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조수석 문을 열고 팔을 내밀어 높은 차체로 올라타는 것을 도우며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부딪치지 않도록 막아 주는 일련의 동작이 물 흐르듯 이어졌다. 형진이 머릿속에 밀려드는 기억의 폭풍에 휘말려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는 동안 혁윤은 형진이 건넸던 차 키를 그녀의 주머니 안에 쏙 넣고 벨트를 그녀의 손에 쥐여 준 뒤 운전석으로 돌아갔다.
핸들을 쥔 그가 벨트를 채우는 형진을 도우며 물었다.
“어디로 가면 될까요?”
“창천 성당이요.”
혁윤은 가볍게 고개만 한 번 끄덕이고 시동을 걸었다.
몇 개의 터널을 지날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기분 좋은 온도로 따뜻해지는 시트에 몸을 푹 묻은 채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에만 눈을 두고 있던 형진이 창문에 이마를 대고 눈을 감았다.
“남 팀장님 이름 예쁜 것 같아요.”
“그렇습니까?”
“혁주라는 이름을 한 번도 좋아해 본 적이 없는데… 동윤이었던 사람이 혁윤이 된 걸 보니 썩 나쁜 이름은 아니었다 싶고요.”
“저도 이 이름이 마음에 듭니다.”
형진이 눈썹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갑자기 모든 기억이 쏟아져 들어온 자신만큼은 아니어도 조금은 놀랄 줄 알았는데. 혁윤의 목소리는 변함없이 건조하고 서늘했다.
“왜 이렇게 무덤덤해? 기억났다니까?”
혁윤은 운전에만 집중하면서 평범한 대화에 맞장구를 치듯 고개만 끄덕였다. 창문에 비친 혁윤의 평온을 보며 기막혀하던 형진이 그를 향해 몸을 틀었다.
“다 기억났다는데, 내가 드디어 돌아왔는데… 안 기쁜가?”
신호가 바뀌었다. 서서히 속도를 줄인 혁윤은 차가 완전히 멈춘 뒤, 신호등의 빨간색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지금은 좋은 세상입니까?”
형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묵묵히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던 혁윤은 신호가 바뀌고 뒤에서 경적이 울릴 때에서야 씁쓸하게 웃으며 앞으로 향했다.
“또 금세 떠나실 건가. 좋은 세상이라고 확신을 못 하시네.”
혁윤의 말을 곱씹고 또 곱씹던 형진은 차가 다음 신호에 멈춰 섰을 때에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저기, 내가 전에 한 말… 그것 때문에 많이 마음 상했나 본데.”
“상했습니다.”
“어……?”
“아무리 허물없는 사이라도 해야 할 말,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는데 명백히 후자셨죠.”
“…….”
깔끔하게 인정하고 깔끔하게 비난한 그는 형진이 앉은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고 곧게 앞만 보았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무슨 짓을 해도 혁윤만은 화내지 않고 받아 주리라는 믿음에 가득 차 있던 형진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세 번째 신호에 걸렸을 때 그녀는 서운해하는 목소리로 혁윤의 팔을 툭 치면서 투덜거렸다.
“남 팀장, 조선 시대 때 호패 못 가졌던 걸 다행으로 여겨. 과거 시험 봐서 조정으로 나아갔었다면 지금처럼 그렇게 바른말만 하다가 탐라국까지 유배 갔을 거야.”
“부정은 못 하겠습니다만, 또 뱉어 놓고 후회하실 말 하시네요.”
“…….”
“호패가 제 콤플렉스였던 것, 기억하시죠?”
“아니, 그게…….”
인상을 찌푸린 그녀가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자꾸 말실수하는 건 미안한데 나… 다 기억하면서 미적대다가 이제서야 찾아온 거 아냐. 지금 막 생각난 거야. 번개 맞은 것처럼. 기억이 이제 부분부분 돌아오고 있으니 적응 기간에는 기준을 좀 낮춰 주면 안 되나? 정인이 아니라 정인 인턴같이.”
하!
