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몸종 아이에게 고향으로, 조선으로 가라고 백 번쯤 당부했어. 챙길 수 있는 건 다 챙겨서 가라고. 그리고 추레하게 분장한 나는 아키코 씨의 심부름을 왔다는 쪽지를 들고 경무국으로 갔지. 상자를 안고 당당히 경무국장실까지 들어가 기폭 장치를 눌렀어.”
나팔꽃처럼 넓게 벌어진 나팔의 곡선을 쓰다듬는 가느다란 손이 잘게 떨렸다.
“리에이에게 내 행세를 하며 조선으로 돌아가라고 상자 가득 패물을 넣어 줬는데… 이게 일본에서 올해 수입한 앤티크라고 하는 걸 보면 조선으로 안 가고 버틴 모양이야. 미련한 사람.”
“패물은 챙겨 가고 축음기는 무거워서 두고 갔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형진이 고개를 저었다.
“리에이는 폭탄 만드는 재주, 바느질하는 재주는 정말 좋았는데 머리 땋는 재주와 상자 여는 재주는 완전히 엉망이었거든.”
“여는 방법이 따로 있습니까?”
“응. 이 축음기 사운드박스는 퍼즐식 잠금 상자야. 각 면이 하나의 판자가 아니라 여러 개의 나뭇조각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표면들이 아주 미세하게 높낮이가 달라. 높이와 무늬를 잘 맞추면―”
형진이 자신의 말에 맞추어 섬세하게 손을 움직였다. 무언가를 맞춘다기보다는 쓰다듬는다는 게 더 알맞을 듯한 손길이었다. 그녀가 상자의 네 면을 모두 보듬은 순간, 사운드박스의 후면이 탁, 소리를 내며 열렸다.
짜잔―
마술사가 자신의 마술을 자랑하는 동작처럼 양팔을 들어 올린 그녀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축음기를 내려다보았다.
“이건 아키코와 리에이의 보물 상자였단 말이야. 그 사람이 이걸 두고 갔을 리가 없어.”
상자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던 형진이 화려하게 수놓인 붉은 비단 봉투 같은 것을 꺼냈다. 혁윤의 입에서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이름이 튀어나왔다.
“이영…….”
혁윤이 직접 서산 대신에게서 받아 왔던 납채문. 그가 납채문을 감싸기 위해 직접 준비한 붉은 보자기였다.
“이영이 그 몸종이었습니까?”
“맞아. 죽음보다 더 비참한 일을 견디고 또 견뎌 살아남았던 이영.”
그녀는 납채문을 꼭 끌어안았다가 혁윤에게 건네고 상자 안에 들어 있던 것들을 차례차례 꺼냈다.
울고 또 우느라 눈물이 번져 글씨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된 편지 한 장. 금색 회중시계. 피에 젖은 붕대. 오팔색으로 빛나는 용의 비늘 하나. 김동으로 태어나 아키코로 살다가 죽은 사람의 보물이었다.
“총감부 폭파일은 1944년 9월 30일 오전. 이영이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면 아마 나와 같은 날에 죽었을 거야.”
김동의 보물 옆에 이영의 보물이 자리 잡았다. 얼룩덜룩한 댕기 하나. 말라서 가장자리가 누렇게 된 분홍 풀꽃 압화. 보내지 못한 편지 한 통.
“이영은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인 척하던 애였는데… 내가 왜놈들 죽인답시고 불량 폭탄만 수십 개 만드는 걸 보더니 한숨 한 번 폭 쉬고 알려 주더라. 아버지한테 배웠다면서. 결국 내가 이영을 죽인 걸지도 몰라.”
축음기를 사이에 두고 김동과 이영의 보물이 가지런히 늘어섰다. 혁윤은 형진에게서 건네받은 납채문을 얼룩진 댕기 옆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이영을 먼저 돌려보내야 했어. 그 애가 무슨 일을 겪고 어떻게 살아남은 앤데. 꽃가마 태워 보내듯 조선으로 가는 배에 실어 보냈어야 했는데, 내가…….”
중후한 진갈색 테이블의 빈 공간에 그녀가 말없이 쏟아내는 자책이 가득 쌓였다.
“남 팀장, 혹시 살면서 독립투사 아키코라는 이름 들어 본 적 있어? 리에이는? 언론사에 사진 몇 장 실어 달라고 소포 보내다 잡혀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은 홍혁주는?”
