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75)

반근이 찬합에 있는 것들을 꺼내놓았다.

“아씨, 음식 준비됐어요.”

반근이 신이 나서 말하자 정교랑이 힐끔 쳐다봤다.

“음식은 재료 수보다 정성이 더 중요하지.”

정교랑이 손을 뻗어 증편 하나를 가리켰다. 반근이 얼른 조금을 떼어내자 안에 든 대추가 드러났다.

“와, 도관에서 먹던 증편보다 훨씬 훌륭하네요.”

반근이 웃으며 말했다.

“맛없어.”

정교랑이 고개를 내저으며 작게 한입 먹고는 먹지 않았다.

아씨가 몸이 나아진 후로 많이 먹진 않아도 입맛이 몹시 까다로워진 탓에, 이동을 제외하고는 버는 돈 대부분을 먹는 데 썼다. 어떻게 그렇게 정교한 음식들을 떠올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예를 들어 아씨가 먹고 싶어 하는 냉면은 청괴엽즙과 밀가루로 면을 만들고 돼지고기에 기름을 넣고 볶아 만들어야 했는데, 들어가는 재료는 많지 않아도 음식 한 냄비 만들 정성을 국수 한 그릇에 쏟아야 했다.

다행히 아씨는 식사량이 많지 않아 어떤 날은 하루에 간식 몇 점이면 충분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아직 집에도 못 왔을 것이다.

정교랑이 찬합을 가리키며 지시했다.

“이걸 데워 와. 이 증편을 잘라 탕에 넣고 끓이면 돼.”

이런 일이 이미 익숙해진 반근은 알았다고 대답한 후 신이 나서 음식을 들고 나갔다.


“너 엎드려 봐, 얼른 엎드려 보라고.”

정육랑이 이리저리 빙글빙글 돌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어린 몸종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린 몸종이 쭈뼛쭈뼛 불안해하며 말했다.

“아씨, 우리 그만 돌아가요. 부인께서 찾으실 거예요.”

정육랑이 몸종에게 쉿 동작을 했다.

“조용히 해! 바보 놀라게 하지 마!”

정육랑이 목소리를 낮춰 소리쳤다. 어린 몸종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아씨, 보지 마세요. 바보는 사람을 때린다니까요.”

몸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열 살 남짓한 아이에게 바보는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여긴 내 집인데 겁낼 게 뭐 있어. 얼른 엎드리라니까. 내가 올라가서 바보가 어떻게 생겼는지 볼래.”

정육랑이 손짓을 하며 몸종에게 빨리 엎드리라고 재촉했다. 어린 몸종은 하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엎드렸다. 정육랑이 벽에 기대 몸종의 등을 밟고 올라서서 창턱을 붙잡고 창 안을 바라봤다.

발걸음 소리에 놀란 정육랑이 움찔하며 쪼그려 앉자, 어린 몸종은 흔들흔들하다 하마터면 정육랑을 떨어뜨릴 뻔했다.

“아씨, 전병 다 됐어요. 이것부터 드세요, 증편죽 끓이고 있어요.”

정육랑이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자 검푸른 치마를 입은 여자아이가 뛰어오는 모습이 보이면서 튀김 냄새가 훅 끼쳤다.

“뭔데 이렇게 맛있는 냄새가 나지?”

정육랑은 입맛을 다시며 창을 붙잡고 까치발을 섰다. 왼쪽의 대나무 문발 뒤에 사람 두 명이 마주앉은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아씨, 탕 떠 올게요.”

“아씨, 입맛에 맞으세요?”

방 안에서 어린 몸종이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내는 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 외에 대답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 바보는 말을 못하나 보다.”

정육랑이 고개를 돌리며 새로운 소식을 얻어 흥분이 되는 듯 몸종에게 속삭였다. 몸종은 겁이 나기도 하고 아프기도 해서 몸을 바들바들 떨며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아씨, 우리 얼른 가요.”

몸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움직이지 마, 아직 어떻게 생겼는지 못 봤단 말이야. 콧물은 얼마나 줄줄 흘리는지, 눈이랑 입이 비뚤게 달린 건 아닌지…….”

정육랑이 말하며 다시 고개를 돌리던 때였다. 커다란 두 눈이 정육랑을 쳐다보고 있었다.

정육랑은 으악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쓰러져 바닥을 뒹굴었다. 어린 몸종 역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놀라 함께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더니 정육랑이 쓰러진 쪽을 쳐다보며 놀라 연거푸 비명을 지른 다음 정육랑을 필사적으로 잡아끌며 도망쳤다.

정교랑이 허둥지둥 멀리 도망치는 두 사람을 쳐다봤다.

“아씨, 저게 누구죠?”

반근이 일어서며 놀라고 걱정되는 얼굴로 물었다. 정교랑은 굳은 표정이었다. 반근은 투덜거리다가 화로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연기에 아차 하고는 급히 뒤돌아 뛰어갔다.

“나도 누군지 모르겠어.”

정교랑이 그제야 대답했다. 말을 마친 정교랑도 조금 답답해 보였다. 머릿속으로는 벌써 이리저리 한참을 생각했는데, 입으로는 이제야 내뱉는 것이다.

이 답답한 입아, 다음 생엔 차라리 나무 입으로 태어나라. 속 터져 죽겠다.

머릿속에서 말 한마디가 번뜩 스치더니, 정교랑은 극심한 가슴 통증을 느꼈다. 뼛속을 가르고 나오는 통증인 듯 두 귀가 웅웅 울려 제대로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손을 뻗어 창턱을 붙잡아야겠다는 생각이 스치는데, 손을 뻗기엔 이미 늦은 때였다.

찬합을 들고 흐뭇하게 들어오던 반근의 귀에 꽈당 소리가 들렸을 때, 정교랑은 이미 바닥에 쓰러진 뒤였다. 찬합이 바닥에 떨어지며 나는 소리와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이어지면서 마침내 앞쪽 문가에 있던 여종들까지 주목하게 됐다.


대부인이 오고, 모셔왔던 의원은 방금 떠난 참이었다.

“별일 아니래요. 그냥 좀 놀란 거라 쉬시면 괜찮대요.”

여종이 말했다.

이부인은 얼굴이 누렇게 떴다. 겨우 하루 반나절 만에 눈가에 진 그늘을 가릴 수 없게 됐다.

“집에 멀쩡히 잘 있다가 갑자기 놀라다니요.”

이부인이 해명인 듯 질문인 듯 대부인에게 힘없이 물었다.

“자리가 낯설어 그렇겠지. 그런 애들은 머리가 꼭 태어난 지 몇 달 된 아기 같아. 아무것도 모르지.”

이부인이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형님 말씀이 맞아요.”

그러더니 또다시 눈썹을 치켜세우며 여종을 보고 말했다.

“동물 구경하듯 큰아씨를 구경하러 간 걸 내가 모를 줄 아느냐. 앞으로 또 그랬다가는 몽둥이찜질을 해서 팔아 버리겠다. 거리엔 구경거리가 널렸으니 실컷 볼 수 있을 게야.”

여종들은 몸을 움츠리고 두 손을 공손히 한 채 말없이 있었다. 물론 자신들이 그 바보를 구경하러 가거나 이러쿵저러쿵 수다를 떨어 벌어진 일이 아님을 알았지만 말이다.

여종들이 곧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며 그런 게 아니라고 떠들어대자, 이부인은 이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자네가 고생이 많네.”

대부인이 이부인을 보며 말하자 이부인은 왈칵 울음이 쏟아졌다. 자신도 자신이 왜 우는지 몰랐지만 어쨌든 울고 싶었다. 답답하고 억울한 마음뿐이었다.

“칠랑은 이제 법도를 배워야 하고 희는 아직 어린데, 이노야는 부임을 준비해야 하잖나. 우리 집은 딸 셋을 벌써 출가시켰고 육랑 하나 남았지. 집 안팎의 대소사는 자네 아주버님이 주관하셔서 난 한시름 놓았어. 그 모자란 아이는 일단 내가 맡음세.”

대부인이 생각 끝에 말하자 이부인이 일어나 예를 표하고 울먹이며 말했다.

“형님한테 폐를 끼칠 수야 없죠. 어쨌든 제가 할 일인데요.”

“됐네. 한 식구끼리 네 일 내 일이 어디 있어.”

대부인이 손을 뻗어 이부인의 손을 토닥여 주었다.

“어쨌든 한 지붕 아래 살잖아. 행랑어멈한테 맡기면 잘할 거야. 다른 건 염려 말고 자네는 마음 잘 추슬러서 애들 훈육에 힘쓰도록 해. 그래야 이노야가 안심하고 부임지로 가시지. 우리 정씨 집안은 이노야 벼슬에 의지해 사는걸.”

이젠 더 이상 사양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이부인은 진심을 담아 감사 인사를 올렸다. 마음속 근심이 어느 정도 해소된 것 같았다.

밖에서는 하녀들이 또다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빨리 말해 봐, 어떻게 생겼디?”

여종들은 운 좋게 비명소리를 듣고 정교랑의 시중을 들러 갔던 여종 주위를 에워싸고 궁금증을 풀고자 했다.

“생김새는 돌아가신 선부인을 빼다 박았더라고.”

한 여종이 쯧쯧거리면서도 경탄을 담아 이야기했다. 나이 든 여종 몇 명은 주씨 부인의 고운 외모를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근데 걸음도 제대로 못 걸으니 안타깝지 뭐야. 가만히 서 있다 말고 갑자기 쓰러지다니.”

그러더니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멍청하더라고. 아무리 봐도 넋이 나간 거 같아서 정신이 들었는데도 들었는지 모를 정도였어. 가져갔던 밥도 안 먹었던데, 혼자 밥 먹을 줄은 아나 모르겠네.”

이쪽에서 여종들이 탄식하는 동안 저쪽에서는 집안 낭자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눈은 이렇게 크고…….”

정육랑이 말하며 얼굴에 손을 대고 커다랗게 그렸다. 앉아 있던 자매들이 놀라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근데 눈동자가 없어!”

정육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덧붙이고는 눈에 힘을 주어 크게 떴다. 여자아이들은 으악 비명을 내지르며 자리에서 서로 손을 붙잡았다.

“너무 무섭다, 너무 무서워.”

“육랑, 다신 보러 가지 마. 바보는 사람도 막 때린대!”

정육랑이 약간 우쭐해하며 손을 양 허리에 대고 대답했다.

“난 겁 안 나. 난 오라버니가 있잖아. 날 때렸다간 오라버니한테 때리라고 시킬 거야.”

이방의 아들은 아직 젖먹이인 희 하나뿐이었지만, 대방은 아들이 셋이나 있었다. 여자아이에게 오라비의 보호는 부러운 일이었다. 친오라버니와 사촌 오라버니 사이엔 엄연히 차이가 있었다.

또각또각 나막신 소리가 울렸다. 정칠랑은 나막신을 벗지도 않고 그대로 방 안으로 들어오면서 정육랑이 가장 아끼는 화조어문석에 자국을 남겼다.

“육랑, 그 바보가 이젠 네 언니야.”

정칠랑이 작은 둥글부채를 흔들며 두 어깨에 얇은 비단을 두른 채 쩌렁쩌렁 울리는 큰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아씨는 모자라지 않아요.”

반근이 고개를 조아리고 급히 말했다. 앞에 있던 대부인이 손을 들어 반근의 말을 제지했다.

“난 칠랑 안 할래요, 칠랑 안 할 거예요.”

이쪽에서 정육랑이 앉으면서 앞쪽에 있는 쌍육 놀이판을 밀치는 바람에 촤락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이어 정육랑의 고함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소란피우지 마라.”

대부인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래도 모친이 무섭기는 한지 정육랑은 입을 삐쭉거리며 더는 소리를 지르지 못했다. 방 안이 좀 조용해지자 대부인은 한숨을 돌리고 옆에 있는 여종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씨가 올해 몇 살이지?”

“14살은 되셨어요.”

반근이 대답했다. 대부인이 불쾌한 기색으로 반근을 힐끔 보자, 여종도 불만의 눈길로 반근을 훑었다.

성격도 급해라, 가정교육을 제대로 못 받아서.

“부인께 아뢰옵니다. 단오를 지나면 14살이세요.”

여종이 말했다.

“넷째 아씨와 다섯째 아씨보다 반년 빠르시죠.”

대부인이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그래, 그때 앞뒤로 연이어 애가 들어섰지.”

당시 정씨 집안 이방의 주씨가 회임했다는 소식에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주씨는 남을 후히 대접하며 아이를 위해 복을 쌓는 한편 첩실들의 피임약까지 중단시켰다. 그래서 주씨가 임신하고 반년 후 이방의 두 첩실 역시 아이를 갖게 됐다.

