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아마도 문 소장님이 이성을 잃기 직전에 쏟아부어 준 아지랑이 같은 기운 덕이겠지.’
윤은 감사와 사과는 응분의 현물로 표하라던 모친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지장의 눈길을 맞받았다.
“그래, 네놈 반려의 목숨값 정도는 내 선에서 물어 주겠다. 뭘 원하나.”
빠득 이를 갈던 지장이 선심 쓰듯이 보상을 입에 담았다. 윤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염라의 신병.”
“이 건방진……!”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고 소파 팔걸이를 쿵 내려치려던 지장의 손은 서산 대신이 뿜은 연기에 잡혀 옴짝달싹 못 하고 굳어 버렸다.
“서산 대신! 이게 무슨 짓입니까? 사람을 초대해 놓고 이렇게 몸을 묶는 법이 어딨답니까!”
“그쪽에선 우리 남 실장을 초대해 아주 곤죽을 만들어 놓고, 오른손 하나 못 움직이게 했다고 나를 탓하나?”
“그…….”
윤이 비스듬히 입술을 기울였다.
“저는 지장께서 주신다 하시기에 달라 답하였을 뿐입니다. 생사를 다루시는 명계의 우두머리께서 사람의 목숨에 값을 매긴다는 발상부터가 말을 잇지 못할 정도입니다마는.”
발끈하는 지장을 향해 담배 연기를 내뿜은 서산 대신이 윤의 편을 들었다.
“염라의 신병 정도면 나쁘지 않네요. 우리 세경이가 거의 완전히 미친 건 그쪽 잘못이니까 겸사겸사.”
“아니, 문 소장은 예전부터 약간 불안한 상태였던 걸 온 세상이 다 아는데…….”
“문세경이 내 도깨비감투며 도깨비 부채까지 다 갈아서 서천 꽃밭에 흩뿌렸습니다.”
묵묵히 오가는 말을 듣고 있던 민재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보탰다. 지장이 짜증스러워하는 얼굴로 민재를 쳐다보았다.
“비형랑, 그 얘긴 지금 하던 얘기와는 아주 맥락이 다르지 싶은데요.”
“아뇨. 그런 짓을 한 건 문세경이지만 문세경이 그렇게 되도록 몰아간 건 저승입니다. 그쪽이 차사들을 인간의 몸에 빙의시키지만 않았다면 문세경은 금기를 어길 일이 없었을 거고, 광증이 도지지도 않았을 테니까.”
민재의 눈에 샛초록 광채가 너울댔다.
“나는 내 감투, 내 부채와 비슷한 값의 무언가를 받아 똑같이 꽃밭에 갈아 뿌려야겠습니다.”
“비형랑… 그대가 대단한 도깨비라는 건 알지만 도깨비감투나 부채가 염라와 같은 값이라고 할 수는 없잖습니까?”
“내 반려가 남긴 유품이 염라의 모가지보다 싸구려라고?”
지장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제 반려를 잃고 민재가 몇 년을 쉬지도 않고 울었다는 소문은 저승까지도 널리 퍼져 있었다.
‘이천 년 넘은 비형랑의 애정과 한이 서린 물건이 복구할 수 없이 망가졌고 그 원인이 우리 저승에 있다는 건데……. 빌어먹을.’
계산기를 두드리던 지장은 적당한 협상안을 내놓았다.
“염라는 이 시간부로 당장 파직시키겠습니다. 염라뿐만이 아니라 휘하의 차사들도 모두.”
“이쪽에서 원한 건 염라의 신병이지 파직이 아닙니다.”
“…이 수준에서 합의해 주시죠. 염라씩이나 되는 사람을 밭에 뿌리느니 하게 둘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사과의 대가로 비형랑께서 언젠가 반려를 다시 만날 수 있도록 환생부를 작성하겠습니다.”
땅에 묻힌 세경과 목숨을 잃은 혁주는 깡그리 무시하고 비형랑에게만 거래를 제시하는 그의 모습에 서산 대신이 발끈했다. 돌아가는 상황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서묵과 호우준이 동시에 그녀의 손등을 잡고 그녀를 진정시켰다. 서묵은 의아해하는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서산 대신에게 한쪽 눈을 찡긋하며 턱으로 윤을 가리켰다.
