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옷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갈아입으시는 동안 저는 백마를 손질하고 있을 테니 준비가 되면 나오세요.”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윤이 준비한 옷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
“어, 아니, 이거… 치마저고리잖아? 이 풍성한 걸 입고 싸우긴 좀 그렇지 않나?”
“사발통문에 여인의 이름이 올라갈 수 있기를 바라시는 것 아니셨습니까?”
설우는 옛이야기 속 선녀들이나 입을 것 같은 새하얀 옷과 천연덕스러운 윤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멍하니 중얼거렸다.
“…디딤돌이 되고 싶다 하였더니 디딤돌에 금칠을 해 주는구만.”
“이왕 파는 것이라면 되도록 비싸게 파는 쪽을 좋아해서 말입니다.”
피식거리는 실소로 시작했던 설우의 웃음이 시원스러운 웃음으로 커졌다.
윤이 마련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설우가 팔을 벌리고 한 바퀴 빙그르 돌자 하늘거리는 순백의 옷감이 춤추듯 넓게 퍼졌다. 윤이 흩날리는 소맷자락의 끝을 가만히 말아 쥐고 입을 맞췄다. 설우는 목덜미가 훤히 드러난 그의 뒤통수를 장난스레 헝클고 말에 올라탔다.
잘 가라는 인사도, 잘 있으라는 인사도 없는 이별이었다.
* * *
한때는 장터였던, 이제는 전쟁터가 되어 버린 곳의 온 사방에 폭약이 터지고 탄환이 날아들었다. 엉성한 나무판자와 지푸라기들이 흩날리면 사방으로 퍼지는 짚 더미와 함께 뒤에 숨어 있던 흰 옷의 사람들도 진창을 나뒹굴었다.
죽음과 패배, 이미 죽은 사체의 악취가 가득한 곳에 누군가가 크게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어 왔다.
“오늘 내가 성문을 열 것이다!”
성 안팎에 포진한 사람들의 시선이 갑작스러운 침입자에게 몰렸다. 새하얀 말을 타고 흰 옷자락을 휘날리며 전쟁터에 뛰어든 사람, 설우가 보란 듯이 새카만 칼을 빼 들었다.
“설우 접장… 죽은 게 아니었어?”
이름 세 글자에 구름과 눈과 비를 모두 담은 사람이 꼭 제 이름 같은 차림으로 새카만 칼을 휘두르며 목청 높여 웃었다.
“좋은 꿈 꾸며 죽으려 했는데 아직 성문을 뚫지 못한 게 생각나서 눈이 안 감기더라!”
달려드는 모든 것을 베어 넘기며 설우는 입술을 질끈 물었다. 생긴 것만 보아도 보통 칼이 아닌 것 같긴 했는데, 정말로 이 세상 것이 아닌 물건이었다. 환도를 휘두를 때마다 생기는 잔상마저 위협적이었다.
‘나… 잘하면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몰라. 살아남으면 곧장 도련님에게―’
그녀의 마음속에 작은 기대가 반짝이기 시작한 순간, 성벽에서 수십 개의 철걱이는 쇳소리가 들렸다.
“쏴라!”
말고삐를 쥔 손도, 안장 위에 단단히 힘을 주고 앉은 몸도 바람 맞은 낙엽처럼 흔들렸다. 그제야 설우는 제 몸을 쳐다보았다. 눈처럼 구름처럼 차려입으라던 옷이 흰색은 찾아볼 수조차 없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시야가 몽롱해지는데도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설우는 문득 윤이 했던 뜻 모를 말을 떠올렸다.
- 더 이상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소원을 빌었을 뿐입니다. 거짓말 잘하는 나의 신께서 그 소원 정도는 들어주신 모양이네요.
설우가 목을 뒤로 젖혀 크게 웃었다. 입에서는 웃음소리 대신 왈칵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애초부터 윤의 기도도 소원도 오직 그녀만의 것이었다.
‘내가 도련님의 신이었어.’
그녀는 핏방울만 점점이 흩날리는 붉은 웃음을 웃으면서 마지막 힘을 다해 환도를 크게 내리그었다. 굳게 닫혀 열릴 줄 몰랐던 두꺼운 문이 산산이 부서졌다.
찰나간의 정적이 흐르고, 거대한 함성이 터졌다.
