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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 부르실 날에-131화 (131/157)

131화

“나는 보기보다 훨씬 욕심이 많아요. 진짜 아키코 아가씨처럼 양장도 입어 보고 싶고, 그 양장 입고 멋진 정인과 팔짱 낀 채 돌아다니고도 싶고, 조선인이니 거사니 하는 이야기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기도 하고…….”

“그리고?”

“남설윤을 온전히 가지고 싶기도 해요. 그러니까 설윤 씨라고 부를래요.”

다소 긴장한 얼굴로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을 기다리고 있던 그가 목을 뒤로 젖히고 웃었습니다.

“뭐가 웃겨요? 나도 모던 걸처럼 남녀유별 없이 누구 씨, 하면서 팔짱 끼고 뭐 그러고 싶다는데.”

그는 푸흐, 하고 잔웃음을 몇 번이나 흘리다가 내게로 얼굴을 기울이며 물었습니다.

“나와 함께 살고 싶은 욕심은 없습니까?”

“있어요. 있으니까 배에 같이 타자고 유혹하려고 해요.”

내가 순진한 체하던 것도 그만두고 눈에 힘을 주자 그가 발긋하게 열 오른 눈꼬리를 늘어뜨렸습니다.

“함께 떠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습니다마는… 제가 부족함이 많아 정인과 함께 햇빛 아래를 걸을 수도, 바다를 건널 수도 없어 말이지요.”

“그럼… 지금은 저 혼자 가더라도 나중에 좋은 세상이 오면, 그때에는 꼭 저와 함께 살아 주시기로 해요.”

딴에는 암살을 다닐 때보다 더한 용기를 끌어모아 한 청혼이었건만. 그는 실망스러울 정도로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좋은 세상에서 뵙지요.”

평온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나는 문득 무언가를 깨달았습니다.

“어어… 혹시 그 정인이라던 이도 똑같이 말했어요? 더 좋은 세상에서 설윤 씨와 살고 싶다고?”

그는 다시 머리를 위아래로 끄덕였습니다. 내가 깡그리 잊어버린 나는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어떤 사람이었길래 이 사내가 서운함도 섭섭함도 모두 기꺼이 끌어안은 채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걸까요.

나는 견딜 수 없는 부러움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그의 목을 감싼 손을 꼼지락거렸습니다. 간지러운 듯이 그가 가볍게 웃었어요. 나는 정인이 어떤 사람이었든 저리 웃는 얼굴이 내 것이니 되었다 생각하면서 그에게 물었답니다.

“설윤 씨는 좋은 세상이란 게 어떤 모습일 것 같아요?”

“모릅니다. 그저 대들보가 썩은 집은 싹 부수고 새로 짓는 것이 쉬울 것 같아서 그런 쪽에 일조하는 중입니다.”

딱 자신의 생김새 같은 대답이었어요. 서늘하고 깔끔하고 단단한 대답. 무심한 듯이 열심인 대답. 나는 그의 입에서 나온 모든 단어들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또 서운해했답니다.

“그래서 나도 도와주시는 거구나. 내가 옆구리에 총 맞아 가며 독립운동하는 사람이라서.”

“선후가 다릅니다. 그대는 내게 돌아오겠다 약속한 내 정인이고, 내 정인이 그놈의 대들보인지 뭔지를 부수고 싶어 하시니…….”

그는 말을 멈추고 나를 곧게 바라보았습니다.

“있는 듯 없는 듯 정인께서 걸어가실 길을 다져 드리며 세월을 보내는 취미가 생겼을 뿐입니다. 흙길이나 자갈길보다는 판판하게 닦인 신작로가 걷기 수월하실 터이니.”

“내가 아직 덜 돌아왔다 할 땐 언제고. 사람 기분을 들었다 놨다…….”

“서운하시거든 좋은 날, 좋은 시절 골라서 제대로 돌아오세요.”

나는 입을 삐죽대다가, 울대뼈를 만지작대다가, 두 손으로 그의 목을 감싸고 톡 튀어나온 곳에 입술을 대었습니다. 그가 마른침을 삼킬 때마다 크게 올라왔다 내려가는 움직임이 젖은 입술에 그대로 전해졌어요. 나는 한참이나 그 위를 빨고 핥으며 천천히 입술을 위로 올렸습니다. 목에서 턱으로, 턱에서 뺨으로, 뺨에서 날렵한 콧대와 이마로.

