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고마우시다면 제가 돌아올 때까지 저를 대신해 다른 분들을 잘 정돈해 주십시오.”
“정돈? 내가? 어떻게?”
“연수산에 들어와서 무엇을 하실 수 있을지, 이곳의 발전에 무엇을 이바지할 수 있을지 분류하여 줄을 세워 주세요.”
“뭐어?”
학 영물뿐만이 아니라 모여 있던 다른 영물들이 죄다 웅성거리며 술렁였다. 윤은 그들을 휘 둘러보면서 건조하게 말했다.
“지금 연수산에 자리 잡고 계신 신들께서도 다 저마다 맡은 일을 하고 계십니다. 내로라하던 명산의 산신들과 고택을 지키시던 가택신들까지 모두 다.”
신도 일하는데 영물들이 거저먹을 생각으로 왔느냐는 책망이었다. 구시렁대던 영물들이 단번에 입을 꾹 다물었다.
“연수산이라고 먹을 것, 쉴 곳이 무한하지 않습니다. 서산 대신마저도 연수산 안을 정돈하시느라 여력이 없으실 정도인데 아무것도 하지 않으실 분들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대충 수긍하는 눈치이자 윤도 말투를 살짝 누그러뜨렸다.
“갑자기 많은 이들이 몰려들었기에 농업과 건설에 많은 인력이 필요합니다.”
“나 유자나무 영물이야, 나!”
“좋습니다. 부모 잃은 어린아이들이 적지 않아 학교에 도움 줄 분들도 필요하고요.”
“도령, 우리는 규장각의 장서들이라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모쪼록 제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도움 주실 수 있는 분들이 스스로 할 일을 찾아 주신다면 더 좋겠지요.”
영물들에게 일을 떠맡기고 돌아선 윤은 조금의 고민도 없이 서산 대신의 집으로 향했다.
“서산 대신께 뵙기를 청합니다.”
너른 정원에서 잎담배를 말아 물고 있던 서산 대신이 대문을 열며 인상을 찌푸렸다.
“볼일 있으면 그냥 들어오래도 쟤는 꼭 문밖에서 저런다.”
“저는 서양 창귀라 허락해 주시지 않으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 집엔 언제든 들어오라고 몇 번이나 얘기하잖니.”
별다른 대답 없이 고개만 꾸벅 숙여 인사한 윤이 다짜고짜 서산 대신에게 물었다.
“행복하십니까?”
“갑자기……?”
“평생 곁에서 함께 해로하는 반려가 계시니 행복하신가 여쭙고 있는 겁니다.”
“아, 그런 부분은 더할 나위 없지.”
눈을 동그랗게 떴던 서산 대신이 흰 연기를 주욱 뿜으면서 피식 웃었다. 윤은 활짝 열린 대문을 사이에 두고 그녀를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그럼 제가 서산 대신의 행복에 다소의 지분이 있다 주장해도 괜찮겠습니까?”
“얘, 네가 그렇게 주고받고 계산하고 따지니 내가 너를 온전히 내 산에 속한 사람으로 못 받아들이는 거란다.”
서산 대신은 지금처럼 선을 긋고 넘어오지 않는 윤의 모습이 서운하기도, 괘씸하기도 하여 그의 얼굴로 담배 연기를 훅 내뿜었다. 윤은 한번 콜록이지도 않고 침착하게 그녀의 대답을 청했다.
“외람되오나, 방금의 말씀은 제가 여쭈었던 물음의 답이 아닙니다.”
“하……. 그래. 네 지분이 있고말고.”
“그럼 지분 행사에 협조 부탁드리겠습니다.”
“알았으니까 들어와서 말하렴.”
윤은 그제야 서산 대신의 집 대문을 넘어 들어갔다.
“조선이 대한 제국으로, 대한 제국이 대한민국으로, 전쟁이 터졌다가, 나라가 반으로 갈라지고, 대통령이 바뀌고 또 바뀌었습니다.”
“내가 그걸 모를 것 같아 하는 말은 아닐 테고.”
