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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 부르실 날에-135화 (135/157)

135화

아가씨는 나를 한 번 꽉 끌어안아 주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섰습니다. 돌아선 작은 등에 실린 각오가 또렷이 보이는 듯하여 차마 잡지 못하였어요.

나는 눈물을 거두려 노력하면서 아가씨의 말을 곱씹었습니다.

만날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되어 있다.

아가씨 말대로라면 우리는 필시 다시 만나게 되겠지요. 그러니 나는, 이번 생에서는 아가씨를 따라서 이 단단한 세상에 흠집을 내 볼까 해요. 아가씨가 맡긴 심부름을 하지 못하는 게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만날 사람이 다시 만나게 되어 있다면, 전해질 편지 또한 어떻게든 전해질 수 있지 않을까요.

나는 내가 생각해도 퍽 바보 같은 기대를 담아 호사스러운 방 안을 휘 둘러보았습니다. 나의 눈은 끝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자개장 위에 놓인 축음기에 멎었어요.

높은 구두가 낯설어 걸음마다 휘청이는 주제에, 아가씨가 골라 준 구두를 신은 것만으로도 내 자신이 제법 모던 걸 같아 기분만은 참 좋았답니다. 나는 눈물 흘리는 얼굴로 방글방글 웃으려 노력하면서 축음기의 음량을 최고로 크게 틀었어요.

즐겨 듣던 노래가 집 안을 울릴 듯이 웅웅 진동하였습니다. 나는 그 울림을 온몸으로 느끼며 눈을 감고 아키코 아가씨가 만들어 낸 저주를 읊어 보았어요.

‘속죄하지 않는 이에게 저주 있으라.’

소리가 나오지 않는 입을 크게 벙긋거리며 최고의 저주술사가 반복한 주문을 방 안에 흩뿌린 나는 응접실 문을 꼭꼭 닫았습니다.

나는 회랑에 가득 쌓인 불량 폭탄들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아버지가 일러 주신 방법을 더듬으며 상자와 상자 사이를 전선으로 연결했습니다. 아가씨께서 총감부까지 느긋하게 가시겠다 하셨으니 총감부가 터지고 저택으로 사람들이 몰려올 때까지 내게는 제법 넉넉한 시간이 있는 셈이었지요.

서로 이어 놓은 수십 개의 상자들 중 열 개만 함께 터져도 충분하다 생각하면서 기폭기를 쥐고 정원으로 나왔을 때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가사가 흘러나오고 있었답니다. 노랫소리가 어찌나 크게 울리는지 뒷짐을 지고 정원 한복판에 서 있는데도 바로 옆에다 축음기를 틀어 놓은 것처럼 노랫소리가 선명했어요.

‘노랫소리가 너무 커서, 그래서 제때 대꾸를 못 한다고 생각해 주면 좋겠다.’

내가 아키코 아가씨인 척 굴려면 말하지 못한다는 것을 최대한 길게 숨겨야 하니까요.

그렇게 내가 아가씨의 흉내를 어떻게 내야 좋을까 하며 어깨를 쭉 편 순간에 제복 입은 사내들이 대문을 밀고 들어왔습니다.

“실례합니다, 아키코 선생님. 선생님을 노하게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만, 선생님의 몸종 아이가 총감부에서 폭탄을 터뜨렸습니다.”

“…….”

“아, 물론, 물론! 말 못 하고 우둔한 계집이니 불령선인이 살살 꼬드겨서 선생님의 저주 상자와 폭탄을 바꾼 거겠지요! 저희도 압니다.”

나는 뒷짐을 진 그대로 고개를 갸웃 기울였어요. 아가씨가 저주를 걸기 직전에 하는 것처럼요. 이 자세를 알아본 사내 둘이 움찔 어깨를 좁히며 뒤로 물러났습니다. 맨 앞에 서 있던 사내는 불안하게 눈을 굴리면서도 꿋꿋하게 제 할 말을 했어요.

“선생님께서는 아무 관계 없으신 걸 알지만… 의례적으로 진행해야 하는 절차가 있습니다.”

