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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 부르실 날에-114화 (114/157)

114화

윤은 손을 움직여 사내의 옷을 벗기고 상처를 닦아 냈다. 민재가 아기 젖 먹이러 가는 길에 언질을 주었는지 서래원에 있던 백사가 뜨거운 물을 대야에 담아 방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아이고, 윤아. 이 산골짝엔 어찌 중환자가 끊이질 않냐?”

“옹기 가마가 자주 터지고, 산짐승에게 물리는 일도 잦고, 오지랖 넓은 어르신들이 자꾸 뭘 주워 오시니까요.”

틀린 말 하나 없는 지적에 백사가 키득키득 웃었다.

“윤아. 나 이러다 승천하면 어쩌지? 환자 돌보고 애들 가르치고 서래원 가택신들이 사다 달라는 거 사다 주느라 덕을 너무 많이 쌓았어.”

괜한 엄살이 아니었다. 요즘 백사는 연수산에서 제일 바빴다. 명패 하나 없이 그저 의원이라고 부르는 곳과 어느새 연수산의 번듯한 학당으로 자리 잡은 서래원을 오가느라 눈코 뜰 새 없는 매일을 보내는 중이었다.

“백사님께서 올해 승천하시면 최연소로 용이 되시는 것 아닙니까. 어쩌냐 걱정할 게 아니라 큰 경사지요.”

“나는 그냥 이무기로 귀염받으면서 살고 싶단 말이야.”

둘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척척 손발을 맞추어 빠르게 상처를 꿰매고 지혈제를 뿌리고 붕대로 환부를 감쌌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던 사내의 안색도, 가쁘게 몰아쉬던 호흡도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윤과 백사는 의식 없는 사내의 이마에 차가운 물수건을 올려 열을 식혀 주면서 겨우 숨을 돌렸다. 그제야 백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 이 남자한테 줄 거야? 그렇게 매일 쓸고 닦으며 관리해 놓고서 모르는 사람한테 내어 주려고?”

“누구든 필요한 이가 쓸 수 있도록 매일 쓸고 닦았는걸요.”

이 집의 주인이었던 권일식이 죽고, 장성한 권욱은 서래원 뒤쪽에 작은 초가집을 지어 살았다. 윤만큼이나 말수 적은 어른이 된 욱이는 제가 지은 초가집에서 저를 닮은 아들을 낳아 살고 있었다. 이후로 이 너와집은 온전히 윤이 관리했다. 먼지 하나 없이 반질반질 광이 나는 마루를 쓰다듬으며 윤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핏물 닦아 내고 보니 모르는 사람도 아닌 듯하고.”

“그래? 아는 사람이야?”

“동학군들 중에 나라 되찾는 싸움으로 흘러간 이들이 몇 있습니다. 그중 한 명이에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던 백사는 그냥 윤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참… 영목이 걔가 네 이 정성을 알아야 할 텐데 말이야.”

“영영 모르셔도 좋으니 그저 돌아와 주시기만 하면 좋겠습니다.”

이런 윤의 기도가 가닿지 못했던 걸까. 죽어 가는 아비의 품에 안겨 있던 갓난아이가 아장아장 걸음마를 시작하고 말을 떼어 서래원에서 언문을 익힐 때까지도 영목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 그 도령 요즘 정말 마음에 안 들어요.”

묵은 언제나와 다름없이 윤을 트집 잡으며 나타났다. 서릿재 대청마루에 길게 드러누운 민재가 핏 코웃음을 쳤다.

“언제는 윤이가 지 마음에 들었던 것처럼?”

“대체적으로 마음에 안 드는데 요즘 유난히 더 맘에 안 든다고요.”

“왜?”

“남가 상단인지 뭔지였다면서 마지막까지 쥐고 있던 그 땅, 거기를 넘겼답디다. 남씨 성 버리고 창씨개명 한 후손 놈에게.”

“윤이 걔는 그거 지 후손이라고 생각도 안 할 거야.”

눈치 없는 민재의 말에 묵이 눈썹을 찡그렸다.

“…지금 그런 얘기가 아니잖습니까.”

