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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 부르실 날에-128화 (128/157)

128화

고백하자면 그의 숨소리가 이상한 위안이 되었답니다. 유리창 너머, 부연 와사등 불빛에 비친 옆모습만으로 연모해 버린 사내가 등 뒤에서 곤히 잠들어 있다는 것이 왜 나의 위안이 되었을까요.

눈을 감고 설윤의 숨소리에만 귀를 기울인 지 얼마나 지났을까. 주르륵, 뚝, 뚝, 무언가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와 함께 서묵의 부드러운 음성이 잠잠해지던 나의 불안에 다시 불씨를 키웠습니다.

“오늘 당장은 아니더라도 머지않아 순사들이 아키코 씨를 잡으러 올 겁니다.”

“그렇겠네요.”

“남치수(南治守)인지 미나미 나오모리(南治守)인지… 그놈이 이제껏 해 온 짓으로 판단하면 보나마나 깨끗하게 잡아떼겠죠. 양녀를 잘못 들였을 뿐이라는 핑계로.”

나는 잔잔한 노기가 느껴지는 서묵의 음성에 대답하지 않고 그냥 웃어 버렸어요. 실은 그 또한 나의 목숨값에 포함되어 있었거든요. 창밖에 선 신사분을 방으로 끌어 들여 죽이는 것. 독립 자금을 대는 게 발각되었을 때에 홀로 뒤집어쓰는 것. 이 모두가 내게 매겨진 가격표였답니다.

내가 딱히 부정하지 않자 서묵은 조금 언성을 높였습니다.

“제 안위 생각하여 이런 어린애에게 위험한 일 시키는 거. 언제든 잘라 버리겠단 식으로 굴리는 거. 내 취향이 아닙니다.”

“다정하시네요.”

“대체적으로 그런 편이지요. 이제 돌아봐도 괜찮습니다.”

빙그르 반 바퀴 돌아서니 잘생긴 사내가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잘난 낯을 구기고 있었습니다.

“미치겠네. 아키코 씨… 그 표정을 보니 남치수에게 토사구팽당할 것도 알고 계셨나 봅니다?”

“제가 겉보기만큼 순진하지 못하여서요.”

멋지게 뻗은 서묵의 눈썹이 슬며시 꿈틀하더니 피식대는 웃음으로 풀어졌습니다.

이내 그의 주머니 속에서 짤그랑, 쇳소리가 났습니다. 나와 눈을 맞추고 잠깐 고민하던 그이는 “칫.” 하며 웃음 반 한숨 반으로 혀를 차고는 턱으로 내 손을 가리켰지요.

“손.”

동네 멍멍이를 길들이는 듯한 말투에 왜 화가 아니라 웃음이 나던지. 키득대며 손을 내밀자 남자는 고개를 저었어요.

“하. 못 배운 사람 같으니.”

“…뭘 또 트집 잡으시려고.”

“아키코 씨, 깜짝 선물을 받을 땐 눈 감고 손을 내미는 겁니다.”

입을 삐죽대며 눈을 꾹 감자 손에 무언가가 짤그랑,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어요. 소리도 크기도 아주 가벼운 반지 따위가 부딪치는 느낌이었는데 이상하게 손목이 저릿할 정도로 무거웠답니다. 슬쩍 한쪽 눈을 뜨자 서묵이 코앞에서 어린애처럼 눈을 반짝이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심장이 발목까지 떨어졌다니까요.

“너무 가까우세요.”

내가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고개를 젓자 남자는 설핏 비뚤게 기운 웃음으로 검지를 펼쳐 들었습니다. 나는 이 남자는 손까지 빈틈없이 예쁘구나― 생각하면서 그의 손을 따라 겨우 고개를 숙였어요. 손가락은 내 손바닥 위의 작은 조각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색의 조각이었어요. 방 안을 가득 채웠던 커다란 날개보다 훨씬 어둡고, 오팔 같은 묘한 빛이 일렁였습니다. 마치 이 사내의 눈동자 같구나― 생각한 순간.

“…헉!”

“내 비늘 보고 이렇게 놀라는 사람이 너무 오랜만이라 흐뭇하네요.”

발목으로 떨어졌던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마구, 마구, 마구 뛰어 대기 시작했어요. 아무도 자세히 알려 주지 않았지만 왠지 나는 확신할 수 있었어요. 이건 용의 비늘이구나, 이 사내는 조선이 아닌 다른 세상의 용이구나, 하고요.