“성문이 뚫렸다!”
“설우 접장 뒤를 따라라!”
티끌 하나 없는 순백의 말은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과 총알에도 아랑곳 않고 설우를 태운 채 덧없이 부서진 성문 안으로 맹렬히 달려 들어갔다.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그녀의 뒤를 따라 달렸다. 대부분 성문을 통과하기도 전에 쓰러졌지만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도 그들은 같은 말을 외쳤다.
성문이 뚫렸다.
밤이 새고 날이 밝도록 이어진 전투는 너른 벌판에 붉은 강이 만들어지고서야 끝이 났다. 도저히 열릴 것 같지 않던 성문이 있던 곳에는 얼기설기 판자를 엮어 만든 임시 문이 달렸다.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태양이 죽음만 산재한 평야에 빛을 뿌리다 느리게 서쪽으로 기울었다.
해가 기울고 석양이 찾아오자 낮 동안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던 솔숲에서부터 흰 옷을 걸친 한 떼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전투에서는 이겼으나 조금도 이긴 것 같지 않게 그저 피로하기만 했던 성안의 관군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얼굴을 찌푸렸다.
“저놈의 동비들은 어디 숨어 있다가 저렇게 꾸역꾸역 기어 나오는 거야?”
“어으!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네!”
성안이 술렁이는 듯싶다가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터졌다.
“옜다! 이 동비 놈들아! 어제 주운 거 구경이나 해라!”
솔숲을 가득 채우고 있던 동학군이 채 대열을 정비하기도 전에 성벽에서 무언가가 뚝 떨어져 내렸다. 목에 줄이 걸린 시체였다. 성한 곳 하나 없는 모습이라 한눈에 알아볼 수는 없었다.
관군 하나가 낄낄대면서 줄을 흔들었다. 망가진 짚 인형처럼 성벽에 매달린 사체가 좌우로 흔들리면서 검붉은 치맛자락이 넓게 나풀댔다. 동학군들의 사이에서 깊은 침음이 흘렀다.
“설우 접장…….”
입술이 터지도록 질끈 문 이들이 일제히 설우를 눈에 담았다. 어디에서, 누구의 입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게 그들은 한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성문은 뚫렸다.”
관군들은 조롱하듯 설우를 내던졌으나, 동학군의 눈에는 그것이 전진을 명령하는 붉은 깃발처럼 보였다.
성문은 뚫렸으니 전진하라.
누가 명령하기도 전에 동학군 무리에서 달려 나온 여인 하나가 성문을 향해 불붙인 화살을 날렸다. 겹겹이 나무를 덧대어 막은 문에 화르륵 불길이 일었다. 수백의 흰 옷 입은 사람들이 또다시 뚫려 버린 문을 목표로 일제히 달려들었다.
“아직 해 지기 전이에요.”
높다란 절벽 위에서 그 소요를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던 묵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핀잔했다. 윤은 드러난 피부가 화상을 입은 것처럼 붉게 부풀고 녹아내리는데도 아무렇지 않은 듯 묵의 곁에 섰다.
“지금이야말로 하루 중에서 빛과 색이 가장 화려한 시간 아닙니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기적을 만들려면 석양 녘이 제격이지요.”
“…본인이 어떤 꼴인지는 압니까?”
윤은 대답을 대신해 장갑을 손에 끼었다. 제가 어떤 꼴인지는 상관없고, 정인을 받아 안을 손만 멀쩡하면 된다는 듯이.
“참… 독해도 저렇게 지독할 수가 없다.”
기가 차다는 듯이 헛웃음 지은 묵이 허리에 손을 얹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원껏 해 봐요.”
“제가 뭘 하려는지 아십니까?”
“저기 성벽에 걸린 시체를 되찾아가려는 거잖아. 이 냄새나는 데에 끼어들어서 같이 뛸 마음은 없지만 도둑질 망보는 것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내가.”
“아닙니다. 나으리께서는 이만 돌아가세요. 예쁘고 반짝이는 것 좋아하시는 분이 볼 만한 풍경은 아닙니다.”
윤이 사양하자 묵의 코웃음이 더 커졌다.
“잘 아네. 이런 거 진짜 질색인데 신경 쓰여서 서 있는 거라고, 내가.”
“예. 나으리 사과는 받은 셈 치겠습니다.”
