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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 부르실 날에-94화 (94/157)

94화

“영목아, 오늘도 네 신랑이 너 보러 왔다.”

“…신랑이라니요.”

수줍은 듯이 손을 저은 윤은 뒷짐 진 손에 내내 쥐고 있던 꽃 네 뿌리를 하나씩 무덤가에 심기 시작했다.

“뭔 꽃을 뿌리째 뽑아 왔누?”

“오늘 좋은 소식이 도착하여서요. 제가 좀 달라져야 할 것 같아 선물 삼아 가지고 왔습니다.”

나직이 대꾸하면서 윤은 쉼 없이 손을 움직였다. 평생 손에 흙 묻히지 않을 듯이 생긴 도령이 아무렇지 않게 달밤의 무덤가를 손으로 헤치는 모습이 기이하여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던 산군이 크게 헛숨을 들이켰다.

“그거… 그거 혹시…….”

“맞습니다. 서천 꽃밭 가장자리에서 뽑아 왔습니다.”

“세경이 걔가 가만있지 않을 터인데…….”

“아무것도 안 해도 수시로 저를 자르고 부수시니 억울해서요. 맞을 짓을 해서 맞는다 생각하는 쪽이 덜 억울할 듯하여 훔쳐 봤습니다.”

전후 관계가 더없이 이상했지만 말린다고 그만둘 각오가 아닌 것 같아 산군은 말을 아꼈다.

“아무래도 오늘은 내가 자리를 피해 줘야 도령이 속 편하게 있다 갈 것 같구나. 적당히 있다 가렴.”

“감사합니다.”

산군의 기척이 멀어지자 윤은 영목의 무덤 앞에 섰다. 그리고 저를 좀 봐 달란 듯이 찢는 듯한 작열통으로 욱신대는 팔을 들어 올렸다.

“대체 세경 마님과 저를 두고 무슨 내기를 하신 겁니까? 제 앞을 막고 지켜 주시던 최 형이 아니 계시니 하루가 멀다 하고 이 꼴입니다.”

하하.

마른 웃음이 아무도 없는 산을 울렸다.

“그래도 세경 마님께 숱하게 맞고 꺾인 보람은 있습니다. 서천 꽃밭 끄트머리에서 아무도 모르게 꽃 몇 뿌리 뽑아 올 정도로는 민첩해진 걸 보면요.”

윤의 눈이 네 개의 봉분을 차곡차곡 스쳤다. 호기심에 기웃대는 잡귀들은 수십, 수백이었으나 사무치게 그리운 이들의 혼백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당골의 핏줄도 무엇도 아니면서 경계에 있어 살아 있지 않은 것들을 본다던 비형랑의 말이 윤을 한 번 더 헤집었다.

‘저 많은 잡귀들 속에 그리운 얼굴은 어찌 하나도 보이질 않는가.’

다들 이 세상에 미련이 없어 인사도 없이 훌훌 떠났으리라. 그렇게 애써 되뇌면서 윤은 영목에게 그간의 안부를 전했다.

“오늘은 담무회에서 좋은 소식이 왔기에 제일 먼저 알려 드리러 왔습니다.”

윤은 품에서 낡은 나무패 하나를 꺼냈다. 자신의 성씨가 거꾸로 새겨지고, 그 가운데에 진주 구슬이 박힌 목패.

조악한 패를 무심히 내려다보던 그가 손아귀에 힘을 주자 목패는 날카로운 파편 한 조각만 남기고 가루처럼 부서졌다. 윤이 그 조각을 무덤 앞에 내보였다.

“이 목패 덕에 우의정 가문이 드디어 멸문되었습니다. 민란으로 평양 감사 자리에서 끌려 내려와 목 잘릴 줄 알았는데… 한성으로 돌아와 짜증 날 정도로 잘 살더군요.”

욕먹어서 오래 사나.

윤이 씁쓸히 덧붙인 말은 밤바람에 휩쓸려 무덤 사이로 사라졌다.

“아무튼 그놈이 말입니다. 이번 연행 때에 제 충복 몇 명을 청나라 사행단에 끼워 주었어요. 이때다 싶어 누군가가 그 집 종들이 달고 있는 목패에 대해 슬쩍 말을 흘렸지요.”

