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 나 부르실 날에-100화 (100/157)

100화

‘그들이 그럴 리가 없다.’

나은조차도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담무회 사람들의 근본 없는 행실에 눈살을 찌푸리다 속으로 화들짝 반성하기를 반복했다.

‘여인으로 태어난 것을 평생 억울해한 나도. 나처럼 억울한 사람들의 편을 들어 주자고 수없이 다짐 중인 나조차도.’

나은조차도 이럴진대, 태어나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당연히 여기는 양반 사내들이 담무회를 사람으로 봐 줄 리가 없었다. 조정에서 닳고 닳은 사대부들이 그럴 리 없었다.

나은이 보기에 조정에서 담무회에 저런 미끼를 던진 이유는 한 가지였다. 적당히 방패로 쓰기 좋은 패였기에.

‘담무회는 결국 이용만 당하고 버려질 거야.’

나은의 염려는 까맣게 모르는 채, 담무회 접장은 그저 싱글벙글이었다.

“영목이가 담무회를 만들면서 바라던 게 딱 이런 거였을 텐데. 윤이 도련님이 이 소식을 들으시면 얼마나 좋아하실꼬.”

이번에도 나은은 동의하지 않았다. 영목은 나라를 엎기 위해 담무회를 만든 것이지, 병조의 부속품 따위가 되길 바란 적은 없었다.

노인이 화통하게 웃으며 꿀꺽 비워 버린 찻잔에 차를 따라 주면서 나은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천민 출신 등짐꾼으로 시작해 담무회의 접장으로 늙어 간 사내. 그는 자신이 키운 천민 조직이 버젓한 조정의 기관이 된다는 생각으로 이미 들떠 있었다. 더 들어 볼 것도 없었다. 이미 조정에서 온 사람과 이야기를 끝내 버린 것이 분명했다.

“접장, 도련님과 의논 없이 이렇게 결정해도 되는 일이오?”

“으응……. 머리로는 도련님 의견을 여쭙고 결정해야 하는 일이라는 걸 알지만… 이런 기회가 또 없을 것 같아 마음이 급했소. 허락을 구하는 게 아니라 통보 같은 모양새가 되어서 꽤나 혼나겠지 싶은데…….”

노인이 귓가를 긁적이면서 나은을 쳐다보았다. 나은이 눈살을 구기며 고개를 저었다. 접장은 한껏 불쌍한 척 눈꼬리를 끌어 내리며 나은에게 매달렸다.

“에이… 그러지 마시고, 대방 마님, 나랑 같이 우리 도련님 좀 만나 봐 주시오. 응?”

“사고는 접장이 치고, 수습은 왜 나와 함께 하자 해?”

잔뜩 주름지고 그을린 얼굴이 면구쩍게 씩 웃었다.

“아무렴 나보다는 대방 마님이 조곤조곤 말씀을 잘하시니까아.”

“싫소.”

“에이, 그러지 말구. 담무회는 남가 상단에도 한 다리 걸치고 있는 곳 아니우? 도와주는 셈 치고 함께 갑시다.”

제가 말하고도 좀 아니다 싶었는지 접장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실없이 웃었다. 그가 다시 나은을 설득하려 입을 떼었으나 나은이 질색하며 손을 저었다.

“접장, 내 나이가 몇인 줄은 아오? 내가 이 나이에 험한 산길을 어찌 넘어.”

“아이고. 대방 마님은 여든 되고 아흔 되어도 항상 처음 본 그대로 정정해 보여서 그만.”

그의 입에 발린 말에 나은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접장 하는 짓을 보니 연수산에서 무언가 연통이 왔구만? 도련님이 뵙자 하시오?”

접장은 눈을 데굴데굴 굴려 대답을 피했다. 앞에 놓인 찻잔 속 찻물을 술처럼 들이켠 그는 한숨과 함께 진짜 속내를 털어놓았다.

“아니, 그게…….”

“아니면, 도련님께서 뭔가 새로 준비하시는 일이 있다시던가?”

“그게 아니라… 도련님이 너무 아무 일도 안 해서 다들 걱정이래.”

나은이 미간을 좁혔다.

“도련님이… 그럴 분이 아니신데.”

