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시체가 뚝 떨어지리라 생각했는지 여기저기서 “어이쿠!” 하는 탄식이 터졌다. 하지만 그림자에 감싸인 설우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고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그 순간, 강물처럼 허공을 느긋하게 흘러 다니던 꽃잎들이 구경하던 사람들의 얼굴로 쏟아져 내렸다. 반사적으로 다들 눈을 감았을 때를 노려 윤의 그림자가 설우를 단단히 감싸고 있는 힘껏 주인에게로 되돌아왔다. 사람들이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해 지는 초저녁 하늘에 함박눈처럼 흩날리는 매화 꽃잎과 유유히 하늘로 날아오르는 학 한 마리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설우 접장이… 사라졌어.”
“정말 천인이었나…….”
“천인을 해하였으니 천벌을 받을 것이다!”
부상을 입고 바닥을 구르던 사람들마저 몸을 일으키고 눈에 힘을 주었다. 죽은 것과 진배없던 부상자들까지 비틀거리며 일어나자 성벽 위에서 작지 않은 동요가 일었다.
지켜보고 있던 묵이 재미있다는 듯이 허리에 손을 얹고 고개를 기울였다.
“저런. 저렇게까지 기대하고 있으면 천벌까지 내려 줘야 얘기가 끝나겠는데요?”
“이미 시작되었을 겁니다.”
“음?”
“스승님과 그리 오래 지내셨으면서 피에 기생하는 족속이 뭘 부릴 수 있는지 모르십니까?”
윤이 무얼 말하는지 헤아리던 묵이 천천히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저 성안에 벌레를 풀었어요?”
“풀었다 뿐이겠습니까.”
윤은 다정한 손길로 설우의 목을 파고든 동아줄을 풀었다.
【 낮달맞이꽃 】
설우의 장례를 치른 이후로 윤의 얼굴에 드리웠던 그림자가 아주 조금은 옅어졌다. 저러다가 또 앵속을 하는 게 아닌가 염려스러워진 민재와 묵이 주위를 얼쩡거리자 윤은 조금 귀찮다는 듯한 말투로 그들을 안심시켰다.
“염려하시는 일은 다시는 하지 않을 터이니 그만 좀 따라다니세요.”
묵은 싱긋 웃는 것으로 대답을 갈음했다. 민재 또한 조금도 신뢰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로 팔짱을 끼었다. 불신 가득한 눈을 해서는 졸졸 따라다니는 커다란 두 남자를 향해 윤이 옅은 짜증을 냈다.
“정말입니다. 이제 제 정인이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알 것 같아 마음이 편해졌다고요.”
“정말? 어디서 나타나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
윤은 서래원 담장을 둘러 핀 새빨간 꽃무릇을 톡톡 건드리며 이야기했다.
“세경 마님께서 최 형께 대들보를 부수라 가르치셨답니다. 나은 아씨는 최 형이 다른 건 몰라도 약속은 잘 지키는 사람이라 장담했지요.”
돌아오겠다. 대들보를 부수겠다. 영목에게는 둘 다 지키고 싶은 약속일 터. 윤은 눈을 감고 잊지 못할 얼굴을 그렸다.
“첫 생에는 세경 마님과 한 약속 가까이에도 가지 못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저 때문에.”
“그러니까 두 번째, 세 번째에서는 문세경과 한 약속을 지키러 올 거다?”
“네. 이번에 다른 이름, 다른 얼굴로 다시 만나서는 문을 부수셨으니… 그다음에 뵙게 될 때엔 마당에 들어서시고, 그다음엔 대청마루로 올라서실 겁니다.”
묵이 팔짱을 끼고 비스듬히 다리를 짚었다.
“그쪽은 정인이 걸어갈 길을 미리 닦아 두고 있는 중이란 말이네.”
“제가 미리 예비해 두고 있으면 그 길 언저리에서 뵐 수 있을 듯합니다.”
뭔 소리를 하는지 감도 잡지 못하고 있던 민재가 그제야 얼굴을 찌푸리며 입을 쩍 벌렸다.
“뭐야……. 그래서 그간 사 모았던 집이며 땅이며 다 팔아서 신식 조총 사 모은다고? 영목이가 독립군이라도 되어 있을 것 같아서?”
“네? 우리 영목이가 독립운동을 한다고요?”
