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75)

“아씨, 힘드시면 잠깐 쉬시겠어요? 사탕 귤을 가져왔는데 좀 드실래요?”

산길을 걷던 몸종이 정교랑을 향해 예의 바르게 손을 뻗었다. 정교랑은 걸음을 멈추고 몸종이 내민 향낭에서 백설탕이 묻은 알갱이를 꺼내 입에 넣었다. 이곳에서는 산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이제 막 새벽을 지난 터라 산길에는 인적이 없었다.

“점심때쯤 되면 사람이 많아져요. 일용품이나 과일을 파는 사람도 있고요. 아씨께서 드신 귤도 거기서 산 건데 저렴해요.”

몸종의 말에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씨, 그 관주가 얘기하자고 부르면 저 또 가야 해요? 웃는 걸 보고 있자니 너무 거북해요.”

“가.”

정교랑이 말했다.

“하지만 오래 있으면 안 돼. 그 사람이 주는 걸 먹어서도 안 되고.”

몸종은 네 하고 대답했다. 맞은편에서 여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와 정교랑과 몸종은 소리 나는 쪽을 쳐다봤다. 맞은편 산길에서 걸어오던 여도사 셋은 등에 광주리를 멘 채 웃으며 떠들다가 이쪽에 사람이 있는 걸 보고 얼른 웃음을 거둔 후 살짝 예를 표했다.

“산 아래 대현묘관 사람이에요.”

몸종이 정교랑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정교랑은 대현묘관의 일에 대해 잘 몰랐기에 호기심이 일었다. 몸종이 목소리를 낮춰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정교랑은 생각에 잠겼다.

“산 아래에 대현묘관이 있다고?”

정교랑은 아래쪽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몸종은 정교랑을 부축하며 앞으로 몇 걸음 걸어가더니 손으로 어딘지 가리켜 주었다. 녹음 사이로 도관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렇게, 큰 건 아니네.”

정교랑이 말했다.

“우리 도관보다는 크죠. 원래 우리 도관이랑 합치려고 했는데 그 여인이 선수를 쳐서 뺏은 거예요.”

정교랑은 아, 하는 소리를 내고 대답했다.

“정말, 안타깝네.”

“그러니까요. 신선을 모시는 깨끗한 곳이 그 여인 때문에 이 꼴이 될 일도 없고 말이에요.”

몸종은 열이 받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한 듯 말했다. 그런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누군가의 외침 소리가 들렸다.

“노야, 왜 그러세요?”

“사람 살려요! 사람 살려!”

사람을 살리라고? 몸종은 깜짝 놀랐다. 이 벌건 대낮에 산적이라도 나타난 건 아니겠지?

“가 보자.”

정교랑은 앞장서 가며 말했다. 몸종의 눈과 입과 발에 의지하며 지내던 예전의 정교랑과는 달랐다. 이런 기분 정말 좋아. 몸종은 급히 뒤를 따랐다. 산길을 따라 굽이를 돌자 소리는 더욱 시끌벅적해졌다. 대현묘관의 여도사 셋이 벌써 빙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산석 근처에 노인 하나가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옆에 있는 노복은 초조한 마음에 눈물까지 보였다.

“어떻게 된 일이죠?”

“병이 난 거예요?”

“뱀한테 물렸어요?”

여도사들이 긴장한 듯 물었다. 노복은 노인을 업으려고 애를 쓰며 물었다.

“어디로 가야 의원이 있죠?”

“아이고, 거긴 너무 먼데. 성까지 가야 있어요.”

여도사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업는 것을 도와주었다.

“잠깐만요!”

위쪽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리자 다들 걸음을 멈추고 올려다봤다. 남색 무명천으로 지은 치마를 입은 여인 하나가 손에 향낭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오는 모습이 보였다.

“의원을 찾으러 가다간 시간만 허비할 거예요.”

사람들은 뭔가 대꾸하려 했지만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 듯했다.

“낭자께선 의술을 아십니까?”

노복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걸 천천히 먹여 보세요.”

몸종은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고 곧장 말했다.

“몸을 옆으로 눕힌 후 가슴과 배를 쓸어 주면서 귀를 세게 꼬집어 피를 토하게 하면 금방 나을 거예요.”

노복과 여도사 셋은 그 말에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그게 다야?

“그게 다예요, 그럼 곧 깨어나세요. 깨어나시면 급히 가지 말고 좀 앉아 계셔야 해요. 뭘 좀 드시고 가는 게 가장 좋고요.”

말을 마친 몸종은 손에 들고 있던 향낭을 노복에게 쥐여 주고는 뒤돌아 자리를 떴다. 노복과 여도사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 몸종은 이미 굽이를 돌아 산길로 사라진 후였다.

“으응? 저기요, 낭자.”

노복이 소리쳤다.

“우리가 좀 전에 저 낭자를 봤을 땐 두 사람이었어요. 어느 댁 낭자가 산책을 나왔나 봐요.”

한 여도사가 말했다. 노복의 손에 들린 향낭으로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먹으라고? 노복은 안색이 창백해지다 못해 곧 정신을 잃으려 하는 노인을 보더니 이를 악물고 향낭을 거꾸로 들어 쏟았다. 백설탕에 굴린 호두알 크기의 사탕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우리 노야께선 천지에 부끄러운 일 안 하신 분입니다. 이런 분을 해칠 사람은 없죠.”

말을 마친 노복은 손을 뻗어 노인의 입을 벌린 후 알갱이를 먹였다.

같은 시각 몸종은 이미 정교랑과 함께 소현묘관 문밖에 도착해 있었다.

“아씨, 그 사탕 귤을 먹으면 정말 사람 목숨을 구할 수 있어요?”

궁금한 마음을 꾹꾹 누르고 있던 몸종이 결국 못 참고 물었다.

“목숨이 달린 일도 아닌데, 목숨을 구했다고 할 순 없지.”

정교랑은 말을 이었다.

“그냥 가벼운 병세일 뿐이야.”

“그럼 사탕 귤이 약도 되는 거예요?”

몸종은 그래도 이해가 안 가는 듯 물었다.

“찐빵은 약일까?”

정교랑은 몸종을 보며 물었다.

“찐빵은 당연히 약이 아니죠.”

몸종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배가 고파 죽기 직전일 땐, 그게 바로 목숨을 구하는 약이야.”

정교랑이 말했다.

“아씨, 절 놀리느라 그리 말씀하셨군요.”

몸종은 웃으며 정교랑을 부축해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냥 말씀하시면 되잖아요. 저 어르신은 병이 난 게 아니라 배가 고팠던 거라고요.”

“아니지.”

정교랑은 말을 이었다.

“배가 고픈 것도 병이거든.”

몸종은 풉 웃음을 터뜨리고는 그 일에서 관심을 거두고 문 뒤에 쌓여 있는 장작을 쳐다봤다.

“우리 땔감 다 떨어졌어요. 이걸 옮기면 되겠네요.”

몸종은 몸을 구부려 장작을 주우며 말했다.

“어린 낭자가 장작을 옮기면 쓰나. 낭자가 이렇게 몸 쓰는 걸 좋아해서야, 원. 내가 할게.”

장난기 섞인 사내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몸종이 화들짝 놀라 쳐다보자 정교랑도 따라서 고개를 돌리고 쳐다봤다. 언제나 아래로 내려뜨리고 있던 가리개를 이제는 걷어 올리고 다니던 터라 정교랑의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저리 고운 외모라니! 사내는 손에 들고 있던 멜대를 꽈당 소리가 나도록 떨어뜨린 채 넋을 놓고 정교랑을 바라봤다.

몸종은 상대가 그날 관주의 마당에서 마주쳤던 사내임을 알아봤다. 어린 나이였지만 대갓집에서 자란 터라 세상 물정을 일찍 터득한 몸종은 이 사내와 관주 사이에 뭔가 있다는 걸 알았다. 이런 놈은 인성이 쓰레기지. 그날도 날 대놓고 훑어보더니 오늘은 아씨를 저렇게 보네.

몸종은 뒤돌아 총총 걸어가 정교랑의 가리개를 내려뜨려 준 다음, 장작을 내버려 두고 정교랑을 부축해 다른 한쪽에 있는 자신들 거처 마당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노복은 여도사 둘과 함께 조심스레 노인을 부축해 처마 아래의 짚방석 위에 앉혔다.

“피를 닦아야 하지 않을까요?”

한 여도사가 노인의 양쪽 귀에 남은 핏자국을 보며 긴장한 듯 물었다.

“괜찮소, 괜찮아.”

노인은 천천히 말했다. 소식을 들은 관주가 저쪽에서 여도사와 함께 급히 달려왔다.

“관주님.”

세 여도사는 예를 표했다.

“어떻게 된 거죠?”

관주의 물음에 나머지 사람들이 사정을 설명했다.

“폐를 끼쳤구려.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 가겠소이다.”

노인이 말했다. 쇠약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기개가 범상치 않았다. 관주는 얼른 예를 표했다. 산을 오르려던 사람이었구나. 관주와 여도사들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현묘관의 명성이 높지 않기도 했거니와 소현묘관의 평판이 형편없는 탓에 이곳 도관을 방문하는 이는 손에 꼽을 정도였지만 말이다.

이 노인도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사고가 아니었다면 절대 이 도관에 발을 들이지 않았겠지. 노인이 신도가 될 가망은 없어 보였지만 관주는 그래도 노인을 극진하게 대했다. 곧 식탁에 정갈한 식사가 차려졌다.

“도관이라 음식이 소박한 편이니 이해해 주십시오.”

관주가 말했다.

“고맙소, 정말 고맙소이다.”

노인도 예의 있게 대답했다. 관주는 노인이 곧장 젓가락을 드는 대신 손에 들고 있던 향낭을 쏟아 안에 있던 사탕을 천천히 입속에 가져다 넣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게 산에서 낭자가 준 환약인가요?”

관주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묻자 노인은 웃었다.

“실은 환약이 아니오.”

노인은 한 알을 더 꺼내 관주에게 건넸다.

“도사님도 드셔 보시구려.”

환약이 아니라고? 그냥 막 먹어도 되나? 여도사들은 내심 놀랐다.

“그럴 수야 없죠.”

관주는 얼른 사양했다.

“드셔 보래도, 어서요.”

노인은 웃으며 말했다. 좀 쉬고 나니 차츰 기력이 돌아왔다. 나이와 신분이 있는 관주는 자제하며 먹지 않았지만 어린 도동(道童: 도를 닦는 아이) 하나가 호기심을 못 이기고 손을 뻗어 한 알을 받아 들고는 사부의 눈치를 살폈다. 관주가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딱히 나무라지 않자 도동은 안심하고 입속에 넣었다. 입속에 꿀맛이 퍼졌다.

“사부님, 귤이네요!”

도동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벌리자 침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이미 정답을 알고 있던 노인 외에 나머지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귤?”

“산 아래에서 파는 작은 귤이요.”

역시 약이 아니었군. 관주는 생각했다.

“사부님, 귤을 이렇게 먹기도 해요?”

“사부님, 귤은 그냥 먹는 거 아니에요?”

당연히 아니지. 부잣집 사람들은 해바라기씨나 호박씨를 먹을 때도 다양한 방식으로 먹거든. 과일 정과를 만드는 방법은 더욱 번잡하고 사치스럽지. 여도사들이 나지막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던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식사를 시작했다. 입맛이 까다로운지라 소박한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건 당연지사였다.

“노야, 그 아씨 말씀이 식사를 하셔야 한다고……·.”

노인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려고 하자 노복이 얼른 나서서 조용히 말씀을 올렸다. 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네가 이렇게 말을 잘 듣는 건 처음 보는구나.”

노인은 노복을 놀리며 손을 뻗어 귀를 만지더니 낮은 신음 소리를 냈다.

“만평 네놈의 손이 이리 매운 줄은 미처 몰랐다.”

노복은 쓴웃음을 지었다.

“노야, 우스갯소리나 하실 때가 아닙니다. 얼른 식사하시고 바로 의원한테 가 봐야죠.”

“그 낭자가 괜찮을 거라고 했잖느냐. 그 말은 왜 안 들어?”

노인은 웃으면서도 젓가락을 들어 식사를 계속했다. 여도사들은 전부 자리에서 물러났고 관주만 배석하여 노인이 밥이며 국, 반찬을 싹싹 비우는 모습을 지켜봤다. 도동이 물을 올렸다.

“차가 없으니 양해해 주세요.”

관주가 말했다. 나도 밖에선 함부로 차를 마시지 않소, 이리 볼품없는 도관에서라면 더더욱 그렇지. 노인은 미소만 지었다.

“괜찮소이다.”

노인은 투박한 도자기 잔에 담긴 물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식사를 마치고 기력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노인은 작은 도관을 둘러봤다. 푸른 벽돌에 회색 기와를 보니 주인이 공들여 수리한 티가 났지만 낡고 오래된 분위기는 감춰지지 않았고, 영험한 기운보다는 저속한 기운이 느껴졌다. 도관이라는 곳도 역시 오가는 사람이 있어야 영험한 기운이 깃드는 법이다.

물을 마신 노인은 또다시 사탕 귤 두 알을 꺼냈다. 잠시 머뭇거리던 노인은 결국 한 알만 먹고 나머지 한 알은 도로 넣은 다음 몸을 일으켰다. 밖에는 벌써 나귀 마차가 당도해 있었다. 노복은 노인이 마차에 오르도록 부축했고, 관주는 제자들을 데리고 나와 배웅했다.

“정말 고맙소.”

노인의 말에 관주는 얼른 답례했다.

“정말 고맙소.”

노인은 한쪽 옆을 향해 공수하며 말했다. 나귀 마차는 천천히 멀어졌다.

“저 어르신은 정말 예의가 바르시네요. 고맙단 인사를 두 번이나 하시다니요.”

도동이 히히 웃으며 말했다.

“두 번째는 우리한테 한 인사가 아니었어. 그 낭자한테 한 인사지.”

한 여도사가 도동의 머리를 쓰다듬고 웃으며 말했다.

“사저, 그 낭자는 어떤 사람이에요. 산에 사는 선인이에요?”

도동은 궁금해하며 물었다. 산나물을 뜯으러 함께 가지 않은 게 몹시 후회스러웠다. 선인을 볼 수 있는 기회였는데. 도동의 말에 여도사들은 저도 모르게 산 위를 올려다봤다. 쨍쨍 내리쬐는 햇빛이 산을 환히 비추는 가운데 나무숲 사이로 숨어 있는 작은 도관에서 밥 짓는 연기가 올라가고 있었다. 순간 흥이 깼다. 저리 더럽고 불결한 여인이 있으니 선인도 떠나 버리겠지!

몸종이 솥뚜껑을 열자 푹 익은 고기가 솥 안에 들어 있었다. 몸종은 천으로 받쳐 고기를 꺼내고 밥도 한 그릇 담았다. 이어 옆에 있는 독에서 짙푸른 색의 장아찌를 꺼내 접시에 담았다. 몸종은 아궁이의 불이 꺼졌는지 꼼꼼하게 확인한 후에야 쟁반을 받쳐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정교랑은 대청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아씨, 식사부터 하세요.”

몸종은 무릎을 꿇고 펼쳐 놓은 책장을 보며 입을 오므리고 웃었다.

“책 보는 거 안 서두르셔도 돼요. 새해까진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한 쪽은 다 읽으실 수 있을걸요.”

정교랑은 피식 웃었다. 같이 지내다 보니 이 몸종은 예전 그 애처럼 지나치게 조심스럽진 않았고 농담도 곧잘 했다. 따지고 보면 인간관계라는 게 다 이렇다. 낯선 사람이 익숙해지고 익숙했던 사람이 낯설어지고.

정교랑은 젓가락을 들고 고기를 집어 밥 위에 올려놓은 다음 또다시 장아찌를 집어 살짝 섞더니 입에 넣었다.

“그 사람이 관주와 정을 통하는 사내니?”

정교랑이 불쑥 물었다. 아직 시집도 안 간 규수가 이런 말을 입에 올리는 건 부끄러운 일이었다. 몸종은 아씨가 이런 쑥스러운 얘기를 꺼낼 줄은 예상 못 했다. 더구나 아씨는 오늘 밥은 좀 질다는 말을 하듯 평온한 표정이었다.

“그렇겠죠.”

몸종의 대답에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무 말 없이 천천히 밥을 먹었다. 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반근 언니, 반근 언니.”

관주가 거둔 어린아이였다. 몸종이 일어나 나갔다.

“관주님이 잠깐 오래요.”

아이가 쭈뼛쭈뼛 말했다. 몸종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돌려 안에 있는 정교랑을 바라봤다. 정교랑은 몸종을 향해 젓가락을 내저었다.

“네, 다녀올게요.”

몸종은 문을 닫고 나가 아이를 따라갔다. 둘이 자리를 뜨자 다른 한 아이가 한쪽에서 고개를 내밀고 좌우를 살피더니 굳은 결심을 한 듯 살금살금 걸어와 문을 반쯤 열었다. 그러더니 무슨 장난을 치는 건지 후다닥 달아났다.

문소리를 들은 정교랑은 고개를 들었지만 반근이 들어오는 모습이 보이지 않자 잠시 있다가 식사를 계속했다.

“그 몸종을 데려다 밥을 먹는다고 해서 날 내쫓을 것까진 없잖아. 같이 먹으면 좀 좋아.”

사내는 뒷문으로 불쑥 들어오며 답답한 듯 투덜거렸다.

“급할수록 돌아가란 말도 있고 말이야. 난 아직 배불리 먹지도 못했는데.”

사내가 돌연 걸음을 멈추고 반쯤 열린 문을 쳐다봤다. 그 바보 낭자가 사는 곳이네. 바보 낭자라는 단어가 떠오르자 이른 아침에 보았던 생전 처음 본 눈부신 미모가 사내의 눈에 언뜻 스쳤다. 무엇보다도 바보란 말이지. 바보, 아무것도 모르는.

호흡이 가빠진 사내는 쩝쩝 입맛을 다셨다. 가을인데도 온몸이 후끈 달아오른 통에 사내는 옷섶을 풀어헤쳤다. 털이 무성하고 까무잡잡한 가슴이 드러났다. 사내는 문이 반쯤 열린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낭자.”

사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청 안을 쳐다봤다.

“우리 강주성 생선이 엄청 유명하거든. 예전에 물이 많을 땐 우리 집 대문 밖에 나가 아무렇게나 낚싯대를 던져도 고기가 잡혔다니까.”

관주는 방금 식탁 위에 차려 놓은 싱싱한 생선을 가리키며 열심히 떠들어댔다. 몸종은 아, 하고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너희 아씨는 식사했지?”

관주가 물었다.

“네, 지금 들고 계세요.”

몸종은 걸음을 옮기려 했다.

“별일 없으시면 아씨 시중들러 갈게요.”

“에이, 어차피 혼자 먹으니까 혼자 먹게 둬. 자, 이리 앉아. 여기서 나랑 같이 먹자.”

관주는 웃으며 젓가락을 건넸다.

“매일 남이 먹다 남은 음식이랑 찬밥만 먹다니 딱해라.”

“아니에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관주님.”

두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는 와중에 문밖에서 아이들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언니, 장작 어디 있어?”

“아저씨가 가지러 가지 않았어?”

“아, 그래? 나 반근 언니네서 아저씨 봤는데.”

“반근 언니네 먼저 가져다주나 보지. 기다려 봐.”

두 사람은 방에서 그 말을 듣고 멈칫했다가 곧 안색이 싹 변했다. 몸종이 먼저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왔다. 초조한 마음으로 급히 걸음을 옮기던 몸종은 하마터면 넘어질 뻔하기도 했다. 문을 나서기도 전에 벌써 눈물범벅이 된 몸종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관주 역시 곧바로 뒤따라 나오더니 손을 들어 마당에 서 있던 아이 하나의 따귀를 때렸다.

“망할 것, 왜 아저씨를 안 불렀어!”

아이를 혼낸 관주는 급히 밖으로 나갔다. 이 망할 놈이 누구 신세를 망치려고!

“낭자, 내가, 같이 놀아 줄까? 나비를, 잡아 주면 어때?”

사내는 대청을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걸음을 옮겼다. 단정히 앉아 밥을 먹는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품이 넓은 수수한 옷차림에 가지런히 풀어 놓은 흑발은 어찌나 풍성한지 바닥까지 닿았다. 소녀는 조용히 젓가락을 들며 이쪽을 쳐다봤다.

바보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와 같다. 마을에서도 그런 바보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저 먹고 놀며 멍청하게 웃는 것 외에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돌멩이를 주며 얼렀더니 사탕인 줄 알고 먹다가 이가 빠진 일도 있었다.

“이 오라비가 사탕 줄게. 사탕 먹지 않을래?”