윤은 평소 그대로의 무표정한 얼굴로 지장을 바라보면서 그를 재촉하고 있었다.
“저승에서는 그런 식으로 계약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이승에서는 아닙니다. ‘언젠가’라는 두루뭉술한 표현은 불가하니 확답을 주세요.”
“나도 연월일시를 명확히 적어 내미는 게 편하다. 하지만 비형랑의 반려는 이 땅에서 죽은 이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조차 확실치가 않아.”
윤이 고개를 저었다.
“저승 명부에 뻔히 적혀 있는 내용 아닙니까.”
“명부를 보관하는 장소에도 한계가 있어. 저승의 서고가 협소하여 건청궁의 장서고인 팔우정(八隅亭)을 지을 때에 우리 명부를 보관할 자리를 함께 마련했는데… 지난 전쟁 통에 소실되었다.”
“서류 보관 허술한 건 강림이나 지장이나 거기서 거기네요.”
“…….”
윤을 쏘아보던 지장은 민재가 있는 쪽으로 몸을 틀어 그를 설득했다.
“비형랑의 반려가 어디에서 어떻게 죽었는지만 알아내면 됩니다. 그것만 알면 사망지의 명계에 협조를 구해서 영혼을 인도받을 수 있습니다.”
“장소와 일시만 알면 된다는 소린가?”
“네. 제 명예를 걸고 서산 대신 앞에서 맹세합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이 증인이지요. 약속합니다. 정확한 날짜는 말씀드릴 수 없으나, 사망지와 사망 일시만 특정되면 가장 빠른 시일 내로 제가 책임지고 환생부를 적어 드리겠습니다. 비형랑과 반려께서 다시 만날 수 있도록.”
고개를 숙이고 있던 민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윤은 잠든 듯이 눈을 감은 혁주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지장에게 다른 조건을 걸었다.
“하면 그리 알고, 지연되는 시일에 대하여 미리 이자를 지급받겠습니다.”
“…이게 계속 낄 데 안 낄 데를 구분 못 하고.”
“이전부터 연수산에서 큰 거래가 오갈 때에 그 거래의 앞에 나서는 것은 항상 제 몫이었습니다.”
지장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단 도련님 출신답게 속 모를 표정으로 이윤 남기는 데에는 그만 한 인재가 또 없었다.
지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윤은 구겨지는 남자의 얼굴을 감흥 없이 쳐다보면서 줄곧 생각하고 있던 조건을 내밀었다.
“연수산을 자치 지역으로 설정해 주십시오. 저승과 결탁한 기관이든 인맥이든 모든 자원을 총동원해서.”
“그게 지금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나?”
“우리 쪽에서도 대응할 수 있는 조직을 구성할 테니 그것도 공식 기관으로 인정해 주시고요.”
윤은 짜증스러워하는 지장의 목소리에는 대꾸도 않고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인 흰 종이를 펼쳐 그 뒷면에 협의 사항을 적어 내려갔다. 지장이 머리를 헝클며 윤을 가리키자 서산 대신이 어깨를 으쓱여 대답했다.
“중요한 거래는 모두 남 실장에게 일임하고 있다니까 왜 날 보지?”
“하…….”
장탄식을 흘린 지장이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윤은 종이에 빼곡히 글씨를 채워 가면서 눈만 들어 지장을 흘끗 쳐다보았다.
“그럼 이제 제 정인의 목숨값과 제 스승님이신 문 소장님의 정신적 피해 보상을 정산받겠습니다. 전직 염라였던 차사의 신병을 인도해 주세요.”
“야!”
“용 하나, 사람 하나의 피해에 대한 대가입니다. 염라씩이나 되는 사람을 요구하는 것은 다소 과하지만, 전직 염라였다가 이젠 일개 차사로 강등된 사람의 신병을 요구하는 건 절대 과하지 않다 생각되는데요.”
윤은 말을 마치자마자 자신이 완성한 종이를 서산 대신에게 전달했다.
