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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 부르실 날에-95화 (95/157)

95화

* * *

이날 이후로 세경은 더 이상 윤을 험하게 다루지 않았다. 언제 어디에서 공격당할지 몰라 긴장하던 일이 사라지자 윤은 한결 편안한 얼굴이 되었다.

다행스러운 한편으로 민재는 왠지 단이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문세경이가 적당히 미친 용이 아니라는 게 마음에 걸린단 말이지.’

그가 알고 있는 문세경이라면, 그녀가 윤이 속 편하게 사는 꼴을 못 보겠다 벼르고 있다면… 윤이 살뜰히 챙기는 어린아이를 건드리려 할 터였다. 윤을 마음고생하게 하려면 그게 가장 쉬운 방법이니까. 요즘 들어 세경이 틈틈이 단이를 쳐다보며 묘한 미소를 짓고 있어 더더욱 찜찜했다. 한동안 그녀의 행적을 기민히 살피던 민재는 고심 끝에 세경의 앞을 가로막고 경고했다.

“거기, 나이 먹을 대로 먹은 용씩이나 되어서 어린 인간한테 그런 눈 하지 말지?”

“도령이 저 아이와 있으면 즐거워 보이잖아요.”

“…뭐?”

“우리 영목이는 죽을 때까지도 제 생각만 하면서 죽었는데, 벌써 저렇게 웃고 있으면 안 되잖아.”

세경의 광기에 당황한 민재는 뭔 되먹지 못한 소리냐며 언성을 높였다. 세경은 그가 벌컥 고함을 치든 말든 위태로운 얼굴로 눈 한번 깜빡 않고 이상한 소리만 늘어놓았다.

“영목이는 제 정인이 그만 슬퍼하기를 바라겠지만 나는 저 도령이 조금 더 슬퍼하길 바라요. 우리 영목이의 죽음에 묻혀 살길 바라.”

“아이고… 좀 봐줘라. 윤이는 먼저 간 지 동생 생각나서 그러는 거지.”

“그러니까요. 어린 단이든 다 큰 단아든, 내 거랑 멋대로 좋아 지내는 꼴, 나는 못 봐 주겠어요.”

더 이상은 못 봐 주겠다는 말만 남기고 세경은 꽃밭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후로 세경이 단이를 죽일 듯 노려보는 일은 없었다. 민재는 그게 더 불안했다.

‘문세경이가 아무리 크게 미쳤어도 설마 정말 저 어린애를 건드리진 않겠지.’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염려라 민재의 한숨만 나날이 짙어졌다.

오늘도 변함없이 서래원 앞에서 윤의 기상을 기다리는 어린 오누이를 보면서 민재는 몇백 번째의 한숨을 내쉬었다. 욱이가 민재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서릿재 어르신, 무슨 염려가 있으신지요?”

“나는 항상 어린것들이 걱정이지. 너 인마, 몸조심해. 동생 잘 챙기고.”

“왜 그러십니까? 우리 단이에게서 무언가 안 좋은 것이 보이십니까?”

욱하는 아비와 세상 걱정 없이 해맑은 동생 사이에서 일찍 철들어 버린 욱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민재는 불안해하는 어린아이에게 자세히 털어놓지도 못하고 두루뭉술하게 둘러대며 단이를 가리켰다.

“늬 동생 말이다. 애가 윤이만 보면 경주 말처럼 무턱대고 뛰어가니까… 그러다 넘어져서 큰일 나지 않게 조심하라는 거지.”

“아. 예. 염려 감사드립니다.”

바짝 긴장해서 어깨를 굳혔던 욱이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긴 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대번에 안심할 일도 절대 아니라 민재는 눈을 굴리다가 멀찍이 서 있는 소나무 한 그루를 가리켰다.

“마음 놓으면 안 된다. 지금처럼 푹푹 찌는 한여름엔 사방팔방 다 위험한 것투성이야. 이를테면… 저기 저 소나무 보이냐?”

“예.”

“아까 역신이 저기서 한참 동안 기대서 놀다가 갔어.”

욱이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온갖 신이 다 모여 있는 연수산에서 욱이가 제일 무서워하는 신이 바로 역신이었다.

