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그냥 객식구로 얹혀살라는 거 아닙니다. 집세 받을 거예요. 방금 사인하셨으니 거부권은 없고.”
“얼만데?”
“자, 여기 보시면 이 대표님은 자개 가구 납품이라고 적혀 있네요. 제 취향 아시죠?”
민재가 얼굴을 구겼다. 서묵은 그가 그러든 말든 계약서를 윤에게 넘겼다.
“남 실장은 내가 자는 동안 나 대신 이 도깨비 이름 적힌 호적 좀 찾으러 다녀요. 댁은 나라 밖으로 못 나가니까 그 종이라도 찾아서 영매를 붙여 보든 뭘 하든 그 종이를 찾아서 사망 일시와 장소를 특정해 보라고. 달에 한 번쯤은 수입 책 전문 고서점도 돌아봐 주시고.”
“…….”
“가구는 만드는 족족 여기 창고로 넣어 주세요. 나는 1228호, 창고는 내 집 왼쪽. 이 대표님은 가구 납품하는 길에 제가 별 탈 없이 잘 자는지 한 번씩 봐 주시고.”
허리에 손을 얹고 서묵을 가만히 지켜보던 민재가 이제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아. 나 얘가 왜 이러는지 알았다. 무기 얘 은근 외로움 타.”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종족은 차마 아니라고 부정하지는 못하고 꽃처럼 웃으면서 제집 문을 쾅 닫아걸었다.
“맨날 문세경이랑 싸우고 1년, 3년 이렇게 자다가 갑자기 5년씩 혼자 오래 잠들려니까 좀 무서운갑다. 우리가 같이 있어 주자.”
“…하.”
서묵이 완전히 잠든 뒤, 처음 며칠 정도 윤의 집에 이것저것 채워 넣어 주며 새집을 들락거리던 민재는 점점 걸음이 뜸해져 다시 처음처럼 감투와 부채가 묻힌 연구소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래서 새로 생긴 낯선 건물에 드나드는 사람은 항상 윤 혼자뿐이었다. 용이 잠든 산이 도시로 변해 갈수록 윤은 조금씩 더 외로워졌다.
혼자가 아닌 듯 혼자가 되어 버린 그는 건물 뒤의 숲에서 다시 햇빛 적응 훈련을 시작했다. 육신의 형태가 무너지도록 곤죽이 되었다가 다시 원형을 되찾기를 반복한 지 천 일째 되던 날. 윤은 더없이 개운하게 눈을 떴다. 그는 이제 햇빛을 받아도 타거나 녹지 않았다.
여느 직장인과 다를 바 없이 오전 여덟 시 삼십 분에 집을 나서며, 윤은 세경의 음성을 떠올렸다.
- 이제 햇빛 아래에서 우리 영목이랑 나란히 걸어요.
언제든.
그 사람이 내 이름을 불러 준다면.
【 함께 아침으로 】
“수고하셨습니다.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저희 시스템 일부 접근 권한을 요청했습니다. 내일쯤 문자로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전달드리겠습니다.”
“네. 고생하셨습니다.”
품질 평가원 건물을 나서며 혁윤은 시계를 확인했다. 그와 나란히 걸어 나오던 작은 여자가 쏟아지는 화려한 석양빛에 눈을 질끈 감으며 이마 위로 손 우산을 펼쳤다. 혁윤은 걸음을 옮기며 슬쩍 서 있는 위치를 바꾸어 여자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고맙다고 인사해야 하나……?’
눈 부셔 하는 자신을 위해 그늘을 만들어 준 것 같기는 한데… 감사 인사를 하자니 그는 그늘을 만들어 준 게 의도한 행동이 아닌 듯이 그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는 주차장으로 걷는 내내 자신의 스마트워치와 휴대폰을 번갈아 쳐다보며 스케줄을 조정하기에 바빴다.
혁윤이 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아.” 하고 고개를 들었다.
