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부인은 여종과 몸종을 대동하고 여유를 부리며 걸어갔다. 대부인의 거처로 가려면 연못을 지나야 했다.
“며칠 사이에 국화가 피었구나.”
이부인은 연못의 국화를 보며 말했다.
“네, 올해는 국화가 일찍 피었네요.”
여종이 웃으며 말하자 이부인은 걸음을 늦추었다.
“그래, 예쁘구나. 구경 좀 해야겠다.”
뒤에 있는 여종들은 초조하기도 하고 이해도 안 되는 듯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대부인께서 일이 있다며 부르셨는데? 왜 이리 느긋하지? 물론 이부인에게 주의를 줄 만큼 멍청한 여종들은 아니었다. 이부인이 뭐 바보도 아니고!
“어머니.”
뒤에서 정칠랑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부인이 돌아보자 정칠랑 등 여자아이 몇 명이 꽃구경을 하는 게 보였다.
“재미있게 놀렴. 물에 빠지지 않게 조심하고.”
정칠랑은 저쪽에서 손을 흔들며 알았다고 소리치고는 모친이 사람들과 함께 걸어가는 모습을 쳐다봤다.
“재미 하나도 없네.”
정칠랑이 손에 든 꽃가지를 연못 속으로 던져 버렸다. 정오랑과 정사랑은 정육랑에게 국화를 골라 주고 있었다.
“동 낭자네 집에서 다회를 연대.”
정육랑이 말했다.
“그럼 뭐 해. 우린 갈 수도 없잖아. 괜히 갔다가 놀림만 당하지.”
산석 위에 앉은 정칠랑이 국화를 보며 말했다.
“저 바보는 언제 가는 거야?”
“말 함부로 하지 마. 가긴 어딜 가.”
정오랑이 대꾸했다.
“우리 집 국화는 예쁘게 피었는데 동 낭자네는 아니잖아. 동 낭자가 다회를 연다면 우린 국화회를 열자.”
정육랑이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언니, 밖에 나가도 놀림을 받는 처지에 사람을 집으로 불러들여 바보를 보여 주려고 이래?”
정칠랑이 입을 삐죽거리며 반쯤 핀 국화를 꺾어 짓이긴 다음 땅바닥으로 던져 버렸다.
“하긴.”
정육랑은 김이 빠진 듯 맞장구를 쳤다.
“왜 아직도 도관으로 안 보내는 거야. 아버지 말씀으로는 예전에 도사가 그랬대. 도관으로 보내면 좋아질 거라고.”
정칠랑이 국화를 틀어쥐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하자 정칠랑은 정원을 가득 수놓은 국화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꽃구경 중이었구나.”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자매들은 고개를 돌려 쳐다보고 반갑게 웃었다.
“넷째 오라버니!”
한 달 못 본 사이에 정사낭은 많이 야위었지만 그래도 활기찬 모습으로 몸종의 부축을 받으며 서 있었다. 자매들은 정사낭을 둘러싸고 안부를 물었다.
“넷째 오라버니, 겁도 없이 정원까지 오다니요. 여자 귀신한테 잡혀갈까 봐 겁 안 나요?”
정칠랑이 웃으며 말하자 나머지 자매들이 얼른 눈치를 주었다. 하지만 정사낭은 신경 안 쓴다는 듯 웃었다.
“겁 안 나. 귀신은 못된 사람을 무서워하거든. 지난번에 못 잡아갔으니 이젠 감히 못 올걸.”
정사낭은 웃으며 정칠랑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넷째 오라버니. 귀신은 무섭게 생겼어요?”
정칠랑은 호기심이 생기는 듯 신이 나서 물었다.
“안 무섭게 생겼어.”
정사낭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넷째 오라버니가 천천히 산책하며 기분 전환하도록 우린 저쪽 가서 놀자.”
정오랑이 말했다. 정칠랑은 여자 귀신에 관해 더 묻고 싶었지만 언니들이 전부 자리를 뜨는데 혼자 남아 놀고 싶지는 않아서 내키지 않지만 하는 수 없이 따라갔다.
“공자, 힘드시죠. 그만 들어가세요.”
춘란이 말했다.
“안 힘들다.”
정사낭은 멀지 않은 앞쪽을 보며 말했다.
“좀 더 걷자.”
춘란은 네 하고 정사낭을 부축하며 천천히 걸었다. 그 거대한 산석 근처로 온 두 사람은 동시에 걸음을 멈추었다. 고개를 돌리고 춘란을 보며 무언가 말하려고 하던 정사낭의 눈에 멍하니 그 산석을 쳐다보고 있는 춘란의 모습이 들어왔다. 왜 이 아이도 산석을 쳐다보지?
산석 위에 단정히 앉아 무심한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던 그 여인이 어렴풋이 보이는가 싶더니 정사낭이 눈을 깜빡이자 금세 사라졌다.
“춘란, 네가 여기 와서 여자 귀신한테 빌었다지?”
정사낭이 문득 물었다.
“그럼 너도 여기서 뭘 봤느냐?”
춘란은 덜덜 떨며 대답했다.
“소인은 여기에서 방도를 알려 준 사람을 만났어요. 공자를 구할 방도요.”
정사낭은 실망한 듯 아 하고 대꾸했다. 어쩌면 그 여인은 정말 환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땐 이미 병이 났던 때니까.
“그 주씨 가문의 계집 말이구나.”
정사낭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 애한테 고맙단 인사도 못 했는데 떠났네.”
춘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춘란은 다시 산석을 쳐다봤다. 이상하게도 그 몸종의 모습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가리개로 몸을 가리고 있던 그 바보 낭자의 모습은 또렷하게 기억이 났다. 춘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공자, 이제 막 몸이 나으셨으니 그만 들어가세요. 날씨가 쌀쌀해졌어요.”
정사낭은 알았다고 한 후 춘란의 부축을 받아 천천히 걸어갔다.
같은 시각 이부인은 마침내 대부인 앞에 앉았다.
“형님, 여기 국화가 참 예쁘게 피었네요.”
이부인은 병풍 앞에 놓아둔 국화를 보며 말했다.
“정원에 많이 피었으니 마음에 들면 얼마든 꺾어 가.”
대부인이 말했다. 이부인은 몸종이 올리는 차를 받아 입을 축였다.
“우리 집 국화가 예쁘긴 해도 최고라고 할 순 없죠. 성에 새 꽃장수가 왔는데 이름나고 진귀한 국화가 많더라고요. 다들 앞다투어 사려고 난리인데 저도 운이 좋아 두 아름을 구했어요. 며칠 후에 가져다준다니 그때 와서 보세요. 마음에 드실 거예요.”
대부인은 이름나고 진귀하다는 말에 심장이 마구 뛰었다.
“얼만데?”
대부인이 물었다. 이름나고 진귀한 꽃이면 보통 비싼 게 아닐 텐데!
“별로 안 비싸요, 300관(貫: 엽전 1,000개를 꿴 꾸러미)이에요. 형님, 그걸 마당에 두고 다 함께 꽃구경을 하면……·.”
이부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부인이 청랑, 하고 이름을 불렀다. 이부인은 대부인을 쳐다보며 잠자코 있었다.
“꽃을 환불하게.”
대부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형님이 아직 못 보셔서 그래요. 보면 틀림없이 마음에 드실 거예요.”
이부인은 미소를 지으며 부채를 만졌다. 새로 산 상아 부채였는데 재질이 부드럽고 매끄러워 마음에 쏙 드는 물건이었다.
“계약금도 벌써 줬는데 환불하는 법이 어디 있어요.”
대부인은 이부인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래. 그리 마음에 들면 자네 돈으로 사게. 사고 싶은 거 마음껏 사라고.”
“형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부인은 웃으며 부채질을 했다.
“다 같은 식구 아닌가요. 전 이 집안 돈을 쓰면 안 된단 거예요?”
“자네!”
열 받은 대부인이 소리를 질렀다. 팽청랑이 시집온 후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말한 건 처음이었다. 동서가 왜 이러지? 어딘지 괴이해졌어. 귀신에 씌었나?
-과오-
가리개의 천을 든 정교랑의 귀에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희미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누가 우나 봐요?”
뒤에 걷던 몸종이 정교랑의 시선을 따라 쳐다보며 물었다. 이쪽 마당은 정씨 가문의 가장 북쪽으로 지대가 높은 편이었다. 본디 정찰과 방호에 쓰이는 곳이지만 태평성대라 쓸모가 없었다. 높은 곳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울음소리는 동쪽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노부인 쪽인가 봐요.”
몸종이 말했다.
“정씨 가문의 노부인?”
정교랑이 물었다.
“네, 집안일에는 관여 안 하시고 예불에만 전념하시는데 무슨 일일까요?”
몸종은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든 내 알 바 아니지. 정교랑은 고개를 숙이고 발을 들어 걸음을 옮겼다. 한 바퀴만 더 돌면 다섯 바퀴를 채우게 된다.
하지만 정교랑의 예측은 엇나갔다. 그 일은 정교랑과 관련된 일이었다. 노부인은 자신의 앞에서 흐느껴 우는 두 며느리를 보며 극심한 두통을 느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애초에 네 잘못이 아닌 일인데 맏이가 네게 사당에 가 반성하라는 벌을 내렸다고?”
