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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 부르실 날에-142화 (142/157)

142화

반응이 없으니 영 재미가 없다며 투덜거리면서도 강림은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아무리 사랑에 눈이 멀어도 그렇지, 거기가 연수산도 아니고 인간 아닌 티를 그렇게 내면 어떻게 해? 저승 차사인 우리도 인간 껍질 쓰고 몸 사리고 있는데.”

“지금 이 이야기와 차사들이 홍혁주 씨를 납치한 게 어떤 관련이 있는지 이해를 못 하겠네요.”

“정말 이해를 못 하겠어? 서양 용을 러시아까지 보내고, 간덩이 부은 쬐끄만 여자를 데려오고, 그걸 미끼 삼아 남 실장을 부른 이유가 바로 이거라니까?”

윤은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만 살짝 기울일 뿐이었다. 헛웃음을 지으며 눈을 가늘게 찌푸린 강림이 그제야 일의 전말을 제대로 실토했다.

“중정 놈들이 나한테 이런 정보를 가져와서 부탁을 하더라고. 처리해 주었으면 하는 불안 요소가 있다면서.”

“…언제부터 저승이 인간들의 뒤처리 전담반이 되셨을까요?”

“뒤처리 전담반이 아니라 공생이지. 근무 환경 괜찮은 곳에서 눈치 안 보고 일하고 싶은 마음은 차사들이나 인간들이나 똑같어.”

윤이 미미하게 눈꼬리를 찌푸렸다.

“중정 놈들이랑 딜을 했거든. 인간 세상은 그쪽에서 알아서 기강 잡고, 우리는 인간 아닌 것들 서열 잡기로.”

윤의 눈썹이 치켜져 올라갔다. 강림이 박수를 치면서 고개를 주억였다.

“이제 좀 마음에 드는 얼굴이네!”

“…….”

“아이고. 이해 좀 해 줍시다. 그쪽이야 먹고살기 좋은 연수산에서 개발국이니 연구소니 하면서 잘 먹고 잘 살았지만, 저승은 일조권이 있나, 조망이 있나? 영 일할 맛이 안 났다니까. 하찮은 망자들의 길잡이 노릇만 하기엔 차사들 같은 고급 인력이 너무 아깝다는 얘기가 계속 나왔기도 하고.”

얼른 혁주만 찾아서 몸을 빼려 했던 윤이 혀를 찼다. 자신이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고 더러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 혼자 이길 수 있을까.’

그림자 조각 덕에 아주 과식을 한 상태라 힘은 차고 넘쳤다.

‘제거하고, 혁주 씨를 찾고, 중정과 거래를 한 물증을 챙긴 다음 서산 대신을 앞세워 저승 윗선을 호출하면 되겠지.’

윤의 눈은 난잡한 책상을 향해 있었다. 책상 꼬라지만 보아도 강림은 정리 정돈이나 기밀문서 은폐에 능숙한 타입은 아닌 듯했다.

윤의 침묵을 패배로 확신했는지, 들뜬 목소리의 강림은 경솔하게 느껴질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쏟아 냈다.

“그래서, 비명횡사하는 인간들이 많은 시대에 편승해서 이승에 한 발 걸치셨다?”

어깨를 으쓱인 강림이 제 양복 주머니를 뒤져 공무원증을 달랑달랑 흔들었다.

“한 발만 걸친 게 아니지. 우린 이제 어엿한 대한민국 국가 기관이라고?”

윤은 흔들리는 작은 증명서를 쳐다보면서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서 실장은 해외로 나돌기 바쁘고, 비형랑은 연구소에만 틀어박혀 있고, 연수산에서 직위와 이름 내세우고 외부와 접촉하러 다니는 건 나와 호우준 정도다. 호우준의 뒤에는 서산 대신이 버티고 있으니 나를 선택한 것 같은데…….’

눈썹을 찌푸린 윤은 결코 입에 담고 싶지 않은 물음을 건넸다.

“저승이 하는 일에 연수산도 협조하라는 겁니까? 그 거래에 응하지 않으면 ‘불안 요소’로 제거하겠다고?”

강림은 부정하지 않았다.

“뭐어, 중정 놈들 얘기랑 정황을 맞춰 보니 내 오랜 궁금증의 답을 찾을 수 있었더라는 소리지.”

“답?”

“우리 도련님이 피 냄새로 반려를 알아차린다는 거.”

“…….”

“남 실장은 피만 안 나면 반려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어딨는지 못 찾아. 그치?”

