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말아 쥔 자신의 주먹만 내려다보고 있던 형진이 휙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틀어 혁윤을 쳐다보았다. 그는 변함없이 고집스럽게 앞만 쳐다보면서 무심한 듯이 말했다.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태어났을까. 너무 힘든 삶을 사는 건 아닐까. 또 크게 다친 건 아닐까. 내가 알아채지 못할 만큼 자잘하게 다쳐서 혼자 아픈 건 아닐까.”
무심을 가장한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으며 쇳소리가 묻어났다. 서운함에 못 이겨 울음을 참는 저 목소리. 순간순간 서럽고 외로워하는 눈. 혁윤은 지금 형진의 심장을 비틀어 대는 서운함과 섭섭함을 평생 안고 산 것이었다.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 그만하라고, 질리고 부담스럽다고 말한 거야. 내가. 내 마음 편하게 떠나겠다고.’
형진이 고개를 푹 숙였다. 서러운 한숨이 섞인 혁윤의 음성이 지난 세월의 미안함으로 얼굴을 들지 못하는 그녀의 머리 위에 죄책감을 더했다.
“궁금하게 만들고 아무 대답도 안 드리면 내내 제 생각만 하시다가 다음에는 좀 더 빨리 만나러 와 주시겠죠.”
“이제 만났는데 벌써 내가 떠날 걸 생각하네.”
“미리 준비하는 쪽이 덜 아플 것 같아서 많이 연습했습니다. 습관일까, 관성일까, 정말 그리움일까 고민하면서.”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비탈진 도로를 사이에 두고 왼쪽에는 자그마한 성당이, 비스듬히 치우친 오른쪽에는 여인숙이 있던 곳이었다.
두 사람은 성당 근처의 공원 옆에 있는 공영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두 사람 모두에게 그리 아름답지 못한 기억만 남은 곳을 쳐다보았다. 여인숙이 있던 자리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이 검은 아스팔트로 덮인 차도가 되어 버렸다. 혁윤은 예전 모습 그대로 세월만 몸에 두른 채 서 있는 성당을, 형진은 차들이 달리는 도로를 쳐다보았다.
“섭섭해하고 있겠다, 주말에 만나러 가야겠다. 이 다짐을 네 번 반복하니 한 달이 지나고, 또 한 달이 지나고 그러더라. 같이 있을 때는 꿈같아서 시간이 빠르더니, 혼자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을 칠 때는 뭘 했는지도 모르게 시간이 지나갔어.”
흩어지고 뭉개졌던 기억이 밤이 깃드는 검은 도로 위로 빛바랜 그림을 덧그렸다. 온갖 대학교를 돌며 사진전을 준비하고, 어디든 실리길 바라며 두툼한 자료를 모으는 나날. 막막하고 캄캄한 하루에 겨우 숨 돌릴 빈틈이 생기면 그 틈에 두고 온 사람의 얼굴을 가득 채웠다.
지난날을 더듬던 형진이 눈을 꾹 감았다.
“난 진짜 변명의 여지가 없구나. 할 일을 하다가 남은 틈에 당신을 생각하면서 내가 제법 열심히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을 했네.”
그녀가 내쉰 한숨이 차창에 뽀얀 동그라미를 그렸다가 천천히 사라졌다.
“덕분에 확실히 알게 됐습니다. 남윤에게는 최영목이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이자 모든 첫 번째였는데, 최영목에게 남윤은 유일하지도 않고, 첫 번째도 아니라는 거.”
미안하다 할까. 그런 게 아니었다고 할까.
한참이나 고민하면서 적당한 말을 찾던 형진은 엉뚱한 말을 꺼냈다.
“남 팀장, 나 된장찌개 진짜 잘 끓여.”
“저는 철분 캡슐 먹고 삽니다.”
“내가 시청역 쪽에 원래 살던 집, 아직 정리 안 해서 세간살이 그대로 있는데 운전하기 피곤하면 자고 갈래?”
“시청역 옆에 있는 호텔이 제 겁니다. 다른 곳에도 몇 개 더 있고.”
“…안 넘어오네.”