노부인은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투로 물었다. 방금 누구만 단독으로 부엌을 쓰게 해 주고 나머지는 안 된다는 일을 얘기 중이지 않았나? 왜 얘기가 여기로 튀어? 아니지, 아니지, 맨 처음엔 누가 부채를 샀다고 한 거 같은데? 꽃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주 엉망진창이구먼!
“다들 입 다물어라!”
노부인은 손에 든 염주를 팔걸이 책상 위에 무겁게 내려놓으며 호통쳤다. 며느리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얼굴이 다소 수척하긴 해도 꽤 정정해 보이는 노부인은 두 며느리를 차례로 쳐다봤다.
“너희 마음에 응어리가 생긴 게 그 바보 때문이로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 바보의 몸종이 농간을 부리는 바람에 주씨 가문 사람이 기회를 틈타 소동을 부리고, 둘째 동서가 당시 일을 섭섭하게 여겨 자신에게 불만을 품었으니 말이다. 대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일이 발단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애초에 집안일을 관리하는 형님이 그 바보의 모친이 남긴 혼수에 대해 일언반구도 안 하고 넘어가지 않았다면, 자신 역시 주씨 가문 사람이 소동을 벌이던 때에 공연히 억울한 일을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 바보와 관련된 일인 건 사실이었다. 이부인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훌쩍이며 눈물을 닦았다.
“이런 망신이 있나! 그런 사소한 일로 싸우고 내 앞으로 달려왔단 말이냐! 너희 둘의 나이를 합치면 대체 몇 살인데!”
노부인은 계속해서 호통을 쳤다.
“첫째야, 네 잘못이다. 그때 네가 먼저 나서서 잘못했다고 말했어야지!”
“네, 제가 잘못했어요.”
대부인이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둘째야, 네 아주버니가 왜 네 잘못이라고 했겠느냐? 네 아주버니는 사정을 알아도 주씨 가문 사람은 모르잖느냐. 그럴 때 남의 식구 앞에서 누구 잘못인지 세세히 따지고 넘어가야겠느냐? 그런 일로 섭섭하게 여기는 건 네 잘못이다.”
“네, 제가 잘못했어요.”
이부인은 눈물을 닦고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노부인은 한숨을 쉬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 꽃은 둘째가 물리도록 해라. 화초는 마음이 기쁘려고 보는 것이니 귀천이 따로 없어. 보고 기쁘면 그 값이 천금이요, 안 기쁘면 한 푼의 값어치도 없는 것이다.”
이부인은 네 하고 대답했다.
“각 거처에 공급하는 식사나 간식, 과일에 대해서는 첫째 너도 너무 각박하게 굴지 마라. 먹을 욕심은 누구에게나 있는 거야. 사치와 욕망을 다 채울 순 없다지만 먹을 것에 대해선 아끼지 마라.”
노부인의 말에 대부인은 네 하고 대답했다.
“우리 정씨 가문 형제들은 분가를 안 했지. 형제들은 밖에 나가서 일하니 별일 없지만 너희 며느리들은 부딪치며 살아야 하니 힘들기도 할 거야. 윗니 아랫니도 안 맞을 때가 있는 법이니 말이다. 또 여인들은 아주 사소한 것까지도 잘 보는 눈을 갖고 있지. 뭐가 있어도 입 밖으로 내긴 껄끄러워 속으로 담아 두고 있다 보니, 말 한마디면 풀릴 일로도 종국에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기도 해.”
노부인은 엄숙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너희가 지금 속으로 어찌 생각하는지는 말 안 해도 내가 다 안다.”
노부인은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두 며느리를 차례로 쳐다봤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상대방도 다 알 거야. 오늘 모르더라도 언젠간 알게 되지. 세상에 바보가 어디 있느냐. 그저 조금 일찍 알고 조금 늦게 아는 것뿐이야.”
대부인과 이부인은 고개를 숙인 채 허리를 굽혀 네 하고 대답했다. 노부인은 숨을 골랐다.
“그리고 그 바보는 하루빨리 내보내라.”
대부인과 이부인은 멈칫해서 고개를 들었다.
“어머님, 그러다가 주씨 가문에서 따지기라도 하면……·.”
대부인의 말에 노부인은 콧방귀를 뀌었다.
“못 따질 것이다.”
“며칠 전에도 그 바보 때문에 와서 소동을 벌인걸요. 그 일이 아니었으면 저랑 동서 사이에 틈이 생길 일도 없었어요.”
대부인의 말에 이부인은 고개를 숙였다.
“넌 저들이 그 바보 때문에 소동을 벌인 줄 아느냐?”
노부인이 노려보며 물었다. 응? 대부인과 이부인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 설마 그 몸종 때문에 소동을 벌인 거라고?
“따분하던 차에 뭐 구경거리 없나 하고 왔는데 때마침 그 바보가 칼을 쥐어준 거야. 설마 그 바보를 위해 특별히 왔겠느냐.”
대부인과 이부인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 애가 그 몸종을 왜 데려갔겠어? 그 애가 영리하게 군 게 마음에 쏙 들었던 게야. 어리석기는. 진심으로 그 바보를 위했다면 여기서 하룻밤도 안 묵고 떠났겠느냐? 그 바보가 먹고 입는 건 어떤지 말 한마디 묻기라도 했어?”
대부인과 이부인은 퍼뜩 깨달았다.
“너희가 속으로 켕기는 게 있으니 먼저 접고 들어간 거다. 켕길 게 뭐 있어! 그 바보는 정씨지, 주씨가 아니야! 우리 집 아이인데 어디서 주씨가 이래라저래라야? 간섭할 거면 데려가라고 해!”
대부인과 이부인은 얼른 몸을 꼿꼿하게 세워 앉았다. 그래, 겁날 게 뭐 있어! 이 집 아이인데!
“그리 말썽을 일으키는 바보를 애초에 여기 두질 말았어야지!”
노부인은 점점 부아가 치밀었다.
“전에 있던 도관으로 돌려보내라!”
대부인과 이부인은 확실히 깨달았다.
“그 바보 때문에 노태야께서 울적해하다가 돌아가신 일이 있어서 노부인이 한스러워하셔.”
대부인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미 노부인의 방에서 나온 후였다. 두 동서는 서로에게 사과하며 예전과 같은 사이로 돌아갔다. 이부인은 대부인을 부축하며 천천히 함께 걸었다.
“그러니 노부인께서 바보 문제에 있어선 한 치도 양보하실 수 없는 거지.”
이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보내야 하나?”
대부인이 물었다.
“그래도 주씨 가문 사람이 와서 묻기라도 하면……·.”
“노부인께서 말씀하셨잖아. 저들이 와서 따지는 게 꼭 그 바보를 위해서만은 아닐 거라고.”
“사람이 싸우는 일은 결국 두 가지 때문이에요. 하나는 체면이고 다른 하나는, 이익이죠.”
“체면, 이익?”
대부인의 물음에 이부인은 웃으며 대답했다.
“체면으로 인한 소동은 지나갔고 다음 소동은 아마도 이익 때문이겠죠.”
이부인의 손에 든 상아 부채는 어느덧 대나무 부채로 바뀌어 있었다. 이부인은 대부인의 손을 톡톡 두드렸다.
“예를 들자면 혼수요.”
혼수? 대부인은 멈칫했다. 여종 하나가 종종걸음으로 걸어와 이부인의 귀에 대고 무어라 말했다.
“천것이!”
이부인은 이를 악물고 손에 든 부채를 꼭 쥔 채 대부인을 향해 억지로 웃음을 짜내 예를 표했다.
“형님,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볼게요.”
말을 마친 이부인은 여종을 따라 뛰다시피 걸어 자리를 떴다. 대부인은 멍한 채로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혼수라.”
대부인은 멀어져 가는 이부인의 뒷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되뇌고는 마침내 깨달았다.
“이제 보니 혼수 때문이었구나!”
대부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반근, 반근.”
어디선가 들리는 소리에 대부인은 화들짝 놀랐다. 대부인이 똑똑히 기억하는 이름이었다.
“반근? 주씨 가문으로 간 그 계집이 아니더냐?”
“아니에요, 부인.”
한 여종이 웃으며 대답했다.
“새로 교랑 아씨 시중을 들러 간 몸종이에요. 교랑 아씨께서 반근으로 이름을 개명해 주셨어요.”
대부인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바보로구나.”
대부인이 걸음을 옮기고 몇 걸음 채 걷기도 전에 또다시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작고 짧게 끝난 걸 보니 누군가가 얼른 말린 모양이었다.
“또 무슨 일이지?”
대부인이 인상을 쓰며 말하자 여종 몇 명이 급히 알아보러 갔다. 대부인이 방으로 돌아와 앉자 여종들이 돌아왔다.
“이부인께서 이노야의 시녀를 팔아 버리신대요.”
여종들이 나지막이 고했다. 노련한 대부인은 그게 무슨 뜻인지 대번에 알아차리고 더는 묻지 않겠다는 듯 손을 내저은 다음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렇게 엉망진창인 건 처음이군.
대부인은 극도의 피곤을 느꼈다.
체면 아니면 돈이라니, 생각이 천박하군. 예전엔 왜 저게 안 보였지?
결국 그 바보가 돌아와서 때문인 것이다. 한낱 바보 하나 때문에 성가신 일이 이렇게 줄줄이 생길 줄 누가 알았겠는가. 잔잔한 수면 위에 기름 한 방울이 떨어진 것처럼 섞이지도 않고 녹지도 않으면서 물 전체를 혼탁하게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 바보를 집에 둬선 안 되겠어.
