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분명 정인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는 나를 정인 보듯 바라보며 답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처음 이야기를 나눈 사이이건만 마치 오래전부터 알던 듯이 아련하게요.
“정인께서는 다시 뵐 때마다 제가 기억하던 모습보다 조금씩 작아지네요. 작아지는 만큼 훨씬 더 단단해지는 것 같기도 해요.”
그는 밤이 깊도록 미동 없이 감나무만 바라보던 그 눈빛으로 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답니다. 나를 향한 그리움인 듯하면서도 온전히 내 것만은 아닌 듯한 기분에 나는 괜스레 심통을 부렸습니다.
“제가 괜한 물음을 하였습니다. 그리 그리워하실 만큼 어여쁜지 따위나 여쭐걸.”
“그럼요. 언제, 어떤 모습으로 계시든 한순간도 아니 고왔던 적이 없으셨어요.”
빙그레 휘는 붉은 입술이, 그 입술이 말하는 정인의 모습이 어찌나 야속하던지. 부러움에 머리가 하얗게 비어 버린 나는 그만 그의 옷깃을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습니다.
“나만큼 고운가요? 이렇게 서로 통성명을 나눈 첫날에 입을 맞출 정도로 어여쁠까요?”
그가 뱉은 밭은 숨과 옅은 웃음이 내 입술 안으로 흘러들었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정인을 그리워하다가 나와 입술을 맞댄 기분은 어떠한가요?”
연신 따져 물으며 입술을 부비자 잘 웃지 않는 사내의 웃음이 조금씩 선명해졌습니다.
“이보다 더한 짓을 하고 싶은 기분이네요.”
낮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가 서툰 입맞춤으로 시위하는 내 입술에 젖어 들었습니다. 조금씩 더 깊이 포개지는 젖은 살에 머리가 아득해져 나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습니다. 내가 뱉은 신음에 퍼뜩 정신이 든 듯이 그의 얼굴이 멀어졌어요.
“더한 짓을 하고 싶으시다더니 왜 멀어지십니까?”
짧게 헛웃음을 토한 그가 커다란 손으로 나의 옆구리를 닿을 듯 말 듯 보듬었습니다.
“소중하여서요. 상처가 염려되어 가까스로 정신을 다잡았습니다.”
“입맞춤 정도로 꿰맨 곳이 어찌 되진 않을 텐데요?”
지금 다시 생각하여도 이 순간의 나는 대체 어찌 그런 소리를 입 밖에 내었나 싶어요. 아마 아무 생각 없이, 그저 그와 말캉한 살을 맞댄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겠지요. 항상 서럽고 괴롭기만 하던 눈동자에 내가 가득 차 있는 게 좋았기 때문일 거예요.
더 솔직히 말하자면 촉촉하고 간질거리는 감촉과 젖은 소리를 탐닉하고 있노라면 내게 지워진 짐이 다 잊힐 것만 같았거든요. 그 순간만큼은 세비로 입은 청년과 연애하는 경성의 평범한 여학생 같은 기분이었으니까요.
나는 무게를 싣지 않으려고 침대에 팔을 짚고 버티는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졸라 보았습니다.
“더.”
뜨겁게 쏟아지던 그의 숨결이 뚝 멎었습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면서 팔에 힘을 줘 그의 목을 더 꽈악 끌어안았어요.
“더한 짓이요.”
숨을 멈춘 그가 천천히 자신의 아랫입술을 깨무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무엇을 조르는지도 모르고 그가 말한 ‘더한 짓’을 하자 졸라 대자 설윤은 제가 아픈 것처럼 앓는 소리를 내면서 멀어졌습니다.
“내 상처 때문에 그러세요? 아니면 정인이 생각나셔서 더한 짓은 못 하시겠나요?”
내가 아무리 팔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곳까지 멀어진 그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다시 다가와 나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어요.
“당신입니다.”
“…네?”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손빗으로 빗기고 귓가에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은 귀 뒤로 넘겨 꽂아 준 뒤에 그가 한 번 더 말하더군요.