그녀가 갑작스러운 소리를 하면 참 맥락 없는 사람이라고 살풋 눈꼬리를 찌푸리면서 어울려 주던 남자가 사라졌다. 기다리겠다는 남자를 굳이 쫓아 보낸 게 저라는 사실이 후회스럽고 원망스러웠다.
“날 여전히 좋아하기는 해?”
“그렇죠.”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던 혁윤이 주머니에 휴대폰을 집어넣으며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리고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형진은 성큼성큼 조수석 쪽으로 다가와 문을 연 그를 쳐다보면서 혼잣말처럼 말했다.
“대번에 좋아한다고 끄덕이는데 왜 불안하지?”
“다행입니다. 제가 제대로 하고 있는 모양이라.”
벨트를 풀어 주는 그를 바라보며 형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혁윤은 뭔 소리냐는 무언의 물음을 모르는 척 조수석 문을 잡고 반듯하게 서서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형진은 혁윤이 내민 손을 잡고 차에서 내리면서도, 한 발자국쯤 앞서 걸으면서도 뭔가 찜찜했다.
“나랑 뭐 하자는 거야.”
“생각하시는 그거요.”
“나는 이번에야말로 연애다운 연애 하자고 수작 걸려고 하는데?”
“그러실 것 같았습니다. 처음 보는 남자가 주는 커피 막 받아드시고, 기억도 안 돌아왔는데 제 휴대폰 번호 물어보고 싶어 하실 때부터 왠지.”
형진이 처음부터, 남혁윤 팀장과 한형진 책임으로 처음 만났을 때부터 훤히 들여다보고 있던 거냐고 다그치려는데 혁윤이 “왼쪽입니다.” 하고 성당 옆 골목을 가리켰다. 따져 물을 타이밍을 놓친 그녀는 속을 빤히 읽힌 게 조금 부끄러워졌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대충 파악하고 있지만 지난번에 한 말이 괘씸해서 거리 두는 중이라는 소린가.”
“비슷합니다.”
또다시 나타난 갈림길을 앞두고 형진이 뒤를 돌아보았다. 혁윤은 더 좁은 길을 가리켰다. 그가 안내하는 쪽으로 들어서니 최근 입소문을 타고 있는 카페 골목이 나타났다.
“방금 전에 우리 집에서 자고 가라고 수작 걸었더니… 커피 마시자, 밥 먹자, 술 먹자, 같이 자자 중에 커피 마시자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거지?”
혁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앞서 걷던 형진이 어깨 너머로 그를 돌아보며 투덜거렸다.
“아니. 누가 아냐고. 술 좀 들어가고 들떠서 기분 좋아지면 내가 게슴츠레 눈 뜨고 ‘윤이 도령’ 하고 불러 줄지. 모르는 척하고 넘어오지, 좀.”
순간 혁윤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의 입술이 느리고 확실하게 아름다운 호선을 그렸다. 왼쪽 볼에 깊이 팬 볼우물에 석양이 저문 뒤의 첫 어둠이 고였다.
형진은 내내 어둡게 가라앉아 있던 그의 얼굴이 구름 뒤에 달 드러나듯 환하게 밝아지는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왜 웃는지 정말 기준을 모르겠다.”
그녀로서는 갑작스레 사람을 녹일 듯 웃는 남자도, 그 남자를 보며 서운해하다가 설레기를 반복하는 자신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걸어가던 형진은 이내 천천히 입을 틀어막았다.
‘아……. 내가 어깨 너머로 돌아보면서 이름을 불러 주겠다고 약속했구나. 방금 내가 ‘윤이 도령’이라고 했구나.’
형진은 입을 틀어막은 채 뒤를 돌아보았다. 마치 이 순간만을 위해 살아온 사람처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미소 짓고 있는 혁윤이 팔꿈치를 내밀었다. 자석에 이끌리듯 그가 내민 팔에 제 손을 쑤욱 끼워 넣은 형진은 울 것 같은 기분으로 그에게 기댔다.
“봤지. 이렇게 내 기억이 완전하지가 않아. 이제까지도 일부러 안 불러 준 게 아니야.”