“그래서 도관으로 보내겠다고?”
대노야가 물었다. 몸종이 차를 올리자 대노야는 흡족한 표정으로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이었다.
“만녕사에 새로 온 스님이 덖은 차인데 부탁해서 좀 얻었지.”
“은자를 더 쓰면 되지, 그게 뭐 대수라고요.”
대부인의 말에 대노야는 피식 웃었다. 대노야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게 차였다.
“도관으로 보내는 건 내 뜻이 아니에요. 어머님의 뜻이죠.”
대청 밖에서 나이 많은 여종 하나가 들어와 대부인의 귓가에 대고 몇 마디를 전한 후 물러갔다.
“또 무슨 남세스러운 일이기에?”
대노야가 물었다.
“동서네가 노비를 팔아 버리나 봐요.”
대부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이가 드니 청랑도 성격이 나오네요.”
“허튼소리.”
대노야는 못마땅한 듯 찻잔을 내려놨다.
“안 나설 거요?”
“내가 어떻게 나서요.”
대부인은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그 애가 들어온 후로 집안이 아주 엉망진창이에요.”
“그럼 내보내면 되지.”
“주씨 가문으로도 사람을 보내 알려야 할까요?”
대부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밖에서 여종 하나가 급히 들어왔다.
“대노야, 대부인, 주씨 가문에서 사람을 보내 왔습니다.”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더니, 또 왔다고? 대노야 부부는 흠칫 놀라 서로를 쳐다봤다.
이번에 온 주씨 가문 사람은 사내 넷에 여인 넷으로 지난번만큼은 아니어도 기세가 예전 주 공자에 못지않았다.
“주 노야와 부인께서 큰아씨의 혼수로 보낸 점포와 농토를 돌려받아 오라며 저희를 보내셨습니다.”
주씨 가문 집사의 말에 정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멈칫했다.
“황당하군!”
이노야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호통을 쳤다.
“사돈어른, 고정하세요.”
집사는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한 후 말을 이었다.
“전엔 교랑 아씨께서 돌아오지 않으시기도 했고 오래 못 사실 거라 생각해 따지지 않으셨는데, 이제 교랑 아씨께서 돌아오셨잖습니까. 나이가 찼으니 출가할 때 혼수를 해 가셔야 하고요.”
정씨 가문 부부는 머리를 갸웃거렸다. 바보가 출가를 한다고? 주씨 가문 사람들은 거짓말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잘하는군.
“그래서 저희 노야와 부인께서 저희에게 직접 가서 큰아씨의 혼수를 정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야 교랑 아씨께서도 떵떵거리며 출가하시죠.”
집사가 말을 이었다.
“우리 집안에서 교랑의 혼수를 탐내기라도 할까 봐 그러는가?”
대부인은 냉소를 지었다.
“노야와 부인께선 그런 뜻이 아닙니다. 교랑 아씨를 위하는 마음 때문이죠.”
집사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
“확실하게 모르시는 거면 관부에 사람을 청해 혼수 목록과 직접 대조해 보도록 하죠. 사돈어른 내외께 괜한 오명을 씌울 수야 없잖습니까.”
“목록이 있는데 확실하지 않을 게 뭐 있나.”
이부인이 입을 열었다.
“소상히 대조해 보도록 하게.”
어차피 자신에겐 득 될 게 없었던 일이니 좋은 구경거리가 아닌가.
“마침 잘 왔네.”
대부인은 속으로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가서 교랑부터 만나 보게. 며칠 후면 도관으로 요양하러 갈 거야.”
주씨 가문의 사람들은 멈칫했지만, 모든 걸 집사에게 맡기라는 당부를 거듭 듣고 온 터라 고개를 숙인 채 잠자코 있었다.
“갑자기 도관엔 무슨 일로요? 소문이라도 나면 남들이 뭐라 하겠습니까?”
주씨 가문 집사가 물었다.
“뭐라고 하기는? 애초에 도사가 그 애는 정신이 온전치 못하여 도관에서 지내야 무탈할 거라 했는데.”
이노야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들도 알지 않는가. 못 믿겠으면 경성에 좋은 의원이 많을 테니 데려가서 진맥을 맡겨 보든가!”
주씨 가문 집사는 웃으며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당치 않습니다. 이노야의 혈육이니 알아서 잘하시겠죠. 소인은 잘 모르는 일이니 말을 아끼겠습니다.”
집사가 잘못을 빌자 대노야와 이노야는 시선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씨 가문이 원하는 건 그저 이익뿐이군. 교랑에 대해선 관심조차 없어.
“우리가 혈육인 걸 안다니 다행이군. 그래서 말인데 혼수를 그쪽에 맡기자니 마음이 안 놓여.”
대노야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제수씨는 세상을 떴다지만 교랑은 여기 있네. 그 애 부친은 물론이고 백부인 나도 이렇게 건재한데 어디서 주씨 성을 가진 자들이 이래라저래라야?”
이부인은 즉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래, 부친이 있는데 어디서 백부가 이래라 저래라야? 그 혼수에 대해 제대로 따져 볼 때가 온 것이다.
다들 각자 머리를 굴리며 속으로 셈을 하기 시작했지만 하루 이틀 안에 매듭지어질 문제는 아니었다.
아랫것들은 혼수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는 정교랑이 다시 도관으로 돌아갈지 모른다는 소식이 더 중요했다.
“뭐라고? 아씨를 도관으로 보낸다고?”
마당에 있던 정교랑의 몸종과 여종들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다. 도관 같은 곳에 가야 한다니, 그것도 바보를 따라가면 높은 확률로 거기서 평생 못 나올 수도 있잖아!
역시 이 바보의 시중을 드는 사람 치고 운 좋은 이가 없네. 전에 모시던 이들은 일가 전체가 쫓겨나질 않나, 이제는 평생을 도관에서 썩어야 한다고? 차라리 쫓겨나서 어디론가 팔려 가는 게 나을지 몰라. 이 바보는 정말 불운을 달고 다니는구나. 엮이는 족족 불운이 옮잖아! 마당에 있던 몸종과 여종은 허둥지둥 달려나가 빠져나갈 수 있게 해 달라고 도움을 청했다.
한편 회랑 아래에 앉은 몸종은 평온한 표정으로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방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몸종은 바느질거리를 내려놓고 얼른 들어갔다. 정교랑이 침상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씨, 깨셨어요?”
몸종은 얼른 다가가 부축하여 옷을 갈아입히고 얼굴을 씻게 한 후 창가 앞 팔걸이 책상에 앉혀 주었다. 이어 따뜻하게 끓인 물을 건넸다. 몸종은 그 모든 과정을 능숙하게 해냈다.
“아씨, 말씀하신 대로 하얀 연밥을 구해다가 쌀가루와 벌꿀을 넣고 찐 다음 식혀 놨어요. 잘라 올 테니 드시겠어요? 제 입맛엔 당도가 딱 적당하던데 아씨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교랑은 작은 백자 접시에 담은 누르스름하고 먹기 좋게 생긴 쌀떡을 정교랑은 한두 개 집어 먹었다.
“괜찮네.”
몸종은 기쁘게 웃음을 지었다.
“짐은 다 챙겼니?”
정교랑이 물었다.
“네, 남은 건 아씨께서 보실 이 책뿐이에요. 떠나시는 그날, 소인이 직접 들고 갈게요.”
정교랑이 눈을 들어 몸종을 쳐다봤다.
“나랑 같이 가려고?”
정교랑이 물었다.
“소인이 아씨께로 왔다는 건 이미 이 집에서 대접을 못 받고 있었단 뜻이에요.”
몸종은 웃으며 손을 무릎 위에 내려놓고 말을 이었다.
“여기 남는 건 얼핏 좋게 들릴지 몰라도 어차피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아야 해요. 소인도 나이가 있으니 1~2년 후면 짝을 찾아야겠죠. 노비 신분으로 어떤 사람과 혼인할지는 안 봐도 뻔하잖아요. 그런데 요즘 아씨를 모시면서부터는 자유롭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먹고 마시는 거나 명성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고 봐요. 사람이 살면서 평생 자기 마음에 쏙 드는 일만 있을 순 없죠. 소인은 그저 자유로우면 됐지, 딱히 바라는 거 없어요.”
정교랑은 몸종을 보며 입을 삐죽거렸다.
“그렇게 길게 말하면 나 같은 바보가 알아듣겠어?”
몸종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아씨, 놀리지 마세요. 아씨가 바보면 소인도 바보예요.”
정교랑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고개를 숙여 책을 봤다. 몸종도 말없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나 앉아 아까 하던 바느질거리를 손에 들었다.
“사람이 살면서 평생 자기 마음에 쏙 드는 일만 있는 게, 불가능한 것만은 아냐.”
정교랑이 돌연 말을 이었다. 아씨는 보통 사람보다 말이 한 박자 느리다는 걸 몸종은 잘 알고 있었다. 몸종은 웃으며 네 하고 대답했지만 마음에 담아 두지는 않았다.
문밖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이 창가 쪽에서 바라보자 정씨 가문의 하인과는 차림새가 다른 낯선 여종의 모습이 보였다. 정교랑을 처음 보는 사람들이 다들 그렇듯 여종 역시 잠시 얼이 빠져 있다가, 정교랑이 그 멍한 눈빛으로 뚫어져라 쳐다보자 정신을 차렸다.
“저기, 주씨 가문에서 아씨께 갖다 드리래요.”