나은이 알기로 단이 죽은 뒤에도 영목이 죽은 뒤에도 윤은 바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가끔 한 번씩 남가 상단을 들여다보러 오는 민재나 묵이 전한 바로는 그랬다.

“다 죽어 가는 꼴을 하고서도 한시도 쉬지 않고 무언가를 해서 걱정이라 하였는데?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면서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정확히 할 일을 하는 게 소름이 돋을 지경이라고.”

“그랬는데… 그 권가 놈 딸내미가 마마 걸려서 죽은 뒤부터 영 불안불안하더니, 불란서 의사 양반 그리 가신 뒤로는 도련님이 아무것도 안 한대.”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이야기에 그녀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서릿재 어르신 말로는 서래원의 문을 닫고 다른 곳에 새 의원을 차렸다지 않았소? 멀쩡히 있던 곳에서 다른 집으로 이사를 하였다면 평소보다 더 바빠질 수밖에 없을 터인데. 도련님 성격에 아무것도 안 할 리가 있나.”

“아무것도 안 할 리 없는 분이 줄곧 시체처럼 자기만 한대. 일어나 있을 때에는 쉴 새 없이 앵속만 태우고.”

“…앵속이라니. 앵속이 웬 말이오? 그 도련님이?”

“그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라더라고. 영목이 갔을 때도 그랬다네.”

나은은 기절할 듯이 아찔해졌다.

‘소중하게 여겼던 이들을 모두 떠나보낸 도련님에게는 이제 앵속만 남은 거야……. 그게 최영목 배 속에 있던 거라. 정인을 떠올리게 하는 물건이 그것뿐이라서.’

그녀는 손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면서 탄식처럼 물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의원 일 봐주면서 수행한다는 범산 이무기와는 나눌 말들이 있을 것 아니오……?”

“그 이무기가 답답해 미칠 것 같다고 날 붙잡고 한나절을 성토했소. 꼭 전해야 할 말이 있을 때엔 지필로 적어 둔대.”

그건 참으로 남윤다운 짓이다 생각하면서 나은은 헛웃음을 지었다.

“영목이 놈 죽은 뒤에 도련님이 딱 요즘 같았다더라고.”

“하아…….”

“껍데기만 남은 시체처럼 앵속이나 태우며 살다가 도련님네 청지기였던 권가네가 연수산으로 의탁하러 와서 그나마 평소대로 돌아왔다 하더군. 도련님만 믿고 연수산까지 찾아온 식솔들이 눈칫밥 안 먹고 거기 자리 잡게 해 주려 하신 거겠지.”

접장의 말에 나은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최영목이었다. 윤을 살린 것도, 죽지 못하게 붙들고 있는 것도 모두 최영목이었다. 권가를 연수산으로 보낸 사람이 영목이었기에 남윤은 그들을 보호한 것이었다. 담무회 또한 최영목이 시작한 조직이라 이제껏 보살피는 것이었고.

‘도련님을 움직이는 모든 것이 최영목이네.’

파고 들어갈 여지조차 없는 둘의 사이엔 이제 질투도 일지 않았다. 나은이 쓰게 웃었다.

“권일식이가 그 사고 치고 나서는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는가 봐. 서릿재 골방에 콕 박혀서 도통 나오지도 않고.”

“허……. 담무회 접장이라면서 도련님이 그리 사시는 걸 여즉 몰랐소? 댁들은 정보 모으는 게 일인 사람들 아닌가? 연수산 입석 앞에서 도련님과 접선하던 것 아니었나?”

“병조에서 계속 오라 가라 하였고… 직접 뵙지 못해도 연수산 입석 밑에 정기 보고서 묻어 두면 꼼꼼히 첨삭하여 회신 주시니까…….”

나은은 눈을 꾹 내리감았다. 담무회와도 지필로만 의사소통 중이라는 소리였다. 그녀가 앓는 소리를 내자 접장은 더욱 기어들어 가는 음성으로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도련님도 걱정되구 나 혼날 것도 걱정되니까 함께 좀 갑시다. 응?”

“혼자 잘 다녀오시고, 서신 하나 써 드릴 테니 그거나 가져가서 전해 보시오.”

