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서 실장님은 이 긴 세월을 어떻게 혼자 버티십니까?”
“혼자 안 버티는데요? 서산 대신도, 도깨비도 있는데? 드럽게 까탈스러운 고양이 새끼도 하나 키우는 것 같고.”
윤은 서묵의 목소리가 남긴 잔향이 모두 사라질 때쯤에야 입을 열었다.
“내가 고장 나고 있다는 걸 느껴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읊조리듯 말하며 윤은 내내 끼고 있던 장갑을 벗었다.
“내 삶은 이미 예전에 망가졌으니 고장 나는 건 내 마음이겠지요.”
서묵의 눈동자가 윤의 손끝을 향했다. 혁주를 찾겠다면서 얼마나 정신을 놓고 뒤져 댔는지, 손톱이 다 뒤집히다 못해 끝이 닳아 흰 뼈가 드러나 있었다.
‘내게 남산에 있는 놈들을 해치워 달라 부탁하고 혼자 어디로 휙 사라지더니…….’
윤은 흡혈귀였다. 어지간한 상처는 금세 없던 듯이 아무는 족속 주제에 손끝이 다 닳아 없어지도록 곳곳을 뒤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사람이 죽을 때마다 마음이 고장 나고, 고장 난 마음이 그 사람과 함께 묻혀 썩어 갑니다. 부서지고, 썩고, 나는 껍데기만 남아서 연수산을 떠돌아요. 먼지처럼.”
세경의 기운 덕인지 윤의 손끝은 느리지만 착실하게 원래의 모양대로 돌아오고 있었다.
“나는 내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응당 도와야 할 이를 도왔고, 인간의 법이 길을 보이지 못하기에 다른 길을 알려 주었을 뿐입니다.”
“누가 뭐랍디까? 그쪽이 남이 뭐라 한다고 듣는 성격이기나 하고?”
“내가 내게 뭐라 하네요.”
“…….”
“살면 살수록 내가 잘못한 것 같습니다. 다 내 잘못인 것 같아요.”
“홍혁주 씨를 대체 어디서 찾았길래 그래요?”
너무 늦은 질문이었다 자책하며 서묵은 속으로 한숨지었다. 큰 사고를 칠 것 같던 세경의 상태에 신경 쓰기 바빴던 서묵으로서는 차를 타고 오는 내내 윤이 녹아 없어지기라도 할 듯이 부여안고 있던 혁주에 대해서는 물어볼 겨를이 없었다.
한참이나 대답을 하지 못하던 윤이 아주 어렵게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죽은 사람들을 언제든 빼돌리거나 태울 수 있도록 보관 설비가 참 잘 갖춰져 있더라고요. 얼굴에 젖은 면포가 붙여진 채로 거기 들어 있었어요. 피를 내면 내가 찾아온다는 걸 알아서 그렇게……. 하.”
윤이 긴 한숨을 내쉬면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나 때문에 내 정인이 이 꼴을 당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그날, 그 물레방앗간에서, 그 처녀 귀신을 도와서. 그 사람은 말렸는데 내가 나서서.”
서묵은 자책하는 윤을 쳐다보면서 쓰게 웃었다.
“남 실장, 내가 그쪽을 별로 안 좋아하는 건 알죠?”
“압니다.”
“근데 왜 그쪽이 징징거리면 원인 제공한 놈들을 패 주고 싶을까.”
윤의 젖은 눈이 서묵을 향했다. 비쩍 말라서 날이 섰을 뿐, 여전히 처음 본 그날처럼 곱게 자란 도련님 같은 인상이었다.
‘눈빛이 문세경만큼이나 미쳐 있는 게 문제지.’
서묵은 제 마음이 이렇게나 불편한 이유에 자신의 취향을 들먹였다. 흠 없이 고운 것, 예쁜 것 좋아하는 취향이라 윤의 저 눈깔이 취향에 맞지 않는다고.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키면서 서묵은 신음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윤의 허벅지를 발끝으로 툭툭 차며 채근했다.
“일어나요. 일하러 갑시다.”
“…….”
“말로 할 때 일어나요. 난 위로하는 데에 재능도, 취미도 없어.”
서묵은 딱 기절할 것같이 아픈 배를 움켜쥐고 비형랑에게 마음속으로 욕을 퍼부으면서 윤을 내려다보았다.
