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랑의경 1권
차례
기이한 밤
의원을 모셔오다
교랑
은혜
빗길
북정(北程)
적장녀(嫡長女)
어찌하나
한담
간식
주씨 가문
-기이한 밤-
삼경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을 무렵, 빈소 앞을 지키는 사람은 더욱 줄어들었다. 하녀 둘이 화로에 숯을 넣으며 하품을 했다.
“언니, 우리도 잠깐 눈 좀 붙이자.”
한 하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안 돼, 우리까지 가 버리면 아씨 영전을 지킬 사람이 없잖아.”
다른 하녀가 약간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말을 꺼낸 하녀가 입을 삐죽거렸다.
“그러게 누가 일찍 돌아가시랬나. 따님도 저렇게 어리니 몇 번 훌쩍이기나 하면 다행이지, 빈소를 지키는 건 말할 것도 없고.”
하녀가 옆에 있는 하녀를 재차 잡아끌었다.
“가자, 가. 좀 이따 오면 되지. 대노야도 나 몰라라 하시는데 뭘 겁내.”
결국 남은 하녀도 몸을 일으켰다. 두 하녀가 조잘대며 밖으로 나갔다.
“그러게 자기 몸부터 챙겨야지. 일찍 죽으면 남 좋은 일만 시킨다니까…….”
밤바람이 들이치면서 종이로 만든 꽃들을 스치는 소리가 나자, 새하얀 빈소 안은 더욱 쓸쓸해졌다.
아직 옻칠도 하지 않은 관 앞에 놓아 둔 화로에 남아 있던 숯은 마지막으로 화르르 타오르더니 이내 재가 되어 사라졌다. 향로에 꽂아 둔 향 세 개도 거의 다 탔을 무렵이었다.
자그마한 형체 하나가 문 밖에서 잽싸게 들어왔다. 키가 작아 탁자의 다리에도 미치지 못하는 터라 눈앞에 있는 관을 보려면 고개를 젖히고 올려다봐야 했다.
서너 살쯤 된 여자아이였다. 커다란 눈에 희고 보드라운 피부의 얼굴이었지만, 아무렇게나 걸친 겉옷에 머리도 산발한 채였다.
여자아이는 뚜껑도 덮지 않은 관을 멍하니 보다가 천천히 다가갔다. 관 옆에 있던 등받이 없는 작은 의자를 붙잡고 몇 번 실패한 끝에 결국 올라섰다. 손으로 관을 꼭 붙잡은 채 천천히 중심을 잡고 서서 관 안을 들여다봤다.
빈소 안을 환히 비추는 하얀 촛불의 불빛 아래, 젊은 부인이 관 안에 조용히 누워 있었다.
둥근 얼굴은 분을 바른 탓에 더욱 희고 고와 보였다. 오뚝한 코와 앵두 입술, 풍성한 흑발에 갖가지 진주와 비녀 장식을 한 여인은 정교하게 수놓은 짙푸른 남색의 비단 수의 차림이었다. 목에 있는 진주 목걸이는 족히 세 번은 두른 듯 보였는데, 일렁이는 촛불 불빛 아래 더욱 눈부시게 빛났다.
여자아이가 손을 내밀며 재잘댔다.
“어머니, 어머니. 일어나서 안아 주세요.”
작고 여린 팔로 관을 간신히 받치고 있다 보니, 안에 있는 사람을 끌어내기는커녕 안으로 손을 뻗는 것조차 힘겨웠다. 하지만 여자아이는 까치발을 선 채 계속 시도했다.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빈소의 적막을 깼다.
여자아이가 고개를 돌리자, 두 하녀가 빈소 입구에 서 있는 게 보였다. 창백해진 얼굴로 겁에 질려 여자아이를 보고 있었다.
“어머니가 날 불렀어.”
여자아이가 손가락으로 관을 가리키며 두 하녀에게 해명했다.
그 말에 두 하녀는 결국 정신줄을 놓아 버렸다. 두 하녀는 날카로운 비명을 내지르며 그대로 까무러쳤다.
거리 전체를 차지한 장씨 집안 대저택에서 나는 소란스러운 소리가 순식간에 퍼져 나가면서, 초여름의 희미한 달빛마저 움찔 움직였다.
대저택의 가장 서쪽에 있는 작은 집 몇 채는 장씨 집안의 소유가 아니었다. 성 안을 흐르는 물은 이곳에서 시작해 굽이굽이 흘러가며 이곳을 1년 내내 어둡고 습한 곳으로 만들었다. 이끼로 가득한 곳이었다.
급한 발걸음 소리가 거리에 총총 울려 퍼지며 적막을 깼다.
발걸음 소리는 어느 작은 집 앞에서 멈췄다. 작은 대문 옆으로 등잔불 두 개가 걸려 있었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 희미하고 누런 등잔불이 문 앞에 선 사람을 비췄다.
일행은 사내 둘에 여인 둘, 총 네 사람이었는데 그중 한 여인은 비단 강보를 가슴에 품고 있었다. 너무 급히 걸었는지 네 사람은 잠시 숨부터 골랐다. 이윽고 한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문을 두드렸다.
등불 아래의 나무문은 볼수록 낡고 볼품없어 보였다. 손을 문에 가져다 댔을 뿐인데, 끼익 소리를 내며 문이 저절로 열렸다.
야심한 밤에 그런 소리까지 나며 덜컥 문이 열리자, 그렇지 않아도 긴장하고 있던 네 사람은 놀라 기겁을 했다. 두 여인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반쯤 열린 문을 겁에 질린 눈으로 바라봤다.
등불이 절반만 들이친 탓에, 불빛이 닿지 않는 곳의 어둠이 부각되어 더욱 스산해 보였다.
“정, 낭자.”
사내가 이까지 덜덜 떨며 입을 열었다.
“저녁인데 문도 안 잠그고 계세요.”
사내의 말소리가 공포에 질린 분위기를 누그러뜨렸다. 강보를 끌어안고 있던 여인이 심호흡을 하고 앞으로 한걸음 나섰다.
“정 낭자.”
여인이 문 안쪽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소리쳤다.
“정 낭자, 정…….”
갑자기 작아진 말소리와 함께, 문 안의 어둠 속에서 등롱 하나가 표표히 다가오는 게 보였다. 동시에 발걸음 소리도 희미하게 들렸다.
“진료 받으러 오셨어요?”
가냘픈 여인의 목소리였다.
등롱이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그 뒤에 있던 담황색 옷을 입은 어린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봉황의 눈처럼 위로 올라간 눈초리에 오뚝한 코, 붉은 입술을 가진 소녀였다. 입술 아래로는 미인 점까지 있어 생기가 넘치고 호감을 사는 인상이었다.
음산하고 공포스러운 분위기가 일거에 걷히자, 대문 밖에 있던 네 사람은 마음을 놓았다.
“네, 맞아요. 늦은 시간에 실례하게 됐네요. 우리 아기씨께서 좀 안 좋으셔서요.”
강보를 안고 있는 여인이 급히 앞으로 나서며 강보를 펼쳐 보였다. 강보 안의 여자아이는 여인의 어깨에 기대 곤히 잠들어 있었다.
담황색 옷을 입은 소녀가 몸을 앞으로 내밀어 힐끔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따라오세요.”
네 사람이 급히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담황색 옷을 입은 소녀가 고개를 돌리고 손을 내저으며 저지했다.
“이분만 아이를 데리고 들어오시면 돼요.”
결국 두 사내와 한 여인은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추고, 다른 여인이 아이를 안고 혼자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등롱이 멀어지면서 두 사람 역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무시무시한 맹수에게 집어삼켜진 듯이.
자갈이 깔린 길은 어제 내린 비로 미끄러웠다. 물가 근처에 있는 어두컴컴한 집이다 보니 공기에도 습한 기운이 많았다.
작은 집에 등롱조차 걸지 않은 탓에, 소녀의 손에 들린 등불에 의지해 걸어야 했다. 주변의 캄캄한 어둠이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이렇게 늦은 시각에 폐를 끼치게 됐네요.”
아이를 안은 여인이 이내 입을 열자, 숨 막힐 듯한 분위기가 그제야 다소 누그러졌다.
“괜찮아요.”
담황색 옷을 입은 소녀가 상냥하게 대답하며 여인을 안내했다. 통로 역할을 하는 대청을 지날 때는 등롱을 살짝 뒤로 옮기는 배려까지 했다.
“계단 조심하세요.”
여인이 살짝 기우뚱하더니 바로 중심을 잡으며 섰다. 고개를 들자 캄캄한 어둠 속에 등잔불 하나가 불을 밝히고 있었다. 눈이 환한 빛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하자, 여인은 불빛이 나오는 방 앞에 서 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소녀가 총총 앞으로 나서며 문을 열었다. 문 안에서 빛이 쏟아져 나왔다. 여인은 순간 눈이 부셔서 살짝 고개를 돌렸다가, 잠시 후에야 문 안을 들여다봤다.
가운데에 궁등(宮燈)이 하나 있었다. 뒤로는 얇은 비단에 꽃을 수놓은 6절 병풍이 있고, 그 뒤로 옆으로 누운 사람의 형체가 어렴풋이 비쳤다.
저게 그 정 낭자인가?
“아씨, 진료 받으러 왔대요.”
이미 문 안으로 들어간 소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병풍 뒤에서 옆으로 누워 있던 사람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불빛 속에 검은 머리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환자를 들여보내.”
부드러운 여자 목소리가 병풍 뒤에서 전해졌다.
여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아기를 안은 채 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움직이지 마세요.”
담황색 옷을 입은 소녀가 재빨리 나오며 손을 뻗었다.
“아이를 이리 주세요.”
여인은 잠시 망설이다가 품에 있던 여자아이를 소녀에게 건네고, 소녀가 아이를 안고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문을 닫지 않은 덕에 소녀가 여자아이를 안고 병풍 뒤로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등불의 불빛이 병풍을 비추면서 여인의 옆모습이 비쳤다. 품이 큰 옷을 입고 있는지 손을 뻗을 때면 큰 그림자가 생기곤 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소녀가 몸을 숙이더니 아이를 안고 걸어 나왔다. 여인이 얼른 손을 내밀어 아이를 받았다. 품속에 있는 아이는 데려올 때처럼 홍조를 띤 얼굴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갑자기 놀란 탓에 풍사(風邪)가 들어 그래요. 침을 놨으니 괜찮을 거예요. 경련이 일어나거나 대소변을 못 가리는 일도 없을 거고요.”
병풍 뒤에서 나긋나긋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여인은 기뻐하면서도 흠칫 놀랬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병세를 이렇게 잘 알고 있다니. 진단만 들어도 정씨 부인의 의술이 얼마나 고명한지 알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낭자.”
여인은 얼른 예를 표하며 품속에서 전대를 꺼냈다.
“실례 많았습니다.”
여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방 안에서 들리는 여자의 목소리가 말을 끊었다.
“이 아이의 병은 별거 아니에요. 댁의 관 안에 누워 계신 그분의 병이 문제죠. 그분은 정말 치료 안 할 거예요?”
뭐라고?
여인이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들었다. 다시 옆으로 누운 모습이 병풍 뒤로 비쳤다.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있는 탓에 몸이 굴곡져 보이면서, 어두운 밤과 누르스름한 불빛, 얇은 병풍에 수놓은 꽃이 한데 어우러져 기이한 아름다움을 뿜고 있었다.
관 속에 있는 건 죽은 사람인데, 치료를 한다고? 정 낭자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지?
오경쯤 됐을 무렵, 유모가 조심스레 휘장을 젖혔다. 비단 이불 속에 잠든 여자아이는 놀란 탓인지 손을 살짝 떨었다. 유모는 순간 숨을 멈추고 긴장했지만, 여자아이는 잠깐 부르르 떨더니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유모가 비단 이불 속으로 손을 뻗어 만져도 여자아이는 깨지 않았다. 유모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다시 휘장을 친 다음 뒤를 돌아 화려하게 치장한 여인들을 바라봤다.
“좀 어떠냐?”
여인들 중 백발이 성성한 노부인이 목소리를 낮춰 다급히 물었다.
“마님, 아기씨께선 오줌을 지리지 않으셨습니다. 잠에서 깨지도 않으셨고요. 돌아온 후로 쭉 주무셨는데 경련도 없으셨습니다.”
유모가 소리 죽여 대답했다. 그 말에 방 안에 있던 여인들이 모두 안도했다.
노부인이 손을 휘휘 내젓고는 먼저 나갔다. 나머지도 얼른 따라 나갔다.
밖에서는 어느덧 날이 밝고 있었다. 마당 곳곳에는 하얀 등롱이 걸려 있고, 오가는 이는 전부 상복을 입고 있는 터라 보기만 해도 마음이 무거워졌다.
“여도사 유 씨가 왔습니다.”
여종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노부인이 잠시 주저하더니 말했다.
“잠깐 기다리라고 해라. 일단 상황 좀 보고 얘기하자.”
집안에 초상이 난 마당에 여도사를 불러 의식을 치르면, 남들이 뭐라 손가락질하며 뒷말을 옮길지. 정말 골치 아픈 일이다.
멀쩡하던 며느리가 왜 갑자기 발을 헛디딘 건지, 하필 발을 헛디딘 일로 숨이 멎은 건지. 정말 환장할 노릇인 건 자기 방에서 발을 헛디뎠다는 사실이고, 그보다 더 환장할 일은 마침 그때 고부간에 말다툼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노부인이 유모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그러니까 정 낭자 말로는…….”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밖에서 곡소리가 들렸다. 아직 날이 채 밝기도 전이라 날카로운 여인의 울음소리는 더없이 스산하게 들렸다.
마당에 있던 사람들의 안색이 변했다.
“사돈댁 사람들이 왔어요!”
몇몇 여종들이 황급히 뛰어 들어오며 말했다.
빈소 밖에 선 사돈댁 큰처남인 대소야는 가슴이 미어터지는 듯했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누이의 부음 앞에 일가는 이성을 잃을 뻔했고, 부친은 소식을 듣자마자 그대로 쓰러져 혼절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모친께는 알릴 엄두도 나지 않았다. 사돈댁 대소야는 황망하여 어쩔 줄 몰라 하는 집안사람들을 간신히 다독이고, 형제들 셋을 대동한 채 매부의 집으로 들이닥쳤다.
상복을 입고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은 한 가닥 남은 희망마저 끊어 버렸다. 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눈에 들어온 텅 빈 빈소의 모습에 사돈댁 사람들은 슬픔을 못 이기고 정신을 놓을 뻔했다.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곡하는 사람은 관두고 영전 앞에 향불 하나 없다니! 죽어서도 이렇게 무시를 받는데, 살아생전엔 또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지.
처남들은 허둥대며 맞이하러 나오던 매부를 순식간에 에워싸고 매섭게 때리기 시작했다.
“사돈댁 어르신들, 빈소를 안 지키려던 게 아니라 귀신이 나와서 그래요.”
여종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쳐 해명했다.
“퉤, 켕기는 게 없으면 귀신이 온들 무서울 게 뭐 있어! 내 동생을 죽여 놓고 웬 귀신 타령이야!”
사돈댁 여인들도 귀부인 체면을 다 내려놓고 울고불고 하며 욕을 해대는 한편, 데려온 노복들을 시켜 이쪽 집안 하인들을 때리게 했다.
빈소 밖은 아수라장이 됐다. 노부인을 비롯해 뒤에서 나오던 여인들은 그 모습에 놀라 나설 엄두조차 못 냈다. 하지만 피한다고 능사는 아니지 않은가.
“마님, 곧 날이 밝겠어요.”
여종이 재촉하듯 말했다.
이 소란스러운 소리가 거리에서도 들릴 텐데, 날이 밝으면 더 많은 사람이 구경하러 몰려올 게 아닌가!
노부인은 몸을 떨었다. 밖에서 사돈댁 사람들이 관아에 고발하겠다며 난동을 부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일을 정말 관부로 끌고 가면, 대대로 지켜온 집안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꼴이 된다.
청렴한 집안으로 몇 대째 지켜온 명성을 자신의 손으로 망쳐 버리면, 장차 무슨 낯으로 조상님들을 뵙는단 말인가!
업보로다.
“마님, 어떡하죠?”
며느리와 여종들이 거듭 채근했다.
어떡하냐고? 지금 이 판국에 무슨 방법이 있겠어? 사람이 안 죽은 게 아니고서야!
사람이 안 죽었다?
노부인이 움찔하더니 뒤돌아 소리쳤다.
“유모, 유모! 어서 정 낭자를 모셔 오게!”
-의원을 모셔오다-
“사돈댁, 이러지 마시오!”
노부인은 지팡이를 짚고 문 밖에 선 채 아수라장이 된 빈소를 쳐다보고 있었다. 노부인의 뒤로는 간신히 침착한 척 마음을 다잡고 있는 부인들이 서 있었다.
이쯤 되자 남녀 간의 내외고 뭐고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그랬다가는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는 노부인의 체면마저 구겨질 터였다.
“안사돈 어른, 여기가 어디라고 나오십니까?”
사돈댁 대소야가 소리쳤다.
“잘 나오셨습니다. 함께 관아로 가시죠!”
“사돈, 오해하셨소.”
노부인이 지팡이를 짚은 채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해요?”
처남댁까지 나섰다. 방금 전까지 울고불고한 탓에 갈라진 목소리로 냉소하며 말했다.
“안사돈 어른, 사람이 죽었어요. 오해인지 아닌지는 안사돈이 결정할 일이 아니죠. 아드님의 첩실을 들이려 했을지, 새 부인을 들이려 했을지 누가 알아요?”
노부인의 안색이 변했다. 숨길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며느리가 관에 누워 있게 된 건 방에서 발을 헛디뎠기 때문이고, 발을 헛디딘 건 두 사람의 말다툼 때문이었다. 분을 못 이긴 며느리가 씩씩거리며 홱 나가려다가 일어난 불상사였는데, 며느리가 그토록 분노했던 건 노부인이 아들의 첩을 들이는 문제를 거론해서였다.