사내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마침내 회랑 아래까지 왔다. 소녀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일수록 자신을 억제할 수 없었다. 사내는 나무 난간을 짚고 엉거주춤 앉아 바닥에 떨어져 있는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눈앞의 소녀는 입을 씰룩이며 웃는 듯했다. 웃는 거야? 웃었지? 역시 이 방법이 잘 통하네!

사내는 목이 탔다. 이 해맑은 소녀에게선 다른 바보들처럼 역겨운 느낌이 전혀 안 드네. 그냥 보기만 하는 건 안 되겠어. 사내는 입술을 핥았다.

“낭자, 이 오라비한테 사탕이 있거든. 먹을래?”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던 사내는 몸이 달았다. 사타구니 밑이 불끈 솟자 사내는 한 손으로 잡고 주무르면서 다른 한 손으로 섬돌을 짚더니 훌쩍 뛰어 올라왔다. 대청 안의 정교랑은 입에 넣고 있던 젓가락을 천천히 빼 손에 쥐고는 사내를 조용히 바라봤다.

문밖에서 시끄러운 발소리가 들렸지만 사내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사내는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이미 대청 안으로 들어선 사내를 본 몸종은 날카로운 비명을 내지르더니 옆에 있던 빗장을 들고 달려들었다. 몸종은 말도 나오지 않는지 비명만 내지르며 사내를 향해 무작정 달려들었다.

흠칫 놀란 사내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연달아 두 대를 맞았는데 여자라 힘이 들어간 건 아니었지만 그 광기 어린 모습은 놀라기에 충분했다. 사내는 얼른 물러났다.

“오해야, 오해. 난 장작을 가져왔는데, 이 바보가 날 불렀어.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해서 들어온 건데.”

사내는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여전히 이성을 잃은 몸종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이 망할 놈을 패 죽이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겁도 없는 놈 같으니라고.

사내도 부아가 치밀었다. 어차피 조만간 내 노리개가 될 계집인데, 조그만 게 어디서 이리 방자하게 굴어! 사내가 잽싸게 손을 놀려 빗장을 낚아챘다.

“망할 년, 맞아야 정신을……·.”

사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가에서 여인의 날카로운 고함 소리가 또 들렸다.

“황이낭, 지금 뭐 하는 거야!”

관주는 아이에게 소리치는 시늉을 했다.

“어서 정씨 댁 대노야와 이노야께 알려라. 감히 정씨 가문에 행패를 부리는 놈이 있다고!”

사내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래, 여긴 정씨 가문의 소유였지! 상대는 정씨 집안 아씨고, 아무렇게나 대할 수 있는 아랫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측실 소생도 아닌 정실부인의 혈육 아닌가! 이 일이 새어 나갔다간 맞아 죽을 터였다.

“오해입니다, 오해요. 내가 말했잖아요. 내가 여길 지나는데 이분이 부르길래 무슨 일인가 하고 들어와 본 거라니까요!”

사내는 높이 쳐들었던 빗장을 바닥에 확 내던지고는 억울하다는 시늉을 하며 소리쳤다. 빗장을 빼앗기며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던 몸종은 울면서 사내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관주가 얼른 몸종 앞을 막아섰다.

“황이낭, 앞으로 장작 가져올 필요 없으니까 당장 꺼져!”

관주는 사내에게 소리치고 나서 몸종을 달랬다.

“겁낼 것 없어, 내가 있잖아.”

네가 있어서 이런 일이 생긴 거잖아! 몸종은 여인에게 달려들었다. 미처 방어하지 못한 관주는 깜짝 놀랐고 머리채와 얼굴을 붙잡혔다.

“미쳤네, 미쳤어. 얼른 얘 좀 말려.”

관주가 소리쳤지만 사내는 이미 도망친 후였고, 아이들은 겁을 먹은 채 감히 다가오지 못했다. 몸종에게 붙잡힌 관주는 여기저기 찢기고 뜯긴 후에야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이미 이성을 잃은 몸종을 보고 관주는 서둘러 자리를 뜨려 했다.

“너희가 잘 지켜보고 위로해 줘. 난 저놈 도망갔나 보고 사람 불러올 테니까.”

관주가 나가자 두 아이도 겁을 먹고 재빨리 도망쳤다. 몸종은 쫓아가려다가 힘이 쭉 빠진 듯 몇 걸음 못 가고 넘어져 대성통곡을 했다.

이런 엄청난 소동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정교랑은 아랑곳하지 않고 느릿느릿 밥을 먹었다. 정교랑은 식성이 까다로워 좋아하지 않는 음식은 입에도 안 댔지만, 입맛에 맞는 음식이 있으면 싹싹 비우곤 했다. 정교랑이 마지막 밥풀 하나까지 다 먹었을 즈음 몸종이 울며 비틀비틀 걸어왔다.

“아씨, 아씨, 아무 일 없으셨죠?”

몸종은 울면서 묻다가 퍼뜩 생각했다. 일이 있고 없고가 다 무엇인가. 규방 여인이 이런 취급을 당한 것만으로도 엄청난 수치인데 정말 꼭 ……·을 당해야 일이 있는 것일가? 몸종은 뒤로 몇 걸음 물러나 바닥에 머리를 쾅쾅 찧으며 절을 올렸다.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어요.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몸종은 울며 잘못을 빌었다.

“반근!”

정교랑이 소리치자 몸종은 눈물범벅인 얼굴로 고개를 들어 정교랑을 보며 물었다.

“아씨, 하실 말씀, 있으세요?”

“밥 더 줘.”

정교랑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릇은 싹 비워져 있었다. 몸종은 그릇을 하나씩 거두고 국물을 한 그릇 올려놓았다.

“아씨, 배즙이에요.”

몸종이 목멘 목소리로 말했다. 정교랑은 손을 뻗어 숟가락으로 천천히 떠 먹었다. 몸종은 옆에서 또다시 훌쩍이기 시작했다.

“아씨, 우리 돌아가요. 우리 돌아가서 노야와 부인께 말씀드려요. 못 돌아가게 하지는 않으실 거예요.”

“어리석은 소리.”

정교랑이 말했다. 간신히 나왔는데 뭐 하러 돌아가.

“저 천박한 연놈이 너무 가증스러워요. 너무 가증스럽다고요!”

우느라 눈이 퉁퉁 부어오른 몸종과 달리 정교랑의 표정엔 변함이 없었다. 맷돌로 갈아 만든 배즙은 어찌나 투명한지 고개를 숙이면 배즙에 얼굴이 비칠 정도였다. 고개를 숙이자 머리카락 아래로 먹물처럼 진하고 긴 눈썹과 함께 더욱 심원해 보이는 두 눈이 드러났다.

“악행을 저지른 사람을 살려 둬선 안 되지.”

정교랑은 고개를 들어 몸종을 바라보며 물었다.

“반근, 너한테 시킬 일이 있어. 할 수 있겠니?”

반근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씨, 소인더러 나가 죽으라 하셔도 소인은 할 거예요.”

정교랑은 입을 오므리며 피식 웃었다.

“왜 네가 나가 죽어? 죽어야 할 사람은 네가 아닌데.”


어둠의 장막이 내릴 무렵, 정전 담벼락 모퉁이에 서 있던 몸종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산이라 그런지 가을이 되자 집에서 지내던 때보다 훨씬 추웠다. 몸종은 어깨를 움츠리며 끌어안았다. 산속의 밤은 다른 곳보다 훨씬 어두컴컴하고 조용해서 이름 모를 산짐승의 울음소리 역시 한층 더 또렷하게 들렸다.

마침내 이까지 덜덜 떨리게 됐을 즈음,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몸종은 얼른 숨을 죽이고 신경을 곤두세워 담벼락에 몸을 바짝 밀착시켰다. 짙은 어둠 속이었지만 몸종은 그 사람의 형체를 알아볼 수 있을 것 겉 같았다. 몸종의 몸이 또다시 떨려 왔다. 몸종은 손톱으로 손바닥을 꽉 누르며 분노와 공포의 마음을 삭였다.

커다란 체구의 사람 하나와 작은 체구의 사람 하나가 저쪽 마당에서 휙 지나가는가 싶더니 문을 걸어 잠갔다. 몸종은 또다시 잠시 기다린 다음에야 몸을 떨며 도망쳤다. 떨리는 손을 진정시켜 가며 간신히 자물쇠를 열고 안으로 들어간 몸종은 잽싸게 빗장을 걸었다. 문에 기대 헉헉 숨을 몰아쉬던 몸종은 문득 회랑 아래에 선 사람의 형체를 발견하고 놀라 비명을 내질렀다.

“나야.”

정교랑이 말했다. 몸종은 가슴을 치며 몇 번이나 숨을 고른 후에야 진정했다.

“아씨, 여기 서서 뭐 하세요?”

몸종은 빠르게 앞으로 다가가 안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에 기대 정교랑을 바라봤다. 정교랑은 버선만 신은 채로 회랑 아래에 서서 말했다.

“하늘을 보고 있었어.”

정교랑은 고개를 살짝 들어 밤하늘을 보며 말했다. 밤하늘은 칠흑같이 어두워 별빛 하나 없었다. 몸종은 시선을 거뒀다. 저게 뭐가 예쁘다고.

“아씨, 날이 차요. 신도 안 신고 여기 서 계시면 안 돼요.”

몸종은 정교랑을 부축해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침상 앞에 앉았는데 몸종은 긴장한 표정이었다.

“아씨, 그 망할 놈이 진짜 왔어요.”

몸종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떡하죠?”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일이 쉽겠네.”

나쁜 놈이 왔는데 일이 쉽다고? 몸종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묻지 않고 등불 아래의 아씨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치욕스럽고 무서운 일을 다른 여인이 겪었다면 분노와 슬픔을 못 이겨 진작 눈물을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아씨는 시종일관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그 평온한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몸종은 불안에 떨던 마음이 위로를 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바보가 위안이 된다고 한다면 누가 믿겠는가. 게다가 의지가 되는 것 같기도 하다니.

“그 사람이, 안 왔다면, 그게 오히려 위험하지. 이판사판으로 나가겠단 거니까. 그랬다다면, 우리에게 시간이 없었어.”

정교랑은 몸종을 보며 몇 마디 더 하기로 마음먹었다. 안 그랬다간 이 몸종이 계속 불안에 떠는 통에 오히려 실수를 피하기 힘들 것 같았다.

“그 사람이 왔다는 건, 겁이 난단 뜻이야. 그 여인과 함께 대책을 논의하려는 거지. 분명 바보인 나를 상대하기 위한 대책일 거야. 이 일을 오해였다고 말하고, 널 위로하면서, 네가 이 일을 소문내지 못하도록 하겠지. 그렇다면, 저들은 우릴 괴롭히지 않을 거야. 우리는 당분간, 안전할 테고.”

말뜻을 퍼뜩 깨달은 몸종은 마음이 한결 평온해졌다.

“그런지 아닌지는 내일 보면 알 거야.”

정교랑은 천천히 누우며 말했다. 길게 말한 탓에 완전히 지쳐 버렸다. 몸종은 얼른 베개를 정돈하고 얇은 이불을 덮어 준 다음, 눈을 감은 정교랑을 보며 침상 앞에 앉았다. 정교랑이 방금 한 말을 생각하던 몸종은 별안간 몸을 곧추세워 똑바로 앉았다.

“아씨, 우리가 당분간 안전하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그다음에는요? 저들이 또 우리에게……·.”

몸종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운 정교랑은 꼼짝도 하지 않고 별다른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잠이 든 것 같아 몸종은 더 이상 캐물을 수 없었다. 이 일이 무섭기로 따지자면 아씨가 자신보다 더 무서울 텐데 이렇게 자꾸 그 일을 떠올리게 해서는 안 되지 싶었다. 몸종은 불을 끄고 휘장을 쳤다.

이제 일상의 모든 일은 몸종 혼자의 몫이었다. 설거지를 하고 장아찌를 담그는 등 낮에 못다 한 일은 전부 저녁 시간을 이용해야 했다. 부엌에 불이 켜지고 작은 형체가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였다. 방 안에 있는 정교랑은 천천히 몸을 돌리더니 눈을 떴다.

“그다음? 그다음엔 아마 그자에게 기회가 없을걸.”

정교랑이 천천히 말했다.

날이 밝았다. 오늘도 밖으로 산책을 나가겠다는 정교랑의 말에 몸종은 거의 울상을 지었다.

“아씨, 우리 그냥 집에 있어요. 나가는 건 너무 위험해요.”

몸종이 말했다.

“집에 있으면, 무슨 위험이 있는지 영원히 알 수 없고, 대응책도 없어. 그게 가장 위험한 거야.”

정교랑은 몸종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가자, 겁낼 것 없어.”

정말 겁내지 않아도 될까? 몸종은 덜덜 떨며 문을 열다가 깜짝 놀라 비명을 내지르며 빗장을 집어 들었다.

“아씨, 용서하십시오. 아씨, 용서하세요.”

문 앞에 꿇어앉은 사내가 쾅쾅 머리를 찧으며 절을 올렸다.

“어제 일은 전부 제 잘못입니다. 아씨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 드렸으니 때리셔도 좋고 벌하셔도 좋습니다. 부디 목숨만 살려 주세요.”

사내는 울며 호소했다.

“집에 팔순 노모와 세 살 난 아들이 있습니다. 집안 식구가 전부 저 하나만 의지해 살고 있어요. 아씨, 제발 살려 주십시오.”

옆에 선 관주 역시 매서운 목소리로 사내를 꾸짖으며 거들었다.

“아씨의 심기를 그리 건드리고도 살아남길 바라느냐?”

“도사님, 부디 살펴 주십시오. 어제는 정말 아씨께서 부르시는 소리를 듣고 들어가 봤던 겁니다. 정말 그런 거 아니에요.”

사내는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못 믿겠으면 아씨께 여쭤보세요.”

“우리 아씨께서는 정신이 온전치 못하시니 네가 우기면 그만 아니냐. 무슨 수로 대질을 해?”

관주가 호통을 쳤다.

“그렇다고 도사님이 말씀하시는 그런 거라고 할 순 없잖습니까. 전 정말 억울합니다!”

사내는 정말 억울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몸종은 그 광경을 보고 들으며 열이 받아 부들부들 떨었다. 이게 바로 두 연놈이 어젯밤에 생각해 낸 대책이렷다! 아씨가 바보인 줄 알고 모든 책임을 아씨에게 떠넘기려는 것이었다. 자기네 말은 다 맞고 바보의 말은 다 틀린 거니까.

다만 저들은 아씨는 바보가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다. 몸종은 빗장을 꼭 쥐고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려고 했지만 한발 먼저 정교랑의 목소리가 들렸다.

“놀러 가자, 나비 잡으러 가.”

몸종은 멈칫했고 관주 역시 멈칫했지만 꿇어앉은 사내만은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봐요, 보십시오. 어제도 이 말씀을 하셨어요!”

사내는 손을 뻗어 정교랑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어제 절 부르며 들어오라고 하더니 나비를 잡아 달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산에는 나비가 없다고 하니까 울며 떼를 쓰셨죠. 저는 놀라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여 달래 드리러 들어갔는데 그때 두 분이 들어와서 다짜고짜 때린 거예요!”

정말 뜻밖이었다. 이 바보가 말을 할 줄 알다니, 그것도 아주 적절한 때에 꼭 필요한 말을 해 줬어. 사내는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바닥에서 일어났다. 몸종은 속으로 놀랐으면서도 아씨의 뜻을 알아듣고 빗장만 높이 쳐든 채 앞으로 더 다가서지는 않았다.

“그, 그래도 우리 집 마당에 함부로 들어오면 안 되죠. 우리 아씨는 바보고 아무것도 모르시지만, 당, 당신도 모르는 건 아니잖아요?”

몸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성공이다! 관주와 사내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난 아씨가 바보인 줄 몰랐잖소.”

사내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됐네, 황이낭. 챙길 거 다 챙기면서 잔머리까지 굴리진 말라고. 자네가 식구들이랑 힘겹게 사는 형편을 아니까 장작을 대며 돈을 벌게 해 준 건데, 어디 법도도 모르고 도관을 함부로 돌아다녀!”

관주는 사내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사내는 입을 삐죽거리며 못마땅한 듯 말없이 서 있었다.

“그래, 그래. 오해로 밝혀졌으니 반근 낭자도 그만 화 풀어.”

이어 관주는 사내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냉큼 꺼지게. 목숨만은 살려 주지. 앞으론 장작 가져올 필요 없어.”

사내는 우물쭈물하며 뭐라고 툴툴거리더니 몸을 돌려 가 버렸다. 관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웃으며 반근 손에 들린 빗장을 빼앗았다.

“그래, 그래. 내가 내쫓았으니 앞으론 도관에 얼씬도 못 할 거야. 반근 낭자도 그만 화 풀어. 다 내 잘못이야.”

반근은 빗장을 들어 여인의 머리를 후려치고 싶은 걸 아랫입술을 깨물며 간신히 참았다.

“놀러 가자, 놀러 갈래.”

정교랑이 뒤에서 말했다. 반근은 손을 풀며 정교랑의 말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관주를 바라봤다.

“그래, 그래, 착하지. 이번엔 정말 많이 놀랐을 거야. 이따 저녁에 내가 음식 몇 개 해서 갖다 줄 테니까 마음 풀어.”

몸종은 고개를 숙인 채 관주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씨 모시고 놀러 갈게요.”

“그래, 그래, 가 봐.”

관주는 웃으며 어깨를 두드려 주고 탄식했다.

“정말 고생이 많아.”

몸종은 대꾸하지 않고 정교랑을 부축해 가 버렸다. 두 사람이 마당에서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관주의 얼굴에 득의양양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뭐랬어. 바보 하나에 어린애 하나인데 달래기 힘들 것도 없지.”

말을 마친 관주는 여유롭게 자리를 떴다.

담벼락에 있던 두 아이가 장작 위에 천천히 앉았다.

“언니, 우리 도망치자.”

이번엔 언니도 대답이 없었다. 아직 새벽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두 아이는 바들바들 떨며 앉아 있었다.

정교랑은 도관을 두 바퀴 돌았다. 예전과 달리 이번엔 아주 천천히 걸으며 수시로 걸음을 멈췄다. 근심이 있는 몸종 역시 마음이 딴 데 가 있다 보니 갑자기 걸음을 멈추곤 하는 정교랑과 부딪치기 일쑤였다.

“아씨, 힘드세요?”

몸종이 부축하며 얼른 묻자 정교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곳 높이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도관이 작게 보였다. 몸종은 정교랑을 따라 멍하니 쳐다봤다.

“저기 봐, 저기 지붕이 망가졌네.”

정교랑이 말했다. 엥? 멈칫한 몸종이 제대로 쳐다봤다. 좀 낡고 오래되긴 했어도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다. 근데 이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지?

햇빛이 점점 밝아지자 몸종은 정교랑에게 너울을 씌워 주고 도관 쪽으로 걸어갔다. 아직 입구에 채 도착하기 전, 구석에서 누군가가 툭 튀어나왔다. 아직 마음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몸종은 사람이 갑자기 튀어나오자 비명을 내지르며 정교랑을 와락 껴안았다. 그러자 튀어나온 사람이 되레 놀라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상대는 12~13살쯤 된 소년이었는데 낡은 무명 홑옷 차림으로 어리벙벙한 모습이었다.

“청매 누나?”

소년이 물었다. 몸종이 반근으로 개명하기 전의 이름이 청매였다.

“우리 누나는 춘란인데 누나 심부름으로 왔어.”

소년의 말에 몸종은 그제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게 뭐야?”

몸종은 소년이 건네는 쌈지를 받으며 이해할 수 없는 듯 물었다.

“우리 누나가 갖다 주라고 한 돈이야.”

소년이 말했다. 청매는 쌈지를 열어 안에 든 쇄은 몇 개를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네 누나가 나한테 돈을 왜 주는데?”

몸종이 물었다. 몸종은 정씨 저택에 있을 때 신분이 낮았기에 공자를 모시는 몸종과는 자연히 격이 달랐다. 공자를 측근에서 모시는 몸종들은 평상시 이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제는 집에서 쫓겨난 처지고 평생 돌아갈 길도 요원해 보이는데 돈을 보내 줬다고? 이게 무슨 뜻이지?

“누나한테 주는 건 아니고.”

소년이 말했다.

“우리 누나가 예전 그 반근 누나한테 은혜를 입었는데, 떠나기 전에 우리 누나한테 아씨를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했거든. 밖에 나와 지내니 고생할까 봐 돈을 좀 모아서 보내는 거야. 아씨한테 맛있는 거 해 드리라고.”

무슨 일인지 이해한 몸종은 저도 모르게 콧잔등이 시큰해져 눈물을 뚝뚝 흘렸다. 소년은 깜짝 놀랐다. 바보를 따르더니 정상이 아니네. 갑자기 비명을 지르질 않나, 눈물을 보이질 않나.