그때 온 집안이 기뻐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노태야께선 책까지 들춰가며 이름을 지었는데, 뜻밖에도…….

대부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뻐했던 것만큼 낙담도 컸다. 다들 이방의 장녀를 정씨 가문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기에 나이에 따라 순서를 매길 때에도 애써 잊었던 것이다.

“그 애 이름이…….”

대부인이 한참을 생각하다가 물었다.

“교랑이에요, 교랑. 우리 아씨는 교랑이에요. 외가의 노마님께서 지어 주셨죠.”

반근이 기뻐하며 얼른 대답했다.

교랑이라.

대부인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럼 그대로 교랑이라고 부르도록 하자. 사돈 노부인의 성의도 있으니 말이다.”

대부인의 말에 정육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잘됐다, 이름을 바꾸지 않아도 돼.

“대부인, 순서로 따지면 우리 아씨께서 넷째가 되시는데, 그럼 평상시에 호칭할 땐…….”

반근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정씨 집안의 아이인데 그 순서를 따르지 않으면 정씨 집안의 사람이 아닌 것 같고 듣기에도 거슬렸다.

“교랑이라고 하라면 교랑이라고 할 것이지, 망할 것이 왜 말을 못 알아들어?”

정육랑이 소리쳤다. 반근은 자기 아씨보다 약간 어린 듯한 아씨가 대부인 앞에서 방자하게 구는 걸 보며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 집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씨한테 누가 되는 일을 할 순 없었다. 반근은 얼른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잘못을 빌었다.

“바보한테 이름은 무슨!”

정육랑이 비웃으며 호쾌하게 웃었다. 반근은 몸을 엎드린 채 주저하다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 아씨는 다 나으셨어요. 이제 모자란 분 아니에요.”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정말이에요, 대부인. 우리 아씨는 정말 나으셨어요.”

반근이 얼른 말했다.

“말도 할 줄 모르는 바보가 낫길 뭘 나아!”

정육랑은 콧방귀를 뀌고 작은 부채로 부채질을 하며 말했다.

“할 줄 아세요. 할 줄 아신다고요. 아씨도 말할 줄 아세요.”

반근이 얼른 대부인을 보며 말했다.

“대부인, 기억하시죠? 그때 대문 앞에서 우리 아씨가 아버지를 부르셨잖아요.”

대부인은 퍼뜩 기억이 떠올랐다. 대문의 등롱 아래에서 그 여자아이는 가리개를 들어 올려 예를 표하고 아버지를 불렀다. 행동이 뻣뻣하고 목소리도 딱딱해서 줄을 연결한 인형 같았지만 말이다.

“네가 잘 가르쳤더구나. 앞으로도 네 아씨를 잘 가르치도록 해라.”

대부인이 담담히 말하며 반근을 힐끔 봤다.

“넌 주씨 집안 출신이냐?”

반근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가로저었다.

“주씨 집안 노마님께서 소인을 사신 건 맞아요. 하지만 바로 아씨께 주셨으니 주씨 집안 사람이라고 할 순 없죠.”

그렇다고 우리 정씨 집안의 사람도 아닌데. 대부인은 길게 말하기 귀찮은 듯 나이 많은 여종을 쳐다봤다.

“그 집에서 지내게 하고 나이 많은 여종이랑 물청소할 몸종을 보내 줘라. 부엌일할 몸종도 보내고.”

여종이 알았다고 대답했다.

“넌 물러가라. 가서…… 교랑의 시중을 잘 들고.”

대부인이 반근을 보며 말하자, 반근이 네 하고 대답하며 말을 덧붙였다.

“우리 아씨는 이제 모자라지 않으세요. 부인과 노야들께서도 한번 만나 보세요.”

만나 보기도 전부터 이렇게 골치가 아픈데…….

대부인은 응 하고는 잠시 있다가 곧 냉담하게 말했다.

“그 애는 몸이 안 좋으니 안 보는 게 좋겠다. 푹 쉬라고 해라.”

반근은 무언가 더 말하려고 했지만 여종이 짜증난다는 듯 반근을 노려보고는 먼저 일어섰다.

“가자.”

여종이 반근에게 일어서라고 재촉했다. 반근은 하는 수 없이 일어나 물러났다.

“앞으로 주의해라. 다들 그 건물엔 절대 가지 마. 걸리는 날엔 도관으로 보내 버릴 줄 알아!”

대부인의 말이 방 안에서 들려오자 반근이 씩씩거렸다. 집에 돌아왔는데 아버지, 어머니, 큰아버지, 큰어머니도 정식으로 못 만나고, 그것도 모자라 자매들마저 접근 금지라니. 차라리 집 밖으로 격리를 시키시지.

“우리 아씨는 정말 모자란 분 아니에요.”

반근을 데리고 나온 여종은 말하기도 귀찮은 듯 눈을 들어 반근을 힐끔 쳐다봤다.

누굴 바보 취급하는 거야.

반근이 방으로 돌아오자 교랑은 창가 앞에 앉아 밖을 보고 있었다. 생각에 잠긴 것 같기도 하고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씨?”

반근이 조용히 불렀다.

어제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천만다행으로 아씨는 빨리 깨어났고, 장애를 가진 상태로 돌아가지도 않았다. 다만 말수가 더 적어졌을 뿐이다.

“차.”

교랑이 말했다. 반근은 기뻐하며 네 하고 대답하고는 다른 한쪽에 있는 낮은 탁자 앞에 무릎을 꿇고 차를 우려서 가져왔다.

교랑의 손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아 반근이 숟가락을 들고 떠먹여 주었다. 교랑은 한입 먹고 나더니 인상을 썼다.

“맛없어, 차가 아니야.”

교랑은 입을 다물고 먹으려 하지 않았다.

“아씨, 차는 다 이래요.”

반근이 말했다. 아씨의 입맛은 점점 까다로워졌다.

“아니야.”

교량이 단순명료하면서도 고집 있는 말투로 말했다. 반근은 어쩔 수 없었다.

그동안 교량은 보양에 힘쓰기 위해 자신의 약을 직접 지으면서, 차를 마시는 대신 끓인 물이나 황주만 마셨다. 이젠 약을 안 먹어도 되는데, 그래도 계속 끓인 물이나 술만 마셔야 하나?

“아씨, 정말이에요. 드시다 보면 익숙해지실 거예요.”

반근이 타일렀다. 예전엔 먹고 싶어도 못 먹었던 좋은 차였다.

교랑은 먹고 마시는 일에 조금도 타협이 없었다. 반근은 몇 마디 권하다가 포기하고 반쯤 남은 차를 바라보다가,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에 따라 한입에 털어 넣었다.

정말 궁극의 맛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교랑은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며 단정히 앉아 있었다. 반근은 끓인 물 한 잔을 따라 올리면서 교랑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봤다.

창밖에는 나무를 휘감고 올라가는 꽃 넝쿨과 겹겹이 포개진 비취석이 있었다. 약간의 간격을 두고 연못도 반쯤 보였다. 넝쿨이 가리지만 않았어도 수려한 절경이었을 것이다. 물론 아무리 절경이 뛰어나다고 한들 정교랑과 반근을 위해 남겨 두진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아씨, 마음이 괴로우세요?”

반근은 요 며칠의 일을 떠올리고는 의기소침하게 물었다. 예전에 바보였을 땐 남들이 미워하고 싫어해도 지각을 못 했지만, 지금은 바보가 아니라 볼 것 다 보고 들을 것 다 들으니 얼마나 마음이 불편할까.

“괴로워.”

교랑이 이번엔 빠르게 대답했다. 괴롭다는 말에 반근은 또다시 긴장했다.

“아씨, 괴로워하지 마세요. 이제 막 돌아왔으니 다들 낯설어서 그래요. 익숙해지면 괜찮겠죠. 아씨는 정씨 집안 딸이고 다들 아씨의 가족이잖아요.”

반근이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위로하는데도 교랑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그저 창밖을 보며 괴로움을 느낄 뿐이었다. 슬프고 괴로운 마음이 어제부터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더 견디기 힘든 건 왜 괴로운지 모르겠다는 사실이었다.

-간식-

정교랑이 돌아오면서 벌어진 성가신 일들이 일단락되었다. 이노야는 과거 방탕하게 지내던 시절 가까이했던 여인들로 벌어질 수 있는 문제들을 며칠간 공을 들인 끝에 원만히 해결했고, 이부인은 이 까다로운 ‘딸’ 문제에 대해 잠시 손을 떼게 되었다.

정육랑과 정칠랑 역시 이름을 바꾸는 일로 고민하지 않아도 됐다. 그 바보는 갇힌 신세니 겁낼 일도 놀랄 일도 없다.

대부인은 이방 내외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일을 걱정하지 않게 됐고, 가정이 화목하니 더 이상 딸아이의 울음소리를 듣지 않아도 됐다.

지난날로 돌아간 것 같았다. 조용하고 평온하던 일상으로.

반근과 정교랑도 잘 지냈다. 이리저리 떠돌며 전전긍긍하는 삶을 살지 않아도 되고, 먹고 입는 것도 풍족했다. 게다가 자신들만 쓰는 작은 부엌까지 생겼으니 아씨의 까다로운 식성도 근심할 필요가 없었다.

“아씨, 아씨. 이럼 돼요?”

반근이 외치는 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정교랑은 팔걸이 책상에 기대 눈을 감고 있어 자는 건지 깨어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반근은 어느새 문 앞으로 와서 소리치고 있었다. 손에 밀가루 반죽을 들고 있는데 누르스름한 게 기름기로 번들거렸다. 정교랑이 눈을 뜨고 쳐다봤다.

“벌꿀을 한 숟가락 더 넣고 꾹꾹 눌러 뭉치면 돼.”

반근은 신이 나서 네 하고 대답했다.

“아, 맞다.”

반근이 뛰어가려다 말고 다시 몸을 돌리며 물었다.

“아씨, 젓가락으로 펴 놓은 다음엔…….”

정교랑이 팔걸이 책상에서 몸을 일으켜 왼손과 오른손의 손가락 두 개를 뻗으며 허공에 대고 몇 가지 동작을 해 보였다. 느린 동작이었지만 반근은 꼼꼼하게 봤다.

“알겠어요.”

반근은 뒤돌아 얼른 부엌으로 뛰어갔다. 정교랑이 입을 약간 오므리며 웃음을 짓고, 계속해서 팔걸이 책상에 기댔다.

“아씨, 이건 뭐라고 불러요? 진짜 예쁘네요. 이걸 정말 제가 만들었다니.”

반근이 기뻐하며 놀라워했다. 반근은 날실 같은 황금색 튀김을 부채꼴 모양으로 만들어 낮은 탁자 위에 펼쳐 놓고는 신이 나서 감상했다.

정교랑이 손을 뻗어 하나를 집더니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달콤하고 바삭바삭하여 입에 살살 녹았다.

“난, 모르겠어.”

정교랑이 천천히 말했다.

“이런 조리법을 생각해 내다니 아씨는 정말 대단하세요.”

반근도 하나를 집어 먹으며 말했다. 정교랑이 잠시 침묵했다. 이건 생각해 낸 게 아니라 기억 속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잔재주 가지고 뭘.”

정교랑이 몇 입 먹고는 더 이상 먹지 않자 반근이 물을 따라 건네며 물었다.

“그런데, 아씨. 정말 차는 안 드세요?”

“그런 차는 안 먹어.”

정교랑이 물을 들고 천천히 마시며 말했다. 반근이 혀를 내두르고 도리가 없다는 듯 물었다.

“그럼 아씨는 어떤 차를 드세요?”

천천히 물을 마시고 난 정교랑은 물잔을 내려놓았다. 정교랑의 기억은 회복되지 않았다. 기억이 스스로 반응하지 않는 한 정교랑이 무엇인지 생각해 내려고 해 봤자 얻을 수 있는 건 없었다.

예를 들어 밀가루 음식을 보면 머릿속에서 그 조리법이 떠오르는 때도 있지만, 아무 반응이 없는 때도 있었다. 또 예를 들자면 차는 아무리 마시려 해도 입에 안 맞았다. 머릿속에서 먹기 싫다는 강한 거부 반응이 있을 뿐, 어떤 차를 마시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반응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그녀인 듯했지만 스스로 통제할 수 없었다.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모르겠어.”

정교랑이 말했다. 반근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었는데, 반근은 이미 낮은 탁자를 옮기고 있었다. 반근에게는 항상 반 박자 느린 아씨의 답변이 익숙했다.

“아씨, 낮잠 주무실 시간이에요.”

정교랑은 반근의 말에 응 하고는 정교랑의 손을 붙잡고 일어서서 대나무 문발을 넘어 침상으로 갔다. 방 안은 곧 조용해졌다.

