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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 부르실 날에-124화 (124/157)

124화

그가 나의 추레한 삶을 확인합니다. 낮게 울리는 근사한 목소리로 들어서 그런가… 남의 이야기같이 들리더군요. 부잣집 아가씨들을 대신해 팔려 가고 죽는 신세가 드물지 않은 세상 아닙니까. 내까짓 게 뭐라고 내 신세를 유난스레 비참해하고 부끄러워했는지, 원.

새삼스러운 부끄러움으로 그날을 다시 되짚어 보았습니다. 경성 우편국도, 종로 거리도, 편지를 전해 준 우체부도, 죄다 밉고 미웠던 날이었답니다. 세상 모든 것이 죄다 미워서 나 홀로 익애하던 사내의 옆모습만 하염없이 기다렸던 날이란 말입니다. 옆모습이 참으로 단정하고 매정하던 그이라면 내가 이렇게 구차하게 애원하지 않아도 단번에 내 목숨을 가져가 주지 않을까 기대하면서요.

주인어른 말씀대로 그이가 수호신이 아닌 악귀라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내 생을 거두어 주리라 믿었습니다. 나는 그런 믿음과 기대를 가득 담아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집어 들었습니다.

“보신 그대로여요. 내가 객께 죽어야 내 가족이 잔금을 받습니다.”

그가 눈가를 거칠게 문지르며 고개를 휙 돌렸습니다. 내가 몰래 훔쳐보며 익애하였던 그 옆모습에 나는 나도 모르게 작게 감탄하고 말았어요. 동시에 매우 서글퍼졌답니다.

창문 너머, 옆모습이 아름다웠던 그이와 눈앞의 이상한 사내를 서로 다른 이로 생각하자 마음먹었다 한들… 내가 나를 속일 수 있었겠습니까. 몰래 연모하던 이에게 “나는 이 집에, 당신에게 죽으러 팔려 왔다. 하니 죽여 달라.” 이렇게 매달리고 싶었을까요.

뭐라 덮어씌우고 변명해도 부정할 수 없이 섧고 슬프고 안타까웠답니다. 어차피 죽을 목숨, 숨겨 보았자 무엇 하랴 싶어 그 기분까지 숨김없이 내보였어요.

“창 너머의 옆모습, 손끝에 맺힌 빗방울… 그런 꿈같은 것만 가슴에 품은 채 고이 눈감고 싶었답니다. 제 평생의 소원이란 게 고작 이런 것인데 들어주실 수 없나요.”

나는 내친김에 팔을 뻗어 창가 곁의 협탁 서랍에 넣어 두었던 다른 종이도 꺼내 들었습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여기, 주인어른과 쓴 계약서도 보세요. 제발.”

“…….”

“아버지가 많이 아프시대요. 약값이 필요하대요.”

사내의 손이 못마땅해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고 내가 내민 종이를 받아 들었습니다.

[잔금은 창밖의 사내에게 몸을 바친 뒤에 수건에 남은 흔적과 사망을 확인 후 지급함을 원칙으로 함.]

몇 번이나 계약서를 반복해서 읽던 그가 눈썹을 찌푸리고 물었습니다.

“집주인이 내게 이걸 내밀라 시키던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저를 쉽게 취하지 않으시거든 보여 드리라 하셨어요. 그러면 객께서 제 삶을 불쌍히 여기시어 눈 딱 감고 거두어 주실 거라 말씀하셨습니다.”

“남치수 이 미친……. 딸이 상사병 걸려 죽어 가는 걸 보더니 돌아 버린 건가.”

그가 주인어른을 욕하며 아까보다 더한 한숨을 흘렸습니다. 저렇게 차가운 사람도 입김이 생기는구나. 울며 비는 와중에도 그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몸을 바치게 해 주세요.”

“아키코 씨, 몸을 바친다는 게……. 하.”

“할 수 있어요. 하고 싶어요. 정말요.”

“…정말 그리하고 싶습니까?”

아주 한참 만에야 이리 묻습니다. 사내는 내가 뭐라 대답할지 모르지 않는 눈으로 물었어요. 나는 절박하기 짝이 없는 낯으로 빌며 잠옷 소매를 조심스레 쥔 채 답했답니다.

