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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 부르실 날에-146화 (146/157)

146화

* * *

덤비고 또 덤비던 남자는 훤하게 날이 밝은 뒤에야 이마 가득 땀방울을 달고 축 늘어졌다. 튼튼하고 심지 굳고 반듯한 사내였지만 용의 체력을 이기기는 무리였던 모양이었다. 세경은 코웃음을 치면서 잠든 남자의 뺨을 툭 건드리고 미련 없이 뒤돌아 방을 나왔다.

‘몸 섞어 보니 내가 밟고 키우고 할 것도 없이 알아서 쑥쑥 클 놈이야. 잘 골랐다.’

묵직한 가방과 함께 연수산으로 돌아오자마자 세경은 다짜고짜 민재에게로 쳐들어갔다.

“이 멍청한 도깨비 새끼야. 넌 나잇살이나 처먹어서 한다는 게 고작 자빠져 우는 것뿐이야? 까마득히 어린 서양 창귀도 제 정인이 되돌아올 길 예비하겠다며 곤죽이 되도록 발버둥 치는데?”

짓무른 눈으로 대표실 의자에 푹 파묻혀 있던 민재가 눈만 들어 세경의 시비를 받았다.

“문세경이 너는 대체 뭔 사고를 치고 와서 나한테 시비냐.”

“엄청 큰 사고 쳤고, 연수산 장승 밑에 파묻힐 거니까 네놈 정신도 번쩍 들게 해 줄까 해.”

“팔자에 없던 장기 출장까지 다녀와서 피곤한 모양인데, 오늘은 좀 쉬고 내일 얘기해.”

민재는 영이가 실종된 이후로 항상 이런 상태였다.

세경은 가방을 집어 던지고 코웃음을 치면서 민재의 책상 맨 아래 서랍을 잡아 뜯었다.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던 민재가 눈에서 샛초록 안광을 뿜으며 손을 뻗었지만 세경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세경은 뽑아 든 서랍을 들고 날듯이 달려 자신의 연구소로 향했다. 그리고 커다란 분쇄기에 서랍 속의 물건을 탈탈 털어 넣었다. 찰나의 차이로 달려 들어온 민재가 숨을 멈추고 굳었다.

“왜 그러고 있어. 화내야지.”

“…….”

“방금 내가 네 색시가 남겨 주고 간 부채, 감투, 네 옷, 이런 걸 다 갈아서 내 꽃밭에 뿌렸잖아. 가만히 있을 거야?”

툭 치면 바스라질 것 같은 표정으로 서 있던 민재가 괴성을 내지르며 세경에게 달려들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려던 세경은 가만히 눈을 감고 민재의 손에 자신의 몸을 내맡겼다.

“아, 문세경 저거 또 사고 칠 줄 알았어! 이 대표님! 그러면 안―”

공간을 가르고 나타난 서묵이 민재의 셔츠 자락을 잡았지만 광분한 비형랑은 서묵마저도 밀치고 세경에게로 곧장 달려들었다. 이를 악물고 상황을 지켜보던 서묵이 세경과 민재의 사이로 달려들었다.

“큽!”

민재의 손이 서묵의 배를 뚫었다. 서묵은 온 인상을 찌푸리면서 제 배에서 민재의 팔을 빼내고 그를 떠밀었다. 한발 늦게 연구소에 도착한 윤이 한눈에 사태를 파악하고 곧장 다가와 서묵을 부축하며 세경을 흘겼다.

“문 소장님. 이럴 필요까지는 없었습니다.”

“어머. 동윤 씨, 나 섭섭해. 내가 정신 놓을 정도로 싸우고 기력 쇄할 정도로 피 짜서 살려 줬으면 내 편을 들어야지.”

민재가 부릅뜬 눈으로 서묵과 윤과 세경을 쳐다보았다. 세경은 서묵의 뒤에서 얼굴만 빼꼼 내밀고 눈을 깜빡였다.

“민재 씨, 내가 저승 놈들을 다 뜯어 발기고 차기 염라 싹수가 보이는 놈한테 미끼도 잘 던져 놨어요. 사고는 서울에서 치고 협상 카드는 연수산에서 만들려고 그쪽 감투랑 부채 협찬 좀 받았어.”

