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혹시 모르니 비형랑과 호 겸인께 말씀드리고―”
“그러지 않아도 된다. 비형랑께서는 정말 위험한 일이 생길 것을 대비해 연수산을 지키고 계신다. 호 겸인은 자백하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도록 입단속 중이시고.”
“이미… 다 이야기가 되어 있었습니까? 제게는 쉬쉬하시면서?”
“애들이 알아서 좋은 이야기는 아니지 않니. 어린애 취급 하며 이런 부탁을 하려니 참 민망하고 미안하다마는.”
어깨를 으쓱인 불란서 의사 선생은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손길로 윤의 얼굴에 흐르는 빗물을 닦아 주었다.
“더 늦기 전에 어서 가서 미하를 불러와 다오. 윤이 네 몸은 아직 빛에 익숙하지 못하니 조금이라도 늦으면 미하를 찾기 전에 몸이 녹을 거야. 나는 제발 네가 덜 아팠으면 좋겠다.”
가라고 손을 내젓던 그는 “아!” 하고 손뼉을 치더니 멋진 자세로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잊을 뻔했네. 작별 인사는 조선식으로 멋지게 나누겠다고 작정했는데! 떠나기 전에 얼른 올라와서 큰절 한번 올려 주련?”
“…….”
“조선에서는 이런 걸 엎드려 절받기라고 하던가?”
퍼붓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도저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진 윤은 입술을 질끈 물고 비 쏟아지는 마당으로 내려가 흙바닥 한가운데서 큰절을 했다.
“위로 올라와서 하라니까 굳이 땅바닥으로 내려가는 심술 하고는. 윤이 너나 미하나… 내가 키운 애들은 왜 한결같이 심보가 이럴까.”
불란서 의사 선생은 흙탕물 위에 엎드려 일어날 줄을 모르는 윤의 목덜미에 작은 부탁 하나를 더했다.
“윤아. 네가 내 수첩을 정리해서 책으로 내어 주면 좋겠구나.”
“그러겠습니다.”
“대사전, 대전집 같은 멋들어진 이름을 붙여 주길 바라. 열심히 기록했으니까.”
“멋진 이름도 궁리해 보겠습니다.”
“잘 부탁한다. 이제 정말 가 봐야 할 것 같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난 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있는 힘껏 달렸다. 묵이 어디에 있는지 정도는 이미 대충 파악하고 있었다. 삐쳐서 뛰쳐나간 뒤로 몇십 년을 단 한 번도 연수산으로 돌아오지 않은 놈이었지만 여차하면 끌고 올 수 있도록 항상 소재를 파악해 두고 있었다.
윤은 담무회를 다 동원해 전국의 자개 장인들을 포섭하고 팔도 곳곳에 그럴싸한 자개 공방을 열었다. 나전 칠기 때문에 조선에 자리 잡았다던 묵의 취향에 딱 맞춘 덫이었다. 묵은 그게 윤이 뿌린 미끼인 줄도 모르고 몇십 년째 이 덫에서 저 덫으로 옮겨 다니는 중이었다.
‘워낙 여기 번쩍 저기 번쩍 하는 놈이라… 날 보자마자 어디로 휙 사라지면 안 되는데…….’
묵의 고약한 심보만으로 보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윤은 힘껏 달리면서 묵을 붙잡을 만한 핑계를 생각했다.
‘쉽게 따라올 놈이 아니니 최대한 불쌍한 몰골로 가야겠다.’
묵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못된 성정이었으나, 불란서 의사 선생의 가르침대로 약한 존재들에게 유난히 약한 사람이기도 했다. 묵을 길게 설득할 시간이 없다 판단한 윤은 그의 동정을 사기 위해 일부러 햇빛 아래를 달렸다. 햇빛이 닿자마자 온 살결이 타고 녹았다. 죽을 것 같은 고통이 엄습했지만 이런 꼴이 되어서도 죽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윤을 실소하게 했다.
밤낮없이 달린 윤이 남쪽 바닷가 마을에 닿았을 때, 그는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는 몰골이 되어 있었다.
“같이 좀 가셔야겠습니다.”
윤이 그럴싸한 기와집의 안방 문을 걷어차고 흙발로 방에 들어서자 잘 준비를 하고 있던 묵이 온 얼굴을 찌푸렸다.
