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흰 눈 위에 발자국을 하나씩 새길 때마다 가슴이 이상하게 비틀렸다. 신발 밑창에 들러붙는 눈덩이처럼 알 수 없는 불안함도 불어났다. 어깨에 소복이 쌓이는 함박눈같이 묵의 마음속엔 후회가 켜켜이 쌓였다.
불란서 의사 선생의 말대로 정화력이든 뭐든 써서 도와줄걸. 힘들 것도 없는 일인데 괜히 빈정대지 말걸.
서래원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발바닥도 어깨 위도 죄다 찜찜해졌다. 묵은 몸에 들러붙는 쓸모없는 눈송이들을 확 털어 냈다. 기운을 뿜어낸 덕에 그의 새카만 수단에도, 가죽 신발에도 이젠 먼지 한 톨 없었지만 견딜 수 없이 마음이 불안하고 찜찜했다.
“아……. 거슬려, 정말.”
결국 그는 주머니에 손을 꽂고 서래원 앞까지 돌아갔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활짝 열린 대문의 문턱에 앉아 있던 수문 대감이 놀란 눈으로 묵을 쳐다보았다.
“화해하러 왔어?”
그 말에 묵은 발끈하며 입술을 삐뚤게 기울였다.
“그런 걸 할 사람으로 보이나요, 내가?”
“아니어서 물어봤지.”
“…문단속 잘하시라고, 그 말을 깜빡해서 다시 왔습니다.”
수문 대감은 의아하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대문을 안 닫고 싶어서 안 닫나? 불란서 의사 선생이 밤낮없이 열어 두는 걸 낸들 어째. 문이 닫혀 있으면 망설이는 환자가 문턱을 못 넘는다면서 안 닫는 걸 도대체 내가 어쩌냐고.”
“열면 닫으세요. 그러라고 계시는 수문 대감이잖습니까.”
묵은 천연스러운 낯으로 문을 열고 닫는 시범을 보였다. 가만히 그가 하는 양을 쳐다보고 있던 수문 대감이 실소했다.
“허허. 왜 답지 않게 돌아와서 흰소린가 했더니… 대신 시비 걸어 달라는 소리였구만? 에라, 그냥 갈길 가라!”
“…계속 뭔가 마음에 걸려서 그럽니다. 그러니까 대문 꼭꼭 닫으시라고요. 꽉 닫고 계시면서 아무한테나 문 열어 주지 마세요.”
진지하게 얼굴을 굳힌 묵이 재차 당부했으나 수문 대감은 건성으로 대꾸하면서 손만 휘휘 내저었다. 다시 돌아서서 걸음을 옮기면서도 묵은 세 발자국에 한 번꼴로 서래원을 돌아보았다.
묵이 돌아보고 또 돌아보는 것을 알면서도 저 안쪽에서 윤을 간병 중인 불란서 의사 선생은 고개 한번 돌리지 않았다. 큰 목소리로 혼잣말을 빙자해 끊임없이 묵을 비난할 뿐이었다.
“내가 미하 쟤가 한 살이라도 더 어릴 때 더 패서 버릇을 가르쳤어야 했는데! 용이 아무리 저밖에 모르는 족속들이라 해도 정도껏이어야지, 정도껏!”
“…진정하세요, 의원 나리.”
“다 죽어 가는 애를 두고 놀러 나가는 놈을 두고 어떻게 진정해? 백사 너는 저런 용이 되면 절대 안 된다!”
그 모습에 묵의 마음속 저 밑으로 밀어 놓았던 서운함이 훅 치밀어 올랐다. 묵은 미련 없이 공간을 갈라 사라져 버렸다.
“어휴…….”
묵이 사라지자 불란서 의사 선생은 이마를 짚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흘이 지나서야 눈을 뜬 윤은 백사에게 지난 일을 전해 듣고 깊이 탄식했다. 불란서 의사 선생과 묵의 사이가 벌어진 것도, 권일식이 날로 예민해지는 것도 죄다 제 탓이었다.
그는 묵의 빈자리를 메꾸려는 듯이 일을 했다. 묵을 대신해 일거리를 늘리면서 윤은 기나긴 침묵을 깨고 입을 뗐다. 한성을 오가며 약재를 사다 주던 묵이 사라진 탓에 부족해진 약재의 수급이 급선무였다.
