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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 부르실 날에-89화 (89/157)

89화

윤의 삶을 지탱하던 마지막 불빛이 꺼졌다. 총천연색으로 반짝이던 세상이 모든 색을 잃었다. 빛도 색도 없는 세상에는 온전히 윤의 몫으로 남은 이름 하나와 좋은 날에 다시 찾아오겠다는 약속 하나만 남았다.

“기다리겠습니다. 기다릴게요.”

윤은 천 번, 만 번의 기다림을 약속하면서 영목의 뺨을 쓰다듬었다. 하늘의 구석에 어슴푸레 흰빛이 감돌 때까지 윤은 영목이 잠든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동트잖아.”

세경이 미간을 좁히면서 윤을 잡아 일으켰다. 팔을 휘둘러 세경의 손을 떨치고 다시 영목의 관 앞에 주저앉는 윤을 이번에는 나은이 밀어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고 사흘 후, 초상을 대충 마치었을 때 여기로 다시 찾아오시오. 알아들었소? 사흘 후, 그때 도련님이 이이를 직접 범산에 묻어야 한다고.”

“사흘 후. 범산. 단아의 곁.”

윤이 멍하니 나은의 말을 따라 했다. 나은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돌려세웠다.

“정확하오. 사흘 후에 봅시다.”

윤은 휘청휘청 자리에서 일어나 채근하는 세경을 따라 뒤로 돌아섰다. 세경과 함께 걸으면서도 윤의 시선은 잠든 영목의 얼굴 위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앞을 보고 걸어요. 그대는 이제 내 것이니 내 말을 들어야지. 영목이 제 피를 내어 가며 건 내기를 무시할 셈인가요?”

세경에게 이끌려 비치적거리면서 윤은 마지막으로 영목이 잠들어 있는 곳을 눈에 담았다.

영목과 함께 수없이 드나들던 사랑채가, 생이 힘겨운 날에만 남몰래 꺼내 보았던 모든 기억이 이제는 고스란히 악몽이 되었다.

【 상실 】

사흘 후. 영목은 범산 가장 볕 좋은 곳에 묻혔다. 나란히 솟은 봉분이 네 개로 늘어났다. 윤이 사랑했던 여인들이 무덤의 형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늘어섰다.

모든 것을 잃었구나.

윤은 풀 하나 돋지 않은 영목의 무덤을 안고 소리도 없이 어깨만 떨며 울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다가 작작 하고 가자 타박하려던 세경조차 가까이 할 수 없을 정도로 맹렬한 절망이었다.

울고 울던 윤의 목덜미에 새벽이 내려앉았다. 첫 햇살이 닿자 윤의 피부가 주르륵 녹아내렸다.

“청승은 오늘, 이 순간까집니다. 더는 못 봐 주겠어.”

세경은 혀를 차며 그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뭐, 영목이 무덤 앞에서 햇빛에 녹아 죽기라도 하려고요?”

“…….”

“살고 또 살고 지긋지긋하게 살아. 그냥 사는 것도 아니고 예쁘게 살아남아서 다시 찾아올 내 제자를 기다려야지. 햇빛 따위에 타 죽으면 기꺼이 제 삶 내어 준 영목이는 뭐가 되는데? 응?”

- 자네가 창피해할 정도로 자네 이름을 크게 부르며 찾아가겠네. 좋은 날을 고르고 골라서, 윤이 도령! 하고.

영목의 약속을 떠올리면서 윤은 가까스로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났다. 세경이 혀를 찼다.

“하……. 이걸 언제 쓸 만한 사내 꼴로 다듬지?”

세경에게 목줄 잡힌 듯이 걸어가면서 윤은 다시 영목의 말을 되새겼다.

‘그래. 준비하고 기다리는 거다. 비단 목도리가 아니라 비단으로 길을 깔아 달라 하여도 고민 없이 그리해 드릴 수 있을 만큼. 무얼 달라 하여도 내어 드릴 수 있을 만큼.’

한여름 태양 아래 선 얼음처럼 온몸이 녹아내렸지만 윤은 꿋꿋하게 걸어 연수산으로 되돌아왔다.

“아니… 보호를 하신다면서 왜 매번 애를 너덜너덜하게 만드십니까!”

“억울하네? 날이 밝도록 무덤가에 서 있다가 고집스럽게 온 햇빛 다 받고 걸어오는 저 청승이 내 잘못이에요?”

