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아직도 여기에 있습니까?”
“은혜를 갚고자 기다렸습니다.”
“은혜라 할 만한 게…….”
윤이 고개를 젓자 처녀 귀신도 똑같이 고개를 저었다.
“도련님께서는 제 한을 풀 수 있는 방법을 일러 주셨잖습니까. 제 원수의 혼을 밟아 뭉갤 수 있는 방법을요.”
그는 슬며시 미간을 구기며 은혜를 입었다 주장하는 처녀 귀신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이제 완전한 지박령이 되어 있었다.
“승천하지 못하고 지박령이 된 걸 보면 내가 그대에게 은혜가 아닌 화를 입힌 것 같은데.”
처녀 귀신이 재차 고개를 저었다.
“도련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차사들이 저를 여기 버렸어요. 저승 법을 너그러이 적용한다면 승천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겠다면서요.”
“차사들이?”
“네. 그들이 저 안에 있습니다.”
처녀 귀신은 윤이 그림자를 밀어 넣은 그 건물을 가리켰다.
“원래는 이 동네에서 제일 저렴한 여인숙이었는데, 달포쯤 전에 저승 차사들 한 떼가 저기로 들어갔어요. 그 뒤로 저기에서 살아 나온 인간을 못 보았습니다.”
윤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저승 놈들이 저 거지 같은 건물을 점령할 이유가 없는데.’
이승과 저승은 엄연히 구분되어 있었다. 차사들의 임무는 죽은 사람의 혼을 거두어 저승으로 안내하는 것. 그나마도 대부분의 혼백은 차사들이 데리러 가기 전에 알아서 귀문을 향해 떠난다.
‘차사들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안내하는 역할이 전부이니 굳이 공간을 차지할 이유가 없어.’
생각하면 할수록 차사들이 건물을 차지했다는 처녀 귀신의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
‘뭐든지 간에 뒤 구리고 위험한 짓을 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겠네.’
이상하든 위험하든 혁주가 저 안에 있으니 들어가야만 했다. 돌아서는 그를 처녀 귀신이 다시 불러 세웠다.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아직 해도 지지 않았잖아요. 도련님 혼자 들어가시면 절대 다시 나오지 못하실 거여요.”
울긋불긋 수포가 잡힌 피부를 내려다보며 잠시 고민하던 윤은 처녀 귀신에게 한 가지를 부탁했다.
“내가 동틀 때까지도 나오지 못하면 문 소장님… 세경 마님을 불러 주십시오.”
“세경 마님은 살짝 미쳐 가신다는 용 아닙니까? 저 같은 지박령이 부른다고 오실 분이 아니신데요?”
“간절히 부르면 아마 닿을 겁니다. 그분은 도와 달라는 여인들의 간청에 매우 약하시거든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 판단한 윤은 처녀 귀신이 애타게 말리는 소리에도 돌아보지 않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여인숙이라면서 조명 하나 없는 어둑한 실내로 들어서자마자 윤은 인상을 찌푸렸다.
‘썩은 피 냄새.’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숨이 붙어 있는데, 움직이는 이들에게서 부패한 송장의 냄새가 났다. 벽 뒤에 몸을 붙이고 돌아다니는 인간들의 기척에 귀를 기울이면서 윤은 눈에 한껏 힘을 주었다.
그럴싸한 양복 차림을 한 두 남자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복도를 걷고 있었다. 언뜻 보면 특별할 것 없는 인간이지만 가는눈을 뜨니 그들의 몸을 칭칭 감은 검은 아지랑이가 보였다.
‘살아 있는 인간의 몸에 살아 있지 않은 것이 씌었어. 빙의하기 좋아하는 흔한 잡귀들이 아니라 훨씬 대단한 것에 씌어 인간의 몸이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는 건가…….’
윤은 복도를 걷는 사내들을 쳐다보면서 처녀 귀신이 했던 말을 되새겼다. 정황상 저승 차사들이 여인숙 안에 있던 사람들의 몸을 차지했다 보는 게 정확한데… 그렇다 치면 차사들에게 이로울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리 신력 높은 저승 차사라도 인간의 몸에 갇히면 육신의 한계에 영향을 받게 되니까.