“네 누나한테 고맙다고 전해 줘.”

몸종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정씨 저택에 있는 그 수많은 사람 중에 아씨를 염려하는 몸종이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예전 그 반근에게 부탁을 받았다고는 하나 사람이 떠나면 인정도 사라지는 법, 남에게 받은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데 말이다.

“고마워할 것 없어. 난 집 뒤쪽 골목에 사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사람을 시켜 날 찾아.”

말을 마친 소년은 뒤돌아 자리를 뜨려고 했다.

“잠깐만.”

쭉 뒤쪽에 앉아 있던 정교랑이 입을 열었다. 소년은 멈칫하고 너울을 쓴 채 회랑 아래에 앉아 있는 여인을 뒤돌아 바라보았다.

“저 사람이, 날 부른 거야?”

소년은 궁금해하며 물었다.

“그래.”

정교랑이 말했다.

“반근, 돈을 돌려줘.”

몸종과 소년은 멈칫했다. 전에 있던 그 몸종에게 아직 화가 안 풀렸을 테니 그 은혜를 입고 싶진 않겠지. 그렇게 생각한 몸종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네 하고 대답한 후 소년에게 쌈지를 건넸다.

“왜 이러세요?”

소년은 멍한 채로 말했다.

“네가, 도와줄 일이 있다. 이건 네게 주는 품삯이야.”

정교랑이 말했다.

몸종과 소년은 둘 다 멈칫했다.

“뭘, 뭘 도와달라는 건데요?”

소년은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여기 지붕이 망가졌거든. 미장이를 불러다가 지붕을 수리하도록 해 줘.”

정교랑이 말했다. 지붕이 망가진 게 자신들과 무슨 상관이지? 몸종은 놀라 정교랑을 바라봤다.

사내가 방 안으로 훅 들어올 때 관주는 침상에 누워 잠깐 눈을 붙이고 있었다. 움직임 소리에 눈을 뜬 관주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대낮에, 어떻게 들어온 거야!”

관주가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사내는 위에서 몸을 내리누르고는 웃으며 여인의 몸을 어루만졌다.

“아무 일 없이 지나갔잖아. 어떻게 안 와. 며칠이나 안 했더니 몸이 달아 죽겠어.”

사내는 웃으며 말했다. 여인은 몇 번 밀어내려고 애쓰다가 안 되자 결국 부둥켜안았다.

“좀 피해 있으라니까. 내가 그 몸종을 다독이고 나면 그때 오라고.”

여인이 머리를 정리하며 말했다.

“그 애송이 몸종은 당신 손바닥 안에 있잖아.”

사내는 침상 위에 누워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말했다. 여인은 흥 콧방귀를 뀌며 사내를 흘겨보고 주먹을 들어 매섭게 내리쳤다.

“무슨 짓이야?”

복부를 가격당한 사내는 고통을 호소하며 소리쳤다. 여인은 사내를 무섭게 노려봤다.

“진짜 가리는 게 없네. 어떻게 바보까지 탐내냐고!”

여인이 원망하자 사내는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바보 얘기가 나오면서 자연스레 그 바보의 미모를 떠올리니 억누르고 있던 불길이 순식간에 화르르 타올랐다. 그리 예쁘게 생긴 바보가 아무것도 모른단 말인지. 그렇담 침상에서도 뭐든 시키는 대로 다 할 테고. 사내는 일어나 여인을 어루만졌다.

“바보인데 그냥 버리긴 아깝잖아.”

사내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죽으려면 혼자 죽어, 나까지 끌어들이지 말고!”

여인은 앙칼지게 소리쳤다.

“당신이 있는데 내가 아쉬워서 어떻게 죽어.”

사내는 웃으며 여인에게 입을 맞추고 달래 주었다.

“이 도관은 전부 당신이 좌지우지하잖아. 정씨 가문에서도 바보를 여기에 버렸다는 건 상관 안 하겠단 뜻이고. 정씨 가문에서도 내친 애를 뭐 하러 아씨로 떠받들어. 착하지, 그러지 말고 나도 덕 좀 보자.”

여인은 어루만지는 손길을 당해내지 못하고 애증의 눈길로 사내를 바라봤다. 자신은 이미 나이가 들었다는 걸 알고 있었고 딱히 돈도 없었다. 이 사내를 꽉 붙잡아 두려면 새로운 맛을 보여 주는 수밖에.

몸종 하나에 바보 하나 정도는 손안에 두고 휘어잡기에 어려울 것도 없었다. 일이 성사되더라도 저들이 소문을 낼 리 없고 이 사내를 꼬셔 자기 것으로 만들려 애쓰지도 않을 테니 이보다 좋을 순 없었다.

“몸종을 굴복시키기 전까진 일단 바보의 심기를 건드리지 마.”

여인은 손을 뻗어 사내의 이마를 쿡 찍으며 말했다. 사내는 뛸 듯이 기뻤다. 선이 있으면 후가 있는 법, 선후가 어찌 되든 간에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기쁜 일이었다. 사내는 여인을 끌어안고 내리눌렀다.

“내 수완이 어떤지는 당신도 알잖아. 장담하는데 그 계집애가 일단 맛을 보면 밤낮없이 그리워하게 될 거야.”

사내는 음흉하게 웃었다. 여인은 그 말에 내심 질투가 나면서도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혀 몸을 반듯이 누우며 사내에게 응했다. 막 일을 시작하려는데 여럿이 웅성거리는 듯 문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놀란 두 사람은 얼른 옷을 걸치며 일어났다.

“무슨 일이지? 밖에 누구야?”

여인은 당황하여 소리쳤다. 밖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꽤 들리는데, 설마 그 계집이 가서 고자질하는 바람에 정씨 집안에서 사람을 보낸 건가? 아니야, 애들보고 그 둘을 단단히 감시하라고 했는데 별다른 낌새는 없었잖아? 용기를 내어 마당으로 나온 여인의 눈에 광주리를 들거나 밧줄을 진 사내들이 마당을 둘러싸고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왁자지껄 떠드는 모습이 보였다.

“건물을 수리하러 온 거예요?”

놀란 여인이 물었다.

“네.”

몸종이 뒤쪽에서 급히 나오며 대답했다.

“관주님, 우리 쪽 건물이 낡아 비가 새서 수리하려고 사람을 불렀거든요. 관주님 쪽도 같이 수리하려고요.”

돈도 안 냈는데 건물을 수리해 주겠다니 더없이 좋은 일이었다. 여인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좋지. 그렇지 않아도 요새 비가 많이 와서 사람을 부르려던 참이었는데, 그럼 같이 수리해 줘.”

뒤에 서 있던 두 아이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실망이 가득 담긴 눈길이었다. 그 소년이 온 게 기회인 줄 알았는데, 건물을 수리할 사람을 데려오라고 돌려보내다니. 바보네, 역시 바보였구나.

건초와 마른풀을 짊어진 사람들이 수시로 오가면서 길 위는 시끄러워졌다. 무슨 일인지 연유를 알아본 대현묘관 사람들은 산 위에 있는 소현묘관에서 지붕을 수리한다는 소식에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저 여인이 돈은 또 어디서 났나 몰라.”

여도사의 말에 도동이 중얼거렸다.

“먹고 마실 걱정이 없으니 건물까지 수리하는 거겠죠.”

그런 말을 나누고 있는데 여도사 하나가 돌연 문밖을 손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기 좀 봐, 저기.”

문을 활짝 열어 놓은 터라 밖으로 난 길이 한눈에 보였다. 12~13살쯤 된 소년이 좌우 양손에 연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연이 뭐 볼 게 있다고?”

도동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이 계절엔 잘 안 보이지만 아주 드문 것도 아니잖아요.”

“아니, 저 여인 말이야.”

여도사가 말했다. 여인? 모두가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어린 낭자 하나가 그 소년을 맞이하는 모습이 보였다. 소년은 손에 있는 연을 들어 보이며 이 정도면 괜찮냐고 묻는 듯했다.

“어머나, 그 낭자네!”

한 여도사가 소리쳤다.

“누구요?”

도동은 무슨 말인지 몰라 물었다.

“그 낭자 말이야. 산에서 그 노인한테 사탕 귤을 줬던 낭자.”

여도사가 말했다. 선인이구나! 도동은 놀라며 얼른 밖으로 뛰어갔다. 나머지 사람들도 급히 뛰어나갔고 관주도 따라갔다.

“그 낭자가 맞는다면 그 어르신 대신 고맙다고 인사해야지.”

사람들이 문밖으로 나왔을 무렵, 그 낭자와 소년은 이미 가 버린 후였다.

“저기, 낭자.”

소리쳐 부르려던 여도사는 그들이 산 위의 소현묘관 방향으로 가는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말을 멈췄다. 이어 진흙 광주리를 등에 멘 사내 둘이 뒤따라 올라갔다.

“낭자, 짚은 오후나 돼서야 올 겁니다.”

“시간이 지체되면 안 돼요. 오후엔 꼭 끝내야 해요.”

사내들의 말에 몸종이 대답했다. 대현묘관 밖으로 나온 여도사들은 이들이 말을 주고받으며 산 위로 올라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아, 그 선인이 소현묘관에 사는 거예요?”

도동은 고개를 돌려 사저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선인은 그런 곳에 안 살아!”

여도사들은 곤혹스럽기도 하고 실망스럽기도 한 표정이었다.

“새로 들어온 사람이 있어 건물을 수리하는 게로구나.”

관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몸종은 손에 연을 들고 먼저 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씨, 아씨. 이거 괜찮아요?”

몸종이 큰 소리로 외쳤다.

“여기 커다란 제비도 있어요.”

소년도 손에 연을 들고 뒤따라 뛰어 들어오며 외쳤다. 진짜 바보네, 나이가 몇 살인데 이런 걸 갖고 놀아. 마당에 서서 미장이들이 지붕을 수리하는 모습을 보던 관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삐죽거렸다.

“반근.”

잠시 생각하던 관주는 몸종을 불렀다.

“아씨 데리고 나가서 놀아. 여기 어수선하니까.”

마당에 있던 몸종은 네 하고 대답한 후, 얼마 안 가 너울을 쓴 정교랑을 부축해 밖으로 나갔다.

“왜 안 날지?”

“아씨, 바람이 없잖아요.”

“날아야 해, 날아야 하는데.”

“청매 누나, 내가 해 볼게. 난 달리기가 빠르잖아.”

연이은 며칠 동안 산 위에서는 몸종과 소년, 그리고 그 바보가 소리치며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에서는 연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움직였지만 얼마 날지 못하고 곧 떨어졌다. 한번은 관주의 어깨에 부딪치며 떨어진 적도 있었다.

“어이구, 지금은 이런 거 갖고 노는 계절이 아닌데. 산에서는 이런 거 갖고 놀면 안 되기도 하고.”

늙은 인부 하나가 말했다.

“괜찮아요. 그런 거 모르는 애예요. 자기가 기쁘고 좋다니 내버려 두는 거죠.”

관주는 웃으며 말했다. 인부들도 이곳에서 며칠 지내며 그 낭자가 바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가엾기도 하지.”

인부들은 나지막이 수군거렸다. 바보는 정신이 온전치 못하니 아무것도 모르겠지.

밤의 어둠이 내리자 인부들은 철수하기 시작했다. 방 안 있던 몸종이 긴 쇠막대를 소년에게 건넸다.

“이걸 지붕 위에 꽂아 놓으라고?”

소년은 이해할 수 없는 듯 물었다.

“응, 예전에 노마님이 그러셨거든. 아씨께서 계시는 곳에는 이게 있어야 한다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정신침(定神針)이야. 이게 있어야 아씨의 영혼이 제자리로 되돌아올 수 있대.”

몸종은 말을 덧붙였다.

“예전 그 반근 낭자가 부탁하고 간 거야.”

소년 역시 시시콜콜 따지고 싶진 않았다. 어쨌든 돈을 받았으니 일을 해 줘야지. 이렇게 큰돈을 번 건 처음이라 어른이 된 듯 우쭐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좋아, 내가 가서 할게.”

소년은 쇠막대를 들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잠깐만, 조용히 꽂아야 해. 남들이 못 보게. 누가 보면 효과 없어.”

몸종의 당부에 소년은 알았다고 한 후 후다닥 뛰어나갔다.

일을 마친 관주는 한숨 돌렸다. 하루 종일 서서 일을 감독하는 것도 꽤 고단한 일이네, 그래도 며칠 후면 끝나니 다행이야. 관주는 두 아이에게 사람들이 가면 문단속을 하라고 시킨 후 먼저 안으로 쉬러 들어갔다. 관주가 자리에 앉자마자 사내가 술 주전자를 받쳐 들고 들어왔다.

사내는 인부들이 일하는 기회를 틈타 몰래 끼어 올라와 진흙을 개고 물을 나르는 일을 도왔다. 물론 이런 중노동을 하고 싶진 않았지만 사람들이 일을 마치고 내려갈 때 슬그머니 뒤로 빠졌다가 아예 눌러앉기엔 그만이었다.

“사람들 아직 다 안 갔는데 왜 들어와!”

깜짝 놀란 여인은 목소리를 낮춰 소리쳤다.

“아무도 못 봤어.”

사내는 신경도 안 쓰이는 듯 낄낄거리며 말했다. 그리고 누가 좀 보면 어때? 자기 일도 아닌데 누가 나선다고.

“자, 여도사님 고생 많으셨는데 이리 와서 술 한잔하며 피로 좀 풀어요.”

사내가 바짝 다가오며 말했다. 관주는 사내를 노려보면서도 역시 긴장을 풀었다. 침상을 비집고 들어오는 인간만 없으면 될 일이었다. 누가 뭐라고 하면 어쩔 텐가, 어디 말해 보라지. 왜 애먼 사람에게 오명을 씌우냐고 되레 큰소리를 치면 그만이다. 그녀에게 오명을 씌운다는 건 곧 정씨 가문에 오명을 씌운단 뜻인데, 이 강주부에서 감히 북정에 맞설 수 있는 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두 사람이 막 술을 따르는데 지붕 위에서 꽝 소리가 들렸다.

“뭐야? 나가 봐야겠네.”

관주가 놀라 몸을 일으켰다.

“에이, 그 인부들이 철수하다가 깜빡한 물건이 있어서 다시 올라갔나 보지.”

사내가 말했다. 그런가?

“다 간 거 아니었어?”

“아직 하나 남았어요.”

관주가 밖을 보며 묻자 아이가 밖에서 떨며 대답했다. 사내는 관주에게 내 말이 맞지 않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서두르라고 해. 날도 어두운데.”

관주가 소리치자 아이가 밖에서 네 하고 대답했다. 마당은 곧 조용해졌고 작은 도관에 어둠이 내렸다.

마당의 불빛이 희미한 가운데 몸종이 정교랑을 보며 말했다.

“아씨, 저쪽에 가서 채소를 꿔 오라고요?”

“응.”

정교랑은 몸종을 보며 대답했다. 몸종은 네 하고 대답한 후 무슨 채소인지 묻지도 않은 채 뒤돌아 나가려고 했다.

“그 사내가 분명 거기 있을 거야.”

정교랑의 말에 몸종의 몸이 순간 경직됐다. 몸종은 아랫입술을 깨물면서도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너한테 시킬 일이 있어, 할 수 있겠니? 아씨가 물었을 때 몸종은 대답했다. 죽음도 두렵지 않은데 못 할 일이 뭐 있겠냐고. 아씨는 죽으라고 하지 않고 심부름을 시켰다. 뭐가 됐든 시키는 대로 할 것이다.

“들어와서 같이 술 한 잔 마시자고 하면, 한 잔 마셔야 해.”

정교랑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딱 한 잔이어야 해. 더 붙잡으면, 이렇게 말해. 비가 올 것 같아서 아씨랑 같이 있어야 한다고.”

몸종은 피가 나도록 아랫입술을 깨물면서도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바깥의 하늘을 바라봤다. 벌써 며칠째 맑은 날이 계속됐고 푹푹 찌는 무더위는 한여름에 버금갈 정도였다. 밤이라 좀 서늘하고 달이나 별도 안 뜨긴 했지만, 비가 올 조짐은 전혀 없는데? 그런 말도 안 되는 핑계로 빠져나올 수 있을까? 하지만……·.

“네.”

대답을 마친 몸종은 밖으로 나왔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거리였지만 몸종에게는 한평생이라 느껴질 만큼 긴 거리였다. 하지만 아무리 긴 거리라 해도 끝은 있는 법이었다. 마당 문 앞에 서자 사내와 여인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밤바람을 타고 희미하게 들려왔다. 몸종은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 언뜻언뜻 들리던 웃고 떠드는 소리가 순간 뚝 그쳤다.

“누구세요?”

아이의 떨리는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몸종은 심호흡을 몇 번 하고 말했다.

“나 반근이야. 채소 좀 빌리러 왔어.”

-하늘을 속이다-

반근이 자리를 뜬 후 정교랑은 회랑 아래에 서 있었다. 힘없는 여자아이를 이 캄캄한 밤에 색마가 있는 걸 뻔히 아는 관주의 거처로 보냈으니 얼마나 대담한 일인가. 상식적으로 정씨 가문의 지위를 생각해 보면 두 연놈이 경거망동은 못 할 것이나 세상에서는 상식 밖의 일도 수없이 벌어졌다. 이 기회를 놓치면 언제 또 기회가 있을지 모를 정도로 시간이 긴박하지 않았다면, 정교랑 역시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싶진 않았다.

밤이 깊어지자 바람마저 잦아든 듯했다. 몸종은 떨리는 손으로 술잔을 받아들고 고개를 젖혀가며 술을 마셨다. 방 안에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생은 착하네, 정말 착해.”

관주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옆에 있던 사내는 허리를 깊이 숙이며 예를 표하고 웃으며 말했다.

“용서해 줘서 고맙소, 낭자. 정말 고마워.”

“이만 갈게요.”

술잔을 내려놓은 몸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은 후 일어나 가려고 하자, 사내는 초조한 기색으로 관주에게 다급하게 눈짓을 했다. 모처럼 이 시간에 이 낭자를 만났고 간신히 구슬려 마음을 돌려놨는데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동생.”

관주가 손을 뻗으며 몸종을 붙잡자 몸종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떨었다.

“어머, 뭐야. 추워?”

몸종의 격한 반응에 도리어 관주가 놀라 밖을 내다보며 물었다.

“오늘은 무지 더운데.”

“밤엔 좀 쌀쌀하지. 낭자는 얇게 입어서 좀 추울 거야.”

사내가 옆에서 얼른 말을 거들며 자리로 와서 술을 한 잔 따랐다.

“얼른 앉아. 술 더 마시면 따뜻해질 거야.”

사내는 다정하게 술을 권했다. 저 굶주린 꼴 하고는. 관주는 남몰래 이를 악물었다. 이 계집을 걷어차 돌려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하는 수 없이 몸종의 팔을 잡아당겼다. 몸종은 안색까지 새하얗게 질렸다.

“그게, 돌아가 봐야 해요.”

“돌아가긴 뭘 돌아가. 아직 시간도 이른데.”

관주가 웃으며 말했다. 몸종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생각에 잠겼다. 그 말을 해야 할까? 지금 해도 될까? 몸종은 저도 모르게 문밖을 내다봤다.

“비가 올 것 같아서 아씨한테 가 봐야 해요.”

몸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관주와 사내는 멈칫했다가 곧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비가 와, 하늘도 이렇게……·.”

사내의 웃음소리가 채 그치기도 전에 갑자기 번개가 번쩍 밤하늘을 가르더니 우르르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천둥이 쳤다. 방 안에 있던 두 여인은 놀라 비명을 질렀고 사내 역시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소리가 귀에 울려 한참 만에 정신을 차렸을 무렵 천둥과 번개는 벌써 하늘 저편으로 사라진 후였다.

“우리 아씨는 천둥을 제일 무서워하세요. 얼른 가 봐야 해요.”

몸종은 소리치다시피 말하고는 관주의 손을 뿌리치고 뛰쳐나왔다. 관주 역시 아이들에게 밖에 널어놓은 것들을 거둬들이라고 소리치기에 바빴다. 벌써 굵은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달음에 달려 돌아온 몸종은 심장이 밖으로 터져 나올 것 같아 숨을 돌리다가 회랑 아래에 선 정교랑을 발견했다.

“아씨.”

몸종은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달려갔다.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를 일이었다. 정말 비가 왔어! 정말로 비가 왔다고! 세상에, 아니, 우리 아씨는, 비바람도 부릴 줄 아는 거야?

정교랑은 손을 뻗으며 몸종을 막았다.

“아직 안 끝났어.”

