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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 부르실 날에-92화 (92/157)

92화

“우리 도련님 안 계셨으면 이 동네 이렇게 멀끔하게 못 먹고 살았습니다! 고마워할 줄 알아야지!”

묵의 미소가 보다 선명해진 순간, 땅이 잘게 흔들렸다.

“그쪽 도련님 태어나기 몇백 년 전부터 이 동네는 그럭저럭 잘 먹고 잘 살았거든요? 도리어 그쪽 도련님 숨겨 주느라 오가는 사람 다 막는 바람에 요즘 들어 힘들어지고 있는 건데?”

“야, 무기야. 사정 모르는 김 서방한테 눈깔 부라려서 뭐 허냐. 그만해라.”

민재가 그만하라면서 묵의 어깨를 감쌌지만 묵은 민재의 팔을 떨치고 민재를 밀어내 버렸다.

“이 산에 빌붙어 사는 주제면 주제답게 있는 듯 없는 듯 지내요. 건방도 정도껏 떨어야 웃어넘겨 주는 겁니다.”

“건방은 누가 건방인데?”

“그쪽.”

“나 무시하는 건, 그래, 참을 수 있어! 그런데 왜 우리 도련님 가지고 지랄들이냐고! 도련님한테 그따위로 굴지 말라는 게 건방이면 난 백 번, 천 번도 더 건방 떨 수 있다!”

권일식이 씨근덕대며 계속 묵에게 고함을 쳤다. 웃음기 어린 묵의 눈이 혼절한 윤을 향했다.

“내가 저 허여멀건 인간을 괜히 주워 왔다는 생각을 하루에 열 번 정도 하는데… 오늘은 그쪽 때문에 열한 번 했네.”

“뭐요?”

“살려 달라기에 다 죽어 가던 걸 주워 와 줬더니 식솔 나부랭이에게 이딴 소리나 듣게 하잖아.”

땅이 더 크게 울렸다. 말릴까 말까 고민하던 백사는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면서 서래원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는 묵이 윤에게 품은 감정을 잘 알고 있었다.

‘범산 산군께서 새 호랑이 영물에게 애정을 쏟으실 때에 내가 딱 무기 나으리처럼 굴었었지.’

하루 날을 잡아 산군에게 서운하다 털어놓았더니 그녀는 화통하게 웃으며 백사의 등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그의 불쾌함이 귀애받는 동생을 질투하는 맏이의 기분이라 알려 주었다. 백사는 슬쩍 고개를 돌려 여전히 이죽대는 묵을 쳐다보았다.

‘저 나으리한테 내가 ‘당신 지금 도령 질투하시네요.’ 해 보았자 역효과야.’

혀를 쯧쯧대면서 백사는 곧장 불란서 의사 선생의 방으로 향했다.

“의원 나리, 일어나셔야겠습니다. 무기 나으리가 땅 흔들며 심술부리십니다. 도령은 혼절했고요.”

“뭐?”

오랜만에 숙면을 취하고 있던 불란서 의사 선생이 평소보다 더 창백한 얼굴로 뛰어나왔다. 백사는 척 하니 손을 뻗어 서래원 대문을 가리켰다. 문턱에 앉아 있던 수문 대감도 백사와 똑같이 손을 뻗어 묵과 윤을 가리켰다.

불란서 의사 선생은 흐트러진 옷차림을 정돈할 생각도 못 하고 대번에 달려 나와 묵을 혼내기 시작했다.

“미하! 너는 이 한밤중에 또 뭐가 불만이라 심술이냐!”

“내가 이유 없이 심술을 부리진 않아.”

묵이 불란서 의사 선생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려던 찰나, 권일식이 혼절한 윤을 들쳐 업고 불란서 의사 선생의 소매를 끌어당겼다.

“의원 나으리, 다 되었으니 저희 도련님부터 빨리 봐 주십쇼. 도련님 몸이 너무 차요.”

정신을 잃은 윤의 맥을 짚자마자 불란서 의사 선생의 표정이 굳었다.

“이리로 따라오세요. 윤이 상태가 매우 안 좋으니 뛰지 말고 걸어서 따라와요. 조심조심.”

불란서 의사 선생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어지자 묵의 미소가 조금 더 선명해졌다.

하루 날을 잡아 권일식에게 제대로 화풀이를 하겠다고 벼르던 묵이 허리에 손을 얹으며 삐딱하게 대문에 기댔다. 제 아비의 품에 안겨 자던 단이가 부스스 눈을 뜨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어른들의 소란 따위는 알 바 아니라는 듯이 두리번거리던 아이는 대문가에 있는 묵과 수문 대감에게 작은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안녕. 안녕히 주무세요.”

