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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 부르실 날에-123화 (123/157)

123화

돌연 불어온 센 바람이 문을 밀어 흔들자 사내의 손이 바깥 문고리를 덥석 쥐었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새하얀 손. 고생 따윈 모를 듯한 외양과 달리 손에는 크고 작은 상처의 흔적들이 엷게 덮여 있어 조금 놀랐었지요.

아니. 실은 그보다도 닫히게 둘 줄 알았던 문을 잡아 준 그의 행동에 더 놀랐었답니다. 바람은 사라졌으나 사내의 손등에 울끈 솟은 힘줄은 여전하였습니다.

사내가 조끼 주머니에 넣어 단추에 예쁘게도 걸어 둔 회중시계의 금줄만이 소란스레 흔들렸습니다. 가느다란 금색 줄이 나의 시선이 움직이기를 종용했습니다. 나는 그 종용에 등 떠밀려 들이켰던 숨을 천천히 내쉬며 눈을 움직여 보았습니다.

나의 눈이 시곗줄 위로 조끼 단추를 하나둘 타고 올랐습니다. 짙은 남색의 타이. 실크를 단정하게 둘러 감아 매듭진 기다란 목. 그의 목에서 울대가 크게 한 번 출렁였습니다.

‘만져 보고 싶다.’

불쑥 솟은 속된 마음에 놀라 나는 등 뒤의 손을 더욱 세게 맞잡았습니다. 그리고 깎아 놓은 듯한 턱에서 한참을 망설였습니다. 지난 몇 달간 옆모습만 몰래 보아 온 사내. 아직 그의 온전한 얼굴을 마주할 준비가 되지 않았던 탓입니다.

망설이는 눈길에 끝자락이 살짝 위로 말린 붉은 입술이 얼핏 비쳤습니다.

‘웃지 않는 사내였는데. 미소 지을 리 없는 입인데. 빗물에 이지러진 착시가 아니었나.’

놀란 마음에 한 발 더 뒤로 물러나 버렸지요.

섬세하게 뻗은 콧날. 슬며시 휘어 있는 나무색 눈동자. 비에 젖어 이마에 헝클어진 검은 고수머리. 그리고 내 머리보다 한참 위에 손 우산을 펼친 손.

손가락 끝마디마다 빗물이 방울진, 손.

사내의 전신이, 얼굴이 그제야 온전히 눈에 들어왔습니다. 내 눈길이 멎은 곳을 흘끗 올려다본 그가 멋쩍게 눈을 내리깔았습니다.

“아가씨가 맞기에는 빗물이 너무 차기에.”

“…….”

“제대로 가려 드리고 싶었으나 이 이상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는 까닭에.”

“…….”

“하여 이게 최선이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기다란 속눈썹이 머금은 물기가 너무나 어여뻐 공연히 나의 뺨에 열이 올랐답니다. 등 뒤로 숨긴 나의 젖은 손등과 그의 손끝이 물방울이 자은 실로 연결된 것만 같았습니다.

바보처럼 등 뒤에 모아 쥔 손을 꼼지락거리고 있을 때, 그가 나긋하게 물어 왔습니다.

“어찌할까요?”

“무엇을…….”

“아가씨께서 과연 객을 들이실지, 쫓아내실지, 여쭙고 있습니다.”

와사등 빛이 빚은 듯한 낯에 깊은 음영을 드리웠습니다. 속절없이 사내의 미소가 마음속에 새겨졌습니다.

‘이상타, 이상도 하다.’

수백 번을 되뇌며 가슴에 두 손을 포개 얹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답니다.

정말로, 이상한 밤이었습니다. 그래요. 너무 이상한 밤이었던 탓입니다.

“청하여 안으로 들일 신사분의 이름,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멀찍이 도망쳤던 내가 다시 다가가 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당돌히 물은 것도.

“이름을 알려 드리면, 들여보내 주시는 겁니까?”

그런 물음에 겁 없이 고개를 끄덕인 것도.

“제가 아가씨께 퍽 무도한 짓을 할지도 모릅니다만.”

대답 대신 스륵 눈을 감은 것도. 모두 밤이 이상하였던 탓입니다.

입술을 쓸던 엄지. 귓바퀴를 훑어 내리던 중지. 한 손으로 가만히 감싸 얼굴을 들어 올리던 그 차가운 손이 선연합니다.

