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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 부르실 날에-143화 (143/157)

143화

“협조 좀 해. 우리는 연수산 기 좀 꺾으려는 거지, 전쟁을 하자는 건 아냐. 따지고 보면 이게 다 남 실장 잘못이잖아? 총 맞고 멀쩡하게 뛰어다녀서.”

“…….”

“중정 놈들이 대체 몇 발을 쏴야 남 실장을 제압할 수 있을지, 어떻게 죽일 수 있을지 궁금해하는데 어쩌겠어. 협력 관계라는 게 이럴 때 불편하다니까.”

떠드는 놈은 떠들게 두고 윤은 그림자와 함께 등 뒤의 차사들에게 달려들었다. 윤이 구역질이 날 정도로 썩은 내가 진동하는 놈들의 목을 꺾고 날리면 그림자가 크게 입을 벌려 그들을 집어삼켰다.

걸치고 있는 옷이 온통 썩은 피에 젖어 무거울 정도인데도 검은 양복의 남자들은 줄어들지 않았다. 먹고 또 먹어 치우던 그림자마저도 포만감에 지쳐 헛구역질을 할 정도였다.

먹어 치우기를 포기하고 목만 날린 놈들을 바닥에 쌓아 두기 시작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시체의 산과 피의 강이 만들어졌다. 윤은 거친 숨을 가다듬으면서 얼굴에 흐르는 피를 닦았다.

“그만하면 적당히 했다, 남 실장! 걔들한테 넘기기 좋게 적당히 예쁜 데이터 나왔다 싶으면 마무리하고 홍혁주 시체 돌려줄게!”

방 안에서 강림이 입에 손나팔을 대고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또 다른 차사들이 윤을 향해 밀려 올라왔다. 그들은 바닥의 타일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득 널브러진 죽은 차사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밟으며 다가와 윤을 둘러쌌다.

“남 실장 혼자서는 절대 못 이겨.”

“…….”

“속인 거 미안하고, 홍혁주 시체는 곱게 돌려줄게. 들어와.”

“…….”

“아니, 우리가 인간을 피 한 방울 안 나게 잡아 죽이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나? 곱게 갔으니 곱게 장례 치러 주고 싶지 않아? 쉽게 가자니까 왜 이렇게 사람을 피곤하게 해?”

윤은 들은 체도 않고 다가오는 차사들의 목만 노렸다.

“아유……. 헛수고 그만하고 이것 좀 봐 봐. 저승 명부 전용 펜으로 쓴 계약서야.”

그제야 윤은 강림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중정에서 요구하는 적정 데이터의 기록 후에 남동윤에게 홍혁주의 사체를 반환하고 오작성된 사인을 사고사로 수정하기로 함.]

윤이 눈으로 강림의 손가락을 가리켰다. 칫, 혀를 찬 강림은 윤의 팔에 묻은 피를 엄지에 묻혀 자신의 서명 옆에 지장을 찍었다.

“딱 세 시간만 합시다. 중정 놈들한테 제대로 된 데이터 줄 필요 있어?”

계약서를 대충 접어서 명부에 끼워 넣은 강림이 방 안 어딘가를 가리켰다. 윤의 무릎 정도까지 오는 타일 욕조였다. 그 욕조를 둘러싸고 거실 소파 옆에 놓는 장스탠드 같은 형태의 조명이 열 개쯤 반원을 그리며 놓여 있었다.

윤은 그가 가리킨 곳으로 가 정확히 타일 욕조의 한가운데에 섰다.

“어유. 이제 말이 통하는구만.”

강림이 킬킬대며 바닥에 놓인 커다란 버튼을 눌렀다. 스탠드가 일제히 불을 밝혔다. 밝은 빛이 윤의 살에 닿자마자 끔찍한 고통과 함께 살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인공 태양광 조명이래. 과학 기술이란 게 참 무섭지 않아?”

“…….”

“식물 키우는 데 쓰라고 만든 걸 서양 창귀 잡는 쪽으로 머리 굴리는 인간들도 무섭고.”