내 놀란 얼굴이 어지간히 마음에 드는지 그가 찡긋 한쪽 눈을 감으며 짓궂게 웃더군요.

“아키코 씨. 아무리 좋아도 숨은 쉬셔야지.”

“으……!”

“이렇게 재밌는 얼굴을 할 줄 알았으면 진작 줘 볼 걸 그랬네. 맨날 도깨비가 주워 가기만 했지 누구한테 직접 줘 본 기억이 없어서 내 비늘을 받은 인간이 얼마나 웃기는 얼굴을 하는지 까맣게 몰랐어.”

“이, 이, 이리 귀한 걸 제게 왜……!”

“그게 귀하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 다행입니다.”

알다마다요. 너무 귀하고 두려운 것이라 쥐어 취하지도 버리지도 못한 채 눈썹만 찡그리며 물었지요.

“누구에게 주신 건 제가 처음인가요?”

“그런 셈이죠. 바보 같은 도깨비가 멋대로 주워 간 것 말고 내가 누군가에게 직접 준 건 처음이에요.”

“하면 받을 수 없습니다.”

나는 손바닥째 그에게 내밀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처음이란 건 아주 중요하답니다. 소중한 이가 나타나거든 그분께 처음으로 건네주세요.”

“소중한 이에겐 막 뜯어낸 비늘 따위보다 더 곱고 귀한 것만 고르고 골라 줄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손마디로 내 손가락을 밀어 접었습니다. 직접 닿기는 싫지만 어린애가 고집을 부리니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몸짓이었어요.

“나는 누가 죽어 없어지는 것도 아파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아요.”

서묵은 나와 닿았던 손마디를 내 옷에 슥슥 닦았습니다. 그러면서 태연하게 하던 말을 이어 갔어요.

“살아남기에도 상처받지 않기에도 쉬운 세상은 아니잖습니까. 나한테는 널리고 깔린 비늘이지만 아키코 씨에겐 요긴하게 써먹을 만한 물건일 테니 잘 챙겨 두시라고.”

“…그래두…….”

“그냥 받기에 정 불편하면 내가 부숴 버린 물건들 값 치른 셈 하고.”

나는 그제야 그의 의도를 알아챘습니다.

“제게 부탁하실 게 있는 거죠?”

“그래요. 부탁이라기보다는 당부에 가까운데.”

서묵은 처음보다 훨씬 안색이 좋아진 설윤을 내려다보며 귓가를 긁적였습니다. 머뭇대는 모습마저도 사람을 홀릴 듯 하염없이 아름다운 사내라 구경하는 동안 심심하지는 아니하였지요.

뭐가 그리 어려운지 비 내리는 창밖을 쳐다보면서 참 오래 망설이던 서묵이 드디어 입을 열었습니다.

“남설윤이 말입니다… 아키코 씨가 떠날 수 있도록 배표를 구해 놨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네?”

“제 정인이 분명 독립운동을 할 거라나, 위험하다 싶은 순간에 나라 밖으로 빼돌릴 거라나. 아무튼.”

“정인이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고요?”

안타까운 듯도, 슬픈 듯도 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던 서묵은 끝내 아무 대답도 해 주지 않았습니다. 한참이 지나서야 영 딴소리를 할 뿐이었어요.

“아키코 씨는 인간치고 영안도, 신력도 꽤 쓸 만해요. 머리를 잘 굴리면 내 비늘이 아키코 씨 재능을 더 키우는 데에 꽤 도움이 될 겁니다.”

나는 손에 들린 그의 비늘을 내려다보았어요. 시린 듯하면서도 이상하게 따뜻한 것. 보석 같기도, 쇳덩이 같기도 한 이상한 비늘을요.

기다란 손가락이 내 손바닥 위에 놓인 비늘을 툭 건드렸습니다.

“비늘이 두 개니까 하나는 아키코 씨 수련에 쓰고, 나머지 하나는 기회 봐서 팔아먹어요. 이왕이면 명성을 쌓고 몸을 지킬 수 있게 된 뒤에 팔길 추천합니다.”

“용의 비늘을… 어디에 팔라고…….”

“어디에 팔지는 본인의 결정이지.”

다정한 소리를 참으로 밉살맞게 하는 습관이 있는 사내가 어깨를 으쓱였습니다.

“그걸 이용해서 명성을 높이고, 부를 누리고… 더 비싼 대가를 치르는 이, 더 어려운 부탁을 하는 이들과 친해지세요. 그다음에 여유가 생기면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말씀하세요.”