식은 손이 안타까워 조금이라도 온기를 나누어 주고자 뺨을 부볐던 게 기억납니다.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힌 내게로 사내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니 감은 눈꺼풀 위로 어둠이 더해지더군요.

어둠보다 더 어두운 어둠 속에 입술이 닿았습니다. 목에 내려앉은 사내의 입술은 몸서리치게 차가웠습니다. 타는 듯한 붉은색이 워낙 도드라지어 화로 속 숯처럼 뜨거울 줄로만 알았던 살결이 어찌 그리 차갑던지요.

가벼이 닿아 오는 젖은 살의 부드러움에 아, 짧은 탄성이 새자 기다린 것처럼 벌어진 입술을 손가락이 느슨히 쓸었어요. 서툰 입술을 훑어 벌리고 느리게 더듬어 나의 것을 제 것처럼 매만지는 타인의 살은 낯설어야 마땅할 텐데. 어쩐지 온기를 찾는 짐승 같아 밀어낼 수가 없었답니다.

목에 닿은 치아가 조금씩, 조금씩 더 깊어져 마침내 젖은 소리 하나 새어 나갈 틈 없이 맞닿은 순간. 등을 쓸던 커다란 손이 목덜미를 휘감았습니다.

바로 그때. 사내의 손이 이끄는 대로 크게 기울었던 내 이마에 시린 봄비가 뚝, 떨어졌어요.

“개… 객께서 밖에 너무 오래 계셨던 모양이에요.”

파드득 몸을 떨며 물러나 그의 탓을 해 보았습니다. 나의 키에 맞추어 참 많이도 수그렸던 너른 등이 천천히 다시 제 높이를 찾았습니다.

목피 같은 연한 갈색 눈동자에 노란빛이 일렁였습니다. 나는 기이한 빛에 사로잡히었다가 더 크게 도리질을 쳤습니다. 그러고는 달리는 걸음으로 멀어져 하녀 아이가 바구니에 담아 두고 나간 수건을 안아 들고 다시 그의 앞에 섰습니다.

“닦으세요. 이 계절에 생긴 오한은 오래간답니다.”

하녀 아이들이 항상 침대 곁, 등나무 바구니에 고이 놓아두고 나가는 커다란 수건입니다. 분명 장신의 사내가 몸 추스르기에 적당한 크기일 터. 하지만 그는 수건을 받아 들 마음 없이 엉뚱한 말만 하였습니다.

“원래 이 방의 주인이었던 이에게 듣기로, 이 수건은… 이리 쓰라는 용도가 아닐 텐데.”

“수건을 몸 닦는 데에 쓰지 않으면 어디에 쓴답니까?”

나는 계속하여 가라앉기만 하는 마음을 숨기고자 부러 뾰족하게 쏘아붙였답니다. 열린 문으로 짓쳐들어오는 빗줄기에 젖었는지, 꽃잎색으로 달아올랐던 마음이 못 견디게 눅눅해져 버렸습니다.

남의 속도 모르고 그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연신 물음표를 던졌습니다.

“…집주인에게서 아무것도 듣지 못하였습니까? 아니면 너무 잘 배운 건가?”

“여고보에 다니는 선생들보다 제 가정 교사들이 훨씬 뛰어나답니다. 수건 쓰시라는데 배움을 따지어 무에 쓰시려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아니… 내가 아키코에게서 듣기로 이건 이 방의 주인이 객을 들여……. 하, 정말 배우지 못한 겁니까?”

“배울 만큼 배웠다니까요?”

“…….”

배우지 못하였느냐는 물음만 뱉는 것이 어찌나 야속하던지요. 서운함을 미련함으로 덮어 대꾸하였더니 잘생긴 미간에 세로줄이 더 깊이 파이더군요.

“받으시라구요.”

야속하다면서도 빗물 흥건하던 그의 머리카락을 얼마나 닦아 주고 싶던지……. 남들 클 때 크지 못한 나는 한껏 팔을 뻗어 보았자 무용이라, 하는 수 없이 수건만 내밀어야 하는 내 꼴이 참 속상했답니다. 키 큰 이들은 이런 마음 따위, 영영 모를 테지요.

속상하여도 별수 없었습니다. 그의 머리는 종로2정목에 연일 복작이는 어떤 사내들보다도 훌쩍 높고, 나는 또래보다 반 뼘은 작은 것을요.

그는 내가 내민 수건은 받을 생각도 않고 손으로 눈을 가렸습니다.

