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이 상처 처리는 혼자 하신 겁니까?”
“네. 급한 대로 꿰맸는데… 아무래도 좀 흉하지요? 많이 이상한가요?”
도리도리.
그가 고개를 젓자 새카만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뚝, 떨어졌습니다.
“너무 능숙한 처치라 속이 상합니다. 얼마나 많이 다쳐 보았으면 이리 큰 상처를 이렇게나 정갈하게 봉합하였나 싶어서.”
“어쩌다 다쳤는지는 아니 물으시네요.”
“이런 시절에 어린 아가씨가 새벽녘에 총을 맞고 그 상처를 숨길 일이라면 하나뿐이겠지요.”
“…….”
“먼저 말씀해 주시지 않는 이상에야 굳이 묻지 않으려 합니다.”
마음 한구석이 간질간질해졌습니다. 상처가 다 아물어 갈 때의 그 느낌처럼요. 다친 곳이 그렇게 간질거릴 때에 긁적이면 덧나기 마련인데… 마음 또한 그러하겠지요. 간지럽다 하여 건드리면 곪아 버리겠지요.
맨살을 스치는 손이 새삼 민망해 몸을 움찔거리자 그가 눈썹을 끌어 내렸습니다.
“차갑습니까? 그래도 이제는 사람의 체온과 크게 다르지 않을 터인데.”
“아니… 차가운 게 아니라…….”
“그럼 아프십니까?”
도리도리.
나는 입술을 꾹 닫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프냐 묻는 그의 음성에 웃음기가 어려 있었거든요. 내가 왜 움찔대는지 알면서 묻는 게 분명하였어요.
나는 가지런히 눈을 내리깔고 소독을 하는 그이를 바라보다가 말을 돌렸습니다.
“이제 저를 취하실 건가요?”
“아뇨.”
고개를 젓자 또다시 그의 머리카락에서 흘러내린 빗물이 깎은 듯한 얼굴선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나는 가끔, 아니, 비 내리는 날이면 항상 이 순간을 떠올립니다. 눈물처럼 흐르던 빗물에 왜 가슴이 시렸을까. 눈물이 아님을, 날 위한 무엇도 아님을 알면서 왜 두근대고 시큰했을까.
창문에 알알이 맺힌 빗방울만큼의 질문을 반복하고서야 겨우 깨달았습니다. 그게 날 위한 눈물처럼 보였다는 걸요. 진짜 눈물이 아니면 어떻습니까? 내가 날 위한 눈물이라 느끼었으면 그만이지요. 난생처음으로 나를 위해 울어 주는 누군가를 마주했으니, 아키코 아가씨의 대역으로 팔려 온 천것 주제에 어찌 반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나는 주책없이 시큰거리는 코끝과 두근대는 심장을 누르며 그를 쳐다보았습니다.
“객의 이름만이라도 안고 죽고 싶습니다.”
“하늘이 두 쪽 나도 내가 그대를 죽이지는 않을 터이니 헛된 기대는 접으세요.”
“…….”
“내 이름은 설윤. 남설윤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밝힌 그가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였습니다.
“어우. 요즘 청춘들은 참 빨라요. 벌써 침대 위네?”
갑자기 어떤 사내가 불쑥 나타났어요. 이 어이없는 순간의 기억이 어제처럼 선명합니다. 부드럽고 맑은 목소리로 포장한 모난 말, 우리 사이를 턱 가르고 빗방울을 사납게 흩뿌리는 검은 장우산 같은 것들 말이지요.
아마 그 사내가 내 생각을 읽었다면 “우산보다 뒤에 언급될 얼굴이 아닌데, 내가.”라고 투정하였겠습니다마는… 새카만 우산 뒤에서 꽃처럼 웃고 있던 그의 모습은 한참 뒤에야 눈에 들어왔답니다. 정말이에요.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딱 한 번, 우산을 휙 휘두르자 설윤의 기다란 몸이 젖은 종이 인형처럼 날아가 방구석으로 처박혀 버렸으니까요.
“누구십니까! 뭐 하는 짓입니까!”
“내가 누군지는 경성에 모르는 이가 없을 텐데. 쓸데없이 시간을 끄시네.”
“…….”
“다음 질문에 답하자면, 나는 지금 밥투정 잘하는 고양이 밥 먹이러 온 거예요. 아키코 씨는 환자니까 신경 쓰지 말고 쉬고 있어요.”
“…….”