몸종은 울음을 그치고 고개를 들어 정교랑을 쳐다봤다. 정교랑이 손에 든 물건을 건넸다. 종이 연이었다.

“아씨?”

몸종은 이해할 수 없었다. 우르릉 천둥소리가 이어지며 빗줄기도 점점 거세지는 때였다.

“날 부축해 그쪽으로 가자.”

정교랑의 말에 몸종은 숨이 턱 막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씨, 안 돼요.”

몸종이 정교랑의 손을 붙잡으며 외쳤다. 만에 하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나마 몸놀림이라도 자유로운 자신은 어떻게든 빠져나오겠지만 아씨는 저항할 능력이 전혀 없지 않은가.

“날 데려다준 다음 넌 핑계를 둘러대고 빠져나와.”

정교랑의 말에 몸종은 말문이 턱 막혔다.

“긴말하지 마, 시간이 없어. 곧 바람이 불 거야. 지금은, 내 말대로 해. 넌 생각할 필요 없고 묻지도 마.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기억했다가 그대로만 하면 돼. 말이든 행동이든 그 어떤 단계에서도 착오가 있어선 안 돼.”

정교랑은 몸종에게 울 기회를 주지 않은 채 팔을 붙잡고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조금이라도 틀리면, 우린 다 죽는 거야.”

몸종은 입을 악물고 몸을 떨며 정교랑을 바라봤다.

몸종이 정교랑을 부축해 관주의 마당으로 들어섰을 무렵, 바람은 더욱 거세고 천둥 역시 더욱 자주 쳤다.

“관주님, 저희 아씨께서 천둥 번개를 겁내세요. 번개가 너무 무섭게 치네요.”

몸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방 안에 있던 관주와 사내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둘은 도로 돌아온 몸종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특히 그 바보까지 데려왔다는 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뻤다.

방 안에 엉거주춤 서 있는 교랑의 모습이 바깥의 번갯불에 언뜻언뜻 보이며 더욱 묘한 매력을 자아냈다.

“산에선 이맘때면 늘 저래. 겁낼 거 없어. 금방 잦아들 거니까.”

정신을 차린 관주가 정교랑과 몸종에게 얼른 자리를 내주며 말했다. 몸종은 네 하고 대답한 후 정교랑을 부축해 자리에 앉혔다. 그러고는 자기도 따라 앉으려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얼른 입을 열었다.

“이런, 창문이랑 문을 안 닫고 왔네.”

몸종은 후다닥 뛰어나갔다. 관주는 아이들에게 시키면 된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몸종은 미처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그림자도 보이지 않게 달아나 버렸다. 일어나려는 관주를 사내가 붙잡았다.

“오늘 밤엔 당신이 저 애 잘 지켜.”

사내가 소리를 낮춰 말했다. 나지막한 목소리긴 했지만 들어도 그만이라는 투였다. 바보인데 들으면 뭐 어때. 멈칫한 관주의 시선이 사내의 눈길을 따라갔다. 사내의 욕정 넘치는 시선은 방 안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바보의 몸에 고정되어 있었다.

“당신!”

관주는 저도 모르게 눈썹을 치켜떴다.

“지금은 안 된다고 했잖아.”

“제 발로 여기까지 찾아왔는데도 가만있으면 내가 그러고도 사내야?”

사내는 언짢은 듯 대꾸하고는 관주를 손으로 밀어제쳤다.

“이 비바람은 하늘이 내려 주신 복이야. 이걸 거절했다간 벼락을 맞지.”

몸을 일으킨 사내가 정교랑 쪽으로 왔다. 정교랑이 따라서 벌떡 일어서자 사내는 놀라 걸음을 멈췄다. 관주와 사내는 그 바보가 창가로 걸어가는 모습을 어리둥절한 채로 쳐다봤다. 바보가 손을 뻗어 창문을 열자 광풍과 함께 비가 안으로 들이치며 침상의 휘장이 어지럽게 휘날렸다.

“어머, 창문 열면 안 돼요.”

관주가 다급히 소리쳤다.

“재미있어.”

정교랑은 뒤돌아 관주를 보며 생긋 웃었다. 등불에 비친 그 웃음에 사내는 거의 쓰러질 지경이었다. 얼른 창문을 닫으러 가려는 관주를 잽싸게 붙잡아 막았다.

“그래요, 재미있으면 놀아야지.”

사내는 떨리는 목소리로 맞장구를 치며 관주를 밀쳐내는 한편, 입맛을 다시며 정교랑 옆으로 가더니 그 옆에 있는 창문까지 열어젖혔다. 정교랑이 또다시 웃었다.

“재미있다.”

정교랑의 말에 사내는 몹시 기뻐했다.

“그럼, 내가 아씨랑 같이 놀아드릴까?”

사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교랑은 사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기뻐 어쩔 줄 모르며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문 쪽으로 가서 문도 활짝 열어젖혔다. 더욱 거세진 비에 바닥이 순식간에 물로 흥건해졌다. 관주는 열이 받아 이를 악물었다.

“장난 좀 그만 쳐. 밖에 비 오잖아. 여기서 어떻게 자라고.”

사내는 정교랑의 손을 잡아 보려고 몸에 힘을 줬다.

“누가 여기서 자래, 얼른 나가서 그 계집이나 잘 달래.”

사내는 답답하다는 투로 말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사내의 눈은 정교랑의 가슴께를 향하고 있었다. 바보라도 자랄 건 다 자랐네.

여인은 이 사내를 걷어차 버리고 싶은 마음에 달려들다가 미끄러운 바닥 때문에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탁, 탁, 소리가 두 번 나더니 광풍에 따라 흔들리는 거친 밧줄 두 개가 창문과 문을 때리자 두 사람은 화들짝 놀랐다.

“바람이 많이 부네. 지붕 고칠 때 쓰는 밧줄까지 바람에 내려왔어.”

관주에 말에 사내도 고개를 돌려 밖을 봤다. 밧줄 두 개가 바람을 따라 흔들리는가 싶더니 한 줄은 창문을 넘어 방 안까지 들어왔다. 정교랑이 밖으로 나갔다.

“어이, 어이.”

퍼뜩 정신을 차린 사내가 급히 소리쳤다.

“나가지 마요, 비 오고 천둥 치잖아.”

정교랑은 벌써 마당으로 몇 걸음 내디딘 후였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다 보니 정교랑은 순식간에 흠뻑 젖었다. 거센 빗줄기에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아씨!”

빗속에서 몸종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어서 들어와요.”

관주의 목소리도 들렸다. 관주는 저 멀리서 달려오는 몸종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자 얼른 소리쳤다.

“둘 다 빨리 들어와. 이렇게 비 오고 천둥도 치는데 밖에 있으면 안 돼.”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늘에서 방을 뒤흔들 정도로 큰 천둥소리가 들렸다. 바닥도 흔들리고 관주의 몸도 부르르 떨렸다.

몸이 떨렸다?

이어 벼락이 내리치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여인의 눈에 창가 쪽 바닥에서 불덩이가 치솟는 모습이 들어왔다.

“이게 뭐야?”

관주는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비를 맞고 서 있는 아씨를 데려오고자 밖으로 나가려던 사내 역시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같은 시간, 산 아래의 대현묘관에서도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사부님, 사부님. 저기 좀 보세요. 소현묘관이 벼락에 맞았어요!”

비 내리는 밤, 하늘에서 수직으로 내려온 듯한 벼락이 산 중턱에 내리꽂히며 소현묘관의 지붕을 쩍 갈랐다. 굉음과 함께 불덩이가 치솟더니 퍽 퍽 소리가 두 번 연달아 들렸다. 방 안에 있던 두 사람은 이미 온몸이 까맣게 탄 채 바닥에 누워 있었다.

하늘에서는 계속해서 천둥과 번개가 내리쳤다. 도관 지붕으로 화염이 치솟더니 맹렬하게 타올랐다. 지붕 위에 꽂힌 쇠막대에 묶여 이리저리 휘날리던 종이 연도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인 채 아래로 떨어져 불타는 방과 하나가 됐다.

천둥과 번개는 이어졌지만 최고조에 달했던 아까에 비하면 한결 잠잠해진 상태였다. 관주의 방은 벌써 반쯤 불타 있었지만 내리는 비에 차츰 불길이 잡혔다. 불빛은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하며 마당에서 비를 맞으며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는 형체들을 비췄다.

넷이었다.

두 아이는 불길이 치솟음과 동시에 부엌에서 후다닥 뛰어나왔다. 불안에 떨던 두 아이와 달려오던 몸종은 무릎을 끌어안으며 앉으라고 소리치는 정교랑의 말을 듣고 반사적으로 시키는 대로 따라했다.

산에 내리는 폭풍우는 빠르게 왔다가 빠르게 물러갔다. 천둥소리가 좀 더 잠잠해지자 정교랑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비를 워낙 많이 맞은 탓에 일어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반근.”

정교랑이 힘없이 말했다.

“이제 됐어.”

몸종은 그 말을 듣고서야 고개를 들었다. 불탄 방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정교랑의 모습이 보이자 몸종은 기다시피 달려가 목놓아 울었다. 몸종은 사다리에서 내려와 곧장 달려오다가 마당으로 들어섬과 동시에 정교랑의 외침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얼마나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던가. 자신은 마당 문가에 쭈그려 앉았는데도 무언가 이상한 물체가 몸을 관통하는 듯한 느낌에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몸이 움직이지 않을 정도였는데 더 가까운 곳에 있었던 정교랑은 오죽했을까.

“아씨, 괜찮으세요?”

몸종이 울며 소리쳤다.

“괜찮아.”

정교랑은 몸종을 붙잡으며 힘없이 대답하고는 몸종의 팔을 붙잡으며 간신히 일어섰다. 몸종은 지치기도 하고 겁이 나기도 해서 몸이 덜덜 떨렸다. 몸종이 정교랑을 부축한다기보다는 두 사람이 서로 기대고 있다고 보는 게 옳았다. 두 걸음쯤 내디뎠을 때 산문 밖에서 시끄러운 발소리와 함께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불을 끄러 왔어요. 안에 계세요? 무사한 거예요?”

여인들의 떨리는 목소리가 문밖에서 전해졌다. 문 안에서는 불타는 소리 외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부님, 다 타 죽은 거 아닐까요?”

도롱이에 삿갓을 쓴 여도사들이 대야며 나무통, 빗자루 등을 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관주는 산문에 이어 문 안쪽으로 보이는 화염과 연기를 차례로 바라봤다. 소현묘관 관주의 행실이 바르지 않다고는 하나 세상 만물엔 생명이 있는 법인데 어려움에 처한 걸 뻔히 알고도 돕지 않는 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문을 부숴라.”

관주의 말에 여도사들은 일제히 문 쪽으로 달려들었다.

“내가 구령을 붙일게.”

관주가 옆에 서서 말했다.

“하나, 둘, 셋.”

여도사들은 문에 몸을 부딪칠 태세를 취하고 얍 기합을 넣었다. 문이 열린 건 그때였다. 여도사들의 기합 소리가 놀라움으로 바뀌면서 여도사들은 문 안으로 우르르 쏟아져 들어갔다.

기분이 좋아서인지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워서인지 문을 연 아이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여인이 벼락에 맞아 죽었어! 그 여인이 벼락에 맞아 죽었다고! 이제 정말 막다른 길에 몰렸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그 여인이 죽어 버리다니!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아이는 점점 더 큰 소리로 웃더니 급기야 배를 잡고 쪼그려 앉아 웃어댔다. 이리저리 포개진 채 비를 맞고 있던 여도사들은 어리둥절해서 서로 눈치를 살폈다. 도관이 벼락을 맞아 불탔는데 이 상황에 웃음이 나와? 너무 놀라서 정신이 나갔나?

몸종은 얇은 이불로 정교랑을 꽁꽁 싸매 주고 곧 뜨거운 생강탕을 내왔다. 두 사람 모두 천천히 몇 모금 마신 후에야 안색이 돌아왔다.

“아씨, 이따가 뜨거운 물을 끓여서 더 우릴게요.”

놀란 탓인지 추운 탓인지 알 수 없지만 몸종은 이를 덜덜 떨며 말했다. 그때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몸종이 얼른 일어나 밖을 내다보자,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여도사가 회랑 아래에서 걸음을 멈추는 모습이 보였다.

“시주님.”

관주가 예를 표하자 몸종도 얼른 답례를 했다.

“정 관주께서는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불길은 잡혔고요. 저기, 그 정 관주 외에, 그러니까, 다른 사상자는 없었습니다.”

여도사가 오밤중에 사내와 함께 죽어 있었다는 말은 도무지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그, 그럼, 어쩌면 좋을까요?”

몸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기서 이불을 싸매고 멍하니 있는 소녀와 넋이 나간 채 떨고 있는 이 어린 몸종을 보고 있노라니 관주는 절로 탄식이 나왔다.

“그럼 정씨 댁 노야께서 처리하게 하죠.”

몸종은 무언가를 퍼뜩 깨달은 듯 아, 아, 소리를 내더니 정교랑을 돌아봤다. 아씨는 너무 지치셨어. 돌아온 후 지금껏 한마디도 안 하셨잖아. 관주의 말대로 해도 될까?

정교랑이 관주를 보며 입을 열었다.

“도사님.”

문밖에 있던 관주는 내심 놀랐다. 이곳 소현묘관에 정씨 가문 바보가 산다는 소문은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 바보가 말도 할 줄 알았다니. 게다가 목소리에서도 바보스러운 기미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정신을 차린 관주가 얼른 예를 표하며 네 하고 대답했다.

“도사님께서 수고를 해주셔야겠습니다.”

정교랑의 말에 관주는 멈칫했다.

“네. 염려 마세요, 아씨. 제가 정씨 가문에 알려 사람을 부르겠습니다. 벼락이 내리치는 걸 봤으면 정씨 가문에 알리는 게 인지상정이니까요.”

자신은 이곳에 들어오지 않았기에 소현묘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그 안에서 사내가 죽은 사실은 더더욱 모른다는 뜻이었다. 정씨 가문의 체면과 명성을 지켜 주겠다는 의도였다.

“아닙니다. 관주님께서는 본 대로 말씀하세요. 관주님의 자비로운 마음은 잘 알지만 굳이 숨기실 것 없어요.”

관주는 정교랑을 보며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바보? 바보랬는데?

“도사님, 소현묘관이 갑자기 벼락을 맞아 불에 탔으니 아무래도 대현묘관에서 맡아 주셔야겠습니다.”

정교랑이 말했다. 이 낭자가 바보인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으나 관주 본인은 바보가 아니었기에 그 말뜻을 바로 알아들었다. 꿈에도 그리던 일이 갑자기 눈앞에 펼쳐지자 관주는 흥분되면서도 믿어지지 않았다. 관주는 뭐라고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잠시 멍하니 있다가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아씨의 마음에 감사드립니다.”

간밤에 산에서는 천둥 번개와 함께 폭우가 쏟아졌지만 성 안은 비가 그 정도로 오지는 않았다. 폭우가 내리긴 했지만 금세 물러갔고 강주성의 새벽은 여느 때처럼 활기찬 모습이었다. 말 몇 마리가 시장을 가로질러 질주하여 평화롭던 거리를 소란스럽게 만들면서 여기저기서 욕설이 튀어나왔지만 말이다.

대노야는 객청에서 한참을 이리저리 서성였다. 집사가 문밖에서 허둥지둥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어떠하더냐?”

대노야가 다급히 묻자 집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까이 다가와 귓속말을 건넸다. 대노야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가문에 먹칠을 해도 분수가 있지, 가문의 불행이로다!”

대노야는 내실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대부인은 몸종을 물린 후 직접 차를 올렸다.

“아무도 모르니 별일 없을 거예요.”

대부인은 위로의 말을 건네고는 못 참겠는지 입을 열었다.

“정말 그랬대요?”

대노야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봤더니 근방 마을에 사는 사내였소. 그 집 여인이 남편을 찾고 있다더군. 집사가 은자를 쥐여주면서 산에 사냥을 나갔다가 벼락을 맞았다고 했지. 아직 애도 없겠다, 싱글벙글하며 돈을 받고는 논밭을 팔아 개가했다고 하오.”

대부인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누를 수 있으면 최대한 누르는 게 좋죠.”

대부인은 손을 모아 합장하며 말했다.

“이번에 손 관주한테 큰 신세를 졌네요.”

대노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가 아직 거기 있는데 이런 일이 났으니, 나 원. 데려와야 하나?”

대노야의 물음에 대부인은 침묵을 지켰다. 이런 일이 일어났으면 도리상 데려오는 게 마땅하지만……·.

현묘관 여도사가 벼락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은 집 안에 금세 퍼졌다. 정육랑도 사건의 경위를 알 정도였다.

“세상에, 잘 있다가 갑자기 벼락에 맞아 죽어?”

정칠랑은 고개를 돌려 밖에 무릎을 꿇고 앉아 시중을 드는 유모를 부채로 가리키며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어멈이 그랬어.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지은 사람이나 요괴 같은 놈들이 벼락을 맞는 거라고. 세상에, 그럼 그 관주가 산에 사는 불여우고 요괴인가?”

하여간 아직 애라니까. 방에 있는 자매들은 할 말을 잃은 눈빛으로 정칠랑을 쳐다봤다.

“산에선 원래 뇌우가 자주 내려. 그래서 산불도 자주 나잖아. 흔한 일이야.”

정육랑이 말했다.

“그럼 왜 예전엔 벼락도 안 맞고 잘 지내다가, 바보가 가니까 벼락을 맞아?”

정칠랑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그러더니 돌연 자세를 고쳐 앉으며 뭔가 알아낸 듯 부채를 마구 흔들었다.

“아, 아, 아, 바보네. 그 바보야. 틀림없이 그 바보가 화를 불러들인 거야!”

같은 시각, 다른 곳에서도 의론이 분분했다.

“그 바보 때문이야.”

“하여간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다 운수가 사나웠어. 걔가 집에 들어온 후부터 따져 봐. 재수 없는 일을 당한 사람이 몇이나 되나.”

“대부인과 이부인께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했고, 당씨네 일가와 소국네 가족이 모조리 쫓겨난 것도 바보 때문이었어. 셈해 보니 벌써 10명은 족히 되네.”

“그 도관으로 간 지 며칠 만에 멀쩡히 잘 지내던 관주가 벼락에 맞아 죽다니, 쯧쯧쯧.”

조잘거리며 웃고 떠드는 소리가 문 뒤에서 들려오자 길을 안내하던 여종은 정색하고 발을 구르며 헛기침을 하여 웃음소리를 쫓았다.

“도사님, 이쪽이에요.”

여종은 뒤에 있는 여도사를 향해 웃음을 짜내며 말했다.

손 관주는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지만 방금 들은 여종들의 수다가 뇌리를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그 바보 때문에 벌써 몇 사람이나 재수 없는 일을 당했단 말이지. 한두 사람도 아니고, 집안의 안주인과 시중을 들던 여종과 몸종까지. 아무 이유도 없이 재수 없는 일을 당하진 않았을 텐데. 그 바보의 심기를 건드렸겠지.

순간 손 관주는 오싹했다. 그 바보의 심기를 건드려? 그래서 그 여인이, 재수 없게 벼락을 맞아 죽었다?

“도사님.”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던 손 관주는 자신을 부르는 여종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손 관주는 자신이 벌써 대부인의 방에 들어와 있음을 깨닫고 얼른 예를 표했다.

“관주한테 큰 신세를 졌네요.”

대부인은 일어나라는 손짓과 함께 웃으며 말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손 관주는 다시 한번 예를 표하며 대답했다.

“우리 집 도관이라고는 하나 그곳을 관리하는 문제는 수행하는 분들이 더 잘 알겠지요. 노야와 나는 그 도관을 손 관주에게 맡기고자 합니다.”

대부인은 곧바로 본론을 꺼내며 계약서 한 장을 내밀었다. 일이 이렇게 되리라 짐작은 했지만 직접 귀로 듣고 눈으로 보며 확인하니 손 관주는 흥분을 억누를 수 없었다.

“두 분의 신뢰에 감사드립니다.”

손 관주는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이 세상엔 생각으로 그칠 수밖에 없는 일이 있다고 여겼는데 그 요원해 보이던 일이 눈 깜짝할 새에 눈앞에 펼쳐졌다. 이게 다 무슨 일이지? 손 관주는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산에 비가 내리고 천둥과 번개가 쳤다. 여기까진 흔한 일이다. 매년 이맘때면 늘 그랬으니까. 그런데 올해는 하룻밤 비가 내리고 천둥 번개가 치더니 소현묘관이 벼락을 맞았다. 그래서 제자들과 함께 사람을 구하고 불을 끄러 갔다. 그러다가 온몸이 흠뻑 젖은 채 빗속에서 몸종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오는 여인을 봤고. 그 여인은 자신에게 이제 소현묘관은 대현묘관에서 맡아 줘야겠다고 했다.