갈증으로 타는 듯한 그의 시선이 느릿느릿 입술을 움직이는 나를 따라왔습니다. 나도 아마 비슷한 눈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닿고 만지고 입을 댈수록 더 애달팠으니. 목이 마를 때에 바닷물을 마시면 갈증이 더 심해진다더니, 이 사내와 내가 서로에게 바닷물이었나 보네요.

커다란 손이 의식도 없이 그의 허벅지 위에 올라탄 나를 더 가까이 끌어당겼습니다. 허리를 쥔 손도, 등을 감싼 손도 좋다는 말로는 다 표현되지 않을 만큼 좋아서 나는 달아오른 한숨만 흘렸지요. 걸터앉은 허벅지도, 빈틈없이 몸을 둘러싼 팔도 폭 파묻힌 가슴도 틈 없이 단단했어요. 그가 나를 더 깊이 끌어안아 무릎이 넓게 벌어질수록 아랫배에 몽글몽글하고 간질간질한 열이 났습니다.

“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갑자기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나를 안고 몸을 일으켰어요. 나 못지않게 도홧빛으로 달아오른 눈꼬리를 하고서는… 객실 창가에 놓인 책상 위에 날 내려놓고는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옷매무새를 정돈해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대가 타고 갈 배는 자정에 떠납니다.”

“하지만 서묵 씨는 내일 떠난다고…….”

“오늘이 바로 그 내일입니다. 상처가 깊은 탓인지 오래 주무셨어요.”

나는 옆구리를 만지면서 입을 삐죽 내밀었습니다. 어차피 아픈 것도 모르는데 그냥 깨우지. 깨웠다면 입도 더 오래 맞추고 더한 짓도 해 보자 유혹할 수 있었을 텐데.

내 생각이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가 작게 고개를 저었습니다.

“배가 뜨기 전까지 함께 어울려 주시겠습니까?”

이렇게 정중하게 말하는 사내에게 어찌 싫다고 할 수 있겠어요. 나는 그가 내민 손을 잡고 호텔 밖으로 나갔습니다.

밤의 항구 도시에 가 본 적이 있나요? 그곳은 낮보다 밤이 더욱 화려하답니다. 경성의 불빛과는 다른, 날것의 번쩍임이지요.

그이가 내 손을 끌고 문 닫기 직전의 가게로 들어갔던 것. 어린 누이 챙기듯 먹지 못하는 것이 있느냐, 어떤 것을 좋아하느냐 물어 가며 배에서 먹을 주전부리를 살뜰히 챙겨 주었던 것. 온 주머니를 털어 가진 재물을 모두 내어 주었던 것. 뒤지고 또 뒤지다가 자신의 회중시계까지 풀어 주었던 것. 하나하나 소중한 기억입니다.

내가 실없는 이야기를 하면 그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거나 저었습니다. 참으로 말수 적은 사내라 핀잔하면서 볼우물을 쿡 찌르면 그는 내 손가락을 쥐어 손끝에 입을 맞췄어요.

그이가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정인의 기억을 더듬으면 나는 부러 서묵을 칭찬하였습니다. 설윤은 좀처럼 감정 기복 없는 사내이지만 내가 서묵을 칭찬하는 것만은 질색하였으니까요.

“이제 곧 출항이니 저기서 잠깐 쉬다 가시지요.”

웃고 떠들며 걷고 또 걷던 우리는 밤이 깊어도 불이 꺼질 줄 모르는 노천카페에 마주 앉았습니다. 양손이 부족할 정도로 늘어난 짐을 발치에 잔뜩 쌓아 두고 떠날 준비가 한창인 커다란 유람선을 쳐다보았지요.

기약 없는 이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헤어지기 아쉬워 찰싹 붙어 있던 시간을 돌이켜 보니 지난밤은 온통 믿기 어려운 일투성이였습니다.

죽이거나 죽으라고 고용되었다가 그를 사랑해 버린 나. 자존심 다 내버려 목숨을 거두라 부탁하였더니 갑자기 나를 정인이라 부르는 사내. 꿈같은 하룻밤을 보내자마자 곧장 헤어질 준비를 하는 지금.