여종은 몸을 굽히며 네모반듯한 함 하나를 밀어주었다.
“반근.”
정교랑이 돌연 입을 열었다. 여종은 화들짝 놀라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사람이나 일을 기억 못 한다지 않았나? 어떻게……·.
“네, 아씨.”
몸종이 대답하며 손을 뻗어 함을 받았다. 어리둥절해진 몸종은 무언가 생각이 날 듯 말 듯했다.
“아씨, 먹을 거네요.”
몸종이 함을 열어 보더니 반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포장을 뜯어 보니 2층으로 된 찬합이었는데, 네모반듯한 격자 안에 각종 화려한 정과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경성에서 유명한 간식 가게 거예요. 반, 아니 집안 식구가 아씨께서 간식을 좋아하신다며 특별히 골라 줬어요.”
여종이 이번에는 몸종을 향해 말했다.
“그래도 너무 많이 먹진 마. 배탈 안 나게 조심해야지.”
몸종은 쌩긋 웃으며 잠자코 있었다.
“그럼 소인은 물러가겠습니다.”
여종이 말했다. 이 바보가 예쁘게 생기긴 했지만 바보 앞에 있는 건 어쩐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저기.”
또다시 입을 연 정교랑은 팔걸이 책상 옆에서 공책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걸 그 애한테 갖다 줘.”
여종은 멈칫하여 정교랑을 바라봤다. 그 애가 누군데? 누가 그 애야? 이 바보는 누가 누군지 아는 거야? 설마?
몸종은 벌써 손을 뻗어 공책을 여종에게 건네고 있었다. 여종이 힐끔 보니 손으로 잘라 실로 간단하게 묶은 공책인데 아주 얇았다. 여종은 글을 모르는 터라 무어라 쓰여 있는지 알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받아 들고 예를 표한 후 밖으로 나왔다. 몸종이 회랑까지 직접 배웅을 나왔다.
“여기 언니는 이름을 뭐라고 부르면 될까?”
계단 아래로 내려선 여종은 문득 떠오르는 일이 있는 듯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몸종은 여종을 향해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소인, 반근이에요.”
경성은 날씨가 서늘해 강남보다 국화가 더 많이 피었다. 주육낭의 마당은 각양각색의 크고 작은 국화들로 가득했다. 몸종들은 국화를 둘러싸고 꽃을 구경하거나 정담을 나눴다.
“두 개 더 꺾어 와라.”
진 공자의 말이었다. 진 공자는 한 손에 작은 절구통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절굿공이로 콩콩 찧고 있었다. 몸종 둘이 네 하고 대답하더니 국화를 두 송이 꺾어 돌아왔다. 진 공자는 아까운 기색은 조금도 없이 꽃을 절구에 그대로 넣고 콩콩 찧어 짓이겼다.
“상자 자네가 꽃이며 잎을 이렇게 거리낌 없이 꺾는다고 하면 아무도 안 믿을 거야.”
주육낭이 회랑 아래에서 무릎을 세우고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웃으며 말했다.
“이건 차를 만드는 거야. 만들고 나면 아주 매력적이고 아름다울걸.”
진 공자가 대답했다.
“괜히 쓸데없는 걸 만들고 난리네.”
주육낭이 대꾸했다. 뒤에서 몸종 하나가 총총 걸어와 무릎을 꿇고 차 두 잔을 올렸다.
“차 드세요.”
몸종이 고개를 숙인 채 말하자 주육낭이 손을 뻗어 찻잔을 받아 단숨에 비웠다. 진 공자는 찻잔을 받지 않고 계속해서 꽃을 빻았다.
“난 그런 차 안 마신다, 맛없어. 내가 직접 만들어 봐야지.”
주육낭은 웃으며 말없이 있었지만 몸종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공자님도 이 차가 맛없으세요?”
진 공자는 손을 멈추었다.
“공자님도?”
진 공자는 몸종을 쳐다봤다.
“반근, 네 입맛에도 이 차가 맛없느냐?”
주육낭의 물음에 반근은 고개를 숙였다.
“네, 소인은 천박해서요.”
반근이 불안한 말투로 대답하자 진 공자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천박하지 않다, 천박하지 않아. 모처럼 뭘 좀 아는 사람을 만났구나. 좋다, 좋아.”
주육낭은 입을 삐죽거리고 진 공자에게 주려던 차까지 받아 고개를 젖혀 가며 깨끗이 비웠다. 반근은 진 공자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살짝 긴장했다. 자신을 주시하는 진 공자의 눈길에 반근은 늘 불안을 느꼈는데, 이번만큼은 자신을 보는 표정이 전보다 많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럼 어떤 차가 맛있는데?”
진 공자가 웃으며 물었다. 반근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데 여종 하나가 다가와 이들의 대화를 끊었다.
“여섯째 공자님.”
여종은 예를 표하고 입을 열었다. 여종을 본 반근은 누구 앞인지 잊은 듯 반가운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쪽에서 소식이 왔느냐?”
“네.”
주육낭의 심드렁한 물음에 여종이 대답했다.
“똑바로 말을 해.”
“네, 대부인께서는 점포 하나를 둘로 나누고 농토는 전부 우리에게 돌려주는 것에 동의하셨습니다. 그런데 정씨 가문 이노야께서 반대하며 교랑 아씨는 장차 그 농토에 기대 먹고살아야 한다고 하셔서 지금 다시 나누고 있습니다.”
주육낭은 냉소를 지었다.
“오래 해 먹었었는데 뱉어내려니 아깝긴 하겠지. 그럼 천천히 나누라고 해라. 우리 집 재산을 공으로 가로채는 게 그리 쉽진 않을 거다.”
“네, 노야와 부인께서도 그리 분부하셨습니다. 바로 그쪽에 다녀오겠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여종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아이는 도관으로 보내졌답니다.”
“뭐라고요? 아씨를요?”
자신의 신분도 잊은 채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른 반근은 눈가가 그렁그렁해져서 무릎을 꿇고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
“아씨를 도관으로 보냈다고요?”
주육낭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반근을 힐끔 쳐다봤다.
“뭘 그리 호들갑을 떨어?”
반근은 고개를 숙이고 가까스로 눈물을 삼켰다.
“정씨 집안 아이니 저들이 알아서 하겠지.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네, 노야께서도 그리 말씀하셨어요.”
주육낭이 손을 내저으며 말하자 여종이 웃으며 대답했다. 반근은 주육낭 뒤에서 무언가 말하려다가 감히 입을 열지 못했고, 진 공자는 그들의 대화를 못 들은 듯 한쪽 옆에서 조용히 꽃을 빻았다.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뒤돌아 나가려던 여종이 걸음을 멈추고 공책 하나를 꺼냈다.
“반근, 그쪽에서 인편에 보낸 거야. 너한테 주는 거래.”
반근은 아, 하는 소리를 내고 일어나 신도 신지 않은 채 달려가 물건을 받더니 공책을 보고는 몸을 떨며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평소와는 다른 모습에 모두가 반근을 쳐다봤다. 꽃을 빻는 데 여념이 없던 진 공자마저도 고개를 들어 힐끔 바라봤다.
“아씨, 아씨.”
반근은 자신을 주체할 수 없는 듯 공책을 꽉 쥐고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목이 멘 목소리로 오열했다.
“그 바보가 준 것이냐? 뭔데?”
“아씨와 돌아오던 길에 겪은 일을 소인이 기록한 공책이에요.”
반근은 울며 대답했다. 주육낭은 아 하고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진 공자는 무언가 생각에 잠기는 눈치였다.
“아씨께서 저한테 전한 말씀은요?”
반근은 울며 고개를 들어 그 여종에게 물었다. 진 공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반근을 힐끔 쳐다봤고, 여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러가거라.”
주육낭의 말에 여종은 뒤돌아 몇 보 걸어가더니 또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삼키는 듯했다.
“한 가지 일이 있긴 한데……·.”
여종이 뒤돌아 머뭇거리며 말했다.
“말해라.”
“그 아씨 곁에 새로 온 몸종의 이름도 반근이랍니다.”
반근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더니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잠시 멍해졌다가 곧이어 목 놓아 대성통곡을 했다. 아씨께서 그래도 이 이름을 기억하시다니, 아직 날 그리워하시는 게 틀림없어! 주육낭은 여종과 반근을 모두 내쫓고 나자 비로소 귀가 깨끗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자들 울고불고하는 게 제일 짜증 난다니까.”
말을 마친 주육낭은 진 공자 쪽을 쳐다봤다. 진 공자는 꽃을 빻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울음소리에 넋이 나간 게야?”
진 공자가 정신을 차리고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공이를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육낭, 정씨 가문에 갔을 때 그 바보 누이부터 보고 나서 저 계집을 본 거지?”
“아니, 그 바보를 뭐 하러 봐.”
주육낭은 긴 소매를 털고 몸을 곧추세워 앉았다.
“안으로 들어서니까 저 계집이 아주 훌륭한 연극판을 벌이고 있더라고. 정씨 가문 사람들이 어리둥절해서 어쩔 줄 모르는 게 정말 재미있더군. 더 대단한 건 저 계집이 내가 온 이유를 알고 그 바보를 부추겨 정씨 가문 사람들한테 물을 먹인 일이지.”
주육낭은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안 그랬음 내가 정씨 가문에서 하루 더 머물며 시간을 낭비했겠나. 생각할수록 속이 다 시원해.”
“그 바보를 안 만났다고?”
