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씨, 다들 여기에 귀신이 산다던데요.”
반근이 정교랑을 부축하고 조심스레 좌우를 살피며 연못으로 다가왔다. 정교랑을 부축한다기보다는 정교랑의 뒤에 숨어서 온다는 표현이 맞았다.
“낚시는 안 하는 게 좋겠어요. 아씨는 겁 안 나세요?”
“뭐가 겁나? 귀신이 사람을 겁내는 게 맞지.”
“네? 어째서요?”
반근이 묻자 정교랑은 잠시 침묵했다. 반근은 아씨가 말할 준비를 하고 있는 걸 알고 기대에 차 기다렸다.
“말 안 할래, 귀찮아.”
정교랑의 말에 반근은 입을 뾰로통 내밀고 말했다.
“제가 아둔하다고 말씀 안 해 주시는 거죠?”
하지만 그런 말을 내뱉고 나니 긴장이 풀리며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반근은 성큼성큼 걸어가며 신이 나서 산석을 가리켰다.
“아씨, 우리 낚싯대가 아직도 여기 있네요!”
신이 난 반근은 그렇게 외치며 먼저 뛰어 올라갔다. 정교랑은 느릿느릿 걸어가며 겁에 질렸던 반근이 폴짝폴짝 뛰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게 아니야.”
반근이 천천히 말했다.
“지금으로선 말을 안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말을 해도 긴장이 풀리고 말을 안 해도 긴장이 풀리니, 말을 하든 안 하든 상관없었다.
정교랑은 낚싯대를 붙잡고 산석에 앉아 잔잔한 수면을 바라보며 평정을 되찾았다.
언뜻언뜻 떠오르는 기억 속에서 자신은 말하기 좋아하고 말을 잘하는 모습이었지만 기쁘고 유쾌한 표정은 아니었다. 가까스로 그 기억들을 찾을 때면 마음속에 슬픔과 괴로움이 번졌다.
“아씨, 이쪽으로 햇빛이 드네요.”
화초와 나뭇가지를 갖고 놀던 반근이 눈부신 햇살을 손으로 가려 주었다. 정교랑은 그제야 살갗에 타는 듯 뜨거운 통증을 느끼고 따라서 손을 들며 햇빛을 피했다.
귀신은 햇빛을 무서워한다고들 하던데, 그럼 이러는 자신이 귀신이란 말인가?
햇빛이 돌연 구름 속으로 들어갔다.
“아씨, 가리개를 쓰세요.”
반근이 한쪽 옆에 둔 가리개를 들어 정교랑에게 건넸다.
“조금만 더 놀다가 그만 들어가요.”
여전히 햇빛이 무섭긴 했지만 정교랑이 밖에서 활동하는 시간은 점점 늘어났다. 정교랑의 건강이 날로 호전된다는 뜻이니 좋은 현상이었다.
정교랑은 응 하고 대답한 후 계속해서 낚시에 몰두했다.
연못은 과연 전보다 훨씬 조용해졌다. 하지만 이곳을 찾는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14~15살쯤 된 몸종 하나가 앞쪽 모퉁이로 걸어오더니 무서워서 더는 못 가겠는 듯 손에 들고 있던 짐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었다.
“제발……· 공자를……· 살려 주세요……·.”
몸종은 바들바들 떨며 붉은 종이에 불을 붙였지만 겁에 질린 터라 제대로 되지 않았다. 서두르려 할수록 불이 붙지 않았고, 불이 잘 붙지 않자 몸종은 이곳의 음산한 기운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런 악순환에 겁을 집어먹은 몸종은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너 뭐 하니?”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고개를 들던 몸종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새까만 형체였는데 손에 막대까지 들고 있었다.
“귀신이야!”
몸종이 비명을 질렀다. 몸종은 도망치려 했지만 몸이 굳어 도망치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바들바들 떨었다.
반근 역시 그 비명에 놀라 정교랑을 와락 끌어안았다.
“귀신이야!”
반근도 따라 소리치며 주변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정교랑이 손을 뻗어 반근을 툭툭 치더니 자신을 가리켰다.
반근은 그제야 깨달았다. 몸종이 가리개를 쓴 아씨의 모습을 보고 놀랐던 것이다.
“너 때문에 깜짝 놀랐잖아!”
반근이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왜 이렇게 겁이 많아!”
자신도 방금 전 놀라 정교랑을 끌어안았던 일은 까맣게 잊은 듯했다. 그제야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든 몸종은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여자아이를 발견했다.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몸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자세히 쳐다봤다. 그 새까만 형체는 가리개를 쓴 사람이었다.
“당신들 뭐야! 왜 일부러 여기까지 와서 사람을 놀라게 해!”
몸종도 소리쳤다. 열도 받고 무섭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나랑 아씨는 여기서 낚시 중이었어. 갑자기 달려와 놀라게 한 사람은 너잖아.”
반근이 말했다.
아씨라고?
이 댁 아씨들은 무서워서 이쪽에 못 오는데, 그렇다면 이 아씨란 사람은……·.
“아, 그 바보구나!”
몸종이 퍼뜩 깨닫고 소리쳤다.
“바보는 너지!”
반근이 즉시 반박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넷째 공자를 모시는 몸종으로서 이렇게 버릇없는 애들은 가차 없이 혼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넷째 공자는 곧 세상을 떠날 사람이었다. 목숨이 없다면 바보만도 못하지 않은가.
몸종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랫동안 넷째 공자를 모셨는데, 넷째 공자가 세상을 떠나면 어디로 쫓겨날지 모를 상황이었다. 그동안 측근 시녀로서 열 손가락에 물 한 방울 안 묻히며 지냈는데, 허드렛일이나 하는 아랫것의 삶을 어찌 견딘단 말인가.
눈앞에 있는 저 여자아이는 바보를 모시는 하녀 같았다. 바보라고는 하나 어쨌든 멀쩡히 살아 있는 목숨이니 내쫓길 염려는 안 해도 된다.
몸종은 갑자기 엉엉 울기 시작했다. 반근은 당황했다. 내가 뭐 혼내기라도 했나?
“너 왜 울어? 얼른 뚝 그쳐.”
반근의 말에도 그 몸종은 한번 터져 나온 울음을 주체할 수 없는 듯 아예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반근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바라봤다. 정교랑은 손을 들어 가리개를 걷고, 대성통곡을 하는 몸종을 바라봤다.
“우리 음식 부족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겠구나.”
정교랑이 반근을 보며 돌연 나지막이 말했다.
반근은 손수건 하나를 그 몸종에게 건네며 물었다.
“임종이 가까워진 거야?”
그 몸종은 손수건을 받아 눈물을 몇 번을 닦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바보 몸종의 손수건을 썼다가 나도 바보가 되는 거 아냐?
하지만 좋은 뜻에서 준 걸 대놓고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몸종은 손수건을 손에 꼭 쥐고 애써 눈물을 삼켰다.
“그런 건 아니고.”
몸종이 말을 이었다.
“노야께선 함구를 명하며 여기저기서 의원을 수소문 중이시지만, 오는 의원들마다 탕약 처방조차 제대로 못 하더라고. 부인께선 울다가 벌써 몇 번이나 까무러치셨어.”
반근은 아, 하고 나서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넷째 공자께선 왜 그러시는 건데? 멀쩡하셨던 분이 왜 갑자기? 언제부터 그런 거야?”
몸종은 낯선 사람 앞이라 되레 마음이 놓이는지 차분히 대답했다.
“처음엔 얼굴이 빨개졌다가 나중에 하얘지셨다고?”
반근은 확인하듯 물었다.
“응, 그래서 열이 나는 줄 알았지. 풍한과 발한에 쓰는 약을 드셨는데 땀을 비 오듯 흘리시는 거야. 옷이 물에 푹 담근 것처럼 젖어서 계속 갈아입혀 드려야 했어.”
거기까지 말한 몸종은 말을 멈추더니 산석 위에 앉아 여전히 가리개를 쓰고 있는 여인을 바라봤다. 여인은 미동도 없이 석상처럼 조용히 있었다.
“저 사람은……·.”
몸종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반근에게 물었다.
“저렇게 앉아 있어도 괜찮아? 데려다줘야 하는 거 아냐?”
데려다주긴. 그럼 아씨께서 너희 넷째 공자의 병을 어찌 고치시라고? 반근은 속으로 투덜댔다. 진짜 복에 겨운 줄을 모르네.
“괜찮아. 우리 아씨는 저렇게 앉아 있는 걸 좋아하셔.”
반근은 몸종을 채근했다.
“그다음엔? 또 무슨 증상이 있으셨는데?”
바보니까 멍하니 앉아 있다가 그저 먹고 잘 줄밖에 모르겠지. 몸종도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다음부터 정신이 이상해지셨어. 춥다고 했다가 덥다고 했다가, 헛소리를 줄줄 늘어놓으셨지.”
말을 잇던 몸종은 못 참고 눈물까지 쏟았다.
“우리 넷째 공자처럼 멋있는 분이 갑자기 딴사람처럼 변하셔서는……·.”
멋있는 게 밥 먹여 주나. 자신이 궁금한 건 그게 아니었기에 반근은 얼른 말을 끊었다.
“그래서 의원은 뭐라고 했고?”
이 계집은 왜 이렇게 궁금한 게 많아? 넷째 공자의 몸종이 의심스러운 눈길로 반근을 바라봤다.
“병이 난 거면 의원이 뭐라고 말은 했을 거 아냐. 전혀 방법이 없다면 그게 의원이야?”
“의원들이 전부 모른다고 한 건 아니었어.”
몸종은 어느새 의혹을 잊은 듯 반박하며 말을 이었다.
“근심이 지나쳐 머리를 상했다고도 하고 마음을 다쳤다고도 했어. 또, 또, 간을 다쳤다나 비장을 다쳤다나. 여하간 내장 쪽이 다 상했다는데 어디 부딪치지도 않고 내장을 왜 다쳐?”
거기까지 들은 정교랑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몸종은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움직였어!”
“우리 아씨도 사람인데 당연히 움직이시지!”
반근이 기분 나쁜 듯 대꾸하자 몸종은 멋쩍어했다.
“아씨, 들어가시려고요?”
반근이 의미심장한 뜻을 담아 묻자 정교랑이 대답했다.
“응.”
“말도 해!”
몸종은 또다시 놀라 비명을 지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정교랑을 가리켰다.
“야, 우리 아씨는 벙어리가 아니라고!”
반근은 기분이 나빴다. 이 인간들은 대체 뒤에서 뭐라고 수군거리는 거야!
몸종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정교랑을 훑어봤지만 가리개에 가려져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듣자니 바보는 눈코입이 비뚤어졌다던데. 정교랑이 주는 암시를 눈치챈 반근은 기분 나쁘지만 꾹 참고 몸종을 잡아끌었다.
“언니, 이런 말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무슨 말을?”
반근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몸종을 잡아끌며 몇 발자국 걸어갔다.
“나한테 넷째 공자의 목숨을 구할 방법이 있어.”
반근이 소리를 낮춰 말했다.
“뭐라고?”
몸종이 놀라 소리를 치자 반근은 얼른 조용히 하라며 눈치를 줬다.
“조용히 해.”
“그 말이 참이야?”
몸종이 마음을 진정시키고 물었다.
“네, 네가, 병을 치료할 줄 알아?”
아씨가 외출조차 못 하던 예전엔 병자를 직접 볼 수 없어서 병의 증세만 듣고 치료를 해 왔다. 반근이 거리에서 어떤 불치병에 대한 소식을 듣고 아씨에게 전하면, 아씨가 이야기를 듣고 치료할 수 있는지 없는지 결정했다. 그러면 또다시 반근이 나가 그 병자의 가족을 우연히 만난 것처럼 꾸며 자기 집으로 와서 병을 치료하도록 구슬리곤 했다.
이런 식의 의심 섞인 질문을 상대하는 일에 도가 튼 반근은 웃으며 말했다.
“내가 어떻게 치료를 하겠어. 알다시피 난 도관에서 자랐잖아.”
바보가 도관에서 자란 건 온 식구가 다 아는 사실인지라 몸종도 고개를 끄덕였다.
“도관에 있는 도사들은 대체로 의술을 조금씩 알거든. 사람들 병 고쳐 주는 걸 많이 봤는데 꽤 영험했어. 못 믿겠으면 병주에 가서 물어봐.”
반근은 진지하게 말했다. 거기가 어디라고 거기까지 가서 물어보겠나. 몸종은 반신반의했다.
“내가 돌아가서 처방을 써 줄게. 한번 해 봐.”
반근의 말에 잠자코 있던 몸종이 물었다.
“방법을 알면 노야와 부인께 가서 직접 말씀드리지 않고?”
“난 의원이 아니잖아. 게다가 ……·의 몸종이고.”
반근이 아직 산석 쪽에 서 있는 정교랑을 힐끔 보면서 웃으며 말했다.
“노야와 부인께서 날 믿으시겠어? 하지만 넌 달라. 넌 어릴 때부터 넷째 공자를 모셨으니 정이 남다르잖아. 그러니 여기까지 달려와 몰래 기도를 올렸겠지.”
반근의 말을 들은 몸종은 반근의 손을 와락 붙잡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언니는 가서 시도만 해 봐. 그 방법을 쓰고 혹여 넷째 공자께서 잘못되시면 내가 시킨 일이라고 지목하면 되잖아.”
반근은 몸종의 손을 꼭 붙잡고 말을 이었다.
“넷째 공자께서 잘되시면 그건 언니의 지성에 하늘이 감복한 거야. 나와는 무관한 일이지.”
거기까지 말한 반근은 몸종의 손을 더 꽉 붙잡으며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넷째 공자의 병을 고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몸종이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몸종의 눈빛이 절로 빛났다.
몸종의 신분으로 최상의 결과는 넷째 공자의 측실이 되는 것이지만, 그 운은 장차 넷째 공자의 부인이 될 사람에게 달린 일이다. 하지만 넷째 공자의 생명을 구한 은인이 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몸종은 호흡이 가빠지면서 반근을 잡은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을 주었다.
“좋아. 그럼 일단 해 볼게.”
몸종의 말에 반근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종이에 써서 갖다 줄게.”
“서둘러야 해.”
몸종이 재촉하자 반근은 알았다고 한 후 서둘러 돌아섰다. 돌아선 반근은 정교랑을 향해 메롱 혀를 내밀며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가리개 속 정교랑의 입꼬리가 슬쩍 위로 올라갔다.
반근은 마당으로 나온 후에야 입을 열었다.
“아씨, 정말 고칠 수 있으세요?”
정교랑이 반근을 힐끔 보자 반근은 헤헤 웃으며 혀를 쏙 내밀었다.
“맞아야겠네요. 아씨께서 고치실 수 있다면 고치실 수 있는 건데.”
정교랑이 자리에 앉자 반근은 팔걸이 책상과 지필묵을 준비해 처방을 쓸 준비를 했다.
“그런데 아씨.”
반근은 결국 못 참고 물었다.
“이렇게 좋은 처방을 정말 저 아이한테 주시려고요? 우리가 직접 노야와 부인께 말씀드려서 신임을 얻는 게 더 좋지 않아요?”
“아니야.”
정교랑이 말했다.
“어째서요?”
반근이 물었다. 반근은 자신이 묻지 않는다면 아씨가 말을 잇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말하는 것보다 행하는 게 쉬운 일도 있거든.”
정교랑의 말은 사실이었다. 반근은 아씨를 보며 픽 웃음을 터뜨렸다. 아씨의 말은 지극히 옳았다.
대낮에 정사낭의 처소를 드나드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울다 지친 대부인은 더 이상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탕약으로 버티다가 결국 대노야에 의해 강제로 옮겨졌다.
근처 의원들은 이미 전부 다녀간 후였고 멀리서 오는 의원들은 아직 오는 길이었다. 쓸 수 있는 방법은 이미 다 썼으니 이젠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몸종은 측문 밖에서 여인이 건네는 종이봉투를 받았다.
“춘란, 정말 이대로 하려고?”
여인이 긴장한 표정으로 손을 잡아끌며 소리 낮춰 묻자, 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에 하나……·.”
여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들의 잘못이라 해도 꾐에 넘어가 주인을 해친 죄는 씻을 수 없어.”