윤의 눈이 남자들의 그림자를 향했다. 새카만 색이었던 그림자는 가장자리부터 조금씩 흐릿해지기 시작했다가 그들이 의식하지도 못한 순간에 엷은 회색으로 뒤덮였다.
‘차사들씩이나 되어서 서양 창귀의 그림자가 몰래 숨어들어 온 것도, 제 그림자가 먹혀 버렸다는 것도 모를 줄이야.’
그는 혀를 차면서 제일 위험한 기운이 느껴지는 3층의 방으로 향했다.
그늘에 젖어 든 것처럼 소리 없이 움직인 윤이 목표했던 방 앞에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렸다. 철제 책상에 앉아 누런 공책에 뭔가를 휘갈겨 적고 있던 남자가 열린 문 안쪽에서 눈만 들어 그를 맞이했다.
“아이구. 우리 구면인데. 이따위 몸에 있으니까 우리 남 실장이 못 알아보네.”
윤은 대꾸도 않고 가는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아래층에서 보았던 것들과는 시커먼 기운의 위세부터 다르다는 것 정도만 알 수 있을 뿐, 대체 저 몸뚱이 안에 누가 들어간 것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었다.
책상에 앉은 중년 남자는 사람 좋게 허허 웃으면서 코끝에 걸린 사각 안경을 밀어 올렸다.
“나 강림이야. 우리 예전에 연수산에서 만났었잖아, 왜.”
“아. 발 잘못 굴렀다가 서산 대신께 부하들 다 잡아먹혔던 그 강림도령.”
중년 남자가 이마에 핏대를 세우고 웃었다.
“우리 도련님이 시비 터는 게 많이 느셨네. 깝치는 서양 이무기는 해외로 보내 버리고 만만한 남 실장은 한입에 찜 쪄 먹으려고 했는데.”
전날 서묵에게 발신인 불명의 제보가 날아들었다. 사할린으로 강제 동원 되었던 조선인의 명단 일부가 발견되었고, 그 명단에 이웅헌이라는 이름이 있다고.
‘서묵이 이웅헌 본인인지 동명이인인지 일단 가 보겠다며 자리를 비웠으니 며칠은 못 돌아올 거라 판단한 거군. 서양 용을 치워 두고 내 정인을 납치해서 날 끌어 들일 이유가 뭘까.’
고민해 봤자 답이 나올 문제가 아니었다. 윤은 거의 정상으로 돌아온 자신의 얼굴과 아직 나아지려면 한참인 손을 내려다보면서 빈정댔다.
“서 실장님 하나 치우려던 것치고는 꽤 괜찮은 정보를 주셨습니다?”
“어차피 못 찾아낼 망자 이름 하나 던져 주고 안전성을 얻었으면 남는 장사지. 알다시피 우리 차사들이 묵인지 무기인지 그 새끼랑 상성이 안 좋잖아.”
“서 실장님과 상성 좋은 사람이 드물죠.”
강림이 그건 그렇다며 낄낄대고 웃었다. 윤은 그 웃음소리를 유난히 불쾌해하면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긴말은 됐고, 내게 원하는 게 뭡니까.”
“뻔하지, 뭐. 그냥 작은 부탁 하나 들어 달라는 거야. 그러면 나는 홍혁주를 남 실장에게 돌려주는 거지.”
“강림도령이 직접 지휘하는 짓치고는 너무 구질구질하네요.”
“나도 이렇게 치사스러운 건 안 하고 싶은데… 어쩌겠어,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지.”
윤의 속눈썹이 미미하게 꿈틀거렸다.
‘위라면… 염라일까, 아니면 그보다 더 위의 지장일까.’
처음보다 더 불쾌해진 윤이 주머니에 손을 꽂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서로 썩 오래 말 섞고 싶은 기분 아닐 테니까 얼른 원하는 거 주고받읍시다.”
“왜? 나는 남 실장 오랜만에 보니 반갑고 좋고 길게 얘기하고 싶은데.”
강림은 느물대며 자신이 앉아 있는 책상에 쌓인 갈색 봉투들을 가리켰다.