윤이 저도 모르게 잘근대고 있던 입술 안쪽에서 툭, 피가 터졌다. 강림이 만족스럽게 씨익 입을 늘였다.

“그리고 남 실장 말을 좀 정정해 주자면… 이건 거래가 아니라 명령이야, 명령.”

“하. 명령이라.”

“남 실장이 재미없게 굴면 홍혁주는 남산 쪽으로 넘길 거야. 대학생 애들이 거기서 어떻게 되는지는 알지?”

강림은 지저분한 책상에서 아까 한참 끄적대고 있던 누런 공책을 집어 들었다.

“이게 요즘 쓰는 저승 명부인데 말이야, 홍혁주인가 뭔가 걔 수명은 어차피 오늘까지야. 사기 치는 거 아니다? 이건 아무리 내가 강림이라도 마음대로 쉽게 조작을 할 수가 없어. 태우거나 찢지 않는 이상에야.”

그가 휘리릭 넘겨 보인 공책을 마주한 순간 윤은 아무리 탐색해도 혁주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이유를 깨달았다. 그녀는 이미 한참 전에 남산 쪽으로 빼돌려진 게 분명했다.

‘이놈들은 내 그림자가 급히 사정을 알리러 연수산으로 되돌아올 걸 알고 있었구나. 혁주 씨를 여기로 끌고 들어온 것부터가 눈속임이었어.’

강림이 찰나간 흔들어 보여 준 명부, 홍혁주의 이름 아래 적힌 시간은 오늘 오후 두 시였다.

‘그 사람은 이미 죽었다.’

윤이 헛웃음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인간들한테 넘기는 것보단 그냥 우리 쪽에서 곱게 죽는 게 덜 아프지 않겠어?”

“…….”

“알아들었을 것 같은데 대답이 없네.”

“…….”

“아우, 그래. 인심 썼다. 원래는 홍혁주를 자살자 처리 하려고 했거든? 여기 명부에 이미 다 써 놨는데 말야―”

강림은 일부러 요란스레 종이를 넘겨 한 페이지를 펼쳤다. 윤에게는 보이지 않도록 공책을 펼쳐 든 그는 양복 위 주머니에 꽂아 두었던 펜을 꺼내 책장을 툭툭 두드렸다.

“나한테 협조만 잘하면 자살이 아니라 사고사나 병사 쪽으로 수정해 줄 용의가 있어. 자살귀들이 저승 팔열팔한지옥에서 얼마나 혹독한 벌을 받는지는 알 거니까 긴말은 안 할게.”

“…….”

“뭘 고민을 하나? 죽고 또 죽어도 다시 만날 정도로 애틋한 반려를 저승 명부에 자살귀로 적히게 할 거야? 저승 법도상으로 자살귀 처우가 제일 험하다니까?”

“그 개같은 저승 법도는 들으면 들을수록 참 한결같습니다.”

강림이 흔들다가 책상 위에 대충 던져 놓은 공무원증을 노려보면서 윤은 자신의 그림자를 불러들였다. 입으로는 몇백 년 전부터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저승의 법도를 비난하면서.

“망자의 한을 달래고 공과를 공평히 다루어야 하는 곳이 어쩜 그렇게 거지같이 굴러가는지. 이승이 오죽 힘들었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었느냐 안타까워해 주어도 부족할 판에.”

“자결자는 오류거든. 데이터 오류.”

강림은 썩 기분 나빠 하는 기색도 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서류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그렇잖아. 결재 라인 쭉 타고 올라갔는데 갑자기 시시한 게 오류를 일으킨다……. 그럼 그게 진짜 짜증 난단 말이야. 실무자를 짜증 나게 한 대가는 가볍지가 않아요.”

건물 전체로 퍼져 있던 그림자들이 입구에서 망을 보는 한 조각만 빼고 신속히 주인에게로 되돌아왔다. 강림은 윤의 발밑을 흘끔 쳐다보다가 평범한 공책과 꼭 닮은 저승 명부를 흔들었다.

“할 말은 대충 다 했으니까 이제 할 일 합시다. 응?”

“강림도령.”

“촌스럽게 강림도령이 뭐야. 따라 해 봐, 1국장님.”

“그래요, 1국장님.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연수산에 쌓인 게 많아서 제일 만만한 나를 걸고넘어졌다 이거잖습니까? 서산 대신은 무섭고 서양 용은 곤란하고 비형랑은 어렵고.”

“그렇게 말하면 우리가 되게 시정잡배 같잖아.”

시정잡배보다 더 밑이지.