“어머니, 걱정 마세요. 약을 먹일 때 그 계집을 불러올 거예요. 일이 틀어져도 어차피 증인이 있잖아요. 우리가 방심한 틈에 약을 쓴 거니까 우린 무관한 일이라고 하면 돼요.”
춘란이 나지막이 물었다.
“처방전은 태웠죠?”
“태웠어.”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내가 약포 사람한테 물어봤더니 아주 흔한 처방이라 딱히 별난 것도 없대.”
“시키는 대로 해야죠.”
춘란의 말에 여인은 주저하는 표정으로 소리 낮춰 물었다.
“그 애는 왜 널 돕는 건데? 그 애한테 좋을 게 전혀 없잖아.”
춘란이 입을 살짝 삐죽거렸다.
“좋을 게 왜 없어요? 걔도 살길 찾으려는 거죠. 그 바보를 따라 봤자 미래가 안 보이잖아요. 이번에 날 도왔다가 잘되면 내가 그 은혜를 평생 기억할 거 아니에요. 아버지랑 어머니도 남몰래 그 애를 도와주실 테고요. 무슨 꿍꿍이인지 훤하죠.”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 갈게요.”
춘란이 말했다.
“이 보조 약재도 있잖아.”
여인이 얼른 소리 낮춰 말하며 커다란 소매 속에서 가면을 하나 꺼냈다.
“거리 점포에서 가장 추한 것으로 골랐어.”
춘란이 손을 뻗어 가면을 받았다. 여인은 딸의 손을 잠시 힘주어 잡았다가 마지못해 놓아 주고, 들어가는 딸을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봤다.
춘란은 부엌에 앉아 보글보글 끓는 약탕관을 바라봤다. 마당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자 춘란의 가슴은 더욱 쿵쾅거렸다. 일어서서 살펴보니 몸종 하나가 마당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게 보였다.
“넌 어디 애니?”
한 몸종이 묻자 반근이 대답했다.
“우리 아씨께서 넷째 공자를 보고 오라고 하셨어.”
넷째 공자가 병이 난 후로 병문안을 오는 사람은 많았다. 형제자매라 해도 매일 올 수는 없는 노릇이라 아랫것을 시켜 가 보게 하곤 했다. 이 댁 어느 아씨의 시중을 드는 몸종인가 보군 싶었다.
“못 보던 얼굴인데?”
그 몸종이 물었다. 춘란은 반근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약을 받쳐 들고 밖으로 나왔다.
“하국, 화로 좀 봐 줘.”
춘란의 말에 몸종은 알았다고 한 후 반근에게서 관심을 거뒀다.
“내가 문발 들어 줄게.”
반근이 얼른 다가서며 웃자 춘란은 응 하고 대답했다. 두 사람이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아, 참. 이것 좀 봐 줘, 보조 약재 가져올게.”
들어가자마자 그 말만 남기고 도로 나간 춘란은 부엌을 한 바퀴 돌더니 화로를 보고 있는 몸종에게 무어라 말했다. 긴장하는 춘란의 모습을 보며 안에 있는 반근은 피식 웃었다. 긴장할 게 뭐 있어. 아씨가 처방한 약은 죽은 사람도 살리는데 그깟 상사병이 뭐라고.
반근은 편안한 마음으로 방을 둘러봤다. 정씨 집안에 돈이 많긴 한가 보네. 궁색한 티가 전혀 안 나는 방이야. 침상으로 시선을 돌리던 반근은 저도 모르게 앗, 하고 소리쳤다. 안으로 들어오던 춘란과 다른 두 몸종은 반근 때문에 깜짝 놀랐다.
“조용히 해.”
몸종들이 나무라자, 반근은 손을 뻗어 입을 틀어막고 침상에 있는 사람을 살폈다. 그때 그 공자네! 동시에 반근은 기쁘기도 했다. 역시 아씨 말씀이 맞았구나. 정씨 가문 대방의 공자였어.
집안에 먹구름이 가득한데 저 계집은 뭐가 좋다고 희희낙락이야.
“그만 가 봐. 의원 말로는 공자께서 조용히 쉬셔야 한 대.”
몸종들은 기분 나빠하며 말했다.
반근은 응, 하고 자리를 떴다.
“어느 아씨의 몸종인데 저렇게 버릇이 없어.”
몸종들은 불만 섞인 말투로 수군거렸다. 저 계집이 이제 확실히 인상을 남겼네. 춘란은 반근이 일부러 그렇게 반응했음을 알아차렸다. 이 정도로 성의를 보이다니. 처방에 대한 춘란의 확신이 더욱 굳건해졌다.
“약 드시게 공자를 부축해 드려.”
몸종들이 정사낭을 부축해 일으키자 춘란은 이미 눈조차 못 뜨게 된 정사낭의 입으로 간신히 탕약을 떠넘겨 주었다.
차츰 어둠이 내렸다. 정사낭은 침상에 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었다. 귀신이 나타난다는 소문이 난 후로 몸종들이 밤에는 가능한 몸을 사리며 움직이지 않는 통에 더욱 음산해 보였다.
침상 근처에 선 춘란의 손바닥은 땀으로 흥건했고 몸도 절로 떨려왔다. 약은 벌써 먹였고 이제 성공 여부는 밤에 쓸 보조 약재에 달렸다. 사람의 인생에는 언제나 선택할 길이 있고 넘어야 할 고비가 있는 법이다.
“공자, 공자.”
춘란은 나지막이 소리쳤다.
“공자, 공자를 뵈러 왔어요.”
피곤한 정사낭은 긴 한숨을 내쉬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나마 얼마 전에 목으로 넘긴 탕약 덕분에 피곤한 기운이 한결 덜하긴 했지만 대신 무력감이 몰려왔다. 온몸이 붕 떠오를 듯 힘이 빠졌다. 귓가에 들리는 소리가 점점 또렷해졌다.
“공자, 공자를 뵈러 왔어요.”
날 보러 왔다고? 누가 날 보러 온 거지? 정사낭은 예전처럼 눈을 뜨려고 애를 써 보았다. 그런데 이번엔 정말로 눈이 떠졌다. 어두운 등불 아래 시야가 흐릿했다.
“공자!”
목소리가 갑자기 커지자 정사낭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아졌다. 푸르뎅뎅한 귀신 가면이 바짝 다가왔다. 놀라 비명을 내지른 정사낭은 흰자위를 보이며 까무러쳤다.
정사낭의 상태가 안 좋다는 소식을 들은 이부인은 얼른 가 보려고 했지만 정칠랑은 이부인의 팔을 붙잡으며 가지 말라고 울며 떼를 썼다.
“어머니, 귀신이 나온단 말이에요. 가지 마세요.”
이부인은 화도 나고 안타깝기도 했지만 딸을 마냥 달래고 있을 시간이 없어 집 안에 있는 여종들을 죄다 불러 정칠랑 곁에 붙여 주고 나왔다. 이부인이 정사낭의 거처 마당으로 달려왔을 즈음 안에서 곡소리가 들렸다.
“잘못된 건가?”
이부인의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같이 자식 키우는 입장에서 저리 장성한 아들이 갑자기 죽어 버리면 그 심정이 오죽할까. 한 식구로서 정말이지 가슴을 칼로 도려내는 듯 마음이 아팠다. 방 안으로 들어선 이부인의 눈에 꿇어앉아 부들부들 떨며 우는 춘란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이 물건은 어디서 난 것이냐! 뭘 하려던 거야!”
대노야가 호통을 치며 손에 든 물건을 바닥으로 매섭게 내던졌다. 산산조각이 난 가면의 파편에 얼굴을 맞은 춘란은 울부짖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이게 무슨 일이지? 이부인이 영문을 몰라 하는데 밖에서 대부인의 곡소리가 들렸다.
“누가 또 대부인한테까지 알렸어?”
대노야가 역정을 냈다. 여기서는 아들이 사경을 헤매고 저기서는 아내가 앓아누웠으니 집안 꼴이 아주 엉망진창이다.
“아들이 다 죽게 생겼는데 마지막 모습도 못 보게 해야 속이 풀리겠어요?”
여종들에게 들려 안으로 옮겨진 대부인이 울며 힘없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부인은 얼른 다가가 위로하며 대부인을 정사낭의 침상 옆으로 부축해 주었다.
“별일 아니라니까. 허튼 생각 마시오.”
대노야가 말했다. 대부인은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 침상 위에 미동도 없이 누운 아들을 바라봤다.
“아들아, 어찌 이리 어미를……·.”
대부인은 아들에게 달려들며 흐느껴 울었다. 그런데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사낭이 어이쿠 소리를 내며 소리쳤다.
“깜짝 놀랐잖습니까!”
정사낭이 대부인에게 눌려 있던 상반신을 벌떡 일으켜 앉자 이부인과 근처에 서 있던 여종들은 놀라 비명을 지르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깜짝이야!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돌연 어안이 벙벙해졌고, 대부인 역시 몸을 반쯤 일으켜 앉은 아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아들아, 너, 너……·.”
대부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잇지 못했다. 창백한 안색이긴 했지만 정사낭의 눈빛에는 생기가 돌았다. 위에서 누르는 모친의 중압감을 못 버티고 도로 누웠지만 말이다. 줄곧 바닥에 꿇어앉아 있던 춘란이 벌떡 일어섰다.
세상에! 세상에! 진짜 나았네! 진짜 깨어났어! 이 방법이 진짜였구나! 이건 대운이야!
“공자, 공자.”
춘란은 침상 옆으로 달려가 꿇어앉으며 대성통곡을 했다.
“정말 깨어나셨네요! 소인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신묘한 일-
“좋습니다. 신묘한 일이에요!”
이노야가 며칠째 밤낮을 가리지 않고 데려온 의원이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사람이 병으로 다 죽게 생겼는데 뭐가 좋고 뭐가 신묘하단 말인가. 정말 믿을 수 있는 의원 맞아? 대노야가 이노야를 쳐다보자 이노야도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료 의원, 우리 사낭의 병세는 어떠합니까?”
이노야가 얼른 물었다. 절강성(浙江省)에서 유명한 이 신의는 이노야가 적잖이 공을 들여 모셔 온 사람이었다.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딱히 할 일이 없게 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어떻냐고요?”
료 의원이 수염을 만지며 말했다.
“좋습니다, 좋아요.”
좋다? 이게 좋다고?
“아니, 좋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대노야가 급히 묻자 료 의원은 대노야를 힐끔 보며 말했다.
“그럼 안 좋았으면 좋겠습니까?”
이게 무슨 말이야! 의원이라는 자가 말을 왜 이렇게 빈정거려! 대노야는 미간을 찌푸렸다.
“의원님, 사낭이 어제까지만 해도 인사불성이었습니다. 분명 중병이 들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겁니까?”
이노야가 물었다.
“중병이 맞았든 아니든 지금은 다 나았습니다.”
료 의원이 말했다. 대노야와 이노야의 눈이 마주쳤다.
“어떻게 나은 거지요?”
두 사람이 동시에 말하자 료 의원은 둘을 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터뜨렸다.
“깜짝 놀랐네요. 정말 신묘하기 그지없는 일이죠!”
방 안. 아들이 의식을 회복한 일로 병이 반쯤 나은 대부인은 남편의 말을 듣고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내가 걱정된 대노야는 얼른 아내에게 청심환부터 먹였다.
“진정이 되시오?”
그러자 대부인이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래요?”
“료 의원 말로는 근심이 깊어 마음의 병을 얻은 탓에 기혈이 뭉친 거라고 하더군. 세간에서 말하는 상사병 말이오.”
대노야의 말에 대부인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전에 다녀간 의원들의 말이 맞았군. 멀쩡하던 애가 다른 병도 아니고 하필 상사병을 얻다니, 이게 웬 망신이야.
“그런데 마음의 병은 마음의 병을 고치는 약으로 치료해야 한다잖아요. 사낭은 상사병에 걸리게 한 그 사람도 못 봤는데 나았어요. 그런데도 상사병이라고요?”
대부인이 반박했다.
“료 의원 말로는 상사병이라는 게 꼭 사람을 그리워해야 생기는 병은 아니라고 하오. 물건이나 새, 꽃, 벌레는 물론이고 수려한 경치를 보고도 상사병에 걸릴 수 있다더군.”
대노야는 말을 옮기면서 그제야 료 의원이 그나마 의원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기분을 풀었다. 아들이 그런 상사병에 걸린 게 아닌 거면 됐다.
“그런데 우리 아들은 사람 때문에 상사병을 얻었다고 하오.”
대노야의 말에 대부인의 안색이 다시 어두워졌다.
“우선 막힌 기를 뚫는 탕약을 먹인 다음 갑자기 놀라게 해서 정신을 쏙 빼놓으니 가슴에 맺힌 한이 덩달아 사라지면서 기혈의 순환이 원활해져 몸이 나았다더군.”
한편 객청에 있던 료 의원이 웃는 얼굴로 손뼉을 치며 말했다.
“신묘합니다, 신묘해요.”
옆에 앉은 이노야는 뭔가 아리송했지만 딱히 방법이 없었다. 자신은 의원이 아니니 의원의 말을 못 알아듣는다 해도 이상할 건 없지 않은가.
“증상에 맞춰 탕약을 쓴 게로군. 어느 의원의 처방인지 어서 상을 내리도록 해라.”
이노야가 하인에게 말하자 하인이 네 하고는 알아보러 갔다.
“탕약도 아주 훌륭했지만 상을 받을 사람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귀신 가면으로 공자를 놀라게 한 그 계집이죠.”
료 의원이 말했다.
“그 탕약만 마시게 했다면 별다른 효과가 없었을 텐데 그 추가 처방을 한 덕에 병이 나은 겁니다.”
거기까지 말한 료 의원은 다시 한번 박수를 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신묘하군요, 신묘해요. 왜 그 방법을 진작 생각 못 했나 모르겠습니다. 그리움이 사무치면 정신이 한 곳으로 모아지니 놀라게 해서 정신을 흩트려야죠. 역발상이로군요. 신묘합니다, 신묘해요.”
이노야는 이제 료 의원이 신의(神醫)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신이 들린 건지 제정신이 아니야.
정사낭이 인삼을 넣은 닭죽을 천천히 먹는 걸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후에야 대부인은 마음을 놓았다.
“어머니께 근심을 끼쳤습니다.”
정사낭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전히 허약한 상태였지만 한결 활기를 되찾은 모습이었다. 대부인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은 다음 여종들이 정사낭을 부축해 눕히고 쉬게 해 주는 모습을 본 후에야 밖으로 나왔다.
사낭을 상사병에 걸리게 한 그 여인은 대체 누구인지 너무나도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걸 물을 때가 아니라는 걸 잘 알았다. 일단 다른 일부터 해결하도록 하자.
대방 안채의 대청. 춘란은 벌써 반나절을 꿇어앉아 있었다.
“말해라.”
대부인이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인, 소인은 넷째 공자께서 귀신에 들린 줄로 알고 연못에 가 기도를 올렸지만 공자께선 전혀 차도가 없으셨어요. 그러던 중 시골 아주머니들이 했던 말이 떠올랐죠. 귀신은 악한 사람을 무서워하니 귀신을 놀라게 하면 된다고……·.”
춘란은 떨리는 목소리로 흐느껴 울며 머리를 조아렸다.
“소인이 잘못했습니다.”
옆에 있던 어린 몸종과 나이 많은 여종들의 표정은 복잡했다. 정말 길운이 제대로 터졌네. 그 의원이 말했잖아. 넷째 공자가 쾌차한 건 전부 이 계집이 넷째 공자를 놀라게 한 덕분이라고. 따지고 보면 넷째 공자의 목숨을 구한 일등 공신이니 이제 몸종 따위나 할 몸이 아니겠어.
“네겐 죄가 없다.”
대부인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공을 세웠지.”
납작 엎드린 춘란은 흐느껴 울었지만 울음소리 속에 묻어나는 기쁨까지 감춰지지는 않았다.
“다만 그 공은 너 혼자 세운 것이 아닐 게야.”
대부인은 춘란을 보며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닥에 엎드린 춘란은 몸이 살짝 굳어지면서 심장이 마구 쿵쾅대기 시작했다.