밖에서 여종 하나가 고개를 들이밀고 안을 쳐다봤다. 대나무 문발 너머로 침상 위에는 여인이, 침상 아래에는 그 몸종이 곤히 잠든 모습이 보였다. 다시 가운데 쪽을 보니 탁자 위에 고소한 냄새가 나는 간식이 놓여 있었다. 가느다란 것이 겹겹으로 얽혀 있는데 어떻게 만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여종은 저도 모르게 눈빛을 반짝이고는 까치발로 살금살금 들어갔다. 손을 뻗어 작은 간식 하나를 집어 입에 넣자 감탄이 절로 나오며 정신이 확 들었다.

방 안에 코 고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며 여름 바람이 불어왔다.

“역시 바보는 바보네. 그저 먹고 자는 것만 알아.”

여종은 소리 죽여 중얼거리며 입을 삐죽거렸다.

“괜히 먹을 것만 축내지.”

여종은 안을 몇 번 힐끔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간식을 쟁반째 들고 밖으로 나갔다. 이쪽 건물에서 일하는 사람은 두 사람뿐이다. 하나는 자기 자신이고, 다른 하나는 허드렛일을 하는 어린 몸종이다. 어린 몸종은 날마다 놀러 나가기 바빠 이 시간엔 그림자도 안 비춘다.

여종은 음식을 들고 이리저리 좌우를 살피며 문을 나섰다. 해가 중천에 떠 있을 시각이라 연못에 있는 연꽃도 축 늘어져 있고, 숲에서 들리는 매미 울음소리에도 힘이 없었다. 낮잠을 잘 시간이라 마당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쟁반을 들고 총총걸음으로 밖으로 나간 여종은 마당을 지나 측문으로 빠져나와 좁은 골목을 걸어 자기 집으로 향했다.

“이봐.”

갑자기 정수리 위에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종은 순간 걸음을 멈추고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야.”

여자아이가 소리쳤다. 고개를 든 여종은 그제야 석가산(石假山. 뜰에 돌을 쌓아 올려서 만든 산) 위에 지은 작은 정자에 서 있는 세 여자아이를 발견했다.

“여섯째 아씨, 일곱째 아씨, 다섯째 아씨.”

여종이 얼른 몸을 굽히며 예를 표했다. 나이는 정오랑이 가장 많은데도 맨 마지막에 부른 것은 여종이 멍청해서가 아니라 적서의 구분 때문이었다.

“늙은이가 뭘 그리 수상쩍게 움직여?”

정칠랑이 말했다. 정육랑은 여종의 손에 들린 쟁반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정칠랑의 옷소매를 잡아끌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뭘 들고 있는 거야? 또 남의 거 훔쳐가는 거지!”

정육랑이 말했다. 정육랑은 이제 12살로 혼기가 찼다고 할 수 있는 나이였고, 어머니에게서 집안일을 배우기 시작하여 여종들의 손버릇이 나쁘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절도죄가 씌워지면 가볍게는 매질을 당한 후 쫓겨나고, 무겁게는 관아로 넘겨진다. 여종은 놀라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여섯째 아씨, 소인이 어찌 감히요. 이건 교랑 아씨께서 먹고 남아 버리시는 건데, 소인이 보기에 멀쩡한 음식을 버리는 것 같아 집에 있는 손자나 줄까 하고 챙긴 거예요. 훔쳐온 건 절대 아닙니다.”

여종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정칠랑은 그제야 그 노비가 정교랑의 처소에서 일하는 여종임을 알아챘다. 그 바보가 꼴 보기 싫다 보니 이 여종까지 덩달아 곱게 보이지 않았다.

“그 바보 거구나. 내버려 둬.”

정칠랑이 정육랑의 옷소매를 잡아끌며 말했다. 옆에 있던 정오랑이 입을 오므리며 웃더니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여간 여종들은 하나같이 약삭빠르다. 바보에게로 미루면 어차피 대질할 수도 없으니 자기한테 유리한 법이다.

정육랑은 바보의 사람이라는 말에 불쾌한 마음이 들어 그냥 넘어가려고 했지만 그 금빛 찬란한 간식에서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창밖에서 그 바보의 방 안을 쳐다볼 때 맡았던 맛있는 냄새가 갑자기 떠올랐다.

“이봐, 그거 이리 가져와 봐.”

정육랑이 쟁반을 가리키며 말하자 여종은 잽싸게 움직였다. 음식을 집으로 가져가겠다는 생각은 접은 지 오래고, 더 이상 추궁만 당하지 않아도 감지덕지였기에 곧바로 공손하게 바쳤다.

“이걸 뭐 하게?”

정칠랑이 코를 가리며 혐오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러다 바보한테 병 옮아.”

정오랑은 여종이 내미는 쟁반을 받아 웃으며 정육랑 앞으로 가져오더니 물었다.

“동생, 이거로 뭐 하고 놀게?”

“우리 이거 물고기한테 주러 가자.”

정육랑이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

“그러다가 물고기도 바보 돼!”

정칠랑이 소리쳤다.

“바보가 되면 더 좋지. 낚시하기 쉬워지잖아.”

정육랑이 웃으며 말하고는 치마를 손으로 걷고 연못 쪽으로 갔다. 정칠랑이 뾰로통 입을 내밀며 일부러 협박하듯 소리쳤다.

“그럼 나 언니랑 안 놀아.”

정육랑은 겁날 거 없다는 듯 정오랑에게 서두르라고 재촉했다. 정오랑이 웃으며 정칠랑을 잡아끌었다.

“바보의 음식을 먹어도 바보가 되진 않아. 어차피 걔 것도 아니잖아. 우리 집 것이지.”

정오랑이 웃으며 말하자 정칠랑은 그제야 응 하고 대꾸하고는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섰다. 여종은 기회를 틈타 후다닥 도망쳤다.

바삭바삭한 간식을 조금 떼어 물 위로 흩뿌리자 곧 연못 아래에 있던 비대한 물고기가 와서는 먹어치웠다.

“이게 뭐지? 평소에 못 보던 건데?”

정육랑은 물고기에게 간식을 던져 주면서 손에 묻은 냄새를 맡아 보았다.

“모르겠어, 나도 처음 봐.”

정오랑이 말했다.

“그 바보한테 주는 거니까 우리가 먹는 거랑 당연히 다르겠지.”

정칠랑은 몇 걸음 멀찍이 떨어진 채 코를 가리고 서 있었다. 정육랑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간식을 조금 떼어 자신의 입에 넣자 정칠랑은 놀라 비명을 질렀다.

“아.”

정육랑도 곧 소리를 질렀다.

정오랑으로서는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 바보는 부엌을 단독으로 쓰는데 숙수를 딸려 주지 않고 허드렛일 하는 늙은 여종 하나와 어린 몸종 하나만 붙여 줬다는 얘기를 들은 터였다. 나이 든 여종과 몸종이 무슨 요리를 하랴 싶지만 바보한테 맛있는 음식이 필요하겠는가. 먹고 배만 채우면 그만이지.

처음 보는 음식이고 이 집에서 자주 해 먹는 음식도 아닌 것으로 보아 아마 그 바보의 부엌에서 만든 것일 터였다. 맛이 있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그런데 웩웩거리며 토할 줄 알았던 정육랑이 예상 밖으로 또 하나를 집어 입에 넣는 게 아닌가.

“맛있다!”

정육랑이 음식을 입에 물고 말했다. 정칠랑과 정오랑은 대갓집 규수의 자태를 잃은 정육랑의 모습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봤다.

“육랑이 바보가 됐어!”

정칠랑이 소리치며 치마를 들고 뛰어갔다.

대부인의 귓가에 사흘 만에 딸아이의 울음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막내딸은 몇 년 더 데리고 있다가 시집보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빨리 보내는 게 나을 듯싶었다.

“어머니, 어머니. 이거 먹고 싶어요. 나도 이거 먹을래요.”

정육랑이 자리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모친의 팔을 흔들며 말했다. 앞에 놓인 작은 탁자에는 쟁반에 간식이 놓여 있었는데 끄트머리가 조금 부서져 있었다.

“육랑, 넌 이제 12살이야. 어디서 이렇게 식탐을 부려.”

대부인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어머니, 그런 말씀 마세요. 왜 편애를 하시냐고요. 바보한테만 맛있는 거 주고 저한텐 안 주셨잖아요.”

정육랑이 뾰로통 입을 내밀며 덧붙였다.

“걔한테 육랑을 시키고 절 칠랑으로 만들려고 그러시죠!”

대부인은 머리가 아팠다.

“뭔데 그렇게 맛있단 거야?”

대부인이 간식을 조금 떼어내 입에 넣더니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훌륭하구나.”

모친이 칭찬하는 걸 본 정육랑은 더욱 골을 냈다. 대부인은 시끄러워 못 견디겠는 듯 말했다.

“가서 누가 만들었는지 물어봐라.”

정교랑 처소의 여종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문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전전긍긍하게 됐다. 이런 허드렛일을 하는 나이 많은 여종에게는 방 안으로 들어갈 자격이 없었다. 어린 낭자들을 속일 순 있어도 주인마님까지 속일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끝장이구나, 곧 쫓겨나겠어. 이게 다 그 바보 때문이다. 괜히 음식 하나 잘못 먹어서 이게 웬 고생이야.

여종은 원망스럽기도 하고 겁이 나기도 해서 바닥에 바짝 부복해 있었다.

“이걸 네가 만들었느냐?”

대부인이 물었다. 여종은 두 번을 듣고서야 무슨 질문인지 알아들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반근 그 애가 만든 거예요.”

여종이 얼른 손을 내저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반근?

한참을 생각한 대부인은 누군지 생각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주씨 집안 노부인께서 그 바보의 시중을 들라고 붙여 준 아이면 정성 들여 고르고 고르셨겠지. 바보가 원하는 거라곤 그저 배불리 먹고 따스하게 입는 것뿐일 테니, 몸종의 음식 솜씨가 훌륭한 것도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었다.

“어머니, 그 아이를 갖고 싶어요.”

정육랑이 단정히 앉으며 말했다.


대부인이 이부인을 대신해 정교랑을 맡기로 했지만, 그래도 대부인은 이부인한테 직접 가서 의견을 구했다.

“형님, 제 쪽에 마음에 드는 아이가 있으면 얼마든 데려가셔도 돼요. 더구나 교랑은 형님이 맡고 계시니 더 말할 것도 없죠.”

이부인이 말했다. 권한 내에 있는 일이라고 해서 전부 도의에 들어맞는 건 아니다. 말 한마디 덧붙이는 건 힘 드는 일도 아니고, 이래야 괜히 틈 생길 일이 없다.

대부인이 시집온 후 수십 년 동안 터득한 경험이다.

“그래도 이노야의 여식이 데리고 있는 아이니 큰어미로서 말은 하는 게 좋지.”

대부인은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방 내외가 이런 일로 기분 나빠할 리는 절대 없다는 걸 대부인도 알고 있었다. 과유불급이라고 여기서 더 말을 보태면 오히려 억지스러워진다. 대부인은 화제를 돌렸다.

“그 아이를 불러서 요리 솜씨가 어떤지 좀 보려고.”

애초에 이부인은 일개 몸종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더구나 바보의 몸종이 아닌가. 그래도 손위 동서가 하는 말이니 동의했다.

“그 애가 한 밥 먹으면 바보가 될걸.”

정칠랑이 말했다. 모친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두 자매는 병풍 뒤에서 쌍육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 애가 바보인 건 아니잖아.”

정육랑이 어린애 같은 말에 코웃음을 치며 놀이판을 밀어냈다.

“내가 이겼다. 봐, 난 그 쟁반에 있는 튀김 다 먹었는데도 널 이겼잖아.”

정칠랑이 불만스레 입을 내밀며 놀이판을 마구 흔들어 버렸다.

“나 진짜 바보가 됐나?”

정육랑이 작은 부채를 흔들며 일부러 진지하게 말했다.

“그런데도 어떻게 칠랑을 이겼지? 칠랑 네가 그 바보보다 더 멍청했구나?”

정육랑이 부채로 입을 가리고 깔깔대며 웃었다. 정칠랑은 창피하기도 하고 화도 나서 울음을 터뜨렸다.

“육랑! 또 동생 괴롭히지!”

대부인의 노여운 목소리가 병풍 앞에서 전해졌다. 유모들이 종종걸음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고 육랑을 나무라며 칠랑을 달랬다. 두 자매에게는 자주 있는 일이라 다들 태연했다.

시끌벅적해진 가운데 반근까지 불려왔다.

“너희 아씨는 뭐 하고 있니?”

본분을 다하고자 이부인이 묻자 반근이 반색을 하며 신이 나서 대답했다.

“아씨는 주무세요.”

지금이 몇 신데 아직도 자다니. 이부인이 입을 오므렸다. 역시 바보는 바보인 게야.

“이걸 네가 만들었느냐?”

