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항상 서럽다, 종종 서럽다, 드문드문 서럽다 하시다가 아니라고 대답하신 건 처음이라서요.”
“그랬나…….”
“이 정도면 아주 좋은 세상은 아니더라도 함께해도 괜찮은 세상 정도는 되지 않았습니까?”
형진은 그의 손바닥에 얼굴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손바닥은 따뜻하고 손끝은 살짝 차가운, 커다랗고 단단하고 다정한 손이었다. 그 손에 얼굴을 부비자 혁윤이 들릴 듯 말 듯 소리 내어 웃었다.
마지막 남은 훌쩍임을 혁윤의 손안에 흘려보낸 형진이 혁윤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러고는 그의 뒤통수를 두 손으로 감싸고 가볍게 끌어당겼다. 혁윤은 저항 없이 눈을 감고 그녀가 이끄는 대로 얼굴을 내렸다.
눈물에 젖은 입술은 차가웠고 달래는 입술은 뜨거웠다. 두 사람은 입술을 가볍게 맞대었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하다가 젖어 드는 살을 느릿하게 비볐다. 차갑고 뜨거운 것이 서로의 체온을 닮아 갔다. 오랫동안 짝을 만나지 못한 뜨거운 살점이 엉켰다.
형진은 버거운 숨소리와 열이 오르는 아랫배와 맞닿은 단단한 몸에 만족스럽게 미소 지으며 그를 불렀다.
“남윤.”
떨어질 줄 모르고 맞닿은 혁윤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윤이 도령.”
형진은 옆으로 길게 곡선을 그리는 입술에 이를 세웠다. 그래도 혁윤이 눈을 뜨지 않자 그녀는 혁윤의 왼쪽 뺨에 쏙 들어간 보조개를 툭툭 두드렸다.
“보조개가 이렇게 파이도록 웃고 있으면서 눈은 안 뜨겠다?”
끄덕끄덕.
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괘씸하다며 담뿍 젖은 입술을 조금 더 세게 깨물었다 놓은 형진이 혁윤의 목뒤에 늘어뜨렸던 손으로 그의 뺨을 감쌌다.
“나한테도 남윤 하나뿐이고, 첫 번째야.”
거짓말.
혁윤이 입 모양으로 부정했다. 하지만 형진은 들은 체도 않고 그의 입술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처음부터 그랬어. 그래서 좋은 세상에 살고 싶었던 거고. 윤이 도령이 나와 걸을 때마다 좋은 친구 사귀라는 말을 듣는 게 정말 부끄럽고 미안했거든.”
“…….”
“내가 있는 그대로 이 세상 어디에 서 있어도 부끄럽지 않은 세상. 목숨 걸고 발버둥 치지 않아도 사람대접은 받고 살 수 있는 세상이 되면… 마음 놓고 윤이 도령과 나란히 설 수 있을 것 같았어. 남윤의 눈동자 속에서만 귀한 사람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당연히 귀한 사람이 될 것 같았는데.”
형진의 손끝이 길고 가지런한 혁윤의 속눈썹을 쓸었다. 얼마든 만지고 주무르라는 듯 고스란히 얼굴을 내어 주면서도 그는 결코 눈을 뜨지는 않았다.
“궁금하다. 지금 남혁윤의 눈에 비친 나는 어떨까. 여전히 세상 무엇보다 귀할까.”
혁윤이 천천히 눈을 떴다. 형진은 그의 눈동자 속에 담긴 자신과, 기억 속 모습보다 더 귀하게 자신을 대하는 남자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제야 고백하네. 사랑한다고.”
혁윤이 눈을 내리깔고 웃었다. 형진이 사랑하는 그의 순간들 중 하나였다. 이렇게 속눈썹 그늘을 길게 드리우고 아랫입술을 살짝 물고 웃는 남자. 웃는 것이 익숙지 않아 미소 짓는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 귓바퀴가 발그레 달아오르던 사람.
“나는 항상 처음 그 순간부터 사랑했어. 기억이 있든 없든 항상.”
벅차게 행복한 얼굴로 크게 숨을 들이켠 혁윤이 잔뜩 몸을 수그려 형진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형진은 한껏 작은 척을 하는 남자의 머리를 헝클며 자신의 욕심을 그대로 내보였다.
