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내가 혁주 씨를 구하지 말았어야 했단 말로 들립니다. 나와 한 약속이 후회스럽다고도 들리고.”
“그냥… 지쳐요. 문을 부수고 들어가면 곧장 마루에 올라 대들보에 칼끝을 들이밀 수 있을 줄 알았다니까. 대문 너머, 마당 뚫고 지나가는 데에만 한세월일 줄 누가 알았나.”
혁주가 노을을 등지고 어깨를 으쓱였다. 길게 늘어뜨린 긴 머리카락이 하루의 마지막 빛을 묻히고 찰랑였다. 윤은 차마 혁주의 얼굴을 마주 볼 자신이 없어 그 머리카락에만 시선을 두고 억눌린 목소리로 물었다.
“나한테 이렇게 화내는 건 너무 잔인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들린다면 미안한데, 난 그냥 내 신세를 한탄하는 거예요.”
“…….”
“당신이 미련스럽게 날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걸 뻔히 아는데 내깟 게 감히 어떻게 화를 내겠어요. 화를 못 내겠어서, 그래서 더 미치는 거지.”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마당을 가로질러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는 지옥 같던 그 거리에서 나만 살아 나온 게 싫어요. 당신 덕에 혼자 목숨을 건진 것도, 저 밖이 어떤 꼴인지 모르는 척 굴면서 된장찌개가 먹고 싶다는 생각이나 하는 내 머릿속도 환멸스러워요. 아무렇지 않은 듯 살다가도 최루탄 냄새를 닮은 매캐한 냄새가 풍길 때마다 죄책감이 몰려오니까.”
혁주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간 윤이 들고 있던 것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식재료가 바스락대는 소리가 천둥 치는 소리처럼 들렸다.
“어떤 날은 유리창이 터지고, 신발이 날아가고, 비명 소리, 달리는 소리, 던지고 맞고 터지는 소리가 들려요. 살았으면 죽은 사람 몫까지 해야지 노닥대기 부끄럽지 않느냐는 호통도 들려요.”
혁주는 물이 똑똑 떨어지는 싱크대의 수전을, 윤은 혁주를 바라보았다.
“내가 보고 듣고 기록하고도 사람들에게 알리지 못한 수천 개의 단어들이 매일 밤 나를 짓눌러요. 그날, 그 거리에서 나와 같이 총 맞아 쓰러지던 가엾은 사람들이 왜 너만 살았느냐 손가락질하는 꿈이.”
혁주는 수도꼭지를 꾸욱 비틀며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거기서 죽은 사람들, 앞으로 죽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소중해요. 소중한 만큼 미안하고.”
“나는요. 혁주 씨에게 난 소중하지도, 불쌍하지도 않습니까? 나도 아프고 힘들고 벅차고 외로운데. 나는―”
“당신은 사람이 아니잖아!”
버럭 소리친 혁주가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윤이 상처 입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래요. 저 밖에서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은… 사람이고, 나는 뭘 해도 안 죽는 괴물이지.”
윤이 헛웃음 짓자 그의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나왔다. 혁주는 눈물을 흘리는 그를 바라보면서 달궈진 석탄처럼 가슴속을 까맣게 태우던 말을 토해 냈다.
“너무 힘들면 이제 날 그만 기다려도 돼요.”
“뭐라고요?”
“좋은 날에 이름 불러 준다던 약속, 그깟 게 뭐라고 미련스럽게 붙들고 있어. 사람 미안하게.”
“나… 나는 그 약속 하나만 붙들고 사는―”
“네, 그 짓, 그거 그만하라고. 이제 좀 질리고 부담스러워질 것 같으니까.”
가라앉다 못해 메마른 눈을 한 여자와 흐르는 눈물로 온통 젖어 버린 남자가 식탁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당신이 나를 기다리는 거… 너무 오래 해 왔던 일이라 습관처럼 그러고 있는 거란 생각은 안 해 봤어요? 이제 와서 그만두면 지난 세월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버릴 게 무서워서 관성처럼 붙들고 있는 거란 생각은 안 해요?”