“…꼴이 그게 뭡니까?”
“제 꼴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나병 환자보다도 더한 몰골이 된 윤이 다짜고짜 묵의 손을 잡아당겼다. 누군가와 닿는 것을 원체 싫어하고 그중에서도 손 닿는 것을 제일 질색하는 묵이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쳐 냈다.
“읏!”
윤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햇빛에 녹아내려 너덜너덜하던 윤의 손이 손목째로 날아가 화려한 자개소반 위를 나뒹굴었다. 당황한 묵이 사과할 틈도 없이 윤은 아무렇지 않게 나가 떨어진 손을 주워 들었다. 그리고 대충 제자리에 갖다 붙이면서 다급하게 말을 쏟아 냈다.
“스승님이 위험합니다. 저와 함께 가셔야 해요.”
묵이 긴장을 풀고 웃었다.
“뭔 소린가 했더니 헛소리였네. 대체 무슨 일이길래 밉살맞도록 차분한 놈이 이리 난리인가 싶어 긴장했던 게 억울할 정도야.”
묵은 연신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코웃음을 쳤다.
“웃을 일이 아니라고!”
비스듬히 턱을 괴고 드물게 언성을 높이는 윤을 쳐다보던 묵이 손가락을 세 개 펴 들었다.
“이 내가 전력으로 싸워야 할 사람이 세상에 딱 셋이 있어요. 그중에 하나가 그쪽 스승입니다.”
불란서 의사 선생은 대단한 흡혈귀였다. 힘으로는 딱히 적수가 없는 묵을 물고 뜯고 때리며 가르쳤을 정도로 만만찮은 상대였다. 한창 서로 기운차게 싸우던 시절을 떠올린 묵이 어이없다는 듯 재차 고개를 저었다.
“그 친구는 햇빛에도 끄떡없는 흡혈귀잖아요. 위험이 닥칠 수가 없는 존재인걸.”
“천주학을 퍼뜨리려 몰래 산골에 숨어든 양인 선교사로 몰렸단 말입니다. 관군들이 몰려오고 있어요. 스승님께선 순순히 목을 내어 주시겠답니다! 이래도 웃음이 나옵니까?”
싱글거리던 묵의 얼굴이 웃음 띤 그대로 굳었다. 윤이 빠르게 쏟아 내는 말들이 머릿속으로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그가 멍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이자 윤은 마른세수를 하면서 더 빠르게 말했다.
“일단 가면서, 함께 가시면서 들으세요. 권일식이… 저도 그이가 딸 잃은 앙심을 그리 쏟아 낼 줄 몰랐습니다.”
윤의 기세에 휩쓸려 엉거주춤 일어나던 묵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지? 권일식이라면 나한테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그쪽 식솔이잖아? 그 집 딸은 그쪽한테 찰싹 매달려 있던 콩알만 한 핏덩이고.”
“맞습니다.”
“자기 딸이 죽었는데 그 앙심을 왜 내 친구한테 풀었다는 거야?”
“세경 마님이 제게 달려오던 단이를 넘어뜨렸습니다. 넘어진 단이는 역신이 풀어놓은 마마에 먹혔고요.”
문세경은 왜 또 그런 미친 짓을 했느냐 물으려던 묵이 입을 틀어막고 신음했다.
그가 연수산을 떠나오기 전날. 세경은 윤의 목에 매달린 어린아이를 광기가 일렁이는 눈으로 죽일 듯 흘겨보고 있었다. 모르는 척 지나가려던 묵이 껄끄러운 마음에 한마디 보태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망할…….”
지난날을 떠올리던 묵은 입을 막았던 손으로 눈을 가렸다. 이전에도 문세경은 알게 모르게 윤의 주변을 맴도는 여인들을 해치곤 했었다. 하지만 이제 열 살도 되지 않은 어린애까지 범위를 넓혔으리라고는 묵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묵이 탄식하자 윤은 그에게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섰다.
“권일식이 통곡하며 스승님께 매달렸습니다. 저를 살린 것처럼 단이도 살려 달라고. 하지만 스승님이 거부하셨어요. 그 이후로 이를 갈고 복수를 준비한 것 같습니다. 더 긴 이야기는 가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발 가서 도와주십시오.”