그 누군가는 당연히 윤이 심어 넣은 담무회 사람이었다. 그간 담무회가 꽤나 버젓한 보부상 집단으로 자리 잡은 덕에 그가 슬쩍 흘린 말의 무게도 이전과는 퍽 달랐다.

“김욱진이 남가의 주렴을 뜯고 부수어 노비에게 뿌렸다. 황제가 하사한 주렴을 종의 허리에 달았다는 건 황제에 대한 모욕이다. 이렇게 바람을 넣었답니다.”

황제는 기대 이상으로 대노했다. 청에서는 즉각 해명과 사죄를 요구해 왔다.

“남가를 짓밟을 때엔 그리도 끈끈하던 사대부들이 일제히 등을 돌려 우의정 가문을 외면했답니다. 요상한 결속력이지요?”

주상은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 일은 주상은 몰랐던 일로, 오만방자한 김씨 가문의 독단이었던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김씨 가문은 방계까지 모조리 참수당했다. 김욱진의 머리는 입에 족보가 물려 청나라로 보내졌다. 우의정의 가문은 조선에 존재하지 않는 집안이 되었다.

“너무 쉽고, 너무 빠르게 무너졌습니다. 허무할 정도로요.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놈들에게 당했다는 게 참으로 억울하여 영의정 가문은 좀 다른 방법으로 밟아 볼까 해요.”

나무 조각을 소매 속에 쏙 집어넣은 윤은 더러운 것을 치워 내듯 탁탁 손을 털고 꼿꼿하게 뒷짐을 졌다.

“최 형께서 투전판으로 끌어들인 영의정의 장자… 그놈의 빚을 제가 샀습니다. 흰 무명옷만 입고 먹을 것 줄이며 검소하게 살았더니 남의 집 아들 모가지 틀어쥘 정도의 자금은 어렵지 않게 모였습니다.”

윤이 느린 걸음으로 무덤을 천천히 돌며 잡초를 뽑았다. 그는 꼼꼼하게 손을 움직이면서 사소한 장난을 자랑하는 소년 같은 표정으로 무덤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영목이 사랑했던 그의 볼우물에 달빛이 한가득 고였다.

“계획의 절반은 이루었으니 오늘부로 세경 마님께도 조금 대들어 보려 합니다. 생각대로 일이 마무리되거든 다시 말씀드리러 오겠습니다. 최 형께서는 지금보다 좋은 세상에, 천천히 돌아오세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제 이야기를 들어 달라 칭얼대는 잡귀들만 윤의 주변을 빼곡히 메웠다. 윤은 그들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듯이 무심히 걸으며 영목이 약속한 좋은 세상이 무얼지 생각했다.

‘이놈을 치워 내고 저 가문을 걷어 내면 조금은 좋은 세상이 될 수 있을까.’

그조차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좋은 무언가는 여전히 과하게 멀고 요원했다. 윤은 컴컴한 제 인생만큼이나 암담한 세상을 경멸 어린 눈으로 둘러보며 욱신대는 팔다리를 이끌고 연수산으로 돌아갔다.

고요하던 범산과 달리 연수산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세경 때문이었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결과라 윤은 덤덤하게 그녀가 패악을 부리는 곳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윤은 보란 듯이 소매에 붙어 있던 꽃잎을 털며 물었다. 난리를 피우고 있던 세경이 그가 털어 낸 꽃잎을 보며 표정을 굳혔다.

“도령이… 도령이 내 꽃밭에 손을 댔나요?”

“가장자리의 잡초를 뽑았을 뿐입니다. 종종 서래원에 버리고 가시는 잡초라 눈에 익어 일손이라도 도울까 하였지요.”

윤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핑계를 댔다.

세경을 말리고 있던 민재와, 혹시 모를 참사를 대비해 대기하고 있던 서산 대신까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다 죽어 가는 꼴을 한 도령이 보통 사람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서천 꽃밭을 보고, 그냥 본 것도 모자라서 꽃밭의 주인도 모르게 꽃을 뽑아 갔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세경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더듬더듬 물었다.

