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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 부르실 날에-125화 (125/157)

125화

“우십니까.”

소리도 없이 다가온 차가운 그의 손이 내 뺨을 감쌌습니다. 단단한 손끝이 언제 젖었는지도 모르게 눈물 매달린 속눈썹을 쓸어 달래고, 기다란 손가락이 귓바퀴를 쓸었습니다.

“비 오는 날이 울기에는 참 좋지요.”

사각사각.

살이 살을 보듬으며 달래는 소리가 귀를 가득 메웠습니다. 내 모든 감각이 그의 손끝에 휘둘리는 것 같은 기분으로 마른침을 삼키자 낮은 목소리가 사각이는 소리와 함께 내 안을 파고들더군요.

“제가 다른 것은 몰라도 눈물만큼은 얼마든 닦아 드릴 수 있습니다.”

귓속으로 스며드는 낮은 목소리에 오싹 소름이 일었습니다. 그의 손가락에 갇혀서야 나는 내 뺨이, 귀가 얼마나 뜨거운지 알았어요.

“속 후련해질 때까지 우시면서 기분 내킬 때에 천천히 말씀해 주세요. 이 집의 주인이 그대에게 또 무슨 말을 전하라 하였습니까?”

나는 연신 마른침만 삼켰습니다. 찌르고, 쏘고, 던지고, 구르는 훈련을 나름대로 꽤나 열심히 하였는데… 배운 노력이 무의미할 정도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답니다. 그건 아마 그의 체온 낮은 손이 어린 강아지를 달래듯 열 오른 내 살결을 느릿하게 문지르고 있었기 때문일 거예요.

“서두를 필요 없습니다. 밤은 기니까.”

그 달콤한 말이 유혹으로 포장된 종용임을 알기에 움츠러든 나의 어깨는 펴질 줄 모르고 뻣뻣하게 굳어 버렸습니다. 그는 내가 생명 줄처럼 끌어안은 수건 중 하나를 스윽 빼어 내 나의 어깨에 둘렀습니다.

“오래 망설이실 듯하니 조금 더 편하게 모시지요.”

좋다 싫다 말할 새도 없이 그가 나를 답삭 안아 올려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습니다. 곧 등 뒤에 푹신한 것이 닿았습니다.

침대. 침대였습니다. 물기 가득하게 시린 사내가 더 가까워져 나는 그만 숨을 참고 눈을 꽉 감아 버렸지요.

옹크린 몸을, 발끝을 교차해 힘주어 모은 무릎 새를 그의 단단한 무릎이 느리게 가르고 들어왔습니다. 발등까지 덮은 두툼한 누비 잠옷이 그의 움직임에 쓸려 허벅지 위까지 말려 올라갔습니다.

눈을 감은 채로 어디까지 올라갔는지 어찌 확언하느냐 타박하신다면… 글쎄요, 하고 고개나 갸웃하겠습니다. 초봄의 한기가 드러난 살결에 오스스 소름을 일게 했으니 허벅지까지 걷히었구나, 짐작하였던 게지요.

고민을 하라구선 무슨 재촉이 이 모양이냐며 바락 소리치려던 찰나. 젖은 옷감의 감촉이 하녀 아이들도 닿지 않는 곳까지 닿는 바람에 퍼뜩 정신이 들었습니다.

“이… 이 무슨 무도한 짓입니까!”

꾹 감았던 눈을 뜨니 그의 연한 나무색 눈동자에 온통 내가 가득 차 있지 뭐예요. 코가 닿을 듯 가까워진 얼굴에 숨이 턱 멎었습니다. 베개에 뒤통수를 부비며 더 물러날 곳도 없이 얼굴을 무르자 이슬을 매단 사내의 눈꼬리가 조금 더 아래로 휘었습니다.

“재밌으십니까? 아무리 자유연애가 유행이라 하여도 과년한 남녀가 이― 이렇게 한 침대에 있는 건 도의에 맞지 않아요!”

“경고했었지요. 나 같은 이를 방으로 들였다간 분명 무도한 일을 겪게 될 거라고.”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창백한 피부에 붉은 입술만 유난히 도드라진 그가 낮고 낮아 긁히는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습니다. 나야 뭐, 도리질만 열심히 쳐 대었지요.

“나는 미쓰코시 옥상 정원에서 사내와 차 한잔 마셔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처음 대면한 사이에 이리 침대에 엉켜 옷자락을 들추시다니요!”

