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민재는 영이의 입술이 솜털같이 닿았다가 떨어진 자리를 손등으로 덮고 짝을 잃은 새끼손가락을 내려다보다가 핏 웃으며 영이를 따라갔다.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알 수 없는 불안이 일었지만 그로서는 여름 풀꽃처럼 웃으며 손짓하는 제 색시를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
“아이고, 오셨습니까.”
싸리문을 밀고 집 마당으로 구르듯이 달려 들어간 영이가 뒷짐을 지고 배시시 웃었다. 영이의 곁에서 이웅헌이 민재를 돌아보며 반갑게 인사했다. 여전히 그가 제 장인이라는 게 어색하고 낯선 민재가 목을 긁적이면서 슬며시 눈을 찌푸렸다.
“나랑 같이 가면 하루 만에 얼른 갔다가―”
민재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영이가 크게 머리를 저었다. 곤란하다는 듯이 영이를 바라보던 이웅헌이 민재를 설득했다.
“아시겠지만 우리 영이가 한 번도 경성에 가 본 적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시집가기 전에 이것저것 해 보고 싶은 게 많은 모양이에요.”
“뭐어? 그래서, 기어코 나를 두고 둘이서만 가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영이가 이웅헌의 팔짱을 끼었다. 그리고 저와 제 아비를 가리키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그래. 부녀가 다정하게 여행 기분 내고 싶은 건 알겠는데…….”
민재는 허리에 손을 얹으며 깊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연수산 밖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공출이라는 명목으로 쌀부터 지푸라기까지 죄다 긁어 갔다. 이번 달부터는 사람도 차출한다는 이야기까지 돌았다.
“내가 가야―”
도리도리.
단호히 고개를 저은 영이가 자신의 댕기 머리를 가리켰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둘둘 말아 비녀를 꽂는 시늉을 했다.
“머리 올리기 전에 산골 처녀가 경성 놀러 간 기분을 내고 싶다는 건가요? 그 기분 내려면 색시 곁엔 신랑이 없어야 하구?”
끄덕끄덕.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영이가 목이 떨어져라 고개를 끄덕였다. 민재의 시름이 더 깊어졌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제게 줄 것들을 깜짝 선물로 사 오려고 굳이 저를 떼어 놓고 가려는 게 뻔했다.
결국 그는 영이를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영이가 손으로 네모난 모양을 만들면서 눈을 깜빡였다. 민재는 짧게 한숨지으며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읍내 메밀묵은 안 사 와두 되니까 무사히만 돌아와요. 응?”
해맑게 고개를 주억인 그녀는 들뜬 걸음으로 방에 달려 들어가 미리 챙겨 두었던 듯한 짐을 가지고 나왔다. 이웅헌이 다소 곤란한 듯이 콧등을 찌푸리며 민재의 눈치를 보았다. 민재는 태어나서 지어 본 중에 가장 긴 한숨과 함께 어깨를 으쓱였다.
야무지게 짐 보따리를 어깨에 둘러멘 영이가 민재에게 손을 흔들고 이웅헌의 소매를 잡아 이끌었다. 민재는 도깨비불이 되어 몰래 따라가야겠다 작정하며 사이좋은 부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럼 조심해서 다녀오겠습니다.”
연수산 입석 앞에 이르러 이웅헌이 민재를 향해 묵례를 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민재의 코앞에 불쑥 가느다란 손가락이 들이닥쳤다.
“뭐… 무슨 약속을 하라구?”
영이는 마치 민재의 속을 다 들여다본 것처럼 새끼손가락을 내밀고 턱을 치켜들었다.
“얌전히 연수산 지키며 기다리고 있으라는 거예요?”
끄덕끄덕.
귓가의 잔머리를 나풀대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영이의 모습에 민재는 어깨에서 힘을 빼고 웃어 버렸다. 마지못해 새끼손가락을 거는 민재를 보면서 영이는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이날 이후로 민재는 연수산 입석이 제집인 듯이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서성였다. 민재가 기다리는 영이는 소식도 없고, 팔도의 신들만 꾸역꾸역 연수산으로 몰려들며 들여보내 달라 아우성이었다.
‘피난 오는 신들이 점점 늘어나는데…….’