“해 뜨기 전에 억지로라도 끌고 오셨어야지요! 다른 때는 잘만 그러시면서!”

기겁하며 달려온 불란서 의사 선생이 세경을 타박하는 말을 들으면서도 윤은 오직 영목과의 약속만 천 번, 만 번을 되뇌었다.

그날 이후로 윤은 쉼 없이 몸과 머리를 움직였다. 백사를 붙들고 약초의 목록을 적는 규칙을 정하더니, 환자의 명부와 병명과 처방을 정리하는 서식까지 만들었다. 묵을 통해 영목이 키우던 담무회와 접선하여 검계와 더불어 새 체계를 갖추도록 종용하기도 했다.

혹시나 영목을 따라 죽으려 하면 어쩌나 싶어 윤에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연수산의 신들은 하나둘 어깨에서 힘을 풀고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오직 묵만이 미심쩍어하는 눈으로 멀찍이서 윤을 관찰할 뿐이었다.

아무 일 없던 듯이 흘러가던 어느 날, 민재가 서래원 문간에서 윤을 불렀다.

“윤아, 네가 입석 앞으로 나가 봐야겠다.”

“무슨 일이십니까?”

“네 집안 이름을 대면서 도련님을 만나러 왔다고 외치는 인간들이 있어. 쫓아내자니 웬 백발성성한 노인네를 업고 쬐끄만 꼬맹이까지 데리고 있길래.”

장부를 정리하고 있던 윤은 붓을 내려놓고 민재를 따라나섰다. 연수산에서 범산으로 이어지는 길목, 저만치에서부터 누군가가 그를 향해 두 손을 다 흔들어 대고 있었다.

“도련님! 도련니임! 아이구! 도련님!”

“권가인가……?”

생각지도 못한 얼굴이었다. 웬 장정의 등에 업혀 있던 노인은 윤이 가까워지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땅으로 내려서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등에는 권가를 업고 가슴에는 포대기로 갓난아기를 둘러메고 있던 장정이 침통한 얼굴로 권가의 손에 지팡이를 쥐여 주었다. 노인은 지팡이를 짚고 다리를 절룩이면서 윤이 가까워져 올수록 더 기뻐하는 얼굴로 발을 동동댔다.

“저는 영목 도련님이 절 놀리는 줄 알았지 뭡니까. 제가 오락가락하니 정줄 놓지 말고 살아 있으라고 없는 소리를 하시는 줄 알았어요. 아이고……. 이리 멀쩡히 살아 계셨으면 연락이라도 좀 주시지…….”

싱글벙글 기뻐하던 권가는 갑자기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어린아이처럼 엉엉 통곡하기 시작했다. 곁에 서 있던 장정이 노인을 부축하면서 윤에게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도련님. 기억하실는지요? 저 권일식입니다.”

윤은 그제야 사내의 얼굴도 기억해 냈다.

권가는 남가의 청지기였으나, 아들만큼은 남의 집 종살이가 아니라 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시키고 싶어 했다. 하인들끼리 하는 이야기를 통해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된 남인혜는 권가의 외아들인 권일식에게 장사하기 좋은 자리를 내어 주고 남가 상단과 거래하는 곳들을 여럿 소개해 주었다. 이것저것 해 보던 그는 남촌 어귀에서 과일로 만드는 과편이나 다식을 만들어 파는 작은 점포로 자리를 잡았다.

여간해서는 집 밖으로 잘 나가지 않고 나가 봤자 운종가 정도가 전부였던 윤은 권일식과 마주칠 일이 많지 않았다. 얼굴은 자주 보지 못했으나 권일식은 권가의 손에 매번 단의 간식을 살뜰히 챙겨 보내곤 했다. 그 마음 씀이 고마워 윤 또한 절기마다 솜이불이며 쌀 같은 것을 권일식의 집으로 보내 주었다.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 면구쩍어 윤은 성큼 다가서서 권일식의 팔을 두드렸다.

“미안하네. 내가 경황이 없어 자네가 누구인지 한참 궁금해하였네. 지난 환란에 별일 없이 무사하였는가?”

“예. 영목 도련님이 살뜰히 챙겨 주셨습니다.”

“권가는…….”

“아버지께서는 단이 아씨가 돌아가신 이후로 매병이 일어서 오락가락하십니다. 영목 도련님께서 아버지의 상태가 더 나빠지면 연수산으로 가서 도련님께 의탁하라고 하시기에 염치 불고하고 찾아왔습니다.”

