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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 부르실 날에-154화 (154/157)

154화

“문 소장님이 그러셨습니다. 당신 제자께서 다른 건 몰라도 싸우는 일은 참 잘한다고. 그이가 고르는 게 제일 알맞은 전술이라고.”

“…….”

“문은 부쉈고, 마당도 지났고… 대청마루로 오르려면 남은 건 정치죠. 총 쏘고 화염병 던지는 시대는 지나갔으니까요.”

찬우는 아무 말 없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에 걸고 소파에 앉았다. 혁윤은 찬우의 맞은편에 놓인 의자를 빼어 어리둥절해하는 형진이 자리 잡기를 기다리면서 말을 이어 갔다.

“평가원은 좋은 선택입니다. 시간 많고 일 없는 신들이 모여 수다 떠는 사랑방 역할을 맡고 있는 데다가, 애매한 사안이 닥쳤을 때에 어느 기관에서 다룰 일인지를 판단하는 역할도 하죠. 인간과 신과 저승의 묘한 문젯거리들을 다 접할 수 있습니다.”

조곤조곤한 설명과 함께 혁윤은 원래 제 몫이라는 듯이 형진의 얇은 봄 코트와 가방을 받아 들어 정리했다. 그런 혁윤을 감탄스러워하는 눈으로 쳐다보면서 찬우가 슬며시 덧붙였다.

“다양한 정보를 접할 수 있다는 건 다양한 약점들을 쥘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나 경감님께 바로 이런 걸 배우셨으면 좋겠다 싶어 마련한 자리입니다.”

혁윤이 찬우를 가리키자 찬우가 씩 웃으면서 고개를 까딱였다. 혁윤은 보일 듯 말 듯한 묵례로 그에게 답하면서 형진의 앞에 메뉴판을 펼쳤다.

“그럼 두 분 말씀 나누시죠. 혹시라도 자금 지원이나 공식적인 후원회가 필요해지시면 서우 재단에 제 이름 대면서 요청하시면 됩니다.”

미련 없이 돌아서는 그의 모습에 당황한 형진이 혁윤의 재킷 자락을 잡았다.

“나한테 소개만 시켜 주고 그냥 가?”

“급히 처리할 것들이 생겨서 잠시 일 보고 있겠습니다. 천천히 말씀 나누세요.”

카페 문을 밀고 나가기 무섭게 혁윤은 누군가와 통화를 시작했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찬우가 작게 웃었다.

“남 팀장이 연수산에서 제일 바쁜 사람이에요.”

형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신의 기억하는 연수산의 사람들을 떠올려 보았다. 서산 대신부터 시작해 민재와 서양 용까지.

‘천 년, 만 년씩 살아서 느긋하고 느슨한 사람들 중에 혼자 예민하고 바지런하니 일이 많을 수밖에.’

하여튼, 저나 남혁윤이나. 사서 일하는 팔자들은 정해져 있었다.

형진은 창문 너머, 가로등 아래에서 심각한 얼굴로 전화기를 붙잡고 선 남자를 쳐다보았다. 형진의 시선을 느끼자마자 혁윤이 슬며시 웃으며 손을 들어 보였다.

“와. 남 팀장이 웃을 줄도 아는 사람이었네요?”

마주 앉은 찬우가 잘게 소리 내어 웃으며 혁윤을 쳐다보았다가 형진 쪽으로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꼭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한 책임님이 제가 염라 자리에 오를 수 있는 데에 지대한 도움을 주신 분이라.”

“…제가요?”

“홍혁주 씨로 사실 때… 발포, 고문, 납치 현장들이 찍힌 사진과 기사를 작성하셨죠.”

“아. 소포를 수백 통 보냈는데 하나도 안 실어 줬던 그거요?”

“신문사든 방송국이든, 기삿거리를 보내 봤자 막힐 걸 알고 계셨잖습니까. 그래서 저기― 창천 성당 고해소에서 주임 신부님께 진짜 알리고 싶은 내용들을 전하셨고요.”

찬우의 검지가 좁은 골목길 끝, 넓은 공터와 공원이 시작되는 곳에 위치한 작은 성당을 가리켰다.