왠지 언젠가 똑같은 말을 들었던 것 같았어요. 기억을 더듬으며 미간을 찌푸리자 그가 방긋 웃었습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기억을 못 하네요. 하긴. 예전부터 머리가 썩 좋지는 않은 사람이었죠.”
그는 나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는 듯한 태도로 벽에 부딪쳐 혼절한 설윤에게로 다가갔습니다. 그러더니 설윤을 헝겊 인형처럼 집어 들어 내 곁으로 휙 집어 던졌어요.
“볼 때마다 점점 작아지는 것 같은데도 여전히 잘 어울리네.”
“네?”
“그쪽이랑 거기랑 둘 말입니다. 잘 어울린다고.”
마치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인 것처럼 중얼거린 그가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안부 인사라도 묻는 듯한 얼굴로 능청스럽게 묻더군요.
“애 재워 놨으니 긴밀한 대화를 나눠 볼까요?”
남자는 그렇게 물으며 도망갈 생각도 못 한 채 얼어붙은 내게로 아주 천천히 걸어왔어요.
장우산을 지팡이 삼아 비스듬히 기대선 남자가 흐드러진 꽃처럼 미소하며 날 향해 돌아섰습니다. 그의 말이 맞아요. 경성에 저 그림 같은 사내를 모르는 이는 아마 없을 겁니다.
서묵.
일주일에 두어 번씩 새카만 자동차를 타고 신작로를 내달리는 사내. 사치스러운 차림으로 명치정의 백화점들을 둘러보고 킷사에서 커피 한 잔에 곁들여 담배 한 대를 피우고 돌아가는 남자. 대체 어디에 사는, 어느 댁의 자제인지 아무도 모르지만 모두들 말 한마디 걸어 보고 싶어 하는 이. 그 화려하고 비밀스러운 남자가 어떻게 내 방에 소리도 없이 들어와 설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답니다.
“이것저것 곤혹스러워 보이십니다?”
그가 물었습니다. 당황스러움도 잊고 짜증이 울컥 치밀었을 정도로 명백히 놀리는 투였어요. 틀린 말은 아니었지요. 내 방에 갑자기 서묵이 나타났다는 것도, 내가 수건 한 장 걸치고 있을 뿐이라는 것도 매우 곤란하였으니까요.
“돌아앉아서 100 정도 세고 있을 테니 뭐라도 좀 걸치고 이리 오세요.”
서묵은 장난꾸러기처럼 씩 웃으며 티 테이블 앞에 턱 하니 자리 잡고 내게 등을 돌렸습니다. 어이가 없어 눈을 데굴 굴리면서도 나는 서둘러 옷장에서 유카타와 하오리를 꺼내 대충 걸치고 그의 앞에 섰습니다.
“여긴 어떻게 들어오셨습니까?”
“이 세상에 내가 못 가는 곳은 없어요, 아키코 씨.”
“…….”
“저 손 많이 가는 놈이 말이죠. 혈압이 낮아서 비가 오면 꼼짝도 안 하던 주제에 오늘은 눈 뜨자마자 미친 것처럼 튀어 나가더라고요. 혹시나 싶어 따라와 봤더니― 여기네요.”
짠.
그는 극장의 배우처럼 양팔을 펼치고 자신만만하게 웃었습니다. 장난을 치고 뿌듯해하는 어린아이 같은 표정이었어요.
아름다움이 지나쳐 두렵기까지 한 얼굴의 사내는 곧이어 내 허리춤을 가리켰습니다.
“상처는 좀 어떻습니까? 꽤 크게 다친 것 같던데.”
나는 대답보다도 먼저 이마를 구겼어요. 이 남자나 저 남자나… 어떻게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내 상처를 훤히 알고 있는 걸까요? 목욕 시중도 마다하고 붕대를 겹겹이 둘러 몰래 숨기고 있는데 말이에요.
“괜찮습니다. 염려해 주신 덕분에요.”
“목소리에 진심이 하나도 없네.”
“…….”
“아키코 씨는 지금 그것보다는 조금 더 나한테 고마워해야 해요.”
“제가요?”
“응. 저쪽은 피 냄새에 눈 뒤집히기 직전이었고, 아키코 씨는 눈 뒤집힌 서양 창귀한테 먹히기 직전이었어요. 서로 아슬아슬하던 순간에 구해 준 거라고, 내가.”
기절할 것 같은 소리를 나긋나긋 지껄인 서묵은 검지를 쭉 펴 들고 나를 가리켰어요. 그리고 고개를 갸웃대며 나를 살피었어요.