어느샌가 나타난 세경이 세 남자의 사이로 불쑥 끼어들었다. 기다란 머리를 흐트러짐 없이 쪽 지고 고운 치마저고리 차림이었던 그녀는 지금 신식 의복으로 완전히 갈아입고 있었다. 머리카락도 싹둑 잘라 귓가에 찰랑였다.
“문세경이 너…….”
“그대들만 신식 양장 차려입으니 왠지 샘이 나서. 어때요? 잘 어울리지 않나요?”
세경이 양쪽으로 팔을 벌리고 천천히 한 바퀴를 돌았다. 윤은 별다른 말 없이 눈만 스윽 굴려 시선을 피해 버렸다.
단이의 죽음 이후로 윤은 가능한 한 세경과 마주치는 일 자체를 피하려 했다. 오늘처럼 습격당하듯 세경과 맞닥뜨리면 없는 사람 대하듯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어머, 윤. 이제는 내게 인사도 안 하고 쳐다보지도 않겠다는 건가요? 매정한 사내 같으니.”
윤은 대꾸할 마음이 없다는 듯이 무표정하게 꽃무릇으로 시선을 돌렸다. 세경의 눈꼬리가 점점 뾰족해졌다. 그녀가 또 뭔가 패악질을 부릴까 염려되었는지 민재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우. 문세경이 너 쪽 진 머리보다 짧은 머리가 훨씬 어울린다, 야.”
민재는 옷 소재가 좋다는 칭찬까지 덧붙여 세경의 주의를 돌리면서 묵의 옆구리를 찔렀다. 묵이 방긋거리며 성의 없이 박수를 쳤다. 세경은 두 남자의 반응 따위는 관심 없다는 듯이 윤의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영목이가 다시 태어난 건 확실해요?”
“크게 다쳐 많은 피를 흘리지 않는 이상에야 저도 모르지요.”
윤이 마지못해 대답하자 세경은 어깨를 늘어뜨리며 입술을 삐죽였다.
“뭐야. 괜히 기대했네. 지난번엔 영목이를 제대로 못 봐서 서운했단 말예요. 관군 놈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장례 치를 때에 보니 애 얼굴이 너무 상해서 어찌나 속이 상하던지.”
“아아. 너무 속이 상해서 그 성을 폭삭 다 무너뜨리셨구나.”
“도령이 독충들을 워낙 심하게 풀어서 땅이 시커멓게 썩어 들어갔던걸요. 나는 땅의 신이니 수습을 해야지.”
“그러셨구나아.”
묵은 연신 말꼬리를 늘이면서 세경의 부아를 돋웠다. 얄밉게 방실대는 그의 얼굴 때문에 짜증이 인 세경이 손에 들고 있던 신식 교재를 서래원 담장 안쪽으로 휙 집어 던졌다. 서래원 안에서 가택신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백사가 능숙하게 책을 받아 안았다.
“감사합니다, 세경 마님.”
“감사합니다, 세경 마님!”
서래원 안의 꼬마들이 백사를 따라 세경에게 큰 소리로 인사했다. 화풀이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에 더욱 짜증이 난 세경은 혀를 차며 본론을 꺼냈다.
“내가 한성에서… 아니, 이젠 경성이지. 경성에서 놀다 오는 길에 뭘 좀 봤는데 말이죠.”
세경은 검지를 뻗어 연수산 입석이 서 있는 곳을 가리켰다.
“셋 중에서 한가한 사람이 좀 가 봤으면 좋겠거든? 나 성질부리기 전에 가요.”
세 남자는 서로를 쳐다보다가 어깨를 으쓱이면서 세경이 가리킨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피 냄새가 풍겨 오자 예민한 윤이 제일 먼저 인상을 구기며 문제의 장소로 다가섰다. 전신에 성한 곳이 하나도 없는 사내가 갓난아기를 안고 입석에 기대 있었다.
“서른쯤의 남자 하나, 갓난아기 하나입니다.”
윤이 건조하게 보이는 그대로를 읊었다. 묵이 한쪽 눈썹을 쭉 끌어 올리며 턱으로 사내를 가리켰다. 뭔가 하고 다가오던 민재는 질색하면서 껑충 뛰어 멀찍이 물러섰다.