강림은 시계를 한 번, 윤을 한 번 쳐다보면서 서류에 뭔가를 대충 휘갈겨 쓰고는 탕탕, 발을 굴렀다. 윤의 눈이 반사적으로 강림의 발을 향하자 그는 실없이 웃으면서 손을 저었다.

“별거 아냐. 하는 김에 총알 내구성 테스트도 같이 해 달라는 요청을 이제 봤네, 내가.”

강림이 손짓하자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세 명씩 줄을 맞춰 늘어섰다.

탕, 탕탕, 탕탕탕.

세 명이 각각 총알 열일곱 발씩. 쉰 개가 넘는 총알이 윤의 몸을 파고들었다. 선두에 있던 세 명은 빈 탄창을 빼며 줄의 맨 뒤로 물러났다.

“어차피 협조하기로 한 김에 남 실장 덕 좀 보자. 우리 차사들이 인간 총 다루는 게 영 시원찮아서 연습을 좀 해야 쓰겠더라고.”

한 발 앞으로 나와 윤을 조준하는 두 번째 줄의 차사들을 쳐다보면서 강림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이런. 조명 강도가 최대치인데 내가 옛날 사람이라 이 조명 빛 조절을 할 줄을 모르겄네. 어쩌나.”

윤은 고통을 참으면서 귀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저 밖에서 목 놓아 세경의 이름을 부르는 처녀 귀신의 목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나를 곱게 보관하고 있다가 돌려주기로 한 계약이었다. 신은 약속을 어길 수가 없으니 문 소장님은 반드시 올 거야.’

윤이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탄창을 몇 번째 갈아야 우리 도련님 입에서 비명이 나올까.”

쉴 새 없이 살을 파고드는 총알과 함께 강림의 비웃음이 그의 속을 헤집었다.

* * *

“세경 마님! 세경 마님!!”

처녀 귀신이 세경을 만 번쯤 불렀을 때였다.

“세상에. 지박령이 목청도 좋아라. 서울 창천동에서 지르는 소리가 저어기 공항까지 들립디다? 연구소 때문에 반년이나 해외로 나가 있다가 오늘 막 돌아왔는데 쉬지도 못했다고.”

세경은 투덜대면서도 큼지막한 여행 가방을 덜덜 끌고 처녀 귀신에게로 다가왔다.

“어쩌다 지박령이 되었는지 어디 보자…….”

“보실 것도 없습니다. 제가 지신밟기 하듯 원수 같은 놈이 묻힌 곳을 마구 밟아 그놈의 혼백을 뭉개 버린 탓이에요.”

“미쳤니? 지신밟기 놀이는 양기 넘치는 장정들이 땅을 밟아서 잡귀들을 없애는 거야. 한 서린 처녀 귀신이 시커먼 음기를 뿜으며 밟았으니 지박령이 되어 승천도 못 하는 거고.”

세경은 혀를 끌끌 차면서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었다. 한밤의 가로등 불빛을 담고 있던 새카만 렌즈가 사라지자 한심하다는 듯이 찌푸린 날카로운 눈매가 드러났다.

“그래서,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뭔가요? 들어나 봅시다.”

처녀 귀신은 타는 마음으로 여인숙을 흘끔거리며 세경에게 애원했다.

“도와 달라 부탁을 드리려 합니다. 세경 마님께서는 간절히 부탁드리는 목소리를 내치지 않으신다 들었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저 안에 저를 여기다 버리고 간 놈들을 비롯해 저승 차사들이 득시글합니다.”

세경이 더 깊이 미간을 찡그렸다.

“뭐야. 지금 나한테 저승 차사들 혼내 달라는 거야? 그런 부탁 하려고 혼이 다 닳도록 소리를 질렀어?”

처녀 귀신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너덜너덜해진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저는 한을 다 풀었으니 어찌 되어도 상관없습니다. 남가의 윤이 도련님을 구해 달라 부탁드리려고 불렀어요.”

“윤이 도련님? 연수산 서양 창귀 말인가요?”

“네! 도련님이 저기로 들어가셨다가 나오질 않으세요!”

처녀 귀신이 가리키는 여인숙을 바라본 세경이 온 얼굴을 찌푸렸다.