“그럼 뭔 얘기지? 땅 팔고 집 팔아서 영이 애비가 달라는 대로 거사 치르는 데 돈 대 주는 게 마음에 안 든단 거야?”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물은 민재가 말끔한 조끼 자락을 손등으로 쓸어 모양을 잡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더없이 그리운 시절을 더듬는 듯한 얼굴이었다.

“무기야. 옛날 옛적 남가 상단에 크다란 돈 창고가 있었는데 말이다. 윤이 어미 죽고 대방 마님 자리 물려받았던 양갓집 규수 아씨가 큰일 여럿 하고 눈을 감았잖어?”

“갑자기 그때 얘기는 왜―”

“아, 들어 봐. 문제는 3대째 대방 자리를 물려받은 후계자 놈이 영 거지 같았단 거야. 3대 대방 놈이 기방 다니고 노름한다는 걸 윤이에게 일러 줄까 말까 고민만 했는데… 어느 날 윤이가 내 앞에 남가 상단 대방의 증명 패를 내밀더라. 어울리지 않는 놈이 달고 다니길래 받아 왔다며.”

시큰둥하게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묵이 스르륵 입을 벌렸다.

“자세히 말은 안 해도 곱게 빼앗지는 않은 듯하더라. 제 동생이 배 아파 낳은 아이라 차마 죽이지는 못한 모양이고.”

“뭐야. 걔한테 전각 한 채 규모짜리 돈 창고가 있으니 걱정 말라고요? 집은 팔아넘겨도 도깨비가 지어 준 돈 창고는 건재하다고?”

“응. 정리하자면 그렇지.”

묵이 어이없다는 듯이 눈을 빙글 굴렸다.

“남영윤인지 남설윤인지 하는 놈한테 돈 창고가 있든 빚더미가 있든. 걔가 파산할까 봐 걱정하는 게 아닙니다, 나는.”

“그래? 그럼 뭘 걱정하는데?”

“돈이 움직이면 시선이 모입니다. 독립운동인지 뭔지 하겠다며 맨날 밖으로 나도는 그놈이 도령에게서 큰돈 받아 뛰어다니면 결국 연수산이 주목받게 된다고요.”

“아. 그거.”

민재가 입꼬리를 늘어뜨리며 허리에 손을 얹었다.

“웃어넘길 일이 아니에요. 연수산이 천주쟁이 소굴이라는 게 소문나서 그 사달을 겪었던 거 잊으셨습니까? 그 뒤로 어디에도 얽히지 않으려고 다들 몸 사리며 꽁꽁 숨어 살았던 건요? 이제 와 불령선인 소굴이란 소문에 또 휩쓸리고 싶지 않다고요.”

“요즘 조선 팔도에 총 쥔 사람 없는 산이 어딨고 근본 모를 돈 안 흐르는 곳이 어딨다고 그런 걱정을 하냐.”

묵이 대꾸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위태위태하던 나라에 이 나라 저 나라 놈들이 슬슬 발을 들이더니 등 뒤에 숨겨 두고 있던 총을 꺼내 들기 시작했다. 여간해서는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조선이 무너지고, 산에는 나라를 되찾겠다 이를 가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거리에서 상투와 댕기가 점점 사라지고, 단발령에 휘둘릴 일 없는 연수산의 신들마저 머리를 잘랐다. 묵이 상투를 틀지 않은 짧은 머리로 다닌다는 이유로 용이 아니라 서양 이무기라 놀려 대던 신들마저도.

빠르게 변해 가는 세상 속에 오직 묵 자신만 불란서 의사 선생이 살아 있던 그 시절에 멈춰 서 있는 듯했다. 자신의 새카만 수단을 내려다보는 묵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를 조용히 지켜보면서 민재가 어깨를 으쓱였다.

“남모르게 수작질하고 남모르게 덮는 건 윤이가 조선 최고야. 들킬 걱정 같은 건 안 해도 돼.”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맘에 안 들어요.”

부루퉁하게 중얼거린 묵이 모습을 감췄다. 멋대로 나타났다가 멋대로 사라져 버린 묵을 향해 입을 삐죽인 민재가 작게 한숨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하여튼 저놈 자식 저거, 성질머리 더럽긴. 나라고 변하는 세상이 달가울까.”