진 공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뭐 잘못됐나?”
“아무래도 뭔가 이상한데 말로는 표현을 못 하겠네.”
진 공자는 비스듬히 기대앉아 정원에 가득한 국화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쪽에서 반근에게 보냈다는 공책 말이야.”
한참 말을 기다리던 주육낭은 그 말에 저도 모르게 콧방귀를 뀌었다.
“그 애 물건이잖아. 정씨 가문엔 필요 없으니 돌려보낼 만도 하지.”
“그래. 그리고 새로 온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 준 것도 그래. 같은 이름이잖아.”
“정씨 가문 사람들이 그 바보를 달래려고 한 일일 뿐이야. 그런 하찮은 일을 생각하고 있다니 한심하군.”
진 공자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웃었다.
“정말 그 정씨 가문 사람들이 별 뜻 없이 한 일이면 상관없는데, 혹여 그 바보의 뜻이라면……·.”
“바보? 그러면 뭐?”
주육낭이 물었다.
“그 바보는 정말 속 좁고 뒤끝 있는 사람인 거지.”
진 공자가 박수를 치며 말하자 주육낭은 그를 힐끔 보고 고개를 젖혀 가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다면 저 계집이 정씨 가문 사람들 앞에서 한 일도 그 바보가 가르쳤을지 모르는 일이군.”
주육낭이 웃음을 거두고 진지한 얼굴로 말하자 진 공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를 일이지.”
진 공자가 주육낭을 보며 말했다. 주육낭은 다시 한번 무릎을 치며 크게 웃었다.
“상자, 내가 바보일지도 모를 일이네!”
주씨 가문의 마당은 깊은 곳에 있어서 웃음소리가 멀리 문밖까지 전해지진 않았다.
-현묘-
문밖에서 거리를 청소하던 시종들의 눈에 급히 달려오는 마차 행렬의 모습이 들어왔다. 맨 앞에 있는 관졸의 위풍당당한 모습에 신분이 적잖이 높은 관리라는 사실을 눈치챈 주씨 집안 시종들은 얼른 길을 열었다.
“저게 누구지?”
사람들은 의논이 분분했다. 경성에서 제일 빠른 게 바로 소식이니 정체가 밝혀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 관리는 신임 이부(吏部) 상공 대인(相公大人) 진소였다.
진소는 소년 신동으로 이름을 날리고 성년이 되면서 진사에 급제한 후 내각과 지방에서 오랫동안 경험을 쌓은 강남의 명사로, 모친의 삼년상을 마친 후 마침내 황제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다시 벼슬길로 나온 터였다. 진소는 곧장 육부의 수장이자 관원의 임면과 영전을 관리하는 이부상서로 발탁됐다.
진 상공 대인이 경성을 떠난 3년 동안 저택을 관리해 온 사람이 있기는 했지만,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고 비워 둔 터라 군데군데 망가져 있었다. 물론 집을 수리해 주겠다는 자는 대문에서부터 성문까지 줄을 설 정도였지만 청렴하고 강직하게 살아온 진 상공 대인은 허락하지 않았다. 거리로 영접하러 나오는 이조차 없이 단출한 마차 한 대에 수행하는 노복 몇 명이 전부였다. 관부의 관졸까지 돌려보내자 진 상공의 집 대문 앞은 여염집과 다름없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아버지.”
40~50세쯤 된 진 상공이 마차에서 내리는 한 노인을 직접 부축했다.
“아버지.”
노인의 뒤에서 여자아이가 고개를 내밀고 웃으며 소리쳤다.
“거리에 나가 놀고 싶어요!”
진 상공은 웃으며 여자아이를 안아 여종에게 맡긴 후, 다시 부친을 부축했다. 노인은 바삐 돌아오느라 음식을 제대로 못 챙겨 먹었는지 수척한 얼굴이었다. 천천히 층계를 오르던 노인은 몸이 뻐근하여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아버지?”
진 상공이 걱정스레 불렀다. 노인은 선 채로 잠시 꼼짝도 안 하고 있다가 겨우 몸의 긴장을 풀었다.
“허리가 좀 아프구나. 좀 움직이면 괜찮겠지.”
“급히 돌아오시느라 무리가 갔나 봅니다. 소자 탓입니다.”
송구스러워하는 진 상공의 말에 노인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손으로 등허리를 꾹꾹 주물렀다. 욱신욱신 저리고 쑤시는 통증이 요즘 들어 부쩍 잦아지긴 했지만 마차를 너무 오래 타서 그럴 것이다. 이제 집에 왔으니 푹 쉬고 나면 괜찮겠지. 이 늙은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 아닌가. 모친의 삼년상을 치르느라 아들의 벼슬길이 지체됐는데, 자신한테도 무슨 일이 생겼다가는 더 이상의 영전은 희망조차 사라질 터였다.
어르신, 병을 빨리 치료하셔야 해요.
귓가에 그 목소리가 스치는 듯하여 노인은 내디디던 걸음을 멈추었다.
“아버지?”
진 상공이 걱정스레 물었다.
“아니면 의원을 불러 보시지요.”
노인은 잠시 주저하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문 안으로 들어갔다.
7월 중순이 되자 강주는 가을 우기로 접어들었고, 비가 오는 날이면 벌써 쌀쌀했다. 강주성 밖의 현묘산은 자욱한 비안개 속에 더욱 푸르른 모습이었고 산속에 있는 두 도관은 안개에 가려져 보였다 안 보였다 했다.
산에는 도관이 있기 마련이었기에 현묘산에는 현묘관이라는 도관이 있었는데, 현묘관은 다른 도관과 달리 크고 작은 두 개의 도관이 있었다.
진(晉)나라 때 지어진 대현묘관은 산기슭에 위치하여 문 두 개에 전각 세 개, 연극 무대 하나를 갖고 있으며, 산허리에 위치한 소현묘관은 산을 끼고 지어져 산문(山門: 도관의 바깥문) 하나에 전각 하나가 전부였기에 다소 협소하나 경치는 절경이었다.
두 곳 모두 여성이 수련하는 곤도(坤道) 도관으로 대현묘관의 관주(觀主)는 여제자 다섯을 거느린 여도사였고, 소현묘관은 본디 관주 여도사 한 명이 전부였는데 몇 년 전에 부모를 여읜 여자아이 두 명을 입양하여 함께 지냈다.
현묘산은 경치가 수려하다고는 하나 명산이라고 할 순 없었다. 이치상 하나만 있어도 충분할 도관이 두 개나 있으니 시줏돈이 얼마나 들어올지는 뻔했다. 특히나 그중 한 도관은 평판도 형편없었다.
대문을 박차고 들어오던 가무잡잡한 피부의 작고 통통한 여인은 회랑 아래로 걸어오는 여도사를 보더니 원수라도 본 듯 눈이 시뻘게졌다.
“이 뻔뻔한 도사 같으니라고, 내 손맛 좀 봐라.”
여인이 고함을 내지르며 달려드는데도 여도사는 흔히 있는 일이라는 듯 평온한 표정이었다.
“시주님, 여긴 대현묘관입니다.”
여도사는 예를 표하며 말을 이었다.
“소현묘관을 찾아오신 게 아닌지요?”
여인은 여도사의 머리로 내리치려던 주먹을 허공에 걸어 둔 채 씩씩거리며 노려봤다.
“아무튼 하나같이 재수 없어!”
여인은 그 말만 남기고 곧장 뒤돌아 달려갔다. 여도사는 여인의 뒷모습을 보며 딱히 도리가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대청에서 40대쯤 된 여도사가 급히 걸어 나와 예를 표했다.
“관주님.”
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관주님, 저 소현묘관을 저대로 내버려 두면 우리 명성까지 땅에 떨어지겠어요.”
여도사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관주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고 어쩌겠느냐. 저긴 정씨 가문에서 공양한 도관이라 시줏돈으로 생활하는 곳이 아닌걸. 뒤에 정씨 가문이 버티고 있으니 어쩔 수 없어.”
관주가 회랑 아래에서 산허리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좋은 곳이 아까울 따름이지.”
하늘에서 천둥과 번개가 치자 여도사는 놀라 귀를 막았다.
“요즘 번개가 자주 내리치네요.”
“여느 해나 똑같지, 뭐.”
관주는 웃으며 말하고는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 여도사는 산 중턱에서 반쯤 모습을 보이고 있는 도관으로 다시 한번 눈길을 돌렸다.
“매년 이렇게 내리치는데, 왜 저긴 벼락도 안 맞아?”
여도사가 투덜거렸다.
“여긴 예전에 고조부께서 마련한 곳으로 아내의 복을 빌기 위해 청성산의 여도사를 모셔와 머무르게 하셨는데, 그 뒤로 만사가 순조로웠대요. 산 아래의 대현묘관보다 더 영험해서 본명이 잊혀지고 그저 소현묘관이라고 불리죠.”
몸종의 말이었다. 가랑비와 함께 부는 바람은 서늘했다. 몸종이 창문을 닫자 들이치는 바람에 펄럭이던 검붉은 휘장이 잠잠해지면서 뒤에 있던 사람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몸종은 휘장을 들어 올리고 지나가면서 예전과 다름없이 조용히 책을 보고 있는 정교랑을 바라봤다. 책을 보면서 한 손으로는 팔걸이 책상 위에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여 따라 쓰고 있었다. 예전과 다름없다고 할 순 없겠구나. 예전에 비하자면 글씨를 쓰는 아씨의 손놀림이 훨씬 빨라졌으니까. 한 줄을 다 쓰고 난 정교랑은 손을 멈추었다.