“아이구, 이런. 도깨비가 피 무서워하시는 걸 매번 깜빡깜빡한다니까요.”
“으…….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싫어하는 거다!”
“네에. 이번에도 문세경이 주워 와서 여기다 버려둔 것 같죠?”
“그랬겠지. 가끔 보면 걔도 참 나만큼이나 오지랖 넓어.”
윤은 묵과 민재가 주거니 받거니 하는 말을 들으며 연수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를 쳐다보았다.
서산 대신은 너무나 큰 신이라 하찮은 인간 한둘의 구제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도리어 귀찮아하는 느낌마저 있었다.
‘연수산에 들어오려면 서산 대신의 허락을 받아야 해. 서산 대신을 대신해서 문지기 노릇을 하는 게 비형랑인데… 비형랑은 피를 무서워해서 어지간해선 부상자 가까이에는 가지도 못하고.’
가만히 상황을 정리하던 윤의 눈길이 민재를 놀려 대는 묵에게 닿았다.
‘저 서양 용은 서산 대신이 아끼는 유일한 제자이고 인간 생사에 직접 관여하면 안 된다는 신의 금제에도 크게 얽매이지 않지. 그래서 세경 마님이 매번 저놈에게 이런 구호를 맡기는 거로군.’
묵은 전방위로 활용 가능한 인력이었다. 본인이 내켜야만 일을 한다는 아주 큰 단점이 있었지만.
그가 제대로만 움직여 준다면 연수산이 좀 더 버젓하게 살 만해질 수 있을 것 같다 윤이 생각하고 있을 때, 민재와 묵이 동시에 윤을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그쪽이 유경험자잖아요. 직접 해 본 사람이 도와 보시라고.”
짧게 한숨을 내쉰 윤은 거의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사내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소매를 걷어 올리고 손목시계를 풀더니 망설임 없이 사내의 뺨을 후려 갈렸다. 세경에게 모질게 훈련받은 서양 창귀가 전력으로 때렸다가는 목이 날아갈 것 같아 일부러 잘 쓰지 않는 쪽 손으로.
철썩.
목이 꺾일 정도로 얼굴이 돌아가자 사내가 겨우겨우 눈을 떴다.
“정신이 드십니까?”
사내가 입을 달싹였다.
딸애만이라도 살려 주십시오.
윤은 그가 하는 말을 정확히 알아들었으면서도 못 알아들은 척 그를 재촉했다.
“따님 안고 몇 발자국만 더 앞으로 오시면 됩니다. 구르든 기든 자력으로. 그럼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사내는 잘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려 윤을 올려다보았다. 윤이 검지를 뻗어 세 걸음쯤 앞을 가리켰다. 쿨럭 피를 토해 낸 사내는 아이를 안은 채 반쯤 구르고 반쯤 기듯이 연수산 입석을 지났다.
“조금만 더 움직이세요. 조금만.”
사내가 땅 위에 검붉은 궤적을 남기며 느리지만 확실하게 서산 대신의 영역 안으로 온전히 들어섰다.
“어르신, 이 정도면 됩니까?”
흘끗 곁눈질로 확인한 민재가 고개를 끄덕여 확인시켜 주자마자 묵이 사내의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
“아기는 그쪽이 안고 와요.”
묵은 윤의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물건 던지듯 강보에 싸인 아기를 휙 집어 던지고는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깜짝 놀란 윤이 아기를 받아 안고 묵의 뒤를 따랐다.
망설임 없이 걸어간 묵은 깨끗하게 관리된 너와집으로 쑥 들어갔다. 아주 오래전, 권일식이 연수산에 자리 잡을 때에 민재가 마련해 주었던 그 너와집이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 능숙한 손길로 자리를 펴고 사내를 내려놓은 묵은 윤이 안고 있는 아기 한 번, 뒤따라온 민재를 한 번 가리켰다.
“환자 치료해야 하니 애 데리고 나가 계세요.”
“아. 응.”
“마을 아낙에게 부탁해서 애 먹일 것 있나 챙겨 주시고요.”
“으응.”
“전 할 일 다 했으니 한동안 찾지 마시고요.”
묵은 말을 마치자마자 휙 하니 사라져 버렸다. 순하고 착한 도깨비는 눈만 몇 번 끔뻑대다가 능숙하게 갓난아기를 어르며 묵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