나는 맥없이 물러났던 손에 다시 힘을 주어 있는 힘껏 그의 가슴팍을 밀었습니다. 꿈쩍도 하지 않을 줄 알았던 사내는 내가 미는 대로 훌쩍 멀어졌습니다. 길고 긴 한숨과 함께 그의 얼굴에 어린 미소가 사라지고 내가 알던 서늘한 사내의 얼굴로 돌아왔어요.

“…나에 대해서 주인에게 들어 알고 있는 것 아니었습니까?”

“압니다! 아키코의 목숨을 거두실 이라는 거!”

“…내게 아가씨의 청을 들어 달라 하였잖습니까?”

“그러니까요! 목숨만 깔끔히 거둬 가시면 될 일을 왜 욕까지 보이려 하십니까?”

나는 허벅지가 아니라 허리춤까지 말려 올라간 치맛자락을 급히 끌어 내리고 원망을 가득 담아 그를 노려보았습니다. 그는 귓불을 발갛게 붉히며 느릿하게 되묻더군요.

“수건의 용도를 똑똑히 아신다고… 하셨잖습니까.”

“객께서도 계약서를 보셨으면서 뭘 물으십니까!”

“수건에 남은 흔적을…….”

“예! 객께서 저를 해하시고 흐른 피! 그 흔적! 이 파렴치한 짓과 수건이 대체 무언 상관입니까!”

나는 욱신거리는 옆구리의 고통도 잊고 크게 소리쳤습니다. 그는 몇 번이나 입을 달싹거리다가 침대 기둥까지 물러나 그곳에 몸을 기대었습니다. 그러고는 항상 꼿꼿하던 허리에서도 어깨에서도 힘을 스륵 빼고 아무렇게나 앉아 버리더니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 아니겠어요?

“…내가 저런 어린애에게 무슨 몹쓸 짓을.”

“스물입니다! 스물!! 스물이라고! 작은 거지 어린 게 아니― 읍!!”

멀찍이 떨어졌던 그가 날듯이 다가와 손으로 내 입을 덮어 막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동시에 문밖, 응접실에서 타박타박, 발소리가 들렸습니다.

“아가씨. 계속 소란한 소리가 들리어서 여쭈어요.”

그의 눈이 응접실 쪽을 한 번, 발코니를 향해 난 창을 한 번 돌아보았습니다. 떠나려는 거구나. 심장이 침대 밑까지 쿵, 내려앉았습니다. 욱하여 소리치긴 하였으나 그를 보낼 마음은 없었어요.

“아가씨?”

나는 눈을 깜빡였어요. 날 믿어 보라고. 내 뜻이 전해졌기를 바라며 몇 번이나 힘주어 눈을 깜빡였습니다. 겨우 알아들은 그가 내 입을 막은 손에서 천천히 힘을 뺐습니다.

얽은 시선이 거미줄이라도 되는 듯, 속눈썹은 거미줄에 낚인 나비라도 되는 듯. 맞닿을 것처럼 가까워진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습니다. 바닥까지 떨어졌던 심장이 속눈썹 언저리까지 달려와 뛰고 있는 기분이었지요. 그때였어요.

“아가씨, 들어가겠습니다.”

“이 밤에 잘 자는 이 깨워서 무슨 소란이야!”

달칵, 문고리 돌아가는 소리에 나는 냅다 소리를 질러 버렸어요.

“…네?”

“곤히 자는 걸 왜 깨우느냐고!!”

“…잠꼬대가 들리어서.”

“원, 예민하기두 해라. 닫힌 문 너머 응접실서 내 잠꼬대가 들리던?”

“…실례하였습니다. 주무시어요.”

혹여 그가 훌쩍 떠나가기라도 할까 겁이 났습니다. 가지 말라 부탁하지는 못하고 그저 내 입을 막았던 미운 손만 양손으로 꼭 붙들었습니다. 그러고서 하녀 아이 들으라며 한껏 큰 소리로 핀잔하였어요.

“얘, 네가 깨운 바람에 잠을 다 설쳤다. 내일 아주 늦게 일어날 터이니 절대 깨우지 말렴.”

“알겠습니다, 아가씨.”

문 앞을 서성이던 발소리가 응접실을 거슬러 나가 문을 닫고 복도로 멀어졌습니다. 그제야 후우― 길고 긴 한숨이 흘렀습니다.

“이제 하세요.”

“무얼 하라고.”

“신사분께서 아키코에게 하시려던 일을요.”

“…하아.”

