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세월 흐른들 빛바랠 그리움이 아니기에
속절없이 기다립니다.
좋은 날 다시 오마 하였으니
내게 허락된 건 그저, 기다림뿐이라.
그대 나 부르실 날에 기대어 사나니
내내 행복하시다 좋은 날에 다시 뵙기를.]
딱 저를 닮은 반듯하고 정갈한 필체에 꾹꾹 눌러 담은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편지를 안고 객실로 달려 들어가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객실은 쓸데없이 넓고 휘황찬란하여서 내 울음소리가 바닷바람처럼 웅웅 울렸습니다. 이제는 달래 줄 이 없이 혼자 울어야 한다는 게 사무쳐 날이 새도록 울고 말았지요.
【 1943, 동경 】
이야기를 잠시 끊은 아키코 아가씨는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아주 그립고 아주 미안한 것을 더듬는 눈동자라 가만히 지켜보는 내가 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어요.
이내 그녀의 눈은 다시 나를 향했습니다.
“그 뒤로는 리에이, 당신도 잘 아는 이야기예요. 나는 눈이 다 짓무르도록 운 뒤에 방을 나섰답니다. 그가 가방 가득 사 준 양장에, 그가 신겨 준 구두를 신고, 그가 사 준 색안경을 끼고요.”
양 뺨을 발그레 붉히고 배시시 웃는 아키코 아가씨는 참 어여뻤답니다.
“배 전체를 통틀어 딱 세 개뿐이라는 특실. 그 방을 홀로 독차지한 작은 여자. 나는 이미 배에 올라탈 때부터 소문과 관심의 중심이었어요.”
화려한 응접실에 앉아 가을 한낮의 황금색 햇살을 받고 있으면서도 아가씨는 그 시절, 그 배 위에 서 있는 듯한 얼굴을 하셨어요.
“항구에 내려서야 재미나지만 배가 바다 위를 달리는 시간은 꽤나 지루하답니다. 나는 그 지루함을 틈타 사람들의 점을 봐 주었어요. 상해에 도착했을 즈음엔 내 선실 문부터 시작된 손님 줄이 배를 반 바퀴 돌아가며 이어질 정도였지.”
그리고 아가씨는 나를 보며 천사처럼 웃었답니다.
“고베에서 내리자마자 내 눈에 그대가 보였어요.”
아가씨의 말을 들으며 나는 아가씨를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좋은 냄새가 나는 사람이 모질게 퍼붓는 매질을 피해 몸을 웅크리고 있는 내 앞을 막아섰지요.
- 어머. 내 점괘가 또 맞았어. 지느러미 썩는 냄새를 따라가서 사람 하나를 거두라기에 와 봤더니 딱 맞는 이가 여기 있네?
아가씨가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거기에서 죽어 바다에 버려졌을 거예요. 왜 맞는지도 모르게 시작된 매질이 반나절이 넘도록 이어지는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거든요.
“그대를 만나고, 주인 같지도 않은 선주 놈에게 그대의 몸값을 치르고… 내 집을 사고, 내 옷을 샀지. 참 미안했어요. 온통 내 것만 사서.”
미안하긴요. 그날, 아키코 아가씨가 거두어 주신 덕분에 저는 근사한 화식(和式) 저택에서 살 수 있게 되었는걸요. 그 전까지 저는 어부들이 생선을 다듬고 남은 부속들을 쌓아 두는 곳에 웅크리고 살았어요. 씻어도 씻어도 썩은 생선 비린내가 몸에서 가시질 않던 내가 이렇게 좋은 집에 살아도 될까, 싶었다니까요.
내가 아가씨께 무한히 고마워하고 있는 동안, 아가씨는 발그레 달아오른 얼굴로 지난날을 소녀처럼 조잘대셨습니다.
“그다음엔… 교토의 황족들과 고관대작들의 요청이 쏟아지기 시작했죠. 유람선에 타고 있던 부자들이 내가 용하다는 소문을 톡톡히 내 준 덕이었지. 도쿄의 대저택을 사서 상경할 수 있을 정도로 단단히 한몫 챙겼었잖아요.”