몇 년 전, 산 아랫마을 처녀가 윤을 홀로 사모하다 상사병에 못 이겨 숨을 거둔 일이 있었다. 상사병을 앓다 죽은 인간은 병을 관장하는 역신의 권속이 되는 법. 그렇게 상사뱀이라는 괴물로 변해 버린 처녀는 기어코 윤을 잡아먹겠다며 아가리를 쩍 벌리고 그에게 달려들었었다. 이상을 감지한 윤이 재빨리 몸을 피한 덕에 상사뱀에게 잡아먹히는 참사는 피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 쳐도 썩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반투명한 구렁이의 형상을 한 상사뱀을 이끌고 와 큰 소리로 웃던 역신의 모습을 본 날, 욱이는 단이를 안고 와들와들 떨다가 며칠을 앓아누웠다. 멀찍이서 지켜보기만 해도 병이 드는 역신인데 역신이 기대어 놀았던 나무에 닿으면 어떻게 될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욱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자 민재가 그의 등을 쓸어내리면서 한 번 더 주의를 주었다.

“어린애는 저 나무에 닿기만 해도 큰 병 걸릴 수 있으니 특히 조심해.”

“예, 어르신. 조심, 또 조심하겠습니다.”

병을 만들고 옮기는 것이 역신의 일. 인간의 생사에 관여하면 안 된다는 원칙에 따르면 지금 민재의 행동은 아슬아슬하게 반칙의 경계에 있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몇 번이나 욱이에게 나무를 가리키며 주의시켰다.

“갑자기 땅에서 돌부리가 솟아난다거나, 바람이 분다거나 하는 일이 있을 수 있어. 서래원으로 오는 이 길은 유난히 좁아서 몇 걸음만 비틀거려도 저 나무에 닿기 쉬우니 진짜 조심해야 한다. 알았지?”

욱이가 고개를 끄덕인 순간, 서래원 대문 문턱에 앉아 수문 대감과 손그림자 놀이를 하고 있던 단이가 종종거리며 달려 나왔다.

“오라버니이. 도련님은 아직이셔?”

“마침 저기 오신다.”

욱이가 멀찍이 보이는 흰 도포를 가리켰다. 아이의 손끝이 가리킨 곳, 저 멀리서 걸어오던 윤이 단이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아이는 까르륵 웃으며 두 팔을 벌리고 윤을 향해 달렸다.

“거, 뛰지 좀 말라니까!”

민재가 불안해하는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나 다를까, 힘차게 달려가던 단이는 민재의 걱정 그대로 돌부리에 발이 걸려 옆으로 고꾸라지다가 소나무에 몸을 부딪쳤다.

“컥!”

단이가 입에서 새카만 핏덩어리를 왈칵 토해 냈다.

“단이야!”

“비켜! 닿으면 너도 옮아!”

민재는 비명같이 동생의 이름을 외쳐 대는 욱이를 밀어내고 단이를 안아 들어 서래원 안으로 들어갔다. 수문 대감이 침통한 얼굴로 대문을 닫아걸었다.

“이제 이 안으로는 못 들어간다.”

항상 집 안, 대문의 뒤나 문턱에 앉아 있던 수문 대감이 대문 앞을 지키고 서서 무겁게 선언했다. 숨이 턱까지 차도록 달려온 윤이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도령도 못 들어가.”

“저는 옮지 않습니다. 들여보내 주세요.”

“나는 집의 문을 지키는 수문 대감이다. 집 밖의 험한 것이 안으로 못 들어가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집 안의 험한 것이 동네를 망치지 못하도록 막는 일 또한 내 일이다.”

“집 안의 험한 것이라니…….”

윤이 욱이를 쳐다보았다. 욱이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민재가 알려 준 소나무를 가리켰다. 소나무에 새카맣게 엉겨 붙은 역신의 기운을 확인한 윤이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수문 대감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알았으면 뒤로 물러나. 지금 단이는 마마에게 먹혔다. 역신이 이를 갈고 만들어 낸 마마라 어린아이는 이겨 낼 수가 없어.”

윤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는 무릎을 굽혀 발만 동동 구르는 욱이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욱아. 가서 아버지를 모셔 오너라.”

똘똘한 아이는 윤의 부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번에 알아챘다. 동생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아버지를 불러와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한다. 욱이는 팔뚝으로 눈물을 훔치고 집으로 내달렸다. 욱이는 자초지종을 설명할 새도 없이 잠들어 있던 권일식을 깨워 서래원으로 끌고 왔다.

“도련님, 부르셨습니까?”