입을 열면 눈물이 나올 것 같았어요. 그래서 입술을 꾹 물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항구의 사람들만 속절없이 구경했지요. 찻잔이 모두 비고도 한참이나 지났을 때에 나는 주변을 살피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습니다.

“설윤 씨는 주인어른께서 거사에 돈을 대시는 걸 처음부터 알고 계시었지요?”

“알고만 있었고, 남치수에게 딱히 협력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하고자 하는 바는 알겠으나 방식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잔을 비웠습니다. 나는 그의 입술이 닿았던 찻잔의 모서리마저도 질투하면서 내내 궁금했던 것에 마침표를 찍었어요.

“궁금했답니다. 주인어른께서 왜 가문의 수호신처럼 대하던 그대를 갑자기 악귀 취급 하시는지.”

“악귀라……. 크게 틀린 말은 아니네요.”

“그런 말 마세요. 이렇게 곱고 곧은 악귀는 본 적도 없습니다.”

내가 단호하게 부정하니 그가 맑게 웃었어요. 평생 웃지 아니하다가 내 앞에서 평생 웃을 만큼 웃는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또 간질간질해졌습니다.

“무튼 말예요. 내내 궁금하던 문제의 답을 알았습니다. 거사를 도와 달라는 주인어른의 청은 딱 잘라 거절하시고 아키코 아가씨의 마음만 홀랑 훔쳐 가셨기 때문이었네요.”

“그런 것 훔칠 만큼 아쉽게 살지 아니했습니다.”

그가 곤란하다는 듯이 눈꼬리를 찌푸렸습니다. 진심으로 질색하는 낯이 우스워 나는 손등으로 입을 막고 웃었어요. 그리고 설윤의 모습을 처음 보았던 날을 떠올렸습니다.

진짜 아키코 아가씨가 끝없이 울며 바라만 보시던 창밖. 그곳에 선 사내의 옆모습을 본 순간 알았지요. 아아, 아가씨께서 저이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구나, 그럴 만한 사내구나, 했더랬지요.

그래서일까요. 훔쳐만 보던 사내를, 아키코 아가씨조차 갖지 못해 몸져누우셨던 사내, 그 사내를 내 것이라 여기고 있는 오늘이 더더욱 꿈처럼 느껴졌답니다.

“알고 계세요? 주인어른께선 몸져누운 아키코 아가씨를 다그쳐 경무국장에게 시집보내셨답니다.”

나를 양녀로 들인 사연까지 다 알고 있었느냐고 넌지시 돌려 묻던 나는 비로소 깨달았어요. 울며불며 목을 매겠다, 손목을 긋겠다 하던 아키코 아가씨가 왜 갑자기 순순히 시로무쿠(白無垢: 일본 전통 혼례복)를 입으셨는지 말이지요.

“설마… 아키코 아가씨의 초야에 생긴 변고가…….”

그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내게 말 걸지 말라 질색하며 윽박을 질러도 진짜 아키코는 들은 체도 않았습니다. 마음을 주지 않을 거면 몸이라도 섞자며 달려들던 기세가 얼마나 대단하던지.”

아키코 아가씨는 차 한잔 사 드리고 싶다며 줄을 선 사내가 종로 이 골목에서 저 골목까지 이어질 정도의 미인이었습니다. 그런 아가씨가 그러셨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찻잔만 만지작거렸어요. 알전구의 누르스름한 빛이 찻잔 바닥에 고인 찻물에 반짝반짝 빛을 더하고, 설윤의 낮은 음성이 그 빛을 덧씌웠습니다.

“이 집이 감옥 같다고, 죽지 못해 산다고, 울며불며 일탈다운 일탈을 도와 달라기에… 어린애 달래는 기분으로 도망치는 방법 정도는 가르쳐 주겠노라 약조했습니다.”

찻잔에 고이는 낮은 목소리를 음미하던 나는 그만 기가 막혀 입을 떡 벌리고 말았습니다.

“경무국장의 집에 있던 이들을 몰살하고 불을 지른 게… 객이시라고요?”

“술에 강한 수면제를 타고 불을 낸 건 진짜 아키코였습니다. 그 약을 주고 불내는 법을 알려 준 건 나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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