나은은 전각 한편에 놓아두었던 서안으로 가 서둘러 짧은 서신을 완성했다. 기대에 찬 눈으로 그녀가 건넨 종이를 읽던 접장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옛일이 그리워 차 한잔 청하오니 거닐다 적적하신 날에 교월 서문에서 기별 주시오면 버선발로 맞이하러 가겠습니다.]

“대방 마님… 이게 전부요? 이건 그냥 심심할 때 놀러 오란 소리잖어? 교월 서문은 대체 어디야?”

“도련님께 제대로 전하기나 해요.”

나은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입을 딱 다물고 접장을 돌려보냈다. 그날 이후로 나은은 매일 소나무 밑의 문까지 두근거리며 걸어갔다가 어깨를 늘어뜨린 채 남가 상단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접장에게 서찰을 전한 지 정확히 일주일이 되는 날이었다. 소나무 밑의 문을 밀고 나온 그녀의 눈에 새하얀 도포를 걸친 사내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사내의 곁에는 그가 걸친 옷만큼이나 하얀 말 한 마리도 함께 서 있었다.

“혹시나 하여 보낸 서신이었는데, 이리 걸음하여 주실 줄은 몰랐소.”

뒤돌아 서 있던 사내가 옷자락 바스락대는 소리도 없이 나은을 향했다.

“나와 최 형을 기억하는 사람을, 평범한 우리를 기억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파르란 달빛 아래 유난히 붉은 입술이 열리고 담담한 대답이 돌아왔다. 기억 속 목소리보다 더 낮은 음성이었다. 나은은 어린 소녀처럼, 운종가에서 그를 훔쳐보던 처녀 시절처럼 설레는 마음을 걸음마다 담아 윤의 앞으로 걸어갔다.

“요즘은 어찌 소일하고 지내시오? 담무회 접장에게서 드문드문 소식 전해 듣고는 있소마는.”

그녀가 기억하던 갓 관례를 올린 앳된 도령의 얼굴보다 훨씬 사내다워진 얼굴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섬세하고 고운 선이었으나 눈가가 우묵히 깊어지고 턱선이 도드라져 유난히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나은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뺨을 쓸었다. 스물두셋이나 되었을까 싶은 윤의 얼굴과 달리 손끝으로 만져지는 자신의 얼굴은 주름이 가득했다.

“귀하는 참 신기할 정도로 변치 않으셨소. 홀로 늙은 나만 부끄럽게.”

“세월조차 피해 가는 괴물이 되었으니까요.”

자조적인 대꾸에 이상한 기운이 어려 있었다. 경고하듯 피부를 찌르는 이질감에 나은은 주춤 뒷걸음을 쳤다.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던 윤이 먼저 크게 한 발자국 물러서며 물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나를 부른 것 아닙니까? 본론만 하시지요.”

주춤주춤 멀어지던 나은은 발을 멈추고 다시 목을 가다듬었다.

“최영목과 단이 아씨의 묘에 가고 싶소.”

예상치 못한 요구였는지 윤의 미간에 작게 실금이 갔다. 살풋 찌푸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윤은 긴말 대신 손을 내밀었다. 나은이 홀린 듯이 윤의 손을 쥔 순간 그는 나은을 번쩍 들어 말 위로 올렸다. 입을 벌리면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으로 숨을 들이켰던 그녀는 이내 평정을 되찾고 말고삐를 쥐었다.

“접장 말로는… 앵속을 하신다고 들었소.”

백마의 곁에서 묵묵히 밤길을 걷던 윤이 단정하기 그지없는 자태로 그녀에게 물었다.

“아씨 눈에는 내가 아편쟁이들처럼 흐트러져 보입니까?”

“앵속을 태우신다는데 겉으로 보이기로는 예전 그대로 정갈하시니 더 염려스러운 거요.”

윤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여상히 걷기만 했다. 인적 하나 없는 한밤중의 산에 말발굽 소리만 나직이 울렸다.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고심하던 나은은 아주 옛 이야기부터 꺼내 들었다.

“내가 그대와 최영목과 대방 마님에게 빚진 것이 있어 더 늦기 전에 갚으려고 만남을 청하였소.”

“빚이요?”

윤이 고개를 들어 말 위에 앉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한껏 달빛을 받은 얼굴이 깜짝 놀랄 정도로 어여뻐 나은은 엉겁결에 고개를 틀어 윤의 눈을 피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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