“약재는… 범산 산군과, 담무회의 연락책에게 부탁하여 수급하면 될 것 같습니다. 담무회와는 매달 초하루에 연수산 앞의 입석에서 접선하니까 제가 직접 만나 말할게요. 산군께 오가는 일은 백사 님께서 맡아 주셨으면 하는데요…….”
“그런 부탁을 뭐 그리 어렵게 해. 나야 범산이 고향인데 자주 드나들면 좋지.”
윤이 움직이자 어수선하던 주변이 차근차근 정리되어 갔다. 민재도, 권일식도, 불란서 의사 선생도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심했다. 오직 세경만이 불만이었다.
“마음에 안 들어요.”
검술 대련을 핑계로 윤을 눈 뜨고 못 볼 꼴로 만들어 놓은 세경이 칼을 내던지며 투덜거렸다. 손톱으로 손목을 쭉 그어 바닥을 나뒹구는 윤의 위로 피를 떨어뜨리면서 그녀는 연신 고개를 저었다.
“진짜 마음에 안 들어.”
벌써 열 번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을 중얼대는 그녀의 뒤에서 민재가 부루퉁한 음성으로 끼어들었다.
“난 문세경이 네가 최고로 마음에 안 들어. 애한테 매번 뭔 짓이냐?”
“내가 왜요? 영목이 돌아올 때까지 고이 보관하였다가 돌려주기로 약속했으니 최선을 다해 보관하고 있을 뿐인데?”
민재의 눈이 용의 피를 흡수하면서도 제 형체를 찾지 못하는 윤을 향했다. 윤을 향했다기보다는 윤의 잔해를 향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당할 것 같은 상태였다.
“영목이는 제 반려가 저 꼴 당하는 걸 ‘고이 보관한다’라고 생각 안 할걸.”
딱히 반박할 말이 없던 세경은 눈을 굴리며 손에서 흘리는 피를 더 쥐어짰다.
“눈 피하는 거 보니 괜한 심술을 부린다는 자각은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느릿한 말투로 핀잔한 민재가 슬쩍 그녀를 떠보았다.
“오늘은 또 뭣 때문에 속이 뒤틀렸길래 애를 토막 내 놨냐?”
“내가 좀 알아보니 강자영인가… 영목에게 앵속을 먹였다는 걔가 아직 살아 있더라고요. 당장 달려가서 그대로 갚아 주려 하였는데 도령이 자꾸 말리니까 잠깐 이성을 잃었지, 뭐.”
가만 보면 문세경을 미치게 하는 것도, 윤을 이상하게 만드는 것도 죄다 영목이었다. 무턱대고 돌아오겠다 약속한 영목도 영목이지만 그 약속에 휘둘려 점점 위태로워지는 남은 둘도 문제였다.
민재는 속에서 치미는 수백 마디의 잔소리를 다 누르고 가장 기본적인 원칙만 꺼내 들었다.
“문세경이 너 신이야. 신은 인간 생사에 손대면 안 되는 거 몰라? 갚아 주긴 뭘 갚아 준다고 그래!”
딴에는 꽤나 고심하여 던진 말이었는데 세경은 코웃음 한 번으로 그의 염려를 날려 버렸다.
“비형랑은 그 개같은 규칙 한 번도 어겨 본 적 없죠?”
“…없지.”
“여러 번 어겨 본 내 입장에서 진짜 어이없이 웃기는 얘기 해 줄까요?”
“웃기는 얘기?”
“네.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사람을 살렸을 때 몸에 닥치는 벌이 더 커요. 웃기죠?”
정말 우습다는 듯이 깔깔 목청 높여 웃은 그녀는 손에 남은 핏방울을 윤의 몸 위로 죄다 털고는 몸을 돌렸다.
“대체 신은 무얼 위해 있는 걸까. 내 제자 죽인 놈들에게 속 시원히 복수도 못 하고, 죽지 못해 산다는 듯 구는 도령 하나도 제대로 붙들어 놓지 못하는데.”
세경이 씁쓸한 혼잣말을 흘리며 멀어졌다. 겨우 팔다리가 제자리로 붙은 윤을 부축하는 민재의 입에서 말로 다 하지 못한 탄식이 터졌다.
“윤아, 너 오늘은 서래원 가지 마라. 며칠 전부터 문세경이 상태가 오락가락하는데… 불란서 의사 선생이 네 꼴 보고 쟤한테 따지러 가면 둘이 또 싸운다. 나 기운 빠져서 더는 못 말려.”
