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스승님의 말씀처럼 나으리는 나으리보다 더한 정인을 만나실 겁니다. 겪어 본 적 없이 속을 다 뒤집어 놓고, 바보 같은 짓만 골라 하게 만드는 사람을요.”
“그쪽이 정인에게 매여 산다 해서 세상 다른 사람들도 다 똑같을 거라 생각하는 건… 좀 바보 같지 않나?”
“이렇게 나한테 했던 말들이 생각나고, 내게 부탁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속이 뒤집히게 될 겁니다.”
온 신력을 다해 저주를 걸면서 윤은 확신했다. 세상 모든 것을 깔보는 이 망할 서양 용은 언젠가 제게 와서 도와 달라 부탁할 거라고. 이성과 합리 따위를 짓밟으며 제 심장을 쥐고 흔드는 존재가 생기자마자 불안해하고 자책하고 후회하게 될 거라고.
그날을 생각하며 윤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윤의 표정이 꽤나 마음에 들지 않는지 코웃음 치는 묵의 얼굴에 짙은 불쾌감이 어렸다.
“내력 깊은 흡혈귀는 꽤나 강한 저주가 가능하긴 한데… 그쪽은 아직 사람 피도 못 빠는 반편이라 그런가, 조금의 타격도 없네요. 아쉬워라.”
묵은 보란 듯 코웃음을 쳤다.
“흡혈을 거부하면서 ‘흡혈귀’라는 이름값도 못 하는 주제에 정말 저주라도 걸려는 모양이 아주 가소로워.”
윤은 대꾸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묵을 노려보기만 했다.
점점 노란 불꽃이 커지는 윤의 눈동자를 보면서 묵과 민재가 ‘요놈 봐라.’ 하던 순간이었다. 윤의 눈이 찬란한 황금색으로 빛났다.
‘최 형이 돌아오셨다.’
영목의 피 냄새가 났다. 아주 먼 곳에서 바람결에 실려 온 아주 옅은 냄새였지만 확실히 영목의 피였다. 윤은 한껏 확장된 동공으로 불안하게 사방을 살폈다.
“뭐야……. 방금 뭐 한 거예요? 저주는 아닌데?”
궁금해하는 묵의 말에는 대답할 생각도 없이 윤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자신의 품을 더듬었다. 항상 침착하기만 한 윤의 손끝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방금 그거 뭐냐니까? 혹시 지금 본인 눈 색 바뀐 거 모르나?”
“압니다. 잔소리 그만하시고 포도주병이나 채워 주십시오.”
윤이 품에서 꺼낸 작은 술병의 뚜껑을 열어 내밀었다. 좁은 병 입구에서 진한 포도주 향이 물씬 피어올랐다.
묵은 호리병을 한 번, 윤의 얼굴을 한 번 번갈아 보면서 입꼬리를 뒤틀었다.
“하. 저주 걸다 말고 피 내놓으라고?”
“도와줄 수 있는 건 도와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나으리께서. 나으리 입으로.”
“하……. 이래서 사람이 너무 착하고 너그럽게 살면 안 돼.”
“나으리는 착하지도 너그럽지도 않으시니까 걱정 말고 여기나 채워 주세요.”
“서릿재 식객 하는 짓이 갈수록 뻔뻔해지네.”
이렇게 싸웠다가 저렇게 싸웠다가 붙기만 하면 끊임없이 싸우는 두 놈을 쳐다보며 민재는 혀를 찼다. 윤이 피를 달라 재촉하는 모습이 너무나 낯설기 때문이었다. 윤은 본성을 거부한 채 시종 말라비틀어져 있기 일쑤였다.
‘오래 묵기로는 세상을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흡혈귀의 피를 받은 주제에 피를 안 마시니……. 애가 오죽 고집이 세면 문세경이랑 무기 저놈이 목을 꺾어 기절시켜서 억지로 피를 먹이겠냐고.’
보다 못한 민재가 제 팔을 그어 내밀었을 때에도 윤은 한사코 고개를 저었다. 그러던 윤이 갑자기 피를 내놓으라 재촉하는 모습은 낯설다 못해 기묘하기까지 했다.
묵의 기분도 민재와 별반 다르지 않은지 그는 어이없어하는 얼굴로 술병을 가리키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저기, 사람 피는 곧 죽어도 아니 먹겠다면서 문세경이나 내가 포도주에 섞어 주는 피는 모르는 척 마시는 거… 좀 웃기지 않나?”