“신부님들이 그 자료들을 쥐고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덕분에 의문사한 수많은 사람들과 실종자들과 무연고 사망자들이 제대로 된 사인과 이름을 찾았습니다.”

“다행이네요. 여태까지 저는 제가 개죽음한 줄 알았는데.”

“정말 큰일을 해 주셨습니다. 그 자료들 덕에 이승은 이승대로 난리가 나고, 저승 또한 이승에 몰래 뿌리내리려던 게 밝혀져서 발칵 뒤집혔어요. 납치, 고문, 사인 조작, 수명 조작 등과 같이 온갖 더러운 짓을 벌인 당대 염라 라인이 하나씩 차례차례 뽑혀 나가고 몇십 년간 물갈이가 거듭된 끝에―”

찬우가 팔을 벌리고 어깨를 으쓱였다.

“저같이 가진 것 없고 빽 없는 놈이 그럴싸한 자리로 끼어들 수 있었죠. 요란하게 개혁한 티 내고 싶을 땐 바닥에서 기어 올라온 놈이 광고판으로 아주 좋지 않습니까?”

리넨 앞치마를 걸친 종업원이 주문한 커피를 들고 왔다. 하던 말을 멈춘 찬우는 턱을 괴고 창밖을 쳐다보았다. 혁윤은 벌써 세 통째 전화를 받으며 피로한 얼굴로 미간을 문지르는 중이었다. 종업원이 찻잔만 내려놓고 멀찍이 떨어지자 찬우가 슬쩍 창밖을 가리켰다.

“남 팀장과 화해했습니까?”

“했나… 잘 모르겠어요.”

“사과는 하셨습니까?”

“했는데 받아 줬는지도 확신을 못 하겠네요.”

저 밖에서 통화 중인 혁윤에게 고정되어 있던 찬우의 시선이 형진에게 향했다.

“홍혁주가 죽고, 남동윤이 남혁윤이 되어서 한형진을 만나는 시간만큼, 딱 그만큼 저도 문세경 씨를 기다렸습니다.”

“그래요? 나 경감님도 환생하셨어요?”

“아뇨. 밟아 가며 키워 줄 것처럼 말해 놓고는 하룻밤 맛보더니 30년을 방치하더라고.”

형진은 순간 홀짝이던 커피를 뿜을 뻔했다. 찬우가 키득거리면서 냅킨을 그녀 쪽으로 밀어 주었다.

“기다리는 거, 쉽지 않아요. 갑을로 따지면 기다리게 하는 쪽이 갑이고 기다리는 쪽이 을일 수밖에 없어서 더 쉽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건 하는 거고, 섭섭한 건 섭섭한 거거든.”

“…….”

“남 팀장이 지금보다도 더 마음이 굳으면 한 책임이 수습하기 꽤 힘들어지실 것 같아서 하는 말이에요.”

굳은살이 박인 긴 손가락이 창문을 톡톡 건드렸다.

“딱 저 생긴 것처럼 칼같이 선 긋고 사는 사람이던데… 내 눈엔 지금 한 책임이 아슬아슬하게 선 밖으로 밀려나게 생긴 것 같단 말이지. 대체 뭐라고 그랬던 겁니까?”

“질리고, 부담스러우니 그만 기다리라 했어요. 날 기다리는 게 관성이나 습관일 수 있다고도.”

“못됐네. 나 같으면 오만 정 다 떨어져서 때려치웠다.”

“그쵸. 어떻게 주워 담기도 어렵고…….”

누군가 형진에게 그의 기다림이 정말 질리고 부담스러웠느냐 묻는다면 맹세코 아니라 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 그때는 왜 그런 말을 했느냐 묻는다면 답할 수가 없었다.

네 잘못이라 쿡 찔러 형진을 심란하게 만든 찬우가 턱을 괴고 묘한 소리를 했다.

“여름과 겨울은 견디는 것, 봄과 가을은 기다리는 겁니다. 견디면 어떻게든 기다리던 계절이 옵니다. 남 팀장은 그걸 알아요.”

“그렇게 만난 계절이… 너무 짧네요. 미안하게.”

“남 팀장은 그렇게 생각 안 할걸요?”

“그럼요?”