나라 안팎이 혼란스러워짐에 따라 몇십 년 전부터 전국에 널리 퍼져 살던 신들이 자신의 터전을 버리고 하나둘 연수산으로 모여들고는 있었다. 가장 먼저 연수산으로 피신한 이들은 명산의 산신과 작은 산의 산군들이었다. 왜놈들이 전국 산의 산신각을 부수고 도리이(鳥居)와 신사(神祠)를 세운 탓이었다.
연수산으로 피신 온 신들의 대부분은 이런 세상에서 신 노릇 하기도 신물이 난다며 신격을 버렸다. 민재가 들여보낸 신들 중 극히 일부만 학당이 된 서래원에 자리 잡아 아이들의 선생 노릇을 하는 정도였다.
‘이상해. 요 근래 연수산으로 몰려오는 신들의 숫자가 범상치 않아.’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신들이 피란민처럼 줄지어 입장을 기다렸다.
좀처럼 떨쳐 낼 수 없는 불안감에 민재가 잔뜩 인상을 구기고 있을 때, 행렬의 맨 앞에 선 신이 그에게 알은체를 했다.
“아이고, 비형랑. 오랜만에 보는구만.”
“아니… 동래(東萊)에 계시던 칠성신 아니십니까?”
“그래. 오죽하면 동래에서 예까지 왔겠나.”
민재는 말을 잇지 못했다. 칠성신은 인간의 수명과 재물을 관장하는 신이었다. 제일 남쪽에 있는 동네, 그것도 제법 먹고살 만하던 동네의 신이 자신의 영역을 포기하고 연수산까지 도망을 왔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거… 괜찮은 겁니까?”
말수 적은 윤이 민재에게 먼저 말을 걸 정도로 사태가 심상치 않았다. 민재는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신들이 이렇게 죄다 여기로 몰려들면 저 밖의 인간과 짐승들은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해. 사는 게 더 힘겨워질 거야.”
한 무리의 신들을 어찌저찌 연수산 안으로 들여보낸 민재가 어깨를 늘어뜨리고 연수산 입석에 기댄 순간이었다. 검은 물을 뚝뚝 흘리는 오염된 신 하나가 그를 향해 다가왔다. 대체 어떤 신이 저 꼴이 되었는지 가는눈을 뜨고 쳐다보던 민재가 이내 대경실색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범산 산군 아니십니까! 어찌 된 일입니까!”
“왜놈들이 내 호랑이들 다 잡아 죽인 것은 참았는데, 연수산 사람들 잡으러 오겠다는 건 못 참겠더라고.”
범산 산군은 최후의 최후까지도 자신의 산을 지켜야겠다며 제자리에 머물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이 꼴이 되었다는 건… 엄청나게 많은 인간의 목숨을 해하였다는 건데…….’
과거, 창귀들을 앞세워 숱하게 인간들의 목숨을 해칠 때에도 범산 산군은 이렇게까지 시커멓게 물들지 않았었다.
‘물론 그때에는 산군이 직접 생명을 앗아 간 것이 아니라 호랑이와 창귀들이 그랬던 거긴 하지만…….’
도저히 이유를 가늠할 수 없는 상황에 민재도, 그의 곁에 서 있던 윤도 표정을 굳히고 산군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녀가 활짝 웃자 귀까지 쭈욱 찢어지는 입에서 끈적한 토사가 주르르륵 흘러내렸다.
“통행세는 왜놈들 모가지로 갈음해 주게.”
“예?”
새카맣게 썩어 가는 산군의 몸에서 순사들이 들고 다니는 장도가 삐죽삐죽 솟아났다. 동시에 산군이 입에서 검은 물을 주욱 뿜어내며 광포하게 웃었다.
“보안과장인가 뭔가 하는 놈이 순사들 한 무리를 이끌고 내 산에 들어왔어. 무슨 몹쓸 짓을 하려는가 가만 보았더니 연수산으로 간다지 뭐야? 그래서 그놈들을 내 산으로 다 잡아먹고 오는 길이다.”
썩어 가는 산군의 뒤로 울창했던 범산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순사들이 내 산을 거쳐 연수산을 향해 몰려가는 이유는 뻔하잖아. 연수산이 살 만하다는 소문을 어디서 주워듣고는 빼앗고 죽이러 오는 게지.”
