭자를 모시다가 좋은 기회를 만난 거잖아. 여기 오는 게 그리 재수 없는 일만은 아니야.”

일행 중 여자 둘이 웃으며 소곤거렸다. 발걸음 소리를 들은 일행이 고개를 돌려 이쪽을 쳐다봤다.

“시주님.”

두 여도사가 예를 표했다. 일행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걸음을 재촉했다. 두 여도사는 서로 시선을 주고받은 후 말을 아끼며 천천히 뒤따라 올라갔다.

일행이 태평궁 문 앞에 다다랐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도동은 갑작스레 여러 명이 찾아오자 어리둥절하다가 뒤에 있는 여도사 둘을 발견하고 반갑게 나와 물었다.

“반근 언니는 돌아왔어요?”

“아직도 안 돌아왔어?”

도동의 물음에 여도사들이 오히려 반문했다. 그 말을 들은 일행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반근이라고?”

일행 중 집사처럼 보이는 사내가 세 사람을 훑어보며 말했다.

“그 애는 이제 안 옵니다.”

마당에 있는 두 몸종은 못마땅한 듯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바짝 달라붙어 투덜거렸다.

“이 애들이 새로 온 몸종이에요.”

관사가 앞에 있는 손 관주를 보며 말했다. 손 관주와 뒤에 있는 제자들은 놀란 표정이었다.

“그럼 반근 낭자는요?”

손 관주가 물었다.

“노야께서 장 노태야 댁으로 보내셨어요.”

집사가 영광이라는 투로 대답했다. 집안 노비라는 게 본디 언제든 쉽게 팔 수 있는 물건 같은 존재이니 팔아 버리거나 선물로 준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손 관주는 잠자코 있으면서도 내심 두려움에 떨였다.

“장 노태야에 대해선 다들 아시죠? 반근 말로는 여기서 알게 된 인연이라던데. 그 애 음식을 마음에 들어 하셨다니 대운이 텄지 뭡니까. 그리 높은 곳으로 옮겨 가게 되다니.”

집사의 말이 이어졌다. 잠시 영문을 몰라 하던 손 관주와 제자들이 퍼뜩 깨달았다.

“그 배고픈 병에 걸린 어르신!”

“정말 잘됐네요. 그 어르신이 반근 언니를 데려가겠다고 했나 봐요.”

“내가 뭐랬어. 반근 언니가 드디어 고생에서 벗어났네.”

“반근 언니가 무지 좋아하겠다.”

여도사들은 오랫동안 바라던 소원이 드디어 이루어지자 기쁜 얼굴을 감추지 못하며 소곤거리는 한편 그 장 노태야라는 분이 누구인지 묻기도 했다. 일개 몸종에게 그런 대운이 트였으니 정씨 가문 하인들로서는 부러울 따름인지라 여기저기 수소문해 알게 된 내용을 신이 나서 들려줬다. 두 몸종이 장 노태야의 신분에 대해 약간의 과장을 섞어 이야기하자 여도사들은 더욱 환호작약하며 천존께 감사를 올렸지만, 손 관주만은 멍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그냥 가 버렸다고? 아씨는 어쩌고?”

손 관주가 중얼거렸다.

“여기 몸종 둘을 보냈잖아요.”

관주의 말을 들은 집사는 성가신 듯 대꾸하고 옷을 털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난 이만 가야겠네요. 그럼 도사님께서 애 좀 써 주세요.”

손 관주가 얼른 막아섰다.

“이런 일은 아씨께 직접 말씀을 올려야죠. 어쨌든 난 정씨 가문 사람이 아니잖아요.”

아씨와 그 몸종은 누가 봐도 사이가 좋았다. 아씨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일을 떠맡을 순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아씨의 심기를 건드릴 순 없지. 집사는 실소를 터뜨렸다. 일개 바보한테 그걸 말하라니, 알아듣기나 하나?

“알아듣습니다. 알아들으세요. 어서 따라오십시오.”

손 관주는 안쪽으로 앞장서 걸어가며 재촉했다. 집사는 하는 수 없이 두 몸종을 데리고 따라 들어갔다. 마당 안쪽으로 들어가자 수수한 옷을 입고 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 소녀가 보였다. 긴 머리를 허리까지 드리우고 손에는 나뭇가지를 든 채 땅바닥에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아씨.”