대부인은 한낱 몸종에게 예의 차릴 필요 없다는 듯 다짜고짜 본론으로 들어갔다. 정육랑이 먹다 남긴 튀김을 여종이 반근 쪽으로 밀어 보여 줬다.

반근은 앗 소리를 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기 음식을 누가 훔쳐 먹은 걸 이제야 눈치챈 게로군. 여종과 대부인은 그 표정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아씨께서 밥을 잘 안 드셔서 소인이 준비한 간식이에요.”

정신을 차린 반근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여종이 와서 이부인이 자신을 찾는다고 했을 때, 반근은 기뻐하며 교랑에게 이부인이 아씨를 보려는 게 틀림없다고 말했었다.

“간식.”

하지만 정교랑은 두 글자를 내뱉었다. 당시 그 말을 못 알아들은 반근은 아씨가 간식을 더 드시려는 줄 알고 가져다주려고 했지만, 여종이 가자고 재촉을 하는 통에 허드렛일을 하는 몸종에게 간식을 올리라고 분부만 하고 왔던 터였다.

그런데 그 간식이 여기 있었다니! 아씨가 간식이라고 한 건 부인이 간식 일로 불렀을 거라는 뜻이었나? 아씨가 그걸 어떻게 알고?

세상에, 아씨는 역시 신선의 계시를 받은 분이야. 똑똑해도 너무 똑똑하다니까!

반근은 기쁘고 흥분되는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 표정은 대부인과 이부인, 여종들이 흔히 보는 표정이었다. 집안 몸종들이 누군가의 마음에 들어 불려와 대답할 때, 곧 이어질 기쁨을 기대하며 흥분하는 표정이었다.

좋은 일이 벌어질 줄 알고 이리 기뻐하는 게로군. 대부인이 살짝 웃었다.

“아주 훌륭하더구나.”

대부인이 문간 밖에 서 있는 여종을 향해 말했다.

“도랑자, 이 애를 데려가 부엌의 주랑자 밑에서 간식을 만들게 해라.”

여종이 네 하고 대답하고는 반근을 보며 눈치를 줬다.

“부인께 감사 인사 올려야지.”

주랑자는 이 집에서 간식을 제일 잘 만드는 찬모였다. 그 밑에서 요리를 배우는 건 수많은 몸종이 간절히 바라는 일이었다.

반근은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몰라 약간 멍해졌다.

“감사합니다, 부인.”

반근은 시키는 대로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들었다.

“저더러 뭘 하라고요?”

“저것 봐. 진짜 바보네. 말귀도 못 알아들어!”

정칠랑이 병풍 뒤에 앉아 말했다. 정육랑이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네가 와서 내 간식을 만들라고.”

정육랑이 반근을 보며 고개를 살짝 쳐들고 말하자, 반근은 그제야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었다.

“하지만 소인은 우리 아씨를 모셔야 해요.”

반근이 멍하니 말했다.

“교랑한테는 몸종을 둘 더 보내 주마.”

대부인이 대답한 후 한마디 당부를 덧붙였다.

“찬모도 하나 보내고.”

이 정도면 됐겠지.

“형님, 거기 사람이 그렇게 많이 필요해요?”

이부인이 물었다.

“어쨌든 아픈 아이잖아. 여럿이 있으면 좋겠지.”

대부인이 말했다. 반근은 아직도 멍한 상태였다.

“그러니까 부인의 뜻은 저더러 앞으로 우리 아씨를 모시지 말라는 말씀이세요?”

정칠랑이 앞으로 나와 반근을 보며 깔깔대고 웃었다.

“역시 멍청하다니까. 말도 못 알아듣네. 바보의 시중을 들면 그 사람도 바보가 되나 봐.”

정칠랑이 우쭐해하며 정육랑을 힐끔 쳐다봤다.

“언니, 진짜 저 애가 만든 음식 먹을 거야? 잘 생각해.”

정육랑이 입을 열기도 전에 반근이 입을 열었다.

“아씨, 우리 아씨는 모자란 분 아니에요.”

이번에는 정칠랑과 정육랑이 똑같은 표정을 지으며 풉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이에요. 우리 아씨 다 나으셨어요.”

반근이 말하며 간식을 가리켰다.

“이건 제가 그냥 만든 게 아니라 우리 아씨께서 가르쳐 주셔서 만든 거예요.”

반근의 말을 제대로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뜻만은 모두가 알아들었다.

“언니, 언니한테 안 간다잖아.”

정칠랑이 웃으며 말하자 정육랑의 표정이 굳어졌다.

“내 간식 만들어 주기 싫어?”

정육랑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눈썹을 치켜세우고 묻자 반근이 당황했다.

“소인은…… 소인은 사실 간식을 만들 줄 몰라요.”

반근이 우물쭈물하며 덧붙였다.

“전부 우리 아씨께서 가르쳐 주신 거예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칠랑이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에 정육랑은 부아가 치밀었다.

“따귀를 쳐라!”

정육랑이 소리치며 손에 들고 있던 둥글부채를 매섭게 내던지고는 발을 구르며 더 크게 소리쳤다.

“따귀를 치라니까! 따귀를 쳐!”

반근은 겁에 질리고 여종들도 멈칫했다. 하지만 곧 한 여종이 그 분부에 따라 손을 높이 쳐들고 반근의 두 뺨을 찰싹찰싹 내리쳤다.

“그만해라.”

대부인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여종은 손을 거두고 공손히 서 있었다.

반근의 뺨은 퉁퉁 부어올랐고,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다.

반근은 주씨 노부인에게 팔려 한동안 훈육을 받은 후 도관으로 보내져 정교랑의 시중을 들었다. 도관 생활이 고생스럽긴 했지만 주씨 노부인의 돈이 있었기에 도관 사람들은 정교랑과 반근을 괴롭히지 않았다. 정교랑도 바보다 보니 조용히 지냈고 일상에서도 말이 없었다. 따로 관리하는 윗전도 없다 보니 지금껏 크도록 누군가에게 맞은 건 처음이었다.

“싫으면 관둬라, 물러가거라.”

대부인이 냉담하게 말했다. 반근은 여전히 멍한 상태였다.

“어서 부인께 감사 인사 올리지 않고!”

여종이 나지막이 소리쳤다. 반근은 허둥지둥 꾸벅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올리고 일어나 비틀대며 재빨리 자리를 떴다.

“어머니, 꺼지라고 해요. 꺼지라고. 난 저 애 우리 집에 있는 거 보기 싫어요!”

뒤에서 정육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근이 궁지에 빠진 모습으로 도망치는 모습을 보며 오가던 여종들과 몸종들은 손가락질을 하며 수군거렸다. 반근은 뺨이 얼얼하고 화끈거리는 것만 느껴질 뿐 창피한 건지 아픈 건지 알 수 없었다.

기우뚱하며 갈팡질팡하다가 하마터면 발을 접질릴 뻔한 반근은 그제야 자신이 황급히 도망치느라 이부인 쪽에 나막신 한 짝을 떨어뜨리고 온 사실을 깨달았다. 가지러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반근은 나막신 없이 고개를 숙인 채로 허둥지둥 걸어갔다.

돌길을 걷자니 발이 아파왔다. 고개 숙인 반근에게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정교랑은 벌써 한참 동안 병풍만 보고 있었다. 병풍에는 간단한 나무와 미인도가 그려져 있고 글자도 한 줄 쓰여 있었다.

정교랑이 보는 건 바로 행서체로 쓰인 그 글자였다. 정교랑은 입술을 움직이며 글자를 천천히 따라 읽었다. 정교랑은 병풍을 뚫어져라 보며 팔걸이 책상에 올려놓은 손을 천천히 움직여 그 글자를 따라 써 보았다.

글자를 알았고 쓸 줄도 알았다. 아마 꽤 능숙하고 글씨도 훌륭하게 썼을 것이다. 손가락이 굳어 손놀림이 뜻대로 되지 않았지만 마음속에선 거침이 없었다.

이게 정말 바보의 기억이라고? 바보가 신선의 계시를 받았다고 해서 이럴 수 있나?

넌 누구니? 난 누구지?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반근이 돌아온 것이다. 정교랑은 손동작을 멈추었다. 하지만 반근은 곧장 들어오지 않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솥에 넣어 둔 설탕이 어느덧 걸쭉한 액체가 되어 있었다. 반근이 썰어놓은 복숭아를 넣고 이리저리 굴린 다음 건져 내고 한쪽에 하나씩 놓아 식혔다.

거울이 없는 반근은 물동이 속에 있는 물에 자신의 얼굴을 한참 비춰 보고, 머리를 빗고 또 빗은 다음 얼굴에 재를 묻혔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반근은 물동이를 보며 씽긋 웃었지만 눈에는 운 티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반근은 눈을 찡그리며 몇 번을 이리저리 굴려 본 다음, 아예 손으로 눈을 몇 번 문지르기도 했다. 복숭아가 어느덧 다 식었다. 반근은 크게 심호흡을 한 후 쟁반을 들고 방 안을 향해 경쾌한 발걸음으로 들어갔다.

“아씨, 아씨. 이번에 만든 건 어떤지 드셔 보세요.”

정교랑은 반근을 쳐다봤다. 반근이 싱글벙글 웃으며 무릎을 꿇고 팔걸이 책상 위에 쟁반을 내려놓은 다음, 일어나 대나무 꼬치로 하나를 집어 정교랑의 입가로 건넸다. 정교랑은 입을 벌리고 받아먹었다.

“어떠세요?”

반근이 물었다. 정교랑은 말없이 천천히 먹었다. 반근도 서두르지 않고 정교랑이 먹는 모습을 싱글벙글 쳐다보며 어떻게 만들었는지 재잘재잘 떠들었다.

“좋아.”

다 먹은 정교랑이 대답했다. 반근은 기쁘게 웃으며 손으로 얼굴을 만지더니, 깜짝 놀라며 무언가를 발견한 시늉을 했다.

“이런, 손에 재가 묻었네요. 아씨, 제 얼굴에도 묻었어요?”

“응.”

“이런, 창피해 죽겠네. 어차피 볼 사람도 없으니 그냥 안 씻을게요.”

반근이 웃으며 말했다. 정교랑이 입을 오므리며 말했다.

“그래.”

반근이 복숭아를 또 하나 집어 정교랑에게 먹여 줬다. 정교랑은 두 개를 더 먹은 후 그만 먹겠다고 했다.

“복숭아씨 아직 남았지?”

정교랑이 갑자기 묻자 반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씨, 또 뭐 드시고 싶으세요?”

“그걸 갈라서 복숭아씨의 알맹이를 가져와 봐. 절굿공이로 찧으면 돼. 이리 가져와.”

반근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알겠다고 대답한 후 나갔다. 바닥에는 진창을 밟았던 발이 남긴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정교랑의 시선이 그 발자국을 따라갔다.

“아씨, 이렇게 하면 돼요?”

반근이 앞에 앉아 복숭아씨를 빻으면서 수시로 물었다. 정교랑은 팔걸이 책상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는 중이었다.

“생강도 있니?”

정교랑이 묻자 반근이 고개를 끄덕이며 있다고 대답했다.

“가져와서 껍질을 벗겨.”

정교랑이 말했다. 반근은 네 하고 대답한 후 시키는 대로 했다.

“아씨, 생강은 필요 없고 생강 껍질만 필요한 거예요?

반근이 조심스레 생강을 까서 그릇에 껍질을 담으며 물어봤다.

“생강은 필요 없어.”

정교랑은 눈을 감은 채로 반근이 콩콩 빻는 소리를 들었다.

“다 됐어요.”

반근이 손을 멈추고 기대에 차 물었다.

“아씨, 이걸 어떻게 할까요? 끓일까요, 볶을까요, 찔까요, 튀길까요?”

정교랑이 손을 뻗었다.

“이리 와.”

반근이 영문을 몰라 하며 앞으로 움직였다.

“더 가까이 와.”

정교랑이 다시 말했다.

반근이 그릇을 안고 다가가 정교랑과 마주보고 앉았다.

정교랑이 한 손의 소매를 걷고 한 손으로 그릇에 있는 재료를 쥐어 뭉치더니 반근의 얼굴에 발라 주었다. 반근은 깜짝 놀랐다. 차갑기도 하고 끈적거리기도 하고 쿡쿡 쑤시는 통증도 있었다.

“아씨?”

반근이 놀라 말했다. 정교랑은 말없이 느린 동작으로 반근의 얼굴에 계속 펴 발라 주었다. 왼쪽을 다 바르고 난 다음에는 오른쪽에도 발라 주었다.

반근은 차츰 움직임을 멈췄다. 눈에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점점 많아지더니 얼굴에 바른 거무스름해진 죽으로 번졌다. 정교랑은 소매로 눈물을 닦아 주었다.