이게 왜 잘못이지? 아들은 집안의 장남인데, 혼인하고 지금껏 아들 하나 못 낳은 채 딸만 줄줄이 낳지 않았는가. 집안에 있는 여자 잘못이 아니야? 부인 된 도리로서 첩이라도 들여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하지 않느냐 말이다.
집안의 대를 있는 건 지극히 당연한 도리다. 잘못한 게 없다고! 단 하나 잘못이 있다면, 며느리가 노부인의 방에서 죽었다는 사실이다.
노부인은 손에 든 지팡이를 꽉 쥐었다. 손바닥은 땀으로 흥건했다.
“운랑은 안 죽었소!”
노부인이 일갈했다.
그 말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멈칫했다. 우선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부터 어리둥절했고, 이어 하나둘 어리둥절하여 어쩔 줄 몰라 했다.
아침 해는 아직 떠오르기 전이고, 마당에 있던 등롱은 빛을 잃어 푸른 새벽빛이 자욱한 때였다. 맞은편에 있는 사람조차 누군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사람들의 눈에 노부인은 구름이나 안개 속에 있는 듯 보였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사돈댁 대소야가 소리쳤다.
“운랑은 안 죽었다고 했소!”
입을 뗀 노부인의 말투엔 거침이 없었다.
거침없지 않으면 어쩔 텐가. 이제는 눈 딱 감고 밀어붙이는 수밖에.
이번엔 모두가 똑똑히 들었다. 사돈댁 사람들이 경악한 것은 물론이고 이쪽 집안 식구들까지 놀라 어안이 벙벙해졌다.
노부인께서 충격을 받아 실성하셨나?
처남들한테 맞아 흉측해진 몰골이 된 아들은 어머니부터 걱정했다. 기다시피 일어나 사돈댁 대소야의 멱살을 쥐며 소리쳤다.
“어머니께서 잘못되시면 다들 가만 안 둘 줄 알아!”
이제는 전세가 뒤바뀌었다. 일순간 마음속에 기쁨이 번졌다. 이젠 겁 안 내도 돼!
잠깐 서로를 응시하던 양측이 다시 싸우려는데, 노부인이 지팡이를 내리치며 언성을 높였다.
“다들 그만! 내 말 못 들었소? 운랑은 안 죽었다니까! 병이 난 거라고! 지금 병을 치료하는 중이오!”
양측 모두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하녀들은 윗전의 부적절한 언사를 목격이라도 할세라 차를 올린 후 서둘러 자리에서 물러났다.
사람이 많으면 공연한 말도 많이 나오는 법. 다들 지체 있는 신분이다 보니 문을 닫고 해결하는 게 서로에게 좋았다.
“이렇게 큰 판을 벌여 놓은 게,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라고요?”
사돈댁 대소야가 맞은편에 있는 사람을 쭉 훑으며 물었다.
“그렇소. 나와 그 의원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노부인이 단정한 표정으로 말했다.
밖에서 여종이 총총 발소리를 내며 들어오더니, 사돈 처남댁 귓가에 대고 무언가를 나지막이 고했다.
사돈 처남댁이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탁자 위로 내던지더니 냉소하며 말했다.
“안사돈 어른. 우릴 바보로 아세요? 다 확인했어요. 숨도 안 쉬고 몸도 뻣뻣하게 굳었는데 무슨 병을 치료해요! 실성하셨어요?”
“정 낭자가 병이라고 했으면 병인 거요!”
노부인도 물러서지 않고 기세를 높이며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노부인의 태도를 보아하니 실성한 게 아니라 사실인 듯싶었다. 사돈댁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정 낭자가 누구죠?”
누군가가 물었다.
정 부인이 누구냐는 질문에 순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대답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두 달 전쯤이었다. 오래도록 비어 있던 물가 근처 집에 세가 나갔다. 오밤중에 이사를 들어온 건지 이웃 중에는 누군지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튿날이 되어서야 어린 몸종 하나가 물건을 사러 나왔다. 상냥하고 사근사근한 말투로 남방의 장강, 회화 지역 말씨를 쓰는 아이였다.
“의원입니까?”
사돈댁 대소야가 물었다. 문가에 서서 대기하고 있던 여종이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원래 잘 몰랐는데 얼마 전에 동쪽 거리 벙어리네 집 어린 아들이 고열에 시달리며 헛소리를 늘어놓았거든요. 여도사 유 씨도 보더니 가망이 없다고만 했어요. 벙어리네 집에선 대성통곡을 하며 죽느니 사느니 했죠. 그때 그 정 낭자의 몸종이 마침 길을 지나다가 그 꼴을 보고는 자기네 아씨한테 가면 치료할 수 있다는 거예요. 벙어리네 식구는 치료할 수 있다는 말에 냅다 아이를 안고 달려갔죠. 오전에 애를 보냈는데 오후가 되니까 의식을 되찾았어요. 밥을 거하게 한 끼 먹더니, 이튿날엔 멀쩡하게 침상에서 내려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굴지 뭐예요.”
문가에 서 있던 이들은 허드렛일 하는 여종이었다. 이들은 이러쿵저러쿵 말 옮기기를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이웃에서 일어난 신기한 일은 가장 좋아하는 화젯거리였다. 신이 나서 저도 모르게 손짓 발짓까지 섞어가며 떠들어댔다.
여종들은 노부인이 무거운 헛기침을 한 뒤에야 퍼뜩 정신을 차려 어느 안전인지 깨닫고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정식으로 의원을 하는 여인이 어디 있누. 대충 민간요법을 쓴 게 운 좋게 들어맞았던 게지.
사돈댁 대소야는 논할 가치도 없다는 눈치였다.
“글쎄, 아니라니까요.”
정통한 소식통임을 자부하는 여종은 체면이라도 깎인 양 대범하게도 손까지 내저으며 끼어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그 후엔 동쪽 시장 백정의 노모가 식탐을 부려 복숭아를 많이 먹었다가 설사병이 나서 거의 사경을 헤맸거든요. 근데 정 낭자네 몸종이 고기를 사러 왔다가 그 말을 듣고는 또 자기네 아씨한테 데려갔어요. 오후에 실려 갔는데 저녁때 멀쩡하게 나오더니 이튿날엔 지팡이를 짚고 손주까지 보더라니까요.”
사돈댁 대소야가 미간을 찌푸렸다.
문가에 있는 여종들은 서로 앞다투어 말을 빼앗으며 자랑을 늘어놓다가, 사돈댁 대소야가 인상을 쓰자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 후로 정 낭자가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이 진료를 받으러 몰려왔죠. 그런데 그 댁 몸종이 한다는 말이, 자기네는 문을 안 닫으니까 누구든 진료를 받을 거면 그냥 들어오면 된대요. 대신 조건이 하나 있는데, 불치병이 아니면 안 고친대요.”
그 말이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여종이 잠시 숨을 돌렸다.
“불치병이 아니면 안 고친다는 게 무슨 말이지?”
사돈댁 쪽에 있던 한 부인이 못 참고 물었다.
이제 화두는 정 낭자였다. 여종은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문 안에 있는 사람이나 문 밖에 있는 사람이나 똑같아 보였다.
“그 말인즉, 머리 아프고 열나고 기침하는 것처럼 생명에 지장이 없는 병은 안 고치니까 다른 의원을 찾아가란 거죠. 다른 의원한테서 못 고치는 병이니까 죽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판명을 받은 사람만 고친대요.”
그 말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별 오만방자한 말이 다 있네.”
부인들이 쑥덕거렸다.
“그건 오만이 아니에요.”
또다시 여종이 나섰다.
“정 낭자 말로는 자신은 아녀자라 의술을 행하는 게 적절하지 않은데, 생로병사의 고통에 시달리는 중생을 보기 딱해 어쩔 수 없이 나서는 거래요.”
그 말에 몇몇 부인은 자비롭다며 염불을 외기도 했다. 하지만 자비롭다고 느끼는 건 여인들뿐이었고, 사돈댁 대소야나 이 집 아들은 입을 삐죽거렸다.
의술을 행하는 게 적절치 않긴. 체면을 차리려고 하는 말이지.
“그간 정 낭자를 찾아간 사람들은 전부 중병에 걸린 사람들이었는데, 다 나았어요.”
여종이 말을 마무리 지었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나지막이 말을 주고받았다.
세상엔 기이한 사람도, 이상한 일도 많은 법. 황당하고 터무니없긴 하지만 전부 부정할 수는 없지.
“그럼 내 누이는 어떻게 된 겁니까? 그 말이 사실이면 빨리 치료하지 않고, 이게 무슨 짓이죠?”
사돈댁 대소야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액막이를 하고 있소.”
노부인은 눈 하나 까딱 안 하고 말하다가, 사돈댁 대소야의 눈썹이 꿈틀대는 걸 보고는 얼른 한마디 덧붙였다.
“정 낭자가 한 말이오. 이건 더없이 진지한 일이라오. 그래야 효과가 있댔소.”
“대체 무당이랍니까, 의원이랍니까? 무슨 액막이를 해요!”
사돈댁 대소야의 얼굴에 핏줄이 튀어나왔다.
액막이라니, 하마터면 부모님 초상까지 치를 뻔했는데! 이런 액막이가 어디 있어?
“난 의원이 아니오, 난 모른다고.”
노부인이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내 며느리의 목숨을 구하고 싶을 뿐이오. 장례뿐 아니라 나도 따라서 관 속에 들어가 누워 있으라 해도 기꺼이 그럴 거요.”
노부인의 단정하고 엄숙한 표정을 보고 있노라니, 사돈댁 여인들은 송구한 마음까지 들었다. 며느리를 위해 그런 일까지 할 수 있는 시어머니가 세상에 몇이나 있겠나.
사돈댁 대소야가 마른기침을 했다.
“말씀만 번드르르한들 무슨 소용입니까.”
냉소를 지으며 말하긴 했지만, 막 도착했을 때처럼 화를 억누르지 못해 집이라도 부술 듯한 표정은 아니었다.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곧 노부인에게로 눈길이 모아졌다.
하긴, 말만 번지르르한들 무슨 소용이야. 중요한 건…….
“정 낭자를 왜 아직도 안 모셔온 것이냐?”
노부인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호통을 쳤다.
“날이 밝지 않았느냐!”
문 밖에서 발걸음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아이의 유모가 뛰어 들어왔다.
“정 낭자가 온 것이냐?”
노부인이 못 참고 일어나서 물었다.
정 낭자는 대체 어떤 인물이란 말인가.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급히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문 밖에는 옅은 안개가 걷히고 새벽빛이 밝아지고 있었지만, 사람은 없었다.
“그 댁 몸종 말로는 아씨께서 몸이 안 좋아 출타하기 힘드니 병자를 그리로 데려오랍니다.”
유모가 떠듬떠듬 말했다. 그때까지 문가에 서 있던 여종은 그 말에 윗전의 명도 기다리지 않고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떠들어댔다.
“맞습니다, 맞아요. 정 낭자는 바깥출입을 절대 안 해요. 늘 병자를 데려오라고 하죠. 게다가 가족 한 사람만 빼곤 못 들어오게 하고요.”
“어서 데려가게.”
노부인이 급히 말했다. 노부인이 바라던 바였다. 차라리 그리로 데려가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는 사돈 식구한테 책잡힐 일이 줄어들지 않겠는가.
하인들이 대답하며 자리를 떴다.
“잠깐!”
사돈댁 대소야가 일어서더니, 유모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방금 뭐라고 했지? 그 정 낭자라는 자가 몸이 안 좋다고?”
유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집 몸종에게 들은 말이었다.
“자기 병도 못 고치는 자가 무슨 불치병을 고쳐!”
사돈댁 대소야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아씨께서 편찮으시든 말든 무슨 상관이죠? 그리고 의원이 제 병 못 고친다는 말도 몰라요?”
문 안에 선 몸종이 문가에 있는 서슬 퍼런 사내를 보며 따져 물었다. 위축된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병 고쳐 달라고 부탁하는 건 댁들이지 우리가 아니에요. 우리가 뭐 빚진 거라도 있어요? 고치기 싫음 말든가!”
몸종은 콧방귀를 뀌며 문밖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문에서 비켜서요. 남의 집 문 막지 말고!”
지금껏 부친 말고는 누군가로부터 이런 꾸중을 들어 본 일이 없는 사돈댁 대소야는 기가 차서 눈을 부라렸다.
“사돈댁, 그만 고집부리시오. 운랑의 치료가 지체되면, 그게 누구 잘못이겠소?”
노부인이 옆에서 말했다. 사돈댁 대소야는 더욱 말문이 막혔다.
누구 잘못이냐고? 그럼 누이가 이렇게 된 게 사돈댁 대소야 잘못이란 말인가?
“나도 같이 들어가야겠습니다.”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건 안 되지. 진랑을 들여보내는 게 나을 것 같소.”
노부인이 말했다.
뒤에 있던 아들이 얼른 앞으로 나서며, 검은 천으로 덮은 관을 들고 있는 네 사내를 재촉해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안 됩니다. 두 분은 누이와 한 핏줄이 아니잖습니까. 내 누이이니 내가 같이 들어가는 게 맞죠.”
사돈댁 대소야가 냉소하며 말했다. 저쪽에 있던 정 낭자의 몸종이 몸을 돌려 먼저 들어가며 말했다.
“딱 한 사람만 같이 들어갈 수 있어요. 환자를 본채로 옮긴 후 모두 물러나세요.”
분명 여름인데도 마당에 들어서니 서늘한 기운이 엄습했다. 나막신을 신은 사돈댁 대소야는 자갈 깔린 길 위의 이끼에 미끄러지기라도 할세라 조심조심 걸었다.
관이 안채로 들어가자 몸종이 얼른 사람들을 내쫓고는 안으로 들어서려는 사돈댁 대소야 앞을 막아섰다.
“밖에서 기다리세요. 저희 아씨께서 치료하실 땐 아무도 보면 안 돼요.”
이런 경우가 어디 있단 말인가! 사돈댁 대소야가 눈을 부라렸다.
대소야는 눈만 부라렸는데 몸종은 손을 양 허리에 대고 고개까지 쳐들며 눈을 부라리더니, 안으로 들어가서는 쾅 문을 닫아 버렸다.
명색이 군자란 사람이 무턱대고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여인의 거처가 아닌가.
방 안에서는 부스럭부스럭 움직이는 소리만 들릴 뿐,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정상이 아니야, 무당인지 의원인지.
사돈댁 대소야는 뒷짐을 진 채 마당 안을 서성거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노부인 일행도 문 밖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어머니, 말씀하신 게 참입니까?”
아들이 나지막이 물었다.
노부인은 코로 한숨을 내쉬고는 대꾸하지 않았다.
“마님.”
유모가 안절부절못하며 바짝 다가오더니 부채를 펼치고 소리 죽여 물었다.
“이게 잘 될까요? 실패하는 날엔…….”
“실패라니?”
노부인은 작은 나무문을 쳐다봤다. 문 안에는 시선을 가리는 가림벽이 세워져 있어서 내부의 정경이 보이지 않았다. 노부인은 지팡이를 움켜쥐고 잇새로 말을 내뱉었다.
“실패하면 저 돌팔이를 살인죄로 발고해야지!”
외지 출신에 주인과 몸종 딱 둘이다. 낯설고 물선 곳에서 저들이 뭘 어찌하겠는가. 누굴 탓할 필요도 없다. 튀는 행동을 했으니 화를 입는 게지.
사돈댁 대소야가 마당 안을 두 바퀴쯤 돌았을 때, 문이 열렸다.
“사람을 불러 모셔 가세요.”
몸종이 나오며 말했다.
“어떠하냐?”
사돈댁 대소야가 다급하게 물으며 방 안을 살폈다. 관은 그대로 안채 한가운데 놓여 있고,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이 안에 정말 정 낭자가 있긴 한 건가? 처음부터 저 몸종 혼자 꾸민 짓 아냐?
그 의문에 답이라도 하듯 방 안에서 나막신을 끄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병풍 뒤로 사람의 형체가 나타났다. 여인의 모습이었다. 품이 큰 옷을 입은 관계로 체형이나 나이가 바로 분간되지는 않았다. 여인은 잠시 서 있다가 자리에 앉았고, 곧이어 몸종이 그의 시선을 가렸다.
“이봐요, 사람을 부르라고요.”
몸종이 툴툴거렸다. 자기 윗전을 엿본 일로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사돈댁 대소야가 시선을 거두며 물었다.
“치료는 끝났느냐?”
“기본적인 치료는 끝났는데, 보조 약재가 필요해요.”
몸종이 대답했다.
우악스러운 여인 넷이 아씨를 침상 위로 옮겨 놓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노부인과 사돈댁 사내들이 침상에 있는 여인을 에워싸고 바라봤다. 수의를 입은 여인은 새끼줄에 손과 발을 묶인 채 조용히 눈을 감고 있어서 관 속에 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옷을…… 갈아입힐까요?”
누군가 못 참고 물었다.
갈아입히긴. 그러다 안 살아나면 염을 또 해야 하는데!
노부인은 대꾸하지 않고 몸을 돌려 사돈댁 대소야를 보며 물었다.
“보조 약재라고 했소?”
“운랑이 자주 쓰던 화장 거울이랍니다.”
사돈댁 대소야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노부인으로서는 보조 약재가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죽은 사람을 치료하겠다고 말도 안 되는 말을 내뱉었는데, 더 놀랄 일이 뭐 있겠는가.
한 여종이 즉시 운랑이 애용하던 거울을 가져왔다. 둥근 달 모양에 연꽃 문양을 조각하고 테두리에 점취 공예(点翠工艺, 물총새의 깃털로 만드는 공예)를 한 구리거울이었다.
“가슴 위에 대고 누르랍니다.”