나는 입을 꾹 닫고 발을 쿵 굴렀습니다. 그러자 앞장서서 나불나불 떠들던 사내가 다섯 걸음이나 뒷걸음질로 물러났습니다. 아키코 아가씨가 이렇게 하시면 누군가 피를 뿜고 쓰러지곤 했거든요.

“아, 진정하십시오! 선생님의 수고를 덜어 드리고 싶어서 저희가 직접 찾아뵌 겁니다! 원래는 서까지 동행해 주셔야 하지만 아키코 선생님께는 여러모로 신세를 졌으니까요.”

나는 아가씨가 곧잘 하셨던 대로 턱을 치켜들고 쓰레기를 쳐다보듯 그 사내를 쳐다보았어요. 사내들은 흠칫거리며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습니다.

“잠시면 됩니다! 잠시 안에 들어가서 약식으로 몇 가지 질문에만 답해 주시면 저희가 알아서 잘 마무리 짓겠습니다!”

잠시 고민하는 척하던 나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만 한 번 까딱하고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어요.

서릿재의 민재. 서래원의 설윤. 연수산의 묵.

내가 사랑하였고, 아가씨가 그리워했고, 우리가 신세 진 얼굴 들을 떠올리면서 좁고 기다란 회랑을 향해 걸었어요. 놈들과 나는 그리 오래지 않아 상자들을 켜켜이 쌓아 둔 곳에 다다랐지요.

“노랫소리가 너무 크지 않습니까?”

사내들이 얼굴을 찌푸리며 나를 쳐다봅니다. 나는 그들을 쳐다보다가 맑고 화창한 창밖의 가을을 바라보았어요. 색안경 너머로 보이는 익숙지 않은 세상이 모두 꿈인 것만 같았습니다.

‘응접실의 축음기는 아가씨가 유난히 아꼈던 물건이야. 그러니 응접실까지 폭발하지 않도록, 너무 가까이 가지 않고 이쯤이 적당할 것 같다.’

내가 소매에 숨긴 기폭 장치를 손에 쥔 순간.

“아키코 선생님?”

보기만 해도 치가 떨리는 제복을 걸친 사내들이 아가씨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동시에 나는 흘러나오는 노래 가사를 속으로 따라 부르며 만지작대던 기폭 단추를 힘차게 눌렀습니다.

펑, 퍼벙.

운 좋게 연결해 둔 모든 상자가 터져 나갔습니다. 커다란 음악 소리에 폭발음이 감춰지면 좋겠다 생각했건만. 내가 아버지와 당신을 닮아 손재주가 너무 좋은 탓에 그건 조금 어렵게 되었네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갈기갈기 찢기는 놈들의 모습에 면사무소 앞 시장에서 나를 끌고 가던 놈과 나를 팔던 놈의 얼굴을 겹쳐 보며 크게 웃었어요.

호상이로구나.

쇳조각이 흩날리는 거센 폭풍에 휘말리며 당신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민재. 나의 비형. 부디 다음 생에 다시 만나기를. 부디 이 바람이 당신의 뺨에 닿을 수 있기를 바라요.

【 동트기 직전 】

가혹했던 침략자들이 쫓겨 가나 싶을 즈음에 전쟁이 나고 나라가 반으로 갈라졌다. 포탄이 터지고 총알이 굴러다니지 않는 곳이 없어지자 구석구석에 숨어 버티던 영물들마저도 하나, 둘 연수산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도령! 여쭙고 온다더니 아직도 답이 없으신가?”

“비형랑이 또 울고 계신다면 서양 용이나 그… 세경 마님도 있잖아!”

연수산 입석 앞은 잡신들과 영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단이의 사고 이후로 가능한 한 세경과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 중인 윤은 길고 긴 탄식을 흘리며 삼신인 효선을 찾아갔다.

“아이구, 도련님. 요즘 정신이 하나도 없지?”

학당인지 고아원인지 구분하기 힘들어진 서래원 마당에서 갓난아기를 어르고 있던 효선이 반가워하는 얼굴로 윤을 맞았다.

“그걸 아시니 이야기가 빠르겠습니다. 이제 삼신께서 나서 주심이 적당하지 않겠습니까?”

“음? 그 삼신이 나를 칭하는 말이라면… 연수산 삼신할미는 전쟁 통에 부모 잃은 아가들과 남편 잃은 산모들 보살피느라 바쁜데?”

