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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 부르실 날에-132화 (132/157)

132화

혼인식을 치른 바로 그날, 경무국장의 집에 큰불이 났었답니다. 잔치에서 술을 어찌나 많이들 마셨는지 다들 쿨쿨 자느라 한 사람도 빠져나오지 못했었지요.

“그 불이……. 세상에.”

“나쁘지 않은 거래였습니다. 아키코는 조선 땅에서 설치는 왜놈들을 지긋지긋해했고, 나는 해외에서 정보원이 되어 줄 사람이 필요했어요. 나라 밖에서 꼭 찾아야 하는 물건이 있어서 말입니다.”

“어… 혹시 설윤 씨도 호적을 찾고 계신가요?”

“맞습니다. 내가 아키코에게 이웅헌이나 이영을 찾아달라 부탁한 것처럼 서묵 그 사람은 그대에게 호적 찾기를 부탁한 모양이네요.”

“아키코 아가씨가 살아 계셨다니……!”

진짜 아키코 아가씨가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내가 놀라 목소리를 높이자 그가 입술 앞에 검지를 가져다 댔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두 손으로 입술을 포개 덮고 주변을 살폈어요. 다행히 출항을 앞두고 들뜬 사람들은 아무도 우리 쪽에 관심을 두지 않았답니다. 설윤은 주변을 스윽 살피고 목소리를 더 낮추어 속삭이듯이 대답해 주었어요.

“아키코는 상해에서 다른 이름으로 살고 있습니다.”

“세상에…….”

“찾아 달라는 사람을 찾을 생각은 않고 편지로 상해가 아주 재미나다며 입이 마르도록 자랑하기에 나는 그대도 상해로 밀항시키려고 했어요.”

나는 까맣게 잊고 있던 서묵의 말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설윤 씨가 제 밀항선을 준비해 두셨다고 들었어요.”

“네. 진짜 아키코를 시켜 상해에 그대가 머물 집과 새 신분까지 마련해 두었습니다.”

“아키코 아가씨의 신혼집에 불이 난 건 한참 전인데… 제가 정인이란 걸 모르셨을 때인데… 왜 그러셨어요?”

대답하면서도 주변을 살피느라 날을 세우고 있던 그의 눈매가 살며시 부드러워졌습니다.

“진짜 아키코의 부탁이었습니다. 남치수가 불쌍한 여자아이 신세를 망치려 드니 구해 달라고요.”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어요. 주인어른이 나를 처음 소개했을 때, 아키코 아가씨는 내가 마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돌아누웠거든요.

“아키코 아가씨는 나를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

“저도 제가 진짜 아키코를 싫어한다고 생각했는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이를 도와서 상해까지 보내 주었잖습니까. 사람이 사람을 돕는 데엔 큰 이유가 필요 없어요.”

태연한 대꾸에 풋, 실소가 터졌어요. 그는 웃는 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면서 마주 웃어 주었습니다. 그 부드러운 미소에 버티고 버티던 마음속 마지막 성벽까지 녹아내렸어요. 그래서 나는 속절없이 항복하는 기분으로 정말 부끄러운 고백을 하였답니다.

“제 진짜 이름은 동(赨)이어요. 벌건 색으로[赤] 꿈틀대는 밥벌레[虫] 하나 더 늘었다며 그리 이름 지었다네요.”

갑자기 불쑥 꺼낸 맥락 없는 소리에도 그는 놀라거나 불쾌해하는 기색 없이 눈동자 가득 나만을 담고 있었습니다.

“김동.”

정말 오랜만에 입 밖으로 꺼내 본 이름이었습니다. 나는 내 이름을 한 번도 좋아해 본 적이 없거든요.

주인어른께서 우리 마을로 아이를 사러 오셨을 때에 부모가 버선발로 달려 나가 그 앞에 엎드렸던 걸 기억합니다. 단이나 동이나 붉다는 뜻은 매한가지이나 이쪽은 천한 붉음이요, 저쪽은 귀한 붉음이라면서요. 아키코 아가씨에게 귀천의 구분을 가르치기 딱 좋지 않으냐며 나를 팔았지요.