진심으로 그들을 반기는 윤의 모습을 확인한 민재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검지를 까딱였다. 연수산 입석을 경계로 두껍게 넘실대던 안개가 깨끗하게 걷혔다. 권일식이 신기하다는 듯이 주변을 둘러보면서 웅얼웅얼 말을 덧붙였다.

“건강도 건강이지만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매병이라… 도련님께서 연수산에서 곧 돌아오실 거라는 둥, 자꾸 안 하셔야 할 소리를 집 밖에서 크게 외치셔서요. 면목 없습니다.”

“무슨 말인가. 잘 왔네. 잘 왔어.”

윤은 어깨까지 떨며 땅을 치고 통곡하는 권가와 고개를 떨군 권일식의 손을 양손에 잡고 길을 안내했다.

“일식아. 우리 도련님 손 봐라. 세상 제일 곱다고 내가 말했었지?”

권가는 언제 훌쩍였냐는 듯이 윤의 손을 덥석 쥐고 싱글벙글 웃었다. 권일식은 부끄러운 듯이 손을 무르려 했다.

“아. 불편하였는가? 내 너무 반가워서 자네 기분을 살피지 못하였네. 미안하네.”

“그게 아니라… 제가 몇 날 며칠 흙 짚고 풀 헤치며 오느라 손이 더러워서…….”

“별걱정을.”

얼굴을 굳혔던 윤은 눈꼬리를 살며시 접으면서 그의 손을 더 단단히 잡았다. 그리고 몸은 잘 피했는지, 장사는 어찌하고 이리 왔는지, 아이는 언제 낳았는지… 윤답지 않게 많은 질문을 건넸다. 권가와 권일식이 한두 번씩 번갈아 가며 윤의 질문에 답했다.

“그 김 서방들은 앞으로 여기서 지내라 해라!”

그들보다 한참 앞서 사라졌던 민재가 저만치 옹기 가마터 옆에서 홀연히 다시 나타나 외쳤다. 씨익 입꼬리를 끌어 올린 마음씨 좋은 도깨비는 윤에게 손을 흔들고 검지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어디서… 들리는 목소리입니까?”

달빛과 별빛뿐인 컴컴한 밤이라 권가와 그의 아들은 민재를 보지 못한 듯했다. 하루가 다르게 오감이 발달하고 있는 윤은 제게만 보이는 민재를 향해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뒤에 앞장서 두 사람을 이끌었다.

“옹기골이라고 저기 가마터 너머에 있는 곳일세. 서릿재 어르신께서 거기에 자네들이 머물 만한 빈집을 마련해 주신 모양이야. 먼 길 오느라 수고하였으니 오늘 밤에는 푹 쉬고 내일 다시 만나 자세히 이야기함세.”

민재가 알려 준 집은 윤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번듯했다.

‘작년에 옹기 가마가 폭발하면서 쑥대밭이 된 빈집이었는데… 언제 이리 고쳐 놓으셨지.’

이 길로 곧장 민재에게 감사를 표하러 가야겠다 생각하면서 윤은 반가운 사람들을 집으로 떠밀었다. 권일식이 눈알이 빠질 듯 눈을 크게 뜨고 너른 마당을 둘러보았다.

“이렇게… 좋은 집을 그냥 내어 주신다고요?”

“어차피 빈집이었으니 부담 가지지 말고 지내게. 여독을 좀 풀고 시간 날 때에 메밀가루로 유밀과 하나 예쁘게 만들어 돌탑 옆에 놓아 주면 될 걸세.”

더 있다가는 권일식이 흙바닥에 넙죽 엎드려 절이라도 할 기세라서 윤은 서둘러 돌아섰다.

“도련님! 이렇게 뵙게 되어 이 늙은이는 더 이상 여한이 없습니다요!”

“나도 다시 만나 더없이 기뻐. 이만 들어가서 쉬게.”

“에이. 싫습니다. 우리 도련님, 또 언제 뵐지 모르는데요. 보고 또 보고 더 보다 들어가겠습니다.”

싸리문까지 달려 나온 권가는 그만 들어가라 해도 들은 체 않고 끝없이 윤을 배웅했다.

윤이 권가에게 손을 저어 주며 가벼운 걸음으로 서래원에 돌아오니 불란서 의사 선생과 민재가 개다리소반을 놓고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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