“죽은 듯 가만히 있겠습니다. 피가 튀는 것이 싫으시다면 수건으로 감고 있을게요.”

“…아니. 내가 괜한 농을 했습니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이에게.”

연모하던 사내에게 너무 무지하여 손댈 가치도 없다는 말을 듣는 게 참 서러웠습니다. ‘죽어야 가치 있는 목숨이니 제발 죽여 달라’며 몇 번이고 거듭 빌어야만 하는 내 신세도 처참했어요. 모진 말이 서글프고 서러워 주먹을 쥐고 그의 팔을 툭, 때렸습니다.

“아키코 아가씨에게 그러셨다면서요? 다음에 또 방으로 들이려 하면 아키코의 생을 거두겠다고요. 나는 진짜 아키코가 아니라 아니 됩니까? 모자라고 천한 가짜라서요?”

“그런 게 아니라……. 하.”

짙은 탄식과 함께 그가 젖은 머리를 휙 쓸어 넘겼습니다. 한 손으로는 머리를 넘기고 계약서를 쥔 다른 손으로는 허리를 짚은 그가 미간을 구긴 채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사는 의미 없는 시대이니 뒷일 생각 않고 화려하게 불태우겠다는 이들이 있어요. 이 방에 살던 ‘진짜 아키코’는 그런 열락을 동경했던 여자였습니다.”

“…네에?”

“힘껏 살아 볼 마음도, 단숨에 죽을 용기도 없어 쾌락으로 도피하는 인간. 명치정의 신기한 것들을 사들이듯, 순간의 충동으로 아무나 침대로 불러들이는 사람이었단 말입니다.”

비 오는 봄밤 한기보다 더 냉랭한 목소리에 짙은 경멸까지 빗물처럼 묻어났습니다.

“나 또한 얕은 수작으로 끌어 들이려 하기에 그리 협박하고 한동안 이 집을 찾지 않았던 겁니다. 그런 아키코를 두고 그대가 스스로를 모자라고 천한 가짜라 칭하는 건 적절치 않습니다.”

“…….”

“그러니 농담으로라도 죽여 달라느니 취하라느니 하는 말씀은 마세요.”

사나운 목소리를 해서는 죽을 생각 말라며 달래는 사내. 검고 파리하고 붉고 시리고 뜨거운 이.

저 붉은 입술에서 나온 협박은 얼마나 달았을까. 얼마나 달콤하였으면 진짜 아키코 아가씨가 내내 상사(相思)로 몸져누웠을까.

고작 그런 생각이나 하는 내 신세가 처량해 크게 한숨지었답니다.

“객께서는 아키코 아가씨에게 마음에 드는 건 이름밖에, 아키코(丹子) 두 글자 중에서도 단(丹) 자 하나밖에 없다 하셨다지요?”

“…주인이 그런 이야기까지 하더이까?”

그이가 주인어른의 방 쪽을 매서이 노려보았습니다. 순간 나는 그냥 웃고 말았어요.

“그런 이야기까지 한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 덕에 제가 가격표를 달고 팔려 온걸요.”

“가격표…….”

“네. 제 본래 이름도 아키코 아가씨 이름처럼 붉다는 뜻이랍니다. 이름부터 따님을 대신하기 딱 좋지 않느냐며 내 어미가 나를 떠밀었어요. 오래 주리고 곯은 집에서는 드물지 않은 일이지요.”

나는 말문이 막힌 듯한 그의 얼굴을 한껏 올려다보았습니다. 그대로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그의 옷소매를 꾹 틀어쥐었지요.

“객께서는 이리 가시면 다시 아니 오실 테지요?”

“…….”

“저를 아니 거두시면 주인어른은 다른 아키코를 구할 거예요.”

사이사이 빗방울을 가득 머금은 그이의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습니다.

“금일 객께 몸을 바치고 죽어 잔금을 받느냐… 아니면 시일이 지나 저의 무용함을 알아챈 주인어른께 죽고 그냥 버려지느냐. 그 차이랍니다.”

나는 그의 구두 끝만 쳐다보며 입술을 물었습니다. 저 구두가 한 발만 더 내디디면 밖. 이리 떠나면 다시는 들어서지 않을 이임을 알았기에 나는 입술 한 번 꾹 물고 절대 하고 싶지 않았던 말을 털어놓았습니다.