“부인.”
춘란은 차분히 고개를 들며 말했다.
“소인이 공을 바랄 순 없어요. 소인은 죄를 지었죠.”
“그럼 공을 세웠으니 죄는 묻지 않기로 하마. 어서 말해라, 그 방법을 알려 준 게 누구지?”
대부인의 말에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멈칫했다. 춘란의 안색은 더욱 하얗게 질렸다.
“부인?”
춘란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춘란, 사실 사낭이 좋아질지 안 좋아질지는 너도 확신이 없었던 거지?”
대부인은 춘란을 보며 천천히 말했다.
“내 생각엔 그렇구나. 혹여 사낭이 정말 잘못됐다면 넌 실수로 그 가면을 떨어뜨려 사낭이 놀란 거라고 할 생각이었어, 그렇지?”
춘란은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흐느꼈다.
“부인, 부인, 아닙니다. 소인이 어찌 감히요.”
“우선 눈물을 거둬라.”
대부인이 돌연 소리쳤다.
“추규!”
대청 밖에 시립해 있던 몸종 추규가 얼른 대답하며 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
“네가 당시 넷째 공자를 놀라게 했다면 넌 어찌했겠느냐?”
대부인이 물었다.
“소인이 잘못했습니다. 소인 때문에 공자께서 놀라셨네요.”
추규는 당황하면서도 자신이 정말 그런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 떨리는 목소리로 얼른 잘못을 빌었다.
“춘란, 그 일이 일어났을 때 너는 어떻게 했지?”
대부인의 물음에 여종들과 몸종들의 시선이 바닥에 꿇어앉아 있는 춘란에게로 모아졌다.
“노야께 들으니 그때 넌 그저 무릎을 꿇은 채 울기만 할 뿐 실수로 잘못을 저질렀다는 말 같은 건 안 했다더구나. 그런 가면을 왜 사낭 앞으로 가져온 건지 해명조차 없었다고 했어.”
대부인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마도 일단 상황을 지켜보다가 뭐라 말할지 결정하자는 심산이었겠지.”
춘란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인 채 감히 대부인을 쳐다보지 못했다.
“말해. 누가 그리하라고 알려 준 것이냐!”
대부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갑작스러운 호통 소리에 모두가 움찔했다. 춘란은 흐느껴 울며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정교랑이 지내는 거처의 문이 열리더니 반근이 기쁜 얼굴로 소리쳤다.
“아씨, 아씨의 말씀이 또 맞았어요! 노야와 부인은 역시 안 속으시네요!”
-훌륭한 방법-
“아씨, 뭐라고 말해야 할지 다 외웠어요. 근데 저들이 또 절 때리면 어떡하죠?”
반근은 자리 위에 무릎을 꿇고 앉은 채로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정교랑은 또다시 병풍의 글자를 쳐다보며 팔걸이 책상 위에 손으로 천천히 글자를 따라 썼다.
“넌 저들의 사람이 아니잖아.”
정교랑의 말에 반근은 멍해졌다가 아, 하며 깨달았다.
“맞네요. 전 저들이 산 게 아니죠. 주씨 가문 노부인께서 사서 아씨께 주셨으니까요.”
반근은 정교랑을 보며 싱긋 웃었다.
“전 아씨의 사람이에요!”
반근이 말귀를 알아듣자 정교랑은 잠자코 있었다.
“그럼 아씨, 이번에도 아씨께서 넷째 공자를 고친 거란 말은 하지 말아요?”
반근이 또다시 묻자 정교랑은 손을 멈추고 반근을 바라보며 입술을 움직였다. 때로는 말을 하고 싶어도 말이 안 나와 정말 고통스러웠다.
“지금으로서는, 우리가 작은 공을 세우는 게, 더 나아.”
반근은 막막한 표정이었다.
“저들이 안 믿을 거야. 나보단 널 믿게 하는 게 더 쉽지. 우선 널 믿게 하고 나서 나머지는 천천히 풀어 나가면 돼.”
반근이 무언가를 더 물으려는데 문밖에서 기다리던 여종이 귀찮다는 투로 또다시 재촉했다.
“가 봐. 피곤해서 말하고 싶지 않아.”
정교랑은 팔걸이 책상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어쨌거나 아씨는 아직 몸이 불편하고 말도 똑 부러지게 못 한다. 대노야와 대부인의 하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아씨가 좋아질 때까지 조금 더 기다리자. 일단 내가 먼저 공을 세우는 게 편할 수 있어. 둘의 삶도 나아질 테고.
반근은 퍼뜩 깨달았다. 작은 공을 세우는 게 낫다는 아씨의 말이 이 뜻이었구나! 정교랑을 따르면서 반근도 점점 똑똑해졌다.
“네, 알겠어요. 아씨, 다녀올게요.”
반근은 신이 나서 예를 표하고 몸을 일으켰다.
대노야는 대부인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지만 안방 여인네의 생각엔 별 관심이 없었다. 대노야가 보기엔 몸종이 혼자 생각해 낸 방법이든 누가 몸종에게 알려 준 방법이든 똑같았다. 무당이나 도사가 부리는 잔재주일 뿐이었다. 사소한 것을 떠들썩하게 일을 키우는 대부인의 태도가 틀렸을 수도 있다. 왜 나무라고 호통을 친단 말인가, 상을 줘야 마땅하지.
“이 일로 어떻게 상을 줘요? 이게 어떻게 사낭을 위해서 한 일이냐고요.”
대부인은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누군가의 꾐에 넘어가 이런 짓을 벌인 거라고요. 이번엔 요행히 들어맞았으니 다행이지만 다음번에 누가 독약을 먹이라고 하면 어쩌겠어요? 사낭에게 독약을 먹이지 않겠냐고요.”
춘란은 기겁을 하고 울며 머리를 조아렸다.
“소인이 어찌 감히요, 당치 않습니다.”
대부인의 말은 일리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대노야와 이노야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게 바로 여인들의 억지 논리겠지.
“얘가 설마 그러겠소. 괜한 생각 마시오.”
대노야가 말하는데 밖에 있던 여종이 때마침 반근을 데려왔다고 고했다.
“그러니까 그……·.”
대노야는 순간 그 바보의 이름이 뭔지 생각이 안 났지만 연장자로서 이 수많은 사람 앞에서 그 아이를 바보라고 지칭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말을 얼버무렸다.
“……·의 몸종 말이냐?”
“네, 소인이 교랑 아씨의 몸종 반근이에요. 노야와 부인을 뵈옵니다.”
반근이 예를 올리며 대답했다. 반근은 두 무릎을 꿇지 않고 한쪽 무릎만 꿇는 예를 올린 후 꿇어앉았다.
“무엄하구나!”
대부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하지만 이 몸종의 태도가 무엄하다는 것인지 이 몸종이 한 일이 무엄하다는 것인지는 대부인 자신도 몰랐다. 호통을 치고 나자 무어라 말을 이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무엄하게도 넷째 공자를 해치려 하다니? 아니지, 목숨을 구했잖아. 다만 너무나도 기괴한 방법으로 목숨을 구했기에 정씨 가문 안주인으로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소인이 어찌 감히요.”
반근이 말했다. 지난번과는 확실히 달랐다. 정교랑이 일깨워 준 말을 마음에 새기고 있어서인지 반근은 갑자기 정씨 가문의 노야와 부인이 별로 무섭지 않았다.
“네가 은밀히 춘란에게 넷째 공자를 놀라게 하라고 시켰느냐?”
대노야가 말을 이어 물었다.
“네.”
반근은 전혀 주저하지 않고 대답하면서 바닥에 납작 엎드려 울고 있는 춘란을 힐끔 쳐다봤다.
“저 아이를 나무라지 마세요. 전부 제가 시킨 거예요.”
“네가 어디서 왈가왈부를 해!”
대부인이 냉담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누가 그리하라고 시켰느냐? 대체 저의가 뭐야?”
반근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부인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다른 뜻은 없었어요. 넷째 공자를 구하고 싶었을 뿐이죠.”
“너, 너, 그럼 왜 나한테 와서 직접 말하지 않고?”
“제가 말씀드렸으면 부인께서 믿으셨을까요?”
반근은 억울하다는 투로 되물었다. 당연히 안 믿었겠지. 대부인은 말문이 막혔다.
“그렇다고 은밀히 춘란을 부추겨? 넷째 공자를 뭐로 아는 거야? 만에 하나 잘못되기라도 하면……·.”
“아니에요, 부인.”
반근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넷째 공자 같은 증상은 도관에서 지낼 때 많이 봤거든요. 도관에 있는 여도사들은 전부 그렇게 했어요. 간단한 방법이죠.”
대부인은 말문이 막혔다.
“저도 처음엔 노야와 부인께 말씀드리려고 했지만 여긴 병주가 아니잖아요. 제가 말씀드려도 안 믿으실 텐데 넷째 공자의 병세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병주였으면 달랐겠죠. 청운관에서 쓰는 방법이라고 하면 다들 믿으니까요.”
반근은 눈빛을 빛내며 당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거기까지 말한 반근은 무언가 생각난 듯 이노야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이노야, 이노야는 아시죠? 병주의 우리 청운관은 귀신을 잘 쫓기로 유명했잖아요.”
이노야의 얼굴이 굳어졌다. 청운관을 없애지 못한 게 한인 이노야가 청운관 일에 관심을 쏟을 리가. 더구나 신에게 복을 빌고 귀신을 쫓는 일은 집안 여인네들이나 신경 쓰는 일이지 이노야 같은 벼슬아치가 상관할 일은 아니었다. 이노야는 콧방귀만 뀌고는 잠자코 있었고, 대노야는 어느덧 저도 모르게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아주 맹랑한 계집이구나. 네가 우리한테 차근차근 설명했으면 우리가 안 믿었겠느냐?”
대노야가 입을 열었다.
“노야와 부인께서 믿으신다 해도 춘란이 믿는 것보단 못하죠.”
반근이 대답했다. 바보의 시중을 드니 몸종도 바보가 된 게 틀림없군. 감히 이따위 말을 내뱉다니! 이노야와 이부인은 반근을 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춘란은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바보의 몸종을 믿는 게 아니었어! 귀신에 홀렸던 게야!
“넌 어찌……·.”
대부인이 화를 내려고 하자 대노야가 말을 끊으며 물었다.
“그리 말하는 연유가 무엇이냐?”
“두 분은 집안을 맡은 노야와 부인이니 이것저것 신경 쓸 일이 많으시잖아요. 하지만 춘란은 달라요. 춘란의 신경은 온통 윗전인 넷째 공자 한 분께 가 있죠. 넷째 공자만 구할 수 있다면 놀라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제 심장을 내놓으라 해도 주저하지 않고 기꺼이 내놓을걸요.”
반근이 진지하게 말했다. 아씨께서 일찍이 말씀하셨지. 노야와 부인은 속이기 쉽지 않으니 머릿속이 오로지 한 생각뿐인 춘란을 속이는 게 훨씬 쉽다고. 춘란은 뜻밖에도 반근이 이렇듯 자신의 편을 들어주자 기쁘기도 하고 억울한 마음도 들어 바닥에 엎드린 채 엉엉 울었다. 대부인은 인상을 쓰고 대노야는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여인네의 논리로구나, 여인네의 논리야.”
죄를 묻겠다는 표정은 아니었다.
“정말이에요, 대노야. 없는 말 하는 게 아니에요. 도관에 있는 여도사들은 사람을 치료할 때 가족들을 속였어요. 병자의 가족들에게 부추를 빻아 병자의 입과 코에 바르겠다고 하면, 그런 식으로 목숨을 구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없거든요.”
반근은 웃음까지 띠고 말했다. 물론 여도사들이 그런 일을 했을 리는 없다. 그 여도사들이야 부추를 먹을 줄만 알지 부추로 병을 치료할 줄은 몰랐으니까. 부추로 병을 치료할 줄 아는 사람은 당연히 아씨였다. 그 사람들이 당시 아씨가 병풍 뒤에서 여인들의 코와 입에 부추를 발랐다는 걸 알았다면 필사적으로 막았을 것이다.
“도사들이 그랬어요. 때로는 말하는 것보다 직접 행하는 게 낫다고요.”
반근이 말했다.
“옳은 말이다, 옳은 말이야.”
문밖에서 누군가가 큰 소리로 칭찬했다.
“결과에 집중하고 방법은 묻지 말라. 과연 신의는 다르군!”
료 의원이 박수를 치며 말했다.
“신묘하도다, 신묘해.”
료 의원은 언제 온 거지? 급히 일어서던 대노야와 이노야는 멈칫했다. 대청 밖에는 료 의원 외에도 소년 하나가 서 있었다. 16~17살쯤 되어 보이는 그 소년은 먹색 관복 차림이었는데 피부색은 거무스름하고 이목구비가 또렷했다. 소년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소년은 어린 나이에도 엄청난 위압감을 내뿜으며 손을 허리춤에 대고 칼을 뽑아 들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물론 그 허리춤엔 칼이 없었지만. 자연스럽고 편한 자세인 걸 보니 이미 습관이 된 듯했다. 그렇다면 료 의원의 제자인가? 의원의 제자가 살기를 띨 리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호위 무사? 하지만 호위 무사라고 하기엔 귀티가 흘렀다. 그렇다면……·.
“네가 바로 우리 조모님께서 정씨 가문 아씨한테 보낸 그 아이냐?”
소년이 입을 열었다. 소년은 그 자리에 있는 정씨 가문 사람들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꿇어앉아 있는 반근에게만 시선을 고정했다. 그제야 고개를 돌린 반근은 그 눈부신 모습에 저도 모르게 멍해져 할 말을 잃었다. 소년도 반근의 대답을 기대하진 않았다.
“제법이구나, 훌륭해.”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도도한 태도로 반근을 보며 말했다.
우리 조모님? 이 경성 말씨는? 설마……·.
“방금 들어오다가 문밖에서 주씨 가문 여섯째 공자를 만났지 뭡니까. 알고 보니 두 집안이 사돈이었군요. 그래서 같이 들어왔습니다. 내 일찍이 경성 주씨 가문에서 며칠 지낸 적이 있지요.”
료 의원이 말했다.
집사 등이 난감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대문을 지키는 이들은 료 의원을 알았기에 출입할 때 검문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료 의원과 소년이 웃으며 함께 들어올 때도 료 의원의 사람인 줄 알았지 사돈댁 손님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주씨 집안 공자도 너무하는군. 한마디 말도 없이 이렇게 남의 집에 버젓이 들어오다니! 사돈댁 안채에서 벌어지는 소동까지 다 지켜보고! 자리에 있던 정씨 가문 사람들은 부끄럽고 민망했다. 무장의 가문이라 그런지 역시 거칠고 근본이 없구나 싶었다.
“공자, 노마님 댁의 분이세요?”
반근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주육낭은 반근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잘됐네요, 이렇게 오시다니요. 우리 아씨를 보러 오신 거죠?”
반근은 반색을 하며 말했지만 주육낭은 대꾸하지 않고, 지금껏 눈길조차 주지 않은 정씨 가문 사람들을 쳐다보며 허리 굽혀 예를 표했다.
“주씨 집안 여섯째입니다. 사돈 어르신의 서찰을 받은 부친께서 직접 가서 말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주육낭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좀 손아랫사람답군. 정씨 가문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카, 대청으로 가서 얘기하지.”
대노야의 말에 주육낭은 다시 한번 예를 표하고 집사의 안내를 따라 성큼성큼 걸어갔다. 반근은 주육낭의 뒷모습을 보며 멍하니 있었다.
“그래, 이 일은 여기까지만 하자.”
주씨 가문 사람의 등장에 온통 신경을 빼앗긴 대노야가 말했다.
“료 의원은 사낭의 병이 그렇게 해야 낫는다고 했다. 여기 두 계집의 마음은 갸륵하나 일을 행함에 있어 온당치 못한 부분이 있었어. 공도 있고 과도 있으니 여기서 덮도록 하겠다. 그 누구도 다시는 거론치 말아라.”
“감사합니다, 노야. 감사합니다, 부인.”