“앞으로 제가 뭐라 불러야 할까요? 한 책임님? 아니면 한형진 연구원님? 전임자께서는 박사님이라고 불러 달라고 하셨었거든요.”
건조하지만 정중한 말투였다. 유난히 낮은 목소리와 잘 어울린다 생각하면서 형진은 습관적인 미소를 얼굴에 걸었다.
“저는 별로 호칭에 신경 쓰지 않아요. 그냥 남 팀장님 편하신 대로 불러 주세요.”
혁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옆구리에 끼고 있던 서류를 반대쪽 손으로 옮겨 들었다. 형진은 그의 옆모습을 흘끔 훔쳐보면서 머쓱하게 주머니 속의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업무차 이것저것 물어볼 게 있을지도 모르니까 연락처를 알려 달라 해도 될까. 아까 받은 명함엔 휴대폰 번호가 없던데…….’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결국 그녀는 번호 따기를 깨끗하게 포기하고 주머니 속에 있던 차 키를 꺼내 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를 보아도 푸릇한 산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도시. 유난히 맑은 공기도 좋았지만 주차 공간 때문에 신경 곤두세우지 않아도 될 정도로 꽤 너른 부지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전에 다니던 곳에서는 선임 이하로는 차 끌지 말라는 둥 별 눈치를 다 줬었는데.’
원래 형진은 서울에 위치한 평가원의 책임 연구원이었다. 접수된 사건이 이매망량과 관련된 것인지의 여부와 연구소에서 개발된 제품이 해당 업무에 적합한지를 판단하는 것이 품질 평가원의 주 업무였다. 아무래도 그런 쪽의 일은 서울보단 천림시 쪽의 입김이 강했기 때문에 일 욕심 많은 그녀는 천림시 쪽으로의 지역 변경을 계속 요청해 왔었다.
좀처럼 티오가 나지 않던 곳에 최근 작은 사고가 발생했다. 원래 있던 책임급과 선임급이 동시에 급병을 얻어 혼수상태라나. 다들 저주나 액이 아니겠느냐며 수군댔지만 형진은 공석이 났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냉큼 지원부터 했다. 그 덕에 형진은 처음 연구원 일을 시작할 때부터 소원이었던 천림시로 발령받을 수 있었다.
태어난 것도, 학교도 모두 서울이었는데 왜 그렇게 이곳으로 오고 싶어 했는지는 그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냥 지금은 간절히 원하던 곳으로 오게 되어 기쁘고 설렐 뿐이었다. 얼마나 기대했던지, 정식 출근은 내일부터였는데도 하루 먼저 평가원에 들러 인수인계를 받겠다 자청했을 정도였다.
그렇게 사서 일을 늘리다가 형진은 마침 볼일이 있어 평가원에 들렀던 키 큰 남자를 소개받았다. 분쟁 조정 위원회 조정 2팀장 남혁윤.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인데도 형진은 봄에 처음 핀 꽃을 본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 이상하게 그리운 느낌도 들었다.
‘이게 첫눈에 반하는 기분인 건가.’
형진이 생전 처음 경험하는 생소한 두근거림에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리는 사이, 둘은 어느새 형진의 차 앞에 서 있었다.
‘뭐라고 인사하지? 다음에 뵙겠습니다?’
단 한 번도 고민해 본 적 없는 유치한 고민을 하면서 머뭇거리는 그녀에게 혁윤이 메모지 한 장을 내밀었다.
“제 개인 연락처입니다. 저희가 조직 혁신이랍시고 명함에서 휴대 전화 번호를 빼 버리는 바람에 업무 연락이 불편할 때가 많아요.”
“아, 그렇지 않아도 여쭤봐야 하나 고민했는데.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앞으로 자주 뵙게 될 것 같네요. 외부 기관과 저희 위원회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은 대부분 제가 맡고 있어서요.”
행간에서 노동의 시름이 전해졌다. 형진은 작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김 수석님이 말씀해 주셨어요. 위원회에서 남 팀장님이 제일 바쁘신 분이라고요.”