저도 모르게 손을 흔들어 주던 묵이 작게 혀를 찼다.

“망할……. 난 진짜 너무 다정해서 큰일이다.”

가만히 돌아가는 상황을 가만히 관망하던 민재가 묵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너 다정하지 않으니까 걱정 말구, 보아하니 서래원은 밤새 환자 보느라 바쁠 것 같으니 우리 집에 가서 쉬자.”

묵은 민재를 돌아보지도 않고 다시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단이만 응시했다. 묵의 복잡한 시선은 조심조심 방 안에 윤을 내려놓는 권일식과 윤의 이마를 짚는 신부의 모습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그리 오래지 않아 권일식이 서래원 마당을 가로질러 묵이 선 대문을 넘어 나왔다. 곤히 잠든 아이를 고쳐 안는 남자의 얼굴이 유난히 지쳐 보였다.

묵은 기다란 검지를 뻗어 쿨쿨 잠든 단이를 가리켰다.

“집에 얌전히 가서 안고 있는 그 애한테 감사하면서 살아요.”

“뭐요?”

“내가 아주 나이 많은 사람이랑 아주 핏덩이 같은 어린애한텐 너그러운 편이거든. 애 덕분에 목숨 건진 줄 알고 죽은 듯 살라고요. 나대지 말고.”

권일식은 타는 듯한 눈으로 묵을 노려보았다.

“…계속 우리 도련님 함부로 대하면 내가 가만히 안 있을 거요.”

“기대되네. 어떻게 가만히 안 있을지.”

코웃음을 친 묵이 권일식을 밀어내고 서래원의 문을 쾅 닫아걸었다. 수문 대감은 오랜만에 제대로 닫힌 대문을 아주 만족스러워하며 문에 자물쇠를 단단히 채웠다.

대문을 걸어 잠근 묵은 담장 너머에서 당혹스러워하는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민재에게 태연하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는 찬 바람이 일 정도로 등을 돌렸다.

“내가 우리 도련님 생각해서 가만히 있던 건데 이젠 진짜 더 안 참을 거야!”

“애 깬다, 애 깨. 윤이 일어나자마자 도깨비불 보내 줄 테니까 일단은 가서 자. 열 내서 뭐 허냐.”

“서양 용인지 뭔지 몰라도 우리 도련님한테 재수 없게 구는 거, 못 참겠다고요!”

“그래그래.”

묵은 문밖에서 들려오는 권일식의 고함과 권일식을 말리는 민재의 목소리 따위는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이 윤이 누운 방 앞에 자리를 잡았다.

“걔는 왜 기절한 거야? 오늘 아침에 걔 자는 동안 내가 밥 먹여 뒀는데?”

“식사가 문제가 아니야.”

“아니면 뭐가 문제지?”

불란서 의사 선생은 묵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바삐 움직이면서 손만 까딱였다.

“됐고, 미하, 이리 들어와서 윤이 좀 도와줘라. 이러다 애 죽겠어.”

“걔가 너무 곱게 커서 불란서 까탈쟁이보다 입이 더 짧고 예민한 걸, 낸들 어쩌라고 맨날 나한테 도우래?”

“까탈스럽게 음식에 트집 잡는 건 미하 네가 천하제일이잖니. 서로 통하는 데 있는 애들끼리 도우라는 거지.”

“난 안 먹어도 살 수 있으니까 맛없는 건 안 먹는 거고. 이쪽은 안 먹으면 죽는 주제에 안 먹는 거고.”

묵은 손에서 피를 내어 윤의 입으로 흘려 넣으며 평소보다 더 이죽대기 시작했다. 불란서 의사 선생이 눈짓하자 백사가 잽싸게 움직여 방 모서리마다 화로를 놓아두고 화로의 숯 위에 쑥과 소금을 담뿍 올렸다. 방 안에 알싸한 연기가 가득 차자 묵이 눈을 찌푸렸다.

“서산 대신이 직접 기른 쑥에 서해 용왕이 가져다준 소금? 서양 창귀를 너무 정결하게 키운다고 생각하지 않아?”

“어차피 서로 돕고 사는 처지에 말이 많다.”

“난 얘한테 도움받을 거 없는데?”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아름다운 얼굴을 한 묵이 얄밉도록 화사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불란서 의사 선생은 웬수 같은 아들과 진배없는 묵을 흘기면서 성질을 누르고 그를 설득했다.