사돈댁 대소야가 말했다. 초조하면서도 어이가 없다는 말투였다. 두 여종이 서둘러 구리거울을 여인의 가슴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거울 면을 아래로 가게 해라.”
사돈댁 대소야가 무언가 떠올랐는지 한마디를 보탰다. 두 여종이 얼른 방향을 바꿔 거울 면이 아래를 향하게 하여 부인의 가슴 위에 눌러 놓고는 얼른 물러났다. 죽은 사람을 지키고 있노라니 온몸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방 안은 고요했다.
“그다음은요?”
누군가 못 참고 물었다.
“기다려라.”
사돈댁 대소야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집 안이 또다시 고요해졌다. 거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모두의 시선이 침상 위에 있는 여인의 몸으로 집중됐다.
일각쯤 지났을까. 숨죽이고 있던 사람들이 더는 못 참겠는지 단체로 숨을 토해냈다. 침상 위의 여인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은 채로 누워 있었다.
“숨이 붙어 있는지 살펴봐라.”
사돈댁 대소야가 말했다. 여종 하나가 잠시 망설이다가 두려움에 떨며 침상 옆으로 쭈뼛쭈뼛 다가가서는 떨리는 손을 조심스레 뻗어 부인의 코 밑에 가져다 댔다.
“없는데요…….”
여종이 손을 거두고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의 안색이 바뀌었다.
“안사돈 어른! 이제 됐습니까?”
사돈댁 대소야가 소리쳤다. 쌓아왔던 분노가 폭발한 듯 찻잔을 들어 바닥으로 내팽개치려 할 때였다.
여인이 숨을 내쉬는 목소리가 들렸다. 숨소리는 무겁고도 길었으며, 오랫동안 막혀 있던 숨을 토해내는 듯했다.
“아이고, 답답해 죽을 뻔했네! 이게 뭐야, 얼른 치워! 눌려서 숨도 못 쉬겠다!”
여인이 숨을 토해낸 후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침상 근처에 서 있던 여종은 숨을 내쉬는 소리에 온몸에 소름이 돋은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러다가 급기야 말소리까지 들리자 뒤도 안 돌아보고 비명을 내지르며 허둥지둥 밖으로 달려 나왔다.
“시신이 움직여요!”
정 낭자의 몸종이 발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갔다. 실로 짠 신발로 나무판을 밟은 탓에 소리가 크게 울리지는 않았다.
“아씨, 정말 깨어났대요.”
몸종이 놀람과 기쁨을 숨길 수 없는 말투로 소리쳤다.
동시에 몸종은 병풍 쪽을 쳐다봤다. 작은 탁자에 몸을 기댄 채 병풍을 넋 놓고 바라보는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 여인의 표정을 본 순간, 몸종의 얼굴에 있던 기쁨이 순식간에 걷혔다.
여인은 사실상 소녀였다. 열네다섯 쯤 된 나이에 어두운색 치마저고리를 입고, 먹색의 커다란 웃옷을 걸치고 있었다. 옷이 온몸을 감싸고 있는 듯 볼수록 왜소해 보였다. 흰 피부는 옥처럼 깨끗하고, 머리카락은 먹처럼 새까매서 얼핏 봐도 눈부신 미모였다.
다만 검은 눈동자가 지나치게 작고 흰자위가 지나치게 넓었다. 게다가 멍하니 병풍을 보고 있는 탓에 영혼이 없는 헝겊 인형처럼 보였다.
“아씨!”
몸종은 얼른 바닥에 무릎을 꿇고 바닥을 덮고 있는 여인의 옷자락을 붙잡은 채, 머리를 조아리고 흐느껴 울었다.
“아씨, 정신 차리세요. 아씨, 절 놀라게 하지 마세요!”
그 울음소리와 함께 소녀의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흐리멍덩한 눈에 약간의 생기가 돌았다.
“난…… 누구지?”
소녀가 조용히 읊조렸다.
-교랑-
강남땅에 못 미친 곳이었지만, 이곳도 여름엔 비가 많이 내렸다. 어젯밤에 휘몰아치던 비바람은 부슬부슬 내리는 비로 바뀌었다. 가뜩이나 습하던 마당에 이끼가 또 늘었다.
삐걱 문소리가 나더니 유지로 만든 우산을 들고 바구니를 옆에 낀 몸종이 종종걸음으로 들어왔다. 나막신이 돌길을 밟자 딸각딸각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몸종이 우산을 회랑에 내려놓고, 문 안쪽을 보며 아씨를 불렀다.
문 안에선 별다른 반응이 없었지만, 병풍 뒤에 옆으로 누운 사람 형체가 보였다.
몸종의 고운 얼굴은 사람들 앞에서처럼 당찬 표정이 아니었다.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는데,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바구니를 들고 옆에 있는 부엌으로 들어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탕약 한 그릇을 들고 총총 걸음을 옮겨 방 안으로 들어갔다.
병풍을 돌아 들어가자 누워 있던 소녀가 일어나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몸종은 내심 기뻐하며 보다가 또다시 실망했다. 소녀의 두 눈은 여전히 흰자위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입가에 침을 흘리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영락없는 바보였다.
“아씨.”
몸종은 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낮은 탁자 위에 국그릇을 내려놓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훌쩍였다.
“아씨.”
소녀는 반응이 없었다.
“교랑, 교랑. 이 외할미가 밥 먹여 주마.”
몸종이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호칭을 바꿔 말하자, 소녀가 약간 미동을 보이더니 눈동자를 천천히 움직였다. 몸종이 기뻐하며 그릇을 들고 조심스레 숟가락을 가져다 댔다. 숟가락이 소녀의 입가에서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소녀가 입을 벌려 음식을 삼켰다.
몸종은 뚝뚝 눈물을 흘리면서도 손을 멈추지 않고 또 한 숟가락을 떠서 가져갔다. 소녀는 연달아 네 입을 먹더니, 또다시 숟가락을 가져다 대자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이 정도만 해도 훌륭해. 몸종은 그릇을 내려놓고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날 교랑이라고 불렀지.”
문득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몸종은 기뻐하며 고개를 들었다. 언제부터였는지 소녀의 눈동자는 일반인의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물론 평범한 사람에 비하면 여전히 흰자위가 크고 검은 눈동자가 작다 보니, 뚫어져라 쳐다본다면 오싹한 느낌이 드는 눈이었다.
“아씨! 깨셨네요!”
몸종은 소녀의 넓은 옷소매를 움켜쥐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소녀가 가냘픈 숨을 토해내고 눈동자를 움직였다. 여전히 멍한 눈빛이었지만 그 안에선 차츰 생기가 돌고 있었다. 소녀가 사방을 둘러봤다. 자신이 있는 곳이 낯선 듯했다.
“반근, 이번이 이번 달 몇 번째 발작이었어?”
소녀가 가냘픈 목소리로 힘없이 물었다.
“아씨께 아뢰옵니다. 세 번째예요.”
몸종 반근이 얼른 대답하자 소녀가 응 하고 대꾸했다.
“지난달엔 몇 번이었지?”
소녀가 또다시 물었다.
“네가 말해 줬는데, 기억이 안 나네.”
“기억 안 하셔도 돼요. 소인이 기억하고 있어요.”
반근이 밝게 말했다.
“다섯 번이에요.”
소녀는 또다시 응 소리를 내고는 낮은 탁자 위에 손을 올려 머리를 괸 채 병풍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눈동자가 작아 넋을 놓고 있는 듯 보였다.
몸종은 순간 또다시 긴장하며 소녀를 조심스레 응시했다.
“그렇다면 내 병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긴 하구나.”
소녀가 말했다. 반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요. 낫고 계세요. 낫고 계시고말고요.”
소녀는 입을 약간 오므린 채 살짝 웃으려고 하다가 곧 다시 얼굴이 굳어졌다.
“반근, 내가 누군지 또 기억이 잘 안 나. 예전 일도. 네가 다시 말해 줘.”
“네, 네.”
반근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고는 소녀 앞에 꿇어앉았다.
지금은 대주(大周) 건원 5년. 소녀는 정(程)씨 성을 가졌고 이름은 교랑(嬌娘: 미인이라는 뜻)이다. 강주 서하 정씨 일족으로 부친이 병주 자사(刺史: 감찰관)에 임명되면서 일가가 병주에서 지냈으나, 반년 전 임기를 마쳐 강주로 돌아갔다. 하지만 정교랑은 병 때문에 돌아가지 못하고 성 밖에 있는 도교 사원인 도관에서 홀로 지내게 됐다.
“사실 아씨께선 6살 때부터 쭉 도관에서 자라셨어요.”
반근이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내가 모자란 채로 태어나서?”
소녀가 물었다. 기억을 떠올려 보려는 듯싶기도 하고, 의문을 품고 생각에 잠긴 듯싶기도 했다.
반근이 고개를 숙였다.
“네.”
그러더니 곧 무언가 떠오른 듯 퍼뜩 고개를 들고 말했다.
“아뇨, 아뇨. 아씨께선 병을 얻으신 거예요, 병이요. 보세요, 지금은 나으셨잖아요.”
소녀의 얼굴에 있는 의문은 더욱 깊어졌다.
“그런데 난 왜 그런 일들이 거의 기억나지 않지?”
소녀가 읊조리듯 말했다.
“10년 넘게 앓으셨으니 기억 안 날 만도 하죠. 그래도 노마님은 기억하셨잖아요.”
반근이 약간 절박한 심정으로 말했다.
노마님.
소녀의 머릿속에 자신을 향해 환한 웃음을 내보이는 백발의 노파 모습이 떠올랐다.
우리 교랑은 착하기도 하지.
“외할머니.”
소녀가 나지막이 불렀다.
그 소리에 온통 뒤죽박죽이던 머릿속이 순간 격렬하게 요동쳤다. 여러 가지 감정과 모습들이 뒤얽힌 듯한데, 제대로 보이지 않고 잡히지도 않았다. 머리를 뚫는 듯한 두통에 폭발할 지경이었다.
“아씨, 아씨.”
반근은 고통에 일그러지는 소녀의 얼굴을 보고 얼른 몸을 일으켜 소녀를 부축했다. 반근은 다급히 소리치며 소녀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기억 속에서도 소녀를 이렇게 위로해 주는 두 손이 있었다. 반근의 손놀림에 소녀는 차츰 정서적 안정을 되찾았고 곧 통증도 잦아들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불명확한 감정만이 머릿속에 뒤죽박죽인 채로 남아 있었다.
“난 정교랑이고 지적 장애를 앓았어. 모친을 일찍 여의고 부친께선 재가하셨지. 날 마음에 안 들어 하셔서 선인의 가르침을 구하도록 도관으로 보내 요양하게 하셨어. 그 후엔 날 버리고 떠나셨고.”
마음이 안정을 찾으면서 소녀의 목소리에도 힘이 들어갔다. 부드럽고 온화한 느낌은 다소 사라졌지만 강경해진 목소리는 딱딱하게 들렸다.
반근은 고개를 숙였다.
말로는 병으로 몸이 허약해 먼 길을 떠날 수 없으니 시간이 지나면 사람을 보내 데려가겠다고 했지만, 진실이 무엇인지는 뻔했다.
이 모자란 아이는 태어난 그 순간부터 정씨 집안의 치욕이었다. 정교랑 모친의 고집이 아니었다면, 의원이 지적 장애를 확진한 한 살 때 이미 익사를 당했을 터였다.
지적 장애아를 돌보는 고단함에 시가의 냉대와 조소가 겹친 탓에 정교랑의 모친은 교랑이 6살 되던 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씨 집안은 좋은 핑곗거리라도 생긴 듯 아이를 도관으로 보내 버렸다.
그래도 교랑은 외조모의 보살핌 덕에 도관에서 평온한 나날을 보낼 수 있었는데 1년 전 그 외조모마저 돌아가시고 말았다. 외숙 내외는 남의 아이한테 거금을 들일 순 없다며 도관으로 보내는 돈을 끊어 버렸고, 때마침 부친인 정 자사마저 병주를 떠나게 되면서 아이 혼자 도관에 남게 됐다. 말로는 데리러 오겠다고 했지만 천 리 길을 온다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이란 말인가.
정교랑을 버리고 가려는 게 분명했다. 정교랑은 그 후 힘겨운 나날을 보내게 됐다. 사실 정씨 집안에선 이 아이를 버린 지 오래였다.
방 안이 침묵에 휩싸였다.
“반근, 그래도 네가 내 곁을 오래 지켜 줬구나.”
소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반근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제 목숨은 노마님이 구해 주신 거예요. 노마님과 약조했어요. 평생 아씨를 모시겠다고요.”
정교랑의 모친이 죽은 후, 외조모는 정씨 집안은 믿을 만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윗전이 믿음을 안 주는데 아랫것들이 정성을 쏟겠는가. 그래서 특별히 교랑에게 여종 둘을 붙여 주었다. 나이가 많은 여종 하나와 어린 여종 하나가 정교랑 곁에서 쭉 시중을 들었다. 그러던 것이 나이 많은 여인은 1년 전 병사했고, 이제 반근 혼자만 남은 것이다.
소녀가 반근을 보며 입가를 씰룩였다. 반근은 이미 그런 표정에 익숙했다.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지으려는 것이다. 반근이 얼른 싱긋 웃어 보였지만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상태라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웃는 것조차 이리 어렵단 말인가. 소녀는 손을 뻗어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져 보았다. 아무래도 몸이 자신의 몸 같지 않았다. 그래도 이제는 걸음걸이도 안정적이고 말도 할 수 있다. 가끔 병이 도져 의식을 잃기도 하고 햇빛을 싫어해 어둡고 습한 곳에 지내야 하지만, 어쨌거나 몸은 점점 나아지고 있다.
정교랑.
소녀는 손으로 천천히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 부드러운 피부를.
자신이 자신에게 이런 낯선 감정을 느낀다는 게 정말이지 이상했다. 머릿속에 기억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조각조각 떠오르는 정교랑의 기억들. 그리고 더 기이한 기억들. 이를테면 병을 치료한다든가.
어떻게 병을 치료하는 거지?
“반근, 의원은 다들 어릴 때부터 공부해서 병을 치료하는 거라고 하지 않았어?”
정교랑이 몸을 반듯이 앉으며 물었다. 이 간단한 동작도 일반인에 비하면 굼뜬 티가 났다.
“나는 지적 장애를 갖고 태어났으니, 배웠을 리가 없는데.”
정교랑을 보는 반근의 눈빛도 막막했다.
석 달 전 뇌우가 내리치던 밤이 떠올랐다. 번개가 도관을 반으로 쩍 갈랐다. 다행히 반근과 정교랑이 묵는 곳은 도관에서 가장 낡은 건물이라 짚과 흙벽돌로 지은 덕에 둘은 목숨을 건졌다. 그런데 건물 앞에 있던 커다란 나무가 벼락을 맞았다. 번개를 맞은 불이 정교랑과 반근의 발치에서 타올랐다. 정교랑은 난생처음으로 날카로운 비명을 내지른 후 의식을 잃었다.
의식을 되찾은 정교랑은 변했다. 아니, 좋아졌다. 눈동자를 움직일 수 있게 됐고, 침도 더 이상 흘리지 않았다. 놀랍게도 말도 할 수 있게 됐다.
“아씨, 예전 그 도사 말이 맞았네요. 집을 나와 식구들과 떨어져 도관에서 지내면 대운이 트인댔잖아요.”
반근이 흥분 어린 어조로 말했다.
그런가?
정교랑은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근육이 굳은 탓에 얼굴엔 별다른 표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일로 내가 좋아졌다 해도 갑자기 병을 치료할 수 있게 될 순 없잖아?”
하긴 그렇다. 반근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정말 이상한 일이긴 하다.
“아.”
반근은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손뼉을 쳤다.
“이상한 일이 아니에요.”
정교랑은 반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반응이 느린 탓에 여전히 약간은 멍해 보였다.
“아씨, 신선이 아가씨를 고쳐 주신 거잖아요. 그러니 아가씨께서 병을 치료할 수 있게 된 것도 대수로운 일은 아니죠.”
반근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응? 정교랑이 멈칫했다. 그럼 이게 신선이 내려 준 선술이란 말인가?
“아씨, 기이할 것도 없어요. 건주의 양대년 아시죠?”
반근은 말하고 나서 곧 머리를 쥐어박았다. 아씨는 지능이 모자라는 분이니 당연히 모르시지.
반근도 노마님이 살아 계실 적에 도관에 다니러 온 여자들과 담소를 나눌 때 들은 얘기였다. 도관에서 무미건조한 삶을 지내다 보니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은 사소한 일도 한번 들으면 머릿속에 오래 남았다.
“몇 살이 되도록 말을 못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시를 읊었다지? 금계에 사는 한 농민의 자식은 다섯 살 때 갑자기 시를 짓게 되었고 말이야.”
응? 정교랑은 또다시 멍해졌다. 하지만 이번엔 놀라움 때문이었다.
내가 이렇게 대단했다니!
“네, 맞아요. 아씨, 어른들이 그러셨어요. 이건 선인의 계시(啓示)라고요.”
반근이 기뻐하며 정교랑을 보고 두 손을 꼭 쥐었다.
“아씨, 아가씨도 계시를 받은 거예요. 아가씨는 넋이 나가 있을 때가 많으셨는데, 이제 선인 덕분에 넋을 되찾은 거죠.”
아, 그런 건가. 정교랑은 반근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씨, 그 도사는 거짓말쟁이가 아니었어요. 어쩌면 노야도 아씨를 고의로 버리신 게 아닐지 몰라요!”
반근은 말하면서 퍼뜩 깨닫고는 기쁜 내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씨, 우리 도관으로 돌아가 봐요. 노야께서 데리러 오셨을 거예요.”
응? 그럴까? 하지만 정교랑은 속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만 동작이 생각을 못 따라가는 탓에 어떤 생각에 대한 표정을 짓기도 전에 또 다른 생각이 떠오르다 보니, 나중에는 아예 아무 표정도 지을 수 없게 됐다.