그 여인! 손 관주는 오싹한 듯 또다시 몸을 떨었다.

“부인께 말씀드릴 일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말씀하시지요.”

“소현묘관에서 지내던 아씨께서 많이 놀라신 듯한데 제가 의술을 좀 압니다. 제가 보살펴 드리면서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수행을 도우면 건강이 좋아지지 않을까 싶은데 부인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이건 정말이지 하늘에서 내려온 보살이 아닌가. 대부인은 환하게 웃었다. 나무아미타불, 그 바보가 집에 없으니 모든 일이 술술 풀리는구나.

대부인은 곧장 대노야한테 알리는 한편 이노야 내외를 불러 관주의 제안을 전했다. 모두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제안이었다.

“손 관주는 진정한 수도자군. 진중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니 손 관주에게 맡기도록 하자.”

대노야의 말에 이노야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도 도사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도관에서 지내면 좋죠.”

“소현묘관의 화재 피해가 심각하다고 하니 수리하도록 돈을 내주시오.”

대노야는 대부인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일을 누구한테 맡길지, 어떻게 수리할지는 전부 손 관주 재량으로 맡기고.”

인부를 부르고 수리를 하다 보면 떡고물도 생기는 법이다. 이번에 손 관주에게 크게 신세를 지기도 했고, 사정을 알고 그 바보를 자발적으로 맡아 주겠다고 나섰으니 대노야로서도 보답을 해야 했다. 그 점엔 다들 이견이 없었다. 대부인은 손 관주에게 알리러 가고 대노야 역시 집사를 시켜 돈을 준비하게 했다. 이노야 내외도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네요.”

이부인은 무언가 떠오른 듯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상하긴 뭐가?”

이노야가 심드렁하게 물었다. 요즘 이노야는 임명을 못 받고 있는 상태였다. 물어보면 윤허한다고 했지만 직첩을 받기 전까지 하나 마나 한 말이었다.

“병주의 그 도관도 벼락을 맞더니 이번에 간 도관이 또 벼락을 맞았잖아요. 정말 뭔가 있는……·.”

이부인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있긴 뭐가 있어! 아무것도 없소!”

이노야가 언짢은 듯 말을 끊었다.

“멀쩡하던 당신까지 무지한 아랫것들이 떠드는 말을 믿다니!”

이노야가 옷소매를 뿌리치며 먼저 가 버리자 이부인은 입을 삐죽거리며 뒤따라갔다.


정교랑을 부축해 내려온 몸종은 산 아래의 대현묘관으로 갔다. 손 관주는 직접 길을 인도했다. 사전에 관주의 명을 받은 여도사들은 방에 숨어 있었지만 어린 여도사 몇 명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창가에 기대 창틈으로 밖을 바라봤다.

“진짜 그 낭자네! 산에서 봤던 그 두 낭자야.”

누군가가 나지막이 말했다.

“정씨 가문 사람이었구나.”

“저 낭자가 진짜 바보였네.”

“너희는 늦게 들어와서 모르겠지만 난 정씨 가문의 예전 주씨 부인을 알아. 소현묘관에 종종 올라가곤 했는데 그럴 때면 여기도 들어와서 절을 올렸거든. 저 아이의 복을 빌기 위해서였지. 매번 안에서 한참을 울다 나오는 게 어찌나 가엾던지.”

여도사들은 너울을 쓰고 가리개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린 여인의 발걸음을 따라 시선을 옮기며 소곤거렸다. 물론 그 시선이 최종적으로 머무는 곳은 옆에 있는 그 몸종이었다.

“저 아이는 심성이 곱네.”

“심성이 곱지 않으면 저 바보의 시중을 들러 오지도 않았겠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싫다고 난리였을걸.”

“맞아, 정색하고 쌀쌀맞게 굴었을 텐데 엄청 살뜰하게 보살피잖아. 저 바보를 진심으로 대하고 있어.”

손 관주는 부들방석을 손수 꺼내 자리를 만들어 주고 몸종이 정교랑을 부축해 천천히 앉혀 주는 모습을 지켜본 후에야 자신도 옆에 꿇어앉았다.

“아씨께서 말씀하신 대로 했습니다. 정씨 가문에서도 아씨를 잠시 이곳에 머물게 하라고 하셨고요.”

손 관주는 흥분을 감출 수 없는 표정이었다.

“감사드립니다, 아씨.”

그 흥분은 정씨 가문 집사가 준 은표를 받아 들었을 때부터 쭉 존재한 것이었다. 정씨 가문에서 소현묘관 수리를 자신에게 맡길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 실로 뜻밖의 기쁨이었다. 소현묘관을 수리하고도 넉넉히 남을 만한 돈이었다. 시줏돈이 별로 안 들어오는 도관의 관주로서 늘 돈이 궁했는데 이 돈이면 한동안 풍족하게 지낼 수 있다. 더는 입을 수 없을 정도로 낡고 해진 도복도 바꿀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건 시작일 뿐이에요.”

정교랑이 손 관주를 보며 말했다. 첫걸음은 이미 내디뎠다. 어쨌거나 소현묘관은 정씨 가문의 가산인데 그 정씨 가문과 신세를 지고 은혜를 갚는 일이 있었다. 오고 가는 게 있으면 정도 쌓이는 법이니 앞으로 왕래가 잦을 것이다. 정씨 가문과 튼튼한 인연을 맺었으니 앞으로 도관을 찾는 이들도 자연히 늘어날 터였다.

물론 거기까지는 손 관주도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생각한 건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생각을 입 밖에 내지도 않았는데 이 낭자는 자신의 생각은 물론이고 뭘 말할 건지도 훤히 아는 듯했다. 손 관주는 고개를 들어 눈앞의 낭자를 바라봤다.

정교랑은 이미 너울을 벗은 후라 얼굴이 드러나 있었다. 손 관주가 정교랑의 생김새를 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지난번엔 밤이기도 했고 워낙 경황이 없어 제대로 못 봤기 때문이다.

손 관주는 아직 정씨 가문의 주씨 부인을 기억했다. 지금 보니 확실히 어머니를 많이 닮긴 했네. 아버지의 모습도 보이고. 너울을 벗자 머리칼 사이로 까만 눈썹이 드러났다. 버들잎처럼 가늘고 칼처럼 긴 눈썹은 커다란 눈과 잘 어울렸지만 안타깝게도 흰자위에 비해 검은 눈동자가 작다 보니 서늘한 느낌이 들어 오래 보긴 힘들었다. 손 관주는 고개를 숙였다.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씨.”

손 관주는 다시 한번 감사를 표했다.

“관주님은 자비로운 분이니까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폭우가 내리고 천둥과 번개까지 내리치는 요란한 날씨에 명성도 형편없는 소현묘관을 위해 위험을 무릅써 가며 제자들을 이끌고 달려온 걸 보면 손 관주는 확실히 착하고 자비로운 사람이었다. 더 겸양을 보일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손 관주는 감사를 표했다.

“일단 여기 머물다가 저쪽 수리가 끝나면 그때 옮겨 가세요.”

손 관주는 미안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누추한 곳이라 아씨께서 많이 불편하시겠네요.”

정교랑은 말없이 답례만 표했다. 손 관주가 밖으로 나오자 일찌감치 와서 기다리고 있던 제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한시름 놓은 듯한 사부의 얼굴을 봤다.

“관주님, 그 바보 무서워 보여요?”

나이가 가장 어린 제자가 나서서 물었다. 울고 때리고 떼를 써서, 달래도 안 되고 타일러도 안 듣고 말도 안 통하는 그런 거? 그 바보는 말이지, 관주는 고개를 돌려 안을 힐끔 쳐다봤다. 나이도 어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데도 그녀에게는 감히 말을 붙이기도, 오래 쳐다보기도 힘든 그 무언가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손 관주는 이번 일이 저 바보와 관련됐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벼락불을 인력으로 조종할 수가 있나? 그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인데? 신선이나 할 수 있는 일이지. 왜 그런 생각이 드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생각은 손 관주를 떠나지 않고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래, 정말 무서워.”

손 관주가 중얼거렸다.

하늘빛이 차츰 밝아질 무렵, 이노야는 벌써 한참을 골목에 서 있었다. 뒤에 있는 어린 시종 둘은 예물이 가득 찬 함을 들고 있었는데 서 있느라 다리가 저릿저릿한 눈치였다. 문을 두드리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문을 두드려도 나오는 사람이 없으니 이노야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딱히 눈에 띄지도 않고 인근의 평범한 민가와 다를 바 없는 저택이었으나 이 자사(刺史) 나리마저도 깍듯이 예를 갖춰야 하는 곳이었다. 사실 이곳은 이노야의 스승인 장순의 고택이었다. 그냥 고택이었으면 별 신경을 안 썼겠지만 지금은 이 안에 노인이 살고 있었다. 장순의 노부가 경성에서 돌아온 것은 한 달 전쯤의 일인데, 고향 생각이 나서 한동안 옛집에 머물까 하여 특별히 찾아왔다고 했다.

해가 반짝 뜨자 이노야는 시종을 시켜 다시금 문을 두드리게 했다. 이번에는 잠시 기다리자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누구세요, 이렇게 일찍?”

낡고 오래된 문이 열리더니 앞도 잘 안 보이고 거동도 불편해 보이는 늙은 하인이 나왔다. 일찍이라니! 벌써 해가 중천인데. 하지만 이노야는 웃으며 예를 표했다.

“정동이오. 선생의 제자였지. 선생의 부친께서 오셨다기에 인사차 왔소이다.”

장순은 강주와 위주에서 학당을 열고 수십 년 동안 후학 양성에 힘쓰다가 지금은 경성으로 불려가 태학에서 수업을 하고 있어 제자가 전국 각지에 퍼져 있었다. 지금은 고택을 비운 지 오래고 집안 식솔들 역시 대부분 경성으로 옮겨 갔지만 여전히 매년 수많은 학생이 이 고택을 찾아오고는 했다. 공부하러 오는 이도 있었고 지나가다가 들르는 이도 많았다.

특히 장순의 노부가 돌아온 후로는 찾는 이가 전보다 한층 많아졌다. 장순의 노부가 성가심을 견디지 못하고 버럭 성질을 내지 않았다면 아마 그 열기는 지금까지도 계속됐을 것이다.

늙은 하인은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니라는 눈치로 대답했다.

“저런, 노선생께서는 아침 일찍 출타하셨습니다. 아직 안 돌아오셨어요.”

그렇게 일찍! 이노야는 놀랐다.

같은 시각. 정교랑은 아침 먹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몸종이 찬합을 들고 왔다. 흰죽과 밑반찬 외에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도록 찐 등자가 있었다. 덮개를 열자 맛있는 냄새가 훅 끼쳐왔다.

몸종이 수저를 들고 그 안에서 누런 게알을 조심스레 꺼내 정교랑에게 올렸다. 정교랑이 손을 뻗어 받더니 초간장에 살짝 찍어 한입 먹고는 내려놓았다.

“아씨, 뭐가 잘못됐어요?”

몸종이 당황하여 물었다.

“등자가 푹 익지 않았고 게알도 충분하지 않아. 술도 좋은 술이 아니고. 제대로 된 맛이 아니라 목에서 안 넘어가네.”

몸종의 표정을 본 정교랑이 살짝 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솜씨 좋은 숙수라도 쌀이 없으면 밥을 못 짓지. 네 잘못이 아니야.”

몸종은 한결 마음이 놓이는 눈치였다.

“제가 성에 가서 좋은 재료로 골라 올게요. 집에서 보내는 거로는 안 되겠어요.”

정교랑은 수고스럽게 그럴 필요 없다는 말을 하는 대신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재료로 다시 만들어 봐. 재료가 별로면 공들일 필요도 없어.”

정교랑의 말에 몸종은 네 하고 대답한 후 정교랑이 흰죽과 밑반찬을 천천히 다 먹도록 기다렸다가 찬합을 정리했다. 식사를 마친 정교랑은 책을 집어 들고 전에 읽던 부분을 이어서 읽었다. 집에서 챙겨온 <대주번성록> 한 쪽을 드디어 다 읽었다.

몸종은 일어나서 휘장을 걷고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바라봤다. 여느 때처럼 조용한 모습이었다. 그날 밤 일은 일어난 적도 없었다는 듯이, 두 사람이 죽임을 당한 일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사람이 죽었어. 죽었다고, 사람이 죽었단 말이다. 그것도 둘씩이나. 그렇게 갑작스럽게 죽다니. 몸종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씨.”

결국 몸종은 쭈뼛쭈뼛 입을 열었다. 정교랑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로 응 하고 대답했지만 몸종의 말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하늘이 만든 화는 피할 수 있어도, 스스로 초래한 화는 피할 수 없는 법이지.”

정교랑은 책장을 넘기며 말을 이었다.

“사람이 내버려 두면 하늘이 거두는 수밖에. 그 여인은 스스로 초래한 화로 벼락을 맞은 거야. 하늘이 목숨을 거둔 셈이지. 명심해.”

몸종은 얼른 돌아서서 무릎을 꿇었다.

“네, 소인 명심할게요. 아니, 소인 잘 알겠습니다.”

몸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몸종은 이제 알았다. 사람을 죽일 때 굳이 직접 손을 쓸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보니 하늘도 마음대로 부리는 방법이 있었다.

몸종은 시종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붕에 쇠막대를 꽂고 종이 연을 걸어 두며 밧줄을 내려뜨렸다고 해서 어떻게 벼락불을 끌어들일 수 있는 건지. 또 몸종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비가 오고 번개가 칠 거라는 걸 아씨는 어떻게 미리 알았던 건지.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한 가지는 확실하니까. 무조건 아씨의 말만 들으면 된다.

찬합을 들고 밖으로 나오던 몸종은 물을 길어오던 여도사 둘과 마주쳤다.

“반근 언니.”

여도사들은 공손하게 예를 표했다. 이 낭자로 말할 것 같으면 전에 사람 목숨을 구한 선인이 아니던가. 게다가 며칠 같이 지내며 지켜보니 과연 붙임성이 좋고 마음씨도 착한 낭자였다. 도관 사람들은 나이를 막론하고 모두 그 몸종을 좋아했다. 몸종은 두 여도사를 향해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정교랑과 몸종은 여전히 부엌을 단독으로 쓰며 밥을 따로 해 먹었기에 몸종은 여도사들이 길어온 약수를 물독에 넣을 수 있도록 안내해 줬다. 부엌에 퍼져 있는 맛있는 냄새에 여도사는 궁금증이 일었다.

“와, 맛있는 냄새.”

그 여도사는 참지 못하고 킁킁 코를 벌름거렸다. 몸종이 아, 하더니 찬합을 내밀며 말했다.

“이거 간식인데 가져가서 먹어요.”

두 도사는 놀라며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아씨 드리세요.”

“아씨께서 안 좋아하세요. 많이 만들었는데 그냥 두면 아깝잖아요.”

몸종이 말했다. 이렇게 냄새가 좋은데 안 좋아한다고? 역시 바보라 입맛도 보통 사람과 다른 모양이네. 몸종의 말도 있고 냄새가 워낙 좋아 두 여도사는 고맙다고 인사하며 찬합을 받았다.


노인은 상쾌한 기분으로 산에서 걸음을 내디뎠다. 뒤에는 지난번에 따라왔던 노복 외에 어린 시종이 하나 더 있었다.

“노야, 돌아갈 수 있으시겠어요?”

노복이 물었다.

“의원이 별일 없을 거라고 했으니 별일 없겠지. 이번엔 나오기 전에 밥을 든든히 먹었으니 별일 없을 게다.”

노인은 웃으며 말했지만 노복은 근심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래도 많이 안 드셨잖습니까.”

노인은 허허 웃으며 못 들은 척 넘기고 손을 뻗어 산허리를 가리켰다.

“며칠 사이에 산림까지 변했구나. 지난번 왔을 땐 저 도관이 수리를 하기 전이었던 것 같은데.”

노인이 화제를 돌렸다.

“저 도관이 벼락을 맞았거든요.”

시종은 신이 난 투로 말했다.

“그 관주는 불여우가 둔갑한 거라 벼락을 불러들였대요. 그날 벼락이 무시무시했다고 그러더라고요. 뇌공(雷公: 천둥을 맡고 있다는 신) 나리를 직접 봤다는 사람도 있어요.”

하여간 민간에 도는 말은 늘 이렇게 과장이 섞여 있는 법이다. 노인은 껄껄 웃고 나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대현묘관으로 눈길을 돌렸다.

대현묘관을 보자 그날 먹은 사탕 귤이 떠오르며 입가에 신맛이 돌았다. 집으로 돌아간 후 부엌 찬모에게 똑같이 만들어 보라고 했지만 딱히 별다를 게 없어 보이던 사탕 귤인데 좀처럼 그 맛이 나지 않았다. 그날 자신이 아파서 더 맛있게 먹었던 것인지 그 간식에 따로 비법이 있었던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기왕 왔으니 저기 가서 물 한 사발 얻어 마셔야겠다.”

노인은 성큼성큼 앞장서 걸어가며 말했다. 노인이 문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비질을 하고 있던 도동이 엇, 하는 소리를 냈다.

“배고파서 병이 났던 어르신이네요.”

도동이 버릇도 없이 불쑥 말해 버리자 옆에 있던 여도사가 얼른 손을 뻗어 제지하며 앞으로 나가 노인을 맞이했다.

“시주님.”

여도사는 예를 표했다. 노인 역시 도동의 말을 들었지만 그저 씩 웃어 넘길 뿐이었다.

“이번엔 배가 고파서 온 게 아니고 물이나 한 사발 얻어 마실까 해서 왔소.”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도동은 쑥스러운 듯 웃으며 빗자루를 내던지고 노인이 앉도록 얼른 자리를 깔아 준 다음 물을 뜨러 갔다.

“사매, 내가 무슨 좋은 걸 가져왔나 좀 봐.”

여도사 둘이 찬합을 들고 뒤쪽에서 웃으며 걸어 나오다가 회랑 아래에 앉아 있는 노인을 보고 역시 엇, 하며 놀랬다.

“어르신, 오셨네요. 마침 잘 오셨어요.”

그중 한 여도사가 얼른 인사했다.

“지난번에 산에서 만난 낭자가 여기 있거든요.”

노인과 노복은 깜짝 놀랐다.

“아, 그렇다면 잘됐군.”

노인은 얼른 일어서려고 하다가 그 낭자가 여인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고 도로 앉았다.

“수고스럽겠지만 한번 볼 수 있겠냐고 도사님께서 물어봐 주시오.”

여도사는 네 하고 뒤쪽으로 갔다. 곧이어 도동이 물을 떠왔다. 물을 받아 마시려던 노인은 문득 맛있는 냄새가 훅 끼치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노인의 눈길은 여도사의 손에 들린 찬합에서 멈추었다. 막 뚜껑을 열어 사매에게 보여 주려던 참이었다.

“도사님, 그게 뭐요?”

노인의 물음에 여도사는 웃으며 찬합 안에서 둥그런 등자 하나를 꺼냈다.

“등자네요.”

여도사는 잘라 놨던 등자 껍질을 도로 덮어 만든 뚜껑을 열며 말했다.

“안에는 고기가 들어 있고요.”

뚜껑을 열자 맛있는 냄새가 사방으로 퍼졌다. 노인은 저도 모르게 깊이 숨을 들이켰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면서 갑자기 배고픔이 엄습했다. 여도사는 노인의 상태를 알아보고 웃으며 하나를 올렸다.

“드셔 보세요. 이게 무슨 고기죠?”

노인은 등자를 받아 쓱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해황(蟹黃: 게의 배속에 들어 있는 누런 알)이로군.”

게살을 이렇게 조리하다니 기발하군. 노인은 젓가락을 들어 한입 먹고는 환하게 웃었다.

“훌륭하구려, 훌륭해.”

노인은 훌륭하다는 말만 남기고는 더 이상 말할 새도 없이 등자를 먹어 치웠다. 멈칫하던 노복과 시종은 곧 크게 기뻐했다.

“정말 잘됐네요. 노야께서 드디어 입맛이 도시나 봐요!”

시종이 말했다. 여도사 셋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이 어르신한테 또 배고픈 병이 도졌군. 배고파서 병이 난 게 틀림없어. 여도사들은 탁자 위에 놓인 속이 텅 빈 등자 세 개와 손수건을 받아 입을 닦고 있는 노인을 연달아 봤다.

“여기에 흰죽 한 그릇을 같이 먹으면 더 좋겠는데.”

노인은 더 먹고 싶은데 아쉬운 듯 말했지만 도관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차밖에 없는데 드시겠어요?”

여도사의 말에 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아니오. 그럼 모처럼 먹은 진미의 맛이 희석될 거요.”