그녀가 빠르게 말을 쏟아 내자 혁윤이 바람 터지는 듯 짧은 웃음소리를 토했다.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웃음이 민망했는지 입술을 꽉 물었던 그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혼자 입을 틀어막고 피식피식 웃었다.
“왜 웃지……? 남 팀장은 옛날부터 왜 웃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순간에 웃더라.”
“그러려니 하세요.”
금세 웃음기를 털어 낸 그가 새침하게 대답하면서 속력을 높였다.
‘저러는 걸 보면 접선 흔들며 새초롬히 눈 내리깔던 윤이 도령이 맞는데.’
지금 운전석에는 밀면 밀려나고 당기면 끌려와 주던 그때의 도련님이 아니라 익숙한 듯 아닌 듯 사람 긴장하게 하는 남자만 남아 있었다. 이게 다 제 죄다 싶어서 형진은 우물우물 자신의 상태를 털어놓았다.
“아마 노을 질 때 남 팀장 눈에 내가 비치는 걸 보면 기억이 돌아오는 것 같아.”
“압니다. 그래서 모기약이니 소독약이니, 일부러 얘기 안 해도 될 일 핑계로 석양 녘까지 시간을 끌다가 나왔습니다.”
그녀는 기어를 쥐고 있는 핏대 선 손등과 그 손등에 남은 흉터의 흔적을 쳐다보느라 혁윤의 말을 조금 늦게 이해했다.
형진은 기다랗고 단단한 손에서 혁윤의 얼굴로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혁윤은 경악에 가득 찬 눈길을 받으면서도 꼿꼿하게 앞만 보고 있었다.
“…안다고? 알고 일부러 그랬다고?”
“홍혁주 씨일 때에 말씀해 주셨잖습니까. 노을 질 때만 벼르고 있었죠.”
“내가 최영목이란 걸 이미 알고 있었어? 대체 언제부터?”
“간단히 요약하면 작년 초여름쯤입니다.”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형진과 달리 혁윤은 평상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게 평온했다. 자신만 동요하는 것이 왠지 억울해진 형진이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최대한 침착하게 요청했다.
“…간단 요약 말고 자세한 버전으로 들을 수 있을까?”
“80년대 후반쯤부터 염라와 강림도령이 수차례 갈려 나갔습니다. 어떻게든 이승에 한 다리 걸치려고 별 공작을 다 치다가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잘리길 반복했죠. 최근에 새로 바뀐 강림도령이 큰 사고를 치고, 신임 염라가 그 책임을 명목으로 독박을 써서 연수시 구석의 파출소 비슷한 곳으로 좌천됐습니다. 아슬아슬 염라의 지위만 유지한 채로.”
“아. 염라가 바뀌기 전까지는 저주가 굳건할 거라고 했었지. 강림과 염라가 다 바뀌어서 우리가 서로 좀 더 빨리 알아볼 수 있게 된 건가?”
“그보다는… 좌천된 염라가 작년 봄에 문세경 소장님과 결혼한 덕이라고 봐야 할 것 같네요.”
세경과 결혼이라니. 나란히 두기도 이상할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형진은 똑똑히 들었으면서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스승님이 결혼을 하셨다고…….”
“그렇게 됐습니다.”
형진은 좀처럼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뺨을 감싸 쥐었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니 세경이 굵직하게 몸 좋은 남자들만 편식을 한다며 혀를 차던 서산 대신과 비형랑의 목소리가 생생해졌다.
신기한 감각이었다. 시선조차 주지 않는 저 남자와 자신을 중심으로 다른 사람의 삶이 나이테처럼 둘러진 것만 같았다. 자각하지도 못한 채 자연스럽게 말을 놓아 버린 것도, 편하게 말하는 자신을 당연하게 대하는 혁윤도 신기했다.
“염라와 공조해 사건을 몇 개 해결하면서 신뢰와 친분을 좀 쌓고… 조건부 상호 협력에 협의했습니다. 제가 문 소장님의 취향과 성향에 대한 데이터를 염라에게 넘기고, 염라는 제 정인에 대한 정보를 넘겨주기로.”
“잠깐. 스승님 취향을 남 팀장이 왜 파악하고 있어?”