“우린 이미 멀리 왔으니 도관으로 가 봤자 좋을 거 없어. 곧장 집으로 가는 게 덜 번거롭지.”
정교랑이 천천히 말하자 반근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엔 늘 자신의 보살핌 아래 생활하던 아씨가 쾌차한 후부터는 주관이 뚜렷해졌다. 병이 가끔 발작하는 게 문제지만 그래도 더없이 마음이 놓였다.
굳은 표정의 정교랑은 말없이 있었다. 반근은 이미 여러 날 동안 그 습관을 지켜봤다. 아씨는 지금 열심히 생각하며 말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반근은 재촉하지 않고 기대에 찬 눈길로 바라봤다.
“우리에게 지금 돈은 얼마나 있지?”
정교랑이 물었다.
반근은 매일 두 번씩 돈을 세는 터라 정확히 알고 있어 얼른 대답했다.
“이번에 장씨 집안에서 받은 돈까지 합치면 은자 10냥이요.”
집을 빌리는 것부터 시작해 병을 치료하고 자신이 먹을 보약과 음식을 사려면 돈이 들었다. 정교랑이 버는 돈은 매번 금세 바닥이 났다. 하지만 그게 뭐 대수란 말인가. 돈이 없으면 길을 멈추고 벌면 될 일이다. 그렇게 계속 반복하다 보면 본가도 점점 가까워지겠지.
가족들을 만나고 태어난 집으로 돌아가면 이 혼란스럽고 이리저리 조각난 기이한 기억들도 정리가 될 것이다.
“한동안 길을 갈 수 있겠구나.”
정교랑이 말했다.
“얼른 가서 마차를 구해 오너라. 오늘 밤에 떠나자.”
지금 당장? 오늘 밤에?
반근은 약간 놀랐다. 오래 머무른 적은 없지만 지금까지는 오늘 이동을 결정하면 내일 준비해서 모레 출발하는 식이었다. 이렇게 바로 떠나는 건 처음이었다.
“아씨, 몸조리를 더 하셔야죠.”
반근이 불안해하며 말했다.
“이렇게 서두르실 필요 없잖아요.”
정교랑이 천천히 얼굴을 움직였다. 고개를 가로저을 생각이었지만 이번엔 도무지 힘들 것 같아 포기해 버렸다.
“이번엔 이웃 부인의 병을 고치느라 전보다 한 곳에 며칠 더 오래 머물렀잖아.”
정교랑이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입 안의 혀가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아 말을 줄여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한마디를 내뱉었다.
“이러면, 안 좋아.”
안 좋다고? 뭐가 안 좋다는 거지? 반근은 이해가 안 갔다.
하지만 정교랑은 말없이 반근을 바라봤다. 조금 생기를 회복한 눈이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인 물처럼 어둡고 깊었다. 반근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네, 소인 그리할게요.”
반근은 대답을 마치고 급히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방 안은 고요를 되찾았다. 밖에 내리던 비는 어느새 그쳤고, 습한 기운이 찬바람을 타고 안으로 스며들었다.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기운이었다. 정교랑은 몸을 옆으로 누워 넋을 놓고 있었다. 또다시 멍한 상태로 돌아간 것이다.
정교랑이 생각을 하기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 기억들을 놓치지 않고 정리하려 들면 극심한 두통으로 뒤죽박죽이 되고 지적 장애 상태로 돌아가기도 했다. 오히려 이렇게 멍하니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있으면 하루가 다르게 건강이 좋아졌고, 병으로 인한 발작도 차츰 줄었다.
일 처리가 빠른 반근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돌아왔다. 물론 수중에 돈이 있는 덕이 컸다. 전에는 도관에서 병주부를 나오는 짧은 여정에 7일이 걸리기도 했다.
“아씨, 짐 챙겼어요. 마차는 저녁에 온대요. 일단 식사부터 하시죠. 그럼 밤새 길을 재촉할 수 있어요.”
정교랑은 침상에서 미동도 하지 않은 채로 응 하고 짧게 대답했다. 신나서 몸을 일으키던 반근은 그제야 문 밖에서 누가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이보시오, 신의(神醫)가 계시는 곳 맞소?”
반근이 아직 열리지 않은 반쪽 문을 열고 보자 문 밖에 있는 사내 둘과 여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반근이 다가오는 걸 보더니 문턱 위에 앉은 여인이 크게 신음 소리를 내며 소리쳤다.
“아이고, 사람 좀 살려요.”
반근은 인상을 썼다. 저리 멀쩡한 정신으로 무슨 병이 있다고. 더구나 아씨가 더는 진료를 안 받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 병은 우리 아씨께서 못 고치세요. 다른 의원한테 가 봐요.”
말을 마친 반근이 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뒤에서 쾅 소리가 들리더니 둘 중 한 사내가 손으로 문을 쳤다.
“왜 못 고쳐? 다른 사람들은 다 고쳐 주더니 왜 우리만 못 고친대? 돈 없다고 무시해?”
사내가 소리쳤다. 하지만 반근은 사내의 험악한 모습을 보고도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이 댁 아씨는 신선의 계시를 받은 범상치 않은 분이 아닌가.
“아니에요. 우리 아씨는 죽음에 이르는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만 치료한다고요. 이쪽 부인은 멀쩡…….”
멀쩡하단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사내가 휙 몸을 돌려 그 부인의 가슴팍을 발로 걷어차는 게 보였다.
반근과 부인은 동시에 비명을 내질렀다. 동시에 부인은 피까지 토하며 바닥으로 쓰러지더니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제 다 죽게 생겼네. 고칠 수 있겠냐?”
사내가 다시 뒤돌아 문을 쾅쾅 두드리면서 창백해진 반근을 노려보며 험상궂게 말했다.
이건 병을 치료하러 온 게 아니야. 트집을 잡으러 온 거야!
반근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안에 있는 아씨를 떠올리고 곧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창백해진 얼굴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게 아씨께서 아까 말씀하신, 안 좋은 일인가?
어떡하지?
“이게 무슨 짓이에요?”
반근은 놀란 표정을 숨기며 문 앞을 굳건히 지키고 섰다.
“무슨 짓이냐니? 병을 치료하라고!”
사내가 소리치며 험상궂은 표정으로 노려봤다.
“죽을 사람이 아니면 안 고친다며? 이제 다 죽게 생겼는데, 그래도 안 고칠 테냐? 사람 목숨이 우스워?”
사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사람이 다 죽게 생겼다니, 그럼 어서 관아로 가 고해야지.”
남자의 목소리였다.
이곳은 동강의 명문대가인 장씨 집안이 대대로 터를 잡고 사는 곳으로, 외부인은 얼마 되지 않았다. 비어 있는 집 몇 채는 습하고 눅눅하여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기에, 이쪽엔 소란스러운 일이 생겨도 구경하러 올 사람이 없었다. 더구나 지금은 장씨 집안이 초상을 치르는 중이어서 아무나 함부로 와서 서성일 리 없는데, 갑자기 구경하는 사람이 나타나 빈정대기까지 하다니?
“어떤 겁 없는 새끼가…….”
두 사내가 험악한 표정으로 몸을 돌려 소리 나는 곳을 바라봤다.
언제 온 건지 세 사람과 말 한 마리가 물가를 지나고 있었다. 말 위에 앉은 젊은이는 긴 소매의 여름 도포 차림에 삿갓을 쓰고 있었다. 긴 여정으로 고초를 겪으며 말을 재촉해 달려온 듯 보였다.
“무엄하다. 감히 우리 도련님께 이리 무엄하게 대하다니!”
젊은 도령 옆에 있던 시종 둘이 사내들의 고함에 눈썹을 치켜세우며 호통을 쳤다.
도련님? 젊은이의 행색을 다시 보니 평범한 백성은 아닌 듯 보였다. 두 사내의 얼굴에 약간의 두려움이 서렸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말씀을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
한 사내가 말했다.
“내 아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
젊은 도령은 말하며 손을 뻗어 삿갓을 벗었다.
“이렇게 밝은 대낮에 사람을 이리 우롱하다니. 소육, 이곳 동강의 현승(縣丞) 진 대인께 내 명첩을 들고 가 묻거라. 고을을 대체 어찌 다스리는 것인지!”
도령의 말을 들으며 불안해하던 두 사내는 도령의 입에서 현승이라는 말까지 나오자 더욱 허둥댔다. 자세히 보니 젊은 도령은 초상집인 장씨 저택의 방향으로 가는 길이었다. 장씨 집안과 교류하는 이들은 전부 권세가인 걸 생각하면 이 도령의 신분도 보통은 아닐 터였다.
“좋아. 여기 도령이 현승을 찾아가겠다니, 우리가 먼저 발고하러 가자고!”
한 사내가 빠르게 반응했다. 분노로 씩씩거리며 소리치고는 곧장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갔다.
“기다려!”
다른 한 사내도 반응이 조금 느리긴 했지만 바로 뒤따라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문 앞에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여인만 남게 됐다. 반근은 정신을 차리고 그 여인을 불안해하며 바라봤다.
“아씨, 어떤 부인이…….”
반근이 이를 악물고 몸을 돌리며 안을 향해 소리치며 여인의 상태를 설명하려던 때였다. 도령이 또다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소육, 사람이 죽었구나. 어서 들고 관아로 가서 검시관에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닥에 쓰러져 있던 여인이 툴툴거리며 일어나 도망쳤다. 여인은 바닥에 찰캉 소리를 내며 떨어진 물건을 주울 새도 없이 순식간에 종적을 감췄다.
젊은 도령과 두 시종은 하하 웃음을 터뜨렸고, 반근은 잠시 어리둥절했다가 따라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호기심에 저도 모르게 몇 걸음 걸어가 바닥에 떨어진 물건이 무엇인지 살펴봤다.
“그건 철판이다. 저 부인이 입으로 내뿜은 건 아마도 닭의 피일 게야.”
젊은 도령이 말했다. 반근이 젊은 도령을 보며 얼른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예는 됐다. 내 고모님 댁 앞에서 몹쓸 무뢰배들이 행패를 부려 체면을 깎게 할 수야 없지.”
말을 마친 젊은 도령은 더 이상 반근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말을 재촉해 출발하려 했다.
“반근.”
집 안에서 정교랑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반근이 얼른 고개를 돌리는데, 몸을 채 돌리기도 전에 정교랑의 말이 이어졌다.
“존함을 여쭈어라. 훗날 은혜를 갚아야지.”
반근은 곧장 동작을 멈추고 말을 달려 출발하는 도령 쪽으로 쫓아갔다.
정교랑이 그렇게 큰 목소리를 낸 건 처음이었다. 얼마나 큰지 도령에게까지 들릴 정도였다. 도령이 뒤쫓아오는 반근을 웃으며 바라봤다.
“이 정도 수고쯤이야 누구나 도울 수 있는 일이니 은혜랄 것도 없다.”
웃으며 말을 마친 도령은 반근을 기다려 주지 않고 말을 재촉해 떠났다. 시종들도 잰걸음으로 뒤따라갔다. 반근이 몇 보 더 따라가자, 도령이 장씨 저택의 문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정교랑이 걱정된 반근은 얼른 돌아왔다. 정교랑은 여전히 병풍 뒤에 앉아 있었다. 멍한 표정으로 숨까지 약간 헐떡였다.
“아씨!”
반근은 놀라며 얼른 무릎을 꿇었다. 정교랑이 반근을 보며 괜찮다는 눈빛을 드러내자 반근은 비로소 안도했다. 아씨의 지적 장애가 발작한 건 아니었다.
일각쯤 지난 후, 정교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방금 소리를 질렀더니 힘들더구나.”
정교랑이 자신의 방금 전 상태에 대해 해명하자 반근은 기쁘면서도 속상했다.
“아씨, 놀라셨죠.”
반근이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아니야.”
정교랑이 말을 덧붙였다.
“그럴 만도 하지.”
못된 놈들이 들이닥쳤는데 그럴 만도 하다니? 반근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정교랑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실은 설명해 주고 싶은데 말하는 게 너무 힘들어 그만둔 것이었다.
반근도 곧 생각을 떨쳐 버렸다. 아씨만 괜찮다면 안심이다.
“그 도령은 장씨 저택 대문으로 들어가면서, 자기 고모님 댁이라고 했어요. 나이는 17~18살쯤 되어 보였고요.”
반근의 말에 정교랑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자세히 눈여겨보지 않으면 티도 안 날 정도의 끄덕임이었다.
“장씨 집안 노부인의 연세에 그리 젊은 조카가 있을 리는 없으니 며느리 한씨의 친정 조카겠지.”
정교랑이 말하면서 반근을 쳐다봤다.
“세상에 쉬이 도울 수 있는 일은 많지만, 누구나 기꺼이 나서진 않아. 반근, 내 기억력이 안 좋으니 네가 대신 기억해 둬.”
반근은 대답한 후, 무릎을 꿇은 채로 옆에 있는 작은 탁자 앞으로 갔다. 탁자 위에는 간단한 지필묵이 있었다. 반근이 붓을 들어 천 위에 몇 글자를 공들여 적었다.
“아씨, 지금 바로 출발하나요?”
반근이 무언가 생각난 듯 물었다.
“서두를 것 없어.”
정교랑이 대답했다. 아씨가 급하지 않다면 반근도 급할 게 없다. 반근이 고개를 돌리고 힘겹게 몇 글자를 이어 썼다.
바로 그 시각 성 안 동쪽 시장에 있는 한 저택 안에서는 두 사내와 아까 그 여인이 바닥에 꿇어앉아 무릎을 조아리고 있었다.
“너희 잘못만은 아니다.”
방 안의 등나무 의자에 청포를 입고 앉아 있던 남자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방문 앞에 꿇어앉아 있던 세 사람은 그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를 표했다.
“아버지.”
한 사내가 급히 들어왔다.
“그 도령은 숙주 한씨로 오늘 조문을 하러 오는 길이었답니다. 그 정 낭자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고요.”
청포를 입은 남자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장씨 집안이나 한씨 집안을 뒷배로 둔 것만 아니면 된다.
“내가 경솔하긴 했다. 장씨 집안 며느리 한씨의 초상이니 조문객이 많을 터, 이런 때에 성급히 굴어선 안 됐어.”
남자가 말을 덧붙였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천천히 하자.”
세 사람은 네 하고 대답한 후 물러갔다.
“아버지, 정 낭자의 의술이 정말 그리 고명하답니까? 그럼 필시 스승의 가르침을 받았겠지요. 정 낭자에게 처방을 내놓으라고 다그치면…….”
남자가 약간 불안한 어조로 말했다.
“절대로 의술이 고명한 게 아니다. 지금까지 치료한 사례들을 보면, 증상이 비슷한 점은 전혀 없었어. 그런데 전부 실려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병이 나았지. 탕약을 지어 준다거나 하는 것도 없었고. 이건 의술의 이치에 맞지 않는다. 사람을 소생시키는 방술을 아는 게 틀림없어.”
청포를 입은 남자가 형형한 눈빛으로 말했다. 남자는 잠자코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조가당(曹家堂)에서 그 방술을 얻는다면 실로 큰 복일 겁니다.”
남자가 방술을 이미 손에 넣은 듯 흥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집엔 윗전과 몸종 둘뿐이라고 했지?”
청포를 입은 남자가 재차 묻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윗전과 몸종 둘뿐이고, 정 낭자의 병자는 전부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안으로 들어간 자들도 전부 마당에 머물러야 했지. 정 낭자는 입조차 열지 않아서 용모나 나이조차 아는 이가 없다. 그림자로 봤을 땐 20~30대쯤 된 부인이라고 들었고.”
청포를 입은 남자가 웃음을 띠고 덧붙였다.
“상관없다. 며칠 후에 우리가 직접 가 보면 되지.”
남자가 나막신을 벗고 버선발로 들어가 방석에 앉았다.
“아버지. 장씨 집안이나 한씨 집안에서 막으면 어쩌죠?”
남자가 물었다. 장씨 집안이나 한씨 집안 모두 이들 같은 일개 상인이 건드릴 가문이 아니었다.
“외지 사람이고 무연고인데 뭘 막아?”
청포를 입은 남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어쨌든 장씨 저택 근처고, 그 댁은 속세에서 벗어나 고상하게 은거하며 지내는 집안이니 다음번엔 더욱 신중히 움직여야 할 것이다.”
그러자 남자는 근심이 사라진 듯 환한 얼굴로 알았다고 대답했다.
-은혜-
아침 해가 막 떠오를 무렵, 거리를 오가던 행인들은 장씨 저택의 장례가 하루아침에 끝나 버린 모습을 목격했다. 종종걸음으로 저택을 드나들거나 걸음을 멈추고 조문하는 이도 없었다.
“삼일장이야, 오일장이야?”
“벌써 매장했나? 이렇게 빨리? 이제 겨우 사흘 됐는데?”
행인들은 의론이 분분했다.
바깥이 떠들썩한 데 반해 장씨 집안 내부는 몹시 조용했다. 노부인은 무거운 표정으로 혼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아들은 한쪽 옆에 서 있는데, 약간 멍한 표정으로 보였다.
문득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여종 둘이 종종걸음으로 들어왔다. 허둥대는 표정이었다.
“마님, 아씨와 사돈댁 분들이 전부 오셨습니다.”
장씨 집안 큰아들 대노야의 얼굴이 곧 창백해졌다.
“어머니!”
장씨 집안 대노야가 소리쳤다.
노부인은 무거운 표정이었다. 며느리가 정말 죽었다면 한씨 집안에서 가만있지 않을 테고, 며느리가 죽지 않았더라도 자초지종을 알면 한씨 집안에서 가만있지 않을 터였다.
이것 참! 노부인이 지팡이를 꽉 움켜쥐었다. 가문의 불행이로고!
총총 발걸음소리가 들리더니 한씨 일가 사람들이 들어왔다. 여종들은 한 몸종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오는 아씨의 모습이 보이자 어리둥절했다. 관 속에 누워 있던 사람이 살아나다니!