춘란은 울며 머리를 조아렸다. 정신을 차린 반근은 고개를 살짝 숙여 예를 표했다. 대부인은 어쩐지 심사가 편치 않았지만 달리 도리가 없었다. 대노야와 의원 모두 두 계집이 넷째 공자를 구했다고 인정한 마당에, 자신만 뭔가 수상쩍다고 물고 늘어지면 아랫것들이 섭섭하게 여길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들 가서 일해라.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있었다간……·.”
대부인은 절대 용서치 않겠다는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정말 이런 일이 생겼는데 두 계집이 나서지 않을 경우 아들이 목숨을 잃지 않겠는가.
“먼저 내게 고하도록 해라. 아무리 황당한 방법이라 해도 너희가 좋은 뜻에서 한 말인 걸 알면 노야와 난 너희를 믿어 줄 것이다.”
대부인이 천천히 말했다. 대부인의 말에 춘란은 죽었다 살아나기라도 한 듯 안도하며 기뻐했다.
“감사합니다, 대부인. 감사합니다, 대부인.”
춘란은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인사를 올렸다. 반근은 고맙다는 말 한마디만 남긴 채 예도 표하지 않고 총총 가 버렸다. 이 기쁜 소식을 한시라도 빨리 아씨에게 알리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모친을 여읜 딸에게 든든한 뒷배가 되어 주는 외가가 있다는 건 얼마나 기쁜 일이던가.
몸종들이 모두 물러가자 대노야와 이노야는 주씨 가문에서 온 사돈 조카를 보기 위해 대청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부인과 이부인은 후당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주씨 가문에서 갑자기 사람을 보낸 의도에 대해 추측했다.
“자네가 전에 귀띔을 해 줬으니 망정이지, 그 애를 도관으로 보냈으면 어쩔 뻔했나. 주씨 가문에서 사람을 보내 그 애를 보자고 했으면 둘러대느라 골치 아팠을 거야.”
대부인이 정말 다행이라는 듯 말하자 이부인은 빙긋 웃었다. 이부인으로서는 아쉬운 마음이었다. 주씨 가문에서 사람을 보낼 줄 알았으면 대부인이 아이를 도관으로 보내도록 내버려 둘 걸 그랬다.
같은 시각 정교랑 역시 주씨 가문에서 사람이 왔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흥분하는 반근에 비해 정교랑은 시큰둥한 모습이었다. 물론 흥분했다 하더라도 겉으로 드러내긴 힘들었겠지만. 반근이 정교랑 앞에 엎드려 정교랑의 팔을 붙잡았다.
“아씨, 이제 됐어요. 노마님은 안 계시지만 외숙 어르신 쪽에서 아직 아씨를 기억하고 계셨네요. 아씨를 외면하지 않으실 거예요.”
반근이 기쁘게 말하자 정교랑은 응 하고 짧게 대답했다.
“여섯째 공자가 오신 거래요.”
반근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여섯째 공자는 전에 뵌 적이 없거든요. 노마님께서 절 사셨으니 주씨 가문 사람인 셈이지만 전 여섯째 공자를 알지도 못해요.”
정교랑이 반근을 쳐다봤다. 주씨 가문 사람이라고 했지.
“여섯째 공자는, 몇 살이니?”
정교랑이 물었다. 반근이 돌아온 후 정교랑이 말한 첫마디였다.
“한 열여섯쯤 돼 보였나? 아니다, 아니다, 한 열일곱쯤이요?”
반근은 그 젊은 공자의 모습을 떠올리며 진지하게 가늠해 보았다.
“소리 소문 없이 들어와서는, 여기서 일어난 일을 한참 동안 잠자코 지켜봤다고?”
정교랑이 물었다. 아씨는 왜 이런 걸 물으시는 거지? 반근은 고개를 끄덕이며 갑작스럽게 들리던 그 목소리와 고개를 돌려 확인했던 소년의 모습을 떠올리며 살짝 넋이 나갔다.
“여섯째 공자께서 정말 때마침 오셨어요. 소인은 바로 겁이 달아나더라고요. 뭐랄까, 노마님께서 생전에 계실 때처럼요.”
반근이 감상에 젖어 말하자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없이 있었다. 정교랑은 계속해서 팔걸이 책상에 기댄 채 병풍에 있는 글자를 바라봤다. 이번에는 왼손으로 글자를 써 보았다. 왼손과 오른손을 번갈아 연습하니 두 손 모두 제법 말을 잘 들었다.
“아씨, 우리 여섯째 공자 보러 갈까요?”
한쪽 옆에 있던 반근은 몸을 곧추세우며 묻다가 도로 앉았다.
“아니다, 여섯째 공자께서 오실 때까지 기다리죠.”
“올 때까지 기다리자. 분명 올 거야.”
정교랑의 말에 반근은 네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네가 복수할 기회가 왔어.”
반근은 무슨 소리인가 싶어 정교랑을 쳐다봤다. 무슨 복수를? 정교랑은 팔걸이 책상 근처에 놓아둔 작은 공책을 꺼내 펴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 낮, 여종이 또 싱싱한 무 한 바구니를 훔쳐 가는 바람에 아씨께서 못 드셨다.
주육낭이 이노야를 따라왔다.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사람이 많으면 놀라더라고. 그래서 여기 머물게 했지.”
이노야는 말하고 나니 이런 꼬맹이한테 내가 왜 해명을 하고 있나 싶어 후회가 들었다. 어쨌거나 자기 딸인데 어디에 묵게 하든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이노야는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집에 있는 거면 어디서 지내든 다 좋죠.”
주육낭이 말을 이었다.
“누이가 돌아왔으니 다행입니다. 황궁보다 좋은 게 누추한 자기 집이라는 말도 있잖습니까.”
이노야는 부아가 치밀었다. 이 자식이 면전에 대고 사람을 모욕해?
“지금껏 집에서 이렇게 멀리 나온 건 처음이라서요. 집 생각이 많이 나네요.”
주육낭은 고개를 돌려 이노야를 바라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모부는 어릴 때 공부하러 집을 떠나 계시고 나중엔 외지로 부임하셨으니,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이노야는 다소 누그러진 표정으로 마른기침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내라면 천하에 뜻을 둬야지. 너도 크면 그럴 것이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정교랑 거처의 문 앞이었다. 허드렛일을 하는 나이 많은 여종과 몸종이 예를 표하며 맞이했다. 대청 처마 아래에 서 있던 반근은 기뻐하며 노야와 공자를 불렀다. 딸이 돌아온 후 이노야가 딸의 거처를 찾은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정말이지 그 방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아이가 어렸을 때 방에서 나던 그 역한 냄새가 훅 끼쳐 질식할 것 같았다.
“너희 아씨는 깨어 있느냐, 잠들었느냐?”
이노야는 걸음을 멈추고 반근에게 물었다. 주육낭 역시 걸음을 멈추고 처마 아래에 선 반근을 바라봤다.
“깨어 계세요. 아씨를 모시고 나올게요.”
반근은 이노야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안으로 들어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정교랑을 부축해 밖으로 나왔다.
“아씨, 아씨. 저기 좀 보세요, 사촌 공자세요.”
반근은 정교랑의 팔을 부축하며 정교랑을 주육낭에게로 안내했다. 눈앞의 소녀를 본 이노야와 주육낭은 살짝 멍해졌다. 하지만 소녀의 눈부신 미모에 대해 곱씹어보기도 전에 소녀가 입을 열었다.
“나 배고파.”
정교랑의 말에 이노야는 멈칫했다. 아름다움을 형용하는 표현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다 말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무심한 눈빛으로 빠르게 정교랑을 훑은 주육낭은 곧바로 반근에게 시선을 옮겼다. 정교랑의 팔을 붙잡고 있는 반근의 손을 보며 주육낭의 입가에 설핏 웃음기가 지나갔다.
“고모부!”
주육낭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이노야를 보고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정교랑은 다시 부축을 받으며 방으로 돌아왔다. 바보는 정상인의 일에 간여할 필요가 없는 법이다.
정교랑은 병풍 뒤 팔걸이 책상에 기대앉았다. 커다란 옷자락은 바닥에 질질 끌렸고 귀밑머리는 빼져나온 상태로, 조용히 그리고 멍하게 앉아 있었다. 누군가가 이 모습을 봤다면 그야말로 나무 인형이 따로 없다고 탄식했을 테지만 예외는 있었다. 주육낭은 고개를 돌려 대청을 힐끔 봤다.
“일개 바보가.”
주육낭은 씩씩거리며 손가락질을 하더니 이노야를 바라봤다.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이노야는 굳은 표정이었고, 곧이어 문밖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무슨 일이에요?”
대부인과 이부인이 급히 들어오며 물었다. 주육낭의 시종들도 달려와 부엌에서 물건을 끄집어냈다. 바닥난 쌀독과 시들시들한 무, 물에 담가 놓은 두부 반 모, 싱싱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생선이 전부였다.
허드렛일을 하는 나이 많은 여종과 몸종, 반근은 전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주육낭이 앞에 있는 독을 발로 홱 걷어차자 때마침 안으로 들어오던 대부인과 이부인은 기겁을 피하며 피했다.
“이봐요, 정씨. 그래도 고모부라고 불러 줬더니만, 우리 고모님의 딸을 이따위로 대우합니까!”
소년은 씩씩거리며 소리치더니 손을 허리춤에 대며 검을 뽑아 들 태세를 취했다. 그러더니 검이 없는 걸 발견하고 뒤돌아 시종을 발로 차며 소리쳤다.
“내 검을 가져오너라!”
무관 출신인 주씨 가문은 난폭하고 거칠었다. 주먹으로 말하는 게 그 집안 가풍이었으니, 의분에 찬 소년이 무슨 짓을 벌일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대부인은 얼른 주육낭을 붙잡으며 소리쳤다.
“육낭, 할 말 있으면 좋게 말로 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냐고요?”
주육낭은 바닥에 여기저기 흩어진 물건들을 가리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내 누이를 이따위로 대접한 겁니까? 사지 멀쩡한 보통 사람도 아니고 말도 제대로 못하는 데다 거동까지 불편한 바보를 굶기다니, 하늘이 무섭지도 않아요?”
대부인과 이부인은 당황한 기색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대노야가 돌아서며 호통을 치자, 따라오던 집사 부인들과 여종들은 즉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소인이 무능하여 아씨를 제대로 못 보살폈어요.”
반근이 울며 말했다. 원래는 울고 싶지 않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바닥에 흩어져 있는 식재료를 보고 있노라니, 고생하며 힘겹게 돌아오던 여정도 떠오르고 돌아와서도 불안하게 지내던 나날들이며 영문도 모르고 따귀를 맞은 일까지 줄줄이 떠올랐다. 반근은 고개를 들고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우뚝 서 있는 소년을 바라봤다.
“누이의 억울함조차 풀지 못한다면, 내 어찌 사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소년이 분노한 목소리로 소리치자 반근의 눈에선 눈물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소인의 무능 탓이에요.”
반근은 바닥에 엎드려 통곡을 했다. 어느 정도 상황 판단을 한 대부인은 기가 차서 몸을 떨었다. 우선은 천박하게 이런 짓을 벌인 아랫것들에게 화가 났고, 다음으로는 고의로 일을 키운 바보의 몸종에게 화가 났다. 하루 이틀 된 일도 아닐 텐데 왜 진작 말하지 않고! 아까 저쪽에서 소동을 벌일 땐 잠자코 있더니 왜 하필 여기서 이 난리를 피우느냔 말이다. 대체 무슨 꿍꿍이야!
“다 내 잘못이야.”
이부인이 입을 열자, 주육낭은 냉소 어린 시선으로 이부인을 보며 말했다.
“후처로 들어오신 그분입니까? 착한 계모는 없다더니!”
이부인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이 말이 새어 나가기라도 하면 이부인의 명성은 끝이었다.
“육낭, 무슨 일인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함부로 말하지 마라!”
이노야는 정색을 하고 호통을 쳤다.
“새어머니가 들어오면 아버지도 내 아버지가 아니란 말이 있죠.”
주육낭이 이노야를 쳐다보며 냉소를 지었다.
“내가 후처한테 한마디 한 건 그리 못마땅하신 분께서 내 누이가 굶주리고 무시를 당할 땐 눈 감고 귀 막고 있으셨습니까!”
버릇이 없군, 버릇이 없어! 이게 어디 손아랫사람이 보일 태도인가! 이노야는 분노로 몸을 떨었다. 막무가내인 사람 앞에서는 이치가 소용없다더니.
“난 그저 누이가 집에 무탈하게 잘 도착했나 보러 왔던 겁니다. 그런데 집까지 무사히 온 누이가 집에 도착해서는 이런 억울한 일을 겪고 있었군요. 어린 조카의 입장이라 말할 자격은 없지만서도.”
주육낭은 정씨 가문 사람들이 말할 틈을 주지 않고 떠들었다. 말할 자격이 없다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너 혼자 떠들고 있잖아. 정씨 가문 사람들은 속으로 소리쳤다.
“이 길로 돌아가 집안 어르신들을 모셔와야겠습니다. 이쪽 집안 어르신들이랑 앉아서 얘기를 나누시도록!”
말을 마친 주육낭은 옷소매를 뿌리치고는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어린놈도 이렇게 기고만장해서 날뛰는데 어르신들이 오면 과연 얌전히 앉아서 얘기를 나눌까? 어림없는 소리! 대노야는 험상궂은 무장들이 먼지를 휘날리며 정씨 집안 대문으로 쳐들어오는 모습이 벌써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거기 서라, 얘기하고 말 게 뭐 있느냐. 못된 아랫것이 주인을 능멸했으니 내쫓아 마땅하지!”
대노야가 성을 내며 소리쳤지만 주육낭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청랑은 관리를 소홀히 했으니 사당에 가서 반성하시오!”
대노야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 말이 떨어지자 마당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흠칫 놀라며 이부인에게로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주육낭의 걸음이 그제야 멈췄다.
이부인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 때문에 입술도 바짝 마르고 불안해졌다. 시집온 후 이런 질책을 받은 건 거의 처음이었다. 더구나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토록 매서운 질책이라니. 앞으로 이 집안에서 설 자리가 있겠는가.
“네.”
이부인은 목 메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형님, 이건 청랑과 무관한 일입니다!”
이노야가 얼른 나섰다.
“그래, 너도 마찬가지야!”
대노야는 이 판국에도 아내를 두둔하는 아우를 보자 부아가 치밀었다. 지금 상황을 보란 말이다! 뭐가 중요한지를 몰라!
“형님, 청랑은 몸이 안 좋습니다. 저기, 그래서 그 일은 형수님이 맡으셨고요.”
이노야는 끝까지 말을 마친 후에야 고개를 숙였다. 대노야는 당황한 표정이었고 대부인은 한숨을 토했다. 관두자, 더 이상 지킬 체면도 없다.
“그래요. 내 잘못이에요. 청랑과는 무관한 일이라고요.”
대부인은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가 주육낭을 향해 살짝 몸을 굽혀 예를 표했다.
“육낭, 내가 사과하마.”
주육낭도 답례로 예를 표했다.
“누구의 잘못인지 따지자는 게 아닙니다. 앞으로는 이런 잘못을 안 저지르길 바랄 뿐이죠. 부처님께 시주하고 염불을 외는 것보단 가까이 있는 혈육을 보살피는 게 더 쉽게 공덕을 쌓는 길이에요.”
녀석, 말은 청산유수군. 정교랑은 입을 삐죽거리고는 시선을 아래로 두며 왼손으로 팔걸이 책상에 그림을 따라 그리는 연습을 했다. 이 시에 있는 글자는 이제 다 쓸 수 있게 됐다. 이참에 연습할 서화를 몇 개 더 가져오게 할까?
바보의 거처는 길게 이야기를 나눌 만한 곳이 아니었기에 사람들은 곧 흩어졌다. 허드렛일을 하던 여종과 몸종은 뭐라 하소연 한마디 못 하고 곧 인신매매꾼에게 끌려갔다. 당사자인 두 사람 본인은 물론이고 가족들까지 전부 정씨 저택에서 내쫓겼다. 정씨 가문 하인들은 뒤숭숭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고, 그 바보의 거처를 바라볼 때면 두려움을 품게 됐다.
소식은 금세 정씨 가문 안채로 퍼졌다. 이부인의 곁방에서 지내는 정칠랑은 넋이 나간 채로 무릎깍지를 끼고 앉아 있었다.