“유난히 가혹한 겨울이었구나. 오래 기다리다 만났으니 더 반갑다. 이런 생각이나 하겠지.”

가만히 귀를 기울이던 형진이 눈썹을 찌푸렸다.

“방금 제가 저 사람의 선 밖으로 밀려나게 생겼다고 겁주지 않으셨어요?”

“겁이 아니라 머지않은 미래죠. 사계절이 있는 가혹한 나라에서 묵묵히 견디는 걸 당연하다 생각하던 사람더러 봄가을만 있는 전혀 다른 나라로 가라 등 떠밀었잖아요. 한 책임이.”

“그건…….”

“듣자 하니 한 책임이 남 팀장의 신이라던데. 신이 하나뿐인 신자에게 의심을 품으라 신탁했으니, 신자는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신의 목소리를 따르겠죠.”

비스듬히 턱을 괸 찬우가 카페에 흐르는 음악보다도 더 잔잔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신앙은 맹목이에요. 형체도 무엇도 없는 것을 당연히 존재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 그래서 신은 저를 믿고 의지하며 제사 지내 주는 사람을 잃으면 신력을 잃고, 그 누구도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때에 소멸됩니다.”

앞에 놓인 커피가 식어 가는 것을 쳐다보며 형진은 오래전, 윤이 도령의 고백을 떠올렸다. 나의 울타리, 나의 신. 아득한 과거의 꽃향기와 눈앞의 커피 향기가 겹쳐지며 미약한 두통이 일었다.

“남혁윤은 기약 없는 당신을 당연히 다시 돌아오는 계절처럼 믿던 사람이죠. 그 맹목을 두고 관성이냐 습관이냐 초를 쳐 놓고 느긋해 보이길래 답답해서 끼어들어 봤어요. 팔짱 끼고 밤길 걸었다고 마음 놓아선 안 된단 말입니다.”

위로인지 도발인지 모를 찬우의 말이 관자놀이를 문지르는 형진의 두통을 더 키웠다. 그러나 자신의 기억과 저가 뱉은 말과 찬우의 목소리를 나란히 늘어놓자 형진의 불안은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혁윤은 그녀가 자신의 모든 것이자 첫 번째라고 말했다. 이번에도, 여전히.

“저는 그 사람의 신이에요.”

찬우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한 형진은 이내 뒤돌아서 있는 혁윤의 실루엣을 창문 위로 따라 그렸다. 지금 그녀의 최선은 받아 줄 때까지 사과하고 다시는 그딴 소리를 하지 않는 것. 그것뿐이었다.

“그래요. 그 확신이 보고 싶었습니다.”

기분 좋은 듯이 고개를 주억인 찬우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의 주머니 속에서 가벼운 무언가가 찰각이는 소리가 났다.

“나는 한 책임이 남 팀장을 잘 어르고 달랬으면 합니다. 지금 보여 준 확신 정도면 되겠어요. 남 팀장이 제멋에 사는 사람을 은근 좋아하더라고.”

“순수한 조언이 아니라 약간 저의가 느껴지는 건 제 착각일까요?”

“눈치가 좋으시네요.”

형진의 눈이 찬우의 주머니를 향하자 그는 씩 웃으면서 찰각이는 것을 손에 쥐고 그 주먹을 테이블 위로 올렸다.

“내 배우자 되시는 분의 첫 번째가 항상 최영목이거든요. 대들보니 뭐니 자기가 괜한 족쇄를 걸었다고. 그래서 그 사람은 당신에게 미안해하고 남 팀장에게 집착해요. 난 그게 싫습니다.”

“…….”

“당신은 남 팀장에게, 남 팀장은 당신에게 떠넘겨서 내 배우자 되시는 분의 첫 번째를 내가 온전히 차지하고 싶어요. 그래서 남 팀장에게 당신 정보를 넘겼고, 당신을 돕는 겁니다.”

찬우가 가볍게 쥐고 있던 주먹을 펼쳤다. 그의 손안에는 흔한 은색 열쇠가 놓여 있었다.

“이해했습니까? 엄마, 아빠도 오롯한 부부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키울 만큼 키워 줬으니 이제 애들은 애들끼리 놀라고.”

형진이 그 열쇠를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찬우가 눈썹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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