물러날 생각 없는 그녀를 바라보며 윤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렇게 말로 할퀴면 아무리 나라도 다칩니다. 난 죽지 않는 괴물이지 고통을 못 느끼는 괴물은 아니에요.”
“…….”
“가고 싶으면 가도 됩니다.”
윤은 자신의 정인을 너무 잘 알았다. 그래서 지금 이 모진 말들이 저와 정을 떼려고 하는 소리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저 밖에 사는 사람들이 눈에 밟혀서, 미안해서, 저 밖과 다른 세상마냥 평화로운 여기가 야속해서.
어떤 마음인지, 왜 그러는지 알면서도 그녀가 던지는 말 하나하나가 윤의 가슴에 낫지 않을 상처로 박혔다.
“나는 가지 말라고 붙잡은 적 한 번도 없습니다. 미치도록, 죽도록 잡고 싶어도 어금니가 다 으스러지도록 참으면서 보냈어요. 가서 원하는 대로 하시다가 돌아와 달라고만 애원했지.”
윤은 식탁 위에 늘어진 봉지를 다시 집어 들고 재료들을 싱크대 위로 가지런히 늘어놓았다.
“당신에겐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는 것, 그 목표를 위해선 내가 두 번째일 수 있다는 것 모두 이해합니다.”
잘게 떨리는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서러움이 선명히 어렸다.
“서로 손을 잡고, 느릿느릿 그늘을 골라 걸으며 장을 보고, 같은 식탁에 마주 앉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 이마를 맞댄 채 잠이 드는 일상이 내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순간이지만… 당신과 내 마음의 무게가 같지 않다는 건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아요. 굳이 말로 일깨워 줄 필요도 없을 정도로 사무치게 압니다.”
가지런히 늘어놓은 식재료를 쳐다보다가 그는 팔을 쭉 뻗어 찬장을 열었다. 그리고 역시 가지런히 그릇이 정돈된 수납장의 깊은 구석에서 예쁜 핸드백을 꺼내 혁주에게 내밀었다.
“카메라와 그 안에 있던 필름, 새 신분증과 호텔의 키, 돈 조금이 들어 있습니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던 것처럼 챙겨 둔 가방이었다. 혁주가 멀거니 서 있자 윤은 직접 그녀의 어깨에 가방끈을 걸어 주었다.
“잡지 않을 테니까 그냥… 더 이상 모진 말 하지 말고 가세요. 곧 손님이 오실 시간이라 멀리 배웅은 못 할 것 같습니다.”
혁주가 손가락이 희게 질리도록 핸드백의 끈을 말아 쥐고 저가 뱉은 말을 후회하는 사이, 그는 등을 돌리고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만일 무슨 일이 생기면 내 이름을 파세요. 나는 당신 디딤돌이라도 되고 싶어서 거창한 직위 자처하며 온 사방에 이름 팔고 온갖 잡일을 다 하는 중이니까… 얼마든 이용하고 써먹어요. 필요하다면.”
“…미안해요. 갈게요.”
혁주는 서울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싣고 창에 얼굴을 기댔다. 차가운 창문에 얼굴을 대고 이마를 식히니 윤에게 뱉은 말들이 모조리 그녀에게 되돌아와 푹푹 박혔다.
“돌아와 달라고, 다시 만나자고… 안 했어.”
그는 이제 그녀에게 돌아와 달라 부탁하지 않는다. 이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은 순간, 내내 말라 있던 혁주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 * *
서울로 돌아온 뒤의 일상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혁주는 아버지가 하던 인쇄소에서 사복 경찰의 눈을 피해 전단지를 만들고, 성당 지하의 창고에서 시위에 쓰일 현수막을 준비했다. 현장의 참상이 생생하게 담긴 사진들로 비밀스러운 사진전을 열기도 했다. 윤이 챙겨 준 카메라 속 사진들이 큰 도움이 되었다.
어느 날은 곧 내일이라도 이 모든 일이 다 해결될 것 같았고, 어느 날은 실재하지 않는 총소리에 시달리며 날이 밝도록 몸을 웅크리고 떨었다.