산군이 깔깔대고 웃으며 팔을 넓게 벌렸다. 그녀는 순사들을 죽여 연수산 사람들을 살렸다. 인간의 생사에 직접 관여하면 안 된다는 금기를 어긴 대가로 검게 오염된 것이었다.
우르릉.
소름 돋는 떨림과 함께 걸쭉한 토사가 흘러내려 길이 막혔다. 수탈과 가뭄 속에서도 산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던 범산의 모습은 간데없이 흙먼지 자욱한 폐허만이 남았다.
“내가 도령이랑 사람 해치지 않기로 약속한 탓에 불란서 의사 선생 잡으러 가는 관군들 못 막은 게 내내 마음에 걸렸었거든? 도령과 한 약속을 어긴 건 미안하지만 속은 아주 후련해.”
윤이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잠시 모습을 감추었던 민재가 이내 서산 대신과 함께 다시 나타났다. 눈동자마저 검게 물든 산군이 서산 대신을 보고 활짝 웃었다. 서산 대신은 흰 연기를 뿜으면서 여상스레 인사를 건넸다.
“산군 왔는가.”
“오염된 몸으로 들여보내 달라 하기 염치없습니다만 들여보내 주시겠어요?”
“큰일을 하고 왔네. 왜놈들이 설치기 시작한 뒤부터 내 산으로 숨어든 신들이 벌써 수십이나, 싸우고 온 이는 산군 그대가 처음이로군.”
무슨 일인가 구경을 나왔던 연수산 안의 신들이 어깨를 좁히며 고개를 숙였다. 무심한 눈으로 그들을 둘러본 서산 대신이 윤을 불렀다.
“도령― 아니, 이젠 어엿한 장정이니 설윤이라 이름을 불러야겠네. 그래, 설윤아.”
“예.”
“개선장군을 문밖에 이리 오래 세워 두는 예의가 어디 있다더냐? 네가 예를 다해 서래원으로 직접 모셔라.”
“그리하겠습니다.”
서산 대신은 윤에게 명령을 마치자마자 들고 있던 장죽을 무너진 범산 위로 던졌다.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장죽은 흙더미 위에 자리를 잡고 뽀얀 연기를 하늘로 올려 보냈다.
“범산은 내가 직접 제를 올려 준 유일한 산이 되겠군.”
지켜보고 있던 신들이 위패 앞에 향을 올린 것처럼 일제히 고개를 숙여 범산과 범산의 산군에게 예를 표했다.
“어… 어어…….”
보폭을 맞추어 서래원을 향해 사라지는 산군과 윤의 모습을 지켜보던 민재가 마른 고목이 무너지듯 쿵, 바닥에 내려앉았다. 흰 연기만 바라보고 있던 서산 대신이 놀라 그를 부축했다.
“민재야. 괜찮으냐?”
민재가 입을 벙긋대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무기가 암시를 걸어 놓았었습니다.”
“암시? 아… 무기가 했던 이상한 소리 말이냐?”
서산 대신이 미간을 슬쩍 찌푸리며 고개를 주억였다.
“기억난다. 무기가 인간들로부터 연수산의 존재 자체를 숨겨야 한다며 직접 허락을 받으러 왔었지. 왜놈들이 쌀부터 놋쇠 대야까지 별별 것을 다 공출해 가니 한동안은 없는 듯이 지내야 한다고.”
“예. 그런데 방금 산군께서 보안과장이 순사들과 함께 연수산으로 오는 것을 막았다고 하셨지요.”
민재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제 색시와 장인어른 때문입니다. 호적에… 저를 호적에 올려 주려고 면사무소로 갔잖습니까……. 거기 있던 놈들이 연수산이라는 글자를 보았겠지요.”
제 입으로 말하면서 민재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깨달아 버렸다. 길고 긴 전쟁에서 수세에 몰린 왜놈들은 물자만이 아니라 사람까지 끌고 갔다. 호적에 적힌 연수산이라는 글자를 보고 달려오는 놈들이, 그 호적의 접수 당사자인 영이와 이웅헌을 가만히 두었을 리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