“…….”
“참 부질없다 싶어. 난 뭘 했을까. 매번 당신을 두고 갈 정도로 더없이 열심이었는데 지난 삶에서 내가 뭘 했는지, 내가 한 일과 내 이름은 어디에도 없고… 남은 건 나 때문에 죽은 이영이란 이름 정도인가.”
그녀가 뿜어내는 짙은 자책이 축음기의 나팔을 웅웅 울렸다.
“나는 아까 나 경감님이 말해 주기 전까진 내가 신부님께 건넨 자료들이 세상 빛을 본 줄도 몰랐어. 당신한테 상처만 주고 쓸모없이 죽었다고만 생각했지.”
고개를 숙인 채 이영과 김동이 남긴 물건들을 바라보고 있던 형진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깊이 심호흡을 하며 잘게 떨리는 흐느낌을 깊이 밀어 넣고 한참이나 입술을 달싹였다. 혁윤은 재촉하지 않고 묵묵히 그녀의 곁을 지켰다.
형진은 창문 밖에 그 어떤 불빛도 보이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쥐어짜는 듯이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이딴 세상 따위 어떻게 돌아가든 무시하면 그만이었을걸. 괜히 대들보를 부수겠다나 하면서 혼자 달려 나가 버려서 미안해.”
혁윤은 괜찮다, 괘념치 말라는 대답 대신 형진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참고 또 참아서 커다란 눈에만 가득 고여 있던 형진의 눈물이 혁윤의 손수건 위로 뜨겁게 쏟아졌다.
“남혁윤과 한형진의 이야기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났으면 좋겠는데 나는 그렇게 죽고 또 죽기만 했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아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될지 모르겠어. 그게 미안해.”
이제껏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수고가 뒤늦게 해일보다 더 큰 후회로 돌아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서럽고 억울하지 않은 세상이고 뭐고… 다 내 탓이고 내 잘못인 것 같아. 천림시로 가고 싶었던 이유가 이건가 봐. 사과를 하려고.”
무슨 보람으로 그렇게 죽고 또 죽었느냐 누가 물으면 아무것도 대답할 수가 없었다. 꽤나 남부끄럽지 않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헛되고 허무한 생이라는 회한만 갑자기 몰아쳤다.
“나는 대들보를 부순다는 게 한 번에 이루어질 거라는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어. 결코 쉽지 않으리라 각오는 했지만… 이제 겨우 댓돌에서 신발 벗고 있는 정도라는 걸 생각하면 기운이 쭉 빠져. 과연 이 짓에 끝이 있기는 할까. 당신을 기다리게 할 가치가 있는 일일까.”
혁윤은 비탄에 빠진 자신의 신과 폭발음이 들린다는 고장 난 축음기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이 존재하지 않고 빙빙 돌아가는 레코드판의 환영을 보았다.
―속죄하지 않는 이에게 저주 있으라.
지금 형진이 답지 않게 자책하는 이유가 이것이었다. 속죄하지 않으면 저주하겠다는 협박.
그는 짧게 한숨지으며 레코드판 위에 손을 얹었다. 제령 같은 재주는 없었지만 삼백 년쯤 살다 보니 어지간한 저주 정도는 그의 선에서 힘으로 누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 무형의 레코드판은 어지간한 저주 정도가 아닌지, 닿아 있는 혁윤의 손끝이 따끔따끔 저려 왔다.
그런 통증 정도는 참은 보람이 있게 갑작스러운 감정의 폭풍에 휘말려 흐느끼던 형진의 목소리가 점차 안정을 찾아 갔다.
“싸움도 하고, 타협도 하고, 그러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게 맞는 건지, 내가 뭘 한 건지 모르겠어. 후회를 하고 또 하고 또 거슬러 올라가니까 끝도 없는 거 있지. 결국은 그 후회가 물레방앗간 처녀 귀신까지 가더라.”
형진의 훌쩍임이 잦아들기를 기다린 혁윤이 한 손은 축음기 위에 얹은 채 다른 손으로 그들이 걸어온 길 쪽을 가리켰다.
“아까 우리가 앉아 있던 그 작은 공원의 이름은 창천 단 공원입니다. 창천 물레방앗간 단이 있는 곳이라서 그렇게 지었습니다.”