[:: 이행 각서 ::
1. 비형랑의 재산 손괴에 대한 책임
비형랑과의 재회가 보장된 이영의 환생부
2. 본 각서 제1항의 지급 기일 미정에 대한 대가
모원도 자치 구역 설정
해당 건과 관련된 부속 기관 일체 공식화
3. 문세경과 홍혁주에 대한 피해 보상
전직 염라의 신병
각서인 본인은 상기 피해 보상에 있어 계약서에 명시된 조건을 성실히 이행하며, 서명 일시 이후로 이승과의 협의 없이는 그 어떤 국가 기관과의 업무 체결도 맺지 않을 것, 각서인의 귀책사유가 발생할 시 이승이 요구하는 배상에 대해 어떠한 이의도 제기치 않을 것을 각서함]
윤이 내민 종이를 받아 든 서산 대신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녀는 휘갈겨 쓴 글씨조차 꼭 저처럼 반듯하다는 생각으로 웃음 지으며 지장에게 각서를 넘겼다.
“확인해 주시죠. 정식으로 서류를 전달하기까지 일주일이면 충분하겠지요?”
“서산 대신, 다른 건 몰라도 2항의 경우는 우리끼리의 일이 아니라 인간 기관이 얽혀 있지 않습니까? 그 인간들의 서류 절차라는 게―”
“복잡하겠지. 그럼 닷새로 합시다.”
“…….”
“사흘로 할까요?”
지장이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일주일 안에 보내겠습니다.”
“그래요, 일주일. 지장도 수장의 체면이 있으니 한 입으로 두말하진 않겠지.”
서산 대신은 별다른 말 없이 손가락 끝만 까딱여 지장의 목에 휘감은 담배 연기와 그의 오른손을 감은 연기를 흐트러뜨렸다. 그리고 그 손가락으로 서묵이 만든 공간의 틈새를 가리켰다. 부를 때만큼이나 무례한 축객이었으나 지장은 한마디 불만도 내뱉지 못하고 주먹만 움켜쥔 채 걸음을 옮겼다.
* * *
혁주의 장례식은 그녀가 눈을 떴던 병원의 장례식장에서 진행되었다. 윤이 잠들어 있던 낮 동안 혁주가 얼마나 바지런히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는지, 장례식장을 찾아온 이들 중에는 윤조차 얼굴을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윤은 혁주의 이름이 적힌 장례식장의 입구에서 차마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문가에 기대어 안쪽을 바라보기만 했다. 안에서 조문객을 응대하고 있던 민재가 윤을 보자마자 달려 나와 그를 덥석 안았다.
“그날은 내가 고맙다는 인사도 못 했다. 우리 풀꽃 같은 색시 환생부를 네가 약속해 줬는데…….”
윤은 무어라 대꾸하려 입을 열었으나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몇 번쯤 입을 벙긋대던 그는 결국 입을 다물고 민재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광경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세상은 난무하는 비참함과 산재한 하찮음으로 가득했다. 헤어지고 또 헤어짐만 반복하는 이의 영정을 마주한 순간에야 윤은 씁쓸히 인정했다. 손쓸 도리 없이 덮쳐 오는 격렬한 슬픔을 훈련된 무표정으로 덮고 있는 자신이 못 견디게 비참했다.
벽을 가득 채운 흰 국화꽃의 한가운데에서 환히 웃고 있는 여자의 얼굴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그 사랑스러운 사람에게 이제 그만두라 통보받은 저 자신의 살아 있음이 하찮았다.
“뭐 하고 있습니까. 들어가지 않고.”
뒤에서 다가온 서묵이 민재에게 기대선 윤을 잡아끌었다. 윤은 그가 검지와 엄지만으로 끝자락만 살짝 쥔 자신의 옷소매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가치 있던 사람이 한 장 사진으로만 남아서 웃고 있단 게… 나는 여전히 비참하고 하찮게 살아 있을 거라는 게 믿어지지가 않아서요.”
“염라도 바뀌고, 강림도 바뀐다잖아요. 강림은 어떤 놈인지 모르겠지만 듣자 하니 염라는 그나마 좀 정신 똑바로 박힌 놈이 새로 들어앉았대요. 그러니까 다음번 재회를 기대해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