“당신이 내 정인이라고.”
나는 바보처럼 눈만 댕그랗게 뜨고 끔뻑일 뿐이었어요. 그럴 리가. 내내 옆모습만 훔쳐보다가 오늘 처음 마주한 사이인데. 저이가 애타게 그리워하던 정인이 나일 리가.
나는 느리게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그는 조금 씁쓸하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어요.
“그래요. 날 기억하실 거라는 기대조차 아니 하였습니다.”
“기억…….”
“좋은 날에 돌아와 내 이름을 불러 주겠다 약속하셨어요.”
“내가… 내가요? 언제?”
나는 믿을 수 없다며 고개만 저어 댔답니다. 그의 정인을 못 견디게 부러워하고 부러워하다가 머리가 하얗게 비어서 입술까지 갖다 댄 주제에… 그의 서러움과 기다림이 모두 내 탓이라는 말을 들으니 문득 무서워지고 말았거든요.
설윤은 마치 다 안다는 듯이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괘념치 마세요. 잊고 또 잊으셔도 내가 기억하고, 내가 알아보고, 내가 찾아뵈러 오면 됩니다.”
말은 덤덤하게 하면서도 그의 눈에는 미처 지워 내지 못한 허수함이 남아 있었습니다.
‘어찌해야 좋을까……. 괜한 말, 허튼 말은 절대 아니 할 것 같은 사내인데.’
몇 달을 꼬박 투기하던 상대가 나라니. 그런데 나는 조금의 기억도 없다니. 어이없기도 하고 아깝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원망이 일었어요.
“아니, 이제 와서 애달피 그리워하던 정인이 바로 나라고 하는 거, 이상하지 않아요? 지난 몇 달간 눈길 한번 안 주다가?”
“피 냄새가 아주 진하게 나야 내 감각이 반응합니다. 정인 이외의 사람은 이 방에 놓인 가구와 다를 바 없으니 눈길 주지 않았고요.”
멀쩡한 사람을 의자나 협탁 취급 하는 무심함도 어이가 없었지만 그보다 핑계가 너무 허술하였습니다.
“나는 달거리를 열다섯부터 했는걸요. 피 냄새로 나를 알아본다면 더 빨리 찾아왔어야지.”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손이 우뚝 멎었어요. 그는 나를 쓰다듬던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리다가 살풋 나를 흘겼습니다.
“나는 기억도 못 하시면서 그 가릴 것 없는 성격만은 참 한결같으십니다.”
“내가 뭘…….”
집에서는 눈치 보며 살고 미나미케에서는 주눅 들어 살면서 미련한 척과 유순한 척에는 도가 텄다고 생각했건만. 그는 원래 내 성격을 다 안다는 듯이 말하였어요. 그리고 내가 무어라 변명을 하기도 전에 다소 상기된 얼굴로 서쪽 어딘가를 가리켰습니다.
“나는 경성에서 두 시간이 넘게 차를 타야 겨우 닿을 수 있는 연수산이란 곳에 삽니다. 거기까지 피 냄새가 닿으려면 달… 으, 그걸로는 부족한 듯해요.”
그의 말에 나는 내 옆구리를 내려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고통에 매우 둔감한 체질 덕에 아무렇지 않은 듯이 굴 수 있는 것이지, 보통 사람이라면 사경을 헤매었을 총상이긴 했습니다. 왜놈들이 쏜 총알이 두 방이나 박히고 한 방은 스쳐 지나가서 눈앞이 까맣게 어두워지도록 피를 쏟았거든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또 다른 궁금한 점을 물었습니다.
“그럼 제가 정인이라며 확신하고 오신 오늘은 왜 한참이나 밖에서 비를 맞고 서 계셨던 건가요? 곧장 들어오셔서 이런 이야기를 하시지 않고?”
“창문 하나 너머에 있던 사람을 못 알아본 게 억울하고 부끄러워서요.”
그 말이 이상하게 좋았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좋았느냐 묻는다면 잘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가, 내내 홀로 사랑하였던 이가 나 때문에 억울해하고 나 때문에 부끄러워한다는 게 그냥 마냥 좋던걸요.