민재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문세경이 너… 뭔 짓을 꾸민 거야……?”

“내가 설명해 봤자 민재 씨는 못 알아들어요. 이 계획은 속 시커먼 것들만 이해할 수 있는 거라.”

세경은 키득키득 웃으면서 자신과 서묵과 윤을 가리켰다. 마치 우리는 알지만 너는 좀처럼 모를 계획이라는 듯이.

윤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서묵의 옷을 벗겼다. 서묵은 급한 대로 셔츠를 찢어 지혈하는 윤의 손을 밀어내며 환자 같지 않게 방긋 웃었다.

“나 용입니다. 상처는 그냥 두면 알아서 나아요. 병 수발이 적성이면 저 도깨비 손에 물이나 끼얹어 주든가.”

윤은 짧게 한숨을 내쉬고 민재가 어쩌지도 못하는 오른손을 닦기 시작했다. 민재는 자신의 손에 묻은 피와 서묵의 몸에서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피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헛구역질을 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세경의 혀 차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민재의 뺨이라도 치는 것처럼 세찬 물줄기가 쏟아졌다.

“찬물 맞고 정신 차려요, 이 등신 같은 도깨비야.”

세경이 호스의 밸브를 잠그고 남은 물마저 민재의 얼굴을 향해 탈탈 털었다. 그녀가 끼얹는 물을 고스란히 맞고 서 있던 비형랑은 이내 설명을 원하는 눈으로 세경을 채근했다. 세경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으면서 대답했다.

“내 눈을 보면 알겠지만 난 이제 거의 완전히 망가졌다고 봐야 해요. 못쓰게 되기 전에 비싼 값 매겨서 팔아 치우는 중이에요.”

“내가 좀 알아듣게 설명해 봐.”

민재가 물이 뚝뚝 흐르는 얼굴을 몇 번이나 문지르면서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세경의 한숨이 짙어졌다.

“내가 미친 거, 그래서 당신의 둘도 없는 보물에 손을 댄 거, 이거 전부 다 저승 탓으로 돌릴 수 있게 조작 중이라고요. 저승 것들이 싸움을 더럽게 걸어오니 나도 더럽게 받아 주겠다는 거지. 걔들이 지금 애먼 인간들에게 누명 씌우고, 협박하고, 별 지랄을 다 하더라고?”

세경은 깔끔하게 정돈된 머리 모양을 꽤 흡족해하면서 서묵을 가리켰다.

“조작하는 김에 이 재수 없는 서양 용을 건드린 것도 나한테 덮어씌워 줘요. 나 서묵 씨 배에 구멍 내는 거, 진짜 해 보고 싶었거든.”

세경의 눈이 윤을 향했다.

“서양 용은 부상자고, 비형랑은 모질이고, 부탁할 사람이 우리 동윤 씨밖에 없네?”

용은 태생이 거짓을 말할 수 없는 종족이었다. 비형랑은 천성이 거짓말에 능숙하지 못했고. 여기 모인 이들 중에서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윤뿐이었다. 윤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경이 싱긋 웃으면서 조금 더 세밀한 지시를 했다.

“동윤 씨가 책임지고 보상 협상을 해 줘요. 나도 진상 쳤으니 아주 대단한 요구는 못 하겠지만 저 멍청한 비형랑과 반려가 다시 만날 수 있는… 뭐, 그 정도 보상은 받아 낼 수 있지 않겠어?”

민재가 눈을 부릅떴다. 죽은 영혼을 관장하는 것, 죄업을 치른 영혼이 다시 태어나도록 이끄는 것 모두 저승의 몫이었다.

‘저승을 닦달하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환생할지 알 수 있어.’

민재가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얻은 얼굴로 입을 쩍 벌리자 세경은 한심하다는 듯이 그의 어깨를 툭 밀었다.

“진작 이렇게 나쁜 쪽으로 머리를 썼으면 색시를 다시 만나고도 남았겠다, 이 멍청한 도깨비야.”

“그럼 이게 다 나랑 우리 색시를…….”

“그래요. 앞으로는 울고 짤 시간에 저승 등쳐 먹고 찜 쪄 먹을 궁리나 해요. 알았어요?”