“조선 땅에서는 밥 가지고 생색내는 것 아니라 하셨습니다. 나으리께서, 나으리 입으로.”
초조한 듯 빠르게 쏟아 내는 말에 묵이 할 말을 잃었다.
윤은 때려죽인대도 사람의 목을 물지 않았다. 그렇다고 제 입으로 세경이나 묵에게 피 좀 마시게 해 달라 부탁할 인간도 아니었다.
포도주에 피를 섞어 먹이라고 조언한 것은 민재였다. 윤은 떠난 사람이 남기고 간 것을 중히 여기는 성격이니 불란서 의사 선생이 담근 포도주에 피를 섞으면 못 이기는 척 알아서 마실 거라고. 앵속을 빨아 대는 것보다야 술을 퍼마시는 쪽이 백번 낫다 싶어 묵과 세경은 오며 가며 포도주 단지를 채워 넣곤 했다.
윤이 고맙다고 머리를 숙이면 묵은 그까짓 포도주 가지고 인사받는 것도 구차스럽다며 손을 내저어 면박을 주었다. 조선에서는 밥 가지고 생색내는 것 아니라 배웠다면서.
제가 한 말을 그대로 돌려받은 탓에 묵은 입을 닫고 눈만 흘기면서 무명지 끝에 생채기를 내었다. 그가 윤에게 술병을 가득 채워 내밀자마자 윤은 깊이 고개를 한 번 숙이고 안에 든 것을 단숨에 입에 털어 넣었다.
‘꽤 멀리에서도 이렇게 피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정도라면 필시 작지 않은 상처일 터. 치료하고 간호하고 곁에 머무르려면 배를 채울 수 있는 만큼 채워야 한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피 냄새가 아득히 멀리에서 그를 재촉했다. 윤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병을 비우고 백마의 말고삐를 쥐었다.
“자초지종은 다녀와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윤은 백마에 올라 말의 옆구리를 힘껏 걷어찼다. 주인의 마음을 읽은 백마가 어찌나 빨리 달리는지, 어이없어하면서 수군대는 묵과 민재의 목소리가 빠르게 멀어졌다.
윤은 피 냄새가 나는 쪽으로 달리고 또 달렸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매캐한 탄약 냄새와 지독한 피비린내가 풍겨 왔다.
‘여기는…….’
가는눈을 뜨고 주변을 살피는 윤에게 누군가 반색하며 다가왔다.
“도련님! 수십 번을 청해도 아니 오실 것처럼 말씀하시더니 친히 와 주셨습니까?”
보부상군의 옷을 걸친 담무회 접장이었다. 피 냄새를 따라오는 데에만 집중했던 윤은 뜻하지 않은 만남에 미간을 구겼다.
‘신식 조총을 구하게 자금을 대어 달라 하도 징징거리기에 생각해 보겠다고 돌려보낸 참이었는데 하필 여기에서 만날 줄은.’
윤의 마음속을 알 리 없는 접장은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자금 지원을 깨끗하게 거절당한 줄 알고 크게 낙담했던 접장은 전장으로 직접 찾아온 윤이 그리 반가운지 과할 정도로 비위를 맞췄다.
“아이고, 세상에. 도련님께서 어찌 이 야심한 시각에 혼자 오셨습니까. 항상 곁에 계시던 그 덩치 큰 나으리라도 함께 오시지 않고요?”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할 것 같아서.”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면서 윤은 꼼꼼히 주변을 살폈다. 머리를 지끈거리게 하는 지독한 쇠 비린내 사이에 미치도록 그리워했던 향기가 있었다.
‘혹시 땅바닥이 보이지 않도록 깔린 저 시체들 중에 있는 건가.’
윤은 더 예민하게 오감을 곤두세웠다.
‘조금씩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진다. 살아서 움직이고 있어.’
땅바닥은 온통 시체, 주변은 온통 울창한 풀숲과 고목이라 어디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윤이 미동 없이 눈만 굴리는 사이, 접장이 그를 성벽으로 이끌었다.
“성벽으로 오르시지요. 마침 도련님을 궁금해하는 책임자들이 모인 참입니다.”
