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 나 부르실 날에-96화 (96/157)

96화

“순리에 익숙해지도록 해요, 윤.”

“…그 어린아이가 그리 죽는 게 어찌 순리입니까!”

“그 애가 죽는 게 순리라기보다는.”

잠시 말을 끊은 세경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역신이 덥고 습한 여름철에 역병을 뿌리고 다니는 것. 땅의 용이 돌부리 한둘쯤 솟게 만드는 것. 어떤 운 없는 아이가 돌부리에 걸려 역병이 고인 곳에 구르는 것. 이런 게 순리지.”

“…설마.”

습한 여름 공기 속에 세경의 주위만 유난히 서늘해 윤의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세경은 손을 내려 솜털이 바짝 선 그의 목을 쥐었다.

“나는 그대가 즐거워 뵈는 게 싫어.”

윤은 기가 막혀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영목이 떠난 뒤로 그는 맹세코 단 한 순간도 즐거웠던 적이 없었다.

어이가 없어 헛숨만 흘리는 그를 가만히 쳐다보던 세경이 윤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대고 연인에게 속삭이듯 달콤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대는 영목을 잃은 슬픔에 잠겨 있어야 하는데 자꾸 그 꼬맹이네 가족을 보면서 행복해하더라고. 우리 영목이는 잊어버린 것처럼.”

“제가 어찌 최 형을 잊겠습니까!”

“알아요. 영목이는 그대 가슴에 사무쳐 있는 거. 아는데 내겐 왠지 부족해 보여서.”

복수이자 경고였다. 감히 신의 약속을 쥐고 흔들려 한 만용에 대한 경고. 동시에 세경이 영목과의 약속을 어떻게 지켜 낼지에 대한 확인이기도 했다. 그녀는 윤을 철저히 고립시킬 작정이었다. 영목이 다시 돌아올 날까지.

윤이 파르르 입술을 떨자 세경은 더없이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운 나쁘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아이가 마마가 득실대는 나무를 잘못 짚은 거니 누굴 탓하겠어.”

“저요. 제 탓입니다. 제가 원망스럽습니다.”

“응. 내가 원한 것도 그거예요. 그대가 자책하고 슬퍼하는 거.”

세경은 그의 목을 틀어쥔 채 즐거이 속삭였다.

“이제 서래원으로 돌아가요. 어서 가서 그대 때문에 아이 잃은 아비를 위로해 줘.”

저 때문에 괜한 목숨이 희생당했다는 죄책감과 이길 수 없는 상대에 대한 분노가 일렁이는 윤의 눈을 보면서 세경은 황홀한 듯이 자신의 뺨을 감쌌다.

“지금 그대의 그 표정이 아주 마음에 들어.”

“…….”

“그 표정 유지하면서 잘 기억해 둬요. 앞으로 또 도령 목에 뭘 쑤셔 박으면서 날 협박하면 이번엔 욱이인가 하는 사내아이를 건드릴 거예요. 알아들었지요?”

소녀처럼 맑게 웃은 그녀가 윤의 등을 가볍게 떠밀었다.

세경에게 등 떠밀린 윤이 서래원으로 돌아왔을 때엔 이미 단은 세상을 떠난 뒤였다. 백사가 코와 입을 가릴 천을 들고 문밖으로 나왔다. 백사는 그 천으로 권일식과 욱이의 얼굴을 가린 뒤에 그들을 이끌고 서래원 안으로 들어갔다.

“의원 나리. 우리 단이 좀 살려 주십시오. 마을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니 의원 나리가 우리 도련님을 살려 주셨다면서요. 의원 나으리는 죽은 사람도 살리실 수 있다면서요.”

“뭔가 잘못 알고 있네요. 나는 그냥 서양 의술을 익힌 의사일 뿐입니다.”

권일식은 서래원으로 들어서자마자 불란서 의사 선생에게 매달렸다.

“이건 그냥 마마가 아니잖습니까! 제 오라비 손 잡고 나비처럼 산들산들 발 구르며 달려갔던 아해가 이리 순식간에 싸늘한 주검이 되는 마마는 들은 적도 없습니다!”

그는 말리는 욱이까지 밀치면서 불란서 의사 선생의 다리를 잡고 매달려 울부짖었다.