혁윤은 말없이 그런 셈 칩시다, 하는 얼굴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형진은 그와 팔짱을 엮고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며 걸었다.
‘윤이 도령. 내 윤이 도령.’
그들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카페 골목에 따뜻한 연노랑색 가로등이 켜졌다. 형진은 하나로 뭉쳐진 두 사람의 그림자가 가로등 불빛을 따라 늘어지는 모습을 쳐다보면서 연신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그녀가 아주 작게 윤이 도령, 윤이 도령 하고 혼잣말을 반복할수록 혁윤의 미소가 더 선명해졌다. 백 번쯤 그의 이름을 읊조리던 형진이 드디어 고개를 들어 혁윤을 바라보았다.
“내 재활 돕는 셈 치고… 예전처럼 같이 살면 안 돼?”
“대답은 다음에 뵐 때까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와……. 이렇게 다음 약속을 잡게 하네.”
혁윤이 어깨를 으쓱였다. 얄밉게 위로 솟았다 내려오는 그의 어깨에 감정 실린 형진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오래 살더니 어르신들에게 나쁜 것만 배웠어. 놀리면 휘둘리던 귀여운 맛이 싹 사라져 버리고.”
“삼백 살 정도면 한창 귀여울 나이 아닙니까?”
기가 찬 형진이 툭툭 때려 대던 주먹에서 힘을 풀었다.
“이제 제게 나이로도 못 이기게 되셨습니다.”
“…….”
“키도 제가 더 크고, 싸움도 제가 더 잘할걸요.”
혁윤이 먼지를 털어 내듯 그녀가 주먹질하던 부분을 손끝으로 스윽 쓸어내리며 눈꼬리를 접었다.
‘그러고 보니 옛날부터 윤이 도령은 드문드문 감당 안 되게 뻔뻔한 구석이 있기는 했지…….’
조각 모음을 하듯 하나둘, 되돌아오는 기억의 편린들을 더듬으며 형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과거의 그녀가 사랑했고 현재의 그녀도 사랑하게 되어 버린 맑은 갈색 눈동자가 형진의 얼굴을 가득 담고 초승달 모양으로 휘었다.
“흠흠.”
마주 보며 웃고 있는 그들의 앞에 커다란 남자가 나타났다. 형진은 깜짝 놀라 갑자기 등장한 남자를 쳐다보았다. 새카만 경찰 정복을 걸친 낯선 사람은 쓰고 있던 모자를 옆구리에 끼면서 혁윤과 형진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혁윤도 목을 꾸벅여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메시지 보내 주기에 얼른 달려왔죠. 두 분, 잘 어울리십니다.”
형진은 마주 선 두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혁윤도 절대 작지 않은 키였지만 이 남자는 거대하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크고 두툼했다.
‘예전에 스승님이 기력 보충한다며 잡아드시던 총각들이 이렇게 생겼었지.’
혁윤은 문득 떠오른 지난 기억에 아련한 눈을 하고 있는 형진에게 그를 소개했다.
“인사하세요. 이분이 염라십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정보 제공자.”
“아…….”
“안녕하세요. 나찬우 경감입니다. 정보 제공이라기보단 남 팀장님과 친교적인 대화를 나누던 중에 자연스럽게 진행된 스몰 토크라는 게 더 적절한 것 같습니다.”
형진은 그가 내민 큰 손을 맞잡아 악수하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혁윤이 자연스럽게 둘 사이로 끼어들어 맞잡은 손을 가르고 카페 문을 열었다.
“들어가시죠. 듣자 하니 곧 경정으로 승진하실 예정이시라기에 급히 만남을 주선했습니다.”
찬우는 부정하지 않고 씩 웃었다.
“두 분 다 큰물로 나가고 싶어 하는 분들이시니 서로 돕고 도움받을 일이 적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큰물? 내가?”
형진이 혁윤이 말한 ‘두 분’ 중 하나가 자신이라는 걸 조금 늦게 알아채고 되물었다. 혁윤은 찬우와 형진을 미리 예약해 두었던 자리로 안내하면서 목소리를 낮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