갸웃, 갸웃, 갸웃.
세 번쯤 아주 느리게 좌우를 오가던 얼굴이 정확히 중심을 잡고 꼿꼿하게 서더군요. 살짝 들어 올린 턱. 하찮은 것을 깔아 보는 새파란 눈동자. 스르륵 옆으로 길게 늘어진 미끈한 입술. 그는 그저 고요히 날 보고 있을 뿐인데 이상하게 턱이 덜덜 떨려 왔습니다.
“지, 지금 제게 뭘 하시는 거예요?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요.”
“속박.”
“속박이요?”
입술을 덜덜 떨며 묻는 내 앞에서 남자는 흡족하게 박수를 쳤어요.
“방금 꽤 그럴싸했어요. 거짓말만큼이나 무구한 척도 수준급이시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일순, 그의 등 뒤로 새벽을 닮은 어두운 쪽빛이 거대한 날개 모양으로 펼쳐졌습니다. 무심결에 일곱 개나 되는 날개를 눈으로 더듬다 아차! 하면서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때엔… 이미 변명하기 너무 늦은 상황이었지요.
서묵이 아주 다정히 웃었습니다.
“예쁘죠, 내 날개.”
“…….”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멍청한 척은 곧잘 하면서 안 보이는 척은 잘 못하더라고, 인간들이.”
나는 그 남자만큼 상대를 부드러이 업신여기는 이를 본 적이 없습니다. 말투도, 목소리도, 미소도 녹일 듯 다정한데 어찌 그럴 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에요.
“이 집 주인이 굳이 영안 트인 인간을 양녀로 들여서, 굳이 남설윤 앞에 미끼로 내놓은 이유가 뭘까요?”
“서묵 씨가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저는 통―”
“저런. 그 비슷한 대사는 앞에서 이미 한 번 써먹었는데.”
더없이 다정한 얼굴로 핀잔한 서묵이 탁자를 가리켰습니다.
“아키코 씨가 숨긴 패는 나한테 거의 다 까였어요. 그러니까 이 이상 빼지 말고 속 곯은 어른들끼리 허심탄회한 대화의 시간을 가져 볼까요?”
이따위 뼈 있는 소리가 그럴싸하게 들리는 것도 다 서묵의 저 낯짝 탓입니다. 그가 초봄 같은 남자이기 때문이에요. 창을 거쳐 들어온 화창한 햇살로 보는 이를 홀려, 가벼이 입고 나간 순간 고뿔이 스미게 하는 고 심술궂은 날씨를 꼭 닮았다니까요.
서묵의 탓을 하며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그 남자는 여전히 유난스레 쌀쌀맞던 경성의 봄을 닮아 있을까요? 아니면 이제는 스치는 바람에 벚꽃 흩날리는 늦봄을 닮았으려나요?
“내가 눈에 힘 좀 줬다고 그렇게 얼어붙어 있으면 좀 재미없습니다? 듣자 하니 남설윤 잡아 죽이려고 많이도 연구하셨다더만.”
“…누가…….”
“누구긴.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답니다. 내가 경성 바닥 소문을 다 긁어모으는 취미가 있어서.”
그는 동무와 비밀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입 옆에 손을 세우고 한쪽 눈을 찡긋했습니다.
“남설윤은 여길 팔아 버린 뒤로는 이 집 주인 따위에게 일절 관심을 끊은 모양이지만 나는 아니었어요. 남설윤이 여길 팔아 버린 것도 찜찜하고, 남치수가 집문서를 넘겨받자마자 본격적으로 부역자 노릇에 열을 올리기 시작한 것도 왠지 찜찜하더라고요.”
그의 시선에서도, 시야에서도 벗어나지 못한 채 입술을 꾹 다물고 주먹을 말아 쥐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서묵은 느긋하게 팔짱을 끼면서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나를 쳐다보았어요.
“예의 주시 하던 중에 이 집 주인 놈이 양녀를 들인다는 핑계로 신력 좋고 영안 트이고 내일 없이 사는 가난한 집 여자아이들을 수소문하기 시작하더라고. 잘됐다 싶어서 좀 알아봤지.”
“다 알고 오신 모양이네요.”
“아마? 다는 아니어도 거의?”
더 이상의 변명은 무용하였지요. 나는 쏟아붓는 빗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이다, 침대에 누워 고른 숨을 내쉬는 설윤을 바라보다, 요요히 아름다운 서묵을 향해 턱을 들어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