“이거 바른 거 좀 말리고 나서 울어. 안 그럼 새로 한 그릇 빻아야 해.”

반근이 입을 삐쭉 내밀며 애써 눈물을 참았다.

“아씨, 소매로 그러지 마세요. 더러워져요.”

반근의 말에 정교랑이 응 하고 대답하더니 덧붙였다.

“괜찮아, 네 소매잖아.”

놀라 고개를 숙이던 반근은 정말 자기 소매가 맞는 걸 그제야 확인하고 풉 웃음을 터뜨렸다.

“아씨.”

반근이 울음과 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정교랑을 불렀다.

밤의 어둠이 내렸을 무렵, 반근은 거울을 대고 얼굴을 살펴봤다. 얼굴은 예전과 다름없이 희고 보드라웠다.

“아씨.”

반근이 기뻐하며 정교랑을 불렀다.

“이렇게 빨리 낫다니요!”

정교랑은 침상에 누워 잠든 듯했다.

“아씨.”

반근은 교랑이 잠들지 않은 걸 알고 침상 아래의 자리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풀며 말했다.

“아씨는 정말 대단하세요.”

“난 죽은 사람도 살릴 정도인데, 그깟 따귀가 대수겠어?”

정교랑이 말했다. 따귀 얘기가 나오자 반근은 풀이 죽은 채로 정교랑의 침상 근처에 엎드렸다.

“아씨, 그 사람들은 왜 절 때렸을까요?”

반근이 억울한 듯 투덜거렸다.

“난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네가 가진 걸, 저들은 못 가졌어. 그런데 저들을 위해 쓰진 않겠다고, 네가 고집을 부렸잖아. 그러니까, 이건, 네 죄야.”

정교랑이 말했다. 반근은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했다.

그런 말을 내뱉은 후 정작 정교랑 자신도 멍해졌다. 머릿속에 또다시 그 시끄러운 소리가 꽝꽝 울렸다.

네가 너무 잘났으니까. 넌 너무 잘났어. 그러니까, 넌 죽어 마땅해.

정교랑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목 주위를 잡으며 헉헉 숨을 헐떡였다.

반근이 깜짝 놀라 얼른 똑바로 꿇어앉고, 정교랑이 숨을 제대로 쉬도록 도우며 아씨를 연신 불러댔다. 다행히 정교랑은 혼절하지 않았다. 잠시 숨을 헐떡이더니 곧 평정을 되찾았다.

이번에 느낀 감정은 저번 같은 괴로움이 아니라 분노였다.

분노로 인한 아픔은 슬픔으로 인한 아픔과 비교가 안 된다. 이런 아픔은 그녀를 혼절시키기는커녕 정신을 더욱 또렷하게 만들 뿐이었다.

“아씨.”

반근이 울며 소리쳤다.

“전부 소인의 잘못이에요.”

“잘못이지.”

정교랑이 말하며 긴 한숨을 토해냈다.

“잘못이야.”

“네, 소인이 잘못했어요.”

반근이 울며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정교랑은 속으로 그 말이 잘못이라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뱉기까지는 동작이 너무 힘들어 말하지 않았다.

물을 몇 모금 마시고 거듭 평정을 되찾은 후, 반근은 정교랑을 부축해 다시 눕혀 주었다.

밤이 깊어지면서 벌레소리마저 잦아들었다. 반근은 무릎을 꿇은 채로 한참을 있다가 정교랑이 무탈한 걸 확인한 후에야 자리에 누웠다.

“네가 잘못했어.”

정교랑이 돌연 입을 열었다. 설핏 잠이 들었던 반근은 놀라서 또다시 눈을 떴다.

“네?”

반근은 바로 반응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다가, 자신이 아까 한 말에 대한 대답인 걸 그제야 깨닫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감해했다.

“네가 틀렸어.”

정교랑이 야경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때 넌, 너무 많은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어.”

“그럼 소인이 어떻게 해야 했는데요?”

반근이 이해할 수 없는 듯 물었다.

“말해야지. 혼자 결정할 수 없는 일이라고. 저 사람들이 와서, 날 부르도록.”

정교랑이 말했다.

“어째서요?”

반근은 점점 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래도 어떻게 아씨한테로 미뤄요?”

“왜냐하면, 난 네 아씨니까.”

정교랑이 말했다. 반근은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씨의 말은 언제나 틀린 법이 없으니까 네 라고 대답하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한참을 기다려도 정교랑이 아무 말 없자 반근은 자리에 누웠다.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들었다. 반근은 베개를 문지르며 크게 심호흡을 하고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정교랑이 또다시 말을 이었다.

“난 바보야.”

바보는 무슨 짓을 하든 이해를 받는다.

이번엔 반근의 반문이 이어지지 않았다. 들려오는 것은 반근의 코 고는 소리뿐이었다.

그 외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고요하기만 했다.

-주씨 가문-

6월 중순, 대노야가 병주로 보낸 사람들이 돌아와 반근의 말이 전부 사실임을 증명했다.

“벼락이 떨어져 절반이 불에 타는 바람에 그 도관이 아예 없어졌다는군. 사람이 납치된 줄 알고, 우리가 물어보니까 도사들이 전부 도망갔다 하오.”

대노야가 서찰을 팔걸이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방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방 안에는 대부인과 이노야 내외가 모두 있었다. 다들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몰라 표정이 이상했다.

“주씨 가문 쪽은요?”

대부인이 물었다.

“아직 회신이 없소. 전갈을 못 받은 건지, 받고도 무시하는 건지 모르겠군.”

“그쪽에서도 모를지 모르죠.”

대부인이 말하며 이부인을 쳐다봤다.

“애초에 주씨 노부인이 도관을 공양하는 것도 집안에서는 못마땅해 했잖아요.”

노부인이 그 도관에 거금을 몰래 묻어 둔 건 주씨 일가 사람들이 더더욱 알 턱이 없었다. 그랬다가는 노부인이 죽고 난 후 도로 가져갔을 테니까.

이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부인의 말에 감사를 표했다.

“확실한 정보면 우리가 키우도록 합시다.”

대노야가 말하자 모두들 알았다고 하고 자연스레 해산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이부인은 장신구를 빼놓고 낮잠을 청하고자 했다. 이부인은 여종의 시중을 받으면서 방금 들은 일에 대해 생각했다.

이부인은 시집온 후 첫 3년간 집에서 시모를 공양하고 딸을 낳은 후에야 남편을 따라 병주로 갔다. 당시 그 바보는 아직 도관에서 지낼 때였다. 집안에서는 그 아이에 대해 말하는 이가 없고 남편도 전혀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다. 따라서 같은 병주 땅에서 4~5년을 지내면서도 그 바보가 이부인의 삶에 나타난 적은 없어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존재하기만 하면 언젠가는 나타나게 돼 있다.

“그 주씨 집안은 부잣집인가?”

이부인이 물었다.

예전에 부모님한테 듣기로는 주씨 집안의 조상은 섬변주 출신인데, 경성에 들어와 관료를 했어도 무관이었던지라 대대로 학문을 하던 이부인 집안과는 비교가 안 됐다. 당시 죽은 조강지처의 친정 자격으로 인사를 왔던 사람 역시 거칠기 그지없었다.

“돈이 꽤 많았죠.”

머리를 빗기던 여종이 얼른 대답했다. 이부인이 여종을 힐끔 쳐다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넌 나보다 잘 알고 있구나.”

그 바보가 돌아온 후로 여종들은 이부인이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은밀히 주씨 부인에 관한 이야기를 떠들곤 했다.

머리를 빗겨 주는 여종은 이부인이 친정에서 데려온 사람이었기에, 여종은 송구한 듯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그렇게 돈이 많았대?”

이부인이 물었다. 부인이 나무라지 않자 여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부인, 다른 건 모르겠고 그때 주씨가, 주씨가 시집올 때 혼수를 엄청 많이 해 왔다던데요.”

이부인이 여종을 흘겨봤다.

실없는 소리는. 후처로 들어오면서 예전 부인의 혼수도 안 알아봤을까 봐?

여종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듣기 거슬리니 그렇겠지. 여종들끼리 수군대는 말은 훨씬 듣기 거북할 텐데.

“주 부인이 시집올 때 기세가 대단했나 봐요. 금은으로 된 장신구에 비단은 물론이고 성의 동쪽과 서쪽 시장의 목 좋은 위치에 있는 점포 두 개, 교외의 비옥한 농토까지…….”

“전부 주씨 집안에서 반년도 전에 사람을 강주성으로 보내 고르고 고른 거라는데…….”

“주 부인이 막 세상을 떴을 땐 노부인께서 혼수를 대신 관리하셨는데, 집사 부인의 말을 듣자니 점포 하나의 매출만 해도 우리 집 반년 치 지출을 넘는다고…….”

금은보화로 된 재물에 재산을 늘리기까지 하는 혼수라니. 거기에 지금 이부인의 혼수를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경성 밖에 있는 가문은 아무리 지체가 높고 돈이 많은들 비교가 안 되는 법이다.

머리를 빗겨 주는 여종이 머리카락을 주우며 이것저것 털어놓자, 이부인은 이를 악물었다. 혼수를 많이 해 왔으면 어쩔 텐가.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그런데…….

점포 하나의 매출이 정씨 가문 반년 치 지출을 넘을 정도라고?

“그 점포와 농토는 노야께서 관리하시느냐?”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이부인이 물었다. 그 정도 수익을 내는데, 집에선 왜 전혀 몰랐지? 녹랑이니 십삼랑이니 하는 것들을 전부 그 수익으로 먹여 살리나?

“아뇨, 아뇨.”

여종은 이부인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잽싸게 눈치채고 얼른 말을 이었다.

“대부인께서요.”

대부인? 이부인은 비녀를 뽑아 탁자 위에 천천히 내려놓았다.

“형님은 왜 그런 말씀이 전혀 없으셨지?”

이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분가하진 않았어도 먹고 입는 용도의 지출은 전부 장부에 따로 기록했다. 지금은 노부인이 집안일을 관장하지 않고, 대부인이 도맡아 하고 있는 터였다.

“어쨌든 예전 부인의 혼수니 부인께서 언짢으실까 봐 말씀 안 하셨겠죠.”

여종이 말했다. 이부인은 콕 집어 어디라고 말할 순 없지만 속이 편치 않았다.

그 혼수는 조만간 그 바보의 소유가 될 테니 이부인 자신과 이부인의 자녀들은 쓸 수 없다. 하지만 그 수익을 생각하면…….

집안의 지출은 전부 대부인이 관리했다. 물론 수익도 굳이 대방, 이방을 가릴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어딘가 마음이 찜찜했다.

시집온 지 만 9년이 됐는데 그 일을 이제야 알다니. 그것도 그 바보 덕분에! 그 바보가 평생 돌아오지 않았다면, 평생 몰랐을 일인가?

“부인, 부엌에서 더위를 쫓는 탕을 가져왔습니다.”

몸종이 들어오며 말했다. 정씨 가문은 부유했지만 늘 검소한 생활을 했다. 하루 세 끼와 새참, 야식, 간식까지도 전부 양이 정해져 있었다. 최근에는 날이 무더워지면서 대부인이 부엌을 시켜 해서탕(解暑汤)을 추가하도록 했다. 그러면서도 대부인 자신은 먹지 않고 아이들에게만 먹였다. 이부인 역시 자연스레 형님을 본받아 먹지 않았다.

그래도 아랫사람 처지에서는 물어보는 것이 도리였다. 이부인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

“가져와라. 마침 생각나던 참인데.”

“네.”

몸종은 네 하고 대답한 후 나갔다. 몇 걸음 걸어간 후에야 정신이 들었다. 부인께서 방금 뭐라고 하셨지?

“앗, 부인이 안 드신다고 하셨나?”

몸종이 얼른 옆에 있던 다른 몸종에게 조용히 물었다. 옆에 있던 몸종이 하품을 하며 말했다.

“너 졸았어? 분명 드신다고 하셨잖아.”

으응? 몸종은 그제야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님을 깨달았다.

“이상하네. 부인이 왜 드시는 거지?”

몸종이 웃으며 말했다.

“집안에 있는 거니까 드시고 싶으면 드시는 거지, 뭐. 안 드셔 봤자 자기만 손해잖아.”

앞서 그 몸종이 나른한 듯 말했다.

바로 그 시각, 경성의 넓은 골목에 들어선 으리으리한 주씨 저택의 대문 앞에는 17~18살쯤 된 준수한 외모의 소년이 말에서 뛰어내리고 있었다. 문지기는 진작 마중을 나왔고, 어린 시종 4~5명이 말을 끌고 갔다. 소년은 허리춤에 있던 전대를 풀어 던졌다.

“너희에게 주는 상이다. 술이나 한잔해라.”

