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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 부르실 날에-106화 (106/157)

106화

“으으…….”

이부자리도 무엇도 없는 돌바닥에 급한 대로 도포를 깔고 환자를 조심조심 눕히자 여인의 입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의식 없이 멍하니 뜬 눈이 윤을 향했다. 윤은 그녀와 시선을 얽고 자신의 그림자로 그녀의 그림자를 덮었다.

“아프지 마세요. 더 이상 아니 아프셨으면 합니다.”

가까스로 고개만 한 번 끄덕인 여인이 스르륵 눈을 감았다. 숨까지 멈추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맥을 짚은 윤은 이내 장탄식을 토하며 굳은 어깨에서 힘을 풀었다.

“의복을 편히 하고 상처를 좀 보겠습니다.”

들을 사람도 대답할 사람도 없는데 윤은 허락을 구하듯 꼬박꼬박 말을 건넸다.

하나로 질끈 묶은 기다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풀자 여인의 마른 입술에서 긴 숨이 흘러나왔다. 윤은 침착하게 옷을 벗기며 가만히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혈기 없는 입술. 고통에 열이 올라 상기된 뺨. 그 어디에도 예전 영목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았지만 기다리던 그 사람이 확실했다.

거적과 다를 바 없는 저고리를 벗기자 너덜너덜하게 뚫린 옆구리가 드러났다. 윤은 자신의 저고리를 벗어 환자를 덮고 동굴 밖으로 나왔다.

“산군 계십니까.”

“오냐. 언제 불러 주나 기다렸지.”

세 마리나 되는 호랑이를 이끌고 온 산군이 동굴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영목이니?”

“예.”

“한눈에 알아볼 수 있더냐?”

윤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산군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윤에게 약초 한 아름을 안겨 주었다.

“피 냄새가 내 코까지 지끈지끈하게 하는 걸 보니 꽤 크게 다친 모양인 것 같아 좀 챙겨 왔다. 혹시 몰라 호랑이들을 풀어 동굴 앞을 지키게 했으니 걱정 말고 지내렴.”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요깟 일에 은혜가 뭐니. 됐다, 얘.”

“매번 베풀어만 주시니 마음이 무겁습니다.”

“돌바닥에 아픈 애 눕혀 둔 걸 보니 내 마음이 무겁다. 동굴 입구에 새 이부자리 갖다 둘 터이니 피 멎거든 퐁신한 데에 옮겨 눕혀 주렴.”

산군이 떠난 뒤, 윤은 꼬박 닷새를 간호했다.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동굴이라 가까스로 자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엿새째, 한낮의 태양과 피로가 파도처럼 윤을 덮쳐 윤은 거부할 도리 없이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윤이 죽음 같은 잠에 빠짐과 거의 동시에 여인이 눈을 떴다.

“…여긴 어디야?”

사방을 두리번대던 그녀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제 몸과 그 위를 이불처럼 덮은 사내의 저고리에 경악했다. 그녀는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하면서 급한 대로 사내의 저고리에 팔을 끼워 넣고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죽은 체하며 시체 사이에 숨어 성벽을 향해 전진하다가… 총을 맞았지.’

가느다란 손이 자신의 옆구리를 짚었다. 통증 때문에 기절할 정도로 꽤 충격적이었던 관통상은 잘 꿰매져 깨끗한 무명천으로 덮여 있었다.

그녀는 옆구리를 매만지면서 동굴 입구에 걸린 대나무 발을 슥 밀어 올리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아니, 걸어 나가려 했다.

‘뭐야, 이게!’

그녀는 바깥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어깨를 부딪치고 주먹으로 두드려도 소용없었다.

“이게 뭐냐고!”

“어, 이게 뭐냐 하면―”

“이건 또 뭐야! 호랑이가 말을 해?”

뻥 뚫려 밖이 그대로 내다보이는 동굴에서 나갈 수 없는 것도 믿어지지 않는 판에, 발소리도 없이 나타난 호랑이가 말까지 걸었다. 그녀는 기절할 것 같은 얼굴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옆구리의 상처가 다시 터졌는지 옷 위로 붉게 번지는 핏 자국을 보면서 커다란 백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면서 산군이 이 입구를 막아 두었어. 이게 다 처녀를 보호하기 위한 거니까 조용히 있는 게 좋아.”