윤은 고개를 돌려 입 안에 고인 핏물을 뱉어 내면서 민재의 팔을 물렀다.
“염려 마세요. 제가 그럴 일 없도록 잘하겠습니다.”
“누가 널더러 잘하라고 이러냐? 고래 등쌀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네가 안쓰러워서 그러지.”
염려 많고 잔걱정 많은 도깨비가 눈썹을 끌어 내렸다. 윤은 대가 없이 나누어 주는 그의 다정함이 고마워 깊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저 때문에 서릿재 어르신께서 매번 고생하십니다.”
“관둬라. 인사받자고 하는 짓도 아니고.”
민재가 질색하며 윤을 일으켜 세웠다. 윤은 그 다정함마저도 마음의 빚으로 끌어안고 민재에게 저를 기다릴 두 아이를 부탁했다.
“잠시 들를 곳이 있어 서래원에는 삼경이 지나서야 가게 될 듯하니 욱이나 단이에게 오늘은 그냥 자라고 전해 주세요.”
“아니, 그 몸으로 어딜 가?”
“최 형 뵈러 다녀오겠습니다.”
민재는 절뚝거리며 정인의 무덤을 향해 걷는 윤을 말리지 못했다. 따라갈까, 하던 그는 고개를 저으며 서래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휴… 도련님 오시기만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애들에게 뭔 핑계를 대야 하나.’
고민하는 민재의 걸음이 납덩이를 단 듯 무거워졌다.
* * *
윤은 삐걱대는 몸을 이끌고 꽃밭으로 직행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빨간 꽃 네 송이를 뽑았다. 그렇게 뿌리째 뽑은 꽃 네 송이를 움켜쥔 그는 범산에 들어서자마자 작은 돌탑부터 쌓았다. 이제 그가 쌓은 돌탑은 범산 입구의 고목나무를 몇 바퀴나 둘러싸고 있었다. 새로 쌓은 돌탑의 꼭대기에 작은 돌을 올리자마자 윤의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얘는 정말. 난 그런 소원 들어줄 자신 없대도 계속 이러네.”
투덜대며 다가온 범산 산군이 통통한 뺨을 부풀리며 불만스럽다는 얼굴을 했다. 그녀는 무언의 소원이 울창한 나무숲 사이를 웅웅대다 밤하늘로 높이 올라가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윤이 수도 없이 빌고 있는 소원, 영목이 돌아오면 가장 먼저 알게 해 달라는 소원이 산군의 산에 메아리처럼 울리고 반짝이는 별 사이로 스며들었다.
“내가 다른 건 못 해 주고… 왠지 영목이인 것 같은 아이가 이 산으로 도망쳐 오거든 온천 동굴에 꼭꼭 숨겨 주는 것 정도는 해 줄게.”
그녀와 나란히 걸으며 윤이 흐릿하게 웃었다. 윤도 알고 있었다. 피로 영목을 알아보게 되리라는 말은, 다시 태어난 영목이 피를 쏟아 낼 때에서야 그가 알아챌 수 있다는 뜻이었다. 영목의 피를 마신 윤도 그 지경이 되어서야 겨우 알아볼 수 있다는데 산군이 다시 태어난 영목을 알아보고 윤에게 기별을 줄 수 있을 리 없었다. 알면서도 그는 기댈 수 있는 모든 곳에 기대는 중이었다.
- 너희 둘은 죽기 직전에 짧게 만났다가 헤어지기만을 반복할 것이다.
강림도령의 저주가 윤의 마음을 좀먹었다. 처녀 귀신을 도운 것. 영목과 그런 약속을 한 것. 미련스러울 정도로 기다리기로 한 것. 처음에는 그 모두 잘못된 선택이 아니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윤에게는 모든 것이 죄다 제 잘못인 것만 같았다.
곁에서 나란히 걷던 산군이 그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윤의 팔을 다정히 다독였다.
“영목이는 곧 돌아올 거다. 다시 만날 날을 위해서라도 도령이 잘 버티고 있어야 해.”
“노력은 하고 있는데… 쉽지가 않네요.”
그리 오래지 않아 두 사람은 네 개의 봉분 앞에 섰다. 산군은 한없이 가라앉은 윤의 기분을 풀어 주려 일부러 더 장난스러운 음성으로 무덤을 향해 말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