“하. 나는 떼쓰는 어린애 달래는 데에도 진짜 재능이 없어.”
“무… 뭐 하시는 겁니까!”
“걷잖아.”
서묵은 일어날 생각이 없이 앉아 있는 윤의 목덜미를 잡아 자신의 어깨에 얹고 걷기 시작했다.
“청승 그만 떨고 재밌는 거 보러 갑시다.”
“…이 상황에 재밌는 거 보러 가잔 말이 나옵니까?”
“못 할 말도 아닌 것 같은데?”
윤이 알았으니까, 걸어갈 테니까 내려놓으라 채근하는데도 서묵은 들리지 않는 것처럼 저 할 말만 했다.
“나는 전부터 저승 것들이 아주 별로였어요. 알죠?”
“…지금 저승으로 쳐들어가겠다는 말씀은 아니시길 바랍니다.”
“하. 내가 저승을 왜? 아랫것들이 찾아오는 게 예의인 나라 아닌가, 여기?”
크게 코웃음 친 서묵은 윤을 짐짝처럼 어깨에 얹은 채 민재네 연구소의 대표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대표실에 아무렇게나 방치돼 있던 커다란 여행 가방을 향해 윤을 내던졌다.
“저 가방 챙겨요. 저기 꽤 재밌는 것들이 많을 거야.”
비틀거리지도 않고 균형을 잡은 윤이 가방을 집어 들자마자 서묵은 자신의 차로 향했다.
“안전벨트 매고. 도착하면 홍혁주 씨랑 여행 가방이랑 다 챙겨서 내려요.”
뒷좌석에 있는 혁주의 곁으로 윤을 툭 하니 밀어 넣은 서묵은 차바퀴에서 타는 냄새가 날 정도로 달려 서산 대신의 집으로 향했다.
서묵과 윤이 마악 차에서 내렸을 때에 그들의 뒤에서 지친 듯 질린 듯한 서산 대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세경이 묻자마자 너희는 또 뭔…….”
서묵은 고개를 기울여 눈물범벅이 된 민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마음 약한 도깨비 아저씨가 제대로 설명 못 하고 딱 저렇게 울 것 같길래 왔죠.”
서묵의 말이 끝나자마자 혁주를 품에 안고 서산 대신을 향해 돌아선 윤이 건조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저승 차사들이 중정과 손을 잡고 이승에서 설치고 있습니다. 저와 제 정인이 거기 휘말렸고, 문 소장님은 저를 구하러 오셨다가―”
윤은 말을 끊고 입을 다물었다. 서묵은 재미있는 것을 보러 가자고 했다. 아랫것들이 찾아와야 한다고도 말했다. 이 길거리는 그가 말한 ‘재미있는 것’을 보기에 적당한 장소가 아니었다.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문 윤과 그가 안고 있는 시체를 쳐다본 서산 대신이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다들 안으로 들어와라. 안에서 상세히 들어야겠다.”
서산 대신이 너른 응접실의 상석에 앉아 담배를 물자 그녀의 옆에 선 호우준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서묵이 윤에게 눈짓했다. 윤은 입에 문 담배를 깊이 빨아들이는 서산 대신을 쳐다보면서 세경이 지시했던 모든 것을 빠짐없이 전했다.
“죽지 않아야 하는데 죽어 버린 사람, 죽었으나 사라졌다고 공표되어 죽음조차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이 수두룩한 시절이잖습니까. 살아도 산 게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게 아닌 혼란을 틈타 강림과 차사들이 몹쓸 짓을 한 듯합니다.”
“차사 놈들이 인간의 몸에 깃들어 있었기 때문에 세경이가 인간을 해한 게 되어 버렸단 거지. 강림은 세경이가 금기를 어기게 만들기 위해 제 부하들을 인간에 몸에 깃들게 하였던 거고?”
“예.”
윤은 사실을 살짝 비틀어 전하면서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대답했다.
‘어차피 강림도, 차사들도 모두 소멸됐다. 현장은 서 실장님이 말끔히 정화해서 뭔가 찾으려야 찾을 수조차 없어.’