해황 등자 세 개로 배를 채운 노인은 기운이 나는 듯 손을 털며 일어섰다.

“이거면 됐소. 어서 집에 가서 흰쌀을 끓여야겠군. 진하게 끓여서 채소 무침이랑 한 그릇 해야겠소.”

노인이 한시도 못 기다리겠다는 듯 서두르자 노복과 시종은 얼른 길을 안내했다. 한동안 식욕을 잃었던 노인에게 이렇듯 간절한 밥생각이 난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여도사가 뒤쪽에서 급히 달려왔다.

“시주님, 이걸 어쩌죠. 그 낭자가 나가셨네요.”

여도사가 미안한 듯 말했다. 노인은 아차 한 듯 손으로 머리를 치며 자신이 왜 거기 앉아 있었는지 그제야 떠올렸다. 은인에게 감사 인사를 하려고 기다리는 중이었는데 해황 등자 세 개에 까맣게 잊었구나. 나갔다고? 떠났단 말이지?

“공교롭게 됐구려.”

노인은 미간을 찌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그 낭자는 어느 댁 분이오?”

여도사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사실 어느 댁 낭자라고 하긴 좀 그래요.”

도동의 대답에 노인은 이해할 수 없는 듯 음 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럼 어느 댁 부인이신가?”

산촌에 사는 아낙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지 알면 말해 주시오. 그래야 사람을 보내 사례라도 하지. 의원 말로는 그날 제때 구했으니 망정이지, 늙은이라 한참을 병석에 누워 있을 뻔했다고 했소.”

그 사탕 귤의 효능이 그리 뛰어났단 말이야? 여도사들은 놀랐다. 그 몸종이 마음씨만 착한 게 아니라 손재주도 좋네.

“실은 낭자를 모시는 사람입니다. 몸종이에요.”

여도사의 대답에 노인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어느 집 몸종인데 그리 영특한 거요?”

“북정 사람입니다. 이름은 반근이고요.”

노인이 호기심에 묻자 여도사가 대답했다. 노인은 또다시 아, 소리를 내고는 무언가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야, 얼른 가시죠. 어느 댁 낭자인지 알았으니 사례하기도 쉽잖습니까.”

노복이 재촉했다. 모처럼 노인의 식욕이 돌아왔는데 지체할 순 없었다. 그러다가 먹고 싶은 생각이 달아나면 얼마나 아쉽겠는가. 노인은 껄껄 웃으며 여도사들에게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문 앞까지 마중을 나온 여도사 셋은 마차를 타고 떠나는 노인의 모습을 보며 기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기개가 범상치 않은 분 같아. 정말 정씨 가문에 사례하러 가면 그 댁에서도 반근 언니의 능력을 높이 살 테니 평생 바보의 시중을 들 일도 없겠네.”

한 여도사의 말에 나머지 두 여도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기개가 범상치 않다고요? 엄청 가난한 분 아니에요? 매번 올 때마다 저렇게 굶주려 있잖아요.”

문 안으로 들어온 도동은 탁자 위에 놓인 물그릇과 등자 껍질을 보며 말했다.

“이게 정말 그렇게 맛있나?”

도동은 궁금증이 생기는 듯 등자 껍질을 들고 이리저리 쳐다봤다. 등자 껍질은 어느덧 차갑게 식었고 안에 들어 있던 고기는 다 먹은 뒤라 아까처럼 맛있는 냄새는 나지 않았다. 찌고 나서 색이 죽은 과일의 시큼한 향만 날 뿐이었다.

“그러게, 반근 언니 말로는 그 댁 아씨도 안 먹겠다고 했다는데. 바보도 안 먹는 게 맛이 있을 수가 있나?”

“네? 이것도 반근 언니가 만든 거예요?”

도동이 놀라며 물었다. 아까는 사저들이 찬합을 가져오는 걸 보면서도 제대로 묻지 못했다. 노인이 말을 끊었기 때문이다. 이것도 그 재주 좋은 몸종의 솜씨였구나.

“반근 언니가 저 어르신의 배고픈 병을 두 번이나 고쳐 줬네요. 고맙다는 인사를 받을 만하네. 이 좋은 소식을 어서 반근 언니한테 알려야겠어요.”

얼른 안쪽으로 뛰어가려는 도동을 다른 여도사가 붙잡으며 말했다.

“일단 말하지 마.”

“왜요? 이거 좋은 일 아니에요? 이번 기회에 그 어르신한테 부탁하면 여기서 떠날 수 있잖아요.”

도동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은혜를 갚겠다고 말하는 건 쉬워. 하지만 그걸 행하는 사람은 많지 않지.”

나이가 많은 여도사가 말했다.

“일단 반근한텐 말하지 않는 게 좋아. 그 어르신이 진짜로 고맙단 인사를 하면 반근에게도 좋은 일이지만, 말만 그렇게 해 놓고 깜빡해 버리면 어떡해. 반근이 모르고 있어야 기대도 안 하지. 그래야 괴로워할 일도 없고.”

확실히 그랬기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반근 언니에게 좋은 소식이 있길 기다려야겠네요.”

도동이 웃으며 말했다.

산허리에 있는 소현묘관은 뚝딱뚝딱 소리로 시끄러웠다. 불에 탄 관주의 방은 손 관주의 뜻에 따라 새로 짓지 않고 싹 밀어 공터로 만든 다음 작은 정자를 지었다. 물론 손 관주의 뜻은 곧 정교랑의 뜻이었다.

건물을 새로 지을 필요 없이 낡은 건물을 새로 칠하고 보수하는 수준인 데다 손 관주가 품삯을 제때 넉넉하게 주는 덕에 공사 일정은 빠르게 진행됐다.

“15일이면 들어갈 수 있어요.”

반근이 시선을 거두고 몸을 돌려 정교랑을 보며 말했다. 정교랑은 산석에 앉아 있었다.

“곧 8월 15일이지?”

“네.”

정교랑의 물음에 반근이 대답했다. 정교랑은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더니 이제는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한 소현묘관을 바라보았다. 아니지, 이젠 소현묘관이라고 부르지 않기로 했지. 대와 소를 합쳐 큰 것은 ‘현묘’라 하고 그에 부속된 작은 것엔 ‘태평(太平)’이라는 별칭을 붙였다.

“빠르네.”

정교랑이 말했다. 7월에 집을 나와 8월 중순에 이르기까지, 소현묘관에서 태평관으로 바뀌기까지 한 달여의 시간은 확실히 빠르게 흘러갔다.

중추절이 가까워지자 경성 거리는 더욱 시끌벅적해졌다. 술집과 찻집은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쉴 새가 없다시피 했고 자식들과 함께 노인을 모시고 구경을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거리에는 여자들이 눈에 띄게 늘었고 부잣집 마차가 줄을 이었으며 웃음소리와 떠드는 소리, 물건을 파며 외치는 장사치들의 소리로 가득 찼다.

“반근 언니, 서둘러.”

한 몸종이 불렀다. 노점 앞에서 넋을 놓고 설탕 공예를 구경하던 반근은 얼른 대답한 후 찬합을 꼭 끌어안고 인파를 헤치며 몸종을 따라갔다.

“거리가 떠들썩하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냐. 15일이 임박하면 훨씬 더 떠들썩할걸.”

몸종은 웃으며 반근의 팔을 다정하게 잡아끌었다.

“언니는 그때 나와서 실컷 보면 되겠다. 우린 집에서나 달을 구경할 테지만.”

“내가 어떻게 나와. 다들 똑같은 처지인데.”

반근이 쑥스러운 듯 웃었다.

“어떻게 똑같을 수가 있어. 여섯째 공자께서 언니를 그리 좋아하시는데. 언니가 놀러 가자고 말만 하면 분명 데리고 나오실걸.”

몸종이 웃으며 말하자 반근은 얼굴이 빨개졌다.

“무슨. 공자님은, 그러니까 공자님은……· 나도 몸종일 뿐인걸.”

반근은 우물쭈물했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이게 무슨 감정인지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몸종은 무슨. 공자님은 누구랑 식사하러 갈 때도 언니를 잊지 않고 데려가시잖아.”

“그야 공자님께서 기름과자(炸果子: 밀가루를 발효시켜 길쭉한 모양으로 만들고 기름에 바삭하게 튀긴 음식)가 드시고 싶어 그러지.”

반근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런 과자는 언니만 만들잖아. 그거면 됐지. 집안에 몸종이 한둘도 아닌데 공자님이 기억하시는 몸종이 몇이나 되겠어.”

몸종은 웃으며 반근의 팔을 잡아끌었다. 비위를 맞추려는 마음과 부러운 마음이 섞여 있었다.

“그러니 공자님께서 언니를 그리 먼 곳에서 데려오셨겠지.”


주육낭이 강주에 갔다가 며칠 만에 돌아오면서 꽃다운 나이의 아리따운 몸종을 데려온 일은 집안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내력을 두고 온갖 추측이 난무하는 그 몸종은 부모와의 논의 끝에 주육낭의 측근 시녀가 됐다.

측근 시녀 자리로 말할 것 같으면 집안에서도 최소 3년은 갈고닦으며 재주를 익혀야 얻을 수 있는 자리였다. 갑자기 튀어나온 여자아이가 그토록 공자의 총애를 받으니 화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말로야 주씨 가문 노부인이 생전에 계실 때 사서 정씨 가문 바보에게 증여한 몸종으로, 이제 바보가 집으로 돌아가게 됐으니 자연스레 주씨 가문으로 돌아온 것이라지만 그게 어디 그리 간단한 일이던가. 믿는 사람이 바보지.

반근은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게 부끄럽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다. 본디 말주변이 뛰어나지도 않았거니와 어릴 때부터 도관에서 자란 탓에 집에서 생활해 온 몸종들과 어울릴 때면 주눅이 들었다. 주육낭의 체면을 봐서 다들 살갑게 대해 주니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래도 남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웃고 떠드는 일은 여전히 어려웠다. 아씨께서 계셨다면 뭐라고 하셨으려나? 아씨라는 말이 떠오르자 반근은 갑자기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가슴속에 놓인 무거운 저울추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듯했다.

아씨는, 잘 계실까? 그리 버려두고 혼자 왔는데 슬퍼하진 않으실까? 어쩌면 이 세상에 반근이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으셨을지도 모르지.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땐 무언가에 홀린 것 같았다. 생각도 제대로 안 해 보고 바로……·.

“어이, 드디어 왔구나.”

머리 위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반근이 정신을 차리고 올려다보니 2층 창가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소년이 눈썹을 치켜뜨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소년의 태도는 도도하고 거만했다. 마음속에 걸려 있던 저울추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올라가요.”

얼른 대답하고 술집으로 들어간 반근은 점원의 안내에 따라 시끌벅적한 중앙을 지나 2층 별실로 향했다. 막 층계를 오르려는데 맞은편에서 여인 몇 명이 걸어왔다. 대체로 오색 비단으로 만든 너울을 쓰고 있었는데 그중 두 여인은 5~6살쯤 되었을 법한 여자아이와 각각 손을 잡고 있었다. 반근이 몸을 비켜서는데 그중 한 여자아이가 어머, 하며 놀라는 소리를 냈다.

“언니? 그 언니네!”

아이의 말에 여인들은 영문을 몰라 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반근의 눈앞에 반갑게 웃는 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어머, 어머.”

반근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한 여자아이는 더욱 반가워하며 작은 손을 들어 보였다.

“비도 부르고 바람도 부르는 아씨의 몸종이잖아!”

반근은 아이의 얼굴을 보고 퍼뜩 깨달았다. 비 오는 날, 낡은 사당, 노인에 의지해 팥 춘권을 게걸스럽게 먹던 여자아이. 다만 지금 아이의 곁엔 노인이 없고, 반근의 곁엔 아씨가 없었다. 순간 반근은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너구나.”

반근은 밝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꼬마야, 너도 경성으로 왔니?”

아이는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잡고 있는 여인의 손을 마구 흔들었다.

“언니, 이 언니는 나랑 할아버지가 길에서 만난 언니인데 진짜 대단해. 비도 막 내리게 하고 맛있는 것도 만들 줄 알아.”

아이는 아이답게 조잘조잘 떠들었다. 옆에 있던 여인들은 이 아이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길에서 만난 인연을 다시 만나는 일은 드물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일도 아니었기에 반근을 힐끔 보고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이의 손을 잡고 있는 여인은 반근에게 살짝 고개를 까닥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고 반근도 얼른 인사했다.

“언니, 이름이 뭐야? 어디 살아? 난 단랑이라고 해, 어디 사냐면……·.”

아이는 흥분해서 떠들었지만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여인이 아이를 가볍게 잡아끄는 바람에 말이 끊어지고 말았다. 몸종도 저쪽에서 재촉했다.

“반근 언니, 빨리. 공자님이 기다리시잖아.”

양쪽에서 재촉하는 바람에 반근과 여인들은 다시 예를 표하고 헤어졌다. 아이는 못내 아쉬워하며 걸음을 옮겼다. 길 위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 인사를 나누더라도 결국엔 각자의 길을 가야 하는 법이다.

“우리 단랑 아씨도 아는 사람이 계셨네.”

함께 가던 여인들이 아이를 놀리자 아이는 득의양양한 모습이었다. 어릴 때부터 자라던 환경을 떠나 경성으로 왔으니 어린아이로서는 외로울 만도 했다. 특히 할아버지까지 병석에 누우셨으니……·.

할아버지! 할아버지 생각이 떠오르자 아이는 마음이 급해졌다.

“얼른 집에 가자, 얼른. 할아버지한테 가서 말씀드릴래.”

아이는 신이 나서 말했다. 할아버지라는 말에 여인들은 근심 어린 표정으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후 아래층으로 내려가 마차에 올랐다. 거리를 가로질러 외진 골목으로 접어든 마차는 평범해 보이는 민가 앞에 멈춰 섰다. 평범해 보이는 집이었으나 마중을 나오는 이가 적지 않았고 기세도 제법 대단해 보였다. 아이는 여종의 손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나 할아버지한테 갈래.”

아이가 소리치며 마당을 향해 뛰어가자 여종은 급히 그 뒤를 따랐다. 아이는 작은 체구로 여인을 가볍게 따돌리고 마당으로 들어서다가 맞은편에서 오던 사람과 부딪쳤다. 상대방이 잽싸게 붙잡은 덕에 그나마 걸려 넘어지진 않았다. 넘어지진 않았지만 아이는 코를 부여잡으며 눈물까지 찔끔 흘렸다.

“용서하십시오. 이 늙은이가 꼬마 아씨를 못 봤네요.”

백발의 노인이 몸을 휘청이며 얼른 아이를 달랬다. 노인의 옆에 선 사내가 엄숙한 표정에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단랑, 무례하구나.”

진씨 가문은 가정교육이 엄격하여 남녀를 불문하고 4살 때부터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이제 만 5살인 단랑도 벌써 언행에 관한 예절을 익힌 터라 부친의 어두운 표정을 보고 얼른 노인에게 깍듯히 예를 표했다.

“제가 결례를 범했어요.”

단랑이 잘못을 시인하자 노인은 미소로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소의 표정이 다소 누그러졌다.

“아버지, 저 할아버지 보러 가고 싶어요.”

단랑이 부친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가지 마라. 방금 약을 드셨어. 괜히 가서 깨우면 안 돼.”

전전긍긍하며 걸어오는 여종을 향해 진소가 손짓을 했다.

“아씨를 데려가라.”

여종은 얼른 다가와 아이를 잡아끌며 타이르고는 안아서 데려갔다. 진소가 가볍게 숨을 토하자 노인은 그런 진소의 모습을 눈여겨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손을 내밀었다. 뒤에 있던 시종이 얼른 약상자를 가져왔다. 노인은 그 안에서 자기(磁器)로 된 병을 하나 꺼내 진소에게 건넸다.

“이걸 쓰십시오.”

진소가 반색을 하며 노인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이 태의, 이 약을 부친께 쓰면……·.”

진소의 떨리는 목소리에 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인께서 쓰시라는 겁니다.”

노인은 자기로 된 병을 쥔 진소의 손을 가볍게 토닥여 주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진 대인의 근심이 과중하니 건강을 챙기셔야 합니다. 이 약으로 원기를 보충하면 식욕 부진과 불면증이 좀 나을 겁니다.”

말을 마친 노인이 이번에는 진소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대인, 마음을 다잡으셔야 합니다.”

병자를 가족으로 둔 이에게 태의가 건강을 챙기라는 말이 아니라 마음을 다잡으라는 말을 하다니 다소 기이하게 들릴 법도 했지만 진소는 눈치가 빨랐다. 부친의 병은 갑작스럽게 넘어지면서 시작됐다. 연로한 나이라 근육이 다치거나 뼈가 부러지진 않았을까 염려했지만 다행히도 부친은 찰과상만 입었을 뿐이었고 의원들도 푹 쉬면 나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쉬어도 좋아지기는커녕 상태는 점점 심각해졌다. 처음엔 몸을 일으키지 못했고 곧 다리에 감각이 없어지더니 얼마 안 가 대소변도 혼자 처리할 수 없게 되고 급기야 의식이 없는 상태로 보내는 날이 길어졌다.

정정하던 노인이 병석에 누워 부지불식간에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가 되기까지는 불과 보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너무나도 빠르고 갑작스럽게 진행된 일이었다.

의원이 수없이 다녀갔지만 병의 원인으로 내놓는 진단조차 전부 말이 달랐다. 나중에는 의원조차 섣불리 청하기 힘들어졌다. 부친의 병이 위중하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조당에서 진소의 부친상에 관한 일이 논의되기 시작해서였다. 벌써 진소의 자리를 대체할 사람을 천거하는 상소가 황제에게 올려갔다는 말까지 돌았다.

이제 겨우 경성으로 돌아왔는데 큰 뜻을 펼치기도 전에 또다시 떠나야 한다니. 이번에 떠나면 또 3년이다. 3년, 3년, 인생에 3년이 몇 번이나 있단 말인가. 진소로서는 마음이 편치 못할 수밖에 없었다.

부친의 병환과 자신의 앞날, 집안의 장래에 관한 근심으로 이 학식 있고 기개 넘치는 문인은 날로 야위어갔다. 이런 모습을 누군가가 본다면 소문은 더욱 빠르게 퍼져 나갈 터였다.

진소는 손에 든 병을 꽉 쥐었다. 이 약은 자신의 정신을 온전하게 지켜 주고 진중한 모습으로 보이게 해 줄 터였다. 일개 태의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다? 진소는 노구를 이끌고 비틀비틀 문을 나서는 노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누군가로부터 가져다 주라는 부탁을 받았나?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마음을. 진소는 자기로 된 병을 꽉 쥔 채 오래도록 생각에 잠겨 서 있었다.

시녀가 약을 내오는 틈에 자그마한 형체가 방 안으로 쪼르르 들어갔다. 방 안에는 약 냄새와 퀴퀴한 냄새가 뒤섞여 있었지만 단랑은 개의치 않고 휘장 뒤편부터 확인했다. 노인은 침상 위에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단랑이 발소리를 죽여 살금살금 다가갔다. 침상 위에는 비단 이불을 두 겹으로 덮은 노인이 눈을 감은 채 잠들어 있었다. 입으로 미약하게 후후 내쉬는 숨소리만이 그나마 노인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아직 병환과 죽음을 분간하지 못하는 단랑은 할아버지가 피곤하여 오래 쉬어야 하는 줄로만 알았다. 단랑은 침상 옆에 꿇어앉아 인형을 높이 들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제가 뭘 샀는지 좀 보세요.”

아이의 목소리는 낭랑했다. 천천히 잠에서 깬 노인이 고개를 돌리고 흐린 눈으로 아이를 바라봤다. 모처럼 의식이 또렷했다. 손녀딸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아, 단랑이구나.”

노인은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이는 할아버지가 깨자 더욱 기뻐하며 시장에서 보고 들은 것을 재잘재잘 떠들었다.

“할아버지, 얼른 좋아지셔야 해요.”

아이는 할아버지의 손을 흔들며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

“우리 15일에 등불놀이 구경 가요. 할아버지 목말을 타고 구경할래요. 높이 보여 주세요.”

노인의 흐린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좋아지긴 힘들 것 같구나. 단랑, 이 할아비는 너와 등불놀이에 갈 수 없어. 더는 네 곁에 있을 수 없단다.

“아, 참. 할아버지, 저 오늘 그 언니 만났어요.”

단랑은 손에 든 인형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팥 춘권을 줬던 그 언니요.”

노인은 어리둥절했다. 팥 춘권이라.

“할아버지, 기억하시죠? 그, 길에서 만났잖아요. 비 오는 날에, 아씨가 비 올 거라고 하니까 비가 오고, 안 올 거라고 하니까 안 오고. 그 아씨, 그러니까 그 아씨의 몸종이요. 저한테 팥 춘권을 줬잖아요. 엄청 맛있는 거.”