자신이 한 말처럼 정말 부끄러운 듯이 귓가를 붉힌 그가 눈을 내리깔고 나직이 말했습니다.
“다음번에는 이렇게 크게 다치시기 전에 더 빨리 알아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는 다시 그에게 입술을 갖다 대었습니다. 우리는 입술을 떼면 숨이 멎기라도 할 것처럼 서로의 살결을 포개고 빙그레 마주 웃었습니다. 내가 크게 다치지 않았더라면 입맞춤보다 더한 짓을 하였을까. 그 ‘더한 짓’이란 과연 어떤 기분일까 설레어 하며 이마를 맞대고 잠들었어요.
잠에서 깨어났을 때에는 또다시 어둑한 저녁이었어요. 마악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는 이른 저녁. 커튼을 반쯤 걷어 둔 창문 밖으로는 인간이 만들어 낸 불빛이 태양이 만든 황혼의 색을 밀어내고 있었지요.
“잘 주무셨습니까.”
어디에 다녀왔는지, 설윤이 바닷바람이 살짝 묻어나는 공기를 휘감고 다가왔습니다. 그의 물음에 입맞춤으로 답하자 다 큰 사내가 어린 소년처럼 웃었답니다. 왼쪽 뺨에 쏙 들어가는 보조개가 참으로 귀여웠어요. 그 볼우물을 한참이나 어루만지면서 입술을 탐할수록 옴폭 들어간 살결이 더 깊어졌습니다.
“더한 짓은 어떻게 하는 거예요?”
“…그 상처로는 못 하는 짓이라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붉게 얼굴이 상기된 그가 몸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언제 사다 놓았는지 모르게 잔뜩 쌓아 둔 상자들을 침대로 가져왔어요.
“어울리실 것 같아 이것저것 골라 보았습니다.”
“양장인가요? 저 양장은 한 번도 입어 본 적이 없어요.”
그게 무어 문제냐는 듯이 그는 이번에도 능숙하게 내 옷을 벗기고 새 옷을 척척 걸쳐 입혔어요. 입어 본 적이 없어 기대된다는 말이었는데 입을 줄 모른다는 말로 착각이라도 한 모양이지요. 단단한 손이 맨살을 스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움찔움찔 몸이 굳었지만 싫지 않았어요. 내가 몸을 작게 떨 때마다 크게 울컥이는 그의 목울대가 아주 마음에 들기도 했고요.
나는 손을 뻗어 곧게 뻗은 목 한가운데에 톡 튀어나온 울대뼈를 만졌습니다. 튀어나온 곳이 크게 꿈틀대더니 그가 스르륵 눈을 감았어요. 원하는 만큼 주무르라는 허락처럼요. 하룻밤 입을 맞대고 잠들었을 뿐인데 그의 모든 것이 당연히 내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남설윤.”
그의 이름을 부르자 대답이라도 하듯 그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습니다.
“내가 당신의 정인이라는데 나는 왜 그 정인이 부러울까요? 당신의 몸은 다 내 것 같으면서도 왜 남설윤의 마음은 온전히 내 것 같지가 않을까요?”
“아직 제게 완전히 돌아오시지 않았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마음을 온전히 내어 주지 않았다?”
“아뇨. 맹세코 나는 내 정인에게 마음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마음 없는 이에게 몸을 내어 드릴 정도로 비위가 좋지도 못하고.”
나는 그의 목을 쥔 채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그는 더 세게 잡으라는 듯이 슬쩍 목을 내밀며 어깨를 으쓱였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마음을 모두 가지지 못하였다 느끼신다면 그건 그대의 마음 탓이겠지요.”
“…내가 기억을 못 한다고 심술을 부리시는 건가요?”
“맞습니다.”
심술이란 단어와는 평양에서 부산만큼이나 멀 것같이 생긴 이가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 어울리지 않는 긍정에 취한 듯이, 나 또한 생전 한 번도 부려 본 적 없는 어리광을 피워 보기로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