권일식이 비몽사몽 잠에 취한 음성으로 눈을 부비며 물었다. 몸져누웠던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부터 그는 담무회의 일원이 되어 슬픔을 잊으려는 듯이 연수산 밖으로 다니기 바빴다. 먼 곳을 떠돌다 갓 돌아와 곤한 잠에 빠졌던 권일식은 피로에 절어 이 한밤중의 소란이 그저 멍한 듯했다.

담장 안쪽의 침통한 상황을 확인한 윤은 권일식의 손을 잡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단이가… 마마에 걸렸네.”

“…예?”

“병이 더 퍼지지 못하도록 서래원 안으로 옮겼어.”

권일식의 눈꺼풀을 내리누르던 졸음이 일순간에 씻겨 나갔다. 윤은 그의 눈빛이 맑아지는 것을 확인하고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건강한 장정이라면 얼굴 조금 상하고 말았을지 모르나 단이는 너무 약하고 어린 아이라…….”

“안… 안 됩니다! 안 돼요!”

권일식은 눈이 뒤집힌 것처럼 서래원의 담장을 타 넘으려 했다. 안쪽에 서 있던 민재가 바람을 불러와 급히 그를 밀어냈다.

“정신 챙겨라! 아비가 건강해야 애를 추스르지! 앞뒤 없이 이 안으로 달려들었다가 네놈 아들에게 동생과 아비 모두 상 치르게 할 셈이냐!”

손톱이 온통 꺾이고 뒤집히는데도 아랑곳 않고 막무가내로 담을 넘으려던 권일식은 그 말에 담장에서 미끄러지듯 떨어져 내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기나……. 어떻게…….”

“아버지…….”

욱이가 다가가 제 아버지의 어깨를 안았다. 욱이를 마주 안는 권가의 손톱이 죄다 뒤집혀 있었다. 윤은 소매를 뒤져 상처에 잘 듣는 연고를 꺼내서는 그의 손끝마다 꼼꼼히 발라 주었다.

원망과 두려움과 절박함으로 엉망이 된 눈동자가 윤을 향했다. 윤은 그 눈빛에 어깨가 짓눌리는 듯한 기분으로 한숨을 지었다.

“잠시 있어 보게. 내가 세경 마님께 가서 혹시 마마를 견딜 수 있는 약재가 있을지 여쭤보고 오겠네.”

“아닙니다! 아니에요, 도련님!”

욱이와 권일식이 동시에 윤의 팔을 잡고 말렸다. 그들이 연수산에 자리 잡은 이후로 본 세경의 모습이라고는 윤의 목을 꺾어 연수산 꼭대기에서 집어 던지는 모습, 검술 대련을 핑계로 그의 팔다리를 거침없이 베어 내는 모습, 윤과 말을 나누었다는 이유로 동네 처녀들을 잡아가는 모습 따위였다.

“세경 마님은 도련님만 보면 못 잡아먹어 안달이시지 않습니까! 필시 험한 꼴을 당하실 겁니다!”

권일식은 자식의 목숨도 소중했지만 자신의 가족을 보살펴 주는 윤도 소중했다. 무엇보다 그가 세경에게 부탁한다 한들 세경이 단이에게 도움이 될 약초를 내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윤은 매달리는 권일식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걱정 말게. 세경 마님께선 손이 험하실 뿐이지 내 목숨을 앗아 가는 분은 아니셔.”

“…….”

“뭘 해서든 단이는 살려 보아야 하지 않겠나.”

영목과의 약속을 빌미로 협박을 한 이후, 세경은 윤을 건드리지 않았다. 윤은 여차하면 또 자신의 목숨으로 협박하리라 작정하면서 서천 꽃밭으로 달려갔다.

세경은 마치 그가 올 줄 알고 있던 것처럼 꽃밭 앞에서 윤을 맞이했다.

“살다 보니 그대가 나를 보러 달려오는 날도 다 있군.”

“왜 왔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도와주십시오.”

“그대에게 안겨 다니는 그 꼬맹이를 살려 달라는 말이지?”

“살려 달라는 염치없는 부탁은 아닙니다. 그저 세경 마님의 꽃밭에서 마마에 효용이 있는 잡초를 조금―”

세경이 손을 뻗어 윤의 뺨을 감쌌다. 그의 고개를 틀어 저와 눈을 마주치게 한 그녀가 싱긋 눈꼬리를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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