아이의 말이라 내용이 뒤죽박죽이었다. 생각나는 대로 말하다 보니 논리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어지러운 말이었지만 노인의 귀에는 더없이 또렷하고 분명하게 들렸다. 그 낭자라면……·. 그 낭자!

어르신, 병을 빨리 치료하셔야 해요.

그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자 노인은 벌떡 일어났다. 물론 힘이 없다 보니 팔을 휘저으며 어어, 하는 소리를 내뱉는 게 전부였지만 말이다.

“그 낭자!”

노인이 쉰 목소리로 외쳤다. 깜짝 놀란 아이는 버둥거리는 할아버지를 쳐다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고 문밖에 있던 이들이 소리를 듣고 뛰어 들어왔다. 곧 진소도 들어왔다. 창백한 얼굴로 두 눈을 부릅뜬 부친의 모습을 보자 진소는 순간 온몸에 식은땀이 났다. 안 되는데, 이렇게 빨리……·.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버지.”

진소가 잽싸게 달려가 부친의 손을 붙잡자 부친 역시 아들의 손을 꽉 붙잡았다. 그 손에는 전에 없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삼낭, 그 낭자를……·.”

노인은 아들을 보며 힘을 주어 소리쳤다.

“살려다오!”

-도리-

찬합에 든 음식을 차려놓은 반근은 예를 표하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나 주육낭 뒤에 앉았다.

“먹어. 지난번에 먹었던 게 바로 이거야.”

주육낭이 말했다. 맞은편에 앉은 진 공자는 웃으며 소매를 걷고 손을 뻗어 앞에 있는 접시에 놓인 노란 튀김 하나를 꺼내 입에 넣더니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해. 이렇게 정교한 맛을 내다니, 어떻게 만든 거야?”

진 공자는 주육낭을 무시한 채 뒤에 있는 반근을 보며 물었다.

“별거 없어요. 그냥 반죽에 벌꿀을 넣고 주무른 다음 기름에 튀긴 것뿐이에요.”

반근이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그깟 간식 하나 가지고 그리 허겁지겁 먹기는.”

주육낭은 하찮다는 투로 말했다.

“상자, 자네 부친 말씀마따나 뭔가에 빠지면 헤어나올 줄 모른다니까.”

진 공자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고 하나를 더 집어 먹었다.

“그깟 간식? 그깟 간식이 아니야. 벌꿀만 더 넣었을 뿐인데 우리가 전에 먹던 것과는 전혀 다른 맛이야.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난 찬모가 아니잖아.”

주육낭이 입을 삐죽거리며 말하자 진 공자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닐세. 마음을 쓰느냐 안 쓰느냐의 차이야. 마음을 쓰면 먹고 마시고 입고 자는 모든 게 남과 다르거든.”

“그런 일에 마음을 써서 뭐 하게? 잔재주일 뿐인걸.”

주육낭은 계속해서 코웃음을 쳤다.

“아니면 이런 작은 일에도 그토록 마음을 쓸 정도니 그 지혜가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거나.”

진 공자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작은 도(道)나 큰 도나 모두 도야. 작은 게 모이면 커지니 작은 도도 함부로 봐선 안 돼.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말도 있잖아.”

주육낭은 술잔을 들어 한입에 털어 넣고는 튀김이 놓인 접시를 진 공자 쪽으로 밀어주었다.

“먹어, 먹어, 전부 다 먹어. 어서 먹고 그 입 좀 막아.”

주육낭이 소리쳤다.

“자네처럼 억지를 부리는 자와 논쟁을 하려 했으니 내가 화를 자초한 거지. 승려 각공(覺空)이 왜 자네만 보면 벙어리처럼 구는지 이제야 알겠군! 불법 설파를 포기할지언정 자네 같은 수다쟁이 불존(佛尊)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진 않았던 거야.”

진 공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억지라니. 자네도 본인 말이 억지인 걸 알면서 그럴듯하게 꾸며대곤 하잖아. 하여간 남의 잘못만 보이지, 본인 잘못은 인정도 안 하고.”

“그 입 다물어, 다물라고. 계속 떠들면 나 확 가 버린다.”

주육낭은 성가신 듯 소리치고는 고개를 돌려 반근을 쳐다보며 호통을 쳤다.

“이게 다 네가 만든 이 간식 때문이다. 괜한 말썽을 일으키잖아.”

반근은 공자가 자신에게 농담을 한다는 걸 알았다. 자신을 중히 여기니 이렇게 스스럼없이 대하는 거겠지. 반근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네, 소인의 잘못이에요.”

진 공자도 웃으며 술을 마시고는 물었다.

“반근, 이 간식은 이름이 뭐냐?”

고개 숙인 반근의 귓가로 전에 나눴던 비슷한 대화가 울리는 듯했다.

“아씨, 이건 뭐라고 불러요?”

“난, 모르겠어.”

그 소리가 맴돌았다.

“소인은, 모르겠습니다.”

“모른다?”

진 공자는 반근을 보며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 주육낭은 성가신 듯 혀를 내둘렀다.

“그냥 먹는 거잖아. 뭔 이름이 있다고 이름을 찾아.”

그렇지. 그런데 이 아인 왜 이름이 없다고 하지 않고 이름을 모른다고 하는 거지? 모른다는 말인즉 이름이 있다는 뜻이고, 이름이 있다는 것은 그 주인이 있다는 의미다. 이 간식의 주인이 이 아이가 아니었나? 그럼 누구? 진 공자는 더 캐물으려 했지만 주육낭이 말을 끊었다.

“난 자네랑 술 마시러 온 거야. 식(食)을 논하러 온 게 아니라고. 따분해 죽겠네.”

주육낭은 술 주전자를 들어 술을 따라주며 질린다는 듯 말했다.

시(詩)를 논한다는 말을 식을 논한다는 말로 바꾸다니, 제법인걸! 진 공자는 웃음을 터뜨렸다. 서생과 무인, 절름발이와 신체 건장한 젊은이. 바로 남들이 보기엔 하등 교집합이 없어 보이는 이 두 사람이 어릴 때부터 절친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거칠면서도 세심한 구석이 있고 고상하면서도 속된 면모가 있으니 호흡이 척척 맞을 수밖에.

진 공자는 술을 주전자째 들어 고개를 젖혀가며 벌컥벌컥 마셨다. 주육낭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

“진작 그랬어야지.”

술이 세 순배쯤 돌자 두 사람 모두 불콰하게 취해 한껏 흥이 올랐다. 주육낭이 성 밖으로 말을 타고 산을 보러 가자고 제안했다. 병으로 걸음을 못 걷는 진 공자 또한 말의 능력에 기대 잠시나마 자유롭게 활보하는 쾌감을 즐길 수 있어 말 타는 것을 좋아했다. 곧바로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시종을 부르고 후다닥 아래층으로 내려와 술집을 나왔다. 반근도 따라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난 말 탈 줄 모르는데.”

반근은 기쁘면서도 불안해했다.

“뭘 겁내, 공자님께서 가르쳐 주실 텐데.”

다른 몸종이 히히 웃으며 대꾸했다. 반근은 얼굴이 빨개진 채 그 몸종과 웃고 떠들었다.

거리에는 사람도 많고 마차도 많았다. 늠름한 소년과 아리따운 시녀의 행차는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마차가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어 앞쪽에서 위압적인 호령으로 길을 여는 소리가 났다.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붐비던 인파는 신기할 정도로 쫙 갈라지면서 길을 텄다.

“누구지?”

술기운이 알딸딸한 주육낭은 미간을 찌푸렸다. 붐비는 인파 사이에 껴 있으려다 보니 이리저리 흔들려 부아가 치밀었다.

“이 몸이 성 밖으로 나가야겠다는데, 어디서 감히 길을 막아.”

주육낭이 고삐를 틀어쥐고 말을 내달리려는데 앞쪽 마차에 있던 진 공자가 얼른 휘장을 들고 손을 내저으며 말렸다.

“진안군왕(晉安郡王)의 행렬이야.”

취기가 확 달아난 주육낭은 휙 몸을 날려 말에서 내려와 사람들과 함께 길을 비켜섰다. 인파에 밀려 뒤로 물러난 반근은 잘생기고 늠름한 주 공자와 총명하고 기품 있는 진 공자가 이토록 공손한 태도를 보이자 의아했다. 반근의 눈에 이 둘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다. 이들마저 이토록 공손하게 만드는 사람은 대체 누굴까?

“고관대작이야?”

반근이 궁금증을 못 이기고 옆에 있던 몸종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역시 촌에서 온 계집이라 어쩔 수 없네.

“군왕(郡王)이셔. 황제의 친척이지.”

몸종이 대답하자 반근은 아, 하고 대꾸했다. 황제의 친척이라니,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분이네. 군왕의 마차가 코앞으로 오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이리저리 몸을 밀치며 군왕을 보려고 애썼다. 황제의 친척을 볼 수 있다니, 역시 경성은 대단한 곳이구나. 반근도 흥분을 안고 까치발을 들며 군왕을 보고자 했다.

황족만 달 수 있는 표식이 달린 마차에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의 위병들은 살기를 띠고 있었다. 마차가 흔들리면서 단정히 앉아 있는 군왕의 옆얼굴이 이따금 보였다. 가지런히 묶은 머리에 진지한 표정이었는데 콧대가 특히 높았다.

어찌나 순식간에 지나갔는지 반근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휘장에 가려져 있으니 제대로 볼 수 없을 수밖에. 마차가 저 멀리로 사라지자 이쪽 거리는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반근과 몸종도 얼른 진 공자의 마차 옆으로 따라붙었다.

“많이 봐 둬, 좋은 기운 얻게.”

진 공자의 말에 주육낭은 말 위에서 고개를 가로저으며 씩 웃었다.

“좋은 기운은 여자들이나 받는 거지. 우리 사내들한테 뭐 좋을 게 있다고.”

진안군왕은 수왕(秀王)의 장자로 어릴 때 부친을 따라 입궁했다가 황후의 품에 안긴 적이 있는데 그 후 얼마 안 가 황후가 회임을 했다. 자손이 귀했던 황제와 태후가 크게 기뻐했음은 물론이었다. 이후 황후는 황자를 낳았지만 안타깝게도 석 달 만에 요절했다. 이듬해에는 진안군왕이 또다시 상경하여 귀비의 품에 안겼는데 얼마 안 가 귀비도 회임을 하여 태후와 황제를 기쁘게 했다. 그때부터 진안군왕은 황실의 복덩이로 여겨졌고 당시 5살이었던 진안군왕을 황궁으로 데려와 키운 게 벌써 10년이었다.

10살을 넘기면서 비빈의 품에 함부로 안기는 게 힘들어졌지만 여전히 태후의 곁에서 자랐다. 우연인지 아니면 정말 뭐가 있는 것인지 진안군왕이 황궁에서 지낸 후로 황제의 자손이 번성하여 벌써 자녀가 열이나 됐다. 황자는 두 명에 불과했지만 나이 마흔이 넘어 처음으로 부친이 된 황제로서는 그 정도도 흡족해하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진안군왕은 황실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고 비빈들 사이에서는 아이를 보내 주는 동자라는 뜻에서 ‘송자동자(送子童子)’라고 불렸다. 어린아이일 때는 이런 칭호를 웃어넘길 수 있었지만 명색이 군왕이라는 자가 황궁에서 자라며 곧 성년의 나이인데도 그리 불린다면 웃을 일이 아니었다. 듣기로 진안군왕은 부친의 봉지(封地)로 돌아간다고 했다.

“따지고 보면 저분도 가엾지.”

벌써 저만치 멀어진 행렬을 보며 진 공자가 중얼거렸다.

자고로 황실의 일은 논하지 않는 게 상책이다. 일행은 빠르게 성문을 빠져나왔다.

잠시 후 주육낭과 진 공자가 머물렀던 술집으로 7~8명쯤 되는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점원은 기겁을 했다.

“누구신지……·.”

여럿이 우르르 달려 나와 묻자 우두머리인 집사가 손을 휙 내저었다. 술집 주인은 손을 뻗어 집사가 던진 은자를 잽싸게 낚아챘다. 제법 묵직하군, 통이 크네.

“분부라도 있으신지요?”

주인이 생글생글 웃으며 앞에 있는 사람들을 맞이했다. 너울을 쓴 여인 둘과 여자아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람을 찾고 있어요.”

너울을 쓴 채 아이를 손잡은 여인이 대답했다.

같은 시각 강주의 현묘관은 시끌벅적한 속세와 달리 더없이 조용했다.

“반근.”

나무 아래의 정교랑이 손을 뻗으며 말하자 몸종은 나뭇가지 끝을 손수건으로 감싸 건넸다. 나뭇가지를 건네받은 정교랑은 느릿느릿 부들방석 위에 앉아 힘겹게 글자 하나를 썼다. 몸종은 그게 무슨 글자인지 몰랐으나 그래도 그게 글자라는 건 알았다.

“어머, 아씨, 쓰셨네요. 글자를 쓰셨어요.”

몸종이 흥분하여 외쳤다. 마지막 획을 느릿느릿 마무리하고 난 정교랑은 그제야 손을 떨며 숨을 토했다. 곧이어 두 번째 글자를 쓰려고 했지만 손은 이미 통제 불가능한 상태여서 좀처럼 써지지 않았다. 정교랑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나뭇가지를 쥔 손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못 쓰겠어, 못 쓰겠네.”

“아씨, 벌써 한 글자를 쓰셨잖아요. 잘하셨어요. 내일이면 두 글자를 쓰실 수 있을 거예요.”

정교랑 앞에 앉은 몸종이 정교랑의 무릎을 주무르며 기쁘게 말했다.

“서두르지 마세요. 서두를 것 없어요.”

정교랑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난 안 서둘러.”

정교랑은 땅 위에 쓴 글자를 나뭇가지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내 말은, 이 글자를, 너무 못 썼단 뜻이야.”

몸종은 땅 위의 글자를 다시 쳐다봤다. 반듯하고 똑바른 게 아주 훌륭해 보였다.

“아주 예쁜데요. 집에 있는 공자님들의 쪽지에 있는 글자보다 훨씬 나아요.”

정교랑은 나뭇가지로 몸종의 이마를 톡 치고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싶은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정교랑은 천천히 시선을 거두었다.

“아씨, 이게 무슨 글자예요.”

“태.”

몸종의 물음에 정교랑이 대답했다.

“‘태’요?”

몸종은 다시 한번 발음해 보다가 퍼뜩 깨닫고 물었다.

“태평할 때 ‘태’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좋네요. 아씨께서 많이 연습해서 편액을 직접 쓰시면 되겠어요.”

몸종은 손뼉을 치며 물었다.

“태평, 태평, 너무 좋은 이름이네요. 태평을 기원한단 뜻이에요?”

“아니야.”

정교랑이 말을 이었다.

“내가 태평 만두를 좋아해서지.”

태평 만두? 멈칫했던 몸종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쪼그려 앉아 있던 몸종은 웃느라 아예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네, 아씨. 그럼 우리 오늘 저녁엔 태평 만두 먹어요. 도사님들한테 부탁해서 양의 간이랑 이것저것 사다 놨어요.”

정교랑도 좋다고 했다. 마당 안으로 들어오던 손 관주는 검은 비단으로 된 겉옷에 긴 흑발을 내려뜨리고 단정히 앉아 있는 여인과 무릎께에 꿇어앉아 환히 웃고 있는 몸종을 바라봤다. 흡사 가을 경치를 감상하는 여인을 그린 미인도 같았다.

녹음이 짙푸른 나뭇가지나 밝은 옷을 입고 맑게 웃는 몸종은 이 그림의 핵심이 아니었다. 극도로 수수한 옷차림에 무표정한 채 멍하니 있는 여인이 핵심이었다. 손 관주는 잠시 넋을 놓고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저런 여인을 정씨 가문에선 왜 나 몰라라 하고 내치는 건지.

“무량천존(無量天尊: 도교에서 예를 표할 때 하는 말).”

정교랑과 몸종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손 관주에게 답례했다.

“아씨, 며칠 후면 저쪽 일이 마무리됩니다. 더 손볼 곳은 없는지 한번 가 보세요.”

“네.”

손 관주의 말에 정교랑이 대답했다. 몸종과 손 관주의 부축을 받으며 함께 가 보니 소현묘관의 모습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앞쪽 전각은 엄숙하고 경건해 보였고 뒤쪽의 거처는 그윽하고 품위가 있었다. 마당 입구에 선 몸종은 얼떨떨한 느낌이었다.

뇌우가 내리치던 밤이 불과 얼마 전에 있었다. 당시 몸종은 덜덜 떨며 바깥마당에 있는 사다리를 통해 지붕 위로 올라갔다. 지붕 위에서 몸을 바짝 엎드리고 앞으로 기어가며 이제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비가 그치고 날이 갠 후에도 그녀는 멀쩡히 살아 있었다. 그 악몽과도 같았던 일은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팔각정 주변에 새 흙을 깔고 대나무를 옮겨 심었다. 가을바람이 불어오자 쉭쉭 소리가 났다. 손 관주와 정교랑의 대화가 귓가로 들려왔다.

“괜찮아 보이세요? 화초를 더 심을까요?”

“괜찮네요.”

손 관주가 공손하게 묻자 정교랑이 대답했다. 몸종은 정신을 차리고 정교랑을 부축해 앞으로 걸어갔다. 두 아이가 뛰어나와 정자 안에 공손하게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아씨, 앉으세요.”

아이는 눈을 내리깔고 상냥하게 말했다. 소현묘관에 일이 일어나고 정교랑과 몸종이 산 아래로 옮겨가면서 두 아이도 따라서 거처를 옮겼다. 그러다가 소현묘관이 수리에 들어가면서 손 관주 혼자 이곳저곳 관리하는 게 힘에 부치자 두 아이는 자신들이 돕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섰다.

“요 며칠 묘춘과 묘령 두 아이가 쓸고 닦고 하면서 청소했어요.”

손 관주가 웃으며 말했다. 두 아이는 고개를 숙이고 한쪽 옆에 쭈뼛쭈뼛 서 있었다.

딱하기도 하지, 그 여인이 아무렇게나 데려다가 가축 대하듯 키웠으니. 기분 좋으면 무시하고 기분 나쁘면 때리고 욕하며 화풀이하고. 무량천존, 그 화근덩어리는 이제 죽었어. 손 관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이 아씨를 따르면 좋은 날이 올 게야.

“아씨, 이 두 아이는 원래 이곳 사람이었으니 어찌 처리할지 아씨께서 결정하세요.”

소현묘관은 이제 정교랑의 구역이었다. 수행을 계속할 생각이라면 어린아이들이 자신을 따라 산 아래로 내려가는 게 옳겠지만 정교랑 쪽에도 시중들 사람이 필요했다. 정교랑은 두 아이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요, 내가 처리하죠.”

두 아이는 살짝 고개를 들고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 눈 속에 놀람과 기쁨이 드러났다.

“아씨,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아이는 털썩 소리가 나도록 꿇어앉아 고개 숙여 연신 절을 올렸다. 이 아씨만 따르면 이제 좋은 날이 올 거다. 너희에게도 드디어 좋은 날이 왔구나. 손 관주 역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손 관주.”

정교랑이 손 관주를 쳐다보며 말했다.

“잘 아는 도관이 있습니까?”

손 관주는 멈칫했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있는데요.”

“이 둘을 그리로 보내세요.”

정교랑이 말했다. 뭐라고? 두 아이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고, 손 관주와 몸종 역시 흠칫 놀랐다. 어째서?

“아씨, 아씨. 저희가 뭘 잘못했다면 벌을 주시고 내쫓지만 말아 주세요. 저희를 내쫓지 마세요.”

두 아이는 머리를 조아리며 눈물로 호소했다.

“사실 너희 잘못이라고 할 수도 없어.”

정자에 앉은 정교랑은 시종일관 무표정한 채로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살길을 찾으려 하고, 살아남고자 목숨 걸고 도박을 하기도 해. 개미 같은 미물도 살려고 발버둥 치는데 사람인들 오죽할까. 그러니 너희가 한 일은, 잘못이라고 볼 수 없어.”

무슨 뜻이지? 손 관주는 이해가 안 가 저도 모르게 몸종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몸종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아씨, 아씨. 저희가, 저희가 뭘 했는데요?”

한 아이가 고개를 들고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울며 말했다.

“그 관주의 손에 자란 건 저희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그 관주와 지내면서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지만 그런 못된 심보는 안 배웠어요. 아씨, 부디 살펴 주세요.”