“아씨, 너무 걱정 마세요. 대부인과 이부인께서 정말로 사당에 반성하러 가신 건 아니에요. 주씨 가문 사람의 화를 가라앉히려고 하신 말씀이죠.”
유모가 위로하며 말했지만 정칠랑은 여전히 넋이 나간 모습이었다. 옆에 있던 정사랑이 입을 열었다.
“그야 당연하지. 백모님과 어머니는 집안의 안주인이시잖아. 손아랫사람의 눈치를 보느라 반성을 하러 가시다니. 주씨 가문 어르신들이 온다 해도 그럴 일은 없어.”
“넷째 아씨 말씀이 맞아요.”
유모가 고개를 끄덕이고 웃으며 말했다.
정칠랑은 정신이 돌아온 듯 손을 풀고 꿇어앉더니 돌연 두 눈을 빛냈다.
“오라버니가 있으니 정말 좋네. 그런 오라버니가 있으면 얼마나 좋아.”
거기까지 말한 정칠랑은 무언가를 퍼뜩 깨달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안타깝게도 난 그런 오라버니가 없지만.”
처음으로 그 바보가 부럽기도 하고 살짝 분한 마음까지 들었다. 그 바보한테 그런 오라버니가 있다는 건 너무 아까워!
그런 오라버니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풍성하게 차려놓은 눈앞의 음식을 보며 반근은 기쁜 표정으로 꿇어앉았다.
“아씨, 식사하세요.”
새로 온 몸종과 여종이 힘을 합쳐 식탁을 들고 왔다. 대나무 문발 뒤 침상에 있는 여인은 옆으로 누워 있었다.
“그만 나가 봐요.”
반근의 말에 여종과 몸종이 네 하고 대답했다.
“아씨의 입맛을 모르니 낭자가 잘 살펴 줘.”
나이 많은 여종이 공손히 말했다.
반근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례를 했다. 여종과 몸종은 물러가면서 반근이 대나무 문발을 올리고 여인을 부축해 대청으로 나오는 모습을 언뜻 봤다. 호기심이 인 몸종은 여인을 똑바로 보려고 했지만, 나이 많은 여종이 눈을 부라리며 잡아끄는 바람에 얼른 고개를 숙이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아씨는 어떻게 생겼어요?”
어린 몸종이 궁금증을 못 참고 묻자 여종이 경고했다.
“바보가 뭘 어떻게 생겨! 괜히 말썽 피우지 마. 주씨 가문 공자한테 무슨 꼬투리라도 잡히는 날엔 우리 둘 다 골치 아파져.”
이번 일로 두 가족 일곱 식구가 쫓겨났다. 주인집에서 쫓겨난 아랫것들의 말로는 뻔했다. 어린 몸종은 놀란 표정으로 몸을 떨며 더는 그쪽 방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괜히 바보의 생김새에 대해 잘못 말했다가 화를 초래할지 모를 일이었다.
식사를 마친 대부인은 대노야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급히 물었다.
“뭐래요?”
“별말 안 했소. 술만 한 주전자 마시고 자러 가더군.”
대노야는 심드렁하게 말하며 기분이 언짢은 듯 자리에 앉았다. 오늘 일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달리 도리가 없었다. 대부인이라고 왜 아니겠는가. 맞은편에 앉은 대부인이 막 입을 열려는데 이노야 내외가 들어왔다. 이부인은 문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그 울음소리에 대부인은 더욱 심란해졌다.
“형님.”
이부인이 무릎을 꿇으며 큰절을 올렸다. 갑자기 큰절을 올리자 대노야 부부는 화들짝 놀라며 얼른 손으로 붙잡았다.
“왜 이러는 거야?”
대부인이 말했다.
“오늘 사람들 앞에서 제 잘못을 형님께 떠넘겼잖아요. 엄청난 불경이고 큰 잘못이에요.”
이부인은 울면서 일어나려 들지 않았다. 그 얘기가 나오자 대부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이쪽에 있던 이노야도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다.
“제 잘못입니다. 제가 형수님께 그리 말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이노야는 고개를 숙였다.
“이러지 마세요.”
대부인은 이쪽저쪽을 급히 만류하며 책망하듯 말했다.
“그게 무슨 잘못이겠어, 원래 내 일이었는데. 내가 집안 단속을 제대로 못 해서 자네가 그런 일을 겪었지 뭔가.”
이부인은 대부인의 손을 붙잡으며 흐느껴 울었다.
“그래요, 한 식구끼리 그런 거 따져서 뭐 하겠소. 지금 중요한 건 남의 식구를 상대하는 일이오.”
대노야의 말에 그제야 다들 자리에 앉았다.
“저쪽 집안에서는 아직, 그, 그 애 이름이 뭐랬지?”
어차피 남이 있는 자리도 아니라 대노야는 까놓고 물어봤다. 안에 있던 세 사람은 잠시 멈칫했다. 셋 다 그 바보의 이름이 뭔지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니까, 교랑이요!”
가장 먼저 생각해 낸 이부인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주씨 집안 외조모가 지어 준 이름인 듯했어요.”
대노야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기이한 이름을 지어 주었군.”
대노야가 중얼거렸다. 이름을 말하는 것인지 주씨 가문 사람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주육낭이라는 아이의 말로는 교랑이 돌아온 일을 몰랐다던데, 그 말을 믿어도 되나?”
대노야의 말에 이노야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모르는 게 이상하죠. 몰랐다는 사람들이 여기까지 와서 행패를 부립니까!”
방 안은 순간 침묵에 잠겼다.
“오늘 일에는 우리의 잘못도 있소. 저쪽에게 약점을 잡혔으니 굴욕을 당했어도 할 말이 없지. 우린 잘못을 인정했으니 주씨 가문에서 뭘 어쩔 건지 두고 보는 수밖에.”
“뭘 더 어쩐단 겁니까? 우리 정씨 가문이 저런 녀석한테 벌벌 떨어야 해요?”
이노야가 분노로 소리치자 대노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은 우리가 한 수 접고 들어갔다만 저들이 적당히 물러나지 않고 일을 계속 키운다면, 우리도 그리 호락호락하게 당할 수만은 없지.”
대노야가 말을 이었다.
“일개 무인에게 치욕을 당한다는 건 우리 정씨 가문의 체면만 깎이는 일이 아니다. 대주 문인들의 체면이 걸린 일이야.”
자고로 무관은 천하고 문관이 귀한 법이다. 관직조차 못 받은 서생도 무관 나리를 겁내지는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애초에 그 혼사를 치르는 게 아니었습니다. 괜히 놀림거리만 됐어요.”
이노야가 콧방귀를 뀌며 말하자 대노야가 눈을 부라리며 호통을 쳤다.
“지금 부친의 잘못을 논하는 것이냐?”
예전 아내에 관한 이야기였기에 이부인은 고개를 숙이고 잠자코 있었다. 대부인이 남편을 잡아끌었다.
“이노야는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멋대로 넘겨짚지 마세요.”
그러면서 대부인은 이노야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요, 피곤할 텐데 다들 낮잠이라도 한숨 자면서 기운을 차리죠. 괜히 웃음거리가 되면 안 되잖아요.”
이노야 내외는 인사를 올린 후 물러나 자신들의 거처로 갔다.
“며칠간 형수님 자주 찾아뵙고 문후 올리시오. 그래야 하루빨리 마음을 풀지.”
이부인은 입을 살짝 삐죽거렸다.
“사죄했잖아요. 큰절까지 올렸는데 그만큼 체면 세워 줬으면 됐죠. 따지고 보면 우리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고요.”
이노야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이부인을 노려보며 목소리를 낮춰 호통을 쳤다.
“지금 뭐라고 했소?”
“내가 뭘요? 내 말이 틀렸어요? 좋은 일은 형님이 다 하면서 난 욕만 먹으라고요? 그 바보는 본인이 맡아 키우겠다더니 왜 일이 생기니까 나만 욕을 먹느냐고요. 아까 당신이 먼저 나서서 내 편을 들지 않았으면 형님이 말을 했겠어요? 내가 사당으로 가는 걸 지켜보고 있었겠죠.”
이부인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말했다.
“목소리를 낮추시오, 여긴 밖이야.”
이노야가 흠칫 놀라며 말하자 뒤따르던 몸종과 여종들이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이부인은 옷소매를 뿌리치고는 이노야를 앞질러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노야는 두통으로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아주 바람 잘 날이 없군! 잘 지내다가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한 집에서 숨길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방 내외의 말다툼은 곧 대부인의 귀로 들어갔고, 대부인은 한숨을 쉬며 비녀를 뺐다.
“물러가라. 이 일은 함구하고.”
여종이 네 하고 대답한 후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이방 내외가 왜 갑자기 철없이 굴지?”
대노야는 마음이 편치 않은 듯 침상에 반쯤 드러누운 채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당신도 참. 교랑을 내가 맡겠다고 한 걸 잊으면 어떡해요.”
대부인은 어이가 없는 듯 힘없이 말했다.
“당신이 맡겠다고 한 게 뭐? 어쨌거나 명목상 모친은 이부인이잖소. 내가 제수씨를 벌하지 않으면 주씨 가문 사람이 가만있었겠소? 그리고 내가 설마 진짜 벌을 주려 했겠냐고.”
대노야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한심해서 원.”
대부인이 침상 한쪽에 누우며 미간을 꾹꾹 눌렀다.
“교랑이 돌아온 게 문제예요. 갑자기 모든 게 변했으니 견디기 힘들겠죠.”
대노야는 콧방귀를 뀌었다.
“우리 집에 그 애가 있다는 걸 몰랐던 것도 아닌데, 갑자기 견디기 힘들 건 또 뭐요?”
대부인이 입을 삐죽거리며 피식 웃었다.
“그 일을 아는 것과 직접 보는 건 별개의 문제예요.”
“제수씨가 너무 오랫동안 마음 편히 지냈어.”
대노야가 무심하게 말했다. 이번에는 대부인도 반박하지 않고 그저 한숨만 내쉰 후, 이번에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눈을 감았다.
-행위-
“아주머니가 고생이 많으시네요.”
반근은 마당에서 예를 표하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낭자, 별말을 다 하네.”
여종이 예의 바르게 답례했다. 반근은 곧장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
“아씨, 아씨. 물어봤더니 사촌 공자는 술을 자신 후 오수에 드셨대요.”
반근이 기쁘게 말했다. 정교랑은 낮잠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루 중 자는 시간이 이미 충분히 길었기 때문이다.
정교랑은 팔걸이 책상에 기대 책을 한 권 보고 있었다. 정씨 가문과 주씨 가문이 소동을 벌인 후 식사를 하는 동안 반근에게 가져오라고 한 책이었다. 구체적으로 무슨 책을 읽어야 할지 잘 몰랐는데, 여종에게 얘기를 들은 시종들이 노야에게 고한 후 노야의 서재에서 가장 두꺼운 책을 가져왔다. 이 정도면 한동안 재미있게 갖고 놀겠지. 설마 바보가 책을 읽으려는 건 아닐 테니, 구기고 찢으며 놀기엔 딱이야, 하면서.
‘대주번성록(大周繁盛錄)’.
정교랑은 손가락으로 책 표지를 쓰다듬으며 책 제목을 나지막이 읊조렸다. 반근이 뭐라 말하고 있었지만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겉으로 표가 나진 않았지만 정교랑은 몹시 기뻤다.
“아씨, 사촌 공자가 깨면 아씨를 보러 오실 거예요.”
앞에 꿇어앉아 있던 반근이 손을 팔걸이 책상 위로 올리며 책을 가리고 말했다. 정교랑은 반근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씨.”
반근은 도로 앉았다가 곧 몸을 똑바로 펴며 꿇어앉았다. 흥분되면서도 불안한 표정이었다.
“사촌 공자를 뵈면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세요?”
정교랑은 음 하고는 한동안 말없이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말이 잘 안 나오시죠? 서두르실 것 없어요.”
반근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천천히 말씀하세요. 사촌 공자께서는 인내심 있게 들어주실 거예요.”
정교랑이 가볍게 응 하고 대답했다. 사실 딱히 말할 것도 없는데. 잘 아는 사이도 아니고. 정교랑은 고개를 숙여 책을 계속 보려고 했다.
“사촌 공자께서 계시는 한, 저들이 아씨를 무시할 일은 없어요.”
반근은 흥분되고 마음도 놓이는 듯 말을 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노마님 댁부터 갔다가 돌아올 걸 그랬네요.”
정교랑이 고개를 들더니 불쑥 말했다.
“네가 말했었지, 한원조라는 사람에 대해서.”
반근은 갑작스러운 말에 멈칫했다. 한원조? 정교랑은 반근이 일상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한 공책을 꺼내 펼치더니 그중 한 줄을 가리켰다.
- 동강에서 길을 지나던 한원조 공자가 억울한 일을 나서서 도와주었다.
반근도 생각난 듯 아 소리를 냈다.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어떻게 된 일이지?”
정교랑의 물음에 반근은 사건의 경위를 다시 한번 들려주었다. 지난번에 비해 오늘은 좀 더 간략하고 빠르게 말했지만 말이다.
“아씨, 여섯째 공자는 한 공자보다 조금 어려 보이셨어요.”
반근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반근, 한 공자가 말했지. 이 정도 수고쯤이야 누구나 도울 수 있는 일이니 은혜랄 것도 없다고.”
정교랑은 반근이 주육낭으로 화제를 돌리는데도 끌려가지 않았다. 반근이 정교랑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아씨, 생각나셨나 봐요. 아씨께서 그러셨죠. 세상에 쉬이 도울 수 있는 일은 많지만 누구나 기꺼이 나서진 않는다고요. 그러니 한 공자의 도움을 잊지 않도록 저더러 기록해 놓으라고 하셨어요.”
반근이 헤헤 웃자 정교랑이 반근을 바라봤다.
“그래, 반근. 한 공자 같은 사람을 만나는 우연은 많지 않아.”
반근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야. 아씨는 생각이 느리니 다른 게 생각나셨겠지. 주육낭의 도움이 고마워서 한원조를 떠올리셨거나. 틀림없어. 아씨는 한번 다른 생각으로 빠지면 바로 못 돌아오시잖아.
“네, 사촌 공자가 와서 정말 다행이지 뭐예요.”
반근은 웃으며 팔걸이 책상을 잡고 일어섰다.
“아씨, 손님 맞이할 차를 보러 갈게요.”
반근은 깡충깡충 뛰어나갔다. 정교랑은 나가던 반근이 되돌아와서 회랑 아래에 둔 나막신을 신고 부엌으로 다다다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정교랑은 피식 웃고는 고개를 숙여 책을 봤다.
한낮이 되어 반근이 끓인 차가 식고 또 식는데도 주육낭은 오지 않았다.
“아직 안 일어나셨나? 술을 너무 많이 드신 건가?”
물론 대답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다른 사람이 점심 휴식을 끝낼 무렵, 정교랑의 휴식 시간이 찾아왔다. 정교랑은 침상에 누워 잠을 청했다. 바람이 창가 근처 탁자에 올려둔 책의 책장을 넘기며 가벼운 소리를 냈다. 반근이 조심스레 들어와 책을 살펴보고는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햇빛 아래 푸르른 녹음을 보며 잠시 멍하니 있던 반근은 몸을 일으켰다.
“난 여섯째 공자를 뵈러 다녀올게. 아씨 좀 부탁해.”
반근이 새로 온 몸종에게 소리 죽여 말했다. 새로 온 몸종은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외모로 나이는 16~17살쯤이었다. 몸종은 반근의 말에 멈칫하며 살짝 두려운 표정을 지었다.
“아, 그럼,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되는데?”
몸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바보의 시중을 든 적은 없단 말이야. 바보가 일어나 울며 떼라도 쓰면 어쩌지? 사람을 때리진 않나? 물을 먹여 줘야 하나? 간식은 뭘 줘야 하지? 옷은 혼자 갈아입을 수 있나?
반근은 성가신 듯 몸종을 노려봤다.
“금방 갔다 올 거야. 넌 밖에서 대기하고 있어, 들어갈 필요 없으니까. 아씨께서 깨셔도 내가 없으면 그냥 누워 계실 테니 넌 아무것도 안 해도 돼.”