“지금 있는 건 청성산의 여도사가 아니지?”
“백 년도 넘은 일인데 당연히 아니죠. 그럼 뭐 진짜 신선이 되었게요?”
몸종은 웃으며 꿇어앉아 물을 한 잔 올렸다.
“그 여도사가 세상을 떠난 후로 한동안 사람을 못 모셔왔대요. 정씨 가문도 강을 파서 물길을 내는 일에 가산을 다 쓰는 바람에 이 도관을 버려두었는데 그래도 노태야께서 다시 수리하신 거죠. 지금의 관주는 우리 정씨 가문 사람으로 남정(南程) 쪽 여인이래요. 본인이 수행을 원해서 이곳으로 오게 됐다네요.”
정교랑은 잠시 침묵했다. 그날 도관 문으로 들어설 때 관주가 영접하러 나오긴 했다. 다만 그 관주는 집사 부인에게만 말을 전하고 자신의 앞으로 오지 않았다. 언뜻 눈으로 훑은 바로는 30대 중반쯤 된 나이에 썩 훌륭한 외모는 아니었지만 두 눈만큼은 묘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응.”
마음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스쳤지만 정교랑은 짧게 대답했다. 대답을 들은 몸종은 그제야 말을 이었다.
“아씨, 간식 드시겠어요? 산 아래에서 싱싱한 귤을 팔길래 조금 사 왔거든요.”
정교랑은 손으로 책을 만지며 잠시 침묵을 지켰다. 몸종은 정교랑이 생각 중인 걸 알고 소리 없이 조용히 있었다.
“물엿에 굴려서 먹을래.”
정교랑이 말했다. 아씨가 말하는 음식은 언제나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지만 몸종은 토를 달지 않고 웃으며 대답했다.
“네. 어떻게 만드는지 소인에게 알려 주시겠어요?”
소현묘관은 산을 끼고 지어진 터라 터가 좁았다. 산문과 정전, 좌우의 곁채가 전부였고, 두 개의 원형 문을 이용해 드나들었다. 저쪽에는 관주와 어린아이 둘이 살고, 이쪽에는 정교랑과 몸종이 살았는데 각자 부엌을 따로 써서 서로 관여할 일은 없었다.
몸종이 이쪽으로 걸어올 때 어린아이 둘은 비를 맞으며 하수구 주변의 잡초와 낙엽을 치우고 있었다. 낡은 옷을 개조해 만든 겉옷은 이미 흠뻑 젖어 작고 왜소한 몸에 달라붙어 있다 보니 추워 보였다.
“왜 우산도 안 쓰고 해?”
몸종이 궁금증을 못 이기고 물었다. 그 목소리에 놀란 아이들은 우산을 쓰고 걸어오는 몸종을 보며 황급히 몸을 일으키더니 대답도 못 한 채 쭈뼛쭈뼛 서 있었다.
“비가 별로 안 오기도 하고 둘이 게으름을 피우느라 지금껏 하는 거야.”
안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곧 사람이 나왔다. 관주가 얼굴에 웃음을 띠고 두 아이를 힐끔 쳐다봤다.
“얼른 가서 불 때고 밥해야지!”
관주가 소리치자 두 아이는 황급히 달려갔다. 관주는 다시 몸종을 보고 웃으며 물었다.
“아씨께서 무슨 분부라도?”
“도사님께 엿을 몇 개 빌리러 왔어요.”
몸종이 대답했다. 관주의 웃음을 대하자니 어째서인지 불편한 기분이 들어 말을 짧게 했다.
“빌리고 말고 할 게 있나, 같은 정씨 가문 사람끼리.”
관주는 웃으며 안으로 들어가더니 엿 몇 개를 가지고 나왔다. 몸종은 감사 인사를 마친 후 잽싸게 뒤돌아 자리를 떴다. 우산을 들고 길만 보며 걷다가 문 앞에서 누군가와 부딪친 몸종은 얼른 고개를 들었다. 몸종은 도롱이 차림에 삿갓을 쓴 신체 건장한 사내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여자들이 사는 도관에 사내가 들어오다니!
“땔감 장수, 드디어 왔군. 어젠 왜 땔감을 안 가져왔는가?”
관주가 뒤에서 말했다. 땔감 장수? 몸종은 고개를 숙였다. 전혀 거리낌 없이 자신을 훑는 시선이 느껴져 급히 걸음을 옮겼다.
“마침 도사님께 말씀드리려던 참입니다. 날씨가 안 좋아 어제는 장작을 못 팼어요. 내일은 꼭 갖다 드리겠습니다.”
뒤에서 사내의 굵고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이쪽 마당으로 와서 문을 닫고 나서야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사내는 몸종이 문을 닫는 모습을 보고서야 시선을 거두고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눈으로 관주를 쳐다봤다.
“쳐다보느라 아주 눈알 빠지겠네?”
관주가 문에 기대 은근히 요염한 표정으로 말했다. 수도자의 모습은 어느새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남자는 허허 웃으며 팔로 관주를 휙 감싸 안았다.
“좀 어리긴 한데 얼굴은 별로야.”
사내의 말에 관주는 입을 삐죽거렸다.
“거기서 보낸 아씨야? 소문을 듣고 특별히 보러 왔지. 앞으로 오기 불편할 것 같아서.”
“그 아씨는 바보야. 방금 그 애는 몸종이고.”
관주가 웃으며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
“불편할 게 뭐 있어. 오고 싶으면 오고 오기 싫으면 마는 거지.”
남자는 웃으며 관주를 따라 들어가더니 바로 방문을 닫았다.
“몸종이 못생겼네. 여기서 키우는 어린애 둘만도 못해.”
“하여간 욕심은 많아요. 그래도 좀 기다려, 아직 너무 어리잖아.”
두 남녀의 웃음소리가 창문 너머로 흘러나왔다. 부엌에 있는 두 아이는 무릎을 감싸고 앉아 고개를 숙인 채 덜덜 떨고 있었다. 이미 아궁이에 불을 지핀 뒤였지만 아이들의 몸에 있는 한기를 달래기엔 역부족인 듯했다.
비가 그치고 날이 개면서 노을이 붉게 물들었다.
“내일은 날씨가 좋겠구나.”
대부인은 밖을 보며 말했다. 저녁상을 차리기 전이긴 하지만 바쁜 하루가 끝난 이때가 하루 중 가장 한가하고 여유로웠다.
“어머니, 어머니.”
밖에서 정육랑의 목소리가 들리자 대부인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자식은 빚이야, 평생 따라다니는 빚.
“백모님, 백모님.”
정칠랑의 목소리도 뒤이어 들렸다. 두 소녀는 나막신을 벗고 대부인 앞에 좌우로 나란히 꿇어앉았다.
“응, 응.”
대부인은 미소로 맞이하고 아리따운 두 아이를 바라봤다.
“백모님.”
정사랑과 정오랑도 조용히 신을 벗고 들어와 한쪽 옆에서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그래, 그래. 다들 배고프지?”
대부인은 웃으며 물었다.
“어머니, 먹는 건 안 급해요.”
정육랑이 말했다.
“백모님, 우리가 국화회를 열려고요.”
정칠랑이 선수 쳐서 말을 꺼냈다. 정칠랑에게 말을 빼앗긴 정육랑은 정칠랑에게 눈을 흘겼다.
“넌 말하지 마, 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옆에 앉아 있기나 해.”
정육랑은 모친의 팔을 잡아끌며 말을 이었다.
“어머니, 국화회를 열래요. 동 낭자네도 우리 집으로 초대해서 그림이랑 꽃꽂이도 겨루고요.”
“낚시도요, 낚시요. 백모님, 전 낚시가 좋아요. 낚시하고 놀 거예요.”
정칠랑이 또 나서서 얘기했다.
“그래, 낚시는 칠랑이 1등일 거야.”
대부인은 웃으며 칠랑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낚시는 안 돼.”
정육랑이 반대를 하고 나섰다.
“우리 집 연못은 낚시하기엔 너무 작아. 우리보다 좋은 집이 많아서 괜히 비웃음만 산다고.”
정칠랑은 배움이 느려 이제 막 글자를 익히는 중이라 서화나 꽃꽂이를 할 줄 몰랐다. 국화회에서 그림을 논하거나 꽃꽂이만 한다면 정칠랑으로서는 자신을 뽐낼 기회가 없는 셈이니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었다.
조용하던 대부인의 방은 여자아이들의 소란으로 시끄러워졌다. 귓가가 얼얼해진 대부인은 얼른 집사 부인을 불러 아이들의 말을 잘 듣고 원하는 대로 준비해 주라고 명한 뒤에야 간신히 아이들을 내보낼 수 있었다.
아이들의 소란스러운 소리는 건너편 방에서 수시로 들려왔지만 그래도 아까보다는 한결 나았다. 아이들은 시끄럽게 떠들고 목소리를 높이는 한편 까르르 웃기도 하며 유쾌하고 활기찬 모습이었다. 이런 게 집이지, 화기애애하고.
