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이 주름은 지난 세월 동안 내가 내 자리를 잘 지켜 내었다는 증거이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조금 용기를 내어 윤을 마주 보았다. 주름진 얼굴이 부끄럽다는 마음도 접었다.
“기억하실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어릴 때에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오. 귀하가 단이 아씨 손을 잡고 운종가로 나들이하시던 까마득한 옛날에.”
“기억합니다. 우물가에서 나를 비웃던 이들을 향해 따끔히 말씀해 주셨던 날 말씀이시지요? 얼마나 감사했던지.”
“감사할 일이 아니오. 내가 귀하에게 죄지은 것이 있어 갚으려 했을 뿐이거든.”
윤이 눈썹을 꿈틀 들어 올렸다. 나은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귀하가 열일곱 살 되던 해였던가……. 나는 조부님도 모르게 남가로 중신어미를 보냈소. 중신어미 곁에서 수발드는 몸종 아이인 것처럼 변장하고 남가로 함께 갔었지. 사랑채 앞에서 까치발로 담장 너머를 들여다보다가 귀하와 똑바로 눈이 마주쳤어.”
무언가 기억난 듯이 윤이 “아.” 하고 짧은 감탄을 흘렸다.
나은의 주름진 눈이 허공을 바라보았다. 세월을 담은 눈이 어리고 젊고 빛나던 날의 오후를 더듬었다. 집안 어른들 몰래 사내의 집에, 그것도 사랑채까지 멋대로 들어갔던 날이었다.
- 길 잘못 드시었습니다. 교월루는 반대편에 있습니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눈이 마주치자 윤은 나은에게 남가 상단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 중신어미는 기절할 것처럼 놀랐지만 나은은 도리어 침착하게 대꾸했다.
- 아니오. 나는 도련님을 만나러 왔소.
- 아씨께서는 본인에게 가격표를 잘못 매기셨습니다. 호패도 없는 놈의 내자로 묶이시기엔 너무 귀하신 분입니다.
- …….
- 교월루에서 대방 마님을 만나 보시고 제값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이 말을 끝으로 윤은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생전 처음 겪는 냉대에 온몸이 수치로 붉게 달아올랐던 날이 나은에겐 아직도 생생했다.
어린 도령이 사라진 자리를 노려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던 날을 떠올리며 그녀가 눈꼬리를 접었다.
“그날, 그 순간의 나는 그저 한없이 부끄러웠소. 귀하의 말 속에 담긴 충고를 이해하기엔 내가 너무 어리고 어리석었지.”
지난날의 기억을, 계화 향기가 유난히 선명했던 오후를 떠올리면서 나은은 스르륵 눈꺼풀을 닫았다.
“도망치듯 귀하의 집을 빠져나와 저잣거리로 들어서자 함께 갔던 중신어미가 슬슬 나를 놀려 대었지. 발끈하여 언성을 높였다오. 남윤은 분명 남장한 여인일 것이라고. 그렇지 않고서야 매번 귀한 혼담을 쳐 낼 리가 없지 않냐고.”
아주 찰나간의 침묵 뒤에 윤이 짧은 한숨을 토했다.
“하……. 그 소문의 시작이 아씨였습니까?”
“집에 가는 길에 빽 내지른 소리가 그렇게 빨리 한성 바닥으로 퍼져 나갈 줄은 몰랐소.”
나은이 면목 없다는 듯이 고개를 푹 숙였다. 작은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아 눈을 들었을 때엔 여전히 서늘한 청년만이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은은 그와 눈을 맞추며 몇십 년이나 늦은 질문을 건넸다.
“그날 귀하는 내가 남가 상단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것을 어찌 알고 계셨소?”
“아씨께서는 그냥 상단에 몸담고 싶으셨던 게 아니라 대방이 되고 싶어 하셨지요.”
예상치 못한 지적에 나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윤은 어깨를 으쓱이며 그녀가 원하는 더 자세한 답을 내어 주었다.
“사람들은 나나 어머니를 쳐다보는데 아씨는 항상 교월루만을 보고 계시더군요. 그러니 아씨를 알고, 기억할 수밖에요.”