“그럼 나라의 기운이 뿌리부터 흔들리며 동산 고신(古神), 북산 천신, 남해 수신이 죄다 고사해 가는 중이라는 것도 아시겠네요.”
“연약한 것들 같으니.”
그녀가 코웃음 치자 이른 여름의 물기 젖은 공기가 한층 더 무거워졌다. 윤은 큰 소나기가 내릴 것 같은 하늘을 흘끗 올려다보다가 본론을 꺼냈다.
“삼팔선 아래의 행정 구역을 정비하면서 연수산 전체가 모원도라는 이름으로 분류된 지도 벌써 3년입니다.”
“그 이상한 이름표 붙은 게 벌써 3년이나 지났어?”
“그렇습니다. 제가 연수산에 버젓한 기관이 필요하다 의견을 올린 지도 3년째고요.”
서산 대신은 대답 없이 담배만 깊이 빨아들였다.
“온갖 신이며 영물들이 죄다 모여드는 바람에 이곳이 사실상 인간 아닌 것들의 수도나 마찬가지잖습니까? 서산 대신께서 인간 아닌 것들의 정상에 서 주셨으면 합니다. 제대로 된 질서 유지를 위해서라도요.”
그녀는 피식거리며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나는 내 영역만 평화로우면 그걸로 족하다. 하찮은 인간 세상의 일에 나서고 싶지 않아.”
“잘 알지요. 제가 행복하시냐 여쭈며 건방이라도 떨지 않으면 서산 대신께서는 영영 안 움직이실 분임 또한 알고요. 알기에 무례를 무릅쓰고 강권드리는 겁니다.”
서산 대신이 내뿜은 푸릇한 담배 연기가 습한 공기를 타고 별이 가득한 하늘로 높이 솟아올랐다.
“세상이 변했습니다. 신과 귀신과 요괴와 영물 들이 당연히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여기던 시절은 완전히 지나가 버렸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인간의 세상에서 당연하지 않아요. 생소하고 위협적인 존재이지요.”
“슬픈 일이지.”
“아뇨. 위태로운 일입니다. 인간들은 달갑지 않은 상대, 자신들이 믿고 지켜 왔던 것을 깨부수려는 상대를 꾸준히 제거해 왔음을 기억해 주세요.”
“하…….”
“한때는 동학군이었고, 독립군이었던 제거 대상이 이제는 갓 스물이 된 학생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서산 대신은 윤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 것처럼 자신이 만들어 낸 연기가 검은 밤하늘에 얇은 선을 그리는 것만 쳐다보았다.
“이대로라면 저들은 머지않아 신과 영물 또한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여길 겁니다. 그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는 이제부터 우리도 인간들처럼, 인간들 틈에 섞여 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러렴. 전국에 퍼져 살던 인간 아닌 것들이 연수산에 드글거리니 네가 돌아다니면서 그네들에게 직접 그러라고 시키면 되겠구나.”
윤이 고개를 저었다.
“서산 대신께서 직접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전권을 위임할 테니 네가 하라니까? 지금도 신들에게 땅 다져라, 물길 내라, 테레비나 사진에 안 찍히게 해라 온갖 잔소리 다 하고 다니면서 뭘.”
“제가 하는 말은 연수산 안의 어떤 신에게도 진지하게 닿지 않습니다.”
서산 대신이 허리를 짚고 비스듬히 섰다. 윤은 반듯하게 뒷짐을 지고 그녀의 불만을 그대로 받았다.
“저는 연수산 출신도 아니고 신도 아닙니다. 서양 창귀에게 물려 흡혈귀가 되었을 뿐인 인간이지요.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은 그들에게 잔소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너 대신 내가 더부살이하러 온 놈들을 모아 놓고 잔뜩 인상 쓰라고?”
파핫, 화통한 웃음소리가 밤하늘 높이 퍼졌다.
“내가 앞으로는 인간인 척하라, 인간 세상에 어울려 살 방법을 강구하라 강요하면… 저들이 군소리 없이 깨갱 할 거란 소리군.”
“정확합니다.”
“구경만 하지 말고 서산 대신 이름값 하라는 소리를 참 예의 바르게도 하는구나.”