“윤이 식사도 식사인데… 네가 진짜 도와주었으면 하는 건 앵속 쪽이야. 우리 일족이 몸속이 이리 헐기가 쉽지 않은데 지금 윤이 몸속이 아주 엉망이다.”

‘우리 일족’이라는 불란서 의사 선생의 말에 묵의 눈썹이 미약하게 꿈틀댔다. 불란서 의사 선생은 여전히 묵의 얼굴은 돌아보지도 않고 윤의 호흡과 안색만 확인하면서 그를 채근했다.

“네 정화력이든 빨아들이는 힘이든, 뭐든 좀 써서 도와 달라니까? 요즘 서산 대신께 정화하는 법과 나쁜 걸 소멸시키는 법을 열심히 배우고 있다면서.”

“굳이 누굴 도우려고 배우는 건 아니야. 안타깝게도.”

묵은 옷자락을 잡는 신부의 팔을 팩 뿌리치고 방을 나와 버렸다. 시체보다도 더 파리한 낯으로 앙상하게 마른 윤의 얼굴이 못내 눈에 밟혔지만 일부러 고개를 더 틀어 돌리고 모르는 척했다.

쓸데없이 마당만 넓은 황량한 터에는 눈 두는 곳마다 새하얀 함박눈이었다.

“미하!”

여간해서는 큰소리 내지 않는 신부가 버럭 소리치며 뒤따라 나왔다. 묵은 제가 닫았던 대문을 손도 대지 않고 활짝 열어젖혔다. 문에 기대서 있던 수문 대감이 급히 몸을 피하며 끌끌 혀를 찼다.

“미하! 어딜 가는 거냐!”

“걔 두고 날 따라올 것도 아니면서 뭘 물어봐.”

묵은 삐걱대며 흔들리는 문짝 한 귀퉁이를 발끝으로 걷어차며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잔뜩 성이 난 목소리로 저를 부르는 불란서 의사 선생을 어깨 너머로 돌아보았다.

대천사의 낯을 한 악마라며 그에게 ‘미하’라는 이름을 붙여 준 사내가 허리에 손을 얹고 성난 얼굴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묵이 유일한 친구라 믿었던 사내는 언제부터인가 웬 애송이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그를 등한시했다.

“미하! 언제까지 고렇게 못됐게 고약한 심보로 살 거냐!”

묵은 낯을 붉히며 제게 화내는 자신의 친구를 쳐다보며 이 뒤숭숭한 마음과 불쾌함의 원인을 뒤늦게 자각했다.

그는 억울해하는 중이었다. 제가 주워 온 허약한 인간에게 하나뿐인 친구를 빼앗긴 것 같아서. 한낱 인간 따위에게 샘을 내고 있는 자신이 더없이 짜증스러워서.

‘하여튼 남윤. 마음에 안 들어.’

묵은 들끓는 심정을 가득 담아 신부를 향해 더욱더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더없이 예쁘게 웃는 그의 얼굴이 불란서 의사 선생의 부아를 돋웠다.

“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철없이 굴 거냐고!”

“산신께서 사람은 모름지기 일관성이 있어야 된댔어.”

“너 이대로 가 버리면… 너보다 더한 반려에게 호되게 당하라고 기도할 거다!!”

어떤 저주를 하려나 내심 기대했던 묵이 목을 젖히고 크게 웃었다.

“하! 네 신이 네 기도를 들어준 적이 있긴 하고?”

불란서 의사 선생은 대답하지 못했다. 묵은 자신의 신에게 확신하지 못하고 머뭇대는 신부를 해맑게 비웃어 준 뒤 걸음을 옮겼다. 잠시 입술을 짓씹던 불란서 의사 선생이 두 주먹을 허공에 휘두르며 묵의 뒤통수를 향해 고함을 쳤다.

“네놈 결혼식 주례는 꼭 내가 볼 거다! 아이가 태어나면 둘을 합친 것보다 더 고약한 성미이길 바란다고 결혼식장에서 꼭 말해 줄 거다!”

“신의 사자라는 신부가, 마음 씀씀이 못됐긴.”

등 뒤에서 계속 욕설 비슷한 것이 들려왔지만 묵은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오늘따라 더 밉살맞게 구는 자신도 싫고, 제 섭섭한 마음은 알아줄 생각 없이 고함만 치는 불란서 의사 선생도 싫었다. 위대한 존재를 이렇게나 유치하게 몰아가는 남윤이 제일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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