내 한숨보다도 더 긴 한숨이 사내의 붉디붉은 입술에서 흘러나와 나의 손 위로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그이는 내게 잡힌 손을 빼내었어요. 내 딴엔 더없이 절박히 잡았던 손인데… 멀어지기는 어찌나 쉽던지.

텅 빈 손을 내려다보는 사이에 그는 내 목뒤를 감싸 안고 다시 침대 위로 눕히고 있었어요.

“상처가 벌어진 듯합니다. 누우세요.”

“사, 상처라니요?”

가지런한 속눈썹이 빼곡한 눈이 스륵,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내 옆구리를 보면서 아주 잠깐 고민하던 그는 이내 내 옷자락을 잡더니 종잇장처럼 북 찢어 버렸어요.

세상에. 너무 놀라면 소리도 나오지 않는다는 걸 이때 처음 알았답니다.

“몸에서 힘을 푸세요. 이렇게 큰 상처를 입고선 언제까지 아무렇지 않은 듯 구시려 했습니까?”

가볍게 타박하면서도 그는 내 잠옷을 찢어 던지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내 너무 고와서 희끗한 흉터가 더 돋보이는 그의 손이 능숙하게 침대 여기저기에 널브러진 수건 하나를 집어 들었어요.

“지금부터 그대가 그리도 원하시던 수건의 ‘자국’을 좀 남겨 보지요.”

놀리는 듯한 말투로 툭 말을 내뱉은 그는 쉼 없이 수건을 겹겹이 깔고, 놀라 굳어 버린 내 몸을 들어 올려 그 위로 올리고, 또 다른 수건을 펼쳤어요. 다 큰 여인을 알몸으로 만들었으면서 낯빛 하나 변하지 않더라고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그의 앞에 누워 있다는 데서 오는 부끄러움은 오직 나만의 것이었습니다.

스윽. 스르륵. 툭.

천이 쌓이고 스치고 몸을 덮는 소리, 몸에 감겨 오는 수건의 촉감에 솜털이 바짝 섰습니다. 그는 수건의 한구석만 들춘 채 책망하는 듯한 눈으로 옆구리의 상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변명할 수조차 없어진 나는 머뭇머뭇 중얼거렸어요.

“제가 다친 걸 어찌 아셨는지……. 언제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주인에게서 듣지 않았습니까? 내가 피를 탐하는 괴물이라고.”

그는 태연하게 자신의 코를 툭툭 건드렸습니다. 여전히 눈동자는 나의 상처에만 못 박힌 듯이 머물러 있었고요.

“내가 잠들기 전까지는 아무 느낌이 없었고, 훤한 낮에 총을 맞지는 않으셨을 터……. 아마 오늘 동틀 무렵에 입은 상처겠군요. 소독은 잘하신 건가요?”

맨살에 닿는 수건의 촉감이 이상하게 간지러워서 나는 발끝을 꼼지락대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변명했어요.

“네에, 뭐. 이 정도 상처는 익숙하답니다. 괜찮아요.”

“괜찮은 상처가 아니었던 탓에 내가 그대가 누구인지 알아채고 찾아온 겁니다. 나는 어지간히 흘린 피로는 확신을 못 하거든요.”

“네?”

“피를 이렇게 쏟아야만 알 수 있으니… 진작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는 한탄도 못 하고. 하…….”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그는 말 걸기 어려울 정도로 매섭게 인상을 구겼습니다. 그러고는 상처로 더 가까이 얼굴을 가져갔습니다.

“저어… 저는 진짜 괜찮아요. 태어날 때부터 아픔을 잘 느끼지 못하는 체질이래요.”

찌푸리고 있던 그의 눈이 본 적 없이 커졌습니다. 그러나 눈동자 안에 가득 차올랐던 반가움과 기쁨은 이내 서운함과 슬픔으로 씻겨 나갔어요.

“내 신이 나는 까맣게 잊었어도 내 부탁만은 기억해 주었던 모양이네요. 그만 아팠으면 좋겠다고 빌고 또 빌었던 보람이 있습니다.”

좀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그의 슬픔이 묵직한 그림자처럼 전신을 덮었기에 나는 그냥 입술만 잘근거렸지요. 그는 마치 자신의 방인 것처럼 침대 곁의 탁자 서랍에서 약품이 든 상자를 꺼내 들었답니다. 그것이 거기 있던 것은 어찌 아셨느냐 물어도 대답조차 하지 않고 꽤 한참이나 말없이 상처를 치료해 주던 그는 약과 붕대가 든 상자를 탁, 덮은 뒤에야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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