노부인은 미동도 않은 채로 있고, 장씨 집안 대노야는 한씨 일가 사람들, 특히 큰처남 대소야를 보고 저도 모르게 겁을 내며 어머니 뒤로 숨었다.
“어머님.”
한운랑이 들어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더니 흐느끼며 말했다.
“이 며느리가 잘못했어요.”
그 말에 장씨 모자는 흠칫 놀랐다.
“며느리가 어머님께 대든 것도 모자라 홧김에 죽으려 했으니, 얼마나 놀라셨겠어요.”
한운랑이 울며 말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로다!
장씨 모자는 몹시 놀란 표정이었다. 한운랑이 자신의 뜻을 분명히 밝히고 나서야 장씨 모자는 마음을 놓았다.
한씨 집안에선 이미 상의를 끝낸 모양인지 표정이 안 좋긴 했지만 더는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한씨 집안 대소야는 여전히 떨떠름해하며 누이를 몇 마디 꾸짖었다.
한씨 집안에서 연극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자 노부인은 자연스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눈시울이 촉촉해져 며느리를 붙잡고 부부 사이의 일에 끼어든 게 잘못이었다며 진심으로 사과했다. 그렇게 두 고부는 서로를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
어쨌든 함께 살아가야 할 가족이 아닌가. 양쪽 모두에게 퇴로가 열린 셈이니 모두가 안도했다.
다시 침상에 앉은 한운랑은 인삼탕을 몇 모금 마시고는 손수건을 들어 입가를 닦았다.
“고모, 정말 병이 났던 거예요? 깜짝 놀랐잖아요.”
안에 있던 조카 몇 명 중 하나가 물었다. 한운랑은 입을 닦은 후 고개를 숙이고는 응 하고 짧게 대답했다.
한운랑이 깨어나면서 노부인의 거짓말은 자연스레 들통이 났지만 따지고 보면 장씨 집안에 죄가 없긴 했다. 어쨌든 한 가족이니 집안의 추문이 소문나 봐야 좋을 게 없었다. 그래서 아주 가까운 몇을 제외하고는 병이라고 둘러댄 터였다.
“그 신의가 아니었다면, 정말 죽을 뻔했지 뭐야.”
한운랑이 고개를 들고 웃으며 말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뛰어난 의원은 처음 본다며 이야기를 나눴다.
“아씨.”
문 밖에서 여종 하나가 들어왔다. 불안한 표정이었다.
“정 낭자의 집엔 이미 아무도 없어요.”
치료비는 노부인이 줬다지만, 전후 사정을 들은 한운랑은 사의를 표하고자 사람을 보내면서 집으로 초대해 직접 얼굴을 보고 인사하고자 했다.
그런데 아무도 없다고? 한운랑은 몹시 놀랐다.
“떠났습니다.”
여종이 대답했다.
“잘 있다가 갑자기 떠나다니?”
한운랑이 물었지만, 여종 역시 이유를 몰랐다.
“정 낭자요?”
조카 하나가 갑자기 끼어들어 물었다.
“이웃에 사는 그분 말이죠?”
모두가 그 조카를 바라봤다.
“그래, 바로 그분이다.”
한운랑이 그 젊은이를 보며 대답했다.
“원조, 그분을 아니?”
한원조가 웃었다.
“그럼 제가 어제 고모의 은혜를 갚은 거네요.”
한원조가 어제의 일을 말하자, 한운랑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그렇다면 정 낭자는 화를 피해 떠난 거구나.”
한운랑이 손에 든 손수건을 움켜쥐며 말했다. 눈 속에 분노가 서렸다.
“가서 아랑을 모셔 오너라.”
정 낭자가 떠났다는 소식은 금세 퍼졌다.
“밤새 떠났단 말이냐?”
청포를 입은 조씨 집안 남자가 분노로 소리쳤다. 하룻밤 방심한 사이에 떠나 버리다니!
밖에서 누군가가 급히 뛰어 들어왔다.
“나리, 못 찾았습니다. 어젯밤에 성을 나간 마차는 총 5대인데, 방향이 전부 달랐습니다.”
뛰어 들어온 자가 무릎을 꿇고 아뢰었다. 청포를 입은 남자는 더욱 격노하여 탁자에 있던 찻잔을 들어 내던지며 매서운 목소리로 호통쳤다.
“아주 당당하게도 말하는구나!”
입장을 바꿔 누구라도, 신의의 명성을 이제 막 쌓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깔끔하게 떠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정 낭자는 훌쩍 떠나 버리지 않았는가.
“쥐새끼 같은 놈들, 겁만 많아 가지고. 그 훌륭한 방술이 아깝구나!”
청포를 입은 남자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한편 하인들을 다그쳤다.
“가서 찾아라. 겨우 다섯 대가 아니냐, 쫓아가서 찾아!”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밖에서 누가 또 뛰어 들어왔다.
“아버지, 아버지, 큰일 났습니다.”
이번엔 아들이 황망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관부에서 사람을 보내 우리 약포를 폐쇄했어요!”
청포를 입은 남자가 흠칫 놀라며 물었다.
“어째서?”
“모르겠습니다. 아무 말 없이 다짜고짜 폐쇄했어요!”
아들이 소리쳤다.
망할 관리 놈들이 갑자기 점포를 폐쇄했다면,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노여움을 산 것이다.
청포를 입은 남자도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현령을 움직여 자신의 약포를 폐쇄할 정도면, 죽음으로 내몰겠다는 뜻이다. 누구에게 밉보였을까? 왜 이렇게 갑작스레?
이틀 후, 장씨 집안의 아씨가 초상으로 액막이를 해 병을 고쳤다는 소문과 함께 정 낭자가 낸 방도였다는 소식이 퍼졌다. 청포를 입은 남자는 그제야 자신이 누구의 노여움을 살게 됐는지 알았지만, 이미 늦은 때였다.
대주 건원 5년 5월, 동강현에서는 거리가 떠들썩해질 만한 사건이 두 건 일어났다. 하나는 장씨 집안의 부인이 죽었다가 소생한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현성 최대의 약포인 조가당이 저질 약재를 속여 판 일로 폐쇄된 일이었는데, 이 두 사건 사이에 무슨 인과관계가 있는지 아는 이는 얼마 없었다.
두 사건이 저자에서 가장 열띤 화젯거리로 떠오르면서, 불치병을 몇 번이나 고친 정 낭자에 대한 관심은 덮이고 말았다. 더구나 정 낭자가 떠난 후로는 정 낭자라는 사람 자체가 거의 잊혀졌다. 지나가는 신선은 오래 가지 못하는 법이다.
하지만 한 사람은 잊지 않았다.
“아씨.”
여종이 집문서 한 장을 공손히 들고 왔다.
“그 집을 사들였습니다.”
한운랑이 손을 뻗어 받았다.
“어차피 정 낭자의 집도 아니었는데 사례를 할 거면 다른 방법으로 하지, 아무 상관도 없는 집을 사들여 뭐 하려고 그러시오?”
장씨 집안 대노야가 옆에서 물었다.
“내 생명의 은인인데, 난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잖아요. 그 사람이 살았던 집이니 내가 사 놨다가, 나중에 돌아오면 주려고요.”
한운랑이 말했다. 장씨 집안 대노야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 여인의 마음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니, 참으로 기이한 사람이오.”
말을 마친 장씨 집안 대노야는 몸을 일으켜 옆으로 책을 보러 갔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갔는지도 모른다. 생김새도 모르고 이름도 모른다. 밤에 왔다가 밤에 갔다. 이제 거리에서도 입에 올리는 사람이 없다. 자신이 직접 경험한 일이 아니었다면, 동강현에 그런 사람이 정말 오긴 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한운랑은 손에 든 집문서를 바라봤다. 집문서에는 한운랑의 이름이 쓰여 있지 않고 비어 있었다. 거기에 정 낭자의 이름을 채울 기회가 올지 모르겠다.
-빗길-
천둥번개가 지나가고 콩알처럼 굵은 빗줄기가 쏟아졌다. 대로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그러더니 곧 자욱한 물안개가 꼈다.
길가의 삼신 사당(娘娘廟)에는 비를 피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가뜩이나 비좁던 건물이 한층 소란스러워졌다. 사람은 많고 건물은 좁다 보니 처마 아래에 서 있어야 하는 사람이 많았다. 사방으로 튀는 빗방울이 머리와 몸을 적시자 거친 말을 하며 밀고 밀치다가 싸움으로 번지기 일쑤였다.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 비하면 건물 안에 있는 사람들은 복이 많은 편이었다.
화로에 불을 피우는 이도 있었다. 사방을 정교하게 조각하여 술을 데울 때 쓰는 작은 벽돌 화로였다. 무명 적삼과 치마저고리를 입은 소녀가 조심스레 술을 데웠다. 술 냄새가 퍼지자 사람들이 쳐다봤다.
“좋은 술이로군.”
누군가가 말했다.
하지만 술을 데우는 소녀는 이런 행동들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소녀는 술 주전자를 들더니, 이번에는 작은 철 쟁반 화로 위에 올려놨다. 그러더니 옆에 있던 함에서 간식을 4개 꺼내 쟁반 위에 올려 둔 다음 술 주전자를 들고 불상 근처로 갔다.
사람들은 그곳에 나귀 마차가 한 대 세워져 있는 걸 그제야 발견했다. 역시 여기 들어온 사람은 복이 많다니까. 나귀마저도 비를 피하고 있다니.
“아씨, 황주를 데워 왔어요.”
소녀가 말하면서 술을 한 잔 따랐다.
마차의 휘장이 살짝 들리더니 손 하나가 밖으로 나왔다. 넓은 소매 아래로 손가락 끝이 어렴풋이 보이는가 싶더니 술잔을 받아 들고 휘장을 내렸다.
소녀가 몸을 돌렸다. 이쪽의 화로 위에 올려놓은 간식에서도 맛있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뭔데 이렇게 맛있는 냄새가 나지?”
근처에 서 있던 사람들이 못 참고 입을 열면서 철 쟁반 위에 있는 약간 누르스름하면서도 속이 붉은 춘권을 바라봤다. 모양새만으로도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할아버지.”
불탁 근처에 앉아 있던 4~5살쯤 된 여자아이가 못 참고 소리쳤다. 손가락을 입에 넣고 빨고 있는 아이는 그 작은 철 쟁반에서 초롱초롱한 눈을 잠시도 떼지 못했다.
여자아이가 기대고 있는 사람은 일흔쯤 되어 보이는 노인이었다. 갈색 옷을 입고 있었는데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로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이가 칭얼대자 노인은 그 마음을 알겠는 듯 난처해하면서 아이를 안아 주었다.
“단랑, 집에 가서 네 아버지를 보면 가장 먼저 무엇이 하고 싶으냐?”
노인은 조용한 목소리로 물으며 여자아이의 주의를 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음식을 앞에 둔 꼬마를 유혹할 만한 게 어디 있겠는가. 아이는 할아버지에게 기대 몸을 비비 꼬기 시작했다.
소녀는 이미 춘권 4개를 작은 접시에 담아 나귀 마차에 탄 사람에게 건네고 있었다. 이번엔 마차 안에 있던 사람이 손을 뻗어 하나만 집었다.
“반근, 저 꼬마 먹게 갖다 줘.”
안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뻣뻣한 목소리였다. 반근이라고 불린 소녀는 알았다고 대답한 후 몸을 돌리더니 접시를 여자아이 앞으로 가져왔다.
방금 여인의 말소리에 노인은 이미 일어서 있었다.
“아니, 미안해서 어쩌죠.”
노인이 미안하고 불안한 기색으로 말했다. 반근은 이미 접시를 여자아이에게 넘긴 후였다. 소녀는 먹고 싶으면서도 할아버지를 쳐다보고 있었다.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은 듯 보였다.
“어르신, 어려워하지 마세요. 같이 길을 떠나는 길동무니 이것도 인연이죠.”
반근이 웃으며 손을 뻗어 여자아이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노인이 감사 인사를 하려는데, 그 여인이 또다시 입을 열었다.
“반근, 어르신께 황주 한 잔 올려.”
“미안해서 안 돼요.”
노인이 얼른 말했다. 반근은 자신의 윗전 말만 듣는 듯 직접 술을 따라 건넸다.
가벼운 대접을 거듭 사양하면 오히려 옹색해 보이는 법이다. 노인은 웃으며 술잔을 받아 단숨에 털어 넣었다. 평소에 술을 좋아하긴 해도 황주를 마시는 일은 드물었다. 한입에 들이켜니 온몸의 혈이 확 통하는 느낌이었다. 방금 전까지 있었던 등 부위의 은근한 통증도 한결 줄어든 것 같았다.
노인은 술잔을 돌려주며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했다. 여자아이도 할아버지에게 허락을 받은 후 접시에 있던 춘권을 냠냠 먹기 시작했다.
“언니, 정말 맛있어요. 이거 이름이 뭐예요?”
여자아이가 물었다.
“팥 춘권이야.”
반근이 웃으며 대답했다.
“어린 낭자가 솜씨도 좋구려.”
노인이 칭찬을 했다. 꼬마아이는 말할 것도 없고 나이든 자신마저도 먹고 싶을 정도였다.
“우리 아씨께서 가르쳐 주신 거예요.”
반근이 기쁨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말했다.
규방의 여인이라고 해서 모두가 열 손가락에 물 한 방울 안 묻히는 것은 아니었다. 음식도 여자의 중요한 일 중 하나였기에 간식을 만들 줄 아는 게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었지만, 어째서인지 소녀는 기쁨과 흥분을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 이 간식을 가르쳐 준 낭자가 석 달 전만 해도 말조차 할 줄 모를 정도의 장애를 안고 있었다는 걸 노인이 안다면, 그리 생각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아마 더 놀라워하겠지.
“역시 똑똑한 낭자로군.”
노인은 자연스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그 나귀 마차를 힐끔 쳐다봤다.
“아까 전에도 낭자가 큰비가 쏟아질 거라며 묘당에서 쉬어 가라고 말해 주지 않았으면, 우리 손녀와 난 길을 재촉하다가 비를 쫄딱 맞았을 거요. 정말 고맙소.”
반근은 웃으며 고개를 숙여 답례하고, 남은 간식거리를 전부 여자아이에게 준 다음 몸을 돌려 식기들을 정리하러 갔다.
대화를 들은 주변 사람들은 더욱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큰비가 내릴 걸 저 낭자가 먼저 알아서 미리 이곳으로 와 비를 피했다고? 언제 비가 내릴지 아는 사람도 있나? 더구나 방금 비가 내리기 전엔 날씨가 맑아 비가 올 기미라고는 전혀 없었는데.
의론이 분분해지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이쪽 나귀 마차에 있는 주인과 몸종을 흘끔거리는 눈길에도 놀라움이 더해졌다.
듣자니 별자리의 모양을 보고 과거와 미래를 아는 사람도 있다던데, 저 작은 나귀 마차에 탄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낭자가 바로 그런 사람인가?
거친 사내 하나가 궁금증을 못 참고 까치발을 든 채 고개를 길게 빼며 이쪽을 쳐다봤다.
“거 낭자는 비가 내릴지 어떻게 아셨소? 신선이 알려 주기라도 했소이까?”
묘당 안에 있던 이들이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가 밖으로 전해지면서 밖에 있던 사람들도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떠들썩한 분위기가 금세 번져나갔다.
반근은 부아가 치밀었다. 모두가 낭자를 비웃는 것만 같았다. 웃음소리가 그치고 다들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렸을 무렵, 마차 안에서 그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신선이 아니라 하늘이 가르쳐 준 겁니다.”
그 말에 조용해졌던 묘당 안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여인의 목소리는 뻣뻣했지만 몹시 엄숙하게 들렸다. 말투가 전혀 농담 같지는 않았는데, 이 여인은 혹시 농담을 이런 식으로 하나?
거친 사내가 가장 먼저 웃음을 터뜨리며 소리쳤다.
“어이, 낭자. 하늘이 언제 비가 그칠지도 알려 줍디까?”
묘당 안의 웃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이자들의 언사가 무례하긴 하지만 악의가 있는 건 아니니, 낭자도 너무 노여워하지 마시오.”
노인이 여자아이를 안고 나귀 마차 옆에서 말했다.
윗전과 몸종의 말투부터 먹고 앉는 행동거지에 이르기까지 평민 같지는 않아 보였다. 이런 귀한 분들이 놀림거리가 되다니 필시 불쾌한 마음이 들 터, 더구나 여인 둘뿐이니 분을 못 참을 것 같았다.
노인은 좋은 뜻에서 따스한 말을 건넸다. 반근은 열이 받았지만 대꾸할 수 없었다. 아씨가 말을 삼가라고 당부했기 때문이다.
웃음소리가 또다시 잦아들었다.
“하늘이 말하기를 곧 그친답니다.”
여인의 목소리가 또다시 전해졌다.
이 낭자가 정말 작정하고 농담을 하는 건가. 웃음소리가 그치자마자 또다시 사람을 웃기려 들다니. 다들 웃고 있을 때 말했으면 이 정도의 파급 효과는 없었을 텐데.
묘당은 또다시 전에 없이 소란스러워졌다. 비를 피하는 일로 아웅다웅하던 사람들도 마음이 누그러져 서로를 보며 웃었다.
그러더니 웃음소리가 갑자기 밖에서부터 뚝 그쳤다.
“앗, 비가 그쳤어!”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소리치는 소리가 연달아 들리더니, 곧 묘당 안의 웃고 떠드는 소리를 눌러 버렸다. 모두가 일제히 밖을 바라봤다.
억수 같이 내리던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비로 바뀌어 있었다. 모두가 그 광경을 지켜보던 그때, 날이 활짝 갰다.
기이할 정도의 적막이 지나가고, 묘당 안은 또다시 왁자지껄 소란스러워졌다.