“아아……. 저기가 그거구나. 중정인지 안기부인지 하는 것들이 지랄 떠는 데.”

건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악취와 한이 얼마나 지독한지, 건물 쪽에 집중한 순간 코가 얼얼할 정도였다. 세경은 손등으로 코를 막으며 진저리를 쳤다. 처녀 귀신이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로 세경에게 매달렸다.

“저 안에 있는 이들은 그냥 경찰, 그냥 인간들이 아니에요. 차사들입니다. 차사들이 여인숙에서 자고 있던 인간들의 몸을 차지하고 사람 행세를 해요.”

“뭐? 차사들이 왜?”

“저는 여기 묶인 지박령이라 여기에서 보이는 것만 말씀드릴 뿐, 저 안의 사정까지는 모릅니다. 차사들이 인간들 틈에 살던 영물들을 잡아 저 안으로 데려간다는 것만 알아요.”

잔뜩 찡그렸던 세경의 얼굴이 온기 하나 없이 차갑게 굳었다. 세경에게 매달리던 처녀 귀신조차도 그녀가 뿜는 냉기와 노기에 질려 슬금슬금 뒤로 물러날 정도였다. 세경은 여인숙을 노려보며 처녀 귀신을 불렀다.

“좀 더 자세히 말해 봐요.”

“오가는 귀신들에게서 듣자 하니 평범한 인간들은 남산 쪽으로 데려가고 영물이나 요물들은 여기로 끌고 오는 모양이었습니다. 도련님도 들어가신 지 한참인데 나오지 않으시는 걸 보면 저 안에서 큰일을 겪고 계시는 게 분명해요.”

“망할. 곱게 보관했다가 영목이에게 돌려줘야 하는데. 그대가 아니었으면 약속을 못 지키고 체면 구길 뻔했네.”

세경이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서 있던 여행 가방을 처녀 귀신 쪽으로 슥 밀었다.

“다녀올 동안 내 가방을 지켜 주면 고맙겠네.”

“네네.”

“이 수고의 대가로 내가 그쪽에게 뭘 해 주면 될까?”

“아니에요. 뭘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어서 들어가서 도련님을 구해 주세요!”

세경이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바쁜 으른이 뭔가 준다 하면 군소리 말고 두 손 내밀고 고맙습니다, 하며 받는 거예요. 뻗대면 안 귀여워.”

여인숙을 쳐다보며 발을 동동 구르던 처녀 귀신은 아주 짧은 고민 끝에 빠른 답을 내놓았다.

“그럼… 염라대왕을 바꿔 주십시오.”

“뭐어?”

“아주 오래전에 강림도령이 도련님과 최영목에게 저주를 걸었습니다. 두 사람은 죽기 전에 잠깐씩만 만나고 헤어지게 될 거라고요.”

세경은 소리 없이 입 모양만으로 거친 욕설을 뱉었다. 그녀의 눈치를 보면서도 처녀 귀신은 빠르게 자신의 요구 사항을 읊었다.

“저 때문입니다. 도련님이 저를 도와주셨다는 이유로 그런 저주를 걸었어요. 제가 그 저주의 원인이라서, 그래서 저도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여튼 저승 새끼들 하는 짓마다… 예전부터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어.”

“그 저주는 염라대왕이 바뀌지 않는 한 유효하다고 하니 부디 도련님을 위해 염라대왕을 바꿔 주세요.”

한참 욕을 하던 세경이 짧게 헛웃음을 지었다.

“뭐 이런 바보 같은 애가 다 있어? 대가를 말하라니까 우리 동윤 씨 도우라는 말을 또 하고 있네?”

“여기 묶인 지박령에게 뭐가 필요하겠어요.”

“어휴. 난 진짜 뽀얗고 착하고 연약한 애들을 너무 귀여워해서 탈이야.”

세경이 팔을 뻗어 처녀 귀신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고작 그것뿐이었는데 새카맣게 변해 너덜대던 처녀 귀신의 몸이 생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감사합니다! 가방 잘 지키고 있을 터이니 도련님을 꼭 구해 주세요!”

세경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쪽 손만 척 들어 올려 인사한 뒤에 여인숙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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