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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 부르실 날에-134화 (134/157)

134화

“사람들은 나를 제대로 보지 않아요. 낮밤 없이 커다란 색안경을 주워 쓰고 다니는 여자. 어떤 백화점이든 새 물건이 들어왔다는 소식이 들리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제일 비싼 옷과 제일 비싼 구두부터 사는 여자.”

아가씨의 눈이 방 한가득 곱게 걸린 옷들을 향했습니다. 그녀는 타박타박 걸어가 바로 어제 불란서에서 왔다며 작은 집 한 채 값을 주고 산 양장을 골라 들었어요.

“저는 과하게 화려한 차림을 하고서 무거운 저주 상자 들고 다니는 제 몸종에겐 제대로 된 옷 한 벌 해 주지 않는 인정 없는 인간. 저주술사 아카무시.”

아가씨는 들고 있던 옷을 내게 건네고 빈손으로 나의 뺨을 감쌌습니다.

“미안해요, 리에이. 일부러 그랬어. 한 사람은 눈살 찌푸려지도록 화려하게, 다른 한 사람은 구정물에 감은 것 같은 더벅머리에 거적 같은 옷으로 기억되도록.”

나는 내 손에 들린 옷과 내가 입은 옷을 쳐다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사람들은 제대로 보지 않으니까요. 아키코와 리에이라는 두 여자가 아니라 화려한 점쟁이와 후줄근한 몸종으로만 우리를 기억할 테니까.”

아가씨는 내 뺨을 감싼 채 목소리를 더 낮추었어요.

“리에이. 내 옷을 입고 나인 척해 줘요.”

이건 또 뭔 소리랍니까. 나는 목소리로 나오지 않는 말 대신 눈을 눈알이 빠질 듯이 크게 부릅떴습니다. 내가 멍하니 눈만 크게 뜨고 있는 사이에 아가씨는 나를 이끌고 욕실로 가고 있었어요.

“부탁이에요. 리에이는 내가 해 달라는 건 다 해 줬잖아.”

나는 고개를 저었어요. 아키코 아가씨는 제정신일 때나 정신이 나가 계실 때나 원체 짓궂은 주문을 하시던 분이셨지만… 오늘의 이 주문은 평소와 너무 달랐단 말이에요.

나는 그녀가 떠민 욕조에 풍덩 빠져서도 연신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러면서 저기 멀리, 상자가 잔뜩 쌓인 회랑과 욕실 앞에 보란 듯이 걸려 있는 양장을 가리켰어요. 저 시커먼 상자가 리에이의 것, 예쁜 양장은 아키코의 것. 서로 바꿀 수는 없다고요.

아가씨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맞아요. 지금부터는 내가 리에이, 리에이가 아키코. 그러니 저 상자는 내가 들고, 양장은 아키코에게 입히려는 거지.”

내가 눈썹을 끌어 내리자 아가씨도 내 표정을 똑같이 따라 하셨습니다.

“난 오늘 리에이가 되어서 저주 상자를 안고 총감부로 갈 거예요. 멍청이들은 아키코 씨 심부름을 온 몸종이라 생각하고 나를 그냥 들여보내 주겠지? 저주 상자는 손대면 저주받는 상자니까 검사하지 않을 거고.”

그제야 나는 아가씨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눈치챘습니다. 아가씨는 내가 되어 죽으려고, 그리고 나를 아가씨의 모습으로 분장시켜 살리려고 이제껏 화려한 치장을 하셨던 거예요.

- 사람들은 나를 제대로 보지 않아요.

아가씨가 장난스레 했던 말이 묵직한 철퇴처럼 가슴을 쿵 치고 마음에 쿡 박혔습니다.

아가씨는 정말 몸종이라도 된 것처럼 해면을 들고 넋이 나간 내 얼굴을 꼼꼼히 닦아 주기 시작했어요.

“내가 생각해도 나는 정말 용의주도한 것 같아요. 총감부 안을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신뢰를 얻겠다는 각오 하나로 온갖 놈들이 주문하는 온갖 저주를 다 들어주었잖아? 좋은 제사도, 나쁜 제사도 전부 제사드린 내 몸으로 돌아오는데 말이야.”

눈물이 주르륵 흘렀습니다. 아가씨는 혀를 쯧 차면서 고개를 저었어요.

“뚝. 어차피 나는 오래 못 살 몸이었어요. 너무 좋은 약은 너무 독한 독일 수도 있단 걸 간과하고 용 비늘을 냅다 삼켰거든.”