구름이 걷히고 비가 멈추자, 텅 비어 있던 도로는 땅 밑에서 솟아나기라도 한 듯 순식간에 사람들이 불어나 활기찬 모습을 되찾았다.
낡은 묘당에서 비를 피하던 사람들은 웃으며 헤어졌지만, 오늘 본 광경은 며칠 동안 화제로 오르내리기에 충분했다.
“경성 태사국에 있는 상공들은 비바람을 정확히 예측한다던데.”
“그 낭자도 상공들처럼 대단한 분인가?”
사람들이 순식간에 흩어지면서 낡은 묘당에는 반근과 낭자, 노인과 여자아이만 남았다. 반근은 진작 짐 정리를 마친 상태였고, 마부는 짐을 실으며 출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노인 역시 여자아이를 등에 업고 문을 나섰다.
“낭자는 비바람을 부를 줄 아네요!”
어린 여자아이는 반나절 동안 어른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무슨 말인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았다. 그래도 맛있는 간식을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나귀 마차 쪽을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하게 됐다.
우리 아씨는 선인의 계시를 받은 거라고. 반근은 약간 우쭐해하며 싱긋 웃었다.
“아니란다. 하늘을 보는 거지.”
마차 안에서 또다시 말소리가 들리더니 휘장이 반쯤 걷혔다.
이때 이들은 이미 묘당의 입구까지 와 있었다. 비가 그치고 날이 개면서 눈부신 햇살이 쏟아졌다. 걷어 올린 휘장으로 약간 그늘이 지긴 했지만, 그래도 마차 안에 탄 여인의 모습은 보였다. 소녀였다.
저렇게 어리다니! 노인은 흠칫 놀랐다. 젊다는 말도 안 어울릴 정도였다. 겨우 13~14살쯤 됐으려나.
“아침에 길을 나서는데 솜구름이 있었거든.”
정 낭자가 할아버지 등에 업혀 있는 여자아이를 보며 말했다. 여자아이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지만 노인은 알아들었다. 구름을 보며 비를 예측하고 비를 보며 맑은 날씨를 예측한 것이다.
“낭자는 참으로 박학다식하시오, 참으로 박학다식하셔.”
노인이 거듭 칭찬했다. 정 낭자는 안에서 고개를 살짝 숙여 답례하며 노인을 바라봤다.
“어르신, 병을 빨리 치료하셔야 해요.”
정 낭자가 갑자기 말했다. 정 낭자 일행보다 앞서 출발하던 노인은 그 말에 멈칫했다.
“낭자, 병도 볼 줄 아시오?”
“약간요.”
정 낭자가 대답했다. 살짝 구부정한 노인의 등으로 햇빛이 쏟아졌다. 다른 사람의 눈엔 그저 노인이 여자아이를 업고 있는 탓에 등을 살짝 구부리고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 내가 무슨 병에 걸렸는지도 알고요?”
노인이 약간 멈칫하다가 웃으며 묻자 정 낭자는 도리어 말을 아꼈다.
“몰라요.”
정 낭자의 대답에 노인은 또다시 멈칫했다.
“하지만 내가 치료할 수 있어요.”
정 낭자가 말했다.
“어떻게 치료한단 거요?”
노인은 웃으며 물었지만 이미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우리 아씨한테 병을 고치려면 진료비를 먼저 내야 해요.”
반근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그 말에 노인은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낭자, 고마웠소. 어린애를 업고 가려니 힘에 부쳐서 이 늙은이는 먼저 갑니다.”
노인은 말을 끊으며 고개를 까딱해 인사하고, 먼저 묘당 문을 나서서 길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마부도 못 참고 끼어들었다.
“아씨, 이런 식이면 장사가 안 됩니다. 뭐 하러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무슨 병인지 모른다니요. 모른다 해도 고칠 수 있는 병이면 병명이야 아무렇게나 지어내도 되잖습니까.”
반근이 불쾌한 듯 마부를 노려보며 말했다.
“우린 장사하는 거 아니거든요?”
마부가 입을 삐죽대며 투덜거렸다.
“장사하는 게 아니면 진료비는 왜 달라고 하시나?”
“그야 돈이 필요하니까요…….”
반근은 야유하는 듯한 마부의 태도에 부아가 치밀었다.
“서둘러 출발이나 하죠. 해가 지기 전에 저 앞의 성엔 들어가야 묵어 갈 거 아니에요.”
“나도 두 사람을 위해 하는 소리예요.”
마부도 약간 겸연쩍은 듯 한마디 덧붙이고는 나귀를 재촉해 문을 나섰다. 마차가 흔들거리며 묘당 문을 빠져나왔다. 햇빛에 눈이 부신 정 낭자는 휘장을 내렸다. 반근도 마차에 앉자 마부는 마차를 몰며 앞쪽으로 나아갔다.
밤이 깊었을 무렵, 나귀 마차가 마침내 한 객잔 앞에 멈춰 섰다. 점원이 하품을 하며 나와 맞이했다. 반근이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려 한참을 진지하게 꼬치꼬치 묻더니, 마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진짜 시중들기 힘드네. 그 많은 객잔에서 이것저것 캐물으며 이래서 안 된다 저래서 안 된다 하다가 날이 저물었으니. 품삯도 하루 치 더 주고 하루 더 먹여 주고 재워 줘야 하는데 대체 왜 이러는 건지.”
마부가 투덜투덜 불평하며 나귀 마차를 끌고 뒷마당 마구간으로 향했다.
“그쪽은 돈 버니까 좋잖아요.”
반근이 마부를 향해 불만을 터뜨렸다. 정 낭자는 이미 마차에서 내려 있었다. 반근이 얼른 손을 뻗어 부축했다.
앞서서 길을 안내하던 점원이 고개를 돌려 힐끔 쳐다봤다. 낭자의 키는 몸종보다 약간 컸는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닿는 긴 너울을 쓰고 있었다. 안에 입은 옷은 소매가 짧은 겉옷인 갈색 반비(半臂) 차림이었고, 몸을 감싸는 어두운색 치마가 보일 듯 말 듯했다. 수수한 차림으로 봐서는 낭자의 나이가 적지 않을 텐데, 체형은 또 가냘파 보였다.
이때 대청 안은 이미 손님들의 움직임이 잦아든 후였다. 뒤쪽 객방의 불도 거의 다 꺼져 있었다. 밤바람이 불어오자 대청의 등롱 아래를 걷는 여인의 모습이 더욱 눈길을 끌었다.
두 사람이 건물에 기대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고개를 돌리다가 저도 모르게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대단한 미인이군.”
다른 한 사람도 그 시선을 따라 눈길을 돌렸지만, 정 낭자가 방문으로 들어가는 뒷모습만 언뜻 보일 뿐이었다.
“원랑의 눈이 점점 예리해지네. 너울을 쓰고 있는 뒷모습만 보고도 용모를 알다니.”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원랑이라고 불린 남자가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외모만 훌륭하다고 해서 미인인 건 아니지.”
원랑이 말하며 그 낭자가 있는 방을 쳐다봤다. 방 안의 등불이 어두운 게 벌써 잠자리에 든 것 같았다.
반근이 어두운 등불 아래 앉아 진지하게 돈을 셌다.
“아씨, 은자 3냥밖에 안 남았어요.”
정교랑은 침상 머리맡에 몸을 기댔다. 등불이 어둡다 보니 정교랑이 희미하게 보였다.
“내일 마차 빌리는 값에 식사 두 끼 먹고, 해 지기 전에 강주성에 들어가면 딱 맞겠네.”
정교랑이 말했다. 반근은 마차값과 밥값 등의 가격을 훤히 꿰고 있었지만, 정교랑만큼 계산이 빠르지는 않았다. 그래서 반근은 값만 기억해 뒀다가 보고하고, 정교랑의 일정 안배를 기다리는 식으로 움직였다.
“아씨, 하룻길인데도 마차를 바꿔야 해요?”
반근이 이해할 수 없는 듯 물었다. 정교랑이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응.”
“마부가 말이 너무 많긴 했어요.”
반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실 그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정교랑이 의식적으로 이렇게 마차를 바꿔 가며 여러 대로 이동하는 것은 자신의 행적을 들키지 않기 위함이었다. 이 방법을 쓰려면 여정에 들어가는 돈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보통 사람이 보기엔 불필요한 지출이었다. 그런데 왜 이런 방법을 쓰는 거지? 뭔가를 피하는 듯한데, 뭘 피하는 걸까?
정교랑이 피하는 걸까,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피하는 걸까?
정교랑은 다시 침묵에 빠졌다. 혼란스럽고 제대로 보이지 않는 그 기억들은 대체 뭘까?
침상에 있는 아씨가 또다시 멍해지는 모습을 보고, 반근은 조심스레 전대를 정리한 다음 등불을 끄고 자리에 옆으로 누워 눈을 감았다.
지난달에 병이 한 번 발작한 후 지금껏 길을 오면서 아씨는 한 번도 병이 발작하지 않았다. 이제 곧 집에 도착하니 더는 길을 재촉하지 않아도 되고, 의지할 곳도 생기게 된다. 반근은 입가에 달콤한 미소를 머금은 채, 약간은 설레는 기분을 안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잠에 빠져들었다.
이튿날 정교랑과 반근이 마차를 타고 성문을 빠져 나가던 때는 이미 정오가 다 됐을 무렵이었다. 길 위는 오가는 인파로 북적여 정교랑의 나귀 마차 정도는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급보요, 급보.”
다급한 말발굽 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오자 행인들이 잽싸게 비키며 길을 텄다. 장병 한 무리가 나는 듯이 지나갔다. 급히 비켜서면서 붐비는 통에 마차 한 대가 길가의 웅덩이에 빠질 뻔했다.
“아버지, 괜찮으십니까?”
비단 관복 차림으로 말을 탄 채 옆에 있던 중년 남자가 급히 말에서 내리며 물었다. 시종들이 마차의 휘장을 걷었다. 마차 안에는 노인 한 사람과 아이 하나가 있었다.
“아버지, 단랑도 말을 탈래요.”
여자아이가 손을 벌리며 남자에게 소리쳤다. 노인이 손을 뻗어 여자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밖은 더워. 이따 시원해지거든 말 타게 해 줄게.”
노인은 여자아이를 달래며 남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괜찮다. 얼른 길을 서둘러라. 네 공무를 그르쳐선 안 돼.”
“이 불효자 때문에 아버지까지 고생하시네요.”
남자는 죄송한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런 말 마라. 어서…….”
노인이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멈추더니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
남자가 영문을 몰라 하며 소리쳤다. 아버지의 시선은 앞쪽의 어느 곳을 향해 있었다. 남자도 그 시선을 따라 눈길을 돌렸다. 그곳엔 나귀 마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는데, 15~16살쯤 되어 보이는 몸종이 마차의 휘장을 걷고 초조한 표정으로 안에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다시 그 나귀를 보니 방금 전 소동으로 다리를 다친 듯했다. 마부가 쪼그리고 앉아 살펴보고 있었다.
그 낭자로군.
노인은 잠시 망설였다. 저들도 강주부에 가는 길인가?
전에 길에서 노인이 아이를 데리고 더디게 걷는 모습을 본 낭자는 선뜻 자기 마차에 타라고 하면서, 길을 서둘러야 비를 피한다고 했다. 처음엔 노인을 공경하는 뜻에서 하는 말로 듣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 말을 믿진 않았지만 선의에서 한 말이라고 생각하고, 몸종이 마차 바깥자리에서 여자아이를 안고 타게 하여 동행했다.
그렇다면 이번엔 우리가 동행을 권해야 하나? 이쪽엔 마차 한 대가 더 있었고, 어쨌거나 저 나귀 마차보다는 빠를 터였다.
하지만…….
노인은 그때 낭자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치료할 줄은 알지만 이름은 모르고 진료비를 받는다고 했지. 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버지?”
남자가 약간 초조한 듯 소리쳤다. 노인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아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니다, 길을 서두르자.”
중년 남자는 부친의 무탈한 표정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 여자아이를 타이르고 뒤돌아 말에 올랐다. 호위대가 길을 열면서 이들은 곧 길 앞쪽으로 나아갔다.
마차의 휘장이 바람에 흩날리자 노인은 무심코 밖을 바라봤다. 그 작은 나귀 마차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어르신, 병을 빨리 치료하셔야 해요.
낭자의 딱딱한 목소리가 귓가에 퍼졌다.
노인은 손으로 허리를 짚어 보고 또다시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그 낭자는 열댓 살 먹은 어린아이에 불과했어. 잔재주를 좀 익힌 게지.
마차의 행렬이 길에서 빠르게 멀어졌다.
-북정(北程)-
나귀 마차가 고장 나는 바람에 정교랑이 강주성에 도착했을 무렵, 성문은 이미 닫히고 있었다. 반근이 정씨 집안을 들먹인 후에야 위병들은 반신반의하며 통과시켜 주었다.
강주성 내에는 성을 가로지르는 강이 있었다. 그 강은 과거 물난리가 났을 때 정씨 온 집안이 나서서 뚫은 물길이었다. 그 후로는 홍수가 나도 강주성의 물길이 둘로 나뉜 탓에 더 이상 물난리가 일어나는 일은 없었고, 조정에서는 정씨 집안의 의로운 행동을 높이 사며 비석과 패방(牌坊)을 세워 줬을 뿐 아니라 강 서쪽의 3분의 1을 정씨 집안 소유로 해 주었다. 그 일로 정씨 가문은 속칭 서하 정씨로 불리었다.
정씨 일족은 이곳에 거주한 후 세 개의 궁형(弓形) 모양 교각을 중심으로 둘로 나뉘게 되었다. 교각의 남쪽에 사는 이들을 남정, 교각의 북쪽에 사는 이들을 북정이라 했는데, 두 정씨의 혈연관계는 이미 3대 이상을 건너게 되었다.
북정은 분가하지 않으면 재산을 나누지 말라는 선조의 유훈을 받들어 지금껏 가산을 지켜왔지만, 남정은 이미 여러 사람들이 뒤섞여 사는 상태여서 북쪽은 부귀하고 남쪽은 그에 의탁해 사는 처지였다.
정교랑의 부친이 바로 북정에 있는 현재 종가의 이노야였다. 성문에서 반근이 북정의 집안사람임을 밝혔을 때 위병들이 신속히 통과시켜 준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남정이었다면 그리 신속하진 않았을 터였다.
이제 강물은 더 이상 예전처럼 맹렬한 기세로 범람하지 않았다. 여름철에도 수위가 얕아 배조차 다닐 수 없을 정도였다. 밤이면 강가에 수양버들이 드리워지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 경관을 보기에는 좋았다.
강 건너편에 서서 높디높은 청색 담장을 보며 반근이 흥분하여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아씨, 저기가 우리 집이에요.”
정교랑은 흰 기와가 있는 그 청색 담장을 바라보았다. 그 뒤로 검은 기와의 지붕이 끝없이 이어져 있어 딱 봐도 최소 다섯 채 깊이는 되어 보였다. 웅장한 패방은 이쪽에서도 보였는데, 밤이라 글씨까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저쪽이 정문이에요.”
반근이 정교랑을 인도해 다리를 건너며 흥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 노마님을 따라 두 번 와 봤어요. 아씨께선 3살 때까지 집에서 자라셨고요.”
3살까지 집에서 자랐다 한들 무슨 소용인가. 지적 장애 때문에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데.
정교랑은 반근의 손에 손을 올려 짚고 천천히 다리를 건넜다. 정씨 집안의 땅이다 보니 괜히 길가를 어슬렁거리며 배회하는 사람은 없었다. 강가 근처에 여기저기 앉아 있는 사람들은 전부 정씨 집안의 사람이었다. 남녀노소 다양하게 있었다. 어린애들은 장난을 치며 놀고, 여인들은 강가에서 빨래를 하며 조잘조잘 웃고 떠드느라 왁자지껄했다.
정교랑과 반근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이자, 특히 밤인데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긴 가리개를 드리운 여인의 모습이 보이자 다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봤다.
“여긴 전부 남정 사람들이에요. 대부분은 일족의 보살핌 덕분에 살아가죠.”
반근이 나지막이 말했다. 두 사람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다리를 건너 북정으로 향하고 있었다.
오밤중에 두 여인이 뭘 하려는 거지? 정씨 집안 안식구인가?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럼 손님? 여인 둘이 오밤중에 손님으로 온다고?
이쪽에서 더위를 식히며 쉬고 있던 사람들은 곧 의론이 분분해졌다.
정씨 집안의 대문은 물론 닫혀 있었다. 크고 붉은 등롱이 비추는 ‘적선지가(積善之家: 착한 일을 많이 한 집)’의 편액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과거 조정에서 하사한 편액이었다. 이 대문은 평상시에도 열려 있는 일이 없었다.
반근이 정교랑을 데리고 서쪽의 두 번째 문 근처로 갔다. 이곳은 정씨 일가 사람들이 평상시에 드나드는 곳이었다.
“아씨.”
반근이 손을 들며 뒤에 있는 정교랑을 바라봤다. 밤바람이 불어오자 등불 아래에 선 정교랑의 옷이 나부꼈다.
“두드려.”
정교랑이 말하자, 반근이 고개를 끄덕이고 흥분된 마음으로 정씨 집안의 문을 두드렸다.
대부인은 아직 잠자리에 들기 전이었다. 내일 길을 떠나야 해서 몸종들과 옷을 고르는 중이었다.
“이 옷은 너무 화려해. 자줏빛 갈색 옷으로 가져와라.”
대부인이 말하자 커다란 옷궤 근처에 있던 몸종이 그 말에 얼른 옷을 꺼냈다. 대부인은 이번에도 마음에 안 드는 듯 답답해했다. 그러더니 결국 박달나무 색상의 옷을 골랐다.
“아무래도 이게 낫겠구나. 눈에 띄게 돋보이지 않으면서도 칙칙해 보이지도 않아.”