“사과? 내가? 그쪽에게? 왜?”
“스승님께서 돌아가시던 날 제게 퍼부으신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려서 도와주시는 것 아닙니까.”
느긋한 호선으로 휘어진 묵의 입술이 굳었다. 윤은 그가 있는 쪽으로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오로지 성벽에 매달린 설우만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스승님께서 그리되신 뒤… 권가에게 협력했던 신과 인간들을 한꺼번에 해치우신 것 때문에 반동이 와서 아직도 몸이 성치 않으신 것 압니다. 신은 인간 생사에 끼어들 수 없지요. 나으리께서 아무리 서양에서 온 용이라도 연수산에 머물고 계신 이상 금기를 완전히 벗어날 순 없고요. 무리하지 마세요.”
“…눈치가 너무 좋아도 흠인 거 알죠?”
“제게 굳이 마음 쓰시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땐 나으리 입장에서 충분히 하실 만한 말씀이셨고, 저도 들어 마땅한 비난이었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나긋하게 눈을 깜빡인 묵이 검지를 한 바퀴 빙글 돌렸다. 만개할 계절을 맞아 이제 막 꽃잎을 펼쳤던 흰 꽃잎들이 덧없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어중간하게 망보는 건 그만두고 이참에 깨끗하게 정산합시다.”
새하얀 꽃잎들은 갓 시작된 석양 녘 주홍빛 하늘을 부드럽게 유영하며 성벽으로 흘러갔다. 서늘한 꽃향기가 매캐한 화약 냄새, 피와 땀의 악취 위를 덮었다. 성벽 앞에 진을 친 동학군들, 성안의 관군들 할 것 없이 나지막한 탄성을 흘리며 하늘에 펼쳐진 꽃잎의 강을 바라보았다.
“이게… 뭐 하시는 겁니까.”
“양념 칩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기적을 만들기엔 연극 무대가 너무 심심해 보이길래.”
미친 짓도 작작 하라 할까, 혀를 찰까 하던 윤은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묵에게 감사를 전했다.
“나으리께는 매번 신세만 집니다.”
“뭐야. 웃겨. 내가 꽃잎 뜯어 날리며 풍류 즐기는데 그쪽이 신세 질 건 뭐지?”
묵이 코웃음을 치며 진심으로 감사를 전하는 윤을 외면했다. 그가 인사를 받아 주든 말든 윤은 깍듯이 예를 표하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허리를 바로 세우는 윤의 눈동자가 샛노랗게 물들었다.
묵이 한쪽 눈썹을 흘끗 끌어 올렸다. 그것을 신호 삼아 두 남자의 발아래로 윤의 그림자가 소리 없이 미끄러졌다. 유난히 잦은 비에 젖어 물컹하게 짓무른 땅 위로 회색 그림자가 흐르듯 멀어졌다.
그림자는 가파른 능선을 타고 동학군이 포진한 평야를 지나 얼룩진 성벽을 타고 올랐다. 사람들이 난데없는 꽃바람에 시선이 팔린 틈을 타, 윤의 그림자는 성벽에 매달린 설우의 몸을 단단히 감쌌다.
설우를 바라보던 윤의 눈동자가 꽃을 잃은 나뭇가지로 향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모르게 고요히 앉아 있던 학이 스르륵 날개를 펼쳤다. 묵은 헛웃음을 지으며 학을 가리켰다.
“저 학… 이 산의 산군 심부름 하는 영물 아냐?”
“맞습니다.”
“자기 연애질에 정신 팔린 줄 알았더니… 이 멀고 먼 남쪽 산의 산군은 또 언제 구워삶았담.”
“제가 보기보다 인맥 관리를 잘하는 편입니다.”
그 말에 동의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주억인 학이 크게 날개를 펼쳤다. 학의 희고 붉고 검은 색이 잔상을 남기며 흩날리는 꽃잎 사이를 날았다. 바람을 가르고 날아간 학은 그저 지나는 길처럼 성벽을 돌았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까지 느긋하게 날갯짓하던 학은 이내 설우의 어깨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그리고 기다란 목을 휘적대며 성 안팎에서 웅성대는 인간들을 가엾다는 듯 둘러보았다. 기묘한 고요에 압도된 인간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학은 고개를 모로 틀고 부리로 설우를 매단 밧줄을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