대부인은 마음 편히 숨을 내쉬었다. 어머님 말씀을 듣길 잘했어. 그 바보는 처음부터 도관으로 보내 버렸어야 했는데, 괜히 속만 끓이고 원망은 원망대로 들었네. 원망을 들은 일이 떠오르자 대부인은 또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혼수 문제는 벌써 한참 논의가 오갔지만 아직도 말끔히 정리되지 않았다. 본디 주씨 가문에서는 양보를 하려고 했지만 이방에서 까탈을 부리며 이래서 안 된다, 저래서 안 된다 트집을 잡는 바람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결국 주씨 가문 사람이 아예 점포에 들어앉게 되면서 장사 매출만 급감했다. 대부인은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다가 하마터면 부채를 부러뜨릴 뻔했다.
“밖에 아무도 없느냐.”
대부인은 생각할수록 화가 나 고함을 쳤다. 밖에서 여종이 들어왔다.
“다음 달부터는 노부인 쪽을 제외하고는 부엌의 지출을 반으로 줄여라.”
여종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면서도 감히 대꾸할 수 없어 네 하고 대답한 후 물러갔다.
“반으로 줄이라면 줄이지 뭐.”
소식을 들은 이부인은 피식 웃었다.
“잘 버텨야지. 저들은 고기를 먹는다지만 우린 국물도 못 얻어 마실 텐데.”
“그러게요. 대부인께서 주씨 가문에 농토를 돌려주는 걸 동의하시다니요. 그 농토에서 나오는 수확이 적지 않다는 건 생각도 안 하시나 봐요.”
옆에 있던 여종이 나지막이 말했다.
“당연히 생각 안 하겠지. 두 점포를 틀어쥔 지 오래됐잖아. 수완 좋은 사람이 맡은 데다 돈도 잘 벌리니 그걸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자기 살점을 내어 주는 꼴인걸. 농토야 돈만 있으면 얼마든 사니까.”
이부인은 냉소하며 말을 이었다.
“한 점포를 둘로 나눠 내가 절반을 가져온다 쳐도 저쪽의 장사 수완을 당해낼 수 없으니 아무것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러느니 아예 농토로 받겠다고 하는 게 낫지.”
“네, 맞아요, 부인.”
여종은 웃으며 바짝 다가와 속삭였다.
“우리 집 남편이 농사는 귀신이거든요. 우리가 장사는 못해도 농사라면 문제없죠.”
이부인이 응 하고 대답하자 여종은 더욱 정성스럽게 시중을 들었다.
“대부인께서도 거긴 신경 안 쓰실 거예요. 우리 남편이 며칠 전에 가 봤는데 멀쩡한 땅을 아깝게 놀리고 있더래요.”
여종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우릴 그리 오래 속이다니요. 따지고 보면 그 바보도 우리 이방 사람인데 평생 독차지하려던 심산이었을까요?”
“자기 딸들한테 혼수로 줄 생각이었겠지.”
이부인은 생각할수록 열이 받아 콧방귀를 뀌었다.
“이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차지할 거야. 딸은 자기만 있나.”
“그러니까요. 그 바보만 해도 그래요. 우리 일곱째 아씨와는 친자매 사이지만 저쪽과는 사촌 자매잖아요.”
여종이 맞장구를 쳤다.
갈등이 폭발 직전인 정씨 저택과 달리 성 밖의 현묘산은 한가하고 여유로웠다. 어제 내린 비로 땅은 촉촉이 젖어 있었다. 몸종은 나뭇가지를 꺾어 잎을 떼어내고 손으로 두어 번 쓸어 보며 손에 거슬리는 곳이 없는지 확인한 후 정교랑에게 건넸다.
정교랑은 여전히 너울을 쓰고 있었지만 가리개로 쓰는 천을 걷어 올린 후였기에 선선한 가을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정교랑은 손을 뻗어 나뭇가지를 받은 다음 옆에 있는 산석 위에 앉았다. 몸종은 긴장한 채로 지켜봤다.
정교랑은 한 손으로 소매를 걷고 한 손으로 나뭇가지를 쥔 채 바닥에 대고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안타깝게도 손에 힘이 없는 듯 나뭇가지가 미세하게 떨리면서 촉촉이 젖은 땅 위에 삐뚤빼뚤한 흔적을 남겼다. 도무지 글자라고 볼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손가락으로는 자유자재로 글자를 쓸 수 있었지만 붓만 쥐면 여전히 글이 제대로 써지지 않았다. 정교랑은 나뭇가지를 내려놓고 몸을 곧게 펴 앉았다.
“아씨, 글씨 연습은 하루 이틀에 되는 게 아니에요. 제가 종이랑 붓을 사다 드릴게요. 우리 천천히 연습해요.”
지금의 정교랑에게 종이나 붓은 소용없었다.
“됐어.”
정교랑이 일어섰다.
현묘산은 경치가 좋았고 도관은 산을 끼고 지어져 있었다. 문을 나가면 도관을 빙 둘러 산길이 나 있었는데, 먼 거리는 아니어도 지세가 험준하여 한 바퀴 돌려면 정씨 저택의 마당보다 훨씬 힘이 들었다. 이는 정교랑이 바라던 바였다. 처음에 시험 삼아 한 번 돌아본 정교랑은 산길 도는 일을 필수 일과에 포함시켰다.
정교랑이 발을 들어 걸음을 옮기면 몸종이 그 뒤를 바짝 따랐다. 손과 입은 여전히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없었지만 그래도 부축을 받지 않으며 걷는 일은 가능해졌다. 다소 느려 보이긴 해도 반년이 조금 넘는 시간인 걸 감안하면 회복 속도 역시 느리다고 볼 순 없었다. 새해엔 나는 듯 빠르게 걸을 수 있으리라.
한 바퀴를 걷고 난 정교랑과 몸종은 도관 문으로 들어섰다. 관주가 마당에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바닥에 광주리가 두 개 놓여 있었다. 하나는 이미 텅 비었고 다른 하나는 그래도 반쯤 있는 상태였다.
“아씨 오셨네.”
관주가 얼른 인사를 하며 물건이 담긴 광주리를 가리켰다.
“집에서 쌀이랑 채소를 보내 왔어. 이 사람이 거기로 들어다 줄 거야.”
정교랑이 걸어가는데도 관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몸종만 보며 이야기했다. 몸종은 네 하고 대답한 후 다가가 확인하다가 쌀 한 자루와 채소가 전부인 걸 보고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뭔가 이상한데요. 왜 이렇게 적죠? 생선이랑 고기, 견과도 없잖아요.”
관주는 웃으며 잠자코 있었다. 하인이 입을 삐죽거리며 대꾸했다.
“내가 어떻게 알아. 집에서 이렇게 줬어.”
“우리 아씨의 몫이 이렇진 않을 거예요.”
몸종이 말했다.
“그럼 집에 가서 말하든가.”
하인은 퉁명스레 대꾸하고는 광주리를 들어 안에 있던 물건을 바닥에 좌르르 쏟아낸 후 멜대 양쪽에 빈 광주리 두 개를 매단 다음 성큼성큼 걸어갔다. 몸종은 열 받아 씩씩거리며 벌써 저만치 걸어간 하인을 향해 삿대질을 했지만 뭐라 따져야 할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이고, 이 일을 어쩌면 좋아.”
관주는 한쪽 옆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몸종은 이를 갈며 서 있다가 몸을 굽혀 주우려 했다.
“줍지 마.”
어느새 걸음을 멈추고 이 광경을 지켜보던 정교랑은 그 한마디를 남긴 채 뒤돌아 가 버렸다. 몸을 굽히려던 몸종은 멈칫하고 바닥에 흩어져 있는 쌀과 채소를 힐끔 본 다음 뒤돌아 정교랑을 따라갔다. 바보가 말도 할 줄 아네, 성질도 부릴 줄 알고. 성질을 부리더라도 때를 봐 가며 부려야지. 관주는 입을 삐죽거렸다. 역시 바보라니까.
이곳으로 올 때부터 집보다 힘들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일을 맞닥뜨리고 보니 몸종은 분한 마음이 들어 어쩔 줄 몰랐다.
“망할 노비 놈 같으니라고, 어디서 감히! 사람들이 그리 팔려 가는 걸 보고도 배운 게 없나 봐요. 우리가 고자질할까 봐 겁나지도 않나?”
“감히 그런 짓을 했다는 건, 겁나지 않는단 뜻이지.”
정교랑이 말했다.
“아마도, 그 관주랑 상의를 마쳤을 거야.”
관주? 몸종은 자세를 바로잡으며 똑바로 앉았다.
“그럼 그 관주도 가담했단 말씀이세요?”
“가담한 정도가 아니라 주모자야.”
정교랑은 손으로 책을 만지면서도 펼치지는 않았다.
“따지러 갈게요!”
몸종이 일어서려고 하자 정교랑이 말했다.
“가서 뭐라고 하게? 감히 이런 짓을 벌였다는 건 변명거리가 있단 뜻이야. 내가 이리로 보내졌다는 건 집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못 받는단 의미지. 같은 실수를 반복해선 안 돼. 더구나 이번엔 주씨 가문 사람도 없잖아.”
“아씨.”
몸종은 무언가 생각난 듯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을 이었다.
“주씨 가문에서 보낸 사람들이 마침 여기 있어요. 제가 그 사람들을 찾아가 볼게요.”
“안 돼.”
정교랑의 말에 몸종은 정교랑을 쳐다봤다.
“우리가 도관에 오기 전에, 그 사람들이 왔었어.”
정교랑은 말을 이었다.
“내가 도관으로 보내지면 어떻게 될 거라는 걸, 그 사람들이, 모를 수 있겠어?”
“네, 그때 내버려 뒀다는 건 내버려 두겠단 뜻이죠.”