“우리 단이는 아비 잘못 만나서 이 이상한 동네에서 태어난 죄밖에 없는 앱니다! 불쌍히 여기시어 살려 주세요! 살려 주십시오!”

“…죽은 이를 살릴 방법은 없습니다.”

“도련님은 살리고 우리 애는 왜 안 되는데?”

불란서 의사 선생과 백사가 침통한 표정으로 권일식을 밀어냈다. 이글이글 끓는 눈으로 모든 사람을 노려보던 그는 갑자기 단이가 누워 있는 방으로 달려 들어갔다. 다행스럽게도 민재가 방 앞을 막아서고 크게 호통을 쳤다.

“만지면 안 된다니까! 마마라고 말했잖어!”

“어르신! 내가 얘 아비입니다! 아비에게 죽은 딸 손도 못 잡고 보내라는 게 말이나 됩니까!”

민재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권일식이 이번에는 마당 한복판에 망연히 선 윤의 손목을 붙잡고 불란서 의사 선생에게로 이끌었다.

“도련님이 의원 나리께 부탁해 주세요. 저 같은 천것 말은 아니 들어주셔도 도련님 부탁을 들어주실 것 아닙니까?”

“자네는… 내가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알면서 단이에게 같은 꼴을 겪게 하겠다는 건가?”

윤이 힘없이 되물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데, 일단 살리고 볼 일 아닙니까!”

“나는 이승에 사는 게 아닐―”

권일식은 잡고 있던 윤의 손을 내팽개치며 입술을 뒤틀었다.

“종놈 부탁 따위는 못 들어주겠다는 말을 참 어렵게 하십니다!”

“그런 뜻이 아닌 걸 알지 않나…….”

“우리 단이를 사람이 아니라 강아지 새끼 귀여워하듯 귀여워하는 거였어. 그랬으니 살려 주질 않는 거야. 하! 하하!”

권일식은 윤의 말은 들은 체도 않고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대며 목청 높여 웃었다. 듣다 못한 민재가 끼어들어 호통을 쳤다.

“말조심해라! 원래대로라면 인간은 이 안으로 들일 수도 없어! 가까이서 작별 인사라도 하라고 이무기에 내 힘까지 겹겹이 둘러 들여보낸 건데 어찌 입을 함부로 놀려!”

“아, 예에! 이 감사를 어찌 다 돌려드려야 할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권일식은 서래원 안의 사람들을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 뒷걸음질로 서래원을 나갔다. 대문을 넘은 그는 벌겋게 달아오른 눈으로 그들을 하나하나 노려보고는 이내 어둠 속으로 뛰어갔다.

조용히 구석에서 흐느끼던 욱이가 고개를 푹 떨구고 무릎을 꿇으며 대신 사과했다.

“아버지께서 상심이 크셔서 저러시는 것이니 노여워 마십시오.”

“일어나라, 욱아. 저 마음을 누가 모르겠니.”

윤이 욱이를 일으켜 세웠다. 아이의 팔을 감싸 안은 윤의 손도, 음성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욱이는 윤에게 기대어 입술을 꾹 물고 눈물을 흘렸다. 윤은 어린 소년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깊이 한숨지었다.

달려 나간 권일식은 단이의 장례를 다 치른 뒤에야 형형한 눈으로 연수산에 되돌아왔다.

“그날은 제가 저를 추스르지 못하여 큰 실수를 하였습니다.”

서래원 마당 한복판에 넙죽 엎드려 사과를 하면서도 권일식의 얼굴은 어둡게 굳어 있었다. 윤은 그를 일으켜 세우면서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어깨를 굳혔다.

윤의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권일식은 단이를 기린다는 핑계로 연수산에 사는 보잘것없는 신들에게 매일 공물을 바쳤다. 굴뚝신이 있는 곳에는 맑은 물을, 장독신이 있는 곳에는 갓 딴 사과 하나를 올리며 죽은 딸의 명복을 비는 식으로.

워낙 큰 신들이 많은 연수산이라 변변한 제사를 받기 힘들었던 작은 신들은 권일식에게 크게 감동했다.

“일식이 자네 소원이 있는가? 우리가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들어주겠네.”