소년이 소리치자 어린 시종들은 서로 받으려고 난리였다.

“감사합니다, 여섯째 도련님!”

시종들이 입을 모아 외쳤다. 주육낭은 하하 웃으며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주씨 집안의 저택은 섬변주에 있는 조상의 저택을 따라 개조한 것이었다. 특히 그 가림벽은 저택에 있는 걸 철거해 그대로 옮겨 온 것이었는데, 운송비용만 해도 가림벽 10개에 맞먹는지라 일거에 명성을 얻었다. 덕분에 경성의 명문가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고, 이들은 노섬(老陜) 주씨로 불렸다.

주육낭이 자신의 집 마당으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비슷한 또래의 소년이 처마 아래에 앉아 있었다. 긴 눈썹에 가는 눈을 가진 소년은 소매가 큰 웃옷을 입고 앞에 놓인 백자 바둑판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근처에 무릎을 꿇고 있는 두 몸종도 따라서 바둑판을 보며 재잘댔다.

“도련님, 이건 재미없어요. 차라리 쌍육을 놀아요.”

몸종들이 말하다가 주육낭의 발걸음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두 몸종은 똑바로 꿇어앉았다가 엎드리며 예를 올렸다. 소년은 여전히 바둑판만 보는 중이었다.

“상자, 어쩐 일로 왔어?”

주육낭이 소매를 크게 휘두르며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바둑판을 팔걸이로 삼아 팔을 그 위에 올리자 바둑판 위에 있던 바둑알이 이리저리 흩어졌다. 그런데도 소년은 신경 쓰지 않았다.

“심심해서. 재미있는 얘기나 들을까 하고 왔지.”

“여기 재미있을 일이 뭐가 있어?”

주육낭이 물었다.

“듣자니 강주부의 자네 고모부 댁에서 사람을 보냈다던데?”

소년이 물었다. 주육낭은 뒤에 무릎을 꿇고 있는 두 몸종을 쳐다봤다. 둘은 켕기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 집 식구들이 재미있긴 하지.”

주육낭이 말하며 손을 뻗어 바둑알을 만지작거렸다.

“자네의 그 사촌 누이 일이었어.”

소년이 말을 이었다.

“왜 꼼꼼히 물어보지도 않고 정씨 집안의 사람을 쫓아냈나?”

“그 쓸모없는 인간이 우리 주씨 집안과 무슨 상관이야.”

주육낭이 하찮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고모님이 충고를 안 듣고 그 바보를 살려 두겠다고 고집을 부리시더니, 결국 당신까지 돌아가시게 됐잖아. 조부님과 조모님만 안타깝게 됐지. 조모님도 그 바보가 눈에 밟혀 고생하시고. 일찍 죽게 내버려 뒀어야 했는데 애지중지하며 키우셨어. 돼지를 키우면 고기라도 얻는다지만, 그런 모자란 애는 키워 봤자 하등 쓸모가 없지.”

소년이 웃음을 터뜨렸다.

“육랑, 그 돼지만도 못한 사촌 누이는 병주에서 자랐잖아. 그런데 정씨 집안에서 사람을 보내 물었다며. 혹시 자네 집안에서 그 애를 강주로 돌려보냈냐고.”

“그래, 물으면 뭐? 우리가 공손히 대답이라도 해야 해?”

주육낭이 소년을 노려보며 물었다. 소년이 바둑판 위로 긴 손가락을 뻗어 쭉 그었다.

“병주에서 강주까지. 자네 사촌 누이는 지금 정씨 저택에 있어. 자네 집에서도 모르는 사이에 혼자 돌아간 거지.”

주육낭은 소년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소년이 다시 바둑판 위로 손을 뻗으며 이 점에서 저 점까지 그렸다.

“병주에서 강주까지, 어린 소녀 혼자서.”

소년이 웃으며 말했다.

“일개 쓸모없는 인간이 그걸 어떻게 해낸 걸까?”

말을 마친 소년이 주육낭을 쳐다보자 주육낭도 소년을 쳐다봤다. 주육낭은 바둑판을 거의 뒤엎을 듯 벌떡 일어섰다.

“부친은 어디 계시느냐?”

주육낭이 크게 소리쳤다. 바깥에 시립하고 있던 어린 시종이 얼른 네 하고 대답했다. 주육낭은 소리치며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눈 깜짝할 새에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마당 안은 다시 고요함을 되찾았다. 소년이 살짝 손을 움직였다.

“여기도 당분간은 재미없겠구나. 집에나 가야겠다.”

소년이 말하며 손을 뻗자 꿇어앉아 있던 몸종이 얼른 일어났다. 하나는 뒤에서 나무 지팡이 두 개를 꺼내고, 다른 하나는 일어나 소년을 부축했다. 마당에 있던 시종이 얼른 밖에 대고 알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시종 4명이 걸상을 들고 들어왔다.

소년은 벌써 지팡이를 붙잡고 일어선 상태라 도포가 길게 내려졌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체형에 준수한 외모였지만, 안타깝게도 바람에 펄럭이는 옷자락 안에 있는 한쪽 다리가 비틀려 있어 바닥에 닿지 않았다. 몸종이 절뚝거리는 소년을 부축해 걸상에 앉혔다.

“도련님을 배웅합니다.”

두 몸종이 한쪽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리며 배웅했다. 시종들이 걸상을 들고 밖으로 나가 빠른 걸음으로 멀어졌다.

정교랑의 귀환은 고요했던 호수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정교랑이 원하던 바는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모든 게 자연스러우면서도 부득이하게 일어난 일이었다. 인생이라는 게 본디 그런 법이다.


반근이 돌멩이 하나를 집어 물속으로 던지자, 연못에 물보라가 일었다.

“아씨.”

반근이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저 물고기 봤어요! 연잎 아래로 들어갔어요!”

부들방석 위에 앉아 있던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보름이 지나면서 정교랑의 몸은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많이 호전된 정교랑은 더 이상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지 않았다. 직사광선의 햇빛은 견딜 수 없었지만 다행히 마당에는 나무가 빽빽해 서늘한 그늘이 많았다.

반근이 다가와 정교랑을 부축했다.

“아씨, 아씨도 와서 보세요. 우리 도관에 있던 물고기보다 더 예쁘죠?”

지난달에 일어난 일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정교랑이 도관의 물고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할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정교랑은 일어서서 천천히 연못 쪽으로 걸어왔다. 정교랑과 반근은 물가에 서서 연잎 아래에서 이리저리 헤엄치는 잉어를 바라봤다.

“여기 물고기도 먹을 수 있나 모르겠네요?”

반근이 물었다. 지난번에 따귀를 맞은 후로 또 찾아와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었지만 부엌의 음식이 하루가 다르게 형편없어졌다. 여종은 설렁설렁 일하며 이것저것 빼놓기 일쑤였고, 가져오라고 시키면 거친 목소리로 없다고 대꾸하곤 했다.

“전부 자기 집으로 가져간 게 틀림없어요.”

정교랑도 반근의 추측에 동의했다.

“제가 기록해 놓을게요.”

반근이 말하자, 정교랑은 웃으며 대꾸하지 않았다.

도관에서 지내던 시절 반근은 노부인의 명을 받들어 경전을 필사하며 아씨를 위해 복을 빌었다. 그러면서 도관 사람들을 따라 글을 익혔다. 정교랑은 기억력이 안 좋았기에 자신이 겪은 일을 반근을 시켜 삐뚤빼뚤한 글씨로나마 기록하게 했다. 최초의 목적은 발병 횟수를 기록하고 건강이 호전되는지 정확히 분석하기 위해서였다. 더불어 오는 길에 만난 사람과 경험한 일들도 기록해 놨다.

“은혜를 입은 일과 틈이 생겼던 일도 전부 기록해. 안 만나면 그만이지만 혹여 다시 만날지도 모르잖아. 확실히 알고 있어야 괜히 어리바리하게 안 굴어.”

매미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뜨거운 태양 아래에 나무도 시들어갔다.

“아씨, 우리 그만 들어가요.”

반근이 하품을 하며 말했다. 영문도 모르는 채 억울한 일을 한 번 겪긴 했지만 어쨌거나 자유로운 나날이었다. 잘 먹고 잘 자다 보니 반근의 키도 어느새 훌쩍 자랐다.

“난 낚시를 하고 싶어.”

정교랑이 말했다. 더 이상 수시로 피곤을 느끼지 않는 것도 건강이 호전된 증거 중 하나였다. 정신이 또렷하고 활발하게 지내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고, 무언가를 생각할 때 나타나던 두통 증상도 한결 가벼워졌다. 다만 정신이 산만한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여기 앉아 낚시를 한다고 해서 그 마음을 한데 모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혼란스럽고 잡히지 않는 파편화된 기억들을 더 빨리 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네, 좋죠. 물고기를 잡으면 먹을 수 있겠네요.”

반근은 신이 났다.

“아씨가 낚시도 하신다니, 정말 좋네요. 일단 여기 앉아 계세요. 낚싯대를 가져올게요.”

말을 마친 반근이 얼른 마당 쪽으로 뛰어가더니 거기 있는 여종에게 물어 낚싯대를 가져왔다. 정교랑은 반근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바라봤다.

“난 낚시할 줄 몰라.”

정교랑이 말했다.

연못 근처의 석가산 중턱쯤, 높지도 낮지도 않은 곳에 평평한 곳이 있었다. 나무 그늘이 지고 아래로는 물을 끼고 있었다. 거리상으로도 마당에서 멀지 않았기에 정교랑은 낚싯대를 드리울 장소로 마음에 쏙 들었다.

반근은 정교랑 뒤에 앉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화초로 각종 형태의 작은 바구니를 만들었다.

“이번엔 물고기가 걸려들었어요?”

반근이 이따금 고개를 돌려 조용히 물으면 정교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짜 낚시할 줄 모르시는 거 맞네요.”

반근의 말에 정교랑이 웃었다. 당연히 진짜지. 낚시를 하는 느낌을 원했을 뿐이야.

과연 정교랑이 짐작한 대로였다. 그렇게 앉아 있노라니 정신이 예전처럼 산만하지는 않았다. 아씨의 정신이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는 모습을 보며 반근도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 낚시는 먹고 자는 일 외에 정교랑과 반근이 반드시 하는 또 하나의 일이 됐다. 매일 오후가 되면 두 사람은 이곳으로 왔다. 정교랑은 정좌한 채 낚시를 하며 정신을 가다듬고, 반근은 꽃과 풀을 엮으며 놀았다.

하지만 입맛을 잃은 정육랑의 나날은 편치 못했다. 집안 막내딸이 이러니 오라비들의 관심이 컸다. 정사낭이 간식을 담은 함을 들고 누이를 보러 왔다. 정육랑은 방 안에 홀로 앉아 축 늘어진 채 어린 몸종이 쌍육을 노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육랑, 이것 좀 먹어 봐. 거리에 간식 점포가 새로 열었는데, 경성에서 온 솜씨 좋은 아주머니가 만든대. 어서 먹어 봐.”

정사낭이 말했다. 정육랑은 여전히 기운 없는 모습으로 손을 뻗어 하나를 집어 들었다.

“너무 느끼해요. 오라버니, 맛도 안 봤어요?”

정육랑이 시무룩하게 말하자 정사낭이 멋쩍은 듯 웃었다.

“난 이런 거 안 좋아해. 다들 맛있대서.”

정육랑이 입을 뾰로통 내밀었다. 말을 잇기도 전에 밖에서 나막신 소리가 들리더니 정칠랑이 들어왔다. 이어 정사랑과 정오랑도 들어왔다. 다들 별로 기분이 안 좋은 듯 나막신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지고 들어와 앉았다.

“앞으로 밖에 나가지 마!”

눈이 빨개진 정칠랑이 고함을 쳤다. 속상하고 화난 모습이었다.

“왜 그래?”

정사낭이 물었다.

오랑과 육랑은 오라버니에게 인사부터 올린 후 자리에 앉았다.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나가면 사람들이 안 비웃어요?”

정칠랑이 정사낭을 보며 말했다.

“왜 날 비웃는데?”

정사낭이 영문을 몰라 했다. 정사낭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정씨 집안의 적자였다. 공부머리는 보통이어도 어디 가서 비웃음을 살 인사는 아니었다.

“이래서 우리 여자들만 재수 없다니까.”

정칠랑이 푸념하며 정육랑을 바라봤다.

“우리한테 바보 언니가 생긴 걸 온 성이 다 알아. 다들 우릴 비웃잖아!”

정육랑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뭐야?”

“다들 어떻게 알았대? 그 바보는 집 밖에 나간 적도 없잖아!”

“원래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잖아.”

정오랑이 조용히 말했다. 정육랑이 손으로 이마를 치고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세상에, 모레 동 낭자네 집에 놀러가기로 했는데.”