다급하기 그지없는 윤의 애원을 들으면서도 사실 묵은 그의 말을 그리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불란서 의사 선생은 생긴 것만 창백하고 기운 없는 책상물림같이 생겼을 뿐, 마음만 먹으면 마을 하나 몰살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고작 마을 사람 몇이 둘러싸고 관군 몇이 위협한다고 어떻게 될 사람이 아니었다.
일의 전말을 대강 짐작한 묵은 다시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고 윤을 쳐다보았다.
“사태의 전말은 대충 알겠고. 그쪽은 날 어떻게 찾았습니까?”
“절 싫어하시는 것 압니다만, 올 사람은 저뿐이라 해가 지자마자 피 냄새를 따라 찾아왔습니다.”
윤은 덫을 놓고 담무회를 통해 보고받았다는 사실 대신 그럴싸한 거짓말을 꾸며 냈다.
‘오만한 놈이니까 먹힐 거야. 설마 내가 저를 줄곧 감시했다고는 생각조차 않을 테니까.’
묵은 순간 며칠 전에 했던 실험을 떠올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제 피 한 방울로 얼마나 대단한 짓을 할 수 있을지 갑자기 궁금해져서 썩어 부글거리는 늪에 피를 떨어뜨렸었다.
‘고작 피 한 방울로 늪을 맑디맑은 샘으로 뒤바꾼 나도 대단하지만, 그 한 방울의 냄새를 맡고 여기까지 달려온 저놈도 보통은 아니네.’
의문을 해소한 그는 이제 가 보라는 듯 손끝을 까딱여 축객(逐客)했다.
“궁금한 것 알았으니 더 볼일 없네요. 잘 가요.”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묵은 여전히 버티고 있었다. 윤은 하는 수 없이 아마 지금쯤 연수산에서 벌어지고 있을 광경을 마치 본 것처럼 주워섬겼다.
“서릿재 어르신이 산신을 달래고 계십니다. 호가 어르신은 자백하겠다며 관아로 달려가려는 천주쟁이들을 겨우 막고 계시고요. 빨리 가셔야 합니다!”
빙글거리던 묵의 얼굴이 굳었다. 민재가 분노한 산신을 달래고, 호우준이 사람들을 막고 있다니. 이건 그가 생각했던 상황과는 너무 달랐다. 묵이 아는 민재와 호우준은 항상 느슨했고, 그가 기억하는 연수산은 따분할 정도로 평화로웠다.
서래원을 등지고 걸을 때에 신발 밑창에 들러붙고 어깨를 짓눌렀던 그 불안이 다시 묵의 전신을 휘감고 불쾌하게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윤은 묵의 표정이 달라진 틈을 놓치지 않고 매달렸다.
“나으리, 제가 꼬박 하루를 달려왔습니다. 그동안 사태가 얼마나 더 나빠졌는지 짐작도 되지 않습니다. 제발―”
머리가 하얗게 비어 버린 묵은 윤의 말을 끊고 움직였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멍한 상태로 하나뿐인 친구의 기운을 따라 몸을 날렸다.
넋을 놓고 연수산으로 되돌아온 묵과 그에게 짐짝처럼 들려 오느라 넋이 나간 윤은 상상 이상의 참상에 숨을 들이켰다. 멀찍이 우뚝 서서 움직일 줄을 모르는 그들에게 민재가 다가왔다.
“불란서 의사 선생이 무기 네게 남긴 거다.”
민재는 묵의 손에 종이 한 장을 쥐여 주고 그가 옆구리에 끼고 있는 윤을 받아 들었다.
[혹시라도 내 질긴 목숨이 아직 그 문 앞에 가닿지 못하고 있다면, 날 위해 기도하고 나의 신의 곁으로 보내 주길 바란다.
내 제자, 내 친구, 내 형제, 내 아들, 미하.
먼 여정에 함께해 주어 고마웠다.]
묵은 초점 흐린 눈으로 손에 들린 종이와 새총 모양의 바위에 목이 매달린 자신의 친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살려 달라고, 같이 도망이나 치자고 부른 줄 알았더니… 죽여 달라고 부른 거였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묵의 음성이 물기 어린 바람을 타고 불란서 의사 선생에게 흘러갔다. 목 매달린 채 축 늘어져 있던 신부가 겨우 눈만 들어 묵을 쳐다보며 흐릿하게 웃었다. 묵은 다시 편지와 오랜 친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