손 관주가 공손히 불렀다. 이 사람이 바로 그 바보 교랑 아씨? 관사와 두 몸종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정교랑을 살폈다. 부르는 소리를 들은 그 아씨가 고개를 들었다.

“아씨, 댁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아뢸 게 있대요.”

손 관주가 뒤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뒤쪽에서 오래도록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손 관주가 고개를 돌렸다. 집사와 두 몸종은 넋을 놓고 서 있었다. 안타까워라. 저리 고운 외모를 갖고 바보로 태어났다니. 안타까워하는 집사에게 손 관주가 재촉을 했다.

“아씨, 노야와 부인께서 새로 보내신 몸종들입니다.”

정신을 차린 집사가 가엾다는 듯한 말투로 두 몸종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교랑은 집사를 보며 말없이 있었다. 이 바보가 전에 있던 몸종의 이름을 반근이라고 불렀지. 지능이 달려서 그 이름이 제일 익숙한가 보네. 그러니 맨 처음의 몸종이 떠난 후 새로 온 몸종에게도 반근이라는 이름을 붙여 줬겠지. 집사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반근입니다. 이 아이들 둘 다 반근이에요.”

집사가 큰 소리로 말했다. 정교랑의 입가가 살짝 위로 올라갔다.

“좋네.”

이어 정교랑이 말했다.

“반근.”

한편 성 안의 장씨 고택 대문 앞에서는 집사가 옆에 있는 몸종을 노려보고 있었다.

“뚝 그쳐.”

집사는 무거운 목소리로 호통을 치며 경고했다.

“좋은 일 망치지 마라. 연로한 네 부모를 생각해야지.”

몸종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애써 눈물을 삼키고 고개를 숙였다. 문이 열리고 문지기가 경계의 눈빛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정씨 댁에서 왔습니다. 노야께서……·.”

집사가 얼른 웃는 낯으로 공손히 말했다. 하지만 문지기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을 닫아 버렸다.

“아니, 사람을 데려왔어요. 사람을 데려왔다고요. 어르신, 문 닫지 마세요.”

집사는 필사적으로 문을 밀며 몸종에게 소리쳤다.

“냉큼 이리 와.”

몸종은 쭈뼛쭈뼛 앞으로 다가갔다. 몸종을 본 문지기가 곧바로 손을 푸는 바람에 집사는 넘어지다시피 안으로 들어갔다. 방금까지만 해도 빚쟁이를 보고 피하듯 굴던 문지기가 만개한 국화처럼 활짝 웃으며 맞이했다.

“반근 낭자, 낭자였군. 무슨 일인가? 마침 낭자 얘기 중이었는데.”

장 노태야는 찻잔을 내려놓고 앞에 선 집사와 몸종을 쳐다봤다.

“노태야께서 여기 홀로 계시는데 마침 이 아이의 솜씨가 입맛에 맞으신다기에 저희 노야께서 노태야를 모시라며 보내셨습니다.”

집사는 공손히 말씀을 올리고 몸종을 힐끔 쳐다봤다.

“소인이 미처 몰랐어요. 노태야께서……·. 결례가 많았습니다.”

몸종이 고개를 숙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장 노태야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는 건 죄가 아니지. 그리고 결례를 범한 적 없다. 내 생명의 은인이기도 한 것을.”

장 노태야가 말을 이었다.

“여기 남아 찬모를 하고 싶으냐?”

“사실 소인의 솜씨는……·.”

몸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자 집사가 헛기침을 했다. 몸종은 고개를 숙이며 몸을 움츠리고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 계집애가 자기 솜씨가 아니라 아씨가 가르쳐 줬다는 괴상한 말을 늘어놓더니, 여기 와서도 똑같은 말을 하려고 구네. 오기 싫다는 말이랑 뭐가 달라? 장 노태야는 별로 개의치 않고 웃으며 차를 마셨다.

  • 인연이 될 일을 원한을 살 일로 만들어 버리면, 내 가만있지 않겠다.

  • 이 천지 분간 못하는 것아. 내가 널 헛키웠구나. 우리 가족의 운명이 달린 일이야. 여차하면 우리 다 죽어.

몸종의 귓가에 이노야의 호통과 부모의 우는소리가 메아리쳤다. 몸종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삼켰다.

“소인이, 원하는 일입니다.”