주인어른은 친부모가 시뻘건 밥버러지 취급 하며 등 떠민 저를 사 주신 분이십니다. 남들이야 만석꾼 남씨 가문을 미나미케로 창씨개명 한 개자식이라고 욕하지만 나는 주인어른을 그렇게 싫어하지 않아요. 벌건 색으로 꿈틀대는 밥벌레를 사서 싸우는 법, 셈하는 법, 사람답게 사는 법을 알려 주셨으니까요. 본인은 매국노가 되어 욕먹는 역할을 자처하시고 저를 보내서는 거사 치르는 독립군들을 돕기도 하셨지요.

내가 이렇게 비루한 태생이다, 이름조차 그러하다, 그런데도 내가 그대의 정인인가.

말로 건네지 못한 물음들이 입 안을 맴돌았습니다. 우리 사이에 흐르는 침묵이 어색하여 나는 괜한 웃음을 흘리며 얼버무리고 말았습니다.

“갑작스러운 말이라 놀라셨겠네요. 그냥 누구라도 내 원래 이름을 기억해 주었으면 해서 그랬어요.”

나를 가만히 지켜보던 그가 손을 뻗어 찻잔을 쥐고 있던 나의 손목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내 손바닥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어요.

“윤. 내 이름은 윤입니다. 조부께서 지어 주셨어요.”

“…….”

“남, 이것은 부끄러웠던 적 없는 내 가문의 이름이지요.”

남윤.

손바닥에 적힌 이름이 가슴속으로 스며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 두 글자 사이에 나의 이름을 적었습니다.

“나는 가문의 이름과 조부께서 지어 주신 이름 사이에 내 정인을 품고 삽니다.”

손바닥을 사각사각 스치는 손끝을 따라서 내 몸으로 붉은색이 스며들어 왔어요. 단단히 쥐인 손목보다 손바닥을 가볍게 긁는 손길이 더, 더 뜨거웠던 건 왜일까요.

“정인께서 큰 용기로 귀한 이름을 알려 주신 덕에 다음에 다시 뵐 때의 저는 남동윤이 되겠네요.”

“그러지 마세요. 설윤 씨 이름에 쓰긴 하찮은 글자예요.”

“내가 귀히 여기는 것을 감히 누가 하찮다 하겠습니까.”

더없이 오만한 말이었습니다. 은은한 광택이 도는 옷감으로 몸에 딱 맞춰 지은 세비로를 걸쳐 입고는 가격표 한번 궁금해 않고 뭐든 사서 안겨 주는 사내. 저렇게 생겨서 저런 소리를 하면… 그래요, 저이의 앞에서 저이가 귀히 여기는 걸 하찮다 말할 사람은 많지 않겠네요.

김동.

나도 귀하다 생각해 본 적 없는 이름이 그로 인해 귀해졌습니다. 손바닥에 적힌 세 글자가 날아갈까 손을 말아 쥐니 그의 커다란 손이 내 손을 감쌌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속삭였어요.

“나는 있는 그대로의 그대를 사랑합니다.”

“…….”

“매번 잊으시는 듯하여 매번 말씀드린답니다.”

그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덮어 쥔 내 손을 토닥이고는 고개를 살며시 기울여 엷게 미소 지었어요.

“항상 그랬듯, 이번에도 그대 이름은 내가 기억하여 내가 품고 살겠습니다. 하니 그대는 괘념치 마시고 저벅저벅 걸어 그대 하고 싶은 대로 사세요. 남 생각도 내 염려도 말고, 오직 그대 욕심대로, 그대 원대로만.”

주먹 쥔 손을 토닥이던 그가 꿀꺽, 차오르는 설움을 삼키듯 밤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그리 원 없이 하고 싶은 일 하시다가 함께하여도 좋은 세상이다 싶을 때에 돌아와 주세요.”

“어디로 가면 될까요?”

“내게로.”

들릴 듯 말 듯한 대답과 함께 그가 몸을 일으켰습니다. 그러고는 발치에 놓아두었던 온갖 것들을 모두 챙겨 들고 턱으로 일어나라 내게 종용하였어요. 나는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미적미적 일으키면서 그의 소매를 잡았습니다.

“설윤 씨가 나를 많이 그리워했으면 좋겠어요.”

“그럴 겁니다.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어제처럼 비가 오는 날, 유리창에 빗방울이 알알이 맺힌 밤이면 저를 떠올려 주세요. 나는 욕심이 많아서 설윤 씨의 그리움도 내가 독차지하고 싶어요.”