대부인이 말했다. 밖에서 몸종 하나가 급히 들어와 말했다.
“대부인, 집사가 왔습니다.”
집사? 대부인은 멈칫했다. 이 늦은 시각에 내외하지도 않고 집사가 오밤중에 여길 오다니?
“대노야는 쉬시느냐?”
대부인이 물었다. 대노야는 오늘 날짜에 맞춰 첩실 방으로 들었을 터였다.
“집사가 대부인께 먼저 허락을 받을 일이 있대요.”
몸종이 말했다. 대부인도 이제 마흔이 넘은 나이였다. 시어머니는 이미 연로하여 집안일은 거의 대부인에게 넘겨 준 후였다. 그렇다면 내키지 않아도 피할 수 없는 법.
“들라 해라.”
정 대부인이 말했다. 몸종의 시중을 받으며 객청으로 나가자, 집사가 얼른 예를 표했다. 집사는 근심 어린 표정이었다.
“무슨 일인가?”
대부인이 물었다.
“밖에 여인이 왔습니다.”
집사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 말에 대부인은 가볍게 부채질을 하며 꿈틀하는 눈빛을 가렸다.
뒤에 있던 나이 많은 여종이 눈치 있게 얼른 손을 내저으며 몸종 몇 명의 자리를 물렸다. 이제 측근 두 사람만 남아 시중을 들게 됐다.
“이노야를 찾아왔답니다.”
집사가 말을 이었다. 대부인은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자기 집 일은 아니었다. 물론 이노야도 한 집안이기는 하나 그래도 엄연히 달랐다.
“이노야께서 돌아오신 지 반년도 안 됐는데.”
대부인이 말하며 손잡이 달린 부채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병주에서 왔답니다.”
집사가 얼른 말했다. 대부인은 탁자 위에 부채를 탁 내려놓았다.
곧 대노야가 불려왔는데, 문에 들어서는 모습부터 심기 불편해 보였다. 첩실과의 다정다감한 시간을 질투한 아내가 고의로 불렀다고 여기다가, 집사까지 와 있는 걸 보고 표정이 다소 누그러졌다. 그러던 것이 집사의 말을 듣더니 순식간에 안색이 변했다.
“황당하군! 내쫓아 버려!”
대노야가 소리쳤다.
“대노야, 병주에서부터 왔다니 일단 이노야한테 물어보세요.”
대부인이 말했다.
“뭘 물어본단 말이오? 이렇게 황당한 일을 아우한테 맡길 순 없어!”
맏형이자 일족을 이끄는 대표로서 대노야는 노발대발했다. 대부인은 고개를 가로젓고 대노야를 설득하는 한편 사람을 시켜 이노야를 모셔오게 했다.
“이부인은 모르게 하고.”
대부인이 주의를 주었다. 하지만 심부름을 갔던 여종은 이노야께서 아직 집에 안 돌아오셨다며 동료들과 술을 마시는 중이라고 했다.
“이부인께서 급한 일이면 사람을 보내 모셔 오겠다고 하셨어요.”
여종이 덧붙였다. 대노야는 그 말에 속이 터졌다.
“종일 술만 퍼마시다니, 체통을 지켜야지!”
대노야가 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데려와라!”
대부인은 다른 곳으로 생각이 미쳤다.
“그 여인은 어디 있느냐?”
“아직 문 앞에 있습니다.”
대부인이 묻자 집사가 대답했다.
“문에 세워 두지 마라. 소란스러워지면 곤란해. 우선, 이리 데려와라. 좀 보자.”
대부인이 말했다.
“안 되오. 안으로 들일 생각 말고 나가서 보시오.”
집사는 어느 쪽 말을 들어야 할지 난처해졌다. 문 밖에서 몸종들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부인께서 오시네.”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 말에 흠칫 놀랐고, 대부인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발을 들어 올리는가 싶더니 24~25살쯤 된 부인이 들어왔다.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눈이 총명해 보이는 여인이 우선 대노야 내외를 향해 예를 올렸다.
“조정 일이 끝나 동료들과 한잔하시나 봐요.”
이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남편을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려고 온 것이다. 대노야는 그 말에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이리 현숙하고 온화한 부인을 집에 두고 밖에서 무슨 황당한 일을 벌이고 다닌 게야.
“그래, 별일 아닐세.”
대부인이 얼른 웃으며 말했다.
“그 일로 여기까지 발걸음을 했구먼. 어서 가 봐. 희는 벌써 잠들었겠네. 자네도 어서 가서 쉬게.”
이부인이 새해 직전 적장자를 낳으면서 이방도 마침내 한숨을 돌리게 됐다. 이부인은 웃으면서 그 말에 대꾸하지도 그렇다고 물러가지도 않았다. 방 안의 분위기가 좀 이상했다.
“형님, 여기까지 왔는데 숨기지 마세요. 다들 아는데 저만 모르니 낯을 못 들겠네요.”
이부인이 말하며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이미 목메어 흐느끼는 목소리였다.
한 집에 살면서 집안에 일어나는 일을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 대노야와 대부인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청랑, 서두를 거 없어. 아직 확실히 물어본 게 아니니 괜한 생각 말아.”
대부인은 하는 수 없이 이부인을 잡아끌며 나지막이 위로했다. 둘이 그런 말을 나누고 있는데, 문 밖에서 돌아온 이노야의 소리가 들렸다.
“형님, 절 찾으셨다고요?”
사람도 들어오기 전에 목소리부터 전해졌다.
진청색 도포를 입은 이노야는 술 냄새와 함께 웃으며 들어왔다가, 방 안에 사람이 여럿 있는 걸 보고 흠칫 놀랐다.
“다들 계셨네요. 무슨 좋은 일입니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내가 달려드는 모습이 보였다.
“좋은 일이라뇨? 정동, 정이낭, 아주 좋은 일을 벌이셨나 봐요!”
이부인이 이노야에게 덤벼들었다. 이노야는 갑작스러운 공격을 미처 피하지 못하는 바람에 얼굴에 붉은 손톱자국을 남기게 됐다.
늘 온화하고 상냥하던 이부인이 이렇게 화끈하게 손을 쓸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정신을 차린 대부인은 얼른 이부인을 잡아끌었고, 대노야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 안은 순식간에 혼란스러워졌다. 밖에 있던 나이 많은 여종들은 얼른 어린 몸종들이 자리를 피하도록 했다. 오밤중에 찾아오는 손님 치고 좋은 일이 없는 법이다.
나이 많은 여종들은 이날 정교랑이 찾아와 문을 두드리면서 일어난 소동을 몇 년 후까지도 기억했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적장녀(嫡長女)-
반근은 자신이 두드린 문의 안쪽에서 윗전들끼리 싸움이 일어난 일을 몰랐다. 반근과 정교랑이 문 앞에 서 있는데도 들어오라는 소리조차 없었다. 두 사람을 쳐다보는 주위 노복들의 눈빛도 이상했다. 뭘 물어봐도 대답하지 않고 피하는 눈치였다. 반근은 이해할 수 없었다.
“왜들 이러지?”
반근이 약간 긴장하며 정교랑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우릴 보는 눈빛이 좀 이상하죠?”
정교랑이 마당 안을 쳐다보며 말했다.
“저들이 네 말을 오해했구나.”
반근은 네 하고 대답하면서도 이해를 못 했다. 방금 전 반근은 문지기에게 이노야를 찾아왔다며 병주에서 온 친척이라고 했다.
“그 말이 오해할 게 뭐가 있죠?”
반근은 이해할 수 없어 하며 묻다가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씨가 오해라고 했으면 오해가 틀림없지. 그러자 반근은 조금 불안해졌다.
“무슨 오해를 한 건데요? 아씨께서 진작 저한테 주의 좀 주시죠.”
입이 머리를 못 따라가다 보니 정교랑은 침묵을 지켰다. 웃으려고 했지만 웃음을 짓기도 전에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정교랑은 마당 안을 쳐다봤다. 나이 많은 여종 네다섯이 무거운 표정으로 걸어왔다. 반근은 그 모습을 보고 흥분하며 얼른 다가가 맞이했다.
“아주머니들, 이노야께서…….”
반근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여종 둘이 급히 반근을 에워쌌다.
“이노야께선 댁에 안 계십니다. 시간이 늦었으니 우선 어디 가서 하루 묵었다가 내일 다시 오세요.”
여종들은 좌우에서 반근을 막아섰다. 반근은 깜짝 놀랐다.
“왜 이래요?”
반근이 소리치며 막 입을 열자 더러운 헝겊 조각이 입으로 쑤셔 넣어졌다. 반근은 멍해졌다.
“오해하셨어요.”
반근이 울며 소리쳤다. 역시 아씨의 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
“난 이노야의 딸이다.”
정교랑이 말했다. 정교랑 쪽으로 걸어오던 두 여종은 멈칫했다.
뭐라고?
방 안에서는 이부인이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닦고 있었고, 이노야는 방금 전 실랑이로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있었다. 이런 일이 익숙하지 않은 티가 났지만, 그렇다고 이런 때에 몸종을 불러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보름간 사당에서 지내며 반성해라. 바깥출입은 금지다!”
대노야가 서슬 퍼런 얼굴로 호통을 쳤다.
“아직 젊은 나이고 그 자리에 있다 보면 접대도 피할 수 없잖아. 노느라 만난 여인들이지. 그런 일로 마음 쓰면 안 돼.”
대부인이 이부인의 어깨를 토닥이며 나지막이 위로했다. 이부인도 일을 더 키우는 건 사리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 눈물을 닦으며 알았다고 했다.
“그래. 이 얘긴 그만하자고. 사람이야 쫓아버리면 그만이지. 없었던 일로 해.”
대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노야를 바라봤다.
“이노야, 다시는 이런 황당한 일 만들지 마세요. 본인 생각은 안 하더라도 아들 생각은 하셔야죠.”
이노야의 얼굴도 파랗게 질려 있었다. 난처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다. 밖에서 두 여종이 급히 들어와 예를 표하고 말했다.
“노야, 부인.”
“잘 처리했느냐?”
대부인이 물었다.
“아니요.”
여종은 대답하면서 이노야를 힐끔 보며 주저했다.
“말로 해서 안 들으면 입을 막아서라도 끌어내야지. 일한 게 몇 년인데 이런 일 하나를 제대로 못 해?”
대부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자 여종은 당황하며 알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다시 이노야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런데 이노야의 따님이라고 하세요.”
그 말에 평온을 되찾았던 이부인이 벌떡 일어섰다.
“정이낭, 여인이랑 애까지 낳았어요? 해도 나무하네요!”
이부인이 소리치며 이노야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번엔 대부인이 잽싸게 손을 뻗으며 막았지만, 기우뚱하며 하마터면 같이 쓰러질 뻔했다.
여종들이 얼른 나서서 부축했다. 방 안이 또다시 소란스러워졌다.
반근은 정교랑 옆에 서서 잔뜩 경계 중인 여종들을 쳐다봤다.
“이제 오해가 풀린 거죠?”
반근이 정교랑에게 소리 낮춰 묻자 정교랑이 대답했다.
“말을 전하는 사람이 제대로 전하지 않거나 듣는 사람이 제대로 안 들을까 걱정이지.”
병주에 정씨 집안의 딸이 있다는 걸 기억하는 사람이 이 집에 있으려나?
정교랑은 마당을 쳐다봤다. 높은 가림벽이 시선을 막아 그 안에 있는 저택이 어떤 모습인지는 볼 수 없었다.
“아니라고!”
이노야가 분노로 소리치며 이부인을 밀쳐냈다. 바닥에 쓰러진 이부인은 대부인을 붙잡고 대성통곡을 했다.
대노야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벽에 걸려 있던 보검을 뽑아 들었다. 여종들은 화들짝 놀라 급히 무릎을 꿇으며 대노야를 말렸다. 대부인은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말리느라 발바닥에 불이 났다.
“누가 날 음해하는 건지 내가 직접 가 보지!”
격분한 이노야가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어딜 보러 가. 그랬다간 이 집에 발도 들일 생각 마라!”
대노야가 목소리를 떨며 호통쳤다. 이노야는 못 들은 듯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아주버님, 형님. 얼른 보려고 뛰어 나가는 것 좀 보세요.”
이부인이 울며 말했다. 대부인이 급히 일어섰다. 여인을 보러 갔다간 정말 시시비비를 가리기 힘들어질 것 같다.
“걱정 말게. 내가 있는 한 남을 우리 집에 들이는 일은 없을 거야. 그게 누구라도 안 돼!”
말을 마친 대부인은 이부인을 더 위로할 새도 없이 급히 뒤쫓아나갔다.
이노야가 문 앞으로 왔다. 멀리 등롱 아래에 두 여인이 서 있고 여종 몇 명이 에워싸고 있는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정말 찾아온 이가 있단 말인가?
이노야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자신이 방탕하긴 해도 밖에서 아이를 낳은 기억은 없는데? 언제 실수를 했나? 실수를 했다 한들 죽어도 아니라고 잡아떼면 그만이다. 아마 저쪽도 증거가 없긴 마찬가지일 터. 그게 아니라면 지금에서야 찾아왔을 리 없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이노야의 발걸음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이노야는 굳은 얼굴로 기세등등하게 걸어갔다.
“노야께서 오시네요!”
반근이 한눈에 알아보고 기뻐하며 소리쳤다. 정교랑도 진작 이노야를 발견한 터였다.
이노야는 서른 남짓한 사내로 호리호리한 체형에 보통 키였다. 가까이 다가오자 희고 깨끗하며 각진 얼굴이 보였다. 잘생기진 않았어도 못생긴 얼굴 역시 아니었다. 이노야의 뒤로 대부인이 급히 따라왔다.
“너희는 무슨…….”
이노야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반근이 반갑게 앞으로 나섰다.
“노야, 저 반근이에요. 아가씨를 모시고 돌아왔어요.”
이노야가 순간 걸음을 멈췄다.
반근? 누구지?
“아씨, 아씨. 이쪽이 아버지세요. 아씨의 아버지요.”
반근이 다시 정교랑을 잡아끌며 소리쳤다. 기쁘기도 하고 마음이 아프기도 해서 왈칵 눈물이 나왔다.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누가 아버지란 말이냐!”
이노야가 소리쳤다.
“어디서 온 여인들이오? 사람을 잘못 찾아왔나 본데.”
대부인 역시 앞으로 나서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반근은 우느라 말도 제대로 못 했다. 정교랑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손을 뻗어 가리개를 벗었다.
“아버지.”
정교랑이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이 여인의 얼굴이 어쩐지 눈에 익긴 한데.
이노야와 대부인은 멈칫했다.
“누구라고? 왜 멋대로 아버지라고 불러?”
이노야가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노야, 잊으셨나 봐요. 도관에 가 있으면 우릴 데리러 온다고 하셨잖아요. 도관이 벼락을 맞아 불이 나는 바람에 저랑 아씨가 직접 길을 나선 거예요.”
반근이 울며 말했다.
우르르 꽝! 밤하늘에 천둥이 치는 듯했다. 이노야와 대부인은 갑자기 퍼뜩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멋대로 아버지라고 부른 게 아니었어! 진짜 딸이었구나!
대노야도 멈칫했다.
“그, 모자란 아이?”
대노야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네, 대노야. 병주 도관에 보냈던 큰아씨께서 돌아오셨어요.”
여종이 말했다. 대노야는 탁자 위에 보검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 애구나.”
대노야가 읊조리며 한숨을 쉬더니 또다시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긴장하기 시작했다.
“주씨 가문 사람들도 왔느냐?”
여종은 순간 경황이 없어 주씨 가문 사람이 누군지 생각나지 않았지만, 이부인이 생각해 냈다. 주씨 일가는 이노야의 예전 부인의 친정이었다. 이부인이 시집오기 전, 굴욕적이지만 손윗사람 신분의 주씨 가문 사람을 만난 적 있었다. 친정의 세력이 아니었다면 이부인 자신도 주씨의 위패 앞에 차를 올렸어야 했을 터였다.
이부인은 눈물을 그치고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을 꽉 쥐었다.
그 딸이로구나.
정씨 가문 이방의 적장녀가 돌아온 것이다.
“뭐? 적장녀?”
내당 깊은 곳에서 머리를 풀고 누워 있던 정칠랑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나한테 언니가 생겼다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정칠랑의 새하얀 얼굴에 홍조가 번졌다. 붉게 물들인 손톱 끝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내가 이방의 장녀가 아니란 말이야?”
-어찌하나-
정씨 가문의 등불은 거의 밤새 켜져 있었다. 두 정씨 형제와 부인들이 전부 대노야의 방에 모였고, 여종이 정신을 깨우는 탕을 달여 가져왔다.
“잠들었느냐?”
대부인이 묻자 여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둘이 차례로 잠들었어요.”
“짐은 확인했고?”
대부인이 또다시 물었다.
“네. 별다른 건 없고 은자도 없었어요. 옷가지 몇 벌과 화로, 빈 찬합 외에 딴 건 없었습니다.”
여종이 대답했다. 그 말에 방 안에 있던 네 사람은 약간 갸웃했다.
그 정도 물건만 가지고 병주에서 강주까지 왔다고? 교외에 있는 대불사에 분향하러 가려고만 해도 그 정도로는 부족할 것 같은데?
대부인이 손을 내젓자 여종들이 차례로 물러갔다.
“집을 떠난 지 하도 오래돼서 난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도 잘 안 나네요.”
대부인이 이노야를 보며 말했다.
“안 그래요?”
주씨와 혼인 후 2년이 되도록 태기가 없어 온 집안이 초조해하던 중 주씨가 간신히 회임을 했다. 딸이긴 했지만 온 집안이 기뻐했다. 그때만 해도 생전에 있던 노태야가 직접 이름까지 지어 주었지만 여섯 달이 채 못 되어 문제가 드러났다.