“남윤이든 남영윤이든 남설윤이든 남동윤이든 남혁윤이든 다 내 윤이 도령이지. 안 놔줄 거야.”
끄덕끄덕.
혁윤은 한 손은 여전히 축음기 위에 올려 둔 채로 형진의 목덜미에 기대어 고개만 끄덕였다. 형진도 그의 박자에 맞추어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음을 이야기했다.
“이제 다음 생에서는 남형윤이겠네.”
“아뇨. 앞으로는 계속 남혁윤으로 살 겁니다.”
“…왜?”
혁윤은 형진의 어깨에 비스듬히 기댄 채 눈만 돌려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제 이름을 들을 때마다 홍혁주 씨가 했던 말이 생각날 테니까.”
“…….”
“제가 누구 말만은 꽤 잘 듣는단 걸 아시니까 불안해하실 테고.”
혁윤이 어깨를 으쓱였다.
“누가 압니까. 다음에 만났을 땐 재수 없는 서양 용처럼 성도 이름도 상관없다는 듯이 영 다른 이름으로 살고 있을지.”
“우리 방금 전까지 침대만 있으면 곧장 뭔가 가능할 것 같은 분위기 아니었어……?”
“마음만 있으면 침대가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묘한 말을 흘린 그는 형진의 어깨에 걸쳐져 있다가 어느 틈엔가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재킷을 주워 들면서 그녀로부터 완전히 몸을 떼어 냈다.
“먼저 나가 계시죠. 저도 이 축음기와 증거물 정리해서 얼른 나가겠습니다.”
“…나가라고? 내가 방금 한 고백 제대로 들은 거 맞아?”
“예. 나가세요. 고백은 확실히 들었고요.”
형진은 몇 분 전까지의 달콤함이 꿈이었나 싶어 자신의 입술을 더듬었다. 살짝 부풀고 열이 올라 있는 상태를 보면 꿈은 아니었다. 자신의 손끝이 입술을 쓸 때마다 따라오는 혁윤의 열 오른 시선을 보면 혁윤 또한 아쉬워하는 게 분명한데… 빨리 나가라 재촉하는 목소리와 표정의 온도가 너무나 달랐다.
형진이 설명을 요구하는 표정으로 허리에 손을 얹고 버티자 혁윤은 한숨을 지으며 축음기를 가리켰다.
“함정에 걸렸단 걸 이제 알았습니다.”
“함정은 또 뭐야.”
“이 가게의 주소, 열쇠, 비밀번호 전부 나찬우 경감이 준 거죠. 그 사람 세팅입니다.”
형진이 눈썹을 구기며 미간에 깊은 주름을 잡았다.
“이 축음기에 걸린 저주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잠깐 힘으로 눌러두면 되겠거니 생각했다가 손을 못 떼고 있을 정도예요.”
“아니… 진작 말을 하지! 왜 그러고 있나 했잖아.”
“분위기를 타서.”
“…….”
“아무튼, 한 책임님이 이 건과 관련하여 우선순위를 미루셨다는 게 밝혀지면 최소 시말서입니다. 그간의 피해 수준이 심각하다면 커리어에 지장을 줄 수 있는 징계까지 감수해야 하고.”
그녀는 혁윤이 무엇을 하려는지 깨달았다.
“나 경감 그 사람 재밌다. 사과하고 화해하고 데이트 기분 내라고 예쁘게 꾸며 놓고 내 약점까지 잡은 거네? 날 커버 치려고 남 팀장이 여길 은폐하면 남 팀장 약점도 쥐는 거고?”
“그렇게 되겠죠. 기분 내는 건 여기까지 하고 이젠 뒤처리 타임인 것 같으니 나가 계시―”
형진은 코웃음을 치면서 테이블 위에 놓인 용의 비늘을 집어 들고 혁윤의 손 바로 옆에 깊숙이 박아 넣었다. 혁윤의 손에서 어깨까지 타고 올라 지독하게 파고들던 저주가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형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때. 재수 없는 서양 용보다 센 저주야?”
“…아닌 것 같네요.”
“내가 사이즈만 좀 작아졌다 뿐이지, 윤이 도령 호위 출신이란 거 잊지 마.”