내 보폭에 맞추어 걷던 그가 시원스레 웃었습니다.

“그러지요. 아주 많이 그리워하고, 아주 잘 기다리겠습니다.”

답하는 사람이 고민 없이 흔쾌히 고개를 주억이자 무리한 부탁을 하던 내 쪽의 기분이 상했습니다.

“전 이렇게 떠나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마냥 기다리시려구요?”

“제가 잘하는 것이 참 많습니다만, 그중 기다림이 가장 자신 있답니다. 생각해 보세요. 지난밤에도 들어오라 청해 주실 때까지 기다렸잖습니까. 그 싫어하는 비를 다 맞으면서.”

내 입이 비죽 튀어나왔습니다.

“왜 안 잡으세요? 가지 말라 잡으시면 잡혀 드릴지도 모르는데. 함께 도망하여 둘이 숨어 살자 하시면 좋다고 따라나설지도 모르는데.”

“안 그러실 분인 걸 아니까요.”

“…….”

“안전한 동굴에 머무르는 것보다 전장으로 달려 나가서 길을 뚫고 성문을 열 때에 더 행복해하는 사람임을 압니다.”

너도 그러함을 안다.

아프고 슬픈 확신으로 가득한 눈길이었습니다. 가지 말라고, 백 번도 더 붙잡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에게 내가 무슨 짓을 한 걸까요. 미안함에 고개를 숙이자 도리어 그가 나를 위로했습니다.

“정인께서 제 곁에 느긋하게 머무실 만큼 좋은 세상이 아닌 게지요. 세상이 좀처럼 좋지 못한 상태이니 나와의 약속은 아직 요원하다, 그리 생각하면서 조바심 내지 않으려 합니다.”

출항 직전의 뱃고동이 울렸습니다. 그는 미안하다고도, 곁에 있고 싶다고도 말하지 못한 채 망설이는 나를 돌려세웠어요.

“배가 떠날 시간입니다. 타세요.”

그는 눈치 좋게 달려드는 배의 사환에게 저가 든 짐을 다 넘기고 잘 부탁한다 몇 번이나 당부했습니다.

“표는 챙기셨습니까? 저기 검사를 하네요.”

한 손에 서묵이 준 표를 꺼내 든 나는 어서 가라 손짓하는 설윤을 몇 번이나 돌아보았습니다. 배가 뿜어내는 연기, 노점에서 퍼지는 연기, 모닥불을 따라 너울대는 연기… 항구에 있는 모든 연기가 온통 그의 몸에 휘감긴 듯 시야가 부옇게 흐려졌어요. 내가 울고 있기 때문이겠지만 그날의 나는 모르는 체 연기 탓만 했답니다.

무기력한 얼굴로 승선권을 검사하던 사내는 내가 내민 표를 보더니 대번에 낯빛을 달리하며 허리를 기역 자로 숙였습니다.

“특실에서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가씨. 즐거운 여행 되시길 바랍니다.”

사내의 인사 따위는 듣는 둥 마는 둥, 다시 뒤를 돌아보자 설윤은 입꼬리를 길게 늘이며 주머니를 톡톡 두드리더군요.

“아가씨, 안녕하세요? 저희는 아가씨께서 여행하시는 동안 모든 것을 챙겨 드릴 메이드여요.”

부르지도 않았는데 나타난 하녀들이 나를 둘러싸고 선실로 이끌었습니다. 양옆에는 하녀들, 뒤에는 짐을 든 사내, 앞에는 안내하는 사내로 둘러싸여 키 작은 나는 아무리 돌아보아도 더 이상 당신을 볼 수가 없었어요.

부우―

긴 뱃고동 소리와 박수 소리 속에 배가 항구를 떠났습니다. 나는 나를 둘러싼 이들을 밀치고 난간으로 달려가 그의 모습을 찾았어요.

설윤, 내 이름을 품고 살겠다 약속한 사내는 처음 서 있던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그는 내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손을 크게 흔들어 보이고는 다시 주머니를 툭툭 두드렸습니다. 나는 그가 무얼 하든 멀어지는 모습이 안타까워 난간만 붙잡고 바보처럼 손만 흔들었어요.

배가 더 이상 항구에 선 사람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멀어졌을 때에서야 나는 그가 가리킨 대로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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