여전히 산파 시늉에만 열심인 효선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삼신께서 직접 나서기 힘드시다면 월하노인께라도 부탁해 주십시오.”

“세경이가 신들을 다 모아 놓고 지랄한 거 몰라? 도련님이 뭘 부탁하든 들어주지 말라고. 자기 피보호자가 자기 말고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는 게 자존심 상한대잖아.”

“…압니다. 그러니 세경 마님이 뭐라 하시든 코웃음으로 흘리실 수 있는 삼신께 부탁드리는 것 아닙니까?”

윤의 말에 효선이 깔깔대며 웃었다.

“나 도련님한테 감정 안 좋아. 영서 걔가 구미호랑 애를 갖겠다며 맨날 나를 들볶는다고. 그냥 쭉 몸이나 섞게 두지, 괜히 나서서 영서랑 호우준을 혼인시킨 게 도령이잖아. 그래서 난 도령이 싫어.”

윤이 얼굴을 찌푸렸다.

“저에 대한 원망은 그렇다 치고, 아이 갖겠다는 소원을 삼신께서 못 들은 체하시면 됩니까?”

“영서 걔가 애를 가지면 서산 대신은 그 순간부터 아이 크는 속도에 맞춰 늙어 가는데?”

“늙다니……. 서산 대신은 신이시잖습니까? 불로장생하는 존재시잖아요.”

“새 생명을 탄생시켰으면 다른 생명은 저물어 균형을 맞추어야지. 세상 순리가 원래 그래. 서산 대신이라고 다를 거 없지, 뭐.”

윤이 입을 벌리고 굳자 효선의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알아들은 얼굴이니 얘기 끝났네. 월하노인은 전쟁 난 것 때문에 선계 불려 가서 시달리고 있으니 거기도 비빌 생각 하지 말고.”

“…헛걸음하지 않도록 알려 주시어 감사합니다.”

“세경이한테 얘기해 보라니까 고집 피운다.”

“귀한 조언, 새겨듣겠습니다.”

효선의 웃음소리가 공손히 인사하고 물러나는 윤의 뒤를 길게 따라왔다. 윤은 이젠 습관이 되어 버린 한숨으로 그녀의 웃음소리를 털어 내고 연수산 입석으로 향했다.

아무도 윤에게 말로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사양할 도리 없이 윤의 일이 하나 더 늘어 버렸다. 연수산 문지기의 역할.

“저기 도령 온다!”

윤은 범산의 토사를 헤치고 도착한 수백의 영물 난민들의 아우성 앞에 한숨을 지었다.

“도령! 언제까지 우릴 이렇게 더러운 흙더미에 세워만 둘 거야!”

북적이는 영물들 틈에서 한 젊은 남자가 목청을 키우며 앞으로 나서 소리쳤다. 이 난리를 어떻게 정리해야 좋을지 고민 중이던 윤은 마침 잘되었다는 기분으로 그를 지목했다.

“방금 더러운 흙더미라고 하신 분, 누구시죠?”

“나다! 청현산에서 온 학이다!”

앞머리에 새치처럼 흰 머리카락이 한 뭉치나 자라난 남자가 번쩍 손을 들었다. 윤은 뒷짐을 지고 서서 그 남자와 흙더미를 한 번씩 쳐다보았다.

“저 흙더미엔 나의 모친과 내 정인의 모친, 내 누이와 내 정인이 묻혀 있습니다. 그렇게 더럽게 느껴지신다면 당장 다른 깨끗한 곳으로 가심이 어떠실는지요.”

“아니… 나는 진짜 흙이 더럽다는 게 아니라…….”

“여러분의 출입이 내게 달려 있다 생각하신다면 앞으로는 말씀을 주의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차갑게 경고한 윤이 학 영물을 지목했다.

“청현산 학 영물이라 하셨습니까.”

“어.”

“이전에 동학 운동 때에 제가 자당께 큰 도움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그때의 인연을 생각하여 방금 하신 말씀은 못 들은 것으로 하죠.”

“어… 응. 고마워.”

그가 영물인 제가 고작해야 서양 창귀인 놈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게 맞나, 찜찜해하는 순간에 윤이 그에게 숙제를 떠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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