“이것 좀 봐, 이거. 이게 다 자원 낭비라고. 이딴 증거 아무리 보내 봤자 테레비며 신문이며, 걔들이 실어 주겠어? 홍혁주 그거… 누가 인쇄소집 딸 아니랄까 봐 뭘 그렇게 찍어 내고 뭔 소포들을 그렇게 보내는지.”
윤은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지난 몇백 년간 서묵과 세경의 도발에 하도 단련이 되어 이제 이런 시비는 가소로울 정도였다.
“그 자원 낭비가 홍혁주 씨를 이딴 데로 끌고 온 이유라고?”
“중요한 문제잖아. 환경 보호.”
“시간 절약도 아주 중요한 문제죠.”
나직이 그를 재촉하면서 윤은 그림자들에게 신호를 주었다. 조용히 차사들의 그림자를 잠식했던 그림자 조각들이 한입에 차사들의 본체를 집어삼켰다.
‘차사의 영체 그대로였다면 그림자 조각 따위가 덤비는 일 자체가 어림도 없었을 거야. 허약한 인간에게 빙의해서 그 인간의 몸이 산 채로 부패해 가는 상태였기에 먹어치울 수 있는 거지.’
왜 이런 불리한 방식을 취했을까. 여인숙 곳곳에 포진한 차사들을 계획대로 제거할수록 윤의 마음속에는 해결되지 않는 의문과 불안이 커져 갔다.
그의 불안과는 무관하게 그림자가 차사들을 착실히 먹어 치운 덕에 녹고 진물 나던 윤의 피부가 빠르게 회복되었다. 윤은 눈을 내리깔며 강림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자연스럽게 뒷짐을 지고 손을 숨겼다.
그리 오래지 않아 그림자 조각들은 차사들을 남김없이 집어삼켰다. 방해꾼을 모두 제거한 그림자의 조각들이 혁주를 찾아 사방으로 미끄러졌다.
윤은 그림자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책상에 앉은 중년 남자를 쳐다보았다. 강림이 기다렸다는 듯이 윤에게 물었다.
“남 실장. 나 뭐 하나만 물어봅시다.”
“그러시죠.”
“남 실장은 환생한 반려를 어떻게 그렇게 찰떡같이 찾아내? 원래 환생하고 다시 만나고 알아본다는 게 생각만큼 쉽지가 않은데 말이야.”
강림이 능구렁이 같은 말투로 물으며 턱을 괴었다. 윤은 눈썹만 쓱 들어 올렸다.
“저승이 꽤 한가하신 모양입니다. 나 같은 일개 서양 창귀 연애나 훔쳐보시고.”
“이게 다 우리 남 실장이 특별 관리 대상자로 지정된 덕이지.”
“제가 저승의 특별 관리 대상자였습니까? 언제부터?”
“서양 이무기랑 친하게 붙어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알다시피 우리 저승이 서묵인지 무기인지랑 쌓인 게 많잖아.”
안 친하다고 부정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른 윤이 그림자의 움직임을 살폈다. 잠식하고 먹기를 반복하며 열심히 찾고 있는데도 혁주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턱을 괴고 빙글대던 강림이 다리를 바꿔 꼬면서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았다.
“비늘 달린 놈 얘기는 됐고. 우리가 어디까지 말했더라? 아, 환생한 상대를 어떻게 알아보냐는 거.”
윤이 등 뒤로 돌려 잡은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강림은 힘줄 돋은 그의 주먹이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킬킬 비웃으면서 자신을 가리켰다.
“내가 걸었던 저주 기억하지? 남 실장이랑 그 여자가 죽기 전에만 잠깐 만날 수 있다고 했었잖아. 난 그래서 내 저주가 둘을 만나게 도와주나, 했단 말이야?”
윤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강림을 직시했다. 강림이 코끝까지 흘러내린 안경을 밀어 올리며 혀를 찼다.
“남 실장, 지난번 소요 사태 때에 현장에서 홍혁주를 구해 왔지?”
“…….”
“이 사람아, 목격자만 수십 명이에요. 총알을 아무리 맞아도 멀쩡하게 뛰어다니는 놈이 있대나 뭐라나.”
윤은 동요를 내보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마음속으로 스스로에게 갖은 욕을 퍼부었다. 연수산 신들에게 인간인 척하라고 온갖 잔소리를 하면서 정작 흠 잡힌 것은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