“보지 못한 체하라. 말 걸지 말라. 안으로 들이지 말라. 똑똑히 배웠습니다.”

“…….”

“하나 객께서 먼저 들여보내 달라 하시면 기꺼이 맞아 몸을 내어 드리라고도 배웠습니다.”

시원스레 뻗은 눈썹이 대번에 일그러졌습니다. 차마 이 이상 노하는 얼굴은 볼 용기가 없어 눈을 감았습니다.

“이 방의 주인이신 아키코 아가씨는 혼약자가 있어 다른 아키코를 준비하였으니 너른 마음으로 받아 주시기를 청한다고도 하셨습니다.”

“남치수 그 미친놈이…….”

낮은 목소리가 더 낮아져 목을 긁는 듯한 쇳소리를 냈습니다. 나는 몸을 돌려 바구니에서 수건을 한 아름 안아 들었어요.

“하여 저는… 이것이 무슨 쓰임을 위해 준비된 수건인지 똑똑히 압니다.”

고백하자면 어린 나는 밤을, 특히나 비 오는 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답니다. 자식 많은 사기꾼네 집. 비 오는 날이면 벌이가 수월치 않을 수밖에 없고, 그런 날이면 으레 가장 약한 아이가 피곤해지는 법이었으니까요.

“부모는 가장 돈 되지 않는 나를 저들이 가진 재산을 다 합친 것보다 큰 값으로 팔았습니다. 내게도 다른 가족에게도 나쁘지 않은 거래였지요.”

“살면서 들어 본 거래 중 가장 불쾌한 거래인데요.”

“어차피 비루하게 죽을 목숨… 아키코 아가씨의 대용품으로 비싸게 팔아 호사를 누리다 익애하던 이의 손에 죽으면 호상 아니겠습니까?”

“나는 호상이란 말을 참 싫어합니다.”

“죽는 제가 호상이라 생각하면 호상이지요.”

비참한 실토를 하며 사람 마음이란 게 참 간사하다 싶어 흐리게 웃었습니다. 어릴 때엔 비 오는 밤이 그렇게도 지긋지긋하더니, 이 으리으리한 집으로 팔려 온 뒤로는 비 오는 밤이 썩 싫지만도 않았거든요.

알고 계셨을까요? 비 내리는 날이면 세상 모든 향기가 조금씩 진해진답니다. 하녀 아이들이 발라 주는 크림의 향기도,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비 오는 날의 풀 냄새도 다른 날보다 오래 남아요.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를 들으며 살포시 눈을 내리깔고 남몰래 좋아하는 사내의 옆모습을 떠올려 보다가, 내 팔뚝에 코를 대고 크림 냄새를 맡아 보다가… 문 틈새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코끝이 시큰해지면 바보처럼 천장을 보며 웃곤 하였답니다.

이 비가 멎고 밤하늘이 유난히 화창해지면 옆모습이 서늘하게 아름다운 그 사내가 창밖에 서 계시려나. 이런 철없는 기대에 젖어 잠드는 사치스러운 시간이 좋았습니다. 나는 그 기다림이 정말 좋았어요.

팔려 온 주제라는 것도 잊을 정도로 호사스럽기 짝이 없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입꼬리를 끌어 올리자 그가 앓는 소리를 냈습니다.

“이게 어떻게 굴러가는 상황인지 이제 확실히 알았으니까… 제발 그 수건 좀 치우세요.”

치우라는 것은 수건인데 왜 내 마음을 치우라는 소리로 들렸을까요. 거절당하는 것은 나인데 왜 그이의 목소리가 서글픈 것처럼 들렸을까요.

썩 싫지 않았던 밤이 이상한 밤으로 수렴되더니 결국은 봄꽃 한 송이만 몰래 틔운 마지막 밤으로 기울었습니다. 모든 설렘과 기대가 무너진 자리엔 팔려 온 신세인 나의 의무만 남았습니다.

“싫어요. 제 청을 들어주시기 전까지는 치우지도 비키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다지도 아름다운 밤에 내 생을 거둬 갈 이를 내 손으로 붙잡아 애원하는 신세에 눈물이 핑글 돌았답니다. 사내의 손끝에서 떨어진 빗물마저 소중하였던 내 마음이 내 삶만큼이나 초라하게 느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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