몸종이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어둠이 내리자 산어귀에는 인적이 드물어졌다. 아무래도 안 올 모양이었다. 문밖에 나와 있던 손 관주는 몸을 돌리며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일을 어찌하누, 어찌해.”

손 관주가 혼잣말을 했다.

“사부님, 뭘 보세요? 뭘 그렇게 오래 보시는 거예요?”

도동이 이해할 수 없는 듯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손 관주가 안으로 걸음을 내디디며 말했다.

“시간이 늦었구나. 아씨를 뵈러 가야겠다.”

사부님이 지키거나 여도사 둘을 시켜 지키는 통에 종일 사람이 끊인 적 없었는데, 이 저녁에 또 가겠다고? 거긴 몸종도 둘이나 있는데? 도동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사부님을 따라갔다.

마당 안으로 들어서자 새로 온 몸종 둘이 정자에서 조잘조잘 떠드는 모습이 보였다. 바닥에는 호박씨 부스러기가 한가득 널려 있었다. 한편 부엌에 있는 두 여도사는 쟁반을 들고 있었다.

“내가 하마.”

손 관주가 쟁반을 받으려 하자 여도사들이 말렸다.

“사부님, 저희가 할게요.”

저쪽에서 몸종이 풉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가 할까?”

한 몸종이 웃으며 말하면서도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저 사람들이 하게 내버려 둬. 우리 집 덕에 먹고살잖아. 저런 거라도 해야지.”

다른 한 몸종이 웃으며 떠들었다. 손 관주는 못 들은 척하며 방문을 열었다.

“아씨, 흰죽 다 됐어요.”

손 관주의 말에 정교랑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수고가 많네요.”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

손 관주가 웃으며 꿇어앉아 그릇과 젓가락을 챙겨 주었다.

“아씨, 드세요.”

정교랑이 손 관주를 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도사님, 이름이 뭐예요?”

정교랑이 불쑥 물었다.

-복을 나눠 주다-

번화한 동쪽 시장은 보부상이 장사하기 쉬운 곳이 아니었다. 골목골목을 누비며 큰 소리로 호객 행위를 해야 그나마 입에 풀칠할 수 있었다. 보부상 오씨는 짐을 내려놓고 소매로 땀을 닦으며 잠시 쉬었다. 보부상 오씨가 취급하는 물건에는 연지분이며 장난감, 과일 절임, 바늘과 실 등 없는 게 없었다.

어느 집 문안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나 팔아야겠군, 보부상 오씨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땡땡이 장난감을 흔들어 소리를 냈다.

“이봐요, 여기요.”

부인 두 명이 아이의 손을 잡고 손짓하며 불렀다. 부인은 진열대 위의 물건들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아이를 달래려고 애썼다. 서너 살쯤 된 아이 역시 진열대를 붙잡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건을 만지작거렸다.

“과일 절임 먹을래?”

부인이 과일 절임 봉지들을 뒤적이며 물었다.

“앗, 이건 뭐지? 처음 보는 건데.”

“거기 글자 쓰여 있잖아. 뭐라고 쓰여 있어?”

다른 부인이 바짝 다가오며 물었다. 힐끗 보던 보부상 오씨는 어제 현묘관에서 받은 공물인 걸 깨닫고 흠칫 놀랐다. 저게 뭐랬지? 중추절이라 뭐가 둥글다고 한 것 같은데.

“월병입니다. 현묘관의 공물이에요. 거기 여도사 말이 중추절을 맞이하여 단란하게 모이자는 의미로 만들었대요. 보세요, 달처럼 둥글잖아요.”

부인이 물건을 들고 꼼꼼히 쳐다보기도 전에 옆에 있던 아이가 홱 잡아채 기름종이를 뜯었다.

“꽃이다, 꽃.”

아이가 손에 든 월병을 보며 소리치고는 한입 깨물어 먹었다.

“어머, 바로 먹으면 어떡해.”

부인이 놀라 소리쳤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입을 댄 물건을 무를 수는 없는 노릇이라 하는 수 없이 돈을 꺼냈다.

“얼마예요?”

“아주머니, 이건 돈을 받을 수 없어요. 도관에서 보시한 건데 어떻게 돈을 받아요. 같이 복을 나눈 셈 칩시다.”