반근이 소리 죽여 말하자 몸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걱정되는 듯 당부했다.
“언니, 빨리 와야 해.”
반근이 밖으로 나갔다. 반근은 몇 사람에게 물은 후에야 주육낭이 쉬는 곳을 알아냈지만, 주육낭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공자는 이노야를 뵈러 가셨습니다.”
문밖에 있던 어린 시종이 말했다. 하긴, 아씨의 부친부터 만나 뵙는 게 맞지. 반근은 기뻐하며 이노야의 거처로 갔지만 마당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공자가 나오거든 자신이 직접 아씨께 모셔 가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주육낭은 나오지 않았다. 기다리다가 초조해진 반근은 이노야 거처의 문을 지키는 시종에게 물어본 끝에야 이노야와 주 공자가 대노야한테 간 사실을 알게 됐다. 반근은 씩씩거리며 발을 구르고 대노야 쪽으로 달려갔다.
반근이 초조한 만큼 정교랑의 거처에 있는 몸종도 안절부절을 못했다.
“아주머니, 들어가 봐야 할까요? 안 들어가도 될까요?”
몸종은 당황스러운 듯 여종을 잡아끌며 물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무릎을 꿇고 밖에 앉아 있었지만, 안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람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고요함이었다.
“그 애가 괜찮다고 했으니 들어가지 말자.”
여종도 확신이 없는 말투로 주저했다.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
몸종은 문밖을 두리번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데 이렇게 오래 걸려. 어차피 이렇게 여기 묵을 테니 내일 말해도 되잖아.”
한편 반근은 대노야 거처의 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안에서 시종이 나왔다.
“뭐라고? 여섯째 공자께서 가신다고?”
반근은 깜짝 놀랐다.
“오늘 오셨는데 벌써 가신다니?”
대노야와 이노야는 떠난다는 말에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날이 어두워지는데 바로 가려고?”
대노야가 물었다.
“괜찮습니다. 밤엔 사람이 적어 길을 서두를 수 있잖습니까.”
주육낭은 도도한 말투로 웃으며 말했지만 이노야는 속으로 경멸했다.
“말 한마디 전하겠다고 이렇게 급히 왔다가 서둘러 돌아가다니, 정말 고생이 많군.”
대노야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더는 붙잡지 않았다.
“아, 실은 어른들의 말씀을 전하고 누이가 무탈한지 보는 것 외에 다른 용무도 하나 있습니다.”
주육낭은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말했다. 올 것이 왔구나! 대노야와 이노야는 속으로 움찔했다. 말을 빙빙 돌리더니, 이제야 여기 온 진짜 목적을 말하는군.
“말하게.”
대노야가 말했다. 주육낭은 몸을 곧추세우며 두 손으로 무릎을 만졌다.
“그 아이를 갖고 싶습니다.”
그 아이를 갖고 싶습니다?
대부인은 며칠 전에도 똑같은 말을 들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교랑의 몸종 말이죠?”
대부인의 물음에 대노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때문에 왔다고요?”
“그렇다고 하더군.”
모두의 예측을 뛰어넘는 요구였다.
“길게 생각할 것 없어요. 달라면 줘 버려요. 어차피 우리 집 몸종도 아니잖아요. 임기응변이 중요하죠. 그 애가 먼저 입을 열면 우리도 응수하고, 잠자코 있으면 우리도 가만히 있는 거예요.”
거기까지 말하고 나자 그 몸종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애도 그래요. 돌아온 후로 수많은 말썽을 일으켰어요. 우리 집에서 거둘 수 없는 아이에요.”
대노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가서 그 아이에게 전해라. 진짜 주인에게 가라고.”
명을 받은 여종들이 밖으로 나갔다가 얼마 안 가 되돌아왔다.
“대노야, 대부인. 가서 말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 계집이 밖에 있다가 여섯째 공자를 만났어요.”
대부인이 피식 웃었다.
“그렇다면 잘됐구나. 그 집 일이니 알아서 처리하겠지.”
대부인은 부채질을 하며 대노야를 바라봤다.
“글쎄 모르겠네요. 그 계집이 이번엔 간다고 할지.”
“공자를 따라 집으로 가자고요?”
반근이 놀라 묻자 주육낭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잘됐네요! 얼른 가서 아씨께 말씀드릴게요.”
반근은 반색하며 뒤돌아 달려가려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걸음을 멈추고 다시 물었다.
“공자, 노야께서도 허락하셨어요?”
“넌 이 집 사람도 아닌데 저들이 허락하고 말 게 뭐 있느냐.”
주육낭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자 반근은 멈칫했다.
“하지만 아씨는 이 댁 분이잖아요.”
주육낭은 더욱 인상을 쓰며 말했다.
“아씨는 무슨, 난 너를 말하는 거다.”
“네?”
반근은 멍해진 채 주육낭을 바라봤다.
“저희 아씨랑 같이 가는 게 아니에요?”
“왜 이리 말귀를 못 알아들어?”
주육낭은 반근을 뜯어보며 성가시다는 투로 말했다.
“너희 아씨의 성이 주씨더냐? 냉큼 짐부터 챙겨라.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출발할 것이다.”
말을 마친 주육낭은 성큼성큼 걸어 자리를 떴다. 그 자리에 멍하니 선 반근의 귀에 웅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교랑은 반근이 몸종에게 당부할 때 진작 잠에서 깼다. 가만히 누워 있기 갑갑하여 혼자 일어났더니 밖에 있던 여종과 몸종이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둘이 소곤거리며 논의하는 소리가 정교랑의 귀에도 들렸다.
정교랑은 조용히 책을 펼쳤다. 병풍에는 그림과 겨우 두 줄의 글이 전부였지만 책 속에는 글자가 빼곡했다. 빽빽한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자 정교랑은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마음속이 혼란스러워져 잠시 눈을 감고 있자 조금 괜찮아졌다.
볼까, 보지 말까? 조용히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던 정교랑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한나절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 역겨운 느낌은 더 이상 들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가리며 글자를 한 줄씩 보자 글자가 눈앞에서 어지럽게 날뛰는 일도 없었다. 딱 한 줄만 봤지만 말이다.
한나절 동안 이 정도 봤으면 충분해. 정교랑은 고개를 들었다. 밖은 이미 저녁 무렵이라 노을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밖에서 여종과 몸종이 초조하게 소곤거리는 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왜 아직도 안 오죠?”
“일하러 가야 하는데.”
“그 아이 윗전은 바보라서 사람이 지켜야 해요.”
“그냥 우리가 들어가 볼까.”
정교랑은 조용히 창밖을 보며 책을 덮었다.
“아무도 없느냐.”
정교랑이 소리치자 밖에서 수군대던 소리가 뚝 멈췄다. 마당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다. 잠시 후 누군가가 긴장한 모습으로 바들바들 떨며 들어왔다.
“아씨.”
몸종은 무릎을 꿇고 고개조차 들지 못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옷을 갈아입어야겠어.”
정교랑이 몸종을 보며 말했다.
“네.”
몸종은 대답하며 고개를 들었다. 석양 아래 반짝이는 햇빛이 눈앞에 단정히 앉아 있는 여인의 몸으로 쏟아지자 순간 눈이 부셨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답다니. 그리고 냄새도 안 나잖아. 사람들이 하던 말은 전부 거짓말이었네!
반근이 문 안으로 급히 들어왔다.
“아씨는 일어나셨어?”
반근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안에 있던 몸종이 고개를 돌려 반근을 바라봤다. 반근의 말이 뚝 멈췄다.
“아씨, 끓인 물을 가져왔어요.”
몸종은 시선을 거두며 말한 후,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손을 뻗어 찻잔을 팔걸이 책상 위에 놓아 주었다. 정교랑이 손을 뻗어 찻잔을 받으려 할 때였다. 정신을 차린 반근이 재빨리 다가가 정교랑 앞에 꿇어앉았다.
“아씨께선 차가운 물을 드셔야 해.”
반근은 손을 뻗어 찻잔을 받아 들고 확인해 보려 했다.
“괜찮아. 내가 잠깐 기다리면 돼.”
정교랑의 말에 반근은 네 하고 대답한 후 손을 거두며 앉았다.
“아씨, 옷을 갈아입으시겠어요?”
반근은 또다시 무언가 생각난 듯 급히 물었다.
“내가 갈아입혀 드렸어.”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던 몸종이 뭔가 대단한 일이라도 했다는 듯 흥분된 어조로 얼른 대답하자 반근은 아 하고 대꾸했다. 정교랑은 찻잔을 들어 물을 천천히 마셨다.
“아씨, 저녁에 뭐 드시고 싶으세요? 제가 만들어 드릴게요.”
반근이 또다시 웃으며 말하자 정교랑은 반근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반근은 시선을 내리깔고 정교랑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냉면.”
반근은 고개를 숙인 채 정교랑의 말을 들었다.
“네, 바로 만들러 갈게요.”
몸을 일으킨 반근이 막 섬돌로 내려서려는데 밖에서 여종이 들어왔다.
“반근 낭자, 중문에서 주 공자의 사람이 다 됐냐고 묻던데?”
순간 몸이 경직된 반근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주머니, 공자께 말씀 좀 전해 주세요. 아씨한테 냉면부터 만들어 드려야 한다고요.”
정교랑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반근 언니, 바쁘면 가서 일 봐. 부엌일은 내가 할게.”
몸종이 옆에서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야!”
반근이 고개를 돌리며 소리치자 몸종은 화들짝 놀라 반근을 바라봤다. 눈물이 글썽글썽한 반근의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반근은 뒤돌아 고개를 숙인 채 부엌으로 들어갔다.
“됐어. 가거라.”
정교랑이 말했다.
반근은 뒤돌아 꿇어앉으며 대성통곡을 했다. 문밖에 있던 여종과 회랑에 있던 몸종은 영문을 몰랐다. 이게 무슨 일이지?
“아씨, 아씨.”
반근은 흐느껴 우느라 말도 제대로 못 하며 무릎을 꿇은 채 앞으로 다가갔다.
“저 안 갈래요, 안 가요. 가서 여섯째 공자께 말씀드릴게요.”
반근이 일어나 비틀거리며 밖으로 달려갔다. 몸종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광경을 지켜봤다.
“이게 무슨 일이지?”
몸종은 이해할 수 없는 듯 물었지만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반근은 어느새 멀리 뛰어갔고, 문밖에 있던 여종이 그 뒤를 따랐다. 몸종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쳐다봤다.
머리를 풀고 품이 큰 어두운색 비단옷을 입은 여인은 아무것도 못 보고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듯 변함없는 표정으로 단정히 앉아 있었다. 먹고 입고 싸고 잘 줄 알면 충분하지 뭐. 희로애락이니 뭐니 바보는 그런 거 모르나 보네.
“부엌에 전해. 난 냉면을 먹고 싶다고.”
정교랑이 말했다. 거봐, 맞잖아!
“네.”
몸종이 대답했다. 이 바보는 대소변을 못 가리는 것도 아니고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것도 아니야. 사람을 패거나 소란을 부리지도 않지. 그저 조용히 앉아 있을 뿐이니 먹고 마실 것 챙겨 주고 옷 갈아입는 시중이나 들면 그만이야. 이렇게 모시기 편한 윗전이 있나. 몸종은 경쾌한 발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정교랑은 커다란 방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손에 찻잔을 꼭 쥐고 미동도 하지 않는 채로.
울고불고하는 반근을 보며 주육낭은 인상을 썼다.
“연지분을 바른 영웅인 네가 아까운 마음이 들어 데려가겠다고 한 것인데 이리 울고불고하는 연유가 무엇이냐?”
주육낭은 고삐를 잡고 말 위로 올라타며 말했다. 영웅? 나를 말하는 건가? 공자께서 날 이렇게 높이 보셨어? 하지만……·.
“그래도 저희 아씨는 어쩌고요?”
반근이 울며 말했다.
“네가 없으면 정씨 가문엔 다른 아랫것이 없다더냐?”
주육낭은 우스운 듯 말했다. 똑똑하고 영리하긴 한데, 너도 여인이라 성가신 건 어쩔 수 없구나.
“하지만 저희 아씨는 어릴 때부터 저와 함께하셨거든요.”
반근이 울며 말했다.
“어릴 때부터 너와 함께했다고 다른 사람이랑은 같이 못 살아? 네가 없으면 살 수 없느냔 말이다.”
주육낭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이 세상에 누가 떠나면 못 사는 사람이 있기나 하다더냐? 네 능력을 과대평가하지 마라. 그건 자기기만이야!”
반근은 고개를 숙인 채 흐느꼈다.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 난 정씨 가문 사람도 아니잖아. 주씨 가문에서 샀으니 주씨 가문 사람이지. 그럼 돌아가야 해.
“갈 것이냐, 말 것이냐? 난 길을 서둘러야 한다. 가기 싫으면 관둬라. 네가 아쉬워서 이러는 줄 아느냐? 널 이런 곳에 버려두는 게 아까웠을 뿐이야!”
반근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들어 말 위에 앉은 소년을 바라봤다. 높은 곳에서 반근을 내려다보는 그 소년은 석양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반근은 고개를 돌려 문 안을 바라봤다. 아씨는 이제 많이 좋아지셨어. 하지만 옆에서 일깨워 주지 않으면 사나흘 내의 사람과 일밖에 기억 못 하시지. 그렇다면 사나흘 후엔 반근이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기억 못 하실 거야.
반근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닦았다.
“네.”
반근은 목멘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소인은 공자의 말씀을 따를게요. 소인은 아무것도 없어서 챙길 짐도 없어요.”
마침내 석양이 지자 저녁 빛이 대지를 덮었다.
몸종은 실파와 두부를 고명으로 올린 냉면을 청자 면기에 담아 팔걸이 책상 위에 차려 놓고, 간단한 반찬 접시 두 개와 빈 그릇, 젓가락까지 올린 후 정교랑 앞으로 들고 갔다.
방 안은 어느덧 불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날아드는 날벌레는 아래로 내려뜨린 대나무 문발이 막아 주었다. 정교랑은 눈앞에 차려진 식탁을 보고도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밥을 혼자 먹을 줄은 아나 모르겠네. 몸종이 잠시 머뭇거리며 옆에 있는 여종을 바라보자, 여종이 몸종에게 눈짓을 했다.
몸종이 손을 뻗어 젓가락을 집어 들으려 할 때였다. 정교랑이 한발 먼저 손을 뻗어 젓가락을 들더니 한 손으로는 소매를 잡고 한 손으로 천천히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몸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여종을 향해 뿌듯한 듯 기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문밖에서 발걸음소리가 들리더니 네다섯 명쯤 되는 사람들이 들어왔다.
“곽 낭자가 어쩐 일이에요?”
몸종과 여종이 웃으며 맞이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여인이 웃으며 뒤에 있는 이를 가리켰다.
“저 아이도 앞으로 여기서 지낼 거예요.”
몸종 하나가 굳은 얼굴로 서서 건성으로 예를 표했다.
“웬 사람을 또 보내요?”
“아, 아씨랑 같이 왔던 그 애가 떠났거든요. 부인께서 둘만으로는 일손이 부족할 것 같다며 하나를 더 보내 주셨어요.”
곽 낭자가 대청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인은 어두운 등불 아래에서 고개를 숙인 채 식사 중이었는데, 식사를 멈추고 이쪽을 쳐다볼 기미는 전혀 없었다. 바보 노릇도 나쁠 건 없지, 성가신 일이 없으니까.
곽 낭자는 오래 있을 생각이 전혀 없는 듯 바로 뒤돌아 나갔다. 남아 있는 몸종과 여종은 여전히 놀란 상태였다.
“그냥 가 버렸다고?”
새로 온 몸종은 입을 삐죽거리며 사방을 둘러보더니 그 말에 쉿 소리를 냈다.
“안 가면요? 평생 여기서 지내라고요? 좋은 곳으로 갔어요. 공자가 직접 와서 데려간다는데 안 가는 게 바보죠.”
몸종과 여종은 어떻게 된 일인지 그제야 이해했다. 실망스럽기도 하고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냥 가 버리다니.”