사람을 찾기엔 지옥도가 따로 없는 아래쪽보다는 성벽 위가 낫겠다 싶어 윤은 지체 없이 그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누구신가?”
“아. 자네들은 처음 뵙겠구만. 우리 군량이며 무기 지원해 주시는 도련님이야.”
“말로만 듣던 도련님을 이제야 뵙는구만!”
땀내 나는 사내들이 윤을 위아래로 훑었다. 윤은 사내들과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울창한 솔밭 한구석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저기다.’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많은 시체들 틈에 살금살금 움직이는 아담한 인영이 있었다. 평범한 사람의 눈이라면 보일 리 없는 모습이었으나 윤의 눈에는 바로 코앞에 있는 듯이 선명했다.
“저기, 도련님, 우리가 신식 총이 정말 필요한데 말이오……. 포도아(葡萄牙) 쪽 물건이 그렇게 좋다던데.”
“정 아니 되면 왜놈들이 쓰는 거라도 어떻게 안 되겠소? 우리 보부상군한테는 지급을 안 해 주니, 원.”
윤을 둘러싼 사내들이 슬금슬금 가까이 다가왔다. 사내들이 떠들어 대는 동안에도 윤의 시선은 솔숲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시체와 시체 사이, 나무와 나무 사이에 몸을 숨기고 느리게 느리게 성벽 쪽으로 다가오던 인영이 풀썩 고꾸라졌다. 윤은 사내들이 이상하게 보지 않도록 솔숲 앞의 모래벌판과 판자 조각이 널브러진 너른 공터의 시체들을 아주 천천히 훑어보았다.
“이미 신식 조총을 구하신 듯한데요.”
“무얼 그리 뚫어지게 보시나 했더니. 동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확인하고 계셨습니까?”
직위도 직급도 이름도 전혀 궁금하지 않은 사내들이 껄껄 웃었다. 윤은 더 이상 꿈틀대지도 않는 솔숲의 한 점에만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 위치를 파악하였으니 사내들 따위는 이제 알 바 아니었다.
“보이는 것이 온통 시체이고 상처를 보아 하니 신식 총에 맞은 듯하여.”
“저건 우리가 쏜 게 아니오. 우리가 가진 구식 총으로는 개미 떼처럼 몰려오는 동비들을 대응하기가 너무 어려워.”
윤은 관군들에게 보급되는 무기와 보부상군에게 주어지는 무기는 당연히 다르다는 둥 하는 한탄을 한 귀로 흘리며 자신의 그림자를 움직였다. 윤의 그림자가 그를 둘러싼 다섯 사내의 그림자를 덮고 옥죄자 덩치 큰 사내들이 숨도 쉬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 달려오는 동안 원래 색으로 돌아왔던 윤의 눈동자가 다시 노랗게 물들었다.
“너희들은 승리를 자축하며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마신 거다. 나는 여기 오지 않았고, 너희는 당연히 나를 만난 적도 없어.”
사내들이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윤은 그림자에게 눈짓하고 유유히 성벽을 내려갔다. 그 무엇도 살아 있지 않은 깊은 밤에 윤의 새하얀 도포만 그의 걸음을 따라 펄럭였다.
솔숲 깊이 들어온 윤은 그렇게나 보고 싶던 사람을 안아 들었다. 시체와 다를 바 없이 창백한 여인은 거친 필체로 네 글자가 적힌 무명천으로 상체를 감싸고 있었다.
‘궁궁을을(弓弓乙乙)……. 동학군이었나.’
윤이 씁쓸히 웃었다.
“자기가 담무회를 만들어서 떠맡겨 놓고… 그 반대편에서 싸우고 있는 게 어딨습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그는 정인을 품에 꼭 안고 말에 올랐다. 어디인지도 모르고 내달렸는데 정신을 찾고 보니 꽤나 남쪽까지 와 있었다.
‘백마가 아무리 빨라도 해가 뜨기 전에 연수산까지 되돌아가는 건 무리다.’
거리와 시간을 가늠한 그는 고민 없이 범산 온천 동굴로 목적지를 정하고 말을 내달렸다. 품에 안은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온천 동굴에 도착했을 무렵, 여인은 거의 불덩이처럼 열이 올라 끙끙 신음만 흘리고 있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으나 윤은 차게 식은 것보다는 열 오르는 몸이 백배 낫다 스스로를 안심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