속으로 핀잔한 윤이 마지막 경고를 던졌다.

“제 연애에 너무 정신이 팔려 계시느라 무섭고 곤란하고 어렵고 혼자 다 하시는 분이 나를 굉장히 과보호하신다는 건 모르셨나 봐요.”

“아, 문세경 소장? 신은 인간 생사에 관여하면 안 되는데 뭐가 걱정이야. 저승 차사씩이나 되어서 괜히 허접스러운 인간 몸에 빙의하고 있겠어?”

왜 인간의 몸을 차지하고 있나 했더니… 혹시 모를 연수산의 신들을 막기 위해서였다. 신은 인간 생사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없으니 차사들이 인간의 몸에 깃들어 있는 이상 그들을 해칠 수 없으리라는 계산이었다.

“미친 용이란 소문이 너무 자자하길래 만에 하나를 위해 입구를 지키는 건 항상 진짜 인간들에게 맡긴다니까.”

강림은 연신 걱정 말라며 킬킬댔다.

‘저승은 인간 아닌 것들의 서열을 다지겠다며 중정과 협상하고 금기까지 이용하고 있다. 나는… 협상이 아니라 본보기로 처형되기 위한 용도야.’

윤의 눈빛이 달라졌다. 어차피 혁주가 죽었다면 더 이상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적힌 명부는 강림을 제거한 뒤에 사인이 명시된 부분만 태워 버리면 될 일이었다. 윤은 그림자의 조각을 넓게 퍼뜨려 어두운 방 안으로 들여보냈다.

“들어오라는 남 실장은 거기 서 있고 왜 그림자만 밀어 보내고 그래.”

“걔들이 불량 식품을 좋아해서요.”

크게 코웃음 친 강림이 책상을 탕탕! 두 번 두드렸다.

“그림자 따위가 나한테 입이나 댈 수 있겠어? 우리 차사들이 남 실장한테 기스 내는 게 더 빠르지.”

문턱 바로 앞에 서 있던 윤이 흘끗 뒤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밖에 아무도 없습니다.”

“뭐?”

윤은 검지를 뻗어 책상을 둘러싼 그림자를 가리켰다.

“나는 입이 짧아서 싸구려는 안 먹는데 내 그림자들은 음식 안 가려요.”

“…서양 창귀 그림자 따위가 우리 차사들을 먹었다고?”

“그렇게 됐습니다. 강림도령께서 국내 서열 잡기에만 급급해서 서양 창귀 습성은 잘 모르셨나 봐요.”

윤의 눈이 샛노랗게 물들었다. 시종 느긋하던 강림마저 움찔 뒤로 물러났을 정도로 사나운 안광이었다.

“저승이 어떤 식으로 사람 등쳐 먹는지 잘 배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미 망자가 된 사람을 빌미로 협박하는 건 상도의에 어긋나지 않나?”

“에이, 뭐야. 아까 명부에서 봤어? 동체 시력이 꽤 좋네.”

멋쩍게 웃은 강림이 보란 듯이 공책을 쫙 펼쳐서 윤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자살이라 적힌 부분을 툭툭 두드렸다.

“이거 수정해 줄게. 내가 그쪽 기준으로 나쁜 새끼긴 하지만 일단 저승 차사야. 뱉은 말은 지킬 수밖에 없단 거 몰라? 속임수는 써도 거짓말은 잘 못한다고.”

“불량 식품 좋아하는 내 그림자들에게 강림 차사 맛을 보여 준 뒤에 그놈의 명부를 태워 버리려고요. 명부가 없으면 자살인지 병사인지 저승에서도 알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아이구. 이래서 서로 간의 신뢰가 참 중요한 건데. 내가 실수했구만.”

무언가 대꾸하려던 윤이 이마를 찌푸렸다. 여인숙 문 앞에서 망을 보고 있던 그림자가 침입자를 알렸기 때문이었다. 오와 열을 맞춘 남자들 한 무리가 3층을 향해 올라오는 것이, 그들이 내뿜는 썩은 냄새가 온 피부로 느껴졌다.

윤의 표정을 보면서 강림이 신나게 웃어 젖혔다.

“놀랐나? 인간 몸뚱이 구하기 참 쉬운 세상이잖아. 비명횡사하는 이들이 많으니 곳곳에 차사들 또한 차고 넘치고. 인력 수급이야 쉽지.”

건물 안을 가득 채우며 꾸역꾸역 밀고 들어온 차사들이 문 앞에 버티고 선 윤의 뒤에 바짝 다가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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