“내가 내 꽃밭을 노리는 놈들을 어떻게 응징하는지 알면서… 손을 댔다고?”

“살살이꽃, 피살이꽃 같은 귀한 꽃엔 손대지도 않았습니다. 말씀드린 그대로 잡초를 뽑았을 뿐이에요.”

놀라서 입을 벙긋대던 민재가 도깨비불로 변해 불란서 의사 선생을 부르러 갔다. 도깨비불을 흘끗 쳐다보며 장죽을 깊이 빨았던 서산 대신이 연기를 내뿜으며 재차 확인했다.

“내가… 도통 믿어지지가 않아 다시 묻겠다. 정말 도령이 세경이 꽃밭에 손을 댔다고?”

“예.”

“하.”

깔끔한 인정에 세경이 실소했다.

사실 윤의 말 자체는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윤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흡혈귀가 되살리고, 연수산의 두 용이 피를 먹여 연명시키는 중이었다. 그러니 여간하여서는 보일 리 없는 서천 꽃밭이 윤의 눈에 보이는 것도… 그래, 그렇다 칠 수 있었다.

‘온갖 기상천외한 장난질로 연수산 신들의 약을 올리는 빌어먹을 무기 놈이나 할 법한 짓을 저 얌전해 뵈는 도령이 했단 말인가? 갑자기?’

세경은 가늘게 뜬 눈으로 윤을 살폈다. 윤이 뽑은 꽃은 세경의 입장에선 그저 잡초일 뿐이었다. 약으로 쓸 수 있으면 쓰라며 서래원에 던져 주던 잡풀. 윤이 그 잡풀을 왜 하필 오늘 보란 듯이 뽑아 들고 무구한 척을 하고 있는지 세경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궁금하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듯이 약한 척 굴던 도령이 갑자기 내게 시비를 거는 이유가 무얼까?”

“정말 잡초라도 뽑아 작은 일손이라도 도우려 하였을 뿐인데 그리 말씀하시면…….”

“서천 꽃밭은 이승도 저승도 아닌 나의 영지예요. 거기 멋대로 손을 대는 게 얼마나 큰 잘못인지 모른다는 말인가요?”

윤은 저 멀리서 허겁지겁 달려오는 불란서 의사 선생과 민재, 찌푸린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 서산 대신, 불쾌함을 금치 못하는 세경과 차례대로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이며 나직이 말을 이었다.

“제가 그리 큰 잘못을 저질렀다면 이렇게 사죄드릴 수밖에요.”

윤이 소매에 감추어 두었던 목패의 파편을 제 목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숱하게 윤의 몸을 가르고 뜯던 세경이 파랗게 질렸다.

“도령! 미쳤어! 무슨 짓이야!”

윤은 치켜져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다스리며 자신의 멱살을 쥐고 흔드는 세경에게 속삭였다.

“저를 잘 보관하셨다가 최 형께 돌려주겠다는 약속이었지요? 앞으로 제게 협조해 주시지 않으면 그 약속은 지키기 꽤 어려워지실 겁니다.”

“…뭐?”

“신의 약속은 어떻게든 지켜져야 합니다. 신의 명예와 자존심은 신을 지탱하는 기둥이니까요. 그러니 앞으로 내가 죽거나 크게 망가지지 않도록 잘하셔야 할 겁니다.”

당신은 더 이상 당신의 제자를 빌미로 내 몸에 화풀이할 수 없다. 나는 당신의 꽃밭을 볼 수도, 손댈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무슨 고약한 짓을 하더라도 당신은 당신 제자와의 약속 때문에 나를 죽이지는 못한다.

윤이 어떤 협박을 하는지 깨달은 세경이 비스듬히 웃었다.

“하. 이제서야 좀 재밌는 짓을 하네.”

“더 즐겁게 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윤은 목에 찔러 넣은 파편으로 목을 더 깊숙이 쑤셨다.

“이제부터 저는 제 몸을 담보로 잡겠습니다. 오늘은 예고 정도로 하지요.”

“…이게 진짜!”

엷은 미소를 띤 채 의식을 놓는 윤의 눈에 이마를 짚고 허탈하게 웃고 있는 불란서 의사 선생과 서산 대신이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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