그랬답니다. 아가씨는 몇 달 만에 천금을 안고 가도 만날 수 없는 사람이 되셨어요.
“큭!”
그때 아가씨가 갑자기 주먹을 말아 쥐고 쿨럭쿨럭 기침을 했습니다. 나는 몸을 웅크리고 들썩이는 아가씨의 등을 쓸어내리며 지난날을 생각했어요.
아가씨의 이름을 알린 것은 유람선에서 선보인 점술이었지만, 그녀가 이렇게나 큰 저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저주 덕이었습니다. 아가씨는 지독하게 강력한 저주에 재능이 있었습니다. 반동으로 자신의 몸을 망칠 만큼 강한 저주를 걸 수 있었어요.
연일 피를 토하고, 코피를 흘리고, 손발이 뒤틀리는 반동을 겪으면서도 아가씨는 저주 의뢰를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저주술사 아카무시(赤虫) 아키코. 괴상한 이름에 걸맞은 반동이라며 깔깔거리기까지 하셨어요.
“리에이… 그렇게 보지 말아요. 아무리 그런 눈으로 봐도 나는 나 하고 싶은 짓은 꼭 하잖아.”
제발 이제 그만 쉬시라고 아무리 애원해도 아가씨는 지금처럼 귀엽게 한 번 웃고 넘길 뿐이었답니다.
“큭!”
여유 있게 키득거리는 웃음의 흔적까지 다 사라질 정도로, 속을 다 토해 낼 것 같은 격한 기침이 한참이나 더 이어졌어요.
“아, 으……. 이제 괜찮아. 괜찮아요.”
검댕이 잔뜩 묻은 손에 각혈한 피가 흥건한데 아가씨는 아무렇지 않게 옷에 손을 슥슥 닦고는 어깨를 으쓱였어요. 제일 비싼 것, 제일 귀한 것만 먹고 입고 걸치는 아가씨의 손에 왜 검댕이 얼룩져 있는가 하면… 폭탄을 만들고 계시기 때문이지요. 나는 그녀의 손놀림을 보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습니다.
“와. 리에이, 지금 나 손재주 없다고 한숨 쉰 거죠?”
“…….”
경애하는 아가씨였지만 이것만은 말해야겠어요. 아가씨는 정말이지 손재주가 지독히 없으셨답니다. 폭탄 만드는 법을 배우기는 했는데 혼자서는 아무리 해도 안 된다며, 좀 쉬운 폭탄을 만들고 싶다시기에 내가 조선에 있을 때에 아버지 어깨너머로 배운 기술을 알려 드린 게 벌써 몇 년인데… 멋들어진 저택의 복도에는 불량품만 한가득이었어요.
“못 구부리고, 고철들 잔뜩 넣고, 미리 만들어 둔 뇌관화약(雷管火藥) 넣고. 리에이랑 똑같이 만드는데 왜 나는 매번 불량이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아가씨가 열심히 만드시던 것을 빼앗아 들었습니다. 아가씨는 멋쩍게 웃으면서 검댕 묻은 손으로 턱을 괴었어요.
“음. 내가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몸이 더 망가질 데가 없으니 이젠 기억력까지 막 오락가락하네.”
한참이나 자신이 했던 말을 생각해 내려 애쓰던 아가씨는 이내 고개를 휘휘 저었습니다. 그리고 아이처럼 턱 아래 두 주먹을 다 괴고 방실방실 웃으며 내가 만드는 폭탄을 구경했어요. 그리 오래지 않아 큼지막한 상자 폭탄이 완성되었습니다.
아가씨가 짝짝짝 박수를 쳤어요. 그러다가 문득 하던 이야기가 생각난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답니다.
“내가 서묵이라는 사내와 만났다는 이야기를 했나요?”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이자 아가씨는 단발머리를 찰랑이며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이름에 대한 이야기도 했던가? 내가 서묵의 이름을 칭찬하였더니 설윤이 발끈하면서 무어라 했는지?”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내가 흥미를 보이는 듯하자 아가씨는 해맑게 웃으며 지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어요.