어깨가 유난히 넓고 키가 큰 남자. 그 남자에게서 나던 비 오는 날의 숲 같은 향기. 노을 지는 골목에서 함께 손을 잡고 걸었던 순간. 혁주는 그런 것을 그리워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윤전기를 돌렸다.
‘많이 섭섭해하고 있겠지. 이번 주말에는 꼭 다시 만나러 가야겠다.’
아침 일찍 벼르고 벼르던 수십 통의 소포를 보낸 혁주가 성당에 들러 짧은 고해를 하고 나왔을 때였다. 무언가 아주 잘못되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달릴까. 달리면 도망칠 수 있을까.’
철컥.
유난히 예민해진 그녀의 청각이 등 뒤의 골목에서 들려온 쇳소리를 잡아냈다. 혁주는 흘끗 골목 쪽을 돌아보았다. 인적 드문 골목에서 건장한 남자 넷이 발소리도 없이 걸어 나왔다. 남자들이 쥐고 있는 총의 총구는 모두 그녀를 겨누고 있었다.
‘침착하자. 지금 나는 다른 신분으로 살고 있고, 이미 소포를 다 보내서 잡혀 봤자 걸릴 만한 물건도 없어.’
혁주는 별일 없을 거라고 수십 번을 반복하면서 침착하게 걸음을 옮겼다. 검은 양복을 걸친 남자가 맞은편 책방 모퉁이를 돌아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우리랑 같이 좀 가야겠습니다.”
“…왜 이러세요?”
“왜인지 맞혀 봐요. 연수산 때문일까, 아니면 성당 들르기 전에 보낸 소포 때문일까.”
딱딱하고 차가운 금속이 등 뒤에 닿았다. 혁주는 어린아이가 손가락으로 친구를 찌르듯이 옆구리를 쿡쿡 찔러 대는 총구에 밀려 성당의 대각선 너머에 있는 허름한 여인숙으로 걸었다.
그녀가 반항 한번 못 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선 찰나, 혁주의 그림자 모서리가 살짝 떨어져 나와 서대문 쪽을 향해 미끄러졌다.
* * *
나무 그림자와 도로 포석의 그림자까지 길가에 널린 온갖 물건들의 그림자에 깃들어 연수산까지 되돌아온 회색 조각이 깊이 잠든 윤의 주변을 맴돌았다. 시간은 아직 한낮. 그림자로서는 주인을 깨우기는커녕 이불을 들썩이고 머리카락을 간질이는 것 정도가 최선이었다.
다행히도 윤은 예민한 감각으로 그림자의 그 부산스러움을 기민하게 눈치채고 평소보다 훨씬 이른 오후 세 시에, 아직 노을조차 드리우지 않았을 때에 눈을 떴다.
‘무슨 일이지.’
윤은 너무 이른 시간이라 좀처럼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피로에 전 눈이 금세 안달복달하는 제 그림자 조각을 발견했다. 혁주를 떠나보낼 때에 그녀의 그림자에 함께 묻혀 보낸 조각이었다.
‘잡혀갔나.’
그의 생각을 읽은 그림자의 조각이 있는 힘껏 동그라미를 그렸다. 윤은 인상을 구기며 달려 나가 차에 올랐다. 선명한 햇빛이 그의 살갗에 붉은 수포를 만들었다. 살에 물집이 잡히고 진물이 터져도 개의치 않고 내달린 덕에 윤은 그림자가 이끄는 곳까지 순식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윤은 여기저기 외벽이 벗겨지고 금이 간 칙칙한 베이지색 건물 안으로 자신의 그림자를 모조리 밀어 보냈다. 태양이 모든 물건의 그림자를 길게 늘이는 시간에 오로지 그의 발밑만 공백이었다.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며 “이러니 괴물이지.” 하고 자조한 윤이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이었다.
“도련님!”
누군가 그를 불렀다. 윤은 건물 안쪽으로 오감을 곤두세우면서 눈만 돌려 소리가 들려온 쪽을 쳐다보았다. 그곳에서는 창천 물레방앗간의 처녀 귀신이 두 손을 흔들며 그를 불러 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