약간 머뭇대던 나은은 깔끔히 인정했다.
“그 말씀대로요. 고백건대 나는 귀하를 좋아하지 않았소. 귀하와 혼인하여, 가업인 상단 일을 배우고 싶었을 뿐이야.”
한껏 턱을 들어 올린 그녀는 별이 가득한 하늘을 쳐다보며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내게 귀하는 남가 상단에서 일할 수 있는 그럴싸한 구실 정도였소. 나는 병판 댁 고명딸이니 귀하가 내 사주단자를 내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지.”
스산한 밤바람이 둘 사이를 가르고 지나갔다. 나은이 어깨를 떨며 장옷의 목을 여몄다.
“나는 내가 아주 귀애받고 살았다 믿었소. 할아버님께 말 타고 활 쏘는 법을 직접 배웠다며, 장옷 덮고 다니는 아씨들과는 다르다며 내심 잘난 체도 했다오.”
목덜미를 여며도 몸에 스미는 한기는 여전했다. 몸이 추운 것이 아니라 마음이 추운 것인가. 나은은 감상 어린 생각에 씁쓸히 웃으면서 제 실상을 고백했다.
“내 처지는 그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오. 귀하에게서 알 수 없는 소리를 듣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아버님과 할아버님께 뺨을 맞고 방에 갇혔지.”
나은이 손등으로 뺨을 쓸었다.
“중신어미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당했다 들었소. 남가가 병판 대감 댁 아씨를 거절했다는 소문이 나면 가문의 누가 된다나? 조부께서는 이제껏 본 적 없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셨지. 수치스러워 낯을 들고 다닐 수가 없으니 집 안에서 꼼짝 말라시더군.”
“…….”
“어두컴컴한 방에 옹크리고 누워 나 때문에 죽은 중신어미에게 끝없이 사과하고, 귀하의 말을 쉼 없이 되풀이했소.”
나은은 다시 엄습하는 추위에 어깨를 떨었다. 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제 목에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 나은에게 건넬 뿐이었다.
무심히 건넨 온기에 감사하며 나은은 새하얀 목도리를 받아 들어 목에 둘렀다. 그리고 지난날, 윤이 제게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가격표를 잘못 매겼다.
“가격표를 잘못 매겼다는 게 대체 무슨 뜻일까. 비싸서 거절당한 걸까, 너무 싸구려라 거절당한 걸까. 계속 고민했다오. 장장 보름을 근신당하며 고민해도 답을 찾을 수가 없었어.”
옛일을 더듬는 사이, 저만치 앞에 네 개의 봉분이 보였다. 한밤의 어슴푸레한 달빛 아래에서도 봉분을 둘러싼 새빨간 꽃무릇이 바람을 따라 하늘거리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어찌나 예쁘게 관리했는지 네 개의 봉분은 무덤이 아니라 붉은 꽃밭에 늘어선 작은 동산들처럼 보였다.
나은은 그마저도 부러워하며 윤이 도와줄 틈을 주지 않고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녀는 놀란 윤의 부축도 손을 저어 마다하고 천천히 걸어 무덤가로 다가가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근신이 풀려 밖으로 나왔더니 온 한성 바닥에 내가 흘린 헛소문이 자자하더구만.”
“덕분에 최 형이 아주 신나게 놀려 대었습니다. 진짜 여인인지 옷고름 풀고 다 벗겨 보자는 둥 하면서요.”
“하여튼 그 사람은 명주 천으로 가슴 꽁꽁 싸매고 다니는 제 몸 생각은 않고… 누구를 어떻게 벗기자며 겁 없이 달려드는지, 원.”
“그러게나 말입니다.”
맞장구를 친 윤이 영목의 무덤을 가리켰다. 나은은 소매에서 작은 천 조각을 꺼내 그 앞에 내려놓았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이내 내려놓은 천 조각을 집어 들어 윤의 손에 쥐여 주었다.
“아무튼, 나는 내가 흘린 말에 책임을 지고 싶었소. 그래서 내 귀에 귀하를 놀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목청 높여 끼어들어 입을 다물게 했던 거요.”