암담해진 몸종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지난번 일은 우연이었을 뿐이야.”
정교랑은 말을 이었다.
“저쪽에서 필요로 했을 때 우리가 고자질하니까, 서로 합이 맞았던 거지. 이제 저들은 원하는 걸 이미 손에 넣었잖아. 저들은 적당한 선에서 그쳐야 한다는 걸, 알고 있어.”
그럼 방법이 전혀 없는 걸까? 몸종은 암담해졌다.
“그러니까 결국, 전부, 내가, 바보기 때문이야.”
정교랑은 말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비록 모친을 일찍 여의었다고는 하나 엄연히 정씨 가문 이방의 적녀인 자신을 무시할 사람은 감히 없을 터였다. 몸종은 눈물을 떨궜다. 그 말이 왜 이리도 가슴 쓰린 것일까.
“아씨는 바보가 아니에요.”
“그래. 원래는 천천히, 조용히 나아지려고 했어. 다른 사람이 날 어찌 대하든, 당분간 신경 안 쓰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네.”
정교랑의 말에 몸종은 또다시 마음이 아팠다.
“이곳이 안 좋아서 아씨의 쾌유도 지체되나 봐요.”
“아니, 우리가 있는 여긴 아주 좋아.”
정교랑은 말을 이었다.
“난 마음에 들어.”
몸종은 어리둥절해졌다. 여기가 좋다고? 대체 어딜 봐서?
“바보가 살기엔 정말 좋은 곳이지.”
밤이 깊었다. 저쪽 곁채에는 땔감을 가져왔다던 사내와 관주가 마주 앉아 있었는데, 이때의 관주에게서는 대낮의 단정한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녀는 본디 먹고 노는 것만 좋아하는 게으른 사람인지라 집에서 버틸 수가 없었다. 북정(北程)에서는 같은 집안사람을 절대 하인으로 부리지 않았고, 여인이 외지로 나가 살기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다 떠오른 게 산에 있는 도관이었다. 돌아가신 부모님께서 꿈에 나타나 말씀하셨기에 수련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며 경전 몇 권을 외는 정도의 수고를 들인 끝에 그녀는 노태야의 마음을 사로잡고 관주 자리를 꿰차게 됐다.
그 후로는 남의 공양으로 먹고 마시며 지낼 수 있었다. 가난하기는 해도 근심 걱정이 없는 삶이었고, 예쁘장한 용모 덕에 근방의 사내들과 인연을 트면서부터는 더욱 자유로운 삶이 이어졌다.
“난 불편할 줄 알았는데.”
땔감 장수는 관주와 입으로 술을 주고받으며 말했다.
“의외로 호강하게 됐네.”
땔감 장수는 크고 거친 손으로 탁자 위에 있는 양고기를 집어 들어 입에 넣고 우걱우걱 먹었다.
“저 바보는 딱히 쓸모가 없어. 정씨 가문에서 평생 좋은 거 먹이고 입히며 키우다가 여기로 보낸 거야. 내가 커다란 돼지를 한 마리 키우게 된 셈이지.”
관주는 웃으며 사내의 건장한 몸에 기댔다. 술을 마신 터라 얼굴이 상기됐다.
“쟤들이 먹을 건데 빼앗아 먹다가 이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사내가 물었다.
“바보잖아!”
관주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내가 음식 가져온 사람한테 얘기 잘해 놨어. 절대 말 안 해. 그 사람한테 내가 다른 거로 보답하면 나중에 대질하더라도 당당하게 나올 거야.”
“다른 거 뭐로 보답하려고?”
사내는 웃으며 여인의 몸을 쓰다듬어 간드러진 웃음을 유발했다.
“이제 남은 건 그 몸종뿐이잖아.”
여인은 웃으며 대답했다. 몸종 얘기를 듣자 사내의 눈에 굶주린 듯한 기색이 드러났다. 외모는 평범해도 어린 나이니 그 맛도 이 중년 부인보다는 좋을 터였다.
“그러다가 그 몸종이 관주가 괴롭힌다고 가서 이르기라도 하면?”
사내는 화제를 돌렸다.
“여기로 쫓겨난 걸 보면 그 몸종도 그 집에서 견디기 힘들었을 거야. 황련이며 꿀에 절인 대추며 맛있는 거 섭섭지 않게 챙겨 주면서 이 도관에서 자유롭게 사는 게 얼마나 좋은지 천천히 알려 줘야지.”
여인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바보를 따르며 고생하는 길을 택하겠어, 아님 나랑 팔자 좋게 즐기며 사는 길을 택하겠어?”
“그 애는 잘 모르겠고, 아무튼 난 당신이랑 팔자 좋게 즐기고 싶어.”
사내는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얼마 안 가 이 침상 위에 숫처녀가 하나 늘어나 그 맛을 보게 되리라는 생각을 하니 몸이 후끈 달아오른 사내는 여인에게 달려들었다. 음탕한 신음 소리가 가을밤을 타고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나뭇간에 멍석을 깔아 보금자리를 마련한 두 어린아이는 몸을 웅크리고 바짝 붙어 귀를 막았다.
“언니, 우리 도망치자.”
“어디로 도망을 쳐. 도망치면 바로 죽는 거야. 여기선 그나마 며칠이라도 살 수 있잖아.”
“그럼 그다음엔?”
“일단 며칠이라도 버티는 게 우선이야. 그다음은 몰라.”
날이 밝자 밤새 한숨도 못 잔 몸종이 몸을 일으켰다. 어제 아씨의 말을 따르느라 두고 온 쌀과 채소를 생각하자 못내 아쉬웠다. 오늘 밥은 어쩐담?
“걱정할 것 없어. 가져올 사람이 있거든.”
아씨에게 조심스레 얘기를 꺼냈을 때 정교랑은 그렇게 대답했다. 누가? 그 못된 하인 놈이 잘못을 뉘우치고 가져다주기라도 한단 말인가? 휘장 뒤 침상에 있는 정교랑은 아직 자는 중이었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몸종은 마당에 서서 잠시 하늘을 보며 멍하니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마당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근 낭자, 반근 낭자.”
몸종은 멈칫했다. 이 목소리는……·. 잠시 주저하던 몸종은 다가가 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문밖에는 관주가 서 있었고, 그 뒤로 각각 쌀과 채소가 담긴 광주리를 든 두 아이가 서 있었다.
역시! 몸종은 기쁜 표정을 지었다. 아씨는 바보가 아니라는 사실쯤은 진작 알고 있었다만 바보기는커녕 미래까지 내다보다니. 기쁜 표정을 짓는 몸종을 보며 관주는 우쭐함이 담긴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반근, 어젠 놀랐지?”
관주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네며 잠깐 스친 우쭐한 표정을 거두고 두 아이를 앞으로 나오게 했다.
“자, 그만 화 풀고 이 식재료 받아.”
머뭇거리던 몸종은 이들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비켜섰다.
“그런 사람들은 부드럽게 다뤄야지, 강하게 나가면 오히려 반발해. 앞으로는 그런 사람들이랑 똑같이 굴지 마. 저쪽에서 때맞춰 갖다 주는 걸 받아먹으며 사는 처지에 억울한 일 한두 번 안 당하긴 힘들지. 부족한 거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내가 여기 더 오래 살기도 했고 나이도 더 많으니 먹고사는 일에 대해선 둘보다 잘 알잖아.”
관주는 다정하게 굴며 자신도 어쩔 수 없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씨로부터 관주도 가담했다는 말을 듣지 않았다면 몸종은 관주의 호의가 진심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사람을 너무 무시하잖아요.”
몸종이 툴툴거렸다. 관주에게 하는 말인지 먹거리를 가져왔던 그 하인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일이었다.
몸종은 관주의 곁채를 쓱 둘러봤다.
“도사님은 여기 10년 넘게 사신 거예요? 진짜 고생 많으셨겠네요.”
관주가 고기 한 덩이를 들고 문밖에서 들어왔다.
“고생은 고생인데 그래도 속세의 번잡한 속박에서 벗어나니 나름대로 즐거움이 있어.”
몸종은 구역질이 나는 걸 간신히 참고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거 좋은 분들이 주고 간 거야. 가져가서 아씨랑 먹어.”
관주가 말했다. 주고 가긴, 고기 써는 방식이 딱 정씨 가문 부엌 솜씨랑 똑같은데. 역시 이 여인이 음식을 가로챘던 거구나. 몸종은 사양하지도 않고 냉큼 손을 뻗어 받았다.
“출가한 분한테 보살핌을 받게 되네요.”
몸종은 짐짓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출가해서 힘들긴 해도 네 고생에 비하면 낫지.”
관주의 동정 어린 말투에 몸종은 그 위선을 심드렁하게 쳐다봤다. 여기까지 왔으니 이 여인에 대한 믿음은 전달한 셈이었다.
“어머나,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우리 아씨랑 산책하러 가야 해요. 안 그럼 성을 내세요.”
몸종은 예를 표하는 것조차 잊고 급히 몸을 돌렸다.
“정말 딱하네. 멀쩡한 사람이 바보한테 혹사를 당하다니.”
관주가 뒤에서 혼잣말인 듯 일부러 몸종 귀에 들리도록 말하더니 목소리를 키워 말을 이었다.
“반근 낭자, 부족한 게 있으면 나한테 와서 말해.”
몸종은 손을 내젓고 문가에서 살짝 예를 표한 후 자리를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