“사서 고생하는 타입이란 말을 듣기 좋게 해 주셨네요.”
짧게 한숨지은 혁윤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우묵한 눈가와 곧게 솟은 콧대의 골격이 도드라진 얼굴이 피곤한 듯이 눈을 꾹 감았다 떴다.
형진은 너무 노골적인 시선이 아니길 바라며 그를 훔쳐보았다. 섬세하게 조형된 얼굴에 만성적인 피로가 더해져 예민한 느낌을 주는 미인이 짧게 한숨을 지었다.
‘남자를 보면서 미인이라 생각해 본 건 또 처음이네.’
초면부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들키면 저 기다란 눈으로 경멸하듯이 흘겨보겠지. 그런 상상을 하면서 형진은 그의 몸 그늘에 쏙 담긴 자신의 그림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림자끼리 겹쳐 있을 뿐인데도 마음에 봄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내일부터 정식 출근이시죠. 그럼 오늘 확인 부탁드린 자료들에 대한 답은 언제쯤 받을 수 있을까요? 에어로졸 타입 모기약과 차아염소산수의 현장 활용에 관련한 부분들.”
그의 낮은 목소리가 건조하게 일을 입에 담았다. 혼자 좋은 꿈이라도 꾸는 것 같은 상태였던 형진은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왔다.
“아……. 제가 서울 쪽 일을 하나 마무리 짓지 못하고 와서요. 지금 그걸 하러 가는 길인데… 오늘 주신 자료는 그 일을 최대한 빨리 끝내고, 꼼꼼히 검토 후에 신속히 전달드리겠습니다.”
긴장할수록 말이 빨라지는 그녀는 와르르 쏟아 내듯이 변명과 약속을 뱉어 냈다. 책망하는 말투가 전혀 아니었는데도 왠지 그에겐 ‘마무리 짓지 못한 일이 있다’고 말하는 것부터가 미안했다. 시종 표정 없이 건조하던 혁윤은 점점 더 화려하게 물드는 저녁노을을 넓은 등으로 막아 주면서 형진을 향해 어렴풋한 웃음을 입에 걸고 손을 저었다.
“재촉하는 게 아닙니다. 가뜩이나 갑자기 오게 되셔서 적응하기 힘드실 텐데 너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진행해 주시면 됩니다.”
“네, 그러면 제가…….”
집에 가서 확인해 보고 보다 구체적인 날짜를 전달드리겠습니다.
하려던 뒷말은 그녀의 입술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노을을 등에 업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 그의 눈동자 가득 담긴 제 얼굴. 세상에 오직 둘뿐인 듯한 감각이 형진을 덮쳤다. 막을 틈도 없이 멋대로 밀려드는 기억에 과부하가 걸린 듯이 숨이 턱 막혔다. 누가 머리를 반으로 쪼개어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들을 쏟아붓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은은한 미소로 엷은 곡선을 그리고 있던 혁윤의 입술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는 허리를 숙여 형진과 눈높이를 맞추고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괜찮으십니까?”
형진은 대답도 하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뒤로, 뒤로 물러났다. 몇 걸음 도망치지도 못했는데 등 뒤에 자신의 차가 닿았다.
“어디 불편하신가요?”
더 도망갈 곳도 없이 고개만 젓자 혁윤의 얼굴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 형진이 괜찮다는 듯이 손을 젓자 걱정스럽게 그녀를 바라보던 혁윤의 얼굴이 다가올 때와 다르지 않은 속도로 멀어졌다.
그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엔 숨이 턱 막히더니, 멀어지니 누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괴로웠다. 형진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멀어지는 그의 옷깃을 잡았다. 흘끗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린 그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운전하기 어려우실 것 같은데… 제가 함께 가도 괜찮은 일이라면 동행해도 될까요?”
형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차 키를 내밀었다. 혁윤은 엉겁결에 형진이 건넨 키를 받아 들고 잠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살짝 기울여 바로 옆에 주차된 자신의 차의 조수석을 가리켰다.
“타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