몸종은 고개를 돌리고 대청 안에 있는 정교랑을 힐끔 바라봤다. 등불 아래의 여인은 여전히 느릿느릿 식사 중이었다.
“그래도 오래 모신 분인데 와서 고개 숙여 인사라도 한마디 하고 가지.”
몸종이 투덜거렸다.
“했어요. 문밖에서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는걸요.”
새로 온 몸종이 말했다.
“그렇게 인사하면 뭐 해요. 바보가 뭘 안다고.”
주씨 가문 공자가 밤길을 재촉해 떠나며 몸종까지 데려갔다는 소식은 금세 안채로 전해졌다.
“자기 아씨를 끔찍이도 챙기더니? 부엌에 와서 간식을 만들래도 싫댔잖아. 더군다나 여긴 같은 집이고. 근데 뭐야, 이번엔 냉큼 가 버려? 천 리도 넘은 길을 이렇게 그냥 간다고?”
정육랑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아쉬울 게 뭐 있어. 그 계집이 영리한 거지. 사람은 다들 높은 곳으로 가려고 하는걸. 바보의 시중을 들어 봤자 평생 그 모양 그 꼴일 테지만, 그 공자를 따라가면 앞으로의 삶이 달라지잖아.”
정오랑이 천천히 말했다. 어느 정도 세상 물정을 파악한 정육랑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고 주위에 있는 몸종들을 분노 어린 눈으로 쓱 훑었다.
“너희들 중에 그따위로 바람이 나서 주인을 버리고 가는 계집이 나오기만 해 봐라. 누굴 따라가든 내 기필코 쫓아가 요절을 내겠다.”
정육랑이 고개를 쳐들고 앙칼지게 말하자 몸종들은 놀라 얼른 무릎을 꿇으며 당치도 않은 말씀이라고 빌었다.
“바람나는 게 뭐야?”
정칠랑이 궁금한 듯 물었다.
“바람이 나면 왜 주인을 버려?”
참, 8살짜리 아이가 한 방에 있었지. 자매들은 부채를 들고 얼굴을 가리며 부채질을 했다.
“따분해 죽겠다. 연못에 가서 놀자.”
정육랑이 말머리를 돌리며 말했다. 다른 자매들은 따라서 일어섰지만 정칠랑은 가고 싶지 않았다.
“거긴 귀신이 있잖아.”
“없어, 넷째 오라버니는 병에 걸렸던 거야. 공부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근심이 쌓였던 차에 연못에서 바람을 쏘다가 병에 걸렸던 거라고. 료 의원이 그랬어!”
정육랑은 눈썹을 치켜뜨며 정칠랑의 머리를 쿡쿡 찔렀다.
“한 번만 더 우리 오라버니에 대해 허튼소리 지어내 봐. 너랑 안 놀 줄 알아!”
정칠랑은 억울하기도 하고 열이 받기도 했다.
“나도 너랑 안 놀아!”
정칠랑은 발을 구르며 소리친 후 신도 신지 않은 채 가 버렸다. 유모와 몸종들은 늘 있던 일이라는 듯 나막신을 들고 얼른 뒤쫓아갔다. 정육랑은 흥 콧방귀를 뀌었다.
“가자. 그 바보가 이젠 연못에 안 나오니까 안심하고 놀아도 돼.”
어느새 날이 밝았다. 대나무 문발 밖에 있는 간이 침상에서 자던 몸종은 방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얼른 일어나 물었다.
“아씨, 일어나셨어요?”
문 안에서 응 하고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몸종은 몸을 일으켜 얼른 머리를 빗질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정교랑은 벌써 침상에 앉아 있었다.
“아씨, 옷을 갈아입혀 드릴게요.”
몸종이 말했다. 정교랑의 시중을 드는 일을 시작한 건 이제 겨우 사나흘밖에 안 됐지만 몸종은 능숙하게 움직였다. 너무나도 단순한 일이었으니까. 아씨는 떼도 안 쓰고 조용해서 시중들기가 너무 편하네. 아, 밥 먹는 것만 빼고.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 끓인 물을 마시고 나자 몸종이 정교랑 앞으로 음식을 가져왔다.
“아씨, 어떠세요?”
몸종이 조심스레 묻자 정교랑은 눈으로 쓱 식탁을 훑더니 잠시 침묵했다. 이젠 모든 음식을 안채 부엌에서 가져왔지만 여기 있는 작은 부엌을 없앨 순 없었다. 왜냐하면……·.
“이 생선은 참기름에 좀 더 지져. 밥은 국에 말아 끓이고.”
정교랑의 말에 몸종은 네 하고 대답한 후 식탁에 있는 음식들을 찬합에 넣어 들고 나갔다. 마당에 있던 다른 몸종은 머리를 감는 중이었다.
“물부터 길어 오고 씻어. 아씨께 밥을 새로 지어 올려야 해.”
몸종이 말하자 머리를 감던 몸종은 성가신 듯 대꾸했다.
“밥 다 됐잖아? 뭘 더 해?”
“안 드시겠다고 이렇게 저렇게 다시 해 오래.”
머리를 감던 몸종은 머리를 털며 다가와서는 찬합을 보며 입을 삐죽거렸다.
“바보가 뭘 알아, 대충 달래서 먹이지. 진짜 아씨 모시듯 시중을 드네.”
이어 손을 뻗어 찬합을 받으며 말했다.
“나한테 맡겨.”
머리를 감던 몸종은 젓가락을 들어 생선을 뒤집고 옆에 있던 국에 밥을 말아 두어 번 아무렇게나 뒤적였다.
진한 머릿기름 냄새가 방 안에 퍼졌다. 정교랑이 창가에서 고개를 들자 낯선 몸종이 보였다.
“아씨.”
몸종은 정교랑을 부르다 말고 창가에 단정히 앉아 있는 아씨를 보며 흠칫 놀랐다. 이 방 안에 들어온 것도 처음이고 아씨를 제대로 본 것도 처음이었다. 바보인 게 아까운 미모네.
“아씨.”
몸종은 정신을 차리고 무릎을 꿇으며 찬합에 있는 생선과 음식을 차려 놓았다.
“말씀하신 대로 생선을 지졌어요. 국도 끓였고요.”
정교랑은 식탁에 있는 음식을 쓱 보더니 다시 고개를 들어 그 몸종을 쳐다봤다. 편하게 행동하던 몸종은 정교랑의 눈빛에 어째서인지 긴장이 됐다. 역시 바보는 사람을 겁먹게 한다니까. 몸종이 정교랑을 보며 미소를 짜냈다.
“소인이 먹여 드릴까요?”
몸종이 쭈뼛거리며 말하자 정교랑은 몸종을 힐끔 보고 입을 삐죽거리며 피식 웃었다.
“난 바보가 아니야. 바보는 너지.”
몸종은 실소했다. 진짜 바보잖아. 정교랑이 손을 뻗어 식탁 위에 있던 그릇을 엎어 버렸다. 국에 만 밥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바닥과 식탁, 맞은편에 있던 몸종의 몸으로 음식이 튀었다.
“앗, 뜨거워.”
몸종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겨우 며칠 마음 편히 지내던 대부인은 또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교랑 아씨 말씀으로는 그 아이가 밥을 먹다가 덴 거라고 하셨어요.”
여종이 무릎을 꿇고 앉아 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 몸종은 교랑 아씨께서 엎으신 거라고 하고요. 나머지는 전부 밖에 있어서 본 사람이 없어요. 부인, 누구 말을 믿으시겠어요?”
“누구 말을 믿냐고?”
대부인이 자세를 고쳐 똑바로 앉으며 여종을 바라보더니 돌연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걸 몰라서 물어? 주씨 가문 사람이 떠났다고 평생 안 올 줄 아느냐? 그저 먹고 마실 줄밖에 모르는 아이 시중이 그리 힘들어? 누굴 바보로 아는 게야! 어딜 감히!”
여종은 얼른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네, 네. 고정하세요, 부인. 고정하세요. 알겠습니다. 소인이 그리 처리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여종은 얼른 일어나 허둥지둥 밖으로 나갔다.
-기억-
불과 며칠 사이에 정교랑의 몸종이 셋이나 바뀌었다. 주씨 가문으로 도망친 몸종 외에 나머지 둘은 팔려갔다.
정씨 가문은 가풍이 엄하고 선조의 유훈을 따라 아랫것에게 관대했다. 부리던 사람을 연달아 파는 일은 요 몇 년간 전례가 없었는데 불과 한 달 만에 두 번이나 일어나니 집안 전체가 뒤숭숭해져 다들 몸을 사렸다.
하인을 두 번이나 팔았다는 소식은 금세 퍼져 나갔다. 전부 정씨 가문 이방의 그 바보와 관련된 일이었다. 다른 집 바보들은 외모가 추하고 희로애락을 몰라 누군가를 때리고 욕하는 일이 없다던데, 정씨 가문의 바보는 아랫것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일에 능했으니 하인들과 몸종들로서는 두려운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바보의 뒤엔 든든한 외가가 버티고 있어 심기를 건드려서는 안 됐다. 정씨 가문 바보의 시중을 들려면 따돌림을 당하는 건 물론이요, 엄청난 심리적 부담과 함께 일가 전체의 앞날을 짊어지는 위험까지 감수해야 했다.
“언니, 언니. 일찍 왔네. 우린 무서워서 시중들러 못 들어가겠어.”
“언니, 우리 언니는 아직 젖먹이도 딸려 있어. 팔려가면 못 살아.”
겁에 질린 얼굴로 애원하는 새로 온 두 몸종의 말에 원래 있던 몸종은 난감했다.
“사실 아씨는 그런 분이 아니야.”
그 몸종은 억울한 일을 당해 팔려 간 게 아니야. 그 계집이 먼저 아씨를 우롱했으니 그런 일을……·. 사실 다른 아씨를 윗전으로 모셨다 해도 그런 짓을 했으면 무거운 벌을 받았을 것이다. 물론 다른 아씨를 모셨다면 목숨이 백 개라 해도 그런 짓은 감히 못 했겠지. 남을 무시하고 깔보다가 되레 자신이 당한 것이다. 그런데 우롱을 당했다는 걸 바보가 어떻게 알았지? 혹시 바보가 아닌가? 몸종은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언니, 언니. 언니는 보살이잖아. 우리 집 식구들은 언니만 믿을게.”
두 몸종이 옷자락을 붙잡으며 애걸복걸하자 몸종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알았어. 안에 들어가서 시중드는 일은 너희가 안 해도 돼. 물청소 깨끗이 하고 물 끓여서 부뚜막도 닦아. 아씨 시중은 내가 들게.”
몸종의 말에 나머지 두 몸종은 무슨 사면이라도 받은 듯 연신 감사를 표했다. 몸종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조롱의 대상이었다가 이제는 두렵고 피해야 하는 대상이 된 그 바보가 여느 때처럼 조용히 앉아 손에 든 책을 넘겨 보고 있었다. 몸종이 끓인 물을 따르고 꿇어앉아 잔을 건넸다.
“아씨, 물 드세요.”
정교랑은 응 하고 손을 뻗어 물잔을 받았다. 몸종은 팔걸이 책상 위에 있는 책을 바라보았다. 몸종이 처음 왔던 날 펼쳐 놓았던 책장과 같은 부분이었다. 아씨의 희고 가느다란 손이 같은 줄 글자를 계속 만진 탓에 그 부분은 마모가 되어 흔적이 남아 있을 정도였다.
“아씨, 오수에 드시겠어요?”
몸종의 물음에 정교랑은 몸종을 쳐다보며 고개를 가로젓더니 손을 뻗으며 말했다.
“일어나게 부축해 줘.”
몸종이 얼른 손을 내밀며 정교랑을 부축했다.
“나가서 좀 걸어야겠어.”
몸종은 네 하고 대답한 후 정교랑을 부축해 밖으로 나왔다. 마당에 모여 떠들고 있던 몸종들은 인기척에 뒤를 돌아봤다가 어두운색 치마에 푸른 비단 윗옷을 덧입고 검은 머리를 늘어뜨린 채 대청 중앙으로 나온 여인을 보고 멍해졌다.
잠시 후 이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차린 몸종들은 부엌 안으로 우르르 들어갔다. 기억에 남는 건 그 여인의 새하얀 얼굴뿐이었다. 구체적인 외모에 대해서는 미처 볼 새도 없었을뿐더러 감히 쳐다볼 담력도 없었다. 괜히 봤다가 해치려 했다며 누명이라도 씌우는 날엔 목이 달아나지 않겠는가.
몸종은 별안간 마당이 조용해지자 멋쩍어했다.
“부엌 뒷정리를 하느라 바쁜가 봐요.”
정교랑은 대꾸하지 않고 고개만 살짝 들었다. 작열하는 햇빛 아래 늦여름 매미가 이따금 울어댔다. 정교랑이 눈을 찡그리자 몸종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정교랑이 아래로 내려서도록 부축해 주었다.
“너울을 가져와. 난, 햇볕을 쬐면 안 돼. 불편해.”
몸종은 아, 하더니 불안에 떨며 말했다.
“소인이 몰랐네요. 소인의 죄를 용서하세요.”
“괜찮아. 내가 말해 주면, 다음부턴 기억할 수 있잖아.”
“네, 소인이 기억할게요.”
몸종은 기쁘게 대답하고 얼른 들어가 너울을 가져와 정교랑에게 조심스레 씌워 준 다음 정교랑을 부축해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아이고, 깜짝 놀랐네.”
“대낮에 밖에는 왜 나와? 괜히 여러 사람 마음 졸이게.”
두 몸종은 그제야 부엌에서 고개를 내밀며 가슴을 쓸어내리고 여전히 겁에 질린 얼굴로 말했다. 정교랑은 멀리 나가지 않고 자신의 마당만 한 바퀴 빙 돈 다음 문 앞에 멈춰 섰다.
“들어가시겠어요?”
옆에서 조심스레 부축하던 몸종은 정교랑이 더 이상 걷지 않자 얼른 물었다.
“응.”
정교랑이 대답했다. 몸종은 무어라 더 묻지 못하고 정교랑을 부축해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에 있던 몸종들은 이번에도 얼른 몸을 숨겼다.
그 후로 정교랑은 매일 산책을 나왔는데 멀리 가지는 않고 집 주변만 빙 돌았다. 날이 지나자 몸종들도 익숙해져서 매번 놀라 피하지는 않았다. 정교랑은 한 바퀴에서 두 바퀴로, 두 바퀴에서 세 바퀴로 차츰 걸음을 늘려갔다. 보름쯤 지나자 무더위가 물러가고 초가을이 왔다.
“아씨, 피곤하시죠? 쉬시겠어요?”
몸종이 물었다. 이제는 정교랑을 부축하지 않고 조심스레 뒤를 따르기만 하면 됐다. 벌써 세 바퀴를 돈 정교랑은 문 앞에 서더니 너울의 가리개를 들어 얼굴을 드러냈다. 희고 고운 피부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안 힘들어, 더 걸을래.”
정교랑의 말에 몸종은 네 하고 뒤를 따랐다. 정교랑은 네 바퀴를 돈 다음에야 걸음을 멈추고 피곤한 듯 몸종에게 몸을 기댔다.
“아씨, 뭘 이렇게까지 하세요. 피곤하면 쉬시죠.”
몸종이 말했다. 한동안 함께 지내다 보니 몸종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 조용한 아씨를 좋아하게 됐다. 변덕이 죽을 끓는 다른 아씨들의 시중을 드는 것에 비하면 소문은 좀 무섭게 났지만 이 아씨를 모시는 게 훨씬 쉬웠다. 아씨의 말을 따르기만 하면 되니까.
정교랑은 멈춰 서서 뒤를 힐끔 돌아봤다.
“안 힘들어.”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고 있다. 느리고 더디지만 보답은 있기 마련이다. 계속 이렇게 단련해 나가다 보면 곧 자유로운 활동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정도로는 안 힘들지. 몸종은 잠시 기다리다가 정교랑이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이것으로 대답이 끝났다는 것을 알아채고 얼른 정교랑을 부축해 안으로 들어갔다.
미리 준비해 둔 뜨거운 물로 정교랑의 목욕을 돕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혀 주었다. 몸종이 정교랑의 머리를 말려 주는 동안 정교랑은 계속해서 책을 들여다봤다.