윤은 그녀가 건넨 천 조각을 내려다보았다. 모란과 나비가 수놓인 붉은 댕기. 창천 물레방앗간으로 가던 날, 윤이 영목의 머리에 묶어 주었던 댕기였다. 나은은 먹먹한 눈으로 댕기를 품에 안는 윤을 바라보다가 영목의 무덤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내가 우물가며 저잣거리에서 사대부들을 비난하고 다닌다는 이야기가 조부님 귀에 들어갔소. 또다시 갇혔고. 그때는… 두 달쯤 근신했던가? 한 번이 어려웠지, 두 번째 근신하니 별것 아니더군.”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피식거린 그녀는 허리에 차고 있던 금색 증명 패를 흔들었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최영목이 나 같은 성질머리로는 남가 상단 대방이나 해야 한다며 이 패를 떠맡겼소.”
미동 없이 듣고 있던 윤의 입꼬리가 슬며시 위로 움직였다. 나은은 더 활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그때의 나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오. 성질머리란 소리를 듣기에도 부끄러울 정도로 가만히 기죽어 있었어. 조부님께서 한 번만 더 나대면 머리를 밀어 버리겠다며 엄포를 놓으시기에 그냥저냥 숨죽이며 살았지. 최영목은 내게 속아서 패를 헐값에 넘긴 게야.”
나은이 장난꾸러기 같은 얼굴로 영목의 봉분을 쓰다듬었다.
“있는 듯 없는 듯 갇혀 살다가 남가에 큰일이 일어난 그해에 혼인하였소. 얼굴 한번 못 본 사내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혼례를 치렀다오.”
“모두에게 가혹한 해였나 봅니다.”
“그런 셈인가.”
덤덤하게 중얼거린 그녀는 영목의 봉분을 하염없이 토닥이며 쓸어내렸다. 옛 친구의 손을 잡고 반갑게 다독이는 듯한 그녀의 손짓을 보면서 윤은 시큰해지는 코끝을 하늘로 들어 올렸다.
나은은 느릿느릿 영목의 무덤을 토닥이면서 쉼 없이 옛일을 이야기했다.
“초야를 치르고 시댁으로 가던 날… 가마에 실려 숭례문 쪽으로 가면서 요만큼 열린 창문 틈으로 교월루를 보았지.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왔소.”
그녀는 잠시 말을 끊고 크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지난날의 북받치는 감정을 쏟아 내었다.
“그랬구나. 나는 대방 마님이 되고 싶었구나. 잘못 매겨진 가격표라는 건 이런 이야기였구나.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나는 내게 ‘남윤의 처’가 아니라 ‘남가 상단 대방 마님’이란 가격표를 매겼어야 했구나.”
윤은 나은의 말을 들으며 보듬고 있던 댕기를 품 안으로 소중히 넣었다. 나은의 눈이 윤의 손을 따라 움직였다.
“제값을 찾으라던 귀하의 충고를 그때에서야 이해한 거지. 심장이 아랫배까지 내려앉았소. 튀어나올 것처럼 뛰는 심장을 누르면서 남가 상단 담장 위로 솟아 있는 교월루를 보았다오. 내가 정말로 귀하를 사랑하였던 것은… 그 순간부터일 거요.”
갑작스러운 고백에 윤이 멈칫 몸을 굳혔다. 나은은 키득대면서 짓궂게 윤을 흘겼다.
“이 나이 되어서 그대에게 내 연심을 받아 달라 매달리려는 것은 아니니 그리 당황치 마시오.”
“…….”
“나도 몰랐던 내 소원을 알아주어서, 내가 매긴 내 가치가 틀렸다고 말해 주어서 고마웠다고, 그 감사를 전하고 싶었을 뿐.”
나은은 무덤 위에 올려 두었던 손을 거두고 윤을 마주 보았다. 영목의 무덤을 사이에 두고 한참 동안 서로를 묵묵히 바라보기만 하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상대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정중하고도 정중한 인사를 나눈 뒤에 나은은 홀가분한 얼굴로 다른 무덤들을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