현장에 있던 피해자도 이쪽. 정리 정돈에 재주 없는 강림이 잔뜩 쌓아 두었던 서류들은 이쪽에서 빠짐없이 확보했다. 얼마든 유리하게 정황을 꾸며 낼 수 있었다.
‘문 소장님 말대로다. 싸움을 더럽게 걸어오면 이쪽에서도 추접하게 맞받아 주어야지.’
묵묵히 담배 한 대를 다 피운 서산 대신이 노기 가득한 얼굴로 이를 갈았다.
“이승과 저승은 엄연히 다르다. 아무리 나라가 두 동강 나고 팔도의 신들이 죄다 연수산에 처박혀 있다 해도 저승 것들이 설치고 다닐 수는 없어.”
서산 대신의 진노를 바라보며 서묵이 입꼬리를 곱게 끌어 올렸다. 드디어 ‘재밌는 것’을 구경할 시간이었다.
서산 대신이 손에 쥐고 있던 꽁초가 파랗게 얼어붙었다가 작은 파편으로 산산이 터져 나가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빈손으로 서묵을 가리켰다.
“염라… 아니, 지장을 족쳐 봐야겠군. 무기야, 네가 저승에 좀 다녀와야겠다.”
“왜 제가 갑니까? 잘못한 놈이 와서 빌어야지.”
서묵이 싱글싱글 웃으며 팔을 들어 올렸다. 무겁게 가라앉은 얼굴로 가만히 앉아만 있던 민재가 펄쩍 뛰며 서묵의 팔을 끌어 내렸다.
“야, 인마! 잘못이 아무리 저쪽에 있어도 지장은 저쪽의 머리통이야! 공간을 갈라서 끄집어내는 건 좀 그렇지!”
“우리 머리통은 나 안 말리시는데요?”
말리던 민재가 눈썹을 쭉 끌어 내리며 서산 대신을 쳐다보았다. 서산 대신은 단단히 화가 난 얼굴로 서묵에게 눈짓했다.
“안 나오겠다 하면 멱살이라도 잡아서 끌어내렴.”
“서산 대신! 이놈 이거, 배 뚫려서 상태가 정상이 아닙니다. 그냥 옆 동네 놀러 가는 것도 아니고 명계의 우두머리인 지장을 향해 공간의 균열을 만들면 몇 년은 앓아누울 거라고요!”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서산 대신이 말릴 새도 없이 서묵이 공간을 쭉 갈랐다.
“십 년을 앓아누워도 이 재밌는 놀이엔 끼어야지. 지금 아니면 언제 또 당당히 지장한테 시비를 털어 보겠습니까?”
“야, 그래도 그건―”
“안녕하세요, 지장님.”
서묵은 민재의 말은 들은 체도 않고 응접실 한가운데에 뚫린 검은 균열 안에 멀거니 선 남자를 향해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
잘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파자마 차림으로 한 손에 물컵을 들고 서 있던 남자가 멍한 얼굴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윤은 내도록 꼭 안고 있던 혁주를 소파에 기대 앉혔다. 저를 향한 시위인 게 명백한 위치 선정에 지장이 얼굴을 와그작 구겼다.
“이쪽에 앉으시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나보다 지장이 더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서산 대신이 갈라진 공간 너머에 선 지장에게 혁주의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더없이 불쾌해하는 얼굴로 응접실 안의 사람들을 노려보던 지장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균열에서 걸어 나왔다.
“글쎄요, 무슨 일일까……. 영서 씨 땅에서 사는 용이 우리 차사들을 다 잡아 죽인 일 말씀이신가?”
“지장, 나한테 기 싸움 걸어 봤자 좋을 거 없습니다. 내가 게을러서 힘자랑을 안 하는 거지 못 해서 가만히 있는 게 아니거든.”
서산 대신의 경고와 동시에 지장이 쥐고 있던 물컵이 산산조각으로 터져 나갔다. 지장은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된 손을 얼빠진 얼굴로 쳐다보다가 서산 대신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새에 새 담배를 문 서산 대신은 호우준이 켜 든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이며 그의 힐난을 무시했다.
“나는 그 파편이 지장의 눈으로 날아가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지금 날 노려보는 그 눈.”
“…….”
서산 대신이 뿜어낸 흰 연기가 지장의 눈으로 곧게 뻗어 나갔다. 지장은 입술을 질끈 물고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