정교랑의 뒤에 서 있던 몸종은 정교랑이 예전 그 줄의 글자 위에 왼손을 올리고 조금씩 이동하는 한편 팔걸이 책상 위에 올려 둔 오른손으로 천천히 따라 쓰는 것을 지켜봤다. 시간이 지나자 정교랑은 두 손을 바꾸어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이게 책을 보는 건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네.
방 안은 조용했다. 정교랑은 조용히 앉아 글자를 어루만지며 따라 쓰는 동작을 했다. 몸종은 문득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아씨는 말씀을 잘 안 하셔. 먹고 마시고 옷을 갈아입는 듯 꼭 필요한 일 외에는 말을 아끼시지.
몸종은 반근을 떠올렸다. 반근이 있었을 땐 아씨와 반근이 수시로 마당에 나와 조잘조잘 떠드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엔 반근이 말했지만 말이다. 반근이 떠난 후 아씨는 훨씬 조용해졌다. 조용히 산책을 나와 마당을 돌고 조용히 책을 보며 손가락으로 따라 쓰는 게 전부였다.
반근이 떠난 걸 알기는 아는 건가? 혹시 슬퍼하는 건가?
“아씨, 아직 반근을 기억하세요?”
불쑥 질문을 던진 몸종은 저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 겁을 먹었다. 듣자니 바보는 사람을 잘 기억 못 한다던데. 정교랑의 손이 멈췄다.
“기억해.”
정교랑은 뚜렷하진 않지만 알아볼 수는 있을 정도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자 얼굴에 한층 생기가 돌았다. 그 모습을 보며 몸종은 멍해졌다. 웃는 건가? 옅은 웃음으로도 이렇게 아름답게 웃을 수 있구나. 그런데 왜 웃는 거지?
“아씨, 저기, 그러니까 반근은……·.”
정신을 차린 몸종이 우물쭈물 말을 더듬자 정교랑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 반근이라는 계집이 다른 사람을 따라 떠나 버린 것을.
그 순간 정교랑은 자신이 기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그렇다면 예전에 기억할 수 없었던 건 병 때문에 기억력이 안 좋아서인가, 아니면 믿을 구석이 있기에 기억하기 귀찮았던 것인가. 순간 정교랑은 병이 나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정교랑은 병을 앓고 있는 게 아니었다. 머리는 물론이고 몸에도 병은 없었다. 그저 조화가 잘 안 이루어졌을 뿐이다. 그 점을 깨닫자 정교랑의 몸 회복 속도는 눈에 띄게 빨라졌다. 그건 정말 좋은 일이었다. 그러니 어찌 잊겠는가.
“아씨, 반근은 떠나기 전에 밖에서 아씨한테 머리를 조아려 절을 올렸어요.”
몸종은 아씨의 평온한 얼굴을 보며 말했다. 이걸 왜 말하고 있지? 아씨를 위로하려고? 반근이 말도 없이 아씨를 버리고 떠난 건 아니라는 사실을?
“응.”
정교랑이 대답했다. 기쁨이나 슬픔은 느껴지지 않는 짧은 대답이었다. 몸종은 문득 마음이 놓여 옆에 꿇어앉았다.
“아씨, 제 생각에는요.”
몸종은 무언가를 더 이야기하거나 반근이 전하는 말이라며 말을 지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정교랑은 몸종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하지만 난 슬프지 않아. 슬픈 건, 그 애지.”
“반근!”
누군가가 밖에서 불렀다. 회랑 아래에 앉아 새로 나온 꽃가지를 전지하던 몸종이 응 하고 대답하며 고개를 들었다.
“부탁했던 돼지 간이랑 양 간을 가져왔어.”
어린 몸종 하나가 고개를 빼꼼 들이밀고 들어와서는 한 손으로 코를 막고 다른 한 손으로 기름종이에 싼 꾸러미를 건넸다. 몸종은 웃으며 일어나 꾸러미를 받았다.
“세상에, 언니야. 이런 걸 뭐 하려고? 무서워라.”
어린 몸종은 혐오스러운 듯 말했다.
“아씨께서 드실 거야.”
몸종의 대답에 그 어린 몸종은 입을 삐죽거렸다.
“안채 부엌에서 보내오는 멀쩡한 음식은 안 먹고 이런 걸 먹겠다니, 진짜 바보네.”
문밖에 서 있던 나이 많은 여종은 그 대화를 듣고 순간 어리둥절해졌다. 이름은 물론이고 대화 내용도……·.
한 달 전의 이곳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다. 몸종들이 왔다가 쫓겨가고 또 왔다가 쫓겨간 일은 아예 일어난 적 없는 듯했다.
“넌 안 무서울지 몰라도 난 무서워. 나 갈게.”
어린 몸종이 손을 흔들고는 얼른 뛰어나갔다. 몸종은 기름종이 꾸러미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언니, 불 지펴 놨어.”
부엌에 있던 두 몸종이 말했다. 두 몸종 역시 고개를 빼고 손에 든 물건을 쳐다보며 혐오스럽다는 눈빛을 드러냈다.
“정말 이걸 먹으려고?”
“그럼 네가 아씨께 다른 거 드시겠냐고 물어볼래?”
몸종은 웃으며 말했다.
“내가 뭐 죽고 싶어 환장한 것도 아니고, 됐어.”
한 몸종이 웃으며 몸을 움츠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넌 이름까지 바꿨다지만 난 내 이름 바꾸고 싶지 않거든.”
다른 몸종도 부엌으로 들어갔다.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어. 내가 나이기만 하면 되지.”
몸종은 웃으며 부엌으로 따라 들어갔다.
밀가루 반죽은 잘 발효됐다. 정교하게 만든 작은 공예 화로에 불을 올려 달구고 푹 삶은 간은 잘게 빻았다. 부엌에 앉은 세 몸종 중 둘은 소를 넣어 만두를 만들고 하나는 화로에 넣어 구웠다.
“희한하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지.”
“안채 부엌에서 보낸 호병(胡餅: 밀가루 안에 팥을 비롯한 각종 소를 넣어 둥근 달 모양으로 구워낸 빵)은 안 먹고 굳이 이걸 먹겠다니. 이런 건 원래 개 먹이로 주는 거잖아.”
투덜거리던 두 몸종이 돌연 말을 멈췄다. 맛있는 냄새가 부엌 가득 퍼졌다.
“앗, 뜨거워라. 뜨거워.”
몸종은 다 구워진 월병을 대나무 쟁반 위에 올려놓고 손가락을 후후 불었다.
“냄새 좋다.”
두 몸종은 저도 모르게 다가와 노르스름하게 구워진 작은 월병 두 개를 바라봤다. 한 몸종이 피식 웃으며 손을 뻗어 그중 하나를 반으로 가르며 물었다.
“간 좀 볼래?”
두 몸종이 안에 든 소를 보며 머뭇거리는 동안 그 몸종은 벌써 입에 넣고 먹기 시작했다.
“오!”
몸종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다.”
몸종은 오물거리며 말하더니 얼른 또 한입 베어 먹고 뜨거운지 후후 입김을 불었다.
“나도 먹어 볼래. 내가 소를 만들었으니까 맛은 봐야지.”
한 몸종이 못 참겠는지 기름기 묻은 손을 앞치마에 쓱쓱 닦고는 남은 반 개를 한입에 넣었다.
정교랑의 마당 밖에는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람이 지나가는 일이 드물었다. 이때 부득이하게 마당 밖을 지나던 몸종 두 명은 길을 재촉하다가 돌연 발걸음을 멈추었다.
“어머, 맛있는 냄새.”
“그러게.”
한 몸종이 코를 킁킁거리며 말하자 다른 몸종도 코를 킁킁거리며 마당 쪽을 쳐다봤다. 두 몸종의 눈이 마주쳤다.
“또 바보 줄 음식을 만드나 보네. 진짜 다른 아씨들보다 더 까탈스럽다니까.”
두 몸종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뭘 먹여야 입에 맞을지도 모르고.”
몸종은 찬합을 들고 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고 탁자에 음식을 차린 다음 창 안으로 옮겼다.
“아씨, 드세요.”
몸종은 공손하게 말하며 탁자를 밀어주었다. 창가 앞 팔걸이 책상에 기대앉아 두 눈을 감고 비스듬히 앉아 있던 소녀는 눈을 뜨고 구부렸던 다리를 내려 똑바로 앉았다.
“아씨, 입에 맞는지 드셔 보세요.”
몸종의 말에 정교랑은 손을 뻗어 작은 월병 하나를 집은 다음 월병을 쪼개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이미 맛을 본 몸종은 완성작에 대해 자신이 있는 터라 그다지 긴장하지 않았다.
“향이 너무 진해.”
정교랑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하나만 입에 넣고 손을 내려놓았다. 몸종은 아, 하고는 이해가 안 가는 듯 다시 물었다.
“저기, 향이 안 좋으세요?”
“안 좋아, 너무 흩어져 있어. 안에 머금어야지. 향은 맡는 게 아니라 먹는 거야.”
정교랑은 숟가락으로 죽을 천천히 떠먹으며 말했다. 그런 걸 다 따지다니, 아씨 입맛은 까다롭기도 하지. 대체 어떻게 자란 거야! 애지중지 키운 금지옥엽도 이 정도는 아닐 거 같은데? 몸종은 달리 도리가 없었다. 어쩌면 진짜 반근의 손재주가 뛰어났던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소인이 아둔했네요.”
몸종이 몸을 굽히며 말했다.
“괜찮아, 잔재주일 뿐이야. 내가 아둔하지 않게 해 줄게.”
정교랑은 몸종을 쳐다보지 않고 잠시 말없이 있더니 말을 이었다.
“네가 원한다면.”
몸종은 희색만면한 얼굴로 다시 몸을 굽히며 머리를 조아렸다.
“반근이 아씨의 마음에 감사드려요.”
정교랑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천천히 밥을 먹었고, 몸종은 조심스레 시중을 들며 반찬을 집어 주었다.
“아씨, 이건 이름이 뭐예요?”
몸종이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아무도 안 먹는 질 낮은 식재료도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되네요.”
정교랑은 초록색 대나무 쟁반 위에 있는 누르스름한 월병을 힐끔 바라봤다.
“태평.”
무심코 말을 내뱉은 정교랑은 곧 말을 멈추고 기억 속 그 이름이 점점 뚜렷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태평 만두.”
“태평이요?”
몸종은 소리 내어 말해 보고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정말 상서로운 이름이네요. 매일 이걸 먹으면 영원히 태평하겠어요.”
그럼 이걸 못 먹으면 태평하지 못한가?
“어머니!”
정칠랑이 소매를 걷은 채 들어오며 소리쳤다. 이부인은 정칠랑을 향해 얼른 쉿 하는 동작을 했다.
“네 동생 방금 잠들었어.”
옆에 있던 유모가 이부인의 품에서 아이를 받아 몸을 굽혀 물러났다. 일곱째 아씨가 있는 한 아이가 여기서 편히 자기는 힘들 것이 분명했다.
“어머니, 백모님의 편애가 너무 심해요!”
정칠랑은 모친의 곁에 꿇어앉아 모친의 팔을 잡고 흔들며 말했다.
“또 왜? 백모가 누굴 편애했는데?”
이부인이 물었다. 물론 자기네 식구를 편애했겠지. 이부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 배 앓아 낳은 자식도 더 마음이 가는 자식이 있는 법인데, 하물며 두 집안은 그저 형제 사이 아닌가.
전엔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 거야, 맏형수는 어머니와 같다고 여겼다니. 어머니긴 어머니지, 그저 친어머니가 아닐 뿐.
“그 바보요!”
정칠랑이 말했다.
“그 바보?”
이부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부채를 들어 살살 부채질을 했다.
“또 뭘 잘해 줬는데? 어차피 자기 돈도 아니면서.”
옆에 있던 측근 여종이 마른기침을 하며 주의를 주었다.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린애 앞에서는 말을 가려서 해야 하는 법이다.
“네 백모는 그 아이를 보살펴 주는 거야. 그 아이는 아픈 사람이니 편애하는 게 당연하지.”
이부인이 둘러댔다.
“그 애는 바보지, 넷째 오라버니처럼 병이 난 것도 아니잖아요. 매일 이것저것 맛있는 거 해 먹어 봤자 뭐 하냐고요! 아픈 사람은 맛있는 거 먹고 몸보신하면 병이 낫는다지만, 바보가 맛있는 거 먹고 몸보신한다고 정상이 되겠어요?”
정칠랑은 모친의 팔을 끌어안고 소리쳤다.
“어머니, 저도 해 주세요! 제가 우리 집에서 그 바보만도 못해요?”
정칠랑이 이리저리 흔들자 이부인은 어지러워졌다.
“그쪽은 부엌을 따로 쓰는 거야?”
이부인이 여종에게 물었다.
“그런가 봅니다. 하루 세 끼 외에 간식도 두 번씩 먹고요. 부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자주 나가서 과일이며 고기를 사 오는데, 우리가 평소에 쓰는 걸 먹지 않고 전부 따로 산대요.”
“어머니, 저도 부엌을 따로 쓸래요. 안채 부엌에서 만드는 거 먹기 싫어요.”
정칠랑이 얼른 말했다. 공용의 돈을 쓰는 거라면 집안의 다른 아이들은 왜 그렇게 안 하지? 공용의 돈을 쓰는 게 아니라면 선부인의 혼수겠지. 혼수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한번 세세하게 따져 볼까? 이부인은 부채를 쥔 채 잠시 침묵했다.
“그래, 그 애가 먹는다면 너도 먹어야지. 뭐가 먹고 싶은지 부엌에 가서 얘기해.”
이부인은 딸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또 월말이 다가왔다. 대부인의 거처 분위기는 전보다 긴장감이 돌았다. 탁! 소리가 나자 안에 꿇어앉은 집사 부인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내가 이 집을 관리하는 게 아니란 말이더냐?”
대부인이 눈썹을 치켜뜨며 호통을 쳤다. 바닥에는 장부들이 이리저리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대부인, 이부인께서 직접 분부하셨어요. 그래서……·.”
몇몇 집사 부인들이 몸을 굽힌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집사 부인들은 뭐라 말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까딱 잘못 말했다가는 집안의 불화를 야기하는 빌미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또 청랑이야? 청랑이 왜 점점 철없이 굴지? 따지고 싶진 않지만 또 못 본 척 넘길 순 없는 노릇이었다. 지난번엔 멋대로 옷을 지어 입고 장신구를 사더니 이번엔 멋대로 산해진미를 추가해? 자기 돈으로 샀다면 상관없지만 이건 엄연히 공금이 아니던가. 다음엔 또 뭘 살지 모를 일이다.
“이부인을 모셔와라. 너희는 모두 물러가고.”
대부인이 말했다. 집사 부인들은 얼른 네 하고 대답한 후 조심스레 장부를 챙겨 줄줄이 빠져나갔다. 밖으로 나온 집사 부인들은 서로 눈길을 주고받으며 혀를 내둘렀다. 멀리 피하는 게 상책이야.
이부인은 대부인이 불렀다는 말에 웃음을 지었다.
“형수님이 당신을 왜 찾지?”
팔걸이 책상에 기대앉아 책을 보고 있던 이노야가 심드렁하게 물었다.
“며칠 못 봤다고 내가 보고 싶은가 보죠.”
이부인이 웃으며 일어서자 이노야는 허허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어서 가서 정다운 담소를 나누시구려.”
책을 보던 이노야는 이부인이 나가는 모습을 보며 하품을 했다. 그때 밖에서 여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늘은 높고 푸르고 공기마저 상쾌한 가을날에 듣는 웃음소리는 더없이 유혹적이었다. 이노야가 책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오자 밖에서 들리던 웃음소리가 뚝 멈췄다. 마당에 있던 여종이 이노야를 미처 못 본 채 피식 웃으며 물었다.
“밖에 누구지?”
입구에 서 있던 여종이 입을 삐죽거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동원(東院)의 이낭(姨娘) 쪽 사람이야.”
“그 이낭은 참 안목도 좋아.”
먼저 그 여종이 웃으며 말했다. 두 여종은 서로 눈길을 주고받으며 소리 없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