받은 만큼 돌려주어야 한다는 규칙을 핑계로 작은 신들이 권일식에게 찾아오는 빈도가 늘었다. 그럴 때마다 권일식은 겸손히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소원이 있다면야 그저 이 연수산 사람들이 건강하게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 딸처럼 급사하는 일 없이 모두 다 건강하게요.”

“허허……. 보기 드물게 욕심 없는 인간이로다.”

그렇게 작은 신들의 환심을 산 권일식은 조금씩 신들의 불안감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어르신들… 저처럼 소소하게 공물 바치는 인간들이 죄다 사라지면 어르신들은 어찌 되십니까? 돌탑을 안 쌓고, 고수레를 안 하고 그러면요.”

“으응? 제사가 곧 신력의 밑천이고 우리는 버젓한 제사보다 그런 자잘한 인사로 먹고사니… 공물 올리는 인간들이 없으면 우리 같은 작은 신들은 서서히 소멸되겠지?”

그러니 그런 끔찍한 소리 말라며 손사래를 치는 신들에게 권일식은 시름 깊은 얼굴로 은밀히 속삭였다.

“그게… 연수산 바깥에서 또다시 천주쟁이들을 잡아 죽이기 시작하는 모양이라서요.”

“어이쿠. 또 시작이구만!”

“문제는 도망친 천주쟁이들이 죄다 여기 숨어 있다는 소문까지 났다는 겁니다. 늦든 빠르든 관군들이 몰려올 거예요.”

작은 신들의 술렁임이 커졌다.

“어르신들, 부디 지켜 보호하여 주십시오. 관군들이 연수산 인간들을 다 잡아가면 누가 돌탑을 쌓고, 누가 까치밥을 남기고, 누가 고수레를 하겠습니까?”

권일식이 불안한 바깥 사정을 전하며 짐짓 염려하는 체를 할 때마다 작은 신들은 서로 수군대며 불안을 키웠다.

연수산 전체가 어수선해지자 민재가 나서서 작은 신들을 다독였다. 하지만 그들은 “비형랑같이 대단한 존재는 우리의 불안을 모른다.”면서 저들끼리 똘똘 뭉쳤다.

권일식은 작은 신들을 더더욱 부추겼다.

“신은 인간의 생사에 직접 관여할 수 없다 들었습니다. 하나, 서양 귀신의 생사는 그 금기에 해당되지 않지요?”

“서양 귀신이라…….”

“서양 귀신 하나로 수십의 천주쟁이를 살린다면 남는 장사 아닌가 싶기도 한데…….”

그가 한마디 한마디 묘한 말을 흘릴수록 작은 신들의 눈빛이 변해 갔다.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조금씩 어수선해지던 연수산의 불안감은 한순간, 누군가 툭 건드리면 펑 터질 것처럼 불어났다.

윤은 답답한 마음을 안고 영목의 무덤을 찾았다.

“최 형. 잘 계십니까.”

대답 대신 빗방울을 머금은 눅눅한 바람만 무덤가를 맴돌았다.

“권일식이 연수산의 작은 신들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제가 밤에만 움직일 수 있는 탓에 진상을 파악하는 게 늦어져… 이미 손쓸 도리 없는 상태로 치달은 것 같기도 해요.”

수상한 짓을 꾸민다는 이유로 권일식을 모질게 쫓아내자니 욱이가 염려스러웠다. 권일식을 연수산 밖으로 내쫓으면 더한 짓을 할 게 뻔해 불안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권일식은 영목이 보낸 사람이었다. 윤은 그래서 권일식에게 냉정해지기가 어려웠다.

“저는 권일식이 매병 든 권가를 등에 업고 욱이를 안고 연수산 입석 앞에 서 있던 날을 어제처럼 기억합니다. 나는 최 형의 흔적이 보이는 모든 것에 이렇게나 약해지네요.”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하는 비에 젖은 윤의 얼굴이 서글펐다. 그는 대답 없는 무덤만 하염없이 쓰다듬으며 권일식과 영목의 얼굴을 번갈아 떠올렸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권일식은 무슨 짓을 벌이려는 걸까.’

지금 분명한 한 가지는 권일식이 불란서 의사 선생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날, 지독한 마마에 잡아먹힌 단이를 살려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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