“가면 안 돼!”

정칠랑이 소리쳤다.

“우리가 오늘 나갔다가 얼마나 망신을 당했는지 알아? 엄씨 가문의 그 천것이 사람들 앞에서 우리한테 한 집안끼린 같은 피가 흐르는 거라며, 똑똑한 가문 자매들은 전부 똑똑하고, 바보네 자매들은 전부 바보라고 했어!”

“진짜 망했다. 엄씨 가문 그 천것이 분명 동 낭자네 집에도 갈 텐데.”

정육랑이 두 손을 비비며 정칠랑을 바라봤다.

“물론 그 바보는 네 친언니지만…….”

정칠랑은 그 말에 거의 뒤로 넘어갈 뻔했다.

“네 친언니기도 하잖아!”

정칠랑이 소리쳤다.

“너랑 비하면 좀 멀잖아.”

정육랑이 진지하게 받아쳤다.

옆에 있던 정사낭은 웃기면서도 궁금해졌다. 여자들의 수다란 늘 이렇게 우습다니까. 항상 핵심을 제대로 못 짚지.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야.”

언니인 정사랑이 화제를 돌리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어쨌든 정씨 집안의 사람이면 우리 모두 웃음거리가 되게 생겼어. 육랑, 특히 넌 인품과 용모를 다 갖췄다고 남몰래 질투하는 사람이 많았잖아. 다들 이번 기회에 널 비웃으려 들 거야.”

그랬다. 정육랑은 완벽에 가까운 미모로 유명했다. 그런데 갑자기 튀어나온 바보 혈육이 그 아름답고 완벽한 그림에 시커먼 먹물을 떨어뜨리면서 그림을 망쳐 버렸다.

“진짜 재수 없어 죽겠어!”

정육랑이 씩씩거리며 손에 든 부채를 바닥으로 내던졌다.

“우리 앞으론 누구 만나러 나가지도 못하게 됐잖아! 전부 그 바보 때문에!”

정칠랑이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정사랑을 바라보며 물었다.

“사랑, 그럼 오늘 엄가 천것이 날 모욕한 것도 내가 인품과 용모를 다 갖춰서야?”

  • 2권에 계속

교랑의경 2권

차례

미인

뜻밖

신묘한 일

훌륭한 방법

행위

기억

과오

현묘

하늘을 속이다

도리

일이 커지다

-미인-

정사랑은 망했다고 혼잣말을 하며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 화제를 돌리려 했지만, 옆에 있던 정육랑이 웃음을 터뜨렸다.

“넌 이제 겨우 8살이잖아. 무슨 인품과 용모를 논해?”

정칠랑이 입을 삐죽거리고 정육랑을 쳐다보며 말했다.

“다들 내가 육랑보다 더 예쁘다고 했어.”

“누가 그래? 어린애 달래려고 하는 말을 곧이들어?”

정육랑이 히히 웃으며 말했다.

정사낭이 더는 못 듣겠는지 일어나며 먼저 가겠다고 했다. 누이들은 지금 발등에 떨어진 불에 정신이 팔려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정사낭은 나오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에서 여자들이 소란스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사낭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화원을 가로질러 밖으로 걸어가면서 남몰래 웃음을 터뜨렸다. 집안에 새 누이가 들어왔다는 소식은 진작 들었다. 새 누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 그 사촌 누이에 대해서는 인상이 약간 남아 있었다.

어느 겨울날이었다. 어린아이는 침상에 누운 채 멍하니 있으면서 지독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유모의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아이를 보던 정사낭은 흰자위만 드러내고 있던 여자아이의 모습을 보고 놀라 기겁을 하고 달아났다.

정사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문득 정수리 위쪽에서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정사낭은 멈칫했다. 서로 내외할 필요가 없으니 집안 자매들은 마당 근처의 처소에서 지내면서도 평소에 이곳으로 자주 와 놀곤 했다.

하지만 아직 출가하지 않은 누이들은 전부 한 곳에 모여 떠들고 있지 않은가. 아마 몸종들이겠지. 정사낭은 무심코 고개를 들다가 멀지 않은 곳의 산석 위에 사람의 그림자가 언뜻 스치는 걸 봤다.

빨간 치마에 풍성한 머릿결, 맵시 있는 몸매.

자세히 보니 구불구불 이어진 길 위의 산석에 15~16살 남짓한 여자아이가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여자아이는 헤헤 웃으며 손을 뻗어 버드나무 가지를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웃는 모습이 맑고 예뻤다.

짓궂은 계집이구나. 정사낭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어느 누이의 몸종이지? 처음 보는 얼굴인데.

정사낭은 여자아이를 보며 저도 모르게 걸음을 늦추었다. 여자아이는 버들가지를 쭉 늘어뜨리더니 몸을 돌리며 무릎을 꿇었다. 정사낭이 의아해하며 지켜보는데, 여자아이가 비켜서면서 또 한 여인이 나타났다.

무심코 보던 정사낭은 눈앞에 폭죽이 터지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풍성하고 검은 머리카락, 가느다랗고 긴 속눈썹, 깊고 심오한 눈동자, 오뚝한 코, 앙 다문 얇은 입술, 가늘고 긴 목, 검은색으로 소박하게 차려입은 옷이 반짝이는 햇빛 아래 찬란하게 빛났다.

정사낭은 어느새 방금 전 본 빨간 치마의 여자아이를 까맣게 잊었다. 정사낭의 눈에는 이 소박하고 검은 여인뿐이었다. 지금껏 오색찬란한 색이 가장 화려한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것은 색채가 없는 무색이었다.

정사낭이 원래 있던 자리에 멍하니 서 있는데, 그 여인이 이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게 보였다. 여인은 기쁨도 노여움도 없는 잔잔한 눈길로 정사낭을 조용히 지켜봤다. 정사낭은 그런 눈빛을 처음 보았다. 그 눈빛은 밤의 색처럼 어둡고 진했으며 깊은 심연처럼 그윽하고 심오했다.

“앗, 누구세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빨간 치마가 갑자기 시선을 막아서면서 정사낭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정사낭은 허공에 붕 뜬 듯한 느낌으로 앞을 향해 총총 걸어갔다.

뒤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죠? 깜짝 놀랐네. 저 사람은 왜 말을 안 하죠? 아씨……·.”

집에 온 손님인가?

정사낭은 한달음에 안마당을 빠져나왔지만 아직도 온몸이 화끈거렸다. 곧장 탁자 앞에 앉아 찻물을 단숨에 들이켠 후에야 마음이 비로소 진정되었다.

“사낭, 어디 갔었어?”

누군가 들어오며 물었다. 그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정사낭의 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너 왜 이래? 얼굴이 왜 이렇게 빨게?”

“그게, 방금 집에서 엄청난 미인을 봤어.”

정사낭이 웅얼거렸다. 들어오던 사람이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집에서 미인을 못 보는 게 더 이상하지.”

그는 웃으며 한쪽 옆에 앉았다.

“누가 감히 우리 집 누이들을 보고 미인이 아니래?”

정사낭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옆에 앉은 사람을 똑바로 봤다.

“셋째 형님.”

정사낭이 얼른 예를 표했다.

“완전 넋이 나갔네?”

정삼낭이 웃으며 말했다.

“여긴 누이들 없으니까 연극 그만해도 돼.”

정사낭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무언가 말하려다가 돌연 말을 아꼈다. 그 정도 미인을 혼자만 볼 수 있다면 그 얼마나 행운이란 말인가.

“셋째 형님, 무슨 일이에요?”

정사낭이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듣자니 동씨 집안 셋째 낭자가 묵수각에서 시회를 연다기에 너와 함께 갈까 하고 특별히 왔다. 네가 미인이라면 사족을 못 쓰잖아.”

정삼낭이 웃으면서 정사낭의 손을 잡아끌며 나가자고 했지만 정사낭은 흥미가 안 생기는 듯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전에는 동씨 집안 셋째 낭자가 정사낭의 눈에 독보적인 미인이었지만, 방금 그 여인을 보니 세상에 저런 미인이 또 있나 싶었다.

“고맙습니다, 형님. 근데 오늘은 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

정삼낭은 놀랐다. 과거 정사낭이 동씨 집안의 재색을 겸비한 셋째 낭자를 얼마나 쫓아 다녔던가. 그런데 안 간다고?

“정말 미인을 본 거야?”

이상하다는 듯 질문을 던지고는 밖으로 나온 정삼낭은 하인에게 알아본 끝에 정사낭이 방금 전 누이들이 지내는 연못 쪽에 갔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여섯째 낭자와 일곱째 낭자께서 또 싸우셨답니다. 여섯째 낭자께서 일곱째 낭자께 못생겼다고 하셔서요.”

어린 시종이 히히 웃으며 알아온 소식을 전했다. 사흘이 멀다 하고 크고 작은 싸움을 벌이는 육랑과 칠랑에 대해선 다들 이미 습관이 된 터였다. 정삼낭이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랬구나. 미인들의 싸움에 놀랐던 게야. 어쩐지 축 처져 있더라니.”

정삼낭은 마음이 놓이는 듯 덧붙였다.

“난 또 진짜 대단한 미인한테 홀린 줄 알았네!”


반근은 낚싯대를 산석 근처에 아무렇게나 놓아두고 정교랑을 부축해 내려왔다. 사실 낚싯대라기보다는 장대에 가까웠다. 걸려드는 물고기가 없기 때문이다.

“아씨, 그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반근이 또 물으며 가리개를 들어 정교랑에게 씌워 주었다.

산석에서 마당 입구까지는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정교랑은 그 정도의 햇빛도 견디기 힘들었다.

반근은 자신과 아씨가 함께 본 사람에 대해 거의 생각 없이 물어봤다. 자신과 아씨가 함께 이 집에 들어왔고, 따지고 보면 정씨 저택에 들어온 후 아씨보다는 자신이 훨씬 더 많이 외출했는데도 말이다.

반근의 마음속에서 아씨는 이 세상에 모르는 일은 없었다. 과연 반근의 아씨는 반근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 사람은 저쪽에서 걸어왔어.”

정교랑이 말하며 손을 천천히 들어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나이는 15~16살쯤 됐고 평상복을 입은 걸 보면 손님이 아니야. 긴장을 풀고 편히 돌아다니는 걸 보면 시종도 아니지. 아버지에겐 그 정도 나이의 아들이 없으니 대부인 소생의 공자일 거야.”

반근이 아, 하며 문득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씨는 정말 아는 게 많으세요.”

반근이 웃으며 말하자, 정교랑이 반근을 보며 입을 약간 오므렸다.

“너.”

반근이 손을 들어 약간 서툰 움직임으로 반근의 이마를 쿡 찔렀다.

“여기로 생각해. 그럼 금방 알 수 있잖아.”

반근이 히히 웃었다.

“아씨께서 생각하시잖아요. 그러니 전 생각 안 해도 되죠.”

“내가, 평생 너 대신, 생각할 수 있겠어?”

정교랑이 말했다.

“아씨. 전 평생 아씨를 따를 거예요. 절 버리시면 안 돼요.”

반근이 말했다. 이야기를 나누던 둘은 어느새 마당의 문 안으로 들어왔다. 문지방에 앉아 돌멩이를 쥐고 놀던 14~15살쯤 된 몸종이 그 말을 듣고 풉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바보는 어차피 탐내는 사람도 없어. 바보가 바보 따라다니면 평생 노처녀로 늙는 거지, 뭐!”

몸종은 누가 들어도 상관없다는 듯 당당하게 말했다.

“바보는 너지. 우리 아씨는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분이야!”

반근이 반박했다.

“똑똑하신 분, 조씨 아주머니가 오늘 휴가 내서 못 온대. 문을 지키느라 쌀이랑 채소 가져오는 걸 깜빡했으니, 밥은 두 분이 알아서 해 드셔.”

말을 마친 몸종은 돌멩이를 던지고 뛰어갔다. 반근이 소리쳐 봤지만 소용없었다.

“아씨, 사람을 너무 무시하네요. 우리 노야께 가서 일러요.”

반근이 말했다.

“이런 일로 고자질할 거 없어.”

정교랑이 말하며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정을 뻔히 알 텐데도 안 물어보잖아. 우리가 고자질해 봤자 굴욕을 자초할 뿐이야.”

반근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듯 말 듯한 얼굴로 따라 들어갔다.

“그럼 그냥 넘어가요? 정말 방법이 없는 거예요?”

“그게 말이지.”

정교랑이 말했다.

“단언하긴 어려워.”

응? 무슨 뜻이지?

반근은 더욱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씨가 알면 된 거니까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반근은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일만 생각하면 된다.

“아씨, 저녁에 뭐 드시고 싶으세요? 두부랑 완두랑……·.”

반근이 손을 꼽아가며 말했다.