“이 사람은 정말…….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도통 짐작을 할 수가 없어.”

그의 젖어 있는 손이 자신의 눈을 가리고 알 수 없는 말을 흘렸습니다. 나는 사내의 이 말이 무슨 뜻이었을지 종종 생각하곤 하였습니다.

“대체 이 방의 어떤 빛이 객의 눈에 저리도 고운 호박색 불을 일렁였을까. 테이블 위의 램프일까, 벽난로 불꽃일까. 그런 것 따위를 생각하고 있어요.”

“하!”

세상에. 이런 별것 아닌 대답에 그는 소리까지 내어 웃었답니다. 정말 이상한 밤이었다니까요.

“신사분께서는 무슨 생각으로 그리 웃으시나요?”

한껏 용기 내어 던진 질문이었건만. 내 목 위로 내려앉았던 그 붉은 입술은 대답할 마음 없이 한참이나 헛웃음만 흘렸습니다. 천천히 웃음기가 가신 그는 눈에서 손을 떼고 한숨지으며 대답했습니다.

“아무리 갈급하여도 그렇지, 어린애에게 무슨 몹쓸 짓을 하려 했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 어리지 않습니다. 벌써 스물인걸요.”

그는 어리지 않다는 내 말에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렇게 등을 돌렸습니다.

그의 발치에 떨어져 빗물 속을 내구르던 심장이 혼자서 꿈틀, 초라하게 몸을 조였습니다. 나는 쪼그라든 심장을 한껏 짜내어 그에게 애원했습니다.

“가지 마세요.”

“…금일은 크게 실례하였습니다.”

안 돼, 가시면 안 돼요. 너무 급하여 목소리가 나오지 아니했습니다. 소리 내어 부른다 한들 돌아볼 뒷모습이 아님도 알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절대 펼치지 않으리라며 숨겨 둔 종잇장들을 책상 서랍에서 꺼내 들고 그의 앞으로 내달려 문을 막아섰습니다.

“바쁘신가요?”

“비키세요.”

“급한 용무가 없으시다면 절 취하고 가세요, 제발. 제발요.”

“…본인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릅니다, 아가씨는.”

“알아요. 목숨을 거두어 달라 부탁드리는 거예요.”

사내의 수려한 눈썹이 무서울 정도로 사납게 치켜져 올라간 순간, 나는 쥐고 있던 종이를 그에게 내밀었습니다.

“이걸 좀 보아 주세요. 제가 말로 간청드릴 때에 못 이기는 척 머물러 주세요.”

“금일 나누었던 이야기는 일체 못 보고 못 들은 셈 치겠습니다.”

그는 내 팔을 슥 밀어 치우고 나가 버리더군요. 뒤따라 뛰쳐나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답니다. 볼품없는 종이가 들이친 비에 더 흉하게 젖어 버렸습니다. 그의 눈이 바닥을 구르는 편지 위에 무심히 내려앉았어요.

[얘, 아버지 약값 떨어진 지 오래란다. 잔금은 언제쯤 받을 수 있을 것 같니. 잔금 치를 날 멀었다면 집으로 패물이라도 몰래 챙겨 보내 주지 않으련. 미나미가의 아키코 아가씨가 연일 미쓰코시에서 돈 쓰는 재미로 산다는 소문이 예까지 자자하더라, 매정한 것아.]

젖은 종이를 내려다보는 그의 갈색 눈동자에서는 더 이상 금빛 불꽃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사내의 미간이 깊이 일그러졌습니다.

“이걸… 아키코 씨의 가족이 보낸 겁니까?”

“오늘, 미쓰코시에서 나오던 내게 우체부가 전해 주었답니다. 거기 적힌 ‘잔금’은 내 목숨이 다하는 날 지급되게 되어 있고요.”

“사람 목숨을 두고 잔금이라니…….”

“객에게 몸을 바쳐 죽거나, 아니면 객을 끌어안고 함께 죽거나. 주인어른께 팔려 오면서 나의 선택지는 이 두 개뿐이었습니다.”

입 안에 담아 두었을 때에는 속을 다 태우는 지옥 불처럼 아프고 뜨거웠던 말이었건만. 그의 앞에 내어놓은 순간 얼음 위의 석탄처럼 추레하게 식어 버렸습니다.

“부모라는 사람들이 그대에게 왜 아직도 살아 있느냐고, 살아 있을 거면 그 댁 재산이나 빼돌려 달라고 편지로 종용하고 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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