보부상 오씨가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기분이 좋아진 두 부인은 그 자리에서 실 몇 개를 골라 계산을 끝냈다. 여인들은 작은 거 하나만 챙겨 줘도 좋아한다니까. 기분이 좋아진 보부상 오씨는 멜대를 들고 딸랑이 장난감을 흔들어 소리치며 자리를 떴다. 맞은편에서 뚱뚱한 노인이 너털너털 걸어왔다. 아이가 소리쳐 부르는 모습이 멀리서도 보였다.

“할아버지.”

뚱뚱한 노인은 이쪽으로 달려오던 아이를 성큼성큼 걸어가 안아 주었다. 아이의 손에 있던 월병이 사내의 얼굴에 닿았다.

“이게 뭐냐?”

노인이 웃으며 물었다.

“달이에요.”

아이가 방금 들은 말을 전하자 노인은 놀란 듯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아이가 노인의 입에 월병을 갖다 댔다.

“엄청 맛있어요.”

노인은 입을 벌려 한입 베어 먹더니 순간 눈빛을 반짝였다.

“엇?”

월병을 삼킨 노인은 아쉬운지 월병을 한입 더 베어 먹었다.

“훌륭하구나, 훌륭해.”

골목에 또다시 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내 달 다 먹었잖아요.”

“착하지, 할아비가 더 사줄게. 보부상, 이봐요. 거기 서라고……·.”

마당에 들어서자 한데 모여 조잘조잘 떠드는 몸종들의 모습이 정사낭의 눈에 들어왔다. 정사낭이 심기가 불편한 듯 발을 몇 번 구르자, 몸종들이 얼른 흩어졌다.

“공자님,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춘란이 얼른 정사낭의 겉옷을 받으며 말했다.

“이따 손님이 오실 거다.”

정사낭의 말에 춘란은 네 하고 대답하며 물었다.

“차로 준비할까요, 술로 준비할까요?”

“차.”

정사낭이 방으로 들어가자 춘란이 따라 들어갔다.

“공자님.”

잠시 망설이던 춘란이 결국 입을 열었다.

“현묘관 몸종이 또 바뀌었어요.”

정사낭은 응 하고 대꾸한 것 외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교랑 아씨 쪽에 반근 대신 갔던 그 몸종도 떠났거든요.”

춘란은 한번 입을 열자 멈출 수 없는 듯 이어 말했다.

“알고 보니 어제 노야께서 그 애를 부른 게 그 일 때문이었어요. 장 노태야 댁으로 보냈대요. 그 애가 만든 간식이 입에 맞으시다며……·.”

정사낭은 잠시 멍하니 있었다. 사람이 또 바뀌었다고? 누가 또 데려간 거야? 바보 교랑의 몸종들은 거기 남아나질 못하는 건가, 탐내는 사람이 많은 건가?

“공자님, 장 공자께서 오셨습니다.”

문밖에서 들리는 소리가 두 사람의 대화를 끊었다.

“언니, 이 간식들론 부족할 것 같은데.”

한 몸종이 접시에 놓인 간식들을 보며 말했다.

“여기도 몇 개 있어.”

다른 몸종이 다른 탁자에 있던 기름종이에 싼 과일 절임 몇 개를 들며 말했다.

“이건 어디서 난 거야?”

몸종이 받으며 물었다.

“아, 여기 글씨가 있구나.”

“다 됐니?”

춘란이 들어오며 재촉했다.

“장 공자 오셨어.”

두 몸종은 지체하지 않고 얼른 간식을 챙겨 춘란을 따라 서재로 들어갔다. 공자끼리 담소를 나눌 때에는 몸종들이 곁을 지킬 필요가 없었다. 춘란 같은 측근 시녀도 문밖에 서서 대기해야 했다. 방 안에서는 시와 그림을 논하는 소리와 함께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두 공자는 해 질 녘이 되어서야 아쉬운 듯 자리를 파했다.

“아, 참. 사낭, 자네 집 간식이 맛있군. 우리 집 열셋째 주게 좀 챙겨 갈 수 있겠나. 그 애가 제일 좋아하는 간식이거든.”

문을 나서려던 장 공자가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

“그래, 그래.”

정사낭이 웃으며 물었다.

“어떤 걸 원하는데?”

“저 기름종이에 싼 복숭아.”

장 공자가 손을 뻗어 가리키며 대답했다. 정사낭이 몸종에게 가져오라는 명을 내렸다. 잠시 후 몸종들이 당황하며 돌아왔다.

“공자님, 이건 집에서 한 게 아니에요.”