세경은 저가 저지른 모든 일을 걸고 민재와 영이가 다시 만날 수 있는 샛길을 터 주고 있었다. 자신이 언제 완전히 정신을 놓게 될지 모르는 상태이니 더 늦기 전에 써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적재적소에 활용할 수 있도록.

“감투랑 부채 갈아 버린 건 사과 안 해요. 환생하여 만날 생각은 않고 옛 물건에 매달려 질질 짜는 거 진짜 꼴 보기 싫었단 말이야.”

“…….”

늦어도 너무 늦게 세경이 벌인 짓을 이해한 민재가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세경은 아이 다루듯 그의 머리를 헝클어 주면서 속삭였다.

“연구소는 내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민재 당신이 잘 맡아 줘.”

민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머리를 쓰다듬던 세경이 “아!” 하며 윤을 쳐다보았다.

“연구소는 처음부터 비형랑 거였는데 내가 욕심을 부려서 지랄을 쳤다, 내 지랄을 막는 비형랑과 혈투를 벌이다가 중상을 입고 연수산 장승 밑에 묻혔다… 이런 소설 정도면 그럴싸하겠다.”

“참고하겠습니다.”

배를 부여잡고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서묵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 핑계라면 저승 것들도 문 소장 신변을 내놓으란 말은 못 하겠네요. 서산 대신 영역에 묻힌 걸 파 달라고 할 배짱은 없을 테니까.”

세경이 서묵을 향해 박수를 쳤다.

“봤죠? 민재 씨, 당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렇게 못된 쪽으로 머리 못 굴리니까 우리 동윤 씨랑 이 망할 서양 용 말 잘 들어요.”

“…알았어.”

“다 늙어서 질질 짜지 말고. 으른이면 으른답게 본을 보이란 말이야.”

“응.”

세경은 몇 번이나 그에게 다짐을 받았다. 그러고서도 안심이 안 되는지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은 서묵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서묵 씨 당신이 협상까지 잘 버텨 줘야 해요. 내가 문을 뚫었고, 이 도깨비가 엄호할 테니 그대는 참모 의견에 귀 기울이면서 칼을 휘둘러야지.”

“네에, 엄마.”

얄밉게도 대꾸하는 서묵에게 진저리를 친 세경은 이내 민재의 앞에 곧게 섰다.

“알아들었으면 이제 도깨비불로 날 묶어서 서산 대신한테 가요. 당신은 연수산 수문장이니까 해로운 게 있으면 당신 손으로 막아.”

고개를 끄덕인 민재가 청록색 도깨비불로 세경의 몸을 감쌌다.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도깨비불에 겹겹이 감긴 채, 세경이 약간 부끄러운 듯이 덧붙였다.

“서산 대신께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빨리 묻어 달라고 해. 지금 나도 나를 어떻게 못 할 정도로 광증이 도지려 해서 많이 위험하거든.”

고개를 끄덕인 민재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던 세경은 두꺼운 도깨비불 안에서 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있죠, 우리 영목이에게 너무 섭섭해하지 말아요. 걔가 공부 머리는 없어도 싸움은 곧잘 해. 걔가 택한 방법이 그 전투에 제일 적당한 전술이려니 생각해 줘요.”

“알겠습니다.”

그녀의 손에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흘러나오며 주변 공간을 일그러뜨렸다. 도깨비불을 헤치고 산안개처럼 번진 무형의 기운이 윤의 몸을 감쌌다가 그의 안으로 스며들었다.

“내가 줄 수 있는 게 이게 다네. 이제 햇빛 아래에서 우리 영목이랑 나란히 걸어요.”

윤이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고개를 떨구었다.

“아. 영목이 아닌 다른 여자들이 동윤 씨 곁에 얼쩡대면 언제든 땅 파고 나와서 잡아 없앨 거니까 조신히 지내고.”

이 당부를 끝으로 버티고 버티던 세경이 정신을 놓았다. 깔깔대며 목청 높여 웃는 웃음소리가 비형랑과 함께 멀어졌다. 떠들던 사람이 사라지자 깊은 밤, 텅 빈 연구소에는 기계 돌아가는 소리만 요란했다.

서묵은 몇 번이나 몸을 일으키려다가 포기하고 길게 드러누워 버렸다. 자신의 손만 하염없이 내려다보던 윤이 서묵의 곁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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