마지막으로 길게 연기를 내뱉은 그녀는 다음 담배를 또 꺼내 들었다. 윤의 눈이 푸릇하게 피어올라 희게 변했다가 흔적 없이 퍼지는 연기를 향했다.
신이 뿜는 연기에는 신의 힘이 담겨 있다. 서산 대신은 세상이 혼탁해질수록 피워 대는 담배의 양을 늘렸다. 그녀가 이렇게 쉴 새 없이 정화하고 기운을 내뿜어도 온전하게 지킬 수 있는 지역은 고작해야 연수산 정도였다. 윤은 그것이 걱정스러우면서도 슬펐다.
“얘, 이렇게 열심으로 뛰어다니면서 네가 얻는 게 뭐니?”
서산 대신이 저가 만들어 낸 연기를 바라보는 윤을 직시하며 물었다. 윤은 그제야 허공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어 눈을 그녀에게 향했다.
“신과 영물이 불안해하면 지기가 흐트러집니다. 이렇게 연수산에서부터라도 체계를 갖추고 불안 요소를 제거하며 차근차근 안정을 찾다 보면…….”
윤의 눈동자가 하늘을 담았다.
“제 정인이 돌아오겠다고 약속한 좋은 세상에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겠지요.”
그의 모든 행동의 이유는 영목이고, 설우이고 동이었다. 서산 대신은 어딘가에 있을, 혹은 어딘가로 향하고 있을 정인을 그리는 윤의 모습을 응시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내가 이 길로 곧장 내려가서 제대로 군기 한번 잡아 주지.”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입석 앞에 몰려 있는 영물들을 들이겠습니다.”
서산 대신은 인사와 함께 돌아서는 그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무언가 지시하실 일이 있으십니까?”
“지시하면 듣기는 할 거고?”
“물론이지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면서 그녀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지나가는 말처럼 가볍게 중얼거렸다.
“얘, 우리 그이가 네 칭찬과 세경이 욕을 입이 닳도록 한단다.”
“그렇습니까.”
윤은 이 늦은 밤까지 저 산 아래쪽에서 일하고 있을 호우준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제부터 인간 세상에 섞여 사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윤의 목소리에 가장 먼저 응답해 준 이가 바로 호우준이었다. 그는 연수산 내의 자금 흐름을 버젓하게 포장하기 위해 서산 대신과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을 세우고 그 재단의 이사장 노릇을 하느라 윤만큼이나 바빴다.
‘호우준은 서산 대신이 서양 이무기보다 더 신뢰하는 사람이다. 그런 이가 날 칭찬한다면 나쁠 것 없지.’
윤은 마음속으로 호우준에게 감사를 전하며 서산 대신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녀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한쪽 허리에 손을 얹고 윤을 쳐다보았다.
“네 말대로 나는 모든 게 하찮고 귀찮은 사람이다만… 내 반려가 아끼는 이는 귀히 대해 주고 싶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런 공치사를 하는가. 윤의 표정을 읽어 낸 서산 대신이 미약한 짜증을 담아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가 너를 귀히 대하니 너도 너를 좀 귀하게 여기라는 말이다. 배곯을 일 없는 연수산에 사는 애가 하루가 다르게 말라 가니, 원. 걱정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있나?”
“아……. 심려 끼쳐 면목 없습니다.”
곧 죽어도 잘 먹고 잘 쉬겠다, 저를 귀히 대접하겠다는 대답은 않고 돌아서는 윤의 뒷모습에 서산 대신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뿜어낸 담배 연기가 윤을 보호하듯 그의 뒤를 짙게 따라갔다.
한순간, 누군가가 서산 대신의 담배 연기를 뚝 끊으며 나타났다.
“오냐오냐하면서 해 달라는 거 다 들어주면 애 버릇 나빠진다니까요?”
세경이었다. 그녀는 도통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세모눈을 해서는 허리에 손을 얹고 윤이 사라진 쪽을 향해 혀를 찼다. 세경의 심술이야말로 윤에 대한 염려에서 나오는 것임을 아는 서산 대신이 세경과 팔짱을 엮으며 그녀를 다독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