그중 하나가 대답했다. 장 공자는 뜻밖이라는 눈치였고 정사낭은 난감해했다.

“그럼 어디서 샀는지 거기 가서 사 오면 되지 않느냐.”

정사낭이 말했다.

“아닐세, 아니야. 어디서 샀는지 말해 주면 내가 가서 사겠네.”

장 공자가 얼른 웃으며 말했다. 몸종들은 서로 눈짓을 하고 춘란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춘란 언니가 가져온 거예요.”

춘란은 멈칫했다.

“아, 그게……·.”

그러더니 무언가 생각난 듯 대답했다.

“현묘관 간식 말씀이세요?”

“현묘관?”

장 공자가 다시 한번 물었다.

같은 시각 성 안에서도 여러 사람이 같은 이름을 입에 올렸다.

“현묘관.”

그들은 손에 든 기름종이에 쓰인 꽃무늬 글자와 앞에 있는 집사를 차례로 보며 말했다.

“이게 장 노태야께서 특별히 보내신 중추절 선물이라고?”

현묘관 여도사들의 일상은 예전과 다름없으나 또 많이 달라지기도 했다. 산 위의 태평궁에 있던 몸종이 떠났기 때문이었다.

“사부님께서 앞으론 태평궁에서 지내시겠대. 사매와 둘째 사저도 그쪽 일을 도우러 갔어. 영혜, 향불 좀 봐.”

“사저, 괜찮아. 걱정할 것 없어. 우리 둘이면 충분해. 어차피 사람도 별로 안 오고.”

여도사 영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산문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도사님, 도사님.”

누군가가 크게 소리치며 들어왔다. 얘기를 꺼내자마자 사람이 오다니. 두 여도사는 표정을 가다듬고 얼른 나가 맞이했다.

“여기서 월병을 만들었다지요?”

도관을 찾은 노인이 물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밖에서 몇 명이 더 몰려왔다.

“도사님, 중추절 공물이 남았습니까?”

“도사님, 치성을 드려도 될까요?”

“도사님, 여기 식사나 간식 공양 있습니까?”

왁자지껄 수다스럽게 떠들며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두 여도사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누구의 질문에 먼저 답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갑자기 웬 사람이 이렇게 많아? 두 사람으론 도관이 부족하겠는데!

떠들썩한 산 아래의 도관과 달리 산 위의 태평궁은 여전했다. 부엌에서 두 몸종이 무언가를 만드는 냄새와 조잘조잘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동이 걸어와 고개를 빼고 방 안을 들여다봤다. 병풍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씨, 아씨.”

도동은 겁을 먹은 듯 소리쳤다. 방 안에서 대답이 들리지 않자 도동은 부엌으로 뛰어가 두 몸종에게 물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회랑 아래에 앉아 있었는데.”

두 몸종이 밖을 힐끔 보며 대답했다.

“어이구, 바보가 뜀박질도 잘하네. 또 어딜 간 거야, 말도 한마디 없이.”

“잘 보고 있었어야죠.”

도동은 절박했다.

“누가 할 소린데. 그럼 너희는 문을 지키고 있으면서 뭐 했어? 남의 집 음식을 공으로 먹으려고?”

허리춤에 손을 댄 두 몸종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도동은 놀라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얼른 가서 찾아.”

두 몸종이 미간을 찌푸리며 손가락을 뻗자 도동은 놀라 얼른 뛰어나갔다. 문을 나서다가 하마터면 문턱에 걸려 넘어질 뻔하기도 했다. 뒤에서 두 몸종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도동은 부끄럽기도 하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불안에 떨며 주변을 둘러봤다.

사부님과 사저는 저녁때 아씨 곁을 지켜야 해서 이 시간엔 경전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도동이 잠시 안으로 들어가 향불을 보고 온 사이에 아씨가 사라진 것이었다. 이 바보가 산 아래로 굴러떨어지기라도 하면 어쩌지?

“아씨.”

도동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응?”

측문에서 누군가가 대답했다. 도동이 얼른 손을 들어 눈물을 닦자 그제야 걸어오는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언제나처럼 무늬 없는 비단 겉옷에 붉은 치마 차림으로 흰 버선에 나막신을 신은 채 긴 머리칼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정교랑이었다.

“아씨.”

도동이 얼른 다가가며 소리쳤다. 정교랑은 도동을 보며 나뭇가지로 그린 꽃을 가리켰다.