짧은 한숨과 긴 침묵이 돌아왔습니다. 빗소리가 조금씩 다시 사나워질 때쯤에 서묵이 아주 은밀하게 속삭였어요.

“호적 서류 하나를 찾아 줘요.”

“호적?”

“연수산에 살던 이들인데… 호주는 이웅헌. 영이라는 딸이 있고 데릴사위에게 제 성씨를 주어 서양자로 들였어요. 사위 이름은 민재입니다.”

“조선인의 호적을 나라 밖에서 찾으라고요?”

그이의 한숨이 보다 깊어졌습니다.

“작년 봄에 면사무소에서 나와 시장을 둘러보던 이영이 끌려가는 걸 본 사람이 있어요. 잡혀가는 딸을 따라가다가 이웅헌마저 징집되었다는 것까지는 알아냈습니다.”

“아…….”

급히 입을 틀어막았지만 탄식이 새어 나오는 것을 막지는 못하였어요. 작년 봄이라면 국가 총동원법이 마악 시작된 때지요.

“젊은 여인들은 전쟁터로, 사내들은 탄광으로 보낸다 하여 난리였는데… 그때에 휘말린 이들을 찾으시는 모양이지요?”

“맞아요. 주소는 산골짝인데 여느 산골 화전민과 달리 부녀의 행색이 남달리 번듯했던 게 오히려 화가 된 듯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어요. 혹독한 공출로 끼니를 제대로 챙길 수 없어 피골상접한 조선인들도 마구 잡아들이는데… 제법 힘 좀 쓸 것 같은 멀끔한 이를 보았다면 고민도 없이 끌고 갔겠지요. 나는 빠드득 이를 갈았습니다.

“천벌받을 놈들.”

“그 천벌받을 놈들 중 한 놈이 마을째 동원하자고 했다더군요. 그 말을 듣자마자 이웅헌이 꽤 크게 반항하면서 동회로 달려 들어가 호적을 뜯어 삼키었다 해요.”

가만히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던 나는 이마를 찌푸렸습니다.

“제게 산 사람 배를 갈라 호적을 찾아내라 시키시는 건 아닐 터이고…….”

“물론 아닙니다. 아키코 씨는 잘 감춰 둔 내 날개도 뚜렷이 보았을 정도로 영안이 트인 사람이기에 부탁하는 거지요.”

그는 이영과 이웅헌이 죽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분명 이웅헌은 왜의 탄광으로 끌려가서 목숨을 잃었으리라. 그리 확신하였기에 내게 제 비늘까지 쥐여 주며 부탁한 것이었어요.

그이가 설윤을 가리켰습니다.

“보세요. 남설윤은 생긴 것만 봐도 정나미 없이 깐깐하고 빈틈없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저런 인간과 내가 찾고 또 찾아도 조선에서는 그 두 사람의 혼백조차 아니 보입니다. 그래서 조선에는 시체조차 없다 확신한 게지요.”

“두 분이 직접 가 보시는 건…….”

“사실 나도 직접 찾는 게 속 편하긴 한데, 안타깝게도 내 눈에는 인간의 혼백이 잘 보이지 않아요. 인간의 혼은 너무 작고 나는 너무나 큰 존재라 도통 안 보이더라고.”

서묵의 말을 몇 번쯤 곱씹자 그가 내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겨우 알 수 있었습니다.

왜의 고위층과 친분을 쌓아 징집된 이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아내라. 어떤 지역인지 범위를 좁혔다면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닌 혼백에게 수소문하라.

그래서 높은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도록 귀한 비늘을 내어 준 것이었어요. 내 눈빛에서 생각을 읽은 듯, 서묵이 씁쓸히 긍정하였습니다.

“쉽지 않은 부탁인 건 압니다. 하지만 우리들만으로는 이제 더 이상 도리가 없어요.”

“해 보겠습니다.”

“…대답이 너무 빠르지 않아요?”

서묵이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기울였습니다. 나는 도리어 홀가분하게 어깨를 으쓱였어요.

“제가 사기꾼 부모에게서 뭘 배웠겠어요. 우리 엄마가 항상 말했답니다. 불안한 시대, 가진 것 많은 이들일수록 미신에 기대게 된다고요.”

“그럴싸하네.”

“그쵸? 아주 뛰어난 점술사 행세를 하다 보면 언젠가는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머뭇대던 서묵은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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