아이들은 더 이상 정교랑을 보지 않고 몸종과 손 관주를 보며 말했다. 저 사람은 바보니까 좋아했다가 화냈다가 이랬다저랬다 하겠지. 아무것도 모르니까. 하지만 이 몸종과 손 관주는 이치를 알 거야. 이치로는 저 바보가 윗전이라지만 최종 결정은 이 두 사람이 하겠지.

몸종과 손 관주도 울고불고하며 매달리는 아이들을 보자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 두 아이가 그 여인의 제자라고는 하나 나이도 아직 어리고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것도 아니잖아. 제자라는 게 맘에 안 든다고 내쫓기에는 실로 가엾지. 손 관주가 말을 거들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머뭇거리고 있을 때였다.

“그날, 너희가 마당 문을 열어서 그 사내가 들어오도록 유인했지?”

정교랑의 말에 두 아이는 공포에 떨며 땅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떻게 알았지? 정말 바보가 아닌 거야?

순간 몸종의 낯빛도 싹 변했다. 그날 문단속을 확실히 하고 간 일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그 호색한이 대담하게도 문을 열고 들어간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중간에서 수작을 부린 자가 있었어!

그날 그 문이 닫혀 있었다면 아무리 호색한이라 해도 그 안으로 들어갈 생각까지는 못 했을 터였다. 문이 열려 있는 걸 보고 슬쩍 엿봤다가 흥분된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겠지. 작은 구멍 하나에 둑이 무너지듯 결국 그 안으로 돌진해 들어갔을 터였다.

세상에, 누가 일부러 덫을 놓았다니! 세상에, 그 속이 시커먼 계집이 아니라 이 가엾은 것들의 짓이었다니! 어떻게! 어떻게 이래! 어떻게! 어떻게 감히!

“너희!”

소리를 빽 지른 몸종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손으로 두 아이를 가리켰지만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손 관주 역시 아무 말도 못 했다. 자신이 들어서는 안 될 일을 들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자리를 피할 수 없어 그저 고개만 숙였다. 두 아이는 더 큰 소리로 울며 머리를 쾅쾅 찧으며 정교랑을 향해 절을 올렸다.

“아씨, 아씨. 저희는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우리 언니가 보고 있다가 바로 사람을 부르러 갔어요. 절대, 절대로……·.”

한 아이가 울며 말했다.

“그래, 너희는 아주 잘했어. 정씨 가문이 나서서 처벌할 수 있도록, 그 사내가 내 심기를 건드리게 하면서도, 때맞춰 사람을 불러와서, 일이 수습하지 못할 지경으로 번지는 걸 막았지.”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너희가 그런 짓을 벌인 것도, 아마 막다른 길에 몰려서였을 거야.”

두 아이는 울며 머리를 조아렸다. 살짝 안도감이 들었다.

“아씨, 혜안으로 살펴 주세요. 부디 사정을 살펴 주세요.”

두 아이가 울며 말했다. 이번에는 진심으로 하는 부탁이었다.

“당연히 사정을 살펴야겠지. 하지만.”

정교랑이 둘을 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속이 좀 좁거든.”

두 아이는 또다시 놀라 고개를 들고, 여전히 무표정한 채로 정자에 단정히 앉아 있는 그 여인을 바라봤다.

손 관주가 오자 회랑 아래에 앉아 버선을 깁고 있던 몸종이 급히 손 관주를 향해 손짓을 했다. 손 관주는 얼른 발소리를 죽이고 회랑 아래로 걸어와 앉았다.

“아씨는 주무셔?”

손 관주가 나지막이 묻자 몸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씨는 몸이 안 좋고 기력도 온전치 않으셔서 낮엔 반 시진씩 주무셔야 해요.”

몸종이 손에 든 바늘과 실을 계속 움직이며 말하자 손 관주는 아, 하고 대꾸했다.

“어쨌든 좋아지시고 있잖아. 요양하면 점점 더 좋아지실 거야.”

손 관주는 웃으며 덧붙였다.

“주 부인께서 올리신 간절한 기도가 헛되지 않았네. ”

몸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께서 살아 계셨다면 얼마나 좋아하셨을지.”

손 관주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려 방 안을 쳐다봤다. 얼마나 영리한 아이인가. 게다가 얼마나 대단한 아이인가.

“그 두 아이는 벌써 보냈어. 보원산에 있는 도관이야. 거기 관주가 나랑 동문수학한 사이니까 아씨께서 마음 놓으셔도 될 거야.”

마음을 놓으라니, 무슨 마음을 놓으란 거지? 몸종은 고개를 숙인 채 바느질을 하며 네 하고 대답했다. 손 관주는 바느질 솜씨가 좋다고 칭찬 몇 마디를 던진 후 돌아갔다. 몸종이 바느질거리를 들고 잠시 멍하니 있는데 안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씨.”

몸종은 얼른 바느질거리를 내려놓고 안으로 들어갔다. 정교랑은 벌써 침상에 앉아 있었다. 몸종은 정교랑을 똑바로 앉혀 주고 물을 한 잔 올린 다음 머리를 빗겨 주었다.

“아씨, 관주님이 그 두 아이를 벌써 보내셨대요.”

몸종의 말에 정교랑은 응 하고 대꾸한 후 고개를 숙인 채 책을 봤다. 방 안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그 두 아이가 불쌍하단 생각이 드니?”

정교랑이 물었다.

“아니요. 불쌍한 사람에겐 미운 구석이 있는 법이죠. 딴에는 완벽한 계획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만에 하나가 있잖아요. 만에 하나 아씨께서 무슨 일이라도 당하셨으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던 몸종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듯 차마 말을 끝맺지 못했다. 요 며칠 밤마다 악몽에 시달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정말 그랬다면, 우리 모두 살아남지 못했을 거야.”

정교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규방 여인이 치욕을 당한 일만큼 수치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정씨 가문에서는 사정을 아는 이를 모조리 죽여 입을 막았을 것이다.

“그러니 그 두 아이가 밖에서 조심스레 살폈겠지. 만에 하나 너나 관주가 오지 않았더라도 그 아이들이 들이닥쳤을 거야.”

정교랑의 말에 몸종은 아, 하고 깨달았다.

“따지고 보면, 둘 다 아주 잘했어.”

정교랑은 책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두 아이가, 똑똑하긴 해.”

몸종은 이해가 안 가는 듯 정교랑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럼, 아씨. 그 두 아이가 마음에 드세요?”

정교랑은 고개를 들고 몸종을 바라봤다.

“난 바보일 뿐, 미치광이는 아니야.”

정교랑의 말에 몸종은 풉, 웃음을 터뜨렸다.

“아씨, 또 절 놀리시네요.”

“놀린 거 아니야. 내가 말했잖아, 난 속이 좁다고.”

정교랑은 책장을 한 장 넘기며 말했다.

“나를 속이고 짓밟고 이용한 사람을 어떻게 곁에 둘 수 있겠어.”

그렇지. 아씨를 속이고 짓밟은 사람은 이미 목숨을 잃지 않았는가. 그 두 아이는 다른 도관으로 보내졌을 뿐이니, 정말이지 운이 좋았다. 몸종은 고개를 숙인 채, 네 하고 대답했다.

“아씨, 생선을 새로 샀는데 어떻게 드시고 싶으세요?”

몸종이 한결 홀가분해진 말투로 물었다.

“무슨 생선인데?”

“커다란 청어예요.”

정교랑의 물음에 몸종이 대답했다.

“부엌에 있는 재료는?”

정교랑이 또다시 물었다.

“파랑 달걀이 있어요. 어제 산에서 딴 버섯이랑 목이도 있고요.”

몸종은 손가락을 꼽아가며 대답했다.

“그리고 또……·.”

“됐어.”

정교랑이 말을 끊었다.

“어죽을 만들자.”

몸종은 기쁘게 고개를 끄덕이고 단정히 꿇어앉아 진지하게 듣고 기억할 준비를 했다.


밤의 어둠이 내릴 무렵, 경성에 있는 진소의 집에서는 드디어 돌아온 집사가 자세한 사정을 전하고 있었다.

“다행히 아씨께서 그 계집의 이름을 불렀던 걸 누군가가 기억하셔서 그 이름을 댔더니, 운 좋게도 그 집 점원이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 계집이 자기 집에서 음식을 가져와 점원이 씩씩거린 일이 있어 기억에 남았다더라고요.”

착한 사람은 하늘이 돕는다고 했던가. 진소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런 우연이 있나, 우연에 우연이 겹치다니.

“그래서 어느 댁 낭자인지는 알아냈는가?”

“당시 별실에는 공자님만 두 분 계셨답니다.”

진소의 물음에 집사가 대답했다. 공자라고? 아버지 말씀으로는 그 계집이 낭자의 시중을 들었다고 했는데? 그것도 나이가 열네다섯 살쯤 된 낭자랬는데, 왜 갑자기 공자로 바뀐 거지? 진소는 미간을 찌푸렸다.

“더욱 다행스러운 것은 두 공자님께서도 경성의 유명 인사란 사실이지요.”

집사가 말을 이었다.

“한 분은 노섬 주씨 가문 공자님이고, 한 분은 다리를 저는 진 공자님이십니다. 반근이 두 분 중 누구의 몸종인지는 점원도 모른답니다.”

주씨 가문과 진씨 가문이라. 진소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렇다면 내 명첩을 들고 가 알아보면 되겠군.”

집사의 생각도 그와 같았다. 둘 다 평민 백성의 집안은 아닌지라 함부로 찾아가 몸종의 일을 묻는 건 곤란했다. 노야의 명첩을 들고 가면 일이 훨씬 쉬워질 것이다. 집사는 네 하고 대답한 후 뒤돌아 나갔다.

술을 마시고 말까지 타다 돌아온 진 공자는 목욕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누워 쉬고 있었다. 밖에서 몸종들이 떠드는 소리가 진 공자 귀에 들렸다.

“방금 누가 누굴 찾았다고 했느냐?”

진 공자가 휘장을 들며 묻자 몸종들이 얼른 들어와 휘장 앞에 꿇어앉았다.

“공자님께 아뢰옵니다. 진소 상공 댁에서 사람을 보내 저희에게 반근이라는 이름의 몸종이 있는지 물으셨어요. 기이한 일인데 이유는 잘 모르겠고요.”

진 공자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누구? 진소?”

진 공자가 이어 물었다.

“반근이라고?”

몸종들은 공자가 그런 어투를 쓰는 일이 드물었기에 흠칫 놀라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휘장을 들어올렸다.

“네, 진 상공의 명첩이에요. 반근이 저희 집 몸종이냐고 물었어요.”

몸종이 진지하게 말했다. 진 공자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손을 뻗어 침상 옆에 있는 지팡이를 집어 들며 말했다.

“주씨 저택으로 가자.”

지금? 몸종들은 놀라 밖을 쳐다봤다.

한편 주육낭은 기력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부친의 부름을 받기 전까지 연무장에서 권법을 연마하고 있었던 터라 온몸이 땀에 흠뻑 젖은 채로 걸어왔다.

“바람이 찬데 풍한이라도 들면 어쩌려고.”

주육낭의 모친은 걱정스러운 듯 말하며 몸종을 시켜 땀을 닦을 수건을 가져오게 했다. 주육낭의 부친이 성가신 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다들 물러가라.”

주육낭의 모친은 감히 거역하지 못하고 몸종들과 함께 자리에서 물러났다.

“아버지, 무슨 일이세요?”

주육낭이 입을 열었다.

“네가 데려온 아이가 보통이 아니더구나.”

부친의 말에 주육낭은 미간을 찌푸렸다.

“말투나 행동거지가 남다른 면은 있지만, 뜯어보면 별다를 것도 없습니다.”

주씨 가문 사람들은 늘 화법이 직설적이었다. 말을 마친 주육낭이 부친을 쳐다보며 말했다.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하십시오.”

“방금 진 상공 댁에서 사람을 보내 왔다.”

주육낭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런 고관대작 유학자가 주씨 가문을 찾아왔다고? 혹시 국본을 세우는 일 때문인가?

황제는 어느덧 연로했고 몸이 허약해 병치레가 잦아 태자 책봉은 시급한 문제였다. 황자 둘을 놓고 조정에서는 의논이 분분했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화가 될 수 있는 일이었기에 다른 이들은 골치가 아프다며 피하려고 했지만, 주씨 가문은 이를 엄청난 기회로 여겼다.

애석하게도 무장은 지위가 낮았고 주씨 가문의 관직 역시 무장 중에서도 낮은 축에 속했다. 조부의 선견지명으로 경성에 올라와 일거에 명성을 얻지 않았다면 이 넓은 경성 바닥에서 주씨 가문에 대해 아는 자는 이미 없었을 것이다. 이들을 포섭하고자 손을 내미는 이가 없는 마당에 무턱대고 찾아가 각오를 다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먼저 찾아와 주다니, 그것도 그런 엄청난 거물이.

“진 상공께선 선택을 하신 겁니까?”

주육낭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눈을 빛냈다.

“누구를 따른답니까?”

금방이라도 옷소매를 걷고 누가 됐든 일단 달려들어 덤빌 태세였다. 자고로 부귀영화는 위험 속에서 얻는 법이라고 했다. 앞뒤를 살피고 이것저것 재며 몸을 사리는 게 꼭 안전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크게 한바탕 붙고 나면 성패가 어찌 되든 속은 시원할 터였다.

주육낭의 부친은 아들의 모습을 보며 실소를 터뜨렸다. 동시에 집사가 가져온 명첩을 받아들 당시 자신의 모습도 이와 별반 다를 바 없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육낭, 괜한 생각을 하는구나.”

부친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진씨 가문에서 그 몸종에 대해 물었다.”

멈칫했던 주육낭이 물었다.

“반근이요? 무슨 일로요?”

주육낭의 부친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내가 물으려던 참이다.”

그 계집이 진 상공을 알았단 말인가? 말하지 않은 일이 대체 얼마나 많은 거야? 그저 영리하고 기민한 덕에 그 바보를 데리고 천 리 길을 이동해 집까지 데려다줬다고 여겨 딱히 더 묻지는 않았건만.

“제가 가서 물어보겠습니다.”

주육낭은 곧장 뒤돌아 나갔다. 문밖에서 집사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노야, 진 상공께서 오셨습니다.”

명첩을 보내 확인하자마자 이렇게 빨리 직접 찾아왔다? 주씨 부자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토록 중요한 계집이었단 말인가? 주씨 부자는 지체하지 않고 곧장 객청으로 나가 맞이했다. 두봉(斗篷: 머리 부분을 덮는 쓰개가 달린 옷) 차림의 진 상공은 벌써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고 있었고, 여자아이를 안은 노복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진……·.”

주육낭의 부친이 얼른 허리 굽혀 인사하며 진 상공을 맞이했다. 인사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진 상공이 두봉을 벗으며 맞절을 했다.

“귀댁의 낭자께 목숨을 구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목숨을 구한다니? 주육낭의 부친은 영문을 몰라 하며 물었다.

“어느 낭자 말씀이십니까?”

주씨 가문 3형제 슬하에 있는 7남 8녀 중 딸 다섯은 이미 출가한 상태였고 집에는 셋이 남아 있었는데, 막내는 아직 강보에 싸인 어린아이였다. 그런 딸에게 진 상공의 목숨을 구할 능력이 있다고?

“반근이란 계집이 시중을 드는 낭자 말입니다.”

진소가 말했다. 반근이 시중을 드는 낭자?

“반근은 우리 육낭의 시중을 드는데요.”

주육낭의 부친은 말하면서 객청 밖을 내다봤다.

“아, 저기 오는군요.”

진소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두 몸종이 등을 들고 한 몸종을 안내해 급히 걸어오고 있었다. 주육낭도 회랑 아래까지 나가 있었다. 여자아이는 급히 걸어오는 몸종을 보고 신이 나서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언니.”

반근은 흠칫 놀랐다. 이 집에서 저 아이를 또 볼 줄이야.

“너는……·.”

막 입을 열려던 반근은 공자와 노야가 한자리에 있는 걸 보고 급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언니, 우리 할아버지가 언니를 봐야겠대.”

여자아이가 달려와 반근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반근 낭자, 큰비가 내리던 날 사당에서 낭자의 아씨가 술을 나눠 주며 병세를 물었던 노인을 기억하시오?”

진소는 자신의 딸과 반근이 서로 아는 듯한 낌새를 보고 구면이라 확신한 후 지체하지 않고 물었다. 반근은 갑작스레 다시 나타난 여자아이 때문에 혼란스럽던 찰나에 낯선 사내로부터 그 일에 관한 질문을 받자 저도 모르게 멍해졌다.

그날, 큰비, 낡은 사당, 마차, 화로에 데운 술, 고단했던 여정. 아씨는 병으로 지난 일을 금세 잊으시고 자신은 이제 아씨 곁을 지키지 않는다. 그런 지난 일을 다시 언급할 이는 평생 없을 줄 알았기에, 순간 왈칵 눈물이 나왔다.

“그런데 누구세요?”

반근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진소는 자신의 질문을 인정하는 반근의 대답에 내심 크게 기뻤다.

“그 노인이 바로 내 부친이시오. 그 아씨의 혜안을 부친께서 미처 모르셨던 것 같소. 병환이 깊어 병석에 앓아누우셨는데, 부디 아씨께서 구해 주셨으면 하오.”

진소는 허리를 깊이 숙이며 극진한 예를 표했다. 일개 몸종에게 이런 예를 표하다니, 진소가 그만큼 절박하다는 뜻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주씨 부자는 영문을 모르겠는 눈치였고 반근 역시 여전히 멍한 상태였다. 노인, 병환, 아씨, 그 모든 게 머릿속에 윙윙 울렸다.

“아씨요? 어느 아씨요?”

반근은 멍한 채로 중얼거렸다. 때마침 도착한 진 공자는 그 대화를 듣고 순간 모든 걸 깨달았다. 그동안 뭔가 이상하다고, 앞뒤가 안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그 모든 의문이 단숨에 풀려 버렸다.

“네게 간식 만드는 법을 알려 준 그 아씨 말이다. 그 아씨도 차를 싫어한댔지. 너와 천 리 길을 함께 해 집으로 돌아간 그 아씨 말이야.”

진 공자는 앞에서 부축하던 시종들을 제치고 지팡이에 의지해 절뚝거리며 직접 걸어왔다.


곁방 안. 주육낭과 진 공자는 앞에 꿇어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반근을 쳐다봤다.

“그때 길에서 만났는데 아씨께서 어르신의 병을 빨리 치료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제가 진료비를 받겠다고 하자 그 어르신께서는 웃으며 아씨의 말을 믿지 않고 가 버리셨죠. 그런데, 그런데 정말 병이 나셨네요.”

반근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주육낭은 머릿속이 어지러운 듯 반근의 말을 끊었다.

“아씨의 말, 아씨의 말이라니. 어느 아씨가 말했단 말이냐?”

진 공자는 한숨을 쉬었다.

“육낭, 믿지 않으려고 하지 마. 어느 아씨인지 뻔히 알잖아.”

주육낭은 그래도 고집스럽게 반근을 쳐다봤다.

“우리 집 아씨요.”

반근이 주육낭을 보며 대답했다.

“그 바보?”

주육낭이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그 바보가 병을 치료한다고?”

“우리 아씨는 바보가 아니에요. 병에 걸리셨던 건데 조금씩 나아지고 계세요.”

반근이 절절한 말투로 대답했다.

“네, 아씨는 병을 볼 줄 아세요. 엄청 대단하시죠, 대단하세요.”

주육낭은 놀란 눈으로 두려움에 떨었다.

“허튼소리! 황당하군!”

주육낭은 옷소매를 뿌리치며 소리쳤다. 일개 바보가! 일개 바보가! 농담도 정도껏 해야지! 반근은 주육낭의 호통에 놀라 몸을 떨며 말을 잇지 못했다.

“반근.”

진 공자가 말을 받아 반근을 보며 물었다.

“내가 묻겠다. 병주에서 강주까지 어떻게 돌아왔지?”

반근이 진 공자를 쳐다봤다.

“가다가 쉬었다가 하면서 돌아갔어요.”

처음 데려왔을 때 물어봤던 건데? 대답도 했잖아?

“여비 말이다. 여비는 어찌 구했고?”

진 공자가 물었다.

“그게, 아씨께서 병을 치료하며 마련하셨어요.”

반근이 대답했다.

“허튼소리!”

주육낭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대체 무슨 저의를 품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게냐! 너희 여비는 내 조모님께서 남겨 주신 돈이 아니었느냐?”

그래서 안 물어봤던 거다. 물어볼 필요도 없으니까! 뻔한 일을 뭐 하러 물어? 이 계집이 감히 헛소리를 지껄이다니! 반근은 당황하여 주육낭을 쳐다봤다. 공자님이 왜 이렇게 분노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또 어떻게 보면 알 것 같기도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