“다른 아이는 눈동자가 사람을 따라가는데, 아기씨는 멍하니 계셨어요. 다른 아이는 다 앉을 줄 알 때에도 아기씨는 못하셨고 뒤집기만 간신히 하셨죠. 허약하게 태어나셨나 보다 하고 먹는 것에 더 각별히 신경을 썼는데, 문제는 점점 늘어났어요. 멍한 눈빛으로 침을 흘리며 말도 못 하셨죠. 그러다 돌이 되었을 때 결국 지적 장애를 가졌다는 확진을 받았고요.”
유모가 자리에 앉아 그때 일을 나지막이 고했다. 정칠랑은 연자줏빛 옷을 입고 침상 위에 앉아 있었다. 아직 8살인데도 상당한 미모의 호감형이었다.
“모자라단 말이야?”
정칠랑의 말에 유모가 얼른 쉿 하는 동작을 취했다.
“아이고, 아씨. 목소리 좀 줄이세요.”
“싫어.”
정칠랑은 점점 목소리가 커지더니 옆에 있던 베개를 던져 버렸다.
“바보 언니라니, 앞으로 사람들을 어떻게 봐!”
방 안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자 밖에서 당직을 서던 몸종들은 몸을 움츠리며 입을 다물었다. 응석받이로 자란 정칠랑은 성격이 제멋대로였다. 성깔을 부리기 시작하면 아무도 못 말렸다.
한편 이노야도 심기가 불편했다. 어린아이가 아니다 보니 마구 성질을 부릴 수 없을 뿐이었다.
“제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그때 저 애 어미가 죽은 후로 곧장 도관에 보내 버렸는데.”
“그게 무슨 말이야. 저 애 아버지는 넌데, 네가 못 알아보면 우리가 알아보란 말이냐?”
대노야가 무거운 표정으로 호통을 쳤다.
“그럼 되겠네요.”
이노야가 말했다. 열 받은 대노야가 또다시 일어나 보검을 뽑으려 하자 대부인이 얼른 말렸다.
“그때 도사가 식구들한테 찾아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6~7살 때 보냈는데 그 사이에 얼마나 달라졌겠어요. 곁에 두고 키운 게 아니면 못 알아보죠.”
대부인이 말했다. 여자는 자라면서 여러 번 바뀐다고 하지 않는가.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잠시 침묵했다.
“그런데 저 둘은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래요?”
이부인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그때 주씨 가문 노부인이 목돈을 남겨 줬거든. 그걸 도관에 묻었는데 도관이 재앙을 입자 반근이 그걸 꺼내서 마차와 마부를 샀나 봐. 모자란 애 하나랑 어린 몸종 하나니 오는 길에 속이려 드는 사람이 없었겠어? 구슬려 삶는 통에 돈을 다 뜯겼겠지.”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지.
밖이 조용해지자 반근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어갔다. 대나무 문발 저쪽의 정교랑은 몸을 옆으로 누운 채 숨소리조차 안 내고 있었다.
“아씨.”
반근이 나지막이 부르며 말했다.
“우리가 어떻게 왔는지 왜 말씀 안 하셨어요? 노마님이 우리한테 돈 남겨 주신 거 없잖아요. 아씨께서 병을 치료할 줄 안다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 아니에요?”
정교랑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반근은 정교랑이 잠든 줄 알고 다시 조용히 자리로 돌아왔다.
“말해 봤자 안 믿을 거야.”
정교랑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반근이 반색을 하며 몸을 돌렸다.
“아씨, 아씨도 안 주무셨네요. 잠이 안 오시죠?”
반색은 소리를 낮춰 물었지만 기쁨을 억누를 수 없는 목소리였다.
“우리, 집으로 왔어요.”
정교랑이 웃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웃을 뿐 입가의 움직임은 아주 미미했고, 밤이다 보니 더더욱 분간하기 힘들었다.
“그래.”
정교랑이 대답했다.
“아, 아씨. 얼른 주무세요. 내일 아주 많은 사람을 보게 될 거예요.”
반근이 소리를 죽여 말하자 정교랑은 응 하고 대꾸한 후 눈을 감았다.
창을 통해 밤바람이 들어왔다. 조용한 밤이었지만 사람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이따금 들려왔다. 안에 있는 둘에게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반근이 이번엔 금세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몇 달 만에 처음으로 편안히 잠자리에 든 것이다. 정교랑은 반근의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돌아누우려고 했지만 몇 번 시도해 보다가 결국 포기해야 했다.
집에 왔다니. 여기가 정말 집인가? 정교랑은 눈을 감고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밤이 깊어지면서 정씨 가문 네 사람의 논의도 일단락을 짓게 됐다. 말을 하려고 해도 딱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오늘 밤 당장 병주 주씨 집안으로 사람을 보내 물어 봐라. 어떻게 된 일인지 소상히 물어봐.”
대노야가 손을 내저으며 결정을 내렸다.
자신들의 거처로 돌아온 이노야 부부는 각자 씻고, 이노야가 서재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려 하자 이부인이 막아섰다.
“소첩이 잘못했어요. 제대로 물어보지도 않고 소란을 피웠네요.”
이부인이 몸을 낮춰 남편에게 직접 차를 올리며 고개를 숙이고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아내가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자 이노야도 한층 표정이 누그러져 응 하고 대꾸했다. 차를 받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서재로 가지도 않았다.
이부인이 다가와 손을 뻗어 남편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이낭, 나도 사리는 아는 사람이에요. 정이 깊어 어쩔 수 없었던 거죠. 지금껏 내가 언제 시샘하고 질투한 적 있어요? 밖에서 오밤중에 사람이 찾아왔다니까 당황스럽기도 하고 겁도 났지 뭐예요. 이 결정적인 순간에 약점이라도 잡히면 어쩌나 하고요. 이낭, 우리 모자는 당신이랑 한 몸이에요.”
이부인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이노야를 보며 말했다.
이노야가 상처한 후 맞이한 후처는 동평주 팽씨 가문의 낭자로 이노야보다 6살 어렸고 이제 막 아들을 얻은 상태였다. 매혹적이고 우아한 자태가 정점에 이르렀을 때인데, 이런 말까지 해 가며 그윽한 표정으로 바라보니 이노야의 노기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당신도 참. 화낼 만도 하지. 당신 눈엔 내가 그리 방탕한 사람이오?”
이노야는 자리에 앉으며 차를 받았다. 두 부부가 마침내 화해를 하고 다정해졌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돌아오다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부인이 말했다.
“모자란 아이니 골치 아파질 것도 없소. 먹여 주고 재워 주면 됐지.”
이노야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며 하품을 했다. 취기가 올라와 잠이 쏟아졌다. 이부인이 잠깐 망설이며 생각에 잠겼다. 그 바보의 일을 생각하니 갑자기 다른 일이 떠오른 것이다.
“이낭, 그런데 아까 대노야랑 얘기할 때 말이에요. 녹랑, 십삼랑 어쩌고 하던데 그게 다 누구예요?”
옷을 벗고 침상에 눕던 이노야가 움찔했다.
방금 전 소동을 벌이면서 예전에 밖에서 만나던 여인들 이름을 아무렇게나 지껄였다. 형님한테 이미 관계를 끊었다고 말했던 건데, 울고불고하던 이부인이 그걸 듣고 기억하다니!
이게 다 그 바보 때문이다. 그 애가 오밤중에 뜬금없이 찾아오지만 않았어도 이런 사달이 벌어졌겠는가!
바보 따위가 무슨 문제를 일으키겠어? 아니지! 저 바보가 오자마자 집안에 성가신 일이 줄줄이 벌어졌지 않은가!
-한담-
정씨 저택 이방의 동쪽 뜰은 연못과 붙어 있었다. 대방과 이방이 함께 쓰는 화원이자 여름에 더위를 식히기 좋은 곳으로 집안의 어린 낭자들 거처는 모두 이 근처에 있었다.
여종들이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게 오가며 시중을 들었다. 단지 예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한 건물 앞을 지날 때는 걸음을 멈추고 힐끔힐끔 보며 한두 마디 수군댄다는 것이었다.
어젯밤 급히 치워진 이 방에 한 여자가 들어와 살게 됐다. 듣기로는 이 댁 적장녀라고 한다.
“우리 서열이 뒤로 하나씩 밀리는 거야. 칠랑은 이제 팔랑이 되는 거지.”
12살의 정육랑이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안에서 함께 밥을 먹던 어린 소녀 둘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고개를 숙인 채 웃음을 참았다. 유모가 당황해하며 급히 끼어들었다.
“여섯째 아씨, 동생을 놀리지 마세요.”
육랑은 대방의 적녀로 서녀가 아니었기에 정칠랑이 함부로 꾸짖을 수 없었다.
밤새 화가 쌓인 정칠랑은 그 말에 욱해서 젓가락을 내던지고 울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유모도 기겁을 하고 뒤쫓아 나갔다. 우는 정칠랑을 보며 정육랑은 메롱 혀를 내밀고는 깡충깡충 뛰어갔다. 방에 남아 있던 두 소녀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 바보 기억나?”
정사랑이 물었다.
“걔가 집을 떠날 때 우린 겨우 2살이었는데, 기억이 나겠어?”
정오랑이 말하며 천천히 젓가락을 들어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바보를 기억할 게 뭐 있어. 이렇게 생겼잖아.”
정오랑은 말하면서 장난스레 혀를 내밀고 흰자위를 까뒤집으며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정사랑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이젠 내가 정오랑이네.”
정사랑이 말하며 손가락으로 정오랑을 가리켰다. 정말 우스운 일이다. 두 자매는 서로 눈을 마주치고 다시 한번 까르르 웃었다.
밤새 한숨도 못 잔 이부인은 식사도 걸렀다. 조금 더 자려고 했는데, 딸의 울음소리에 하는 수 없이 일어났다.
“너한테 칠랑 하라고 한 사람 없어. 네가 칠랑이야. 영원히 칠랑이라고.”
이부인이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정칠랑이 모친의 옷소매를 잡았다.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모친의 다짐을 받고 나서야 마음이 조금 안정됐다.
“난 바보 언니 필요 없어요. 남들이 비웃는단 말이에요.”
정칠랑이 또다시 몸을 배배 꼬며 칭얼거렸다.
그게 가능하다면 아마도 정씨 집안 전부가 같은 생각일 거다. 하지만 무슨 방법이 있단 말인가. 그 바보를 도관에 버린 게 벌써 7~8년인데 죽지 않고 돌아온 것이다.
이부인은 극심한 두통을 느꼈다.
“그만해, 칠랑. 시끄럽게 할 게 뭐 있어. 좀 봐라, 이게 어딜 봐서 대갓집 규수의 모습이야? 계속 이러면 너도 그 바보 언니랑 똑같아지는 거야. 남들한테 웃음거리가 된다고!”
이부인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말에 정칠랑은 생각할 수도 없는 악몽인 듯 모친을 보며 으앙 울음을 터뜨렸다. 정씨 저택의 이방은 이른 아침부터 아수라장이었다.
소식은 금세 대방으로 전해졌다. 마찬가지로 밤새 잠을 못 이룬 듯한 대노야와 대부인이 시선을 주고받으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노야는 남자라 좀 그렇고, 동서는 시집을 늦게 와서 그 애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두 사람이 물어보게 하느니 내가 데려다가 물어봐야겠어요.”
대부인이 말하자 대노야가 지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 아침은 먹었다더냐?”
대부인이 여종을 보내 알아보게 했다. 얼마 후 여종이 돌아와 대답했다.
“아직 자고 있답니다.”
대부인은 어이가 없었다. 여름이라 해가 일찍 뜬다고는 하나 바깥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눈이 부실 정도로 안팎을 비추고 있을 무렵이었다.
“모자란 애가 보통 사람들처럼 생활하길 바라시오? 먹고 자는 것밖에 모를 텐데.”
대노야가 심드렁하게 말하며 덧붙였다.
“물어보지도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시오.”
정교랑과 반근은 정씨 저택으로 돌아온 첫날 편안히 푹 잤다. 집에 도착하자 몇 달간 전전긍긍하던 걱정거리가 싹 사라져 마음이 푹 놓인 덕에 반근은 그 어느 때보다 단잠을 잤다.
몇 달 전 정신이 돌아온 후 처음엔 밤마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던 정교랑도 이제는 제법 잘 잤다. 특히 어젯밤엔 밤새 꿈 한 번 꾸지 않고 단잠을 잔 걸 보면, 집에 도착해서 마음이 편한 게 맞긴 맞나 보다 싶었다.
어쨌거나 정교랑과 반근은 기분이 몹시 좋았다. 그래서 일어나 씻고 난 후 다 식은 식사를 받고도 별다른 반감은 들지 않았다.
“새로 와서 잘 모르겠지만 이 댁은 아침식사를 일찍 하거든. 아궁이에 불이 꺼져 다시 지피기 힘들어. 식구가 워낙 많기도 하고 작은 부엌에서 밥을 따로 해 먹는 법은 없거든.”
회랑 밖에서 나이 많은 여종이 웃는 듯 아닌 듯한 표정으로 반근에게 해명하며 하늘을 쳐다봤다.
“아니면 조금 더 기다리든가. 점심밥을 할 때가 거의 다 됐으니까.”
늦게 일어났다고 비꼬는 말이었지만, 반근은 눈치채지 못했다.
“괜찮아요. 제가 데워 먹으면 되죠.”
반근은 말하며 여종을 향해 웃음까지 지어 보였다.
직접 데워 먹는다고? 여종은 멈칫했다. 그러더니 반근은 과연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대청에 화로 두 개를 늘어놓고 찬합을 열었다. 안에는 주걱과 밥공기, 젓가락 등등 식기구가 전부 갖춰져 있었다. 갖춰져 있는 정도가 아니라 그 모양새도 매우 정교해서 몇 개는 여종조차 처음 보는 것이었다.
바보가 이렇게 정교한 물건을 쓴다고?
여종이 그릇들을 멍하니 바라보자 다른 여종 하나가 뒤로 와서 손으로 쿡 찔렀다.
“어때 보여?”
나중에 온 여종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나지막이 물으면서 건물 안쪽을 곁눈질했다. 먼저 온 여종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오지 않았어, 나도 안 들어가 봤고. 창이 열려 있으니 몰래 가서 봐.”
여종이 웃으며 소리 낮춰 말했다. 둘은 곧 조그마한 소리로 함께 웃었다. 반근이 음식을 데우고 찬합에 차례로 담아 방으로 들고 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두 여종은 따라 들어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어렸을 때 모습은 나도 기억나. 밥도 혼자 못 먹고 오줌도 못 가리니 겨울엔 옷을 다 못 빨아서 종일 몸에서 냄새가 났지. 그래서 돌아가신 선부인께서 방 안에 향을 피워 놓곤 했는데, 그 모자란 아이가 재채기를 해대는 거야. 재채기를 할 때마다 오줌을 지리곤 했어.”
다른 쪽에서 물청소를 하며 모여서 웃고 떠들던 여종들은 그 대목에서 깔깔대며 웃었다.
“선부인도 참 안되셨지 뭐야. 애초에 저런 애를 남겨 두는 게 아니었는데.”
“그래서 처음에 노태야께서 익사시키라고 하셨는데 돌아가신 선부인이 말리신 거잖아. 울고불고 하며 안 된다고 친정으로 돌아가 버리셨어. 노태야께선 열 받아서 사흘을 앓아누우시고는 겨우 단념하고 그 후로 이방 일에 일절 참견 안 하셨지.”
“어른 말 들어서 손해 볼 거 없다니까. 선부인이 저 천치한테 발목이 잡히는 바람에 이노야의 마음이 돌아서서 그 후론 아이를 못 얻으셨잖아. 도리어 몸만 상해서 일찌감치 세상을 뜨셨지. 저 애를 살려 둬서 고생하게 하느니 애초에 독하게 마음먹고 죽였으면 진작 환생해서 잘 살았을 텐데.”
“그게 무슨 말이야. 애초에 선부인이 안 돌아가셨으면 지금의 새 부인이 들어오셨겠어?”
그 말에 여종들은 또다시 깔깔대며 웃고는 화제를 새 부인에게로 옮겨 갔다.
“다들 선부인이랑 지금 계신 부인 중에 누가 더 좋아?
죽은 사람과 비교하는 건 이부인이 가장 꺼리는 일이자 후처로서는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정씨 집안과 혼담이 오가던 때부터 이부인은 이 점을 알고 있었다.
초혼으로 만나 서로에게 하나뿐인 사랑이길 누군들 바라지 않겠는가. 하지만 인생엔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다. 당시 부친이 죄를 지어 가세가 기울다 보니 혼기를 놓쳐 결국 재취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남편이 젊고 잘생긴 데다 벼슬길도 순조로워 다행이었다. 손위 동서는 친절했고 시모는 불교에 심취해 있어서, 시집와 보니 며느리가 아니라 이 집 딸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게다가 이제 적자까지 낳았으니 혼례 전에 걱정했던 일들은 차차 잊혀갔다.
하루하루 더 좋아지는 나날을 보내던 중 뜻밖에 이런 일이 터지면서, 마음속에 억누른 채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일들도 연거푸 튀어나오게 됐다.
이다음에 죽으면 이부인과 남편은 함께 안장될 수 없고, 중간에 관이 하나 놓일 터였다. 이부인은 조금 아래쪽 위치에 놓여야 했다. 남편과 수십 년을 함께하고 아들딸을 낳아 후손을 이었어도, 채 몇 년도 함께 살지 못한 여인에 못 미치는 것이다. 단지 조금 먼저 시집왔다는 이유로, 단지 남편이 처음으로 백년가약을 맺은 조강지처라는 이유로.
이부인은 몸을 떨었다. 딸이 아침부터 울어대며 말한 소리가 귓가에 웅웅 울려 퍼졌다. 난 바보 언니 필요 없어요.
바보. 이 모든 게 바보로 인해 생긴 골칫거리다. 왜 병주에서 죽지 않았으며, 여긴 또 왜 돌아왔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