내가 고개 젓는 것도 잊고 굳어 버리자 아가씨는 혀를 빼꼼 내밀고 어깨를 으쓱였습니다.

“처음엔 진짜 몸에 좋을 줄 알고 먹었어. 영안과 신력은 확 좋아졌는데… 인간의 몸으로 감당할 만한 힘이 아니었을 뿐이에요.”

소녀처럼 배시시 웃으면서 아가씨는 아껴 두었던 향유를 내게 주룩 부었습니다. 정수리에서 흘러내리는 향유를 따라 눈에서는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어요. 아키코 아가씨는 기어이 향유 한 통을 물에 다 풀어 비우고는 내 머리카락을 빗어 넘겨 주었답니다.

“길게 못 살 목숨, 최대한 알차게 쓰러 가는 거니까 너무 속상해하는 표정 짓지 말아요.”

“…….”

“아니… 말이야 바른말로, 왜놈들 저주하다가 업 쌓여서 살 맞아 죽는 게 개죽음이지. 개죽음할 목숨으로 왜놈들 끌어안고 같이 죽는 것은 호상이다, 호상. 안 그래요? 남는 장사라니까.”

목숨을 버리는 데에 남는 장사가 어딨답니까. 전할 수 없는 짜증이 한스러워 나는 손에 얼굴을 묻고 펑펑 울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조선에서 굴러 굴러 여기까지 온 벙어리 여종으로 죽을게요. 당신은 나로 살아요.”

고개를 마구 젓자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어요.

이 넓은 저택에서 단둘이 무얼 하냐고, 심심하니까 폭탄 쉽게 만드는 법이나 알려 달라고 살살 꾈 때에 아무것도 모르는 척할걸. 나를 구해 준 게 그저 고맙다는 이유로 아가씨가 하고 싶다는 걸 다 들어주지 말걸. 이럴 줄 알았다면, 안 그러는 건데.

이제 와 후회해 봤자 아무 소용 없는 후회들이 눈물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아가씨는 내 등을 토닥이면서 참 살갑게도 속삭였어요.

“나도 알아요. 내가 폭탄을 던진다고 당장 뭐가 어찌 되지는 않는다는 거. 그래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아도 소소하게는 흠이 나지 않겠어요?”

“…….”

“나같이 이상한 고집이 있는 사람들이 흠집을 더하고 또 더하면 흠이 금이 되고, 금이 구멍이 되고… 그렇게 반복하면 언젠가는 무너질 거예요.”

아가씨가 울고 또 우는 내 손을 끌어 내렸습니다. 억지로 나와 시선을 맞춘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맑은 눈으로 내게 또박또박 물었어요.

“리에이, 내가 왜 이렇게 긴 이야기를 했을 것 같아요?”

몰라요. 알고 싶지도 않았고요. 할 수만 있다면 크게 고함이라도 치고 싶었어요. 그런 나를 보면서 아가씨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습니다.

“리에이(李永), 당신이 이영이죠? 연수산 도깨비를 데릴사위로 들인 대단한 처녀.”

오랜만에 남의 입으로 들은 이름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습니다. 아가씨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작게 웃음 지으며 말을 이었어요.

“계속 생각했거든요. 나는 그렇게 착한 사람이 아니고, 내 코가 석 자였는데… 그런데 왜 맞고 있는 그대를 보자마자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왜 그랬을까.”

내 머리 위로 아가씨의 목소리와 따뜻한 물이 쏴아, 쏟아져 내렸습니다.

“내가 용의 비늘을 삼킨 덕분이었나 봐요. 만나야 할 운명이라는 거, 되돌려보내야 할 사람이라는 걸 그렇게 알아봤나 봐.”

몇 번이나 쏟아지던 따뜻한 물 다음에는 폭신한 수건이 다가왔어요. 나와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는 앳된 얼굴이 어린 동생을 대하듯이 빙그레 웃음을 띠고 나와 코끝을 맞댔습니다.

“알아들었죠? 이영은 내가 집을 나서자마자 항구로 가요. 집에서 항구로 가는 시간과 집에서 총감부로 가는 시간은 거의 비슷해요.”

“…….”

“내가 가다가 기비당고도 사 먹고 오비 구경도 하면서 천천히 갈 테니까 뒤도 돌아보지 말고 아키코인 척, 조선으로 가요. 가서 기다리는 사람과 만나.”