“알아야 피하죠.”
“…무서운 분이긴 한데 피할 것까지야.”
말할까 말까 망설이는 듯하던 혁윤이 긴 한숨과 함께 형진에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권가 기억하십니까?”
“응. 먹고살기 힘들면 연수산으로 가서 내 몫까지 도련님 귀찮게 하라고, 권가 아들에게 거의 세뇌를 시켰었지.”
형진은 웃었지만 혁윤은 웃지 않았다.
“그 권가의 아들이 연수산에서 새장가를 들어 딸을 낳았습니다.”
“어우. 능력 좋네.”
“우리 단아 이름을 따서 그 애를 단이라고 불렀습니다. 문 소장님이 그 애를 죽이셨지요.”
“…왜?”
“제가 행복해 보이셨대요. 저는 정인을 그리워해야 하는데 단이를 보면서 행복해하는 게 싫으시다고.”
형진이 앓는 소리를 흘렸다. 혁윤은 그 시절의 감정이 북받치는지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그 애뿐만이 아니라 저 모르게 수많은 처녀들을 잡아서 서천 꽃밭에 묻으셨어요. 그래서 문 소장님께 제가… 감정이 좀 안 좋습니다. 더없이 고마운 동시에 죄송스럽고 그만큼 불편해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되새기며 지난 감정을 참아 내느라 그의 이마에 푸른 핏대가 솟았다.
‘저렇게 싫은데도 꼬박꼬박 대답해 주는 걸 보면… 일부러 저를 기억해 낼 수 있는 시간을 고른 걸 보면 날 여전히 좋아하는 것 같긴 한데…….’
지금 형진의 눈에 비친 남자는 오후 세 시에 평가원 급탕실에서 처음 만난 남혁윤 팀장보다도 더 건조했다.
형진은 명확히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운 섭섭함에 고개를 숙이고 그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 처음 뵙는 얼굴인데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형진이 낯선 구조의 급탕실로 들어섰을 때. 커피 향이 모락모락 풍기는 종이컵을 쥐고 있던 그가 어색해하는 형진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 새로 오신 박사님이시죠? 말씀은 전해 들었습니다. 저는 분쟁 조정 위원회 조정 2팀장 남혁윤입니다. 이제까진 김 박사님께 많은 도움을 받았었는데 앞으로는 한 책임님께서 도와주시겠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차갑게 생겨서 사무적인 인사를 꽤 다정한 목소리로 해 주는구나. 목소리 참 좋다.
그런 생각을 하며 형진은 그가 건네는 커피를 받았다. 손에 쥐어졌던 따뜻한 종이컵의 온기와 포근한 향기가 아직도 손에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형진은 비어 있는 손을 말아 쥐면서 서운함을 가득 담아 물었다.
“자세한 버전… 그게 끝이야? 스승님의 남편을 통해 이미 한참 전부터 내 신상을 파악하고 있었고, 다 알면서 처음 보는 척했고, 내 기억이 돌아오라고 일부러 노을 지는 시간을 노렸다? 이게 끝이라고?”
“뭔가 더 말해야 합니까?”
“왜 아무것도 안 물어봐? 내가 이번 생에서는 어떻게 살았는지 안 궁금해?”
혁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머릿속에 한꺼번에 욱여넣어졌던 기억들이 느리게 제자리를 찾아가며 선명해질수록 형진은 지금 그의 모습이 더 낯설어졌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만나든 그는 형진이 실없이 뱉는 바보 같은 말들조차 모두 귀담아듣고 모두 대답해 주었다. 아무리 피곤하고 아무리 바쁘고 아무리 힘들어도.
저 남자의 관심과 애정이 온전히 저의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형진의 심장이 누군가 비틀어 대는 것처럼 꾸욱 조여 왔다.
“나는 지금 엄청 궁금해. 남 팀장이 어떻게 봄볕 아래서도 멀쩡한지. 이렇게 시대가 좋아졌는데 왜 더 마른 것 같은지. 정말 내가 안 반가운지.”
“…….”
“대답 안 해 주네.”
“그래야 내 기분을 좀 알아줄 것 같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