“그게 무슨…….”

“저 도령한테 아주 무서운 보호자가 붙어 있어서 말이지.”

“도령?”

호랑이는 두툼한 앞발을 뻗어 동굴 한구석을 가리켰다. 호랑이가 가리킨 곳, 약재와 모닥불의 사이에서 한 사내가 몸을 웅크리고 잠들어 있었다.

“도령 근처에 여자만 보이면 아해고 할매고 가리지 않고 잡아 죽이는 미친 보호자가 있거든.”

“…….”

“아무튼, 상처 나을 때까지는 큰 소리 내지 말고 있어. 먹을 거나 뭐 그런 건 산군께서 알아서 보살피실 테니까.”

느릿느릿한 말투로 그녀를 안심 아닌 안심 시킨 백호가 길게 기지개를 켜고 멀어졌다. 몇 걸음 걸어가던 백호는 중요한 걸 잊었다며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 대나무 발은 걷지 말아 주어. 도령이 햇빛을 쐬면 좋지 않거든.”

“…알았어요.”

“착한 아이로구나.”

그녀는 초록 풀이 우거진 산길을 사뿐사뿐 걸어 멀어지는 거대한 짐승의 뒷모습을 질린 눈으로 쳐다보다가 시키는 대로 발을 내리고 돌아섰다.

‘내가 총에 맞아 죽은 건가? 죽었는데 저승이 아니라 선계 같은 곳으로 떨어진 건가?’

그렇게밖에는 설명할 도리가 없을 것 같았다.

‘살면서 도깨비불 정도는 몇 번 보았지만… 말하는 호랑이라니.’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사내에게로 다가갔다. 겉옷을 그녀에게 벗어 준 채 속적삼만 걸치고 있어 추운지, 늘씬하게 큰 사내가 아이처럼 한껏 웅크린 모습이 왠지 귀여웠다.

사내의 앞에 쪼그리고 앉으려던 그녀는 동굴 안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가까이 가기 전에 내 몸 지킬 날붙이 하나는 있었으면 좋겠는데…….’

딱 적당한 곳에 약재를 손질하던 것으로 보이는 단도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단도를 단단히 쥐고서 다시 사내를 향해 다가갔다.

총에 맞은 저보다 더 창백한 얼굴을 한 사내였다. 눈매가 길고 콧날과 턱선이 유난히 도드라져 선이 고우면서도 예민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흔들리는 모닥불의 불빛이 그의 우묵히 깊은 눈가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발긋하게 물든 눈꼬리와 새빨간 입술이 서늘하게 아름다운 얼굴에 오묘한 색을 더하고 있었다.

‘이 선녀같이 생긴 낯짝을 왜 어디서 본 것 같지? 한번 보면 잊을 수 있는 얼굴이 아닌데.’

쪼그려 앉아 고개를 갸웃대던 그녀가 무릎을 철썩 내려쳤다.

“아! 그날, 보부상군 놈들이 도련님이라고 부르던 그놈이야! 그럼 그렇지. 어디서 본 것 같더라니.”

꽤 한참이나 제 기억력을 칭찬하던 그녀는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근데 보부상군과 한패인 놈이 나를 왜 구했지?”

보부상군은 관군들이 소모품처럼 험한 전투마다 방패로 내세우는 놈들. 동학군은 그들의 적. 아무리 생각해도 보부상군의 ‘도련님’이 동학군인 자신을 살릴 이유가 없었다.

‘내게서 동지들의 정보를 알아내려는 건가.’

그것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물론 나갈 수 없는 동굴과 말하는 호랑이 같은 것은 조금도 설명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일단은 눈앞의 사내에게만 집중하기로 했다.

그녀는 잠든 사내의 목에 칼을 겨누고 그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녀의 삶에서 가장 지루한 한나절이 느리게 흘러갔다.

“목에 칼을 들이밀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잘도 자더니. 이제야 일어나는군.”

윤이 부스스 눈을 뜨자 그녀가 다소 짜증스럽게 빈정댔다. 윤은 자신의 목에 닿은 날붙이를 내려다보며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동학에서는 목숨 구해 준 은인에게 칼 겨누라 가르치더이까.”