뜻밖

대부인은 월말이면 장부를 대조했다. 벌써 몇 년째 대부인이 맡고 있는 일이어서 눈을 감고 듣기만 해도 대강 알 정도였다.

“왜 지출이 지난달보다 이렇게 많이 늘었지?”

대부인이 눈을 뜨며 물었다. 앞에 일렬로 무릎을 꿇고 있던 집사 부인들이 얼른 장부를 넘기며 살폈다.

“대부인께 아룁니다. 이부인 쪽의 부엌에 해서탕이 1인분 늘었습니다.”

한 집사 부인이 말했다. 해서탕은 값이 얼마 안 나갔다.

대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지금껏 안 먹던 이부인이 왜 갑자기 해서탕을 먹지?

저쪽에서 다른 부인 하나가 또 입을 열었다.

“이부인께서 계절 의복을 추가로 해 입으셨어요.”

대부인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집안에서는 사계절 의복을 정기적으로 지었는데, 왜 명절도 아니고 환절기도 아닌 이때에 갑자기 옷을 추가로 지어 입지?

하지만 아랫것들 앞인지라 의문을 입 밖으로 낼 순 없었다. 그랬다간 말이 와전될 것이다. 특히 형님과 동서 사이라면 더더욱.

“내가 깜빡했구나. 내가 그러라고 한 건데.”

대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집사 부인들은 웃으며 대부인께서 관리하시는 일이 한두 개가 아닌데 어떻게 다 기억하겠느냐고 말했지만 속으로는 훤히 알고 있었다.

오랫동안 대방에 복종하던 이방이 마침내 변한 것이다.

탕약 한 그릇, 옷 한 벌이라고 예사로 볼 일이 아니었다. 여인에게는 아주 작고 미세한 움직임이 가장 진실한 움직임인 법이다. 여러 가지 자잘한 소식들이 정씨 집안 저택에 은밀히 퍼져나갔다.

장부 대조를 마친 대부인은 이번 달도 이렇게 넘어가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심신이 피곤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늘 마음이 묵직했다. 연이어 이어지는 사건 속에 마음이 편할 때가 없었다.

전엔 이러지 않았는데, 언제부터 이랬지?

“어머니, 어머니.”

밖에서 정육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바보랑 한 집에 살기 싫어요!”

아, 그렇지. 바보!

대부인은 퍼뜩 깨달았다. 그 바보를 집에 들인 후부터였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바보가 있은 후로 정씨 집안엔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바보는 어릴 때부터 집안에 먹구름을 드리웠다. 노태야는 화병으로 돌아가셨고 생모도 속을 끓이다가 숨을 거뒀다. 정씨 집안 식구들은 외출도 제대로 못했다.

바보를 도관으로 보내자 집안 분위기는 대번에 좋아졌다. 대방은 사업이 번창했고 이방은 벼슬길이 탄탄대로였으며 현숙한 후처를 들이고 아들딸을 보게 됐다. 정씨 집안은 승승장구했고, 안팎으로 술술 풀려 다들 잘 지냈다.

그런데 하필 그 바보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바보가 돌아오던 날 밤, 언제나 상냥하고 화목하던 이방 부부는 대방 내외 앞에서 대판 싸웠다. 언제나 부드럽고 온화한 동서에게도 그런 성격이 있었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대부인은 다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 한숨만 쉬지 마시고 얼른 저 바보를 내쫓으세요!”

정육랑이 모친의 팔을 흔들며 소리치자 대부인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왜 또?”

대부인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어머니, 그 바보 때문에 전 이제 외출도 못 해요.”

정육랑은 억울하기도 하고 열도 받는 듯 말했다.

“오늘 동 낭자네 집으로 꽃구경 갔다가 놀림을 받았어요. 우리 집에 바보가 돌아온 걸 온 성 사람이 다 알아요.”

강주부 크기의 땅에선 사소한 일도 금세 쫙 퍼지는데 하물며 정씨 집안의 일이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지켜보고 있겠는가. 아는 게 이상할 일도 아니다.

“우리 집 일을 처음 아는 것도 아니잖아. 상대하지 마라, 더 성가셔져. 한동안 바깥출입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 실컷 떠들고 나면 아무도 말 안 해.”

정육랑이 겁쟁이처럼 몸을 사려야 한다니, 이런 치욕이 또 없다.

“어머니, 그럼 저 평생 집 밖에 안 나갈래요. 시집도 안 가고요! 누구한테 시집을 가겠어요! 바보 자매가 있는 신부를 누가 데려가요!”

말을 마친 정육랑은 옷소매를 뿌리치며 뛰쳐나갔고, 대부인이 불렀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대부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육랑은 성격이 너무 제멋대로야.”

대부인이 말했다.

“부인, 여섯째 아씨의 걱정도 일리가 있어요.”

여종이 말했다.

“너도 어린애처럼 굴려고?”

대부인이 여종을 보며 말하자, 여종이 표정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바깥에서 여자아이들끼리 웃고 떠드는 소리라고 하지만, 그런 얘기가 많이 돌수록 안 좋은 건 사실이죠. 특히 우리 아씨들은 전부 혼담이 오갈 나이잖아요.”

대부인이 자세를 똑바로 고쳐 앉으며, 부채를 흔들던 손을 멈추었다. 바보 자매를 둔 게 영예로운 일이 아닌 건 사실이다. 특히 훌륭한 집안일수록 가리고 따지는 게 많은 법.

저녁 무렵 대부인은 대노야와 이 일을 논의했다.

“하지만 무슨 방법이 있겠소. 이미 있는 사람을 없다고 말한다 해서 없어지는 것도 아니니. 바깥에서 뭐라 하든 일단 말을 아낍시다. 주씨 집안도 생각해야 하잖소.”

대노야가 퉁명스레 말했다.

“아니면 이번에도 어디로 보내든가요. 도관이 병주에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우리 집에도 있고.”

“보낸다 해도 그런 사람이 있는 건 사실인데 뭐가 다르겠소.”

대노야가 말하며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감탄했다.

“전남(滇南)에서 온 전차는 역시 훌륭하다니까. 너무 비싸서 그렇지.”

“비싸면 얼마나 비싸다고요. 우리 집이 이만한 차 하나 못 마셔요?”

대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죠. 내가 동서랑 상의해서 조만간 날을 잡아 내보낼게요. 전에 도사도 도관에서 요양하는 게 그 애한테 좋다고 그랬잖아요.”

한낱 바보에게 신경 쓸 대노야가 아니었다. 대노야는 고개를 끄덕인 후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이부인이 문제였다. 더 이상 무슨 일이든 형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하던 예전의 이부인이 아니었다.

“좀 더 기다려 보죠. 지금 내보내는 건 안 좋아요.”

대부인으로선 뜻밖이었다.

“뭘 기다려?”

대부인이 물었다.

“주씨 집안 쪽에서 아직 소식이 안 왔잖아요. 그쪽에서 특별히 사람까지 보냈는데 우리가 곧장 도관으로 보내 버렸다가 그걸 꼬투리 잡아 시끄럽게 하면 큰일인걸요. 저쪽에서 뭐라고 나오는지 기다렸다가 보내죠.”

대부인은 퍼뜩 깨닫고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그건 그렇다고 말했다.

주씨 집안에서 사람을 돌려보내며 무슨 준비를 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아무래도 조심하는 게 좋다.

대부인이 나가는 모습을 보며 이부인은 입을 약간 오므렸다.

“내보내 봤자 어차피 우리 이방 사람이잖아. 명색이 내가 그 아이 어미인데 나중에 소문 나 봤자 손가락질 받는 건 나일 테고. 뭔데 자기만 이득 보고 좋은 소리까지 들으려는 거야.”

이부인이 투덜거리며 둥글부채를 탁자에 탁 내려놓고는 여종에게 말했다.

“이 부채가 별로네. 듣자니 진보방에 새 부채가 나왔다던데 가서 몇 개 골라 와라.”

도관으로 보내는 일은 잠시 미뤄 두기로 했지만, 그래도 대부인은 정교랑의 거처를 바꾸기로 했다. 딸 정육랑이 정말로 두문불출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칠랑의 말로는 그 바보가 마당에서 지내는 통에 놀랄까 봐 마당에서 놀지도 못한다고 했다.

정교랑은 어디서 지내든 상관없었기에 순순히 짐을 옮겼다.

정씨 집안의 사람에게 누가 거처를 옮기는 건 큰일 축에도 못 들었다. 하지만 누가 병이 났다면 그건 큰일이었다.

대노야가 정사낭의 거처 마당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방 안에는 벌써 몇 명이 서 있었다. 정사낭의 유모는 우느라 일어나지도 못했다.

“멀쩡하던 애가 왜 갑자기 병이 나?”

대노야가 물으며 침상을 보니 정사낭이 창백한 안색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누워 있었는데 이미 숨이 편치 않았다.

“아버지, 의원 말로는 넷째 오라버니가 상사병에 걸린 거래요.”

정육랑이 얼른 대답했다. 숨기기 힘든 웃음기가 목소리에 묻어났다. 그 말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대부인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침상 근처에 주저앉아 있었다.

“여섯째 아씨, 그게 아니라 넷째 도련님은 귀신에 들리신 거예요.”

정사낭의 유모가 울며 말했다.

아주 엉망진창이군. 대노야의 얼굴이 한층 더 일그러졌다.

대부인의 근심은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더 늘어갔다.

정사낭의 병은 하루가 다르게 심해졌고, 의원들이 줄줄이 다녀갔지만 이제는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겠다는 말까지 나오는 터였다.

아들이 하나뿐인 이방에 비해 대방은 아들이 넷이나 됐지만 많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누군가는 가업을 이어야 하고, 적출이든 서출이든 정씨인 이상 다들 대노야의 귀한 보배였다.

더구나 정사낭은 적출로 대부인의 작은아들이었다. 느지막이 얻은 자식이라 더없는 총애를 받았다.

대노야는 한숨을 쉬었고 대부인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눈물을 보였다. 정씨 집안에 무거운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늘 아웅다웅하며 싸우던 정육랑과 정칠랑도 요즘은 잠잠했다. 자매들이 모여도 말다툼을 하기보다는 오라버니의 병세를 근심했다.

집안에 오라비가 많으면 시집을 가서도 기를 펴고 살 수 있다. 집에 있는 오라비들은 훗날 자매들의 든든한 뒷배가 될 터였다.

“연못에서 귀신에 들린 거래.”

정칠랑은 기겁을 하며 정오랑을 끌어안았다.

“병이 난 거겠지. 겁주지 좀 마, 육랑.”

정사랑이 말하자 정육랑이 말을 이었다.

“멀쩡하던 사람이 왜 갑자기 병에 걸려? 셋째 오라버니 말로는 넷째 오라버니가 연못에서 미인을 본 후로 저렇게 된 거랬어.”

거기까지 말한 정육랑은 더욱 목소리를 낮췄다.

“연못에 갑자기 미인이 왜 나타나? 그게 귀신이 아니고 뭐겠어?”

“나 이제 연못 근처에서 안 살 거야!”

놀란 정칠랑은 비명을 지르더니 유모를 부르면서 울며 뛰쳐나갔다.

방 안에 남은 자매들은 그런 정칠랑 때문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칠랑이 나간 후 방이 갑자기 조용해지면서 분위기가 기이해졌다.

“하여간 겁도 많아. 난 어머니한테 갈래.”

정육랑이 손을 내저으며 말하고는 일어나 자리를 떴다. 정사랑과 정오랑이 눈을 마주쳤다.

“언니, 우리 방 같이 쓰자. 우리가 함께 서두르면 어머니 생신 선물로 드릴 휘장도 더 빨리 만들 수 있잖아.”

정오랑이 말하자 정사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칠랑이 연못 근처에서 모친의 곁방으로 이사하자 정육랑도 모친의 집안일을 돕는다는 구실로 대부인의 방 쪽으로 거처를 옮겼다. 정사랑과 정오랑 자매는 한 방을 썼다. 매일 밤 마당을 대낮처럼 훤하게 비추는 등불은 밤새 꺼지지 않았다.

연못에 귀신이 있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몸종들조차 연못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더위를 피하기에 좋았던 연못은 더욱 서늘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대노야와 이노야는 초조해 어쩔 줄 몰랐다.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하인들을 벌해도 소문이 잠잠해지지는 않았다. 소문을 잠재울 쉬운 방법은 두 사람도 알고 있었다. 딸들의 거처를 다시 연못 근처로 옮기고 정사낭의 병이 얼른 완쾌하면 될 일이다.

전자는 두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신속하게 해낼 수 있었지만 딸들이 울며 매달리고 부인들이 쉽게 동의하지 않을 터였고, 후자는 더욱 역부족이었다. 더 좋은 의원을 수소문하는 것 외에는 속수무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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