형진은 다시 상자의 옆면을 쓰다듬어 사운드박스를 원래의 형태로 되돌렸다. 혁윤은 형진이 테이블 위에 늘어놓은 보물들을 챙기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 경감은 저희가 함정에 빠져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 그쪽에서 방심하고 있을 때에 쳐야겠습니다. 축음기에서 나온 이것들을 증거 삼아 저승에 이영의 환생부를 요청해야 하는데… 계약했던 대로 당장 환생 일시를 내놓으라고 하면 지장이 아마 이 트집, 저 트집 잡으면서 도망가려고 하겠죠. 그러지 못하게 백업을 준비해―”
“잠깐. 설마 지금 곧장 일하러 갈 건 아니지?”
그의 말을 끊은 형진이 온 얼굴을 찌푸리는데도 혁윤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여상히 고개를 주억였다.
“통곡하는 도깨비 구경도 하고. 겸사겸사.”
“우리… 몇십 년 만에 만나서 서로 화해한 건데 날 놓고 도깨비 구경하러 가?”
“노을 지는 완벽한 풍경 속에 날 놓고 윤전기 돌리러 가신 분이… 누구시더라.”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혁윤은 혹시 CCTV가 있지는 않은지 확인한 뒤에 축음기와 ‘보물’들을 빠짐없이 챙겨 들고 가게를 나섰다. 설마 하던 형진은 기가 막힌 얼굴로 그를 따라 나왔다.
“몇십 년 만에 만나서 진짜 이렇게 일하러 간다고?”
“속 타는 제 기분을 느껴 보시라는 의미에서.”
가게를 나선 혁윤은 봄꽃 향기에 이끌려 바람이 불어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명이 모두 꺼진 밤하늘에 나뭇가지 가득 만개한 목련나무의 흰 꽃이 가득했다.
“이… 야, 남혁윤! 어우, 티끌 한 점 없던 우리 윤이 도령이 진짜 나이 먹으면서 나쁜 것만 배워 가지고!”
등 뒤에서 들리는 자신의 이름에 혁윤은 소년처럼 웃으며 형진을 돌아보았다. 새하얀 꽃이 별빛을 잃은 도시의 밤을 대신 밝히는 이른 봄. 평생을 그리워하던 사람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싱그럽게 살아 숨 쉬는 봄. 영영 오지 않을 것만 같던 그림같은 좋은 날이 그에게 성큼 다가와 턱을 치켜들고 있었다.
“사람 속 뒤집고 예쁘게 웃는 걸로 때우려고 하지 마.”
혁윤은 이번에도 대답 없이 웃었다. 고르고 골라 좋은 날에 오겠다더니. 정말 자기가 지키고 싶은 약속만큼은 착실히 지키는 사람이었다.
“저 얼굴이 저렇게 웃으니 가지 말고 나랑 놀자고 잡을 수가 없잖아, 망할.”
형진이 혁윤의 얼굴에는 이길 수가 없다고 연신 투덜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짐을 가득 안은 혁윤의 왼쪽 손등에 자신의 집 주소를 휘갈겨 적었다.
“최대한 빨리 끝내고 와. 이번엔 내가 기다릴 테니까.”
온갖 것들을 오른손으로 옮겨 잡은 혁윤이 한쪽 눈썹을 쭉 끌어 올리면서 왼쪽 손등을 쳐다보았다.
“왜? 가겠대서 가라고, 기다리라고 했는데 표정이 왜 그렇게 불만스러워?”
“기대했던 반응이 아니라서요.”
“뭔 반응을 기대했는데?”
“같이 가자는 말이요.”
눈꼬리에 울음기가 남은 형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혁윤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의 글씨가 담긴 왼손을 내밀었다.
“같이 가요. 기다리지도, 기다리게 하지도 말고. 같이.”
어떻게 이렇게 원하는 것만 내어 줄까.
까마득히 오래전에 윤이 도령을 보며 했던 생각을 반복하며 형진이 중얼거렸다.
“…이 늦은 시간에 남의 신랑 울리러 가자는데 싫다고 할 수가 없네.”
형진은 투덜거리면서도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둘의 손가락이 서로의 틈새를 메꾸며 단단히 엉켰다.
“그래. 같이 가자.”
형진이 그의 말을 그대로 반복하며 혁윤을 올려다보았다. 등 뒤로 만개한 봄을 가득 업은 남자가 볼우물에 달빛을 고이며 밝게 웃었다.
손에서 손으로 이어진 두 사람이 같은 보폭으로 걸음을 옮겼다.
봄의 시작에서, 함께 아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