그녀는 하얗게 마른 입술을 비스듬히 기울이며 윤에게 더 가까이 칼을 들이밀었다. 윤은 여전히 잠에 물든 눈으로 흘끗 칼을 쳐다보다가 손끝으로 칼날을 가볍게 퉁 튕겼다. 단단한 약초들을 다듬을 정도로 잘 갈려 있던 칼이 장난감보다도 더 장난감처럼 부스러졌다.

놀란 그녀가 후다닥 뒷걸음질로 윤과 거리를 벌렸다. 윤은 그녀를 한 번 흘끗 쳐다보고는 몸을 일으켜 동굴 앞에 걸어 두었던 두툼한 발을 정돈했다.

“이건 왜 이렇게 엉망으로 쳐 두셨답니까? 환자에게 찬 바람은 금물인데. 따뜻하게 계시지 않고요.”

“가까이 오지 마라!”

윤은 그저 그녀에게로 몸을 틀었을 뿐인데, 그녀는 바닥을 나뒹굴던 나뭇가지를 주워 겨누며 주춤주춤 더 멀어졌다.

“예상도, 각오도 했으나… 각오한 게 무색하도록 섭섭하네요.”

잔뜩 경계하는 그녀의 모습에 윤이 진하게 한탄했다.

“곧 돌아와서 제 이름을 불러 주시겠다더니. 그 거짓말에 제가 또 속았습니다.”

“…뭐?”

“하긴. 좋은 세상에서 보자 하셨는데 지금은 조금도 좋은 세상이 아니지요. 이해합니다.”

“뭐라는 거야?”

윤은 대꾸하지 않고 제가 잠든 새에 엉망이 된 제 옷매무새를 보며 한숨지었다. 뭘 그렇게 뒤져 댔는지 속적삼도 바지도 아주 엉망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제 차림새 흐트러뜨리는 건 어찌나 잘하시는지.”

눈을 내리깔고 옷고름을 고쳐 매는 윤을 보면서 그녀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이상한 소리로 나를 현혹시키려는 모양이라면 집어치워. 나는 너를 안다.”

윤은 옷고름을 묶다 말고 떨리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정말… 정말로 저를 기억하십니까?”

“그래. 너는 보부상군 놈들에게 무기 대고 군량 대는 놈이지?”

기대에 가득 찼던 윤은 실망을 금치 못하고 표정을 굳혔다. 그녀는 윤을 흘기며 제법 자신 있게 그를 몰아붙였다.

“놈들이 너를 도련님이라 부르면서 성벽 위로 모셔 가는 걸 내 똑똑히 보았다!”

“쓸모없는 것은 그리 똑똑히 보고 들으시면서 왜 저는 기억을 못 하시는지.”

“…날 알아?”

윤의 진한 한숨이 온 동굴을 울렸다. 한숨이 잦아들자 그는 시름 깊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통성명이나 하지요. 저는 남가 영윤입니다. 제가 그대를 무어라 부르면 되겠습니까?”

“…운설우.”

“이름 안에 구름과 눈과 비가 다 있네요.”

설우. 운설우.

윤은 그의 이름을 수없이 되뇌면서 눈으로 그녀에게 누우라 권했다. 설우가 고개를 저었다. 윤은 피가 번진 그녀의 옆구리를 가리키며 동굴 한편에 준비해 둔 깨끗한 천과 약재들을 눈짓했다.

“상처가 벌어진 듯하니 누우세요. 제가 그대에게 해를 끼칠 요량이었다면 의식이 없으실 때에 이미 온갖 짓을 했을 겁니다.”

“나도 알아. 나쁜 짓을 할 것 같지는 않은데 날 놓아줄 것 같지도 않아서 몸 사리는 거고.”

“변함없이 감도 좋으시고.”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설우가 더 뒷걸음질을 쳤다. 그녀는 동굴 벽에 등을 딱 붙이고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바깥 풍경으로 시선을 돌리며 윤이 아주 작게 혼잣말을 했다.

“내가 내 생각보다 인내심이 옅은 모양이야.”

“뭐라고?”

설우가 눈썹을 찌푸리며 귀에 손을 갖다 댄 찰나, 작은 소쿠리에 무명천과 약재를 담은 윤이 그녀에게 성큼 다가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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