민재는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은, 반질반질 광이 나는 가죽 구두에 발을 꿰었다. 걷는 걸음마다 찰각이는 금시곗줄 소리에 민재의 입에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그는 발소리를 죽이고 사시사철 새하얀 메밀꽃이 흐드러진 서릿재 앞뜰로 걸어 나갔다. 빛바랜 저고리에 대충 묶은 댕기를 늘어뜨린 작은 아이가 그가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메밀꽃을 잔뜩 뜯고 있었다.

“그건 뜯어 어디 쓰려구?”

민재가 나직이 묻자 앙상하게 마른 등이 펄쩍 뛰었다가 옆으로 풀썩 고꾸라졌다. 엉덩방아를 찧은 아이는 새하얀 꽃을 온통 뭉개며 손으로 땅을 짚고 뒷걸음질 쳤다.

빨갛게 달아올랐다가 파랗게 질리기를 반복하는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민재가 무릎을 안고 아이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민재 딴에는 웬 커다란 사내가 제 앞에 나타났으니 놀랐겠거니, 싶어 몸의 크기를 줄이려 했을 뿐인데 아이는 급기야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아이고. 너 울면 더 허기진다?”

민재는 급한 대로 주머니를 뒤져 엿인지 사탕인지를 아이에게 건넸다. 커다란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서럽게 울던 아이는 엉금엉금 더 뒷걸음질 쳤다. 민재는 더 다가가지 않고 양반다리를 한 채 털썩 주저앉아 아이에게 내밀었던 것을 제 입에 하나 까서 넣었다.

“아이고, 메밀엿 참으로 맛있다. 나는 역시 메밀이 제일 좋아.”

“…….”

“영이 너 메밀로 맛있는 걸 얼마나 많이 만들 수 있는지 모르지?”

아이의 눈이 민재와 그가 내민 달콤한 엿을 쉴 새 없이 오갔다.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는 아이를 보며 민재는 씨익 사람 좋은 웃음을 입가에 걸었다.

그는 아이에게 더 다가가지 않고 주머니를 다 뒤졌다. 그리고 주춤거리는 아이의 발치에 예쁘게 포장된 메밀엿이며 당과를 소복이 내려놓았다.

“혼내거나 타박하는 거 아니야. 뜯어 먹었으면 한 소리 했을 테지만.”

말 못 하는 아이가 숨넘어갈 듯이 겁에 질려서 눈을 크게 떴다. 민재는 손을 저으면서 그들을 둘러싼 새하얀 꽃을 가리켰다.

“메밀은 열매를 먹는 거지 꽃을 먹는 게 아니거든. 못 먹을 거 먹으면 배탈 난다구. 알았니?”

발끝을 꼼지락대던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다 해져 너덜대는 옷소매도 문제였지만 아직 바람이 찬 계절에 아이의 옷이 여름 홑겹이라는 데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어휴. 아비 된 사람이 자기 애는 이리 배곯게 두고 무슨 나라를 지키겠다고 나돌아 다니누.”

달콤한 냄새가 풍기는 엿 하나를 까먹으려 손에 쥐었던 영이가 왈칵 눈썹을 치켜올렸다. 민재가 왜 그러느냐 물을 새도 없이 아이는 민재에게 제가 쥐고 있던 엿을 있는 힘껏 집어 던졌다.

“너 인마, 먹는 걸로 장난치는 거 아니야.”

영이가 던진 엿을 별 힘 들이지 않고 척 하니 받아 쥔 민재가 고개를 저었다. 영이는 다시 한가득 눈물이 고인 눈으로 민재를 노려보다가 그가 쌓아 둔 군것질거리를 모두 그에게 집어 던지고 뒤돌아 뛰어갔다.

“지 아빠한테 뭐라 했다고 화난 건가?”

민재는 머리를 긁적이며 비틀비틀 내달려 멀어지는 영이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손에 걸리는 까슬하게 짧은 뒷머리가 이상하게 시리고 어색했다.

그날 이후로 민재의 등 뒤로 도토리며 솔방울 같은 것이 수시로 날아들었다. 모두 영이가 던지는 것이었다. 놀자는 이야긴가, 싶어 날아드는 것을 모조리 잡아 똑같이 던져 주었더니 영이는 나라를 잃은 것처럼 통곡하며 뒤돌아 뛰어갔다. 순하고 조용한 애가 울며불며 화를 내니 대체 어떻게 화해해야 할지 막막해진 민재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윤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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