“신당을 지어 준다고 약속하더니 거하게 지어 줬네.”
울음으로 먹먹하게 가라앉은 그녀의 목소리에 혁윤이 잘게 웃었다.
“창천 물레방앗간 처녀 귀신은 지박령이 되어서도 내게 당신이 끌려갔다 알려 주고, 문 소장님께 도움을 구했어요. 문 소장님께 염라를 바꾸어 달라고 했대요. 그래야 우리 저주가 풀린다고.”
손수건에 폭 파묻혀 있던 형진의 눈이 혁윤을 바라보았다. 혁윤은 울어서 퉁퉁 부은 눈을 따뜻하게 바라보며 그녀가 모르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영… 영이의 아버지는 이웅헌이라는 사람입니다. 동학군이었다가 독립운동으로 흘러간 케이스였죠. 누이와 함께 동학군 전투 맨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다가 설우 접장을 보았다며 자랑할 때 내가 속으로 얼마나 놀랐던지.”
깜빡이는 것도 잊고 혁윤을 응시하던 형진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사실 영이는 이웅헌의 친누이가 남긴 딸이랍니다. 설우 접장처럼 앞서서 문을 열겠다며 먼저 떠났대요. 영이만 남기고.”
그는 형진이 또다시 ‘그 여자도 나 때문에 죽었다’ 같은 소리를 할까 봐 서둘러 다음 말을 이었다.
“기억이 다 돌아오셨는지 모르겠지만, 설우 접장은 운치록 장군의 딸이었죠. 운치록은 향화각 기녀의 동생이었던 운효식의 손자입니다.”
“운효식……. 왜… 들어 본 이름인 것 같지……?”
“최영목 대행수가 남가 상단 겸인으로 거두었던 운가. 그 사람 이름이 운효식입니다.”
붉게 충혈된 눈이 혁윤과 자신의 보물들과 축음기를 거쳐 천장을 가득 메운 샹들리에를 향했다. 혁윤은 사랑하는 사람의 눈동자를 가득 채운 투명한 반짝임에 새삼스럽게 감탄하면서 그녀를 위로했다.
“내가 사랑한 사람은 단 한 번도 헛된 생이었던 적 없습니다. 성벽 밖에서 성문 안으로, 문안에서 대청마루로 차근차근 전진하고 있는 걸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아요.”
“말만이라도 고맙네.”
“나는 나와 내 정인이 한 모든 일이 언젠가 다시, 다른 형태로 되돌아옴을 압니다. 직접 보고 겪어 알고 있습니다. 내 정인은 다시 내게 되돌아오시리라는 것도 알죠. 이게 내 신앙이에요.”
샹들리에만 한없이 우러러보고 있던 형진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다 싶어 혁윤이 형진에게 그녀의 상태를 전했다.
“그리고… 지금 축음기에 홀리셨습니다.”
“내가 홀렸다고? 나 멀쩡한데?”
“속죄하지 않는 이에게 저주 있으라.”
혁윤은 다른 긴 설명 대신 축음기가 토해 내는 저주를 그대로 읊었다. 그러자 형진의 부은 눈이 오늘 본 것 중에서 가장 동그랗게 커졌다.
“…그거! 내가… 아키코가 저주할 때에 쓰던 말인데 어떻게 남 팀장이……!”
“존재하지 않는 레코드판에서 그 소리만 계속 울려요. 거기 홀리셨어요.”
“…망할.”
“덕분에 사과는 잘 받았습니다.”
형진은 또다시 찬우의 말을 복기했다. 안부를 묻듯이 사과했느냐, 화해했느냐 넌지시 떠보던 그의 말들 하나하나가 다 이 사태의 예고편이었다. 얼굴로 왈칵 몰리는 열을 감당하지 못해 그녀는 혁윤의 손수건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서러우십니까?”
“아니. 짜증 나.”
눈만 들어 올려 대꾸하자 혁윤이 싱긋 웃었다.
“내가 짜증 난다는데 웃어?”
혁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형진의 손에서 자신의 손수건을 스윽 뽑아냈다. 던졌는지 주머니에 밀어 넣었는지 모르게 손수건을 치워 버린 혁윤은 형진의 얼굴을 감싸고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뺨을 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