아가씨를 두고 어떻게 혼자 가라고. 그녀의 옷소매를 붙잡고 고개를 젓자 아가씨는 이제껏 보았던 중에서 가장 예쁘게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어떻게 가긴? 제일 예쁜 옷에 제일 예쁜 구두 신고 모던 걸 머리 하고 제일 큰 배, 제일 좋은 방을 잡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거지.”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나는 절대 그렇게 못 해요. 세차게 고개를 젓자 아가씨는 짐짓 심각하게 눈썹을 찌푸렸습니다.

“으음. 그러면 내 심부름을 한다고 생각해 줘요.”

아가씨가 검지를 펼쳐 응접실 쪽을 가리켰어요.

“우리 보물 상자 알죠? 축음기 아래 비밀 상자. 우리가 거기에 매년 소중한 걸 하나씩 넣었잖아.”

“…….”

“그걸 가지고 가서 남설윤이라는 이에게 전해 줘요. 그 사내도 연수산에 산다고 하였으니까 서로 안면은 있을 것 아냐.”

“…….”

“혹시라도 설윤, 그 사람이 너무 슬퍼하거든…….”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아가씨는 나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리운 이를 생각하는 듯이 먼 곳을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환하게 웃으면서 나에게 지키지 못할 일을 부탁했어요.

“내가 봄 중에서도 가장 환한 봄에 찾아가겠다 전해 주어요. 아직은 겨울이라 가지 못하겠다고.”

그녀의 손에 이끌려 나는 다시 옷방에 섰습니다. 아가씨는 어디서 잘도 찾아 온 빗과 가위를 챙겨 들고 내 머리를 자신과 똑 닮은 단발로 예쁘게 잘라 주었어요. 바닥에 후드득 떨어지는 머리카락처럼 내 눈에서도 그만큼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리에이. 아니… 이영. 우리는 다시 만날 거예요. 나 되게 용한 점쟁이예요. 몰라?”

몰라요. 정말 몰라.

고개를 젓자 아가씨가 키득키득 웃었습니다.

“내가 어디 저주만 잘해서 유명해졌어요? 앞일도 잘 내다보니까 이렇게 호의호식하는 거지.”

내 머리카락을 자른 뒤, 아가씨는 마치 예전부터 생각해 두었던 것처럼 아까 골라 둔 옷과 실크 스타킹, 높은 구두까지 착착 내게 입히고 신겨 주었어요. 그러면서 나에게 하는지 스스로에게 하는지 모를 말투로 연신 다시 만날 거라는 말을 반복했습니다.

“사람은 다시 태어나요. 만날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되어 있어요. 세상 이치, 하늘 순리가 그래.”

정말 다시 만날 수 있어요? 울먹이는 눈으로 묻자 아가씨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 옷을 주워 입었습니다.

“어우. 이영이 청소를 너무 잘해 둬서 얼굴에 묻힐 검댕이 부족하잖아. 이거 어떻게 할 거야?”

그런 이상한 투정을 하면서요. 그렇게 서로 뒤바뀐 아키코와 리에이는 팔짱을 엮고 응접실로 돌아갔습니다.

“어디 보자.”

응접실에 들어서자마자 아가씨는 아까 내가 만들었던 저주 궤짝의 뚜껑부터 열었어요.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흐뭇해하는 표정으로 안을 살폈습니다.

“녹슨 쇠못을 이렇게까지 채워 넣었으니 못해도 그 방에 모인 관료 놈 두셋쯤은 같이 데려갈 수 있을 거예요. 운 좋으면 못이 스친 놈들에게 파상풍도 입힐 수 있겠다.”

다시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아가씨는 응접실에 놓인 장식장의 서랍에서 색안경 하나를 꺼내 내게 씌웠어요.

“내가 하는 방법이 곱고 착한 방법은 아니지요. 하지만 곱고 착하고 순하게 굴기만 하여서는 죽도 밥도 되지 않는 세상이잖아요.”

“…….”

“울지 말아요, 이영. 나는 길을 터 두러 가는 거예요. 내 뒤에서 걸어야 할 이가 나보다는 편히 걸을 수 있도록.”

내 눈물을 닦아 주는 아가씨의 표정이 당신과 너무 닮아 있었답니다. 배곯던 나에게 훔쳐 먹지 말고 당당히 먹으라 했던 당신과. 살아서 신랑을 만나러 가라는 아씨의 표정이 내가 매일 밤 그리는 당신과 너무 닮아 있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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