“어때?”

정교랑이 물었다.

“아니, 어디 가셨던 거예요?”

도동이 물었다.

“산책.”

정교랑은 곧장 정자 쪽으로 걸어가며 대답했다. 반근 언니가 있을 땐 둘이서 매일 산에 올라가 산책을 했겠지. 도동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혼자 산책하는구나.

“아씨, 다음에 나가실 땐 절 부르세요.”

뒤따라가던 도동은 짠한 마음이 들어 큰 소리로 말하다가 곧 말의 속도를 늦추었다.

“절 부르시라고요. 혹여, 늑대라도 만나면, 잡아먹혀요.”

어느새 정자의 돌계단에 앉아 있던 정교랑은 그 말에 도동을 쳐다보며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정교랑은 손에 쥔 나뭇가지로 땅에 그림을 그렸다.

“아씨, 물 드시겠어요?”

“돌 위는 차가워요. 그만 들어가시죠.”

“아씨, 저기, 배 안 고프세요?”

도동이 수시로 물었지만 정교랑은 대답 없이 손에 든 나뭇가지로 가로획, 세로획, 갈고리, 삐침 등을 그려대는 일에 열중했다.

“아씨, 뭘 그리세요?”

도동이 호기심에 몇 발자국 다가가 고개 숙여 쳐다보며 물었다. 바닥에는 갈고리며 삐침이 이리저리 뒤섞여 글자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뭇가지로 세로획과 삐침을 그리자 글자로 보였던 게 꽃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것저것 쓰고 낙서하나 보네. 도동이 고개를 들자 정교랑이 나뭇가지를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바꾸어 계속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보였다. 낙서네, 낙서. 도동은 그렇게 확신했다. 왼손으로 글씨 쓰는 사람이 어디 있어.

“아씨, 아씨.”

앞쪽에서 손 관주의 목소리가 들리자 정교랑과 도동이 소리 나는 곳을 쳐다봤다. 방 쪽으로 급히 달려가는 손 관주의 모습이 보였다.

“사부님, 여기예요.”

도동이 소리쳤다. 손 관주는 그제야 둘을 발견하고 급히 이쪽으로 걸어왔다. 어찌나 허둥대며 걸어오는지 부엌 문가에 서 있던 두 몸종은 그 모습에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아주 난리 나셨네. 잠깐 안 보인다고 저리 허둥대는 꼴 좀 봐.”

한 몸종이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그래야지. 바보 교랑 아씨가 없으면 현묘관도 끝장인걸. 저것 좀 봐. 다음 향불을 어디서 태울지도 교랑 아씨한테 물어볼 태세야.”

뜻밖에도 두 몸종의 추측이 적중했다.

“아씨, 이게 무슨 일이죠? 갑자기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서는……·.”

손 관주가 물었다. 정교랑은 고개를 들어 손 관주를 쳐다보면서도 손에 든 나뭇가지의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음식 공양을 청하네요.”

“잊었어요?”

손 관주의 말에 정교랑이 물었다.

손 관주는 그 질문에 멍해져서 소녀의 무뚝뚝한 표정을 쳐다보다 곧 이성을 회복했다.

“그러니까, 그저께, 산 아래에서 행인들에게 공물을 나눠 준 일이요?”

손 관주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 일 때문에? 설마.

“그게 하나고, 또 하나가 있어요. 반근에게 고마워해야겠네요.”

정교랑이 말했다. 반근? 또다시 멍해졌던 손 관주는 그날 반근이 공물과 말린 과일을 한 바구니 가져갔던 일을 떠올렸다. 성 안에 있는 그 어르신께 갖다 드린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어르신은 비범한 신분 같았다. 선물을 받고 나서 반근의 체면을 챙겨 주고자 현묘관의 이름을 널리 알린 건가?

“하여간 똑똑한 사람들은 그렇다니까요. 그냥 주면 먹지를 못하고, 기어이 뭐라도 해야 마음을 놓죠.”

정교랑은 손에 든 나뭇가지로 꽃을 그리며 말했다. 손발이 자유자재로 움직이니 기분이 정말 좋네. 얼마 안 가 말도 편히 할 수 있겠지. 정교랑이 또다시 손을 바꾸어 몇 글자를 적는 모습을 보며 손 관주는 이내 깨달았다. 담담한 모습으로 눈앞에 앉아 있는 이 소녀의 마음속에 일고 있는 거대하고 맹렬한 기세는 잠재우기 힘들다는 것을.