“그 서묵이라는 사내가 정말 잘생겼었거든. 눈동자도 머리카락도 새벽처럼 유난히 고요한 색이라 이름과 참 잘 어울리는 미남자라 칭찬하였어요. 내가 다른 사내를 칭찬하는 게 싫었는지, 설윤이 눈을 이렇게 새침하게 내리깔면서 그러는 거야.”
아가씨는 자신의 정인을 흉내 내면서 그의 목소리를 따라 했습니다.
“새카만 색 좋아하는 놈이[黑] 성격이 개[犬]같아서 묵(默)이라 부른다는 게 더 정확하지요.”
사실 이 이야기도 족히 오십 번은 더 들었답니다. 하지만 아가씨가 다른 어떤 이야기보다 더 즐거워하는 추억이라서 매번 모르는 체 들어 주고 있어요.
까르르 웃는 그녀에게 맞추어 나도 손뼉을 치며 웃었습니다. 한참이나 웃던 아가씨의 표정이 천천히 굳었어요. 이제 제정신으로 돌아오신 모양이에요.
아가씨는 저주의 반동으로 매병 난 노인처럼 천진하게 옛이야기를 하고 또 하다가, 이렇게 한순간 제정신으로 돌아오신답니다. 자신이 또 넋이 나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가 씁쓸히 웃었어요.
“내가 또 불량품들을 산더미같이 만들었나 봐요.”
나는 가만히 오른손을 펼쳐 보였습니다. 아키코 아가씨가 푸스스 웃었어요.
“다섯 상자밖에 안 만들었으면 오늘은 정신이 아주 오래 나가 있지는 않았던 거네. 다행이다.”
하나 가격이 찻집 직원의 반년 치 임금이라는 대단한 자개 상자. 한 번 사용한 상자는 두 번 다시 재사용하지 않는다 하여 더 유명해진 상자예요. 아가씨가 높은 사람들의 일을 하러 갈 때마다 몸종인 저의 손에 들려 동행하는 상자이지요. 다들 ‘저주 상자’라고 부르지만 사실 모두 이런 불량 폭탄일 뿐이랍니다.
처음에는 귀엽고 예쁜 외모와 달리 참으로 괴팍한 취미를 지닌 아가씨라고 눈을 흘겼는데… 제가 그럴 때마다 더 좋아하시는 바람에 눈 흘기는 것도 그만둔 지 오래예요.
“자아. 그럼 불량품 쌓아 두러 가요.”
그녀가 환히 웃을수록 나의 한숨은 더 짙어졌습니다.
우리 저택의 입구에서 응접실로 이어지는 길고 긴 회랑에는 이 저주 상자가 한가득 쌓여 있어요. 나는 아무리 예쁜 상자라 한들 저리 높이 쌓아 두면 적잖이 흉물스러우니 제발 좀 치우자고 매번 말씀드립니다만, 아가씨는 일을 의뢰하러 오는 이들의 기선을 제압하는 데에 아주 좋다면서 더 높이 쌓고 또 쌓아요.
그만 좀 하시라고 눈으로 책망하였지만 아가씨는 본 체도 않고 앞장서서 상자 다섯 개를 죄다 챙겨 들고 복도로 나갔습니다. 자그마한 체구와 달리 기운 하나만큼은 여느 장정보다도 좋은 아가씨라니까요.
나는 아가씨와 나란히 걷다가 그녀가 멈춰 선 곳에 아가씨 손에 들린 상자를 척척 쌓았습니다. 조금만 더 쌓으면 천장까지 닿겠다 싶어 한숨을 내쉬니 아가씨가 작게 웃었습니다.
“이 상자가 나 같아서 만들어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랍니까. 아가씨가 그렇게 무서운 저주를 거는데도 아가씨 손목 한번 잡아 보겠다며 틈만 나면 엉큼한 수작을 부리는 놈들이 널리고 깔렸는데. 그 정도로 어여쁜 우리 아가씨인데 이런 불량 폭탄들과 비교할 수가 있나요.
나는 허리에 손을 얹고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단호하게 도리질을 치자 아가씨는 눈꼬리를 예쁘게 접으며 내 팔짱을 끼고 옷방으로 걷기 시작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