반근에게 고마워하고 그 어르신에게 고마워해야 한다면, 최종적으로 고맙단 인사를 받을 사람은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었다. 그녀는 이름을 크게 알리고 싶은지 조금 알리고 싶은지 물었다. 이름을 알리고 싶냐고 물은 게 아니었다. 이름을 알리는 정도는 아주 손쉬운 일이라는 듯이. 그러더니 과연 눈 깜짝할 새에 정말 이름을 널리 알리지 않았는가.

“아씨께 감사드립니다.”

손 관주가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정교랑은 딱히 대꾸하지 않고 몸을 일으키며 손에 쥐고 있던 나뭇가지를 내려놓았다.

“아씨, 그럼 음식을 다 썼으니 더 만들어야겠죠?”

손 관주가 무언가 생각난 듯 급히 물었다.

“도사님, 또 잊으셨네요. 여긴 도관이지 음식 장사하는 곳이 아닙니다.”

정교랑이 손 관주를 보며 말했다. 손 관주는 끓어오르던 흥분을 가라앉혔다.

“물건은 흔치 않을수록 귀한 법입니다. 귀한 물건은 정교해야 중한 법이고요.”

정교랑은 그 말을 남기고 방 쪽으로 걸어갔다. 손 관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곧 실소를 터뜨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제가 오랫동안 수행을 헛했군요.”

“그건 아닙니다.”

정교랑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도사님은 당사자라 그렇습니다.”

손 관주는 부끄러운 마음을 담아 다시 한번 예를 표하고, 정교랑이 방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후에야 산에서 내려왔다. 올 때와 비교하자면 발걸음에 한결 여유가 있고 표정도 담담했다.

정교랑과 손 관주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 후 정자 근처에는 도동만이 홀로 남아 있었다. 방금 사부와 저 바보 교랑 아씨가 무슨 얘길 한 거지? 둘이 얘기가 잘 통하는 것 같은데? 난 왜 하나도 못 알아듣겠지?

“사실 내가 바보였던 건가?”

도동이 중얼거렸다.

산 아래 도관에 모여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문 안으로 들어서는 관주를 쳐다봤다. 경건한 표정에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높이 뜬 가을 해의 햇빛이 손 관주의 몸으로 쏟아지자 눈이 부셨다. 이 낡은 도관마저 영험한 기운에 휩싸인 듯 보였다. 현묘관이 과연 다르긴 다르군.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머릿속에 이와 같은 생각이 스쳤다.

나귀 마차에 탄 장 노태야는 떠들썩한 현묘관에서 시선을 거두고 마차 옆에 선 몸종을 쳐다봤다. 몸종은 슬픈 표정을 애써 억누르느라 몸까지 떨리고 있었다.

“반근, 우리와 함께 경성으로 가는 게 싫으냐?”

장 노태야의 물음에 몸종은 깜짝 놀란 듯 정신을 차렸다.

“아, 아니요. 노태야, 소인은 가고 싶어요.”

몸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장 노태야는 껄껄 웃었다.

“그 말을 믿으면, 내가 바보게? 군자는 남의 것을 빼앗지 않는다. 가거라.”

장 노태야가 산 위의 태평궁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몸종은 태평궁을 바라봤다. 불과 한 달 남짓의 시간이었지만 이곳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까지도 뼛속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불태워 버릴 때도 힘을 보탰고 새로 지을 때도 힘을 보탰다. 이곳에서 웃고, 울고, 겁먹고, 두려워하고, 흥분했던 시간들. 지금껏 산 17년보다 한 달 동안 더 많은 경험을 했다. 가벼운 맘으로 오가던 이 길이 지금은 한 걸음 내디디는 것도 이토록 힘든 길이 되다니. 지금 안 올라가면 다시는 못 볼 테고 그럼 아씨께서 얼마나 상심하실까. 그렇다고 올라가자니……·.

몸종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인생에는 언제나 선택의 순간이 있다. 그래도 단 한 번쯤은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눈 딱 감고 결정해도 되지 않을까. 몸종은 산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처음엔 느릿느릿 걷다가 차츰 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